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대학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난징에 관한 나의 마지막 기억은 죽어간 중국인, 죽어간 중국인, '''오직 죽어간 중국인'''이었다.”
AP통신 기자 예이츠 맥대니얼의 증언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
난징대학살을 고발하는 책자 「난징의 강간」에 적힌 글귀
1. 개요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난징에 진입하며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중화민국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중국인 포로들과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 지금까지도 중일관계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는 사건 중 하나로[5]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불명확하지만, 전후 일부 유골 매립지를 근거로 든 연구결과가 수만명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볼 때 최소 수만 명 이상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최소가 12만명[6] 이며 최대 추정숫자는 약 35만명 정도이다. 일본 학계에선 10-20만명 정도가 중론이며 프랑스에선 한 학자가 약 9만 명 정도가 살해당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다만 여기서 9-20만명은 난징과 주변 변두리 정도에 한정한 것이며 주변 도시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20~30만명은 난징 '시내' 학살 숫자가 아닌 난징 '근교와 진격 도중' 숫자도 포함한 것이며, 난징 한 곳에서만 저렇게 나오기는 힘들다. 혹여 나중에라도 넷 우익의 선동에 현혹될 수 있으니 주의하자.
2. 명칭 문제
중국에서는 난징 대도살, 영어로는 Nanjing Massacre. 일본에서는 '학살'이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고 '난징 사건'으로 불렸었다. 물론 축소, 은폐하려는 의도였다.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을 '오가사와라 사건'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하지만 근래에는 일본의 교과서에서도 '대학살'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야마가와 출판사의 상세일본사(詳説日本史)와 도쿄서적에서는 여전히 난징 사건(南京事件)이라고 부르지만, 데이코쿠서원은 난징 대학살, 기요미즈서원은 난징대학살사건, 야마가와 출판사에서는 상세세계사(詳説世界史)와 일본문화출판에서는 난징학살사건 이라고 부르는 등이다. 또한, 2006년의 중일수뇌회담의 결과로 진행된 '일중역사공통연구'의 논문의 일어판에서도 '난징학살사건'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3. 배경
1937년, 중일전쟁 시기 일본군의 난징점령 입성을 다룬 일본 아사히 신문 뉴스. 대부분의 전시 선전영화는 부대의 위민활동이나 대민지원 장면을 삽입해서 '''해당 지역을 해방시킨 해방군'''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상에는 '''민간인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킬 때는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시작해 빠른 시일 안에 주요 대도시를 점령하고 중국 국민당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속전속결이 기본방침이었다. 그러나 상하이 전투가 중국군의 거센 저항으로 예상보다 길어지고 결국 오송 전투에서 중국군 피해의 절반이나 되는 큰 피해를 입고서야 승리를 거두게 되자(중일전쟁 항목 참조), 일본군은 '''눈이 뒤집힐 대로 뒤집혀 참모본부의 불확대 방침도 씹고'''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으로 진군했다.
1937년 10월 9일 상하이가 함락된 후 국민당 수뇌 멤버들은 난징사수가 전략, 전력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중국군은 이미 직전의 상하이 전투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일본군 역시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피해가 극심했다. 하지만 전투막바지에 일본군은 타개책으로 중국군의 배후지인 항저우에 상륙하여 허를 찔렀다. 중국군은 급히 철수하여 포위섬멸 위기에서 벗어났으나 이 과정에서 전간기에 양성한 신식 정예부대를 비롯한 주력부대가 대타격을 입었다. 주력부대가 격파당한 상황에서 일본군을 저지하고 난징을 지켜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때 유일하게 탕성즈 한 사람만이 "난징을 필사적으로 지켜 생사를 함께하겠다."고 방어전을 주장해 난징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남는다. 11월 15일 장제스는 수도를 충칭[7] 으로 옮겨 철퇴하고, 12월 10일 난징에 남아있는 중국군은 일본군의 최후통첩을 무시, 이에 일본군은 난징 점령작전을 개시했다. 일본군의 맹공에 피해가 크게 누적되자 12월 12일 탕성즈는 3일 간의 휴전을 통한 명예로운 항복을 하는 대가로 중국군을 철수시키는 방안에 대해 장제스에게 제안했지만 장제스는 묵살했다.
12월 12일까지 난징일대의 중국군은 공세에 나선 일본군보다 수적, 질적으로 모두 열세인 상황이었다.[8] 방어군 총사령관인 탕성즈가 처음부터 난징 외곽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방어할 수 있는 여러 요충지역들을 스스로 포기하는 등 방어 전략을 잘못 수립한데다가 화력과 병력의 질적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장기적인 사수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결국 12월 12일 일본군은 독가스를 뿌려 중국군 방어선을 무력화시켰고 일본군 전차대와 포병대의 공격에 성벽이 무너지면서 방어선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결국 탕성즈는 그날 오후 5시에 회의를 소집, 전군에 퇴각명령을 내린 다음에 참모들과 함께 8시에 우한으로 달아났다. 사령관이 사라진 난징의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거나, 난징에 남아 계속 싸우거나, 난징을 어떻게든 벗어나는 등 완전히 와해된다.
양쯔강 주변은 살고 싶은 수십만 난징 시민들과 중국군이 아수라장을 이루었고, 일본군은 이들을 집중공격하여 무수한 인명을 살상했다. 12월 13일 오전 4시에 난징의 정부청사가 함락되면서 난징은 일본군의 수중에 완전히 떨어졌다. 자세한 사항은 난징 전투 문서 참조.
