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치바나노 키미나가
橘公長
불명
일본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장이자 정치가.
키미나가의 출생은 분명하지 않지만, 크게 두 가지 설로 나뉜다. 하나는 덴교의 난에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를 진압한 타치바나노 토야스의 자손이라는 설로 토야스에서 키미나가로 이어지는 계도도 존재한다. 다른 하나는 중앙귀족 타치바나 씨의 자손이라는 것으로, 산기(参議) 타치바나노 요시후루의 손자 노리미츠의 아들인 스에미치의 현손이라고 한다.
궁마와 지모에 뛰어난 인물로, 원래 타이라노 토모모리의 게닌으로써 헤이케를 따랐으나 지쇼 4년(1180년) 12월에 헤이케와 손절하고, 동료였던 카가미 나가키요의 중개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는 과거 구리타쿠치에서 당시 미나모토노 다메요시의 게닌이었던 사이토 사네모리와 가타키리 가게시게와 분쟁이 벌어졌을 당시, 요리토모의 할아버지로 그 두 사람의 주군이었던 다메요시가 이 문제를 조정에 호소하지 않고 사이토, 가타키리를 나무라며 키미나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던 일로 겐지 가문에 대한 은의를 잊지 않고 연척을 찾아 토토미 국으로 내려가 가마쿠라시로 향했다고 한다. 한편 실제로는 가타키리 가게시게는 헤이지 원년에 있었던 헤이지의 난에서 전사했고, 다메요시는 그 이전인 호겐 원년(1156년) 호겐의 난 직후에 처형되었기에 타치바나노 키미나가가 얽힌 분쟁이란 지쇼 4년(1180년)보다 훨씬 이전의 일로 보인다.
「교토에서 배운 자」(京に馴るるの輩)라는 이유로 요리토모에게 중용되었고 겐랴쿠 원년(1184년) 앞서 헤이케의 일원이었으나 헤이케의 서국 낙향에 따르지 않고 교토에 남아서 요리토모에게 귀순해 우대받았던 타이라노 요리모리의 교토 귀환을 맞아 열린 전별 잔치에 참석하였다. 그 뒤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휘하에서 싸웠으며, 이듬해인 겐랴쿠 2년(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가 멸망하고[1] 포로가 된 헤이케의 총수 타이라노 무네모리의 처형을 맡았으며, 이 일과 타이라노 시게히라의 죽음에 대해 가마쿠라의 요리토모에게 보고하였다.
『헤이케 이야기』「대신의 처형」(大臣殿被斬)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키미나가가 한때 헤이케의 게닌이었음에도 그런 과거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손바닥 뒤집듯 변절한 모습을 비판하였다고 한다. 키미나가의 자손은 히젠 국으로 뻗어나가서, 둘째 아들인 타치바나노 키미나리가 잠시 영지로써 소유했던 오가시마(小鹿島)의 지명을 따서 오가시마 씨(小鹿島氏)로써 번영하였다.
불명
1. 개요
일본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장이자 정치가.
키미나가의 출생은 분명하지 않지만, 크게 두 가지 설로 나뉜다. 하나는 덴교의 난에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를 진압한 타치바나노 토야스의 자손이라는 설로 토야스에서 키미나가로 이어지는 계도도 존재한다. 다른 하나는 중앙귀족 타치바나 씨의 자손이라는 것으로, 산기(参議) 타치바나노 요시후루의 손자 노리미츠의 아들인 스에미치의 현손이라고 한다.
2. 일대기
궁마와 지모에 뛰어난 인물로, 원래 타이라노 토모모리의 게닌으로써 헤이케를 따랐으나 지쇼 4년(1180년) 12월에 헤이케와 손절하고, 동료였던 카가미 나가키요의 중개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는 과거 구리타쿠치에서 당시 미나모토노 다메요시의 게닌이었던 사이토 사네모리와 가타키리 가게시게와 분쟁이 벌어졌을 당시, 요리토모의 할아버지로 그 두 사람의 주군이었던 다메요시가 이 문제를 조정에 호소하지 않고 사이토, 가타키리를 나무라며 키미나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던 일로 겐지 가문에 대한 은의를 잊지 않고 연척을 찾아 토토미 국으로 내려가 가마쿠라시로 향했다고 한다. 한편 실제로는 가타키리 가게시게는 헤이지 원년에 있었던 헤이지의 난에서 전사했고, 다메요시는 그 이전인 호겐 원년(1156년) 호겐의 난 직후에 처형되었기에 타치바나노 키미나가가 얽힌 분쟁이란 지쇼 4년(1180년)보다 훨씬 이전의 일로 보인다.
「교토에서 배운 자」(京に馴るるの輩)라는 이유로 요리토모에게 중용되었고 겐랴쿠 원년(1184년) 앞서 헤이케의 일원이었으나 헤이케의 서국 낙향에 따르지 않고 교토에 남아서 요리토모에게 귀순해 우대받았던 타이라노 요리모리의 교토 귀환을 맞아 열린 전별 잔치에 참석하였다. 그 뒤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휘하에서 싸웠으며, 이듬해인 겐랴쿠 2년(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가 멸망하고[1] 포로가 된 헤이케의 총수 타이라노 무네모리의 처형을 맡았으며, 이 일과 타이라노 시게히라의 죽음에 대해 가마쿠라의 요리토모에게 보고하였다.
『헤이케 이야기』「대신의 처형」(大臣殿被斬)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키미나가가 한때 헤이케의 게닌이었음에도 그런 과거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손바닥 뒤집듯 변절한 모습을 비판하였다고 한다. 키미나가의 자손은 히젠 국으로 뻗어나가서, 둘째 아들인 타치바나노 키미나리가 잠시 영지로써 소유했던 오가시마(小鹿島)의 지명을 따서 오가시마 씨(小鹿島氏)로써 번영하였다.
[1] 키미나가의 옛 주군인 타이라노 토모모리는 바다에 투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