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이 시로
1. 개요
3,000명이 넘는 민간인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자행한 731 부대의 부대장이자 제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이다
당시 계급은 구 일본 군의(軍医)중장.[1]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극악무도한 생체실험을 자행해서 "죽음의 천사"로 악명높은 요제프 멩겔레, 각종 매독 임상실험을 진행한 존 커틀러와 더불어 악명높은 인물. 731부대의 부대원들과 더불어 스스로 학도(学徒)의 칭호를 내다 버린 자이나, 전후 미국의 묵인 아래 처벌 없이 큰 부와 권력을 누린 인물이다.
진주만 공습 후 진행하려던 생물학전 무기 개발 계획에도 참여했으며 작전명은 체리블라썸 엣 나이트 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작전은 취소되었다.
2. 초기의 활동
일본의 치바 현에서 태어나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규슈대학 의학부에서 미군 포로에 대한 생체실험을 자행했다는 말이 있는데[2] 아이카와 사건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사건은 큐슈대 의학부 인체해부 사건에선 자그마치 실험을 명령한 해군 장교들이 산 채로 해부된 미군 병사들의 간을 먹었다는 혐의로 기소되기까지 했다. 참고로 이 학교와 관련해 윤동주 시인의 사망이 일어났단 설이 있다. 피 대용으로 바닷물을 주입하는 대체실험을 당했다는 것.[3][4]
그 후 1921년 육군병원과 육군군의학교에서 군의로 근무, 대학원 과정으로 교토제국대학에 복학해 세균학, 위생학, 병리학을 연구한다.
참고로 이곳 터에서는 89년, 100여구의 정체불명 인골 더미가 발견되었고 그 상당수에 드릴, 톱 등의 흔적이 남은 상태였다. 이시이는 나중에 이곳에서 교관으로도 근무했다. 일본 측의 해명은 전시 사상자의 부상 상태 연구를 위해 메이지 시대부터 수집한 견본들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보기에는 미묘한 점이 많아서 일본 국내에서도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실제로 구미 각국에서도 유명인이나 여러 식민지 인종의 유골 견본을 보관하는 경우도 많아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성격은 지극히 이기적이며 권력욕, 물욕, 명예욕에 가득 찬 인간상이었다. 군에 입신한 후에도 군의관 계급이 중장까지로 제한된 것에 자주 불만을 터뜨렸다.(...) 군납 정수기 제조업체에 리베이트 받아먹다 걸려서 옷벗고 감옥에 갈 뻔 했던걸 육군 윗선에서 선처한 일도 있었고, 부대 예산을 착복하여 궁궐 같은 대저택을 짓기도 했다. [5] 그냥 볼 수 있는 부정에 찌든 군바리의 모습이지만 나쁜 놈은 더 나쁜 놈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이시이 시로가 나체로 기생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운행중인 비행기에서 검열삭제하는 인물로 과장되게 그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6]
1928년에 2년간의 해외 유학 길에 올랐고 거기서 1차 세계대전의 화학무기/세균무기에 대해 엄청나게 연구하였다. 그 덕택에 육군 대신인 아라키 사다오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일본 군부 내에서 생물학전 및 화학전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전문 연구소가 다수 수립되었다.
여기까지만 요약하면 구 일본군 중에선 그나마 상대적으로 평범한(?) 작자라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어디까지나 그 이후의 행적을 빼면.'''
3. 731부대에서의 행적
이시이 시로가 처음 사령관으로 부임한 193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731부대, 즉 관동군 방역급수부는 평범한 방역 및 급수 전문 부대였다. 사실 전쟁, 특히 현대전에서 보급 문제는 전쟁의 성패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그 중에서도 식량과 급수 문제는 절대 간단히 해결되지 않는다. 현지 약탈을 통한 보급 조달을 현실화하려 한 개막장 일본군이지만 일단 이들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부대를 설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 물론 그럼에도 일제의 병참을 운영하는 수준은 매우 떨어져서 중국처럼 물이 좋지 않은 곳에서 싸운 결과 이곳에서 잃은 병사는 역대 일본군이 치른 모든 전쟁에서 전사자보다도 많았다. 중일전쟁 일본군 사망자 45만명중 상당한 숫자가 병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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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시이가 군의관으로서 올린 최초의 업적은 바로 '''1920~30년대 기준으로 대형의 설비가 필요하던 정수기를 대형과 동일한 성능을 지니면서도 야전에서도 간단히 운용할 수 있는 소형의 정수기를 일본 내 기술수준으로 만든 것'''이었다. 심지어 성능을 증명하기 위해서 장군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소변을 정수해서 직접 마시기까지 했다고(...)'''[7] 영어 아시는 분은 여길 참조.
