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모토노 요리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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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무신 정권의 시작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
고대 일본에서 중세로 넘어오면서 중앙 귀족들 중심의 구체제로는 정치 안정을 이루기 어려웠다. 각지에서 봉기 및 전투가 잇따르면서, 사무라이들이 공훈을 세우고 정치 세력화했다. 사무라이 중 가장 큰 세력을 자랑했던 다이라 씨는 스스로 중앙 귀족이 되는 방식으로 정권을 잡지만, 중앙 귀족 중심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미나모토 씨에게 져 멸문지화를 입는다.
요리토모가 일본을 통일한 이후, 일본의 중세, 근세 정치 체제는 그가 세운 막부란 모델을 따르게 된다. 사무라이 봉건 영주들을 부하로 두는 막부 통치로 지방을 다스리고, 수도는 천황과 중앙 귀족들의 세력을 인정해주는 이원적인 통치 형태가 된다. 막부는 쇼군을 정점으로, 직역이라는 이름의 독자적 관직을 만들어 겐지의 방계와 창업 공신들을 앉혔다. 정치적 안정으로 농어업이 안정되고 서부 일본은 이모작을 시작하면서 가마쿠라 막부는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창업주인 그의 사망 직후, 정권은 그의 처가인 호조 씨에게 모두 넘어가고 미나모토씨는 3대만에 끊어진다. 그의 아내 호조 마사코는 자신의 장남을 몰락시키고 친정에 실권을 모두 넘겨줬으며, 차남을 쇼군 자리에 대신 앉히지만 아무 실력도 없었다. 그나마도 암살되면서 교토에서 생판 남을 4대 쇼군으로 데려오는 지경에 이르고, 명목만 근근히 이어가던 가마쿠라 막부의 시대는 9대, 130년 만에 짧게 저문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일본은 동아시아 고대 정치가 모두 그렇듯 왕정 형식의 정치였다. 다만 왕의 방계들을 제후로 삼은 고대 중국과 달리 일황가의 방계 친족들은 사무라이가 돼 각자 국토 수호 및 황가를 보필했다. 대표적인 씨족이 다이라 씨(平氏,헤이시)와 미나모토 씨(源氏,겐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황족의 후예이면서도 궁궐 경비나 보는 신세였다. 후지와라 씨의 중앙 귀족보다 하대를 받고 눌려 있어[3] , 그 때만 해도 무가 귀족은 당상관(정3품 이상 고관)이 될 수 없었다.
세이와 겐지의 본류를 계승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역시 낮은 품계의 사무라이였다. 그의 3남 요리토모는 어머니가 본처라 배다른 형들을 제치고 후계자(적자)가 된다. 요리토모의 어머니 유라고젠은 후지와라 가문에, 아쓰타 신궁의 대궁사(오오구지) 후지와라노 스에노리의 딸이었다. 조선시대 양반제도 그랬고 동서고금 귀족제가 다 그렇듯 모친의 귀천이 자식의 신분을 결정한다.
1159년 헤이시의 난이 발발해 당시 무사 가문의 양대 세력인 헤이시(다이라씨)와 겐지(미나모토씨)가 수도 교토에서 격돌한다. 패배한 요시토모는 부하의 배반으로 죽고, 요리토모와 형제들은 포로로 잡혀 이즈 반도로 유배된다.
겐지를 누른 헤이케는 절대권력을 구축한다. 헤이케의 당주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전통적 신분제한을 깨고, 후지와라 씨가 독점하던 '태정대신' 자리에 무가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오른다. 그러나 일본 정치 체제에 어떤 변화도 없이 자기 세력을 위한 보은 정치만을 했으며 가뜩이나 힘이 없던 천황을 더 바지로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실권을 잃은 중앙 귀족과 호족, 사원 등 지방 토착 세력을 결착하게 만들었다.