'''이 순간 탈출하지 못한 25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과 10만 이상의 패잔병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4. 참상
그 어떤 단어로도 난징의 참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위에서 두번째 사진의 검을 든 일본군 병사와 오른쪽의 일본군 병사는 자세히 보면 환하게 웃고 있다. 이 사진은 선배 병사가 후배 병사에 참수를 명령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며 이외에도 후배병사로 추정되는 병사가 참수된 희생자의 목을 들고 웃는 사진이 있다.
손쉽게 난징을 손에 넣은 일본군은 '''백기를 들고 항복한 국민당군'''은 물론, 패잔병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모자를 오래 쓴 흔적이 있거나 손에 굳은 살이 박힌 젊은 남자'''' 모두를 닥치는 대로 끌어모아 기관총으로 처형하여 시신을 양쯔강에 쓸어넣었다. 이들 중 과연 몇 명이나 패잔병이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애시당초 농업 내지 상공업으로 먹고살던 그 시대 중국인들 중 모자를 오래 쓰지 않았거나 손에 굳은 살이 안 박힌 남자가 얼마나 있었을까 싶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야만적이나, 나중에는 총알이 아까워서 칼로 난도질하거나 '''생매장'''까지 했다고 한다. 전후에 학살에 참가한 한 군인의 일기가 발굴되었는데,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 채로 묻어 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그리고 순순히 항복한 군인이나 일본군을 환영하는 민간인까지 보이는 족족 칼로 베거나 때려죽이는 등 참혹하게 살해하면서 달아나면 그건 또 그거대로 수상하다고 죽이고(...) 그러면서도 왜 중국인들이 일본인을 두려워하면서 달아나는지 알 수 없다는 말 따위나 쓰고 있다.(...)
난징 대학살에서 단일 규모로 가장 큰 학살은 무푸산 근처에서 일어났다. 난징의 북쪽, 곧 난징과 양쯔강의 남쪽 둑 사이에 있는 이 산에서는 5만 7,000명의 민간인과 중국의 전직 군인들이 살해되었다. 수많은 중국군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은 일본군에게 또 다른 문제였다. 난징과 그 주변에서 학살당한 전체 중국군 가운데 일부만이 무푸산에서 처형되었는데, '''이 일부 시체의 처리에만 며칠이 걸렸다.''' 시체를 매장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7천에서 8천구의 시체를 묻을 수 있는 커다란 구덩이를 팔 수 있는 곳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시체를 소각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일본군에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양의 연료가 없었다. 예를 들어 무푸산 학살 후, 일본군은 시체에 휘발유를 드럼통으로 부어 시체를 태우려고 했지만 불길이 시체를 재로 만들기 전에 연료가 바닥나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결국 대부분의 시체는 양쯔강에 내던져졌다. 애초에 학살을 안 했으면 이런 걸로 고생하지도, 연료를 낭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샤관(下关镇/Hsiakwan)[9] 으로 끌려 온 중국인 포로들이 강을 따라 한 줄로 정렬해 있는 것을 목격한 종군 특파원 오마타 유키오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 외에도 살아있는 사람에게 가솔린을 붓고 총을 쏘아 불을 붙이거나,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연못에 밀어 넣어 얼어죽게 만들고 일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총을 쏘기도 했으며, 이유없이 어린아이를 전깃줄에 목을 매달았다. 또한 장작더미위의 나무 기둥에 묶고 사람이 완전히 익을 정도까지 불로 태웠으며 소년에게 염산을 부어서 죽여버리거나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어 가지고 놀았으며, 100여명의 사람을 묶고 코와 귀를 잘라내었다는 증언들도 쏟아진다."첫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번째 줄의 포로들은 자신의 목이 잘리기 전에 앞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져 넣어야 했다. 살육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2,000명밖에 처리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이런 방식의 처형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탕! 탕! 탕! 방아쇠가 당겨졌다. 포로들은 강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강 건너편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징 밖에 있는 연못은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컬러 사진으로 찍었으면 더욱 섬뜩했을 것이다. 포로들에게 자기가 묻힐 구덩이를 파게하고, 포로는 그 구덩이 앞에 꿇어앉아 머리가 잘리었다. 많은 일본군은 칼 솜씨가 아주 좋아 칼이 내리치는 순간 머리가 떨어지고 몸은 저절로 구덩이로 떨어진다. 상해에서 난징까지의 도처에서 여자 음부에 대나무 작대기를 쑤셔 넣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상관은 우리에게 '''여자를 강간한 후 죽여야 한다. 되도록 때려 죽여라. 총과 총검으로 죽이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일본 종군 사진기자의 증언
주씨 할아버지 집에 일본군이 들이닥쳐 40세의 주씨 며느리를 강간했다. 그녀의 시아버지, 남편, 아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이 끝난 후 일본군은 60여세의 주씨에게 며느리를 강간하라 했다. 주씨 할아버지는 며느리 몸에 엎드려 그 짓을 하는 체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그를 마구 때리며 진짜로 하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자기 며느리를 강간했다. 다음, 그들은 17세 된 아들에게 어머니를 강간하라 명령했다. 아들도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박옥상, '남경대학살'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인 포로나 민간인들이 일본군의 총검술 연습이나 목베기 시합에 사용된 것. 여기서 일본 장교였던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가 '''100명의 목을 누가 더 빨리 베나 재는 시합, 다시말해 100인 참수 경쟁'''을 한 사실이 있었다. 더 기가 막힌 건, 당시 일본 언론에서는 무슨 스포츠 시합 중계하듯 이 베기 시합을 '''대서특필'''했다는 것. 다만 100인 참수 경쟁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참수된 100인이 '''당연히 적군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사를 쓴 것이었다. 이후 전범재판에서 증인으로 참석한 기자는 이들이 민간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전해듣고는 매우 허탈해했다. 심지어 이를 통해 진검으로 베는 기술을 연마한 잡것들도 있었다.임신 6개월의 19세 임산부 리슈잉은 일본군에게 배를 찔려 유산하고 얼굴에 18차례 칼을 맞았으며 37곳을 찔려 봉합했다. 이 일을 일본 사령관에게 항의 했지만 '어쩔 수 없다'라는 말만 들었고, 아사히 신문기자조차 '피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방임했다.