사실 일본군의 방역급수부 자체가 다른 지역에 설치된 모든 방역급수부를 포함해서 생물학 및 화학전 연구 기능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관동군 방역급수부는 전장이 전장이라 '''현장에 물 공급하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그쪽 실험을 제대로 할 정신머리도 없는 상태였던 곳이다. 그러던 곳이 1941년 이후엔 바뀌었는데 그것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을 자행하는 부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실전 테스트 임무를 받은 방역급수부는 몇 곳 더 있으나 실질적으로 개발 및 야외임상실험(즉 실전 테스트) 이전 기초 실험장으로 활용된 곳은 이곳 뿐이다.
당시 연구원들은 실험 대상을 마루타라고 명명했으며 이들이 지르는 일체의 비명이나 신음은 깡그리 무시하라고 세뇌를 받았다 한다. 세뇌 과정 중 가장 엽기적인 것은 마루타로 잡혀온 이들 중 가장 반항이 심한 사람을 1명 골라서 '''무조건 때려죽이도록 강요'''했다는 것. 공범 의식을 심어서 함부로 고발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형적인 수법.
731부대를 통해 희생된 무고한 민간인의 수는 10,000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대다수는 중국인이 차지했다'''. 자세한 것은 731부대 항목 참조.[8] 참고로 생물무기도 만들었는데 이것까지 합치면 무려 '''50~60만명'''이 넘는 이들이 희생당했다는 추정치도 존재한다.[9] 그러나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KBS에서도 나온 묵덴 실험의 경우 수용소 자체가 중립국에 보여주는 선전 수용소라는 점, 또한 묵덴에서 했던 의학적인 조사에 연합군 포로 군의관이 참가했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가검물 검사를 생체실험으로 오해했다는 설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후쿠오카 등에서 벌어진 실제 실험의 죄를 묵인할 수는 없다.
상세한 만행에 대해서는 731 부대 참고.
4. 전후의 행적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짓을 족족 해댄 탓에 비록 731부대는 아니지만 다른 곳에서 행해진 미군 포로 대상 인체실험 사실이 전범재판정에 보고되자 검사들이 처음에는 뻥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왜냐하면 의학적 상식을 가진 인간들이라면 하지 않았을 실험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해군의 경우엔 '''물로 석유를 만든다'''는 사기꾼 말에 속기도 했다니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10][11]
게다가 준비해둔 생물학병기는 소련군의 침공에 대비한 것이었음에도 실제로 침공해올 때가 되어선 관동군 자체가 지리멸렬하여 생물학전을 감행할 상태가 아니었다. 생물학병기로 준비된 차량만 신품 포드 차량으로 80대가 넘었다고... 결국 퇴각 과정에서 전부 자폭 처리되었다.
생물학전 및 화학전의 상식은 사실 무기가 아니라 '''보호수단부터 만드는 것'''인데 이런 법칙은 생각보다 잘 안 지켜져서 생물학전은 몰라도 적어도 화학전은 최초의 실행 사례였던 1915년 이프르 전투 당시 저지른 독일군도 보호수단은 만들 생각 않고 일단 뿌리기부터 하고 봤다. 사실상 2차 세계대전 시점에 있어서 독일이나 일본이나 생화학전은 무기가 있는데도 보호수단이 없어서 보복에 대응하기 힘든 탓에 쓸 생각을 못한 것. 또한 만만한 민간인 대상 작전에선 두 나라 모두 거의 대놓고 생화학전을 벌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독일도 파르티잔 소탕 및 농성전 진압에서 신경가스 및 생물병기 사용이 사실상 거의 사실로 밝혀져 가는 단계.
더구나 실제로 생물학전을 벌이려고 해도 제대로 생물학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무기체계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지도 못했다는 것이 더욱 안습이다. 저렇게 사람을 변태적으로 죽이는 데 열중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도무지 예방 및 치료법이 확실치 않은 병만 무기로 삼으려 들은 탓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뭔가 시도는 했어도 실제로 만들어내는 영역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던 것. 특히 731부대가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페스트는 '''아직도 안전한 백신이 없다.''' 치료에 쓸 만한 약품조차 1950년대가 되어서야 미국에서 처음 개발됐으니 안습이라면 안습.