반 헤이시 연합은 시시가타니의 반란모의, 방계 모치히토 황자의 거병 등 여러 사건을 일으키지만 실패한다. 기세가 오를대로 오른 헤이케는 구실을 붙여 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세력들을 발본색원하려 한다. 위협을 느낀 요리토모는 처가인 호조씨 및 관동 지방의 세력을 규합해 1180년 거병하는 도박을 한다.
2.2. 겐페이 전쟁
초전인 이시바시야마 전투에서는 참패했다. 그러나 다이라 씨 정권은 내부로부터 무너져 가고 있었다. 같은 다이라 일족이면서도 교토의 다이라노 기요모리에게 깊은 원한을 가진 간토 일대의 다이라 씨들, 즉 반또헤이씨(坂東平氏)들이 미나모토와 호조 연합 세력에 붙었다. 일거에 세를 불린 요리토모의 대군세는 마침내 헤이케와 정면대결을 하게 되는데 이를 일명 겐페이 전쟁(源平合戰, Genpei War) 혹은 지쇼-주에이의 난(治承・寿永の乱)이라 한다.
요리토모가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친척인 미나모토노 요시나카[4] 등과 이치노타니 전투, 야시마 전투 등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기근 등으로 민심을 잃은 헤이케[5] 를 단노우라 결전에서 멸망시키고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다.
2.3. 쇼군 재임기
요리토모는 쇼군이 된 이후 측근에 대한 자비없는 숙청이 시작된다. 첫 대상이 된 것은 요리토모가 금한 바 있는 조정 관직에 취임한 요시츠네였다. 요시츠네는 억울함을 호소하러 가마쿠라에 찾아오지만 요리토모는 그를 내치고 죽이려 자객까지 보낸다. 암살 시도는 미수로 끝나고, 격노한 요시츠네는 자객을 손수 참수하고 이에 맞서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요리토모 토벌 허가를 받아 유키이에와 협력하여 병사를 일으키려 한다. 그러나 요리토모는 무사들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반면, 요시츠네는 무사들에게는 인기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6] 결국 응하는 병력이 너무나 적어 실패하고 결국 오슈(奧州)[7] 지방으로 도망쳐 히라이즈미의 오슈 후지와라 씨에게 의지한다.
이후 후지와라씨의 영주인 후지와라노 야스히라를 협박해 요시츠네를 죽게 하고, 그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오슈까지 침공해 오슈 후지와라씨를 멸망시켜 버리고 히라이즈미를 잿더미로 만든다. 이로써 간토 등의 토고쿠 지방을 근거로 하는 가마쿠라 막부는 기반을 다지고 일본을 통일한다.
그리고 역시 요시츠네와 종군하며 공이 컸던 이복 형제 노리요리도 구실을 잡아 그를 유배하고 참수시키고, 조카마저 죽여버린다.[8]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막부 수립 과정에서 막대한 공훈을 세운 형제들을 주살한 것은 미나모토 씨의 기반을 스스로 약하게 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고 결국 호조 씨에 의해 대가 끊기는 결과를 낳는다.
힘들게 만들어 놓은 막부의 열매를 미나모토 가문이 아닌 호죠 가문이 누리게 되었으니 업보의 대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1195년에는 딸인 오히메를 황후로 만들려 획책하는 과정에서 고시라카와 덴노의 애첩이었던 정계의 거물 탄고노츠보네를 비롯한 여러 쿠게[9] 들을 숙청하는 '겐큐 7년의 정변'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래 놓고 오히메가 요절해 황후 계획은 대실패하고 도리어 조정에서 반 막부 파가 대두해 버린다.
