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카와 요시노리
[image]
白川 義則, 1869. 01. 24 ~ 1932. 5. 26
1. 개요
일본 육군의 군인. 관동군 사령관· 육군 대신· 군사 참의관.
백선엽이 창씨개명한 이름과 동일하다.
2. 설명
제1차 상하이 사변 당시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등을 역임한 거물이며, 러일전쟁에 참전했던 베테랑 군인이다.
동향 선배였던 아키야마 요시후루 장군과 무척 친한 사이였는데, 아키야마는 시라카와가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뒤에도 예전처럼 "시라카와,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 라고 놀리며 장난을 치곤 했다고 한다.
관동군 사령관을 지냈으며 1925년 11월, 봉천군벌의 궈쑹링이 반봉사건을 일으키자 본국의 명령에 따라 장쭤린을 도와 반봉사건 진압을 도왔다. 이후 육군대신으로 내각에 들어와 제남 사건의 개입을 제안했다.
제1차 상하이 사변 당시에는 확전되지 않도록 국제 협정을 지키라는 히로히토의 당부를 받고, 중화민국 육군 19로군을 격퇴한 뒤 공격을 계속하라는 참모본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정전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평가가 상당히 좋다.
시라카와가 육군대신으로 재임하던 시절, 관동군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와 철도대신 오가와 헤이키치가 결탁해 황고둔 사건을 일으키고 중국인 아편 중독자들을 매수해서 범인인 것처럼 조작했는데, 이를 위해 필요한 자금 3천 엔을 육군의 기밀비에서 조달해 준 공범이 바로 시라카와였다. 결국 시라카와 역시 제국주의와 일본 만주쟁취에 대동아 경영 이란 홱책을 동조한 장군이었던 것이다.
이때 당시 도사교[오늘날] 가 주축이던 만주의 독립군들을 토벌하는데 앞장선 친일군벌 장쭤린을 관동군에서 처단하여 독립군[1] 이 환호한 사실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서 이례적인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제1차 상하이 사변을 틈 탄, 1932년 3월 1일 만주국수립 이후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거행된 천장절 축하 행사에 주빈으로 참석했다가 김구의 사주로 윤봉길이 투척한 물통 폭탄에 맞아 무려 108군데나 상처를 입고, 12번이나 수술을 받았지만 회생하지 못하고 결국 죽었다. 이때 시라카와가 입었다가 108번 정도의 폭발물 상흔으로 피투성이가 된 군복이 지금도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되어 있다. 당시 군인으로선 그에 이은 차석 장교였던 해군중장 노무라 기치사부로 제독[2] 은 한 쪽 눈을 실명했다.
아들인 시라카와 모토하루는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를 나와 육군 항공대에서 근무했고 전후에 항공자위대에 입대하여 항공막료장에 올랐다.
3. 대중매체에서
1967년작 영화 <일본제국과 폭탄의사>에선 배우 송일건이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