병원균을 전투기에 실어 떨구려고 했는데 처음에는 이걸 폭탄에 담았다가 폭발의 열이 살균 작용을 해서 그야말로 말짱 도루묵이 되는 일이 발생하자 도기에 세균을 담고 이걸 전투기로 폭격하는 발상을 했다. 다행히 실제로 쓰이지는 못했지만.
포로들에게만 이런 야만적인 짓을 자행한 것도 모자라, 만주에 거주하는 중국 민간인들을 상대로도 페스트균 살포 등을 저질러 수만 명이 희생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일본군도 꽤 죽었었다. 그리고 마루타는 포로들만 있지 않았다. 미성년 샘플이 필요해서 납치해오는 경우도 있었고 일거리를 구해 주겠다는 말에 속아서 온 걸인들도 많았다고 한다.
4.1. 그간의 통설
귀국 후 '''전범 추적을 피해''' 자기 장례식까지 치르고 가명을 써가며 은신했고 기회가 닿자 미 점령군 당국에 부하를 보내 전범 면제의 대가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세균전 자료 일체를 미군에게 넘긴다. 이시이 시로는 미국에게 자신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이 자료들을 소련에 준다고 협박했다. 실제로 마루타의 창시자이자 100부대 부대장인 다카하시 다카아쓰는 소련군한테 끌려가 잔인한 고문을 당하고 혹사당하다 최후를 맞이했고, 이외에도 상당수 전범들이 사형 내지는 종신형을 선고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살 길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부하들도 정상은 아니였는지 이를 기회로 이시이를 따돌리고 자기들끼리 점령군과의 거래를 독점하고서는 일본 의학계의 중진으로 발돋움하여 '''일본 녹십자 (ミドリ十字) 사'''를 만들어 명예와 돈을 거머쥐고 고위층으로 떵떵거리며 살았다. 그러나 녹십자사도 시작부터 임상을 진행하는 와중의 잡음으로 비난을 받았으며, 결국 1980년대 후반 '''혈우병 치료제에 AIDS 환자의 혈액을 사용''', 일본 내 혈우병 환자들 '''4,500여명 중 무려 2,000여명'''이 줄줄이 AIDS에 걸리는 사상 최악의 병크를 내지르고야 말았다.
1998년 일본 녹십자는 인수합병의 형태로 요시도미 제약이라는 회사에 합병되고 모든 기술은 요시도미 제약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기업이 웰화이드라는 기업이며 또 이 웰화이드는 후에 미쓰비시 화학의 자회사인 미스비시 도쿄제약으로 합병되는데 이리하여 탄생된 기업이 미쓰비시 웰파마다. 이후에는 다나베 제약과 합병해 미쓰비시 다나베 제약(주)가 되었다. 참고로 이 기업은 한국 지사도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731부대는 명맥을 이어가고 또 돈을 벌어 지금은 엄청난 대기업으로 발전'''했다. 한국 녹십자와는 혈액관련제재의 기술협력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일본 녹십자가 망하자 협력했던 지분은 한국 녹십자가 다 챙겼다고 한다.
그에 비해 이시이는 전쟁 전에 착복한 재산과 전후 고향에서 벌인 사업으로 번 돈으로 엽관과 매수에 공을 들여 어떻게든 옛날의 영화를 누리려 했다. 그가 했던 사업이란 매음굴을 겸하는 숙박업소와 실험용 흰쥐 농장이었다. 그런데 일본 쪽 위키피디아에서는 단순 매음굴이 아닌 '뭔가 다른 것을 했다'고 나와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명확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일본 왕의 항복선언과 함께 전쟁이 끝난 후 이시이는 존재 자체가 일본 의학계의 흑역사였기에 옛 부하들에게 철저히 무시당했다. 이렇게 한 번 동료들에게 버림을 받고 나서는 회개를 했는지 개신교로 개종하고 윤락업소 경영과 병행해서 동네 주민들에게 무상 의료 행위를 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위법으로 이시이의 의사 면허는 1945년에 박탈됐으므로 걸리면 감옥에 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개신교로 개종한 후 윤락업소 경영은 모순적 행동'''이다.