2.4. 사망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199년에 사망했는데, 사인은 여러 가지이다. 어째서인고 하니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역사서인 《아즈마카가미》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사망 시점(1199년)의 기록만 전후로 3년치가 빠져서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10] 그나마 요리토모 사망 13년 뒤의 가신의 회고에서 "중신인 이나게 사부로(稻毛三郎) 시게나리(重成)가 죽은 아내를 위해 사가미 강에 놓은 다리의 낙성식을 겸한 공양식에 참석했던 요리토모가 귀가 도중에 그만 말에서 떨어졌고 곧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 《아즈마카가미》에 남아 있고, 이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요리토모의 사망 원인이다. 하지만 이것이 《아즈마카가미》에 등장하는 것은 요리토모 사후 13년이나 지난 뒤의 일로 《아즈마카가미》에는 다리 공양부터 장례 의식까지 요리토모의 죽음에 대한 기재가 일절 없다. 때문에 이에 대해 요리토모의 최후가 불명예스런 내용이었기에[11] 그를 존경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명장의 수치가 될 일을 실어서는 안 된다"며 해당 부분을 숨겨버린 것이라고도 하지만, 도쿠가와 집안에만 《아즈마카가미》가 전해진 것이 아니기에 이는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사망 원인과 낙마의 인과 관계에 따라[12] 해석은 달라질 수 있는데, 뭔가의 원인 때문에 말에서 떨어진 것이라면 뇌졸중 등 뇌혈관 장해가 사고 전부터 일어났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며, 낙마 자체가 원인이라면 두부외상성 뇌내출혈을 일으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낙마에서 사망까지 17일이 걸린 것을 보면 뇌졸중 후의 오연성 · 침하성 폐렴의 가능성이 있다. 《이노쿠마 간파쿠기》에는 '음수병'(물을 마시고 싶어하는 병)이 원인이라고 하고, 현존하는 사료도 요리토모의 죽음을 전하면서 '음수병', '사가미 강의 다리 공양', '수신의 꾐', '바다 위에 나타난 안토쿠 천황' 등 모두 '물'을 연상시키는 말이 많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다리 낙성식에 참석했다는 오늘날 사가미 강 하구 부근은 바뉴가와(馬入川, '말이 들어간 강'이라는 뜻)라고도 불리는데, 요리토모가 타고 있던 말이 뭔가에 놀라 갑자기 날뛰다가 강으로 들어가, 낙마에 이르게 된 데에서 유래했다는 전승이 있는데, 이 경우 '음수병'은 다른 생물학적인 병이 아니라 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물을 과음한 것(즉 익사)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 어떤 경위(이 경우에는 낙마)로 해서 '''그의 죽음 과정이 뭔가 물하고 관련이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노쿠마 간파쿠기》에 실린 '음수병'이 물을 몹시 찾는 병, 즉 당뇨병을 가리킨다고 하는 설이 있지만, 당시 요리토모에게 당뇨병 증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어 가능성은 낮다. 다만 낙마로 인해 뇌의 중추신경이 저하되어 항이뇨 호르몬 분비 이상을 초래해 요붕증이 발현될 수 있고 그럴 경우 소변량이 급증하면서 '''몹시 물을 찾게 된다'''고(또한 혈중 나트륨 농도가 저하되기 때문에 적절한 치료법이 없던 12세기에는 이 병으로 죽음에 이를 가능성도 높았다). 후대인 에도 시대의 《보력간기》에는 요리토모 자신의 손에 죽음을 맞은 안토쿠 덴노나 요시츠네의 망령을 보고 놀라서 죽었다고 했는데, 당시는 망령이나 귀신의 저주 같은 것을 깊게 믿었던 사회였고, 유배 시절부터 신불에 심취했을 정도로 믿음이 깊은 요리토모에게 하필 그날 갑자기 요시쓰네나 안토쿠 천황의 망령이 보였다는 것이다. 왜 하필 그날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뭔가 요리토모에게 의식장애가 있었다고 파악할 수도 있는데, 이것도 낙마 때문에 뇌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2.5. 친족들과 사후
그의 사후, 그의 아내 호조 마사코(北條政子)의 친정인 호조 가문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요리토모의 아내 마사코는 "비구니 쇼군"이라 불리는 여걸로, 노년엔 막부를 위해 사무라이들을 선동하기도 했다.