난징 대학병원 외과의사 로버트 윌슨이 환자 '리슈잉'에 대해 아내에게 쓴 편지
: 참고로 리슈잉은 천만다행으로 생존해서 난징대학살의 증언자로 활동했으며 일본 우익작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기도 했다. 2004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국내기사1 국내기사2
[image]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투 도중 적 군인의 목을 벤 것이 아니면 100% 전쟁 범죄니 두 장교 모두 당연히 전후에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당했는데, 사형이 확정되기 직전까지 무죄를 주장했다고 한다. 웃기게도 당시 기사를 펼치며 자랑하던 이들이었지만 이 기사가 증거가 되어 자신들을 사형시키게 되자 왜곡이라고 발버둥쳤다고 한다.100인 베기 초기록(엄청난 기록), 무카이 106 노다 105, 양소위 거기에 연장전.
당시의 실제 기사
이외 300인 베기에 도전한 다나카 군키치라는 범죄자도 있었다. 역시 전후 붙잡혔고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에 처해졌는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문에 실릴 때는 아주 자랑스럽게 큰소리 치던 이 인간도 자기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며 왜곡이라고 발버둥치다가 결국 무카이, 노다와 같은 날 총살당했다.
여자도 무사하지 못했다. 아니, '''더 심한 꼴'''을 당했다. 전후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들도 상당수가 저런 식의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반항의 기미가 보인다거나, 탈출을 시도한다거나, 성병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죽음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더 심하게는 특별히 이유가 없이도 학살당했다고 한다.
이때 수많은 여성들이 성폭행 당했는데 전후재판에 따르면 약 2,000명의 여성이 강간당했다.[10] 현재는 80,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숫자만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 '''산채로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고 유방을 도려내거나 팔다리를 벽에 못으로 박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지옥이자 어지간한 쇼크 사이트에서도 보지 못할 풍경. 이것도 모자라 상기했다시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딸을, 아들이 어머니를 강간하게 했다'''고도 한다.
관련 증언에 따르면, 아무 집이나 찾아가 어머니를 강간한 다음 울부짖는 딸과 함께 우물 속에 던져버리고 그 안에 수류탄을 던진다음 우물문을 막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의 악행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여자뿐만 아니라 '''어린 소년'''들도 닥치는대로 강간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펄 벅이 중국에서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에도 일본군들이 민가에 들이닥쳐 소년을 집단강간하는 묘사가 등장한다.
당시 난징에 있던 서양인들의 기록과 제보에도 처참할정도로 강간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게다가 '''일본 육군의 교범 자체가 민간인은 죽이고 그 지역은 모두 초토화하고 물자는 약탈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었고 집단강간을 대놓고 방조하기도 했다.''' 교범에다가 저런 소리를 한 학살에 참가한 제6사단장 다니 히사오는 물론 같은 이야기를 다른 장교들도 태연히 떠들고 다니던 것이 당시 일본 육군 내의 분위기였으니, 중국에 대한 멸시감+누적된 전쟁피로+교범에도 쓰여있는 학살과 약탈의 공인, 부조리로 가득찬 전근대적인 군복무로 인한 사병들의 억압된 불만이 한꺼번에 결합하면서 폭발한 것이 난징 대학살이다.
4.1. 난징 안전지대
당시 독일 나치스 당원이자 지멘스의 사원이었던 욘 라베가 주도해 난징에 남아있던 외국인 선교사, 기업가, 소수의 조계지 경비대 소속 독일 국방군, 외교관들과 같이 '난징 국제안전지대'를 설정한 것이다. 이는 난징 전투에 앞서 있었던 상하이 전투에서 프랑스 선교사가 만든 '상하이 안전구'를 본딴 것으로, 난징 사범대학을 중심으로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해 약 2~30만 명의 중국인들을 일본군의 만행에서 보호하는 피난처 역할을 했다.
자세한 것은 욘 라베 항목 참조.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치 부역 혐의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욘 라베 외에도 안전지대를 지킨 외국인들 중 상당수는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 진링 여자대학에서 여성들을 지키고 기록을 남긴 미국인 윌헬미나 보트린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건강을 크게 해쳤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 끝내 1941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일한 외과의사로 부상자들을 치료한 로버트 윌슨은 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평생 시력 저하와 발작, 악몽을 겪었다. 그 외의 사람들 중에도 발작 및 일시적인 기억 상실 등 정신질환 증상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흑역사에 가깝지만 냉전으로 서방 국가와 대립할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에선 1950년 신화일보 보도를 통해서 욘 라베를 제외한 서방 국가 인물들의 공로를 무시하고 오히려 서양인들이 일본군과 협조하여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중국인들을 일본군의 칼밥으로 던져줬다는 등의 악질적인 반서방 프로파간다를 퍼뜨리기도 했다. 다행히 냉전이 끝나고, 아이리스 장 등 난징 학살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들의 공로가 알려져서 현대에는 중국에서도 안전지대를 지킨 외국인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참고로 당시 안전지대 구축에 협력했던 선교사들 중에 조지 애시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인물로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주중 미국대사와 여운형을 접촉시킨다든가,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은신처를 제공하였으며, 무엇보다 '''훙커우 공원 의거 당시 윤봉길 선생을 직접 자신의 차에 태워 홍커우 공원까지 데려다 주었으며, 이후 김구, 엄항섭, 안공근, 김철을 상하이에서 탈출시켜 주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의 연락사항을 OSS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었다.