어찌되었든 그는 결국 실의에 빠진 채 미군을 상대하는 윤락업소를 겸하는 여관 주인 노릇을 하며 살다가 67세에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어쨌든 이 자가 한 짓은 전범재판에서 무조건 사형이 선고될 중죄였기에 이렇게 천수를 누렸다는 사실 자체가 미군과의 모종의 거래, 그리고 그 대가로 이어지는 신변 보호를 증명한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4.2. 진실
그런데 2014년 1월 교토대 의학부 도서관에서 발견된 1960년 2월 콜레라균 연구를 주제로 한 박사 학위 논문에 '''지도교수로 이시이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어''', 종전 이후 사망하기 직전까지 자국에서 의학계의 원로로 대접받으면서, '''731부대의 반인륜적인 행위로 얻어진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학계에 적용시켰던 것'''으로 밝혀져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즉 위의 '''매음굴 운영과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는 정보는 이시이가 여전히 의학계에서 떵떵거리고 있는 사실을 외부에 은폐시키기 위한 역정보였던 것이다.'''
731부대에는 일본의 최고학부를 졸업한 엘리트 의사나 과학자가 다수 있었고, 이들은 전쟁 후에 전범 기소를 받지 않은 채 각 대학으로 돌아가 일본 의학계의 중진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70년대 약해(薬害) 에이즈 사건[12] 으로 피고가 된 녹십자 제약회사의 창시자는 시로의 최측근이었던 나이토 료이치이며, 그는 731부대장을 역임한 바 있는 기타노 세이지를 고문으로 두고 있어서, 731부대와 그 연속성을 찾아볼 수 있다.
참고로 '''731부대 관련자 중에 전범 처리된 사람도 거의 없고 그 극소수도 처벌은 극히 가벼웠다'''. 1945년 소련군은 만주 작전 때 이곳은 점령하고 731부대 관련자를 체포하였지만 이미 수뇌부는 일본으로 튀었고 일부 스태프만 소련군에 체포되어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 넘겨졌으나 이들은 강제노역형을 살다가 소련-일본 수교 협상 때 모두 풀려나서 일본으로 돌아온다. 일본으로 도피한 이들은 미국에 실험 데이터를 넘기는 조건으로 사면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
일본으로 도망친 731부대 고위 관계자들은 승승장구했다. 모두가 그러지는 못했고 이시이의 함구하는 명령을 따라서 군인연금을 신청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소년병 같은 경우는 학력도 인정 못 받았다. 그런데 특히 '''교토대학 의대 학장을 지낸 인물도 731부대 출신'''이라는 것은 충격과 공포. 그의 이름은 '''요시무라 히사토'''. 이시이의 대학 후배이자 동상#s-2 연구를 했으며[13] 이후 교토대학 의학부 학장을 지냈다.
더구나 '''731부대는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안전하게 귀국한 사람이 많은 만주 주둔 일본군 중에서도 인원 손실율이 특히 낮은 부대'''라는 점에서 더욱 사람의 공분을 자아내게 한다. 외국에서만이 아니라 '''관동군 출신자들 사이에서도''' 비난이 쏟아질 정도. 심지어 그들의 전범 혐의 노출을 막기 위해 안전 철수를 명령하고 직접 편의를 봐주었던 관동군 참모장교조차 전후에 "'''내가 도와주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릴 만큼 자기네 안전만 챙긴 놈들'''" 이라며 비난해댔다.
여담으로 731부대와 한국은 인체실험 희생자 외에도 의외의 분야에서 악연을 가지고 있다. 바로 유행성 출혈열[14] 의 매개와 감염 경로의 규명 과정으로 이는 731부대 관련자가 미군의 위탁을 받아 연구를 실시한 결과이다. 그러나 역시 치료법은 고사하고 병원체를 발견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저 기본적인 예방수칙 하나만 정리하는 데 성공한 정도이며 이 정도는 이미 미군 중 상당수는 이런 예방수칙이 나오기 전에 어느 정도 기본적인 대책을 수립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무능했다는 말.'''