현재 그의 후손은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자식 중 자손을 남긴 사람은 차남이자 2대 쇼군인 요리이에가 유일하다. 장남 치즈루마루는 어린 나이에 살해당했고[13] , 3남인 조교는 출가했고, 4남이자 3대 쇼군인 사네토모는 요리이에의 차남 구교에게 살해당했다. 딸 중 오토히메는 혼인도 하기 전에 일찍 죽었고, 오오히메는 혼약이 있었다. 요리토모와 대립하고 있었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義仲)가 자신의 아들인 미나모토노 요시타카(源義高)를 인질로 가마쿠라에 보냈는데 오히메와 혼인을 시켜 서로 화평을 하자는 의도였었다. 이 당시 오히메는 6살, 요시타카는 11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요시타카를 연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1184년 1월 요시나카가 패하여 사망. 이러한 상황이 되자 요리토모의 입장에서는 요시타카는 장래의 화근이었으므로 4월 21일, 이를 미리 뽑자는 생각에서 요시타카의 살해를 결정했다. 시녀들을 통해 알게 된 오히메가 요시타카를 시녀로 변장시켜 도망치도록 도와주었지만, 4월 26일 요시타카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요리토모에게 들어왔다.
이를 비밀로 했으나 오히메의 귀에 들어갔고 7살이었던 오히메는 비탄에 빠져 물조차도 거의 마시지 않았으며, 10여 년간 병상에 거의 누워지냈다고 한다. 이것에 놀라 허둥대던 요리토모는 급히 요시타카를 죽일 생각이 없었는데 요시타카를 잡은 무사가 독단적으로 죽였다며 애꿎은 무사의 목을 베거나 요시타카를 공양하는 보탑을 세우고 명복을 비는 기도를 올리기도 했지만 오히메의 마음의 병은 낫지 않았다.
18살 때는 황실과의 혼담 이야기가 오고 가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쿠조 씨(후지와라의 분파)가 이미 선수를 친 데다 오히메 본인도 '그런 짓을 할 정도라면 연못에 몸을 던지겠다'라고 일언지하에 거절. 끝내는 회복하지 못하고 20살에 요절했다. 어린 나이에 대단히 열렬한 사랑을 한 셈으로, 승자도 패자도 모두 무상하다는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주제를 상기하면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요리이에의 자식들 역시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 장남 이치만은 요리이에가 죽기도 전에 호조 가가 권력독점을 위해 그의 외가를 풍비박산내는 와중에 살해당했고, 차남 구교는 사네토모를 아버지의 원수라고 살해하고 처형되었다. 3남 에이지츠도 출가한 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자살하고, 다른 아들 젠교도 구교의 암살에 가담하여 살해당했다. 딸 타케고쇼도 4대 쇼군 후지와라노 요리츠네와 결혼했으나 첫 아이를 사산하고 사망했다.
1231년, 요리토모의 3남 죠교가 사망하면서 요리토모의 대는 끊겼고, 1234년 요리토모의 자손 중 마지막으로 남은, 요리이에의 딸 타케고쇼가 사망하면서 그의 후손은 완전히 없어진다.
3. 일화 및 평가
창건자들이 다 그렇듯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도 운이 상당히 좋았다. 요리토모는 헤이지의 난 당시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었으나,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계모에게 동정받아[14] 운좋게 이즈로 유배되었다. 유배생활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보내던 요리토모는 평생의 반려자 호조 토키마사(北條時政)의 딸 마사코(政子)와 결혼하게 된다.