5. 그 후
이런 광란의 6주간이 지나고, 1938년 봄에야 대학살은 종결되었다. 물론 그 뒤로도 생체실험같은 일들은 있었다.
1972년 9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중국을 방문했는데 당시의 주석인 마오쩌둥은 호기롭게 "우린 승전국이니 배상 따위는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에선 중국에 배상금으로 최소 500억 달러는 줘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 총리가 중국에 방문하고 배상금 문제까지 땡처리했단 뉴스를 들은 온 중국이 경악에 휩싸였고, 특히 난징은 온 도시가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울음바다가 되어, 항의 시위를 벌이기까지 했지만 통할 리가 있나...
다만 마오쩌둥이 한 배상을 받지 않겠다는 발언 자체는 단순히 이겼으니 돈 필요 없다는 똥배짱이 아니라 국제외교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결정에 해당했다. 당장 중화민국 역시 일본으로부터 사실상 배상을 포기한 바가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입장에서는 중화민국으로부터 갓 상임이사국 자리를 뺏어온 입장에서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어떻게든 수교국을 늘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일본이 중화민국과 단교할 뿐만 아니라 배상금까지 물어주며 중공과 수교한다는 것은 일본의 국내정치에 상당한 부담을 안기는 일이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정치적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배상금을 포기한다고 한 것이다. 사실 직접적인 당사자인 장제스의 중화민국도 난징대학살에 대해 일본에 어떠한 배상 요구를 하지 않았으므로, 중화민국 대신 중국을 대표한다는 중공측이 다시 이를 문제삼기는 어려웠던 측면이 많았다. 그리고 발언은 마오쩌둥이 하긴 했지만 1970년 이후 마오쩌둥은 루게릭병으로 거동이 불편했고, 일선 실무에서 벗어나 있었다. 중일수교-미중수교는 국정을 총괄하던 저우언라이의 결정이었다. 사실 마오쩌둥의 일본 관련 발언 자체는 배상을 받지 않겠다는 발언보다는 일본이 침략해줘서 감사하다는 개드립 쪽을 문제삼는 게 더 맞긴 하다.
당연히 중국에서 영화화가 많이 되었는데 웬만한 걸작도 일반인이 보기 힘들 정도의 묘사가 있으니 주의하자. 한국에서 난징 학살 기록 사진은 대부분 중국 영화 화면을 가져온 게 많다.
뉴트 깅그리치의 대체역사물 진주만[11] 에서 난징 학살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역시 욘 라베가 잠시 나온다.
'''중국계 미국인 2세인 아이리스 장'''은 '''《난징의 강간, 그 진실의 기록》'''[12][13] 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을 매우 적나라하게 까발렸다.[14] 이 책은 서구 사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장은 특유의 논리적인 말빨로 "모르쇠"로 일관하는 주미 일본 대사를 생방송으로 캐박살내며 미국내 중국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한국어/영문 할 것 없이 위키백과 항목의 상당수와 나무위키의 바로 이 항목의 많은 부분도 이 책을 인용한 것.
그러나 일본의 이런 왜곡 등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였던 아이리스 장은 그 후 '''일본 극우의 표적이 되었으며''' 상당한 협박과 위협에 시달렸다. 이후 후속타로 바탄 죽음의 행진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의 각종 막장 사례와 잔학한 실태 때문에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어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2004년 11월 9일 우울증으로 인해서 자살했다. 한편 일본 극우들은 "아이리스 장의 유서에는 일본 우익(극우)에 관한 기술은 없다"면서, 장이 자살한 건 자신들의 협박 때문이 아니라며 우기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장이 거짓말을 꾸며낸 데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했다"'''고 우기고 있다. 물론 일본 극우들 때문에 자살했다는 것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일본 극우에 대한 비이성적인 공포를 심을 수 있다는 반론도 있긴 하다.
2010년 중국 난징에서 난징대학살 73주년을 맞이하여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통곡의 벽'이라는 대규모 추모식을 열었다. 홀로코스트만큼 중국인들에게 매우 가슴아픈 사건이기 때문에 바이두 백과의 "南京大屠杀"(난징대학살) 문서에 들어가면 페이지 전체가 흑백으로 되어있고[15] 중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나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넷우익들의 반달을 우려해 일반 회원이 편집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2014년 중국정부는 1월에 난징 대학살 관련 기밀 문서를 공개하였고 6월에는 위안부 관련 자료와 더불어 난징대학살과 관련된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신청하였다.
2015년 10월 10일, 난징 대학살 관련 자료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6. 난징대학살의 피해국은 대만이다?
간혹 인터넷에서 난징대학살을 조롱하거나 희화화할 때 간혹 난징대학살의 피해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중화민국이고 오늘날의 대만이라고 반박하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중화민국으로만 따질 경우 틀린 말은 아니지만 대만 자체가 피해국이라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이는 '중화민국=대만'이라고 보느냐 안 보느냐의 차이로, 중화민국과 대만을 같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틀린 말이지만, 중국 대륙까지 포함했던 옛 중화민국 시절에는 피해국이라는 말이 맞는 말이 된다.
단지 중국 국민당만이 대만에 있을 뿐 난징대학살 피해자들의 후손들 대부분은 중화인민공화국에 거주하며 정작 지금의 대만에서 본성인들 특히 타이완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은 중일전쟁과 난징 대학살을 남의 나라 역사로 취급한다.