당대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타바이러스에 의한 유행성 출혈열은 미국 본토, 특히 '''서부의 풍토병'''이기도 하며 많은 원주민 부족들이 이 병의 예방을 위해 쥐를 피하거나 보는 족족 죽이는 관습이 있었다. 한국전에서도 관련된 조치가 일선부대 병사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오히려 731부대 관련자가 미군에 협조했던 탓에 "중국과 북한 상대로 미국이 세균전을 벌였다!"는 공산권의 선전에 철저하게 말려들어 국제적으로 욕만 먹었고 지금도 계속 구설수에 오르고 있으니 득보다 실이 훨씬 많았다. 다만 부분적으로는 실험했다는 징후도 있으나 구두증언밖에 없었고 증언 당사자가 중국군의 포로심문 과정에서 진술한 것이 전부로 거의 전원이 송환 후 이를 부정했다고 전해진다. 앞서 정리되었듯이 병원체를 규명하지도 못했는데 그 바이러스를 사용해서 세균전을 했다는 말이 이상한 것이다. 쥐의 사체를 폭탄에 실어 투하했다는 기록은 없다.
5. 회고
이시이 시로는 1955년 12월 교토 대학 때의 지도교수였던 기요노 겐지의 장례식장에서 이시이 기관의 설립되기까지의 경위와 규모, 목적 등에 대해 술회하였다.[15]
이를 통해 정리해보면 대학 이상의 규모와 기동력을 가진 연구기관을 창설하여 운영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고 324개의 연구소를 갖추고 일본을 대표하는 의학자, 과학자들이 참가한 세계 최대의 생체실험센터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패전으로 야망이 좌절되고 생체실험 등에 대한 것이 알려져 비판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언급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패전으로 연구나 실험이 중단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만 드러나 있다.“그래서 육군이 여러 차례 회의한 결과 결정하여 기온의 변화, 환경이 다르므로··· 하나는 만주의 북단으로 가면 좋겠다는 것이어서 결국 연구소를 그곳에 두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계속 발전하여 우선 전쟁터가 4천 킬로미터나 넓어져··· 1년 내내 동시에 계속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우선 장병의 신체를 보호하고 사망률을 낮추려는 국가 백년의 계획을 세울 것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육군군의학교에 연구실을 만들었고 다음으로 만주는 하얼빈에··· 또 남지는 중산대학을 중심으로 그 외 수차 연구실을 만들어 실시하였고 결국 324개의 연구소를 만든 겁니다. 그 결과 전염병 및 전염병 사망률이 낮아져 대장성이 매우 기뻐하여 그렇다면 계속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하얼빈에 큰, 그러니까 마루 빌딩의 14배 정도의 연구소를 만들어 주었고 그 안에 전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었습니다. 모든 종합대학에 연구소가 만들어지고 거기서 열심히 연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 가장 주력하신 것인 인적요소입니다. 각 대학에서 가장 우수한 교수 후보를 모아 주셔서 여기 계신 이시가와 교수[16]
, 그리고 도호쿠대학의 오카모토 교수[17] 그 외 십여 명의 교수진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대동아의 전면에 걸쳐 이 민족선 방어의 제1차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련이 왔기 때문에, 패전 때문에 부대는 폭발하고 모두 태우지 않을 수 없었고 비운으로 끝난 것입니다.”
또한, 저 정도 수준의 시설과 그걸 굴릴 인재들을 1930년대 후반 당시 일개 대좌였던 이시이 시로 한 사람의 지휘와 총 책임하에 만들고 모았다는 것도 넌센스... 저 연설에서도 짐작가능하겠지만, 생화학전 준비와 그에 따른 생체실험 프로젝트 자체가 전 일본 군부와 일본 의학계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일부 수뇌부와 이시이 시로 등의 핵심인물 몇이 사바사바해서 만든 극비부대는 절대로 아니었다. 일본 의학계와 군 전체가 저 비인간적인 활동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다.