소위 '''키보드 워리어'''라는 얘기가 있다. 정략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에게 밀서를 보내 맘대로 조종하거나 협박했으며, 개중에는 "좋은 대장장이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가 너의 목을 칠 테니)''' 굉장히 튼튼한 목가리개가 필요할 일이 생길 것이다." 같은 흠좀무한 서찰도 있다. 후지와라노 야스히라가 요시츠네를 배반한 것도 살벌한 협박에 굴했기 때문이다.[15]
또한 가마쿠라 막부의 정사 기록인 아즈마카가미에는 후지와라노 야스히라가 죽은 뒤, 히라이즈미 잔당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전투에 참전한 무장들의 전투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을 때, "기치지 기미나리는 전사했고 유리 나카하치 고레히라는 도망쳤다"는 보고를 듣고 "기미나리가 도망쳤고 고레히라는 전사한 것이겠지"라고 한마디 했는데, 나중에 실제 상황을 확인해 보니 요리토모가 지적한 그대로였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이런 일화가 아즈마카가미 안에서 적잖이 등장하는데, 요시츠네가 무단으로 임관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요시츠네를 따라 조정으로부터 무단 임관을 받은 무사들의 이름과 용모를 하나하나 열거해가며 비난하기도 하는 등, 휘하 무장들의 용모나 성격을 일일이 기억하고 파악하고 있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치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냉정함이 극에 달한 인물로 조금이라도 뭔가 어긋난다 싶으면 자비나 용서 없이 그대로 칼같이 처분해버렸다. 한마디로 '''처벌에 있어서만큼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인물'''이다. 사형을 선고했으면 그자리에서 바로 목을 베어버렸고 태형을 선고했으면 그자리에서 두들겨 패버리는 이와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렇듯 친족도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팽해버리고 적에게도 자비가 없는 냉혹한 권신[16] 이었지만, 자식들에게는 그야말로 팔불출 아버지였다. 사냥에서 아들 요리이에가 사슴을 쏘아 잡자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서찰을 부인 마사코에게 보냈으나 "무사 아들내미가 사슴 하나 잡은 게 뭐 대수라고."라는 대답을 듣고 데꿀멍한 적도 있다. 어린 딸 오오히메가 남편 요시타카의 죽음으로 몸져눕자 이를 달래려고 요시타카의 죽음을 그를 추적해 죽인 무사 탓으로 돌려 참수하고 사찰에 요시타카를 공양하는 기도를 대대적으로 올리게 하는 등 허둥대기도 했다.
사실,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직을 미나모토 씨가 독점하지 못하게 된 것에는 요리토모의 책임도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세이와 겐지 본가의 잔존 인물들 중에서 칸무 헤이시 일족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 요시츠네는 추방 후 의지하던 세력에 의해 살해당하도록 몰아넣고, 역시 타이라씨의 멸망에 공적을 세운 또다른 동생 노리요리는 실언을 핑계로 처형하고[17] 실패로 끝난 최초의 봉기에서부터 참가했던 숙부 유키이에도 트집을 잡아서 처형했다. 친족들을 죽여댄 목적이야 자신의 직계손들이 막부의 권력을 독점하게끔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엉뚱하게도 처가인 호조씨가 권력을 틀어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자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셈이다.
지나친 숙청으로 유방 사후 지지층의 힘이 약해져 여후가 권좌에 앉은 사건과도 비슷해 보이나, 오히려 유방은 공신들을 제거하면서 동성인 유씨들에게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에 자신의 가문을 작살낸 요리토모와는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친족들이 힘이 있었기에 유씨 한나라가 부활할 수도 있었고.[18]
중국사에서 제일 비슷한건 조비로 공신들은 우대하면서 자신의 친족에게는 가혹하게 굴었기 때문에 친족들이 소수의 몇을 제외하곤 힘이 없어서, 조상이 숙청당하자 훗날 사마씨에게 나라가 넘어가는 단초를 제공했다. 진나라는 반대로 친족들을 너무 우대해서 팔왕의 난으로 박살났지만...
역대 일본 막부 창시자들이 다 그렇듯 라이벌들에 비해 인기가 다소 떨어지는 편.[19] 특히나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워낙에 인기가 많은데다가 그를 죽게 한 게 요리토모이니[20] 전통적으로 일본 문화에서는 악역을 맡는 경우가 많다.
여담으로 가마쿠라 막부 쇼군 중 키하고 몸무게가 공개된 유일한 쇼군이다.
