탓수타 마루 호 침몰 사건

 

일본도시전설.
일본군의 화려한 병맛전설과 삽질로 전선이 악화일로로 치달아 결국 항복을 선언하기 직전, 부산항에 '탓수타마루' 라는 이름의 수송선을 띄워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군 각료들과 장성들을 본국으로 송환키로 했다. 이 중에서는 난징 대학살을 지휘한 책임자인 요시모리 장군이나 그 유명한 이시이 시로의 731부대의 중 책임자 등등도 끼여있었다.
이러한 수송작전의 정보를 들은 미군은 프랭클린 함장이 지휘하는 잠수함으로 격침시키는 작전을 시행한다.
그런데 어뢰로 격침시키기 전, 수천개의 불빛이 나타나 배를 휘감았고 그리고 침몰되기 직전에는 더욱 그러한 불길이 기승을 부려 심해로 배가 가라앉을 때는 침몰되는 배를 따라 바닷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추측에 따르면 이러한 불빛들은 이들에게 희생된 원혼들.
당시 조선이나 만주에 남아 있던 일본군 장성들이나 조선 총독부 인사들은 38선을 경계로 소련군과 미군에 항복했고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갔으니 단순한 도시전설이다. 태평양 전쟁이 말기에 접어든 1945년에는 미군의 잠수함과 비행기가 조선까지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정기적인 부관연락선도 통행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아무리 멍청한 일본군이라도 주요 인사들을 한타에 쓸어버릴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탓수타 마루라는 배는 실제로 있었다. 원래 이름은 타츠타마루(龍田丸)[1]로, 미츠비시 중공업에서 건조하고 일본우선회사에서 운영하던 태평양 횡단 여객선이었다. 선체 178m에 만재배수량 16,975톤으로 1929년에 진수하여 1930년에 취항하였으나, 태평양전쟁으로 징집되어 수송선으로 사용되다 1943년 2월 8일 미쿠라지마 동쪽 42마일 해상에서 격침되었다. 어찌되었건 대한해협에서 일본군 고위 장성을 수송하다 침몰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영문 위키 참조
또한 중국 중부방면 총사령관은 마쓰이 이와네였으며, 요시모리라는 장군은 실제로 없었다. 아마도 윤봉길의 의거에서 폭사한 시라카와 요시노리의 오기일 듯. 또한 마쓰이 장군은 원래 중국군의 항복을 받고 신사적으로 입성해서 민심을 회유할 작정이었으나, 와병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아사카 황자의 독단으로 모든 포로를 학살하라고 명령함으로써 벌어진 것이 난징 대학살.[2]
대한해협에서 침몰한 배로는 1943년 10월 5일 부관연락선 곤룬마루호가 있다. 다만, 조선에서 일본으로가 아닌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던 중이었고 혼령이나 원인불명이 아닌, 미군의 무제한 잠수함전에 따라 잠수함 USS 와후에 의해 격침된 것이다.
정 반대의 사건은 있다. 아오모리에서 출항해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환하는 조선인을 태우던 일본 해군 소속 '우키시마마루'라는 수송선이 교토 마이즈루 항에서 폭발, 침몰하여 승객 전원이 폭사한 사건이 있었다. 왜 침몰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며, '''일본 해군이 고의로 폭발시켰다'''는 정황이 20세기 후반 들어서 보고되고 있는 중이다. 자세한 것은 우키시마호 사건을 참조.

[1] 'Tatsutamaru에서 tsu를 잘못 읽어 Tat-su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2] 마츠이는 이에 대해서 '내 부하들은 후회할 짓을 저질렀다'고 한탄했으며, 요식적으로나마 포고문으로 중국인에게 사죄하고 추도식을 치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쓰이 장군은 전범재판에서 학살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아사카 황자는 전후에도 살아남아 골프로 소일하는 삶을 보냈다. '''황족이라는 이유로'''. (아이리스 장,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