6. 여담
전후 미군은 '동물실험으로 얻을 수 없는 자료'에 눈독을 들여 731부대 출신 인사와의 사법거래를 진행하고 이들의 신변을 보호했다. 또한 이는 한국전쟁 시점에 미국에 대한 이중잣대로서 공산권의 좋은 선전거리가 되어버렸고, 때문에 미국은 이들을 뒤늦게 처벌했다간 그동안 저지른 일에 대한 긍정이 되어버릴 상황에 놓인다. 때문에 미국은 이러한 의혹을 전면 부정하면서 더더욱 이들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던 것. 실제로 미군이 보호한 관련자들이 살아서 일본 의료계 중진으로 자리잡은 것이 가장 큰 문제. [18]
731부대와 6.25 그리고 한타바이러스에 관한 루머는 수십 년에 걸쳐 퍼쳤는데, 이것은 이시이 시로와 731부태 간부들이 세균무기와 인체실험 자료를 미군정에 넘기고 처벌되지 않은 것, 한탄바이러스가 속한 한타바이러스속은 북반구 전역에 걸쳐 있지만 731부대는 전세계 기준으로는 한반도와 가까운 만주에서 활동했던 것, 그리고 이후 이들이 한국전때 한국에 방문했다는 기록과 미군에게 자문을 한 것이 엮여 나온 것이다. 니덤 보고서를 예시하는 뉴스도 있지만, 그 보고서에는 세균무기와 관련한 내용을 모았지만 미군이 세균무기를 만들어 한국전때 사용했다는 물증은 없다. 당시 세균전을 의심한 중공군이 포로로 잡은 연합군 조종사에게서 얻었다는 진술이 유일한데 이것은 중공군이 심증을 바탕으로 가한 고문의 결과로 간주된다.[19] 당시 전선이 교착되어 격전이 벌어지던 중부지방에서 UN군과 중공군을 괴롭혀(연합군 900명 사망 발표, 중공군 미발표) 양측이 서로 세균전을 의심하고 비난하게 한 괴질은 한국 중부지방에 고유한 토종 바이러스인 한탄바이러스에 의한 유행성 출혈열로 결론났는데, 20년도 더 지난 1970년대 중반에 이호왕 박사 연구팀이 세계 최초로 이 계통 바이러스를 분리해 명명했다.
때문에 미국은 이후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때로 일본을 강도높게 비난하는 와중에도 731부대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게 된다.
슬레이어의 앨범 World Painted Blood에서 2번째 트랙 'Unit 731' 이 이 사람과 731부대를 까는 노래이다. 주목할 점은 Reign In Blood에 수록된 'Angel of Death' 와 묘사가 거의 비슷하다는 것.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시이 시로가 어째서 처벌을 받지 않았는가, 라는 주제의 방송을 했다.
헤로인 생산을 위해 만주에서 양귀비꽃을 경작하던 일본 양대 재벌중 하나인 미쓰이 그룹과 연계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
객관적으로 인선능력은 좀 있었던 듯하다. 731부대의 마루타 관리는 이시이 시로의 고향에서 데리고 왔는데[20] 이시이가 죽은 후 수십 년 후에 작가가 증언을 요청하자 "이시이 시로 '각하'의 명예를 위해서 대답할 수 없다" 고 했다. '죄를 부인한 게 아니라'. 학살범들은 보통 자신의 죄를 부인하거나 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한다는 것을 봤을 때, 그토록 많은 사람이 근무했지만 증언은 전부 손 꼽힐 정도라는 것도 인선능력의 결과라면 결과. 그런 한편으로는 자기가 원하는 인재는 어떻게든 부대로 데려오려고 무리한 짓도 많이 했는데, 진청민의 책 "일본군 세균전"에 따르면 그렇게 해서 억지로 데려온 의학자가 자기 뜻대로 행동하지 않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일도 있었고, 해부담당자인 고등관 하나는 생사람 해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임무에 엄청난 회의를 느끼다가 이쪽은 그나마 윗선에 빽이라도 있어서 다른 곳으로 재 발령이 난 뒤, 염전주의자가 된 예도 있었다고 한다. 뒤끝도 좀 있는 편이라서 자기 비리 밝힌 중좌 하나를 남방전선 사지로 보내 전사하게 만든 일도 있었다.
사생활이 조금 많이 더러워서 731부대원들 사이에서도 계집질한다고 말이 많았다는 말도 있다.
민간인 여성을 납치하여 음부를 치아로 물어뜯은 뒤 마루타로 취급하였다.
참모본부 참모와 세균전에 대한 토론을 하다 민간인들 다 죽일 셈이냐면서 한소리 들은 일화도 있다. 이 참모의 정체는 그 유명한 도미나가 교지다. 그 무능한 졸장 조차도 비판할 지경이니 이시이 시로가 얼마나 답없는 작자인지 알 수 있는 이야기. 애시당초 도미나가 교지는 무능하고 허세 심하고 비겁하기는 했어도 사람 목숨 우습게 알고 행동하는 악마는 아니었지만서도...