그야 당연한 것이 한창 중일전쟁이 났을 시점에는 이미 대만은 오래 전에 일본에 넘어가서 중국 본토와 분리되었으니 전쟁이니 학살이니 이런 것은 남의 일이나 다름없으며 오히려 본성인들 중에서는 2.28 사건 때문에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중국 국민당과 외성인을 일본 제국 이상으로 안좋게 보는 사람도 많다.[16] 어느 정도냐면 극좌파가 장제스 동상을 훼손하는 사건이 일어났던 적도 있을 정도이다. 당장 대만 커뮤니티에서 국민당은 물론 학살 피해자들을 조롱하는 글들이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7. 학계의 해석
7.1. 총 희생자수
난징 대학살의 희생자수가 얼마냐는 것에는 학자에 따라 여러의견이 있다. 일본학자들은 중국정부보단 낮게 주장한다. 근데 이게 오히려 유럽권 학자들보단 높다는 주장이 있다. 예로 호라 도미오는 일본인인데 20만명을 주장한다. 근데 장루이 마르골랭은 프랑스 사람인데 5-9만명을 주장한다. 오히려 일본인 학자가 11-15만명은 많게 주장하는 것이다.
8. 일본에서
일본에서 난징 대학살을 대하는 자세는 3가지로 나뉜다. 대규모 학살을 인정하는 대학살파(大虐殺派), 학살을 아예 부정하는 부정파(不定派) 혹은 환상파(まぼろし派), 그리고 이 중간에 있는, 학살은 있었으나 사상자의 규모가 다소 과장되었다고 보는 중간파(中間派)가 있다.
이제까지의 일본 여론에서는 대학살파가 주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일본 극우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서 불행히도 중간파와 부정파가 그 세력을 넓히고 있다는 말이 있다.http://sankei.jp.msn.com/life/news/120701/edc12070118000000-n1.htm
8.1. 대학살파
8.1.1. 학계
일본 학계 내에서 '''현재까지는 주류'''. 하지만 2010년대 들어 일본 극우 세력의 역사왜곡[23] 시도가 점점 심해지면서 이들이 일본 내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그래도 어쨌든 제대로 역사를 인식하는 정상인들이며, 학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No more Nanjing이라는 이름의 단체가 있어 난징 대학살의 사실을 묵살하는 행태에 반대해 진실을 알리기 위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비정부단체라고 무시만 할 것은 아닌 게, 이 단체가 발촉한 지 얼마 안 되어 난징대학살을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가 나왔다.
당연히 일본학계에서도 난징대학살이 '''정설'''이다. 이건 중국에서도 알고 있다. 난징대학살을 소설이라 하는 책이 나오자 많은 일본 학자들이 반박하고 이건 중국논문에도 설명되어 있다. [24] 난징대학살의 대표적인 학자는 호라 토미오, 후지와라 아키라가 있으며 후지와라 아키라는 실제 일본군 장교를 복무한 학자로서 치밀한 실증연구로 부정파는 물론 중간파까지 이기고 대학살을 학계로 중론으로 만든 것으로 명성이 높다. [25] 난징대학살 기념관 관장 朱成山 연구원도 후지와라 아키라를 전문적인 역사지식을 갖춘 일본의 대표적인 학자라고 평가했다.[26] 마찬가지로 난징대학살 기념관 관장 朱成 山 관장은 후지와아 아키라와 호라 토미오 같은 학자들의 글을 우월한 일등급 저서 라고 평가했다.[27]
당연하지만 일본 난징대학살 논쟁의 승자는 후지와라 아키라와 호라 토미오 세력이다. 난징대학살이 현재 일본학계의 정설이고 이 학자들은 중국의 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8.1.2. 문화
모토미야 히로시의 《나라가 불탄다》의 경우는 이 사건을 넣었더니만, 항의를 받아 작가가 실의에 빠져 연재를 빨리 끝내버렸다. 이 만화가 일본의 '''순수한''' 범아시아주의와 일본중심의 대동아 공영권의 대립과 좌절을 그려서 한국인들에게는 고까운 장면이 많음에도 이런 곤욕을 치른다.[28]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도 상당히 사실에 가깝게 언급된다. 때문에 마찬가지로 극우들에게 많은 항의를 받았다.
그나마 테즈카 오사무의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는 그 실태에 대해 꽤나 자세히 언급된다. 하지만 만화 자체가 실제 역사보단 픽션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구성이라 작중 나오는 '히틀러 유대인 음모론'처럼 학살 부분도 테즈카가 각색한 픽션으로 알고 있는 일본 독자가 많다.
8.2. 부정파
당시 난징의 참상을 찍은 일본 기자들의 사진 중 상당수가 검열로 전쟁 후에야 나오게 된다.[29] . 기자 하나는 관련 기사 및 소설을 쓰다가 고등계에 끌려가서 처참한 꼴을 당했다.[30]
전범 재판에서도 중요 증거로 인정받았고, 심지어는 일본의 역사학자들 조차도 이 사건을 실제 사건으로 인정을 하고 있지만, 우익세력은 아직도 이걸 부정하고 있다. 아예 부정하는 측은 '''학살 자체가 없었다'''는게 기본 입장이다.[31] 사망자는 대부분 전쟁에 휘말려 죽은 민간인, 탈출하다가 배가 전복된 군인들이라는 것. 혹은 더 나아가서 '''중국군이 시민들을 학살해놓고 일본군이 죽였다고 누명을 씌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32]
이 난징대학살 부정파論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 現 아지아대학 교수가 있다. 이 사람은 대표적인 극우파로 대표 저작이 <난징 사건 증거사진을 검증한다.>이다. 이 책의 내용 구성을 보면 대부분이 사진에 나와있는 것들을 분석하고 '이래서 날조' 이런 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는 '중국인이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다닌 것.' 혹은 '장제스의 국민정부의 날조극' 이라고 쓴 것. 물론 그게 근거가 될 턱이 없었고, 결국 이 작자는 난징대학살 생존자한테 제대로 걸려서 중국 난징 대법원에 법정소송에 강제로 끌려가 패소당했다.#
이들의 주장을 들면 다음과 같다.
