페르디난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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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1578년 7월 9일 ~ 1637년 2월 15일(만 58세)
재위기간 : 1619년 8월 28일 ~ 1637년 2월 15일
1. 개요
2. 설명
2.1. 출생
2.2. 페르디난트 2세를 둘러싼 당시 독일의 딜레마
2.3. 황제 추대 및 30년 전쟁이 시작되다
2.4. 발렌슈타인의 영입과 암살
2.5. 합스부르크 제국의 야망과 프랑스의 참전
3. 기타


1. 개요


신성 로마 제국황제. 재위 기간 동안을 30년전쟁으로 보냈다.
존재 자체가 30년 전쟁의 방아쇠에 가까운 인물. 4차례를 넘는 30년 전쟁의 진행 상황이 이 사람의 고집과 연관되어 있다. 어쩌다 승리를 많이 해보았으나, 사실 페르디난트 2세 본인의 능력보다는 당시 가톨릭 동맹에 워낙에 걸출한 인물이 많았으며,[1] 대다수는 개신교 측이 약소하거나 오합지졸의 모임이라서 이긴 전쟁이 많았다. 차례대로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의 참전에 끼친 영향을 보면 그의 순수한 능력은 평가가 낮다. 게다가 전투 대부분이 일신의 야망을 위해서 어그로를 끌어대고 국가적인 준비는 하지 않아서 이뤄진 것으로, 황가와 본인의 야망과 군사욕심은 원대했으나 식견이 넓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는 본인이 일으킨 전쟁과 그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특히 거의 모든 전쟁의 원인과 장기화, 각종 외교와 내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원인을 제공했고 암군에 가까운 실책들을 저질렀기에 페르디난트를 암군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1. 신교도 강세지역의 제후로 부임할 즈음, 신교도들에 대한 무조건 추방으로 30년 전쟁의 배경에 일조한다.(1차 전쟁)

2. 첫번째 전쟁만으로도 끝날 상황에서, 종교에 따른 강압적인 영지 재분배로 경제 공황과 추가적인 반란을 유발했다.

3. 개신교 동맹이 계속 자폭하자 능력을 오판하여, 오스트리아 황가 중심 제국의 확장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다. ( ) 이로 인하여, 가톨릭 국가였지만 라이벌이었던 프랑스가 신교편, 스페인이 구교측으로 참전하여, 20여년 동안의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기도 전에 독일은 신흥국가들로 이뤄진 신교동맹 따위가 아니라, 훨씬 더 막강한 가톨릭 국가들의 싸움판으로 바뀌었다.(4차 전쟁)

그래서 페르디난트가 저지른 다른 실책들이 많지만, 위의 3가지 만으로도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황제 개인의 야망을 위해 수많은 전쟁을 자초하여 큰 피해를 입게한터라 결코 좋게 보기 힘든 인물이다. 특히 페르디난트는 독일 내와 주변국들에서 보면 그의 아집과 불관용으로 인해 귀족, 백성, 주변국들을 화나게 만들어[2] 저절로 반란과 침공이 일어나게 한터라, 적들이 보면 놔둬선 안 될 선택을 하는, 존재 자체가 어그로였던 인물이다. 그래도 권좌를 차지하는 능력과 암살해야할 인물을 선택할 때는 군주정에서 딱 평균정도는 했다는 평가도 있다.

2. 설명



2.1. 출생


1578년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남부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는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 카를 2세[3]였고 어머니는 바이에른 출신의 마리아였다. 페르디난트 2세는 어려서부터 5년 동안 예수회가 세운 잉골슈타트 대학교[4]에서 교육을 받았다. 자연히 예수회의 영향을 어려서부터 받을 수밖에 없어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1595년에 비로소 잉골슈타트 대학교를 졸업하고 슈타이어마르크 대공이 되었다. 루돌프 2세마티아스의 권력 다툼에는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마티아스 황제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마티아스의 사촌 동생이 되는 페르디난트 2세가 자연스럽게 다음 황제 후보자로 떠올랐다.