731부대와 연관이 깊은 교토대학에서는 2014년 의학부 경지내에 완공된 의학부자료관에 731부대와 이곳에서 행해진 실험에 대한 판넬을 전시하고 있었으나, 이후 이 판넬은 소리소문 없이 철거되었다. 학교측은 단순히 통상적인 전시물 교체라고 설명했지만, 일본 의학계에서는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칭찬하고 있었더니 뒤통수를 맞았다며 비판.
7. 그 외 매체의 등장
전략인간병기 카쿠고에서는 주인공의 4대조인 하가쿠레 시로로 등장한다. 물론 작가가 작가니 만큼 스토리는 안드로메다지만 잔혹한 인간 생체실험을 했다는 것은 동일하게 나온다.
어떠한 의미로는 제츠 라아스 브라키오 같은[21]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어떤 악랄한 짓도 태연히 하는 악마적인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모델격인 인물이다.
대체역사물 일 베티사드에서는 일본이 안 미쳐돌아가서 계획을 지원 안 해주자 이쪽에서 군국주의로 미쳐돌아가던 중국으로 가 한국의 독립운동가'''(중국에게서)'''들과 반정부인사들에게 인간 생체실험을 한다. 거기다 피해자를 부르는 명칭도 중국어로 통나무라고 부른 걸 보면 지원국이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뀐 것만 빼고 현실과 동일하다.
정현웅의 장편실화소설 마루타에서는 키가 180cm인데 당시 기준으로는 거인이다. 여자를 엄청나게 밝히는데 특히 음모에 사족을 못쓴다.[22] 부대 공금 횡령해서 자기 정부들에게 요정 차려주고 만주 여기저기에 만들어놓은 요정에 군의료용 비행기 타고 날아가서 셔터 내리고 즐기다가 온다. 하지만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 선생님을 놀라게 한 일화가 있는 등 천재이긴 했다는 묘사가 있다. 이 소설 최대의 악역이 이 사람의 조카로 나온 가공인물인 이시이 나가데 대위인데 이시이 나가데 대위의 보직은 마루타 사냥부대 총책임자이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잠시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웃기게도 자신을 군인이라기 보다 학자로 생각하며 다른 일반 군인출신들을 은근히 싫어하는 모습으로 나온다.[23] 다만 이 드라마에서 이시이 시로는 최소의 투입으로 최대한의 살생을 하는 방법론을 연구하는 걸 학자의 본분으로 알고 있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였고, 되려 무사집안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미다대위가 '세균전이던 가스전이던 그건 이미 전쟁이 아니다'라면서 군인으로서 나름 정정당당함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뭐 실존인물인 이시이 시로의 일생과 어록들을 본다면 굉장히 잘 고증한 셈....
8. 관련 항목
[1] 카를 게브하르트와 같은 계급이다.[2] 1945년 일본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 목격자 도노 도시오의 인터뷰[3] 다만 윤동주 시인의 최후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니 단정지을 수는 없다. 윤동주 시인은 옥중 병사한 것이 현재까지 정설. 윤동주 생체실험설이 제기된 유일한 매체는 윤동주의 시체를 인수하러 간 친척의 증언이다. (이 친척이 가수 윤형주의 부친이라고 윤형주가 밝혔다.) 죄수들이 '이름모를 주사'를 맞았다고. 특이한 건 사망한 윤동주의 시신을 일반적인 생체실험 희생자처럼 화장하지 않고 유족이 잘 가져가게 '''방부 처리해서''' 넘겨주었다는 것이다.[4] 윤동주 생체실험론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 연변 출신의 김학철 옹인데. 이 사람이 창작과 비평에서 나온 책에서 한 회고에 의하면 일제의 감옥은 고문과 굶주림, 질병에 의한 사망이 많아도 생체실험할 여력까지는 없었다고 한다. 생체실험이 아니라 어떻게든 처리해야 할 인물인 박열이나 일본 공산당 대표도 20년 넘게 살아남은게 제국 감옥이라는 이야기. 고작 4년형을 받은 조선인 죄수가 생체실험에 동원될 가치는 없다고 봤었다. 참고로 김학철은 태항산 전투에서 팔로군으로 참전했다가 생포되어서 종신형을 받고 일본본토에서 수감 중 해방을 맞는다. 육군 소장까지 오른 광복군 출신인 유해준 장군의 경우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이했다.