- 난징 시내의 인구문제.
- 반론: 난징 시내의 인구문제의 경우는 그 범위상의 문제이고 가장 객관적으로 볼수 있는 적십자 사및 안전지대의 자료를 보면 학살 자체가 없기 보다는 숫자의 차이에 불과하다. 몇만이라도 학살당하거나 강간당하는 것과 인구문제는 무관한 문제이다. 사실 이 기준이라는게 '학살의 지역이 난징 시내인가? 난징을 포함한 주변 지역인가?'로 달라진다. 일반적인 일본의 시각으로 나오는 도시의 규모를 보면 사망자 수십만은 어렵다[33] 는게 이런 논지이다. 실제로 난징 학살은 덴노가 직접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터. 일반적으로 이런 시각을 가진 쪽은 난징 시내에서의 학살만 규정한다. 중국 정부의 입장은 그 주변지역도 같이 보는 셈.[34] 말도 안되는 과장이 아니면 어차피 주변에서 벌어진 학살이라면 포함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래서 몇십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한 것. 더불어 고려해야 할 것이 있는데 오늘날의 남경시의 범위와 그 당시의 남경직할시의 범위는 10배가 넘어갈 정도로 차이가 난다. 중화민국 시절의 남경시는 559.28km2만, 오늘날의 남경시는 6,582.31km2다. 둘 중 어디의 기준을 적용할지에 따라 그만큼 수치도 달리 나올 수 있다. 참고로 중화민국 시절의 남경시는 양쯔강 유역을 포함하지 않으나 오늘날의 남경시는 우리나라의 서울 한강처럼 양쯔강 일대를 포함한다. 비슷하게 흔히 600만으로 통칭되는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희생자들 역시 수용소에서 가스학살로 죽은 사람들만 세어서는 나오지 않는다.
- 미국과 중국이 제시하는 사진은 대부분 조작이거나 출처가 불분명하거나 복식 등이 다르다는 점.
- 여러 증언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전혀 그런 사건이 없었다는 점.
- 반론: 당장 위의《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 - 난징의 강간, 그 진실의 기록》부터 읽어보자.
- 한도 가즈토시[39] 의 의견: 당시 부대의 상황이나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보면 난징 진입때 남쪽으로 진입했던 부대는 별 다른 일이 없었다.
- 반론: 그러나 참전증언자로서는 자신이 겪은 일만 본다면 얼마든지 다른 주장이 가능하다. 오히려 참전 증언자로서 학살을 증언하는 사람도 대단히 많고 중립적인 입장인[38] 외국인들이 본 일본군의 학살 증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 2ch의 넷우익들은 난징대학살은 한국인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이를 중국 웹에 퍼트려 한국과 중국을 상대로 이간질을 시도하기도 했다.[40][41] 그런데 이것이 중국인들에 의해서 "개구라"로 드러나자 2ch 넷 우익들이 의식했는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말을 바꿔버렸다.[42]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혼란 상태에 빠진 난징 시민들이 한간[43] 색출 사냥 과정에서 일본군이 난징성에 입성해 치안유지 등에 힘을 기울였다.'는 식으로 기술해 학살만행을 전면 부정 하는 등 오히려 미화하고 있어서 문제.
남경대학살에서 일본군 소속 조선인 부대가 대거 가담했다는 인터넷상의 유언비어에 대한 반박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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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마존닷컴 유저들은 난징 대학살을 다룬 <난징의 강간>을 날조라며 부정하고 모욕하고 있다. 중국 아마존닷컴 유저들과 강하게 충돌하는 것은 덤. 일본 아마존 평가.
'''그러나 정말 다행인 점은, 일본의 교과서 검정에서 난징 대학살 부정파의 의견은 당연히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다.''' 일본의 보수 우익들도 난징대학살은 워낙 팩트가 명확해서 무시할래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인들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일부 개념없는 와패니즈들 중에서도 난징 대학살은 일본을 국제적으로 망신주기 위해 중국이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답이 없는 부류가 존재한다.
'''난징 대학설 날조설에서 더 나아가 중국군 민간인 학살설까지 주장하는 글(번역문)''' 링크의 블로그 게시글 원문(원번역문)은 비공개 상태이다. 해당 블로거는 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을 예로 들며 '우리(한국인)가 아르메니아 학살 사건에 대해 알아볼 때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터키측, 아르메니아측의 입장을 모두 들어보듯 난징 대학살 사건도 '''과거의 역사로 인한 감정은 접어두고 정확한 판단을 위해 일본측, 중국측 모두의 입장을 들어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게시한 것은 일본의 극우 인사들도 넘쳐나는 반박 사료들로 인해 내세우지 못하는 '난징 대학살 날조설'에 '중국 병사 민간인 학살설'까지 펼치는 '''인터넷 게시글 번역문''' 뿐이다. 2차 게시자인 블로거 본인은 일본측의 것이든 중국측의 것이든 주장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지적되어야 한다며 ''나름'' 이성적인 태도를 보이려 한 것 같으나 난징 대학살의 희생자 또한 중국인들만 있었던 게 아니며 가해자인 일본의 극우파 인사들도 근거를 갖춘 반박이 불가능해 '과장된 것이다' 정도의 주장만 하고 있다. 이미 가해자는 누구였고, 피해자는 누구였고, 피해상황의 규모와 정도[44] , 정황까지 다 결론이 난 참사를 다시 '양쪽의 입장' 운운하며 끌고와 정작 근거라고 올리는 건 일본[45] 측 만의 입장이 담겨있는 '''인터넷 게시글 번역문[46] ''' 뿐이니 저 블로그 게시글은 '''양비론적 입장에 입각하여 써진 것이라 할 수도 없다'''.