2.2. 페르디난트 2세를 둘러싼 당시 독일의 딜레마


문제는 당시 독일 지방을 통치하던 신성로마제국의 상황이다. 유럽 중앙에 위치한 이 제국은 구교(가톨릭)이 부여해준 정당성에 의해서, 각 지방이 하나로 묶여있는 느슨한 봉건체제를 지니고 있었다. 가톨릭의 권위를 빌리는 투표를 통해 제국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신성한 황제를 뽑고, 앞의 권위주의 체제를 통하여 온갖 정치가 통합되는 기묘한 형태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필이면 그 유명한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역도 바로 독일 지방이었다. 즉, 수없이 많은 봉건가문들의 연합 형태인 독일 지방을 묶어주던 유일한 이념이었던 '가톨릭'을 비판하는 세력이 하필이면 바로 그 독일 땅에서 큰 세력을 차지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전체의 황제 선출권을 지닌 선제후들도 구교:신교의 선제후들이 50:50으로 갈리어 있는 일촉즉발인 상황에서, 그는 새로운 선제후가 된다.
문제는 페르디난트가 부임하게 되는 보헤미아 지방의 민중 대다수는 신교였다는 점이다. 반면에 페르디난트 2세는 독실한 구교신자인데다, 신교도들에게 관용적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매우 싫어하며 핍박하고 몰아낸 강압적인 인물이었다. 결국, 보헤미아 지방의 신교도 주민들은 그가 부임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도, 자신의 재산을 빼앗길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여 곧장 반란을 준비를 하게 된다.[5] 즉,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선제후에 즉위한다는 사건 자체만으로도, 당시 유럽 사회를 좀먹던 종교대립이 피를 흘리는 진짜 전쟁으로 바뀔 수 밖에 없는 시발점을 제공하게 된다.

2.3. 황제 추대 및 30년 전쟁이 시작되다


1617년에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됐다는 것은 보헤미아에 있는 신교도들을 매우 불안하게 했다. 그동안 루돌프 2세가 내려준 칙서 덕분에 신앙의 자유를 누렸는데, 페르디난트는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영지에서 신교도들을 몰아낸 일로 상당히 유명했던 구교 신자였다. 결국 이들의 예상대로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 왕이 되었을때 신교도의 재산을 빼앗고 그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처형하며[6] 신교도들한테 가톨릭으로 개종할것을 강요했다. 이때문에 보헤미아에서는 페르디난트 2세에 대한 반감이 커졌으며 나중에는 과격한 신교 상인들에 의해서 구교 성직자들을 종탑에서 떨어트리는 '프라하 투척' 사건이 발생한다.[7] 앞선 사건의 충격과 함께, 보헤미아 상인과 주민들이 페르디난트 2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그와 싸울 준비를 하자, 그는 제국 보수파들한테 이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해야 한다는 강경책을 주장하며 군대를 파견하면서 내전의 맞불을 지폈다.
특히 마티아스 황제의 총신인 클레즐 추기경이 보헤미아의 반란에 미지근하게 대응하자, 1618년 페르디난트 2세는 이를 빌미로 클레즐을 투옥하여 티롤의 암브로스 성에 가둬버렸고, 신성로마제국 의회의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이 반발하며 의회에서 페르디난트의 보헤미아 왕 자리를 빼앗는다고 선언하였으나 다른 선제후들의 지지로 명목상의 보헤미아 왕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위의 이런 고생 을 거친 끝에 '''1619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르게 된다'''. 페르디난트 2세는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의 휘하 장군인 틸리 백작의 활약으로 보헤미아의 반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1622년 그는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의 왕에 오른 것을 반역으로 간주하여 그의 선제후 직위를 박탈하고 막시밀리안 공작에게 선제후 직을 넘긴다.[8] (1차, 팔츠-보헤미아 전쟁)

2.4. 발렌슈타인의 영입과 암살


30년 전쟁에서 방아쇠는 페르디난트 2세였지만 정작 그는 전쟁 중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진 않았다. 그래도 쓰고 버릴 인물들은 잘 선택했는데, 초기 팔츠 전쟁 때는 막시밀리안과 틸리 백작을 잘 썼고, 덴마크와 스웨덴 전쟁에서 영입한 부하가 명장인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었다. 왜냐면 1625년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4세30년전쟁에 개입하였기 때문이다(2차 전쟁). 이에 위기감을 느낀 페르디난트 2세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정규군으로 계약한다. 발렌슈타인은 뛰어난 전략으로 덴마크군, 독일 내의 신교 용병들을 죄다 몰아낸다.
그다음, 1629년에 페르디난트 2세는 "신교도들이 빼앗은 교회 재산을 다시 원상회복시킨다"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는 독일 지방들의 채무관계를 뒤틀어 제국의 경제를 혼란시켰다.[9] 더불어 페르디난트는 절대군주정을 수립하기 위한 정책을 펼쳤는데 이로 인해 제국의 수많은 제후들이 페르디난트의 정책에 대해 반발한다. 특히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는 이것이 발렌슈타인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발렌슈타인이 황제가 하사한 지휘권을 남용하며 월권행위를 하면서 많은 영주들의 분노를 샀기 때문에, 그들의 불만을 견딜수 없었던 페르디난트 2세는 결국 발렌슈타인을 직위해제한다.
1630년에 스웨덴의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개입한다. (3차 전쟁) 이에 페르디난트는 즉시 발렌슈타인을 재등용한다.[10] 1632년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지만 전투가 패배로 끝나자, 발렌슈타인은 멋대로 스웨덴 군과 평화 협상을 진행한다. 거기에 한 발 더 나가 발렌슈타인이 페르디난트 2세를 제거하고 보헤미아의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돌았고, 분노한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1634년에 결국 발렌슈타인은 페르디난트에게 매수된 부하들한테 암살당했다. 그 뒤에 제국군은 레겐스부르크를 재점령하고 뇌르틀링겐 전투[11]에서 스웨덴군을 무찔렀다.