[5] 물론 이 부분은 정현웅의 병크라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부대 예산 착복문제로 인사조치된 사건은 실제로 있었다.[6] 다만 계집질 심하게 하고 성욕이 비상식적으로 강한 호색한이란 이야기는 정현웅 소설에서만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다. 1960년대 말에 태평양전쟁을 다룬 5권짜리 책에서도 이시이 시로의 엽색행각이 이야기 된 걸 보면 뭔가 있기는 있었던 모양. 계집질하면서 게이샤의 음모를 뽑는 짓거리를 하는 모습은 중국 영화인 흑태양731 에서도 묘사된 바가 있다.[7] 영화 마루타에서는 자신의 소변이 아니라 어느 대령을 불러서 대신 소변을 하게 한뒤 정수된 소변을 본인이 마신다. 그리고 이런 광경을 본 대부분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당연스럽게도 경악한다.[8] 이시이 시로는 전후 도쿄 재판에서 마루타는 총 3,850명이며 조선인이 254명, 러시아인이 562명이고 나머지는 중국인이였다고 진술했다.[9] 심지어 이쪽은 의도하지 않은 관리부실로 인한 희생도 상당수인 점을 고려해보면 얼마나 어이없는 상황인지 알 수 있다.[10] 참고로 이 사기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대신'''이 "우리(집) 근처의 우물물은 대단한 것이라고 해요. 그 물이 가솔린이 된다고 합니다" 라고 말한 것을 해군의 높으신 분들이 "실험해 보자!" 라고 해서 발단이 되었단다.[11] 하지만 이 또한 이시이 시로의 전후 행적에서 보듯이 역정보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미국이 진작에 기밀해제 되었어야할 731부대원과의 거래와 실험자료들을 아직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12] 혈우병 환자들의 치료약에 에이즈에 오염된 혈액제제가 사용되어, 그 약을 복용한 혈우병 환자가 에이즈로 사망하는 일이 속출한 사건.[13] 추측일 뿐이지만, 어쩌면 이 인간의 동상 연구도 731 부대에서의 패륜적인 생체실험과 관련있을 지 모른다. [14] 한타 바이러스 및 서울 바이러스. 둘 다 1970년대 이후에야 발견되었다[15] (『고 기요노 겐지 선생 기념존문집』 제3집).[16] 병리학자로 731부대에서 해부반장 같은걸 하던 사람인데, 진청민의 책 '일본군 세균전'에 나온 바로는 그 일에 나름 죄책감을 느끼다가 윗선에 끈이 있어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다만 이 사람이 이 당시 57구의 해부 결과로 병리학 논문을 썼다.[17] 이인간은 도호쿠대에서 교토대학으로 옮긴 후 교토대학 의학부장까지 하며 오래 살다 죽었다.[18] 또한 알려진 것과 달리 731부대 관련으로 그들의 구명을 적극 추진한 일선 미군 간부들의 이름은 도쿄 재판을 전후한 시점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 추인 관련 문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이것 때문에 731부대의 존재와 그 임무 자체는 모든 것을 부정하기 바쁜 일본 우익들조차도 전혀 부정하지 못 하고 단지 생체실험만은 한 적이 없다는 강변에 그치고 있다.[19] 거기다 저 보고서의 주인공인 조셉 니덤은 훌륭한 과학사쪽 학자였을지는 몰라도 이념적으로는 사회주의 쪽에 많이 편향된 사람이었다.[20] 이시이 시로의 친형이 마루타 관리 책임자였다. 동물실험 책임자로 이시이 시로의 친동생도 있는데 이 쪽은 수의학쪽 전문가로 자격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형의 경우는 빼박 낙하산 인사...[21] 그의 마지막 마장기 갓초에는 '''사람의 뇌'''가 이식되어 있다.[22] 성관계때마다 음모를 뽑으면서 여자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성적인 자극을 느끼는 사디스트 취향이 있다고.. 참고로 저런 모습은 흑태양731에도 나온다...[23] 미다 대위에게 '공은 군인들이 세우고 나같은 학자 나부랭이는 쓸모없다는 거냐?' 라며 첫 부임부터 시비를 털었는데 미다는 여기에 '각하께서는 육군 중장, 군인이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라며 저 갈굼을 피해가긴 했지만 그 뒤로도 저 요상한 분류는 바뀌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