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겐의 난
1. 개요
保元の乱
1156년 7월 헤이안 시대 말기 황위 계승 문제와 후지와라 섭관가(摂関家)의 내분으로 조정이 스토쿠 상황파와 고시라카와 천황파로 분열되어 교토에서 두 세력이 펼친 내전으로 '''이후 일본 무가 정권의 시발점이 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2. 원인
병약한 코노에 덴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후계자도 지정하지 못한 채로 사망하자 새로운 천황을 즉위시켜야 했는데, 스토쿠 상황은 코노에 덴노 시절 효에노스케노 쓰보네 여방(兵衛佐局 女房)에게서 얻은 외아들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1140∼1162)을 선황 도바 상황의 제2황후 후지와라노 도쿠시의 양자로 입적시켜[1] 시게히토가 즉위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후지와라노 도쿠시는 막상 코노에 덴노가 죽자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을 즉위시키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었는데, 이는 이대로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이 즉위하면 법적상 도바 상황의 양자라지만 생부인 스토쿠 상황이 멀쩡히 살아있는 이상 이를 빌미로 원정을 행하면 자신의 권력이 줄어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지와라노 도쿠시는 스토쿠 상황의 아내 후지와라노 쇼시 중궁(藤原聖子 中宮, 고카몬인, 키요코)의 아버지 후지와라노 다다미치를 끌어들여 아직 살아있던 도바 상황에게 고노에 덴노가 죽은 건 스토쿠 상황이 저주했기 때문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분노한 도바 상황은 그 말을 믿고 손자인 모리히토 친왕(守仁親王)을 후계자로 정하였다. 하지만 모리히토 친왕은 당시 너무 어렸기 때문에 도바 상황이 후지와라노 쇼시 중궁(타이케몬인, 타마코, 스토쿠 상황의 모후)에게서 낳은 제4황자 마사히토 친왕(雅仁親王)을 징검다리 차원에서 즉위시키니 그가 고시라카와 덴노였다. 마사히토 친왕이 즉위한 이유는 후계자로 지정된 모리히토 친왕의 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것을 일본의 황위계승법을 어기고 태상황(太上皇) 세력이 멋대로 저질렀기 때문에 크나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아무리 당대 일본이 장남, 장손 계승이 철저하지 않았다지만 엄연히 한자 문화권의 계승법을 따르는 나라였기 때문에 천황이 죽든 양위를 하든 후사를 즉위시키기 전에 반드시 천황의 후계자라는 의미로 황태자든 황태제든 책봉한 뒤에 즉위시켰고, 이는 섭관정치가 판치던 헤이안 시대에도 일관되게 지켜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지와라노 도쿠시 세력은 스토쿠 상황이 대처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마사히토 친왕(雅仁親王)을 황태자로 책봉시키지 않고, 곧바로 천황으로 즉위시켰는데 일개 종친이, 그것도 사실상 차기 계승자로 내정된 상황의 아들을 제치고 하루아침에 즉위한 것이었다. 스토쿠 상황과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에게는 그야말로 뒷통수를 맞은 셈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과연 마사히토 친왕(雅仁親王)이 천황으로 즉위하는 것이 적법한가?'라는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고시라카와 덴노와 후지와라노 도쿠시 세력은 해당 즉위를 옹호하는 황실의 가장 큰 어르신인 도바 상황이 죽자 자신들의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스토쿠 상황을 제거해야만 했다.
귀족과 무가들은 그렇다 쳐도 백성들이 스토쿠 상황을 동정한 이유는 스도쿠 상황의 신세가 불쌍한 것도 있지만, 권력을 위해 정통성 없이 즉위하고, 전쟁을 일으켜 반대한 상황을 폐서인하는 동시에 유배조치를 내린 고시라카와 덴노 세력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뒤 단종복위운동 세력을 모조리 죽이고 단종을 죽인 세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3. 진행
고시라카와 덴노의 즉위가 워낙 논란거리였던지라 당대 일본의 귀족과 무가들은 스토쿠 상황을 지지하는 세력과 신 천황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이 상황에서 후지와라노 도쿠시와 후지와라노 타다미치는 스토쿠 상황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고시라카와 덴노는 모병을 금지시켰다. 그러자 위험을 느낀 스토쿠 상황은 후지와라노 쇼시 중궁(타이케몬인, 타마코)이 낳은 제2황녀 조사이몬인(上西門院) 무네코 내친왕(統子内親王) (1126-1189)의 처소로 도망쳤다.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 고시라카와 덴노의 세력과 스토쿠 상황의 세력은 자신들을 정통성으로 받아들이는 무가를 용병으로 고용하게 되었다.
1156년 7월, 신 천황파가 먼저 공격하자 상황파에서 대응하는 것으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지휘층은 황족과 귀족이었지만 전쟁을 이끌고 나간 것은 이들이 고용한 무가였는데 겐케와 헤이케가 양분된 채 전쟁이 벌어졌다.
7월 10일 스토쿠 상황의 편을 든 무가들이 병력을 이끌고 그를 찾아왔다. 스토쿠 상황쪽에서는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부탁했지만 키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천황 쪽을 편드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7월 11일 천황파의 군사들이 상황파의 군사들을 격파하고 상황의 거처였던 시라카와후쿠덴을 불태웠다.
7월 13일 스토쿠 상황은 친동생이었던 카쿠쇼 법친왕(覚性法親王)[2] 을 찾아가 중재를 부탁했지만 카쿠쇼 법친왕은 거부했다.
결국 미나모토노 시게나리에게 스토쿠 상황이 붙잡히면서 암자에서 감시를 받다 시코쿠에 유배되는 것으로 전쟁은 끝이 났다.
4. 결과
패배한 스토쿠 상황은 폐서인되어 시코쿠로 유배되었으며[3] 전쟁에서 패배한 진영의 무사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5. 전후
호겐의 난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무신정권인 헤이케와 가마쿠라 막부 시대로 접어드는 원인이 되었다. 이번 전쟁에서 실제로 싸운 건 겐케와 헤이케뿐이었기에 당연히 전쟁의 공신이 된 이들은 군사력을 쥔 무가였다. 이들의 세력이 커져서 정계에 진출하자 후지와라 섭관 정치와 원정(院政) 정치가 무너지고, 무신정권 시기로 접어들었다.
[1] 헤이안 시대에는 조선과 달리 어머니의 신분이 높아야 즉위하는 게 가능했는데 효에노스케노 쓰보네 여방(兵衛佐局 女房)은 무관 미나모토노 유키무네(源行宗)의 양녀였지만 당시만 해도 무관은 권세를 지닌 집단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땅한 뒷배가 될 수 없었고, 스토쿠 덴노는 자신이 원정을 행하고자 의붓어머니 후지와라노 도쿠시의 양자로 자신의 아들을 입적시킨 것이다. 후지와라노 도쿠시의 아들은 제8황자 나리히토 친왕(体仁親王) 하나뿐이라 다른 아들이 없어서 제2황후는 이를 받아들였다.[2] 출가 전에는 제5황자 무토히토 친왕(本仁親王)(1129-1169)이었다.[3] 사누키로 유배되어 한동안 사누키인(讃岐院)이라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