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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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이케(平家)는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중심으로 한 '이세 헤이시(伊勢平氏)' 일족의 정권을 가리키는 말.[3] 헤이시(平氏) 정권이라고도 하고 본거지인 키요모리의 저택이 교토(당시에는 헤이안쿄)의 로쿠하라(六波羅) 구역에 있었기 때문에 로쿠하라 정권이라고도 불린다.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타이라노 사다모리의 넷째 아들 고레히라가 이세에 자리를 잡은 것을 집안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고레히라의 증손자인 마사모리(正盛)의 대에 와서 시라카와 덴노의 인세이 아래 중용되었고, 특히 미나모토노 요시치카[4] 의 난을 진압하는 공을 세우면서 무사 가문으로써 본격적으로 대두했다. 이러한 이세 헤이시의 대두 과정 자체가 당시 무사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와 겐지 가문을[5] 견제하기 위한 시라카와 덴노의 계략이었다는 해석이 정설.
호겐의 난(保元の乱)과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서 승리를 거두고, 키요모리는 그 지위를 높혀 전국에 500여 개의 장원과 각종 공경 벼슬을 독점하여 헤이시 정권을 형성한다.
헤이케는 해상 세력이기도 했는데[6] , 대 송나라 무역을 독점하고 세토내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현재의 고베에 무역을 위한 인공섬 쿄가시마(経が島)[7] 를 건설했으며, 역시 고베에 후쿠하라쿄(福原京)의 건설과 천도를 시도하기도 했다.[8]
타이라노 키요모리 본인은 상당한 능력자였지만, 헤이케 안에는 '''키요모리를 능가 혹은 그에 비길 만한 능력을 가진 자가 없어''' 키요모리 사후 겐페이 전쟁에서 겐지 세력에 밀리고 패배하며 멸망했다. 헤이케 측의 장원과 영지는 몰수되어 가마쿠라 막부를 따르는 무사들에게 재분배되었다. 요리토모는 헤이케 잔당들에 대해 철저한 보복을 가했는데, 이세 헤이시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키요모리의 동생으로 요리토모에게 귀순한 요리모리에[9] 의해 가문 자체는 유지될 수 있었다. 각지에서 "헤이케의 도망자 전설"이 만들어지게 된다. 사츠마의 시마즈 가문이나 쓰시마의 소 가문도 모두 이 당시 도망친 헤이케 도망자들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헤이케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平家にあらずんば人にあらず)"라는 유명한 고사가 바로 헤이시 정권 시기 때 나온 말이다. 키요모리의 처남인 토키타다가 한 말인데 불새/난세 편에서는 대놓고 키요모리 본인이 토키타다에게 "그런 멍청한 소리를 왜 하냐"고 깐다.[10] 교만의 상징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키요모리 본인은 낮은 사람들한테도 잘 대해 주는 것으로 신망이 높았다.
2. 역대 수장
3. 여담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가마쿠라 막부 이전의 헤이시 정권을 무가 정권의 선도적인 형태로 파악하기도 한다.
이를 다룬 문학으로 헤이케모노가타리가 있다. 13세기에 성립된 이래 수많은 문학과 회화, 연극 작품 등에 영향을 주었고 현대에도 곧잘 주석본이 나오는 삼국지연의급 고전.
겐페이 전쟁에서 실제 역사와 달리 헤이케가 승리해서 정권이 계속 이어지거나 헤이케가 막부를 창건한다는 가정은 일본의 대체역사물에서 상당히 소재로 많이 활용되어서 로쿠하라 막부나 로쿠하라 시대라는 명칭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우라타로가 있다. 이때문에 창작물에서 가상의 막부가 나올때는 장갑악귀 무라마사에서처럼 헤이케와 별 관련이 없어도 로쿠하라 막부라는 명칭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1] 1180년에 약 5개월 간 후쿠하라쿄(福原京, 오늘날의 고베시)를 수도로 삼았으나 곧 헤이안쿄로 복귀했다.[2] 송나라 화폐[3] 사실 겐페이 전쟁이 바로 겐지와 헤이케 가문의 내전을 일컫는 말이다.[4] 겐지의 도료로 신망이 높았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아들이다[5] 또한 겐지는 전통적으로 후지와라 셋칸케와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셋칸케를 배제하려는 시라카와 덴노로서는 미나모토 가문을 배제하기 위해서도 다른 무사 가문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6] 반면 헤이케의 숙적이었던 겐지는 척박한 간토 지방을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육상전에 능하였다.[7] 키요모리가 이 섬을 만들 때 난항을 겪자 주변에서 "산 사람을 제물로 바다의 신에게 바쳐야 공사가 순조롭게 잘 이루어질 것"이라며 인신공양을 권했지만 키요모리는 "다 사람 먹고 살자고 하는 공사인데 그럴 수는 없다"며 '''불경을 적은 돌을 바다에 던지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덤으로 이 돌로 매립공사까지 했다) 공사 중에 해가 저물려고 하자 해에게 명령해 저물지 말고 다시 뜨라고 했더니 해가 지지 않고 조금 그 자리에 멈춰서 비치고 있었다고도 한다.[8] 천도 자체는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고베는 키요모리 '''사후 800년이 지난''' 2016년 지금도 일본의 국제무역항으로써 번영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키요모리의 안목을 가늠할 수 있다.[9] 키요모리와는 배가 달랐고, 생모가 죽은 자기 아들 이에모리와 닮았다며 요리토모의 목숨을 구명해 줄 것을 키요모리에게 부탁했던 것도 있어서 요리토모가 우대했다고.[10] 토키타다 이 사람은 헤이케가 서쪽으로 낙향할 때도 동행했지만 단노우라 전투 때 포로로 잡혔고, 삼종신기의 하나인 신경(神鏡) 야타노카가미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보호했다는 점을 감안해 처형은 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