4. 대중문화 속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내정 100으로 호조 소운과 함께 공동 1위다.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서는 일본의 군주로 개근한다. 징기스칸 2에서는 세계편 시나리오에서 징기스칸, 리처드 1세, 이사키오스 2세와 함께 선택 가능 군주로 나왔다. 원조비사에서는 유저 시나리오/겐페이 전쟁(PS판 한정)에서 일본의 군주로 등장하는데, 정치군주로 호죠 도키마사를 두고 있고 휘하 무장에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두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능력치는 정치 B 전투 C 지도 A 매력 B.
원평토마전에서는 주인공이 주인공이니만큼 당연히 최종 보스로 등장.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일본 열도를 제패했다는 설정이 있으며 이 때문에 악마에 가까운 모습. 후속작에서는 아예 대놓고 나 마왕이오 하는 포스를 뽐낸다. 대표적인 대사는 '나의 영혼은 불멸이니라!'(我が魂は不滅じゃ!)
징기스칸 4에서도 시나리오 1에서 가마쿠라 막부의 군주로 등장한다. 놀랍게도 스텟 총합이 조선의 창업군주인 이성계와 231로 동일하다. 다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내정에 치우쳐져 있는 반면 이성계가 전투에 치우쳐져 있는 차이만 존재하며 세부 스텟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정 87 전 68 지 76, 이성계는 정 76 전 83 지 72 이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정치와 이성계의 전투가 비슷하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전투와 이성계의 지략이 비슷하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지략과 이성계의 정치는 숫제 둘 다 76으로 동스텟이다.
Fate/Grand Order에서는 남동생이었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랑 조상이었던 미나모토노 요리미츠가 TS되어 여동생과 겁나먼 이모님이 되어버렸다. 오픈 당시부터 출전하던 여동생의 언급으로 여기저기 나오는데, 천부적인 재능 을 가진 여동생을 이리저리 써먹다가 내쳐버린 듯. 마물의 목을 마구 잘라 선물이라고 보냈다거나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자 질색인 눈으로 봤다던지, 타이라노 카게키요가 빙의한 요시츠네의 육체의 기억에서 '용서해다오. 요시츠네, 나는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다.'라고 말한 걸 보면, 실제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맛탱이가 간 요시츠네에게 질려서 숙청해버린 모양이다.
[1] 이 초상화에 대해서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아니라 무로마치 막부 초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동생인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의 것이라는 설도 존재하고 있다.[2] 이 사이트에서 결론낸 키하고 몸무게이다.[3] 다만 후지와라씨내에서도 직계-방계, 적출-서출 여부 및 모친의 출신에 따라 그 대우가 천차만별이었다. 섭관가로 불리던 집안은 후지와라씨에서도 홋케 미도류(藤原北家御堂流)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후손들이었다.( 고셋케가 정립되기 이전이다.)[4] 요시나카의 아버지 요시카다는 요리토모의 아버지 요시토모의 이복동생이므로 서로 사촌뻘이지만 사정은 더 복잡해서 요시카다는 요리토모의 이복형인 요시히라에게 살해당했다. 아들을 요리토모의 딸과 결혼시키는 등 동맹관계였으나 복잡한 원한관계에 있던 터에 요시나카가 교토를 점령해 쇼군을 자칭하고 난폭한 행동을 거듭하자 대립하게 되고, 결국 교토를 처음으로 점령해놓고서도 요시츠네에게 패배해 죽는다. 쿠리카라 고개 전투에서 화우의 책략을 사용해 헤이케를 격파한 것으로 유명.[5] 헤이케의 병력은 숫자는 많았지만 거의 오합지졸 수준이었다. 첫 패전에서는 '''물새 소리에 놀라서''' 혼란에 빠져 싸우지도 않고 스타트를 끊고, 이후에도 계속 뻑하면 모랄빵이 나서 우르르 도주하는 병사들을 이끌고 졸전을 거듭했다.