2.5. 합스부르크 제국의 야망과 프랑스의 참전


1635년 신교도들과 프라하 평화 협정을 체결해 페르디난트 2세는 전쟁이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과 루이 13세가 전쟁에 직접 개입하기로 결심했다. 이 둘은 페르디난트가 오스트리아 왕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을 더 이상 강력하게 만드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황제가 황가의 권력에 대한 욕심, 즉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제국에 대한 야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같은 가톨릭인 프랑스는 네덜란드, 스웨덴을 꼬셔 독일의 신교도를 도우러 가담하게 된다.(4차 전쟁)
이전까지의 개신교 동맹이 변경국가 아니면 용병집단 같은 신흥세력에 불과했다면, 프랑스와 스페인은 유럽의 진짜 강대국이었던 '''가톨릭 왕국'''들이었다. 이 덕분에, 가뜩이나 황제와 제후들간에 연속으로 전쟁을 겪었던 독일은 더 막강한 가톨릭 국가들의 싸움터가 되는 과정에서 매우 피폐해졌다. 앞선 세 차례의 전쟁에서 가톨릭 리그는 우위를 점했었지만, 4차 전쟁에서는 프랑스와 스웨덴을 감당하지 못하고 폭망한 후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이름만 남게 된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2세 본인은 30년 전쟁의 끝을 보진 못하고 선종한다.[12]

3. 기타


페르디난트 2세는 1600년에 첫 부인인 마리아 안나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장남과 장녀가 모두 어릴 때에 죽고 마리아 안나도 1616년에 죽었다. 1637년에 사망했다. 3남인 페르디난트 3세가 다음 황제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
참고로 기상학 연구를 후원한 전적이 있다고 한다.[13]

[1] 신성로마 최고의 충신이자 명장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풍운아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30년 전쟁 후기 최고의 명장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등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이들이 죽고나서 신성 로마 제국은 바로 졌다.[2] 그중에서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을 탄압한것은 명백한 악행이자 폭정이다.[3] 한때 엘리자베스 1세와 혼담이 오갔다. 그러나 메리 1세의 선례가 있었고 여왕 역시 결혼을 거부해 무산되었다. 여담이지만 이 사람의 경우 가톨릭 왕가의 중시조격인데(...)부르봉(+오를레앙) ,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사보이, 비텔스바흐, 베틴(+벨기에계 작센코부르크고타), 뷔르템베르크(일부)의 조상이다[4] 여기에서 가톨릭 리그의 창설자이자 30년 전쟁에서 합스부르크의 우방이 되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을 만난다. 참고로 둘은 동문이다[5] 30년 전쟁 자체가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신교도 자유도시 vs 국가의 통합과 군사확장에 더 신경쓰는 가톨릭 보수귀족들의 경제적인 대립에 가까운 성향도 짙었기에, 페르디난트 2세가 무작정 신교도들의 재산을 빼앗고 쫓아냈던 경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업도시가 많았던 해당 지역의 반란의 동기가 될 수 있었다.[6] 특히 공개적으로 참수형에 처했다.[7] 다행히도 전부 살았다고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내전의 시발점이 될만한 사건이라서, 보헤미아 주변은 심심하면 치고받는 전쟁터가 된다.[8] 30년 전쟁 이후에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바이에른은 남팔츠 지방을 얻고 선제후위를 프리드리히의 아들에게 돌려주었다[9] 사실 당시 교회 재산을 먹튀한 게 꼭 신교도 뿐만이 아니었다. 구교도 측에서도 잘만 뺏아 썼다. 거기다 70년 동안 내내 있었던 일이라 얼마나 빼돌렸는지 대중할 수도 없었다.[10] 사실 제일 믿을만한 틸리 백작이 전사한것도 한몫했다.[11] 페르디난트 추기경-펠리페 4세와 안 도트리슈의 동생-과 페르디난트 3세가 정예 테르시오로 스웨덴을 물리쳐서 스웨덴의 힘을 약화시켰다. 여담이지만 이 전투의 패배의 또 다른 원인은 스웨덴의 자만과 내부 분열에 있다.[12] 사실 30년 전쟁 도중에 몇 번이나 전쟁을 끝낼 기회가 있었으나 페르디난트 2세의 고집으로 불씨가 되살아났던 것이다. 결국 신성로마제국은 계속된 전쟁으로 피폐해지면서 국력을 전부 소진하고 말아 종이호랑이가 된 셈.[13] Richard hamblyn,'Invention of clouds',Picador,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