8.3. 중간파
일본 극우의 "그런 사건 없었다, 중상모략이다."라는 주장과 별개로, 지금에 와서는 "중국 국내에서도 제대로 된 조사를 하지 않았고, 중국 정부의 선전 활동으로 내용이 과장되어 있다."라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긴 있다. 30만은 오버고 실제로는 5~8만 정도가 아닌가? 라는 내용들이다. [47][48] 일본의 극우 언론사 산케이신문도 2015년 2월 16일자 기사에서,[49] 30만명설은 학술적 근거를 결여하고 있다 하였다.
실제로 전 세계에서는 난징 대학살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중국의 기록을 100% 신뢰하는 쪽으로 난징뿐 아니라 주변 도시 지역에서의 학살 범위를 포함하는 학파[50] 실제의 인구조사 및 남경 안전지대의 인구 수와 증언을 분석해서 난징 시내에서 학살당한 피해자만 계산해 8만에서 10만 정도로 보는 파가 있다. 이 두 학파의 공통점은 피학살자의 수에는 관계 없이 일본이 벌인 학살이라서 일본의 100% 잘못이고 양 측의 공동조사및 '''일본의 사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51]
실제로 전후에 실질적인 통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대략적인 추산치만 존재할 뿐이기에 중국 측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8만 안팎으로 보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위에서 말하는 '부정파와 똑같은 사람들'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위에서 '8~10만'으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만 이 중에서 '당시 중국군이 도심지를 방어선으로 사용하는 시가전 상황시 일본군이 군인으로 오해해 민간인을 죽였거나 실제로 밀정(스파이) 역할을 하던 민간인들을 색출하는 작업에서 오인해서 학살하는' 이러한 논리도 있지만 이것은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기에 하는 소리다. 따라서 이런 사람이 있으면 알려주자. 이들이 말하 는것은 '인구 통계치가 명확하지 않고 중국 측의 자료에 신빙성이 결여될 수 있기 때문에 어느정도 보정해서 봐야 한다' 는 것이다. 난징 사건 자체도 비극이지만[52] 더 비극은 학살 피해자의 후손들은 아직도 중국 정부에 의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듯.[53]
9. 기타 국가에서
9.1. 미국, 유럽
미국 같으면 2차 세계대전에서 중국과 같이 연합하여 일본과 싸워 마침내 중국이 중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국가이다. 때문에 전쟁 참전 경력이 있는 미국의 노년층들은 대학살파 의견을 따르는 편이다. 그 중에는 종군 기자로 활동하며 중국인들과 연합하여 난징의 상황을 취재하여 일본군이 저질렀던 만행들을 증거 자료로 보관하기까지 했으니.
유럽 국가들 역시 미국과 전반적으로 비슷하다. 약간 의외의 사실은 나치당원이었던 욘 라베가 중국인들을 도와주었다는것.[54] 욘 라베는 독일이 일본을 말려줄 것이라고 믿고 히틀러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썼지만 편지는 히틀러에게 전달되지도 못했고(중간에 가로채졌다고 한다.) 이런 행동이 문제가 되어서 본국으로 불려들어가는 처지가 된다.
러시아는 소련 시절부터 대학살파 의견이었고 최근에는 아예 맹목적으로 반서방 정책의 일환으로 중국을 밀어주면서 빼도 박도 못한 대학살파 측이다. 러시아의 경우도 러일전쟁 당시 만주에서 민간인 학살을 겪었고 시베리아에 일본군이 출병한 적백내전 당시에도 민간인 학살을 연해주에서 여러 차례 겪었다.
9.2. 한국, 아시아
한국의 경우 노태우 정권 이전까지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지 않아 일본 편을 들었단 낭설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중화민국은 1990년까지 한국의 맹방이었고, 그 중화민국 정부가 바로 이 학살의 피해국이다! 1988년 나온 먼나라 이웃나라에도 난징 대학살이 "남경대학살"이라고 짧게 다루어진다. 중화민국이 1980년대까지 한국에선 "중국"을 뜻 했고 오히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공"이라 불렀다.중국의 역사적 사건은 중화민국의 입장에서 모두 제대로 다루었다. 애초 똑같은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인 한국 정부가 일본 편을 든 적은 한 번도 없다.
한국의 입장은 줄곧 이를 유감스럽게 생각해왔고, 같은 일제 침략의 피해국가로서 파렴치한 짓이라고 여겨왔으며 반일 정서의 대두로 더욱이 빼도 박도 못한 대학살파 입장이 되고 있다. 물론 이 학살을 중국의 날조라 주장하는 일빠들도 있고, 2020년 즈음 혐중 감정이 극도로 치달은 일부 혐중 커뮤니티에서는 난징 대학살을 오히려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난징대학살을 난징대축제, 난징대청소, 난징 페스티벌, 난징 미트파티 따위 통구이 드립에 비견되는 멸칭으로 승화시켜 중국인 피해자들을 조롱한다.