[6] '''병사가 모이지 않아서''' 도주하는 꼴이 됐으니 인망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훗날 미화된 것처럼 점잖은 비련의 영웅이 아니라 저돌적이고 상당히 야만적인 무사였을 가능성이 크다.[7] 무츠국(陸奧國). 현재의 도호쿠 이와테현[8] 요시츠네의 부인인 시즈카 고젠에게 딸이면 살려주지만, 아들이면 죽인다고 하였다. 결국 시즈카 고젠이 낳은 요시츠네의 아이는 아들이였고, 요리토모는 그 아이를 죽여버리고 만다.[9] 公家. 무사와 대척점에 서 있는 교토의 귀족들. 무사를 이르는 다른 말인 부케武家와 대비되는 단어다. 공가, 공경이라고도 칭한다. 조정의 관위는 높았지만 이후 무사 중심의 사회로 변하면서 점차적으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데는 한계가 생겼으나 문화적,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매우 중요한 존재들이었다. 조정과 쿠게 층에 영향력을 가진 무사와 그렇지 않은 무사의 차이는 조정의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센고쿠 시대에도 매우 컸다.[10] 아주 전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고 일부 잔본 형태로 존재하기는 한다.[11] 몰래 애인을 만들어두고 밤에 몰래 만나러 다니다가 그를 첩자로 오인한 경비병에게 살해당했다거나, 아니면 아들 요리이에나 사네토모처럼 그 역시 누군가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라거나.[12] 말에서 떨어진 것이 원인이 되어 죽었느냐 아니면 뭔가의 원인 때문에 말에서 떨어졌느냐 하는.[13] 시마즈 가의 조상이라는 전설은 존재.[14] 요리토모를 보니 자신의 죽은 아들이 생각난다며 살려달라고 간청한 것.[15] 사실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굴복했는데도 쳐들어가서 히라이즈미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16] 요리토모가 애초에 적인 헤이케의 어중간한 자비로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나중에는 그 헤이케를 멸망시킨 만큼,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17] 요리토모가 아들 요리이에까지 대동하고 고케닌들과 후지 산으로 사냥하러 가서 가마쿠라를 비웠을 때, 요리토모와 요리이에를 걱정하는 마사코에게 "제가 있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실상은 예전에 가와즈 스케야스를 죽게 만든 고케닌(쇼군과 주종관계인 무사) 구도 스케쓰네가 요리토모를 따라 야영하는 틈을 타서 스케야스의 두 아들이 스케츠네의 숙소까지 침입해 스케츠네를 죽인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소가 형제의 복수로 알려져 있다) 요리토모가 있는 곳과 가마쿠라 사이에 연락이 한동안 두절됐고 그것이 요리토모가 죽었다는 소식으로까지 부풀려 전해진 것.[18] 애시당초 유방 사후 여후가 멋대로 여씨를 왕위에 올렸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 하지만 유씨와 공신들이 힘을 합쳐 여후 사후 비빌 곳이 사라진 여씨들을 숙청할 수 있었던 것도 유씨도 공신도 권력은 없었지만 권위는 여전히 살아있어서였다.[19] 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예외로 이 경우는 그 라이벌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너무 엄청난 짓거리를 저지른 것을 인터넷으로 인해 일본에서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NHK 대하드라마를 보면 공명의 갈림길과 군사 간베에에서 임진왜란을 다루는 차이만 봐도 알 수 있다.[20] 그래도 남아있는 기록에서 인간적 교만이나 전장에서의 잔혹성이 그에 대한 인간적 평을 떨어뜨려 중상 모략을 당하게 했다는 지적을 받는 요시츠네에 비하면 노리요리는 이렇다 할 교만을 보인 적도 없고 중상 모략을 받은 것도 아닌데 죽였다. 에도 시대의 국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자신의 저서 《독사여론(讀史餘論)》에서 "'''요리토모 같은 인간 밑에서 동생으로 산다는 것도 힘든 일이다'''"라고 비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