한국 외의 아시아 국가들 역시 대학살파 의견을 따르는 편이다. 싱가포르는 중국계 화교가 대다수인 데다가 자신들도 일본 점령하 창이 학살 등을 당했기 때문에 대학살파 의견을 따른다.
대만의 경우는 애매한데, 오늘날 대만을 지배하고 있는 중화민국 정부나 중국 대륙 출신의 외성인들의 경우에는 당연히 대학살파 의견을 따르며 난징 대학살에 이를 간다. 하지만 반대로 본성인들의 경우에는 2.28 사건으로 인해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대륙에 대한 반감이 아주 심하기 때문에 오히려 난징 대학살 사건을 좋아하면서 그 피해자들을 조롱하고 있고, 난징 대학살을 일으킨 일본을 옹호하는 경우가 많으며 일본 쪽에서 난징 대학살과 관련하여 제기하는 주장들에 대해서도 동조를 표명하는 경우가 잦다. 대만에서 난징 대학살과 관련하여 일본을 비판하는 의견과 일본을 옹호하는 의견이 동시에 나오는 이유는 이러한 대만 국내에서의 외성인과 본성인의 갈등에서 기인한다.
9.3. 그 외
아프리카, 남미, 오세아니아 등 전반적으로 난징 대학살 사건에 대해서 대학살파 입장을 표명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한때 반중감정이 심했던 아프리카에서는 부정파 의견을 따른 적도 있었다. 물론 지금 2010년대에는 대학살파 의견을 따르기는 하지만.
10. 중화권과의 마찰
일본이 그리도 애쓰는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절대로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문제다.
상임이사국인 중국이 이 문제와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분쟁을 들먹이며 결사반대하기 때문인데, 이스라엘이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에 별로 반대하지 않은 것과 대조적이다.[55][56]
중국에서 난징 대학살 관련 일본 측 사료들을 모두 모은 자료집을 발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측이 원 사료의 사진촬영이나 복사를 거부하는 통에 연구자들이 일일이 손으로 베꼈다고 한다. '''문제는 일본의 우익들은 "필사"했다는 점을 핑계로 삼아서 자료집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까댈 게 뻔하다.''' 현대 역사학에서는 유일자료가 아닌 한 필사된 자료의 신빙성은 상당히 낮게 보며, 필사과정에서 필사자의 주관적 관점이 개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맞다면 일본이 지금도 원본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2012년 2월 20일 난징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당시 나고야 시장인 카와무라 타카시가 "난징 대학살은 없었던 일이다."라고 망언하는 바람에(그것도 대충 뱉은 말도 아니라 난징시 시장을 나고야까지 초대한 자리에서 망언을 한 것이다), 결국 난징시 시장은 나고야와의 자매결연을 맺는 것을 취소하기로 조치했다. # 다행히 일본 정부 측에서는 이에 대해 중국 정부에 사죄하고 난징 대학살은 결코 부정될 수 없는 것이라는 종래의 의견을 확고히 했다.#
심지어 친일국가라고 일본에서 좋아한다는 대만에서조차도 난징 대학살 사건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대만을 지배하는 중화민국 정부가 대학살의 직접적인 피해자이며 '''당시 난징은 중화민국의 수도였다.''' 물론 이렇게 난징 대학살 사건을 부정하지 않는 것은 대만 정부와 외성인한테만 해당하며, 본성인들의 경우 오히려 대륙인들 죽었다고 좋아하지나 않으면 양반이고 이에 대해 추모하는 연예인들을 상대로도 "중국인들 추모하지 말고 2.28 사건이나 추모해라"라는 비난을 하기도 한다.
2014년 6월 일본 정부는 중국의 위안부 및 난징 대학살 자료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철회를 요구하였지만 당연히 중국 정부는 강하게 거부했다. 그 후 2015년 10월에 해당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확정되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극도의 유감을 표하였다. 카와무라 야스히사 일본 외무성 대변인은 10일 담화를 발표하고 “난징대학살을 둘러싸고 '''중·일 간에 견해 차가 있고''' 이 문건은 중국의 일방적 주장에 따라 신청된 것으로 완전성이나 진정성에서 문제가 있다”며 “중립·공정해야 할 국제기구로서 문제가 되는 일이며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일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네스코의 지원금을 끊을 수도 있다[57] 며 협박하는 등 뒤끝을 보여줬다. 당연히 이에 대해서 세계인의 반응도 매우 좋지 않다.
결국 일본이 퉁저우사건을 내걸었다. # 중국군이 일본군에게 기습공격한 걸 학살이라고 왜곡했다.
11. 관련 미디어물
- 흑태양 시리즈 - 국내에서는 1편이 "마루타"라는 명칭으로 개봉되었다. 본 시리즈의 4편(1995년작)이 남경 대학살을 다루고 있다.
- 황시 - 2008년작.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독일의 합작이다. 어거스트 러쉬에 등장한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가 주인공 '조지 호그'로, 주윤발이 조력자 '잭'으로 등장한다. 영국인 종군기자인 조지는 중국에 들어와 일본이 벌인 난징대학살을 보고 충격받고 경악하며 이것을 세상에 고발하고자 하나, 일본군에게 덜미를 잡혀 참수되려는 순간 잭이 이끄는 게릴라 부대가 일본군들을 몰살시키고, 정말 중국인들을 진심으로 돕고 싶다면 60명의 고아가 모인 '황시'로 가 보라는 조언을 던지며, 조지는 황시 고아들을 돌보던 여자 리 피어슨과 함께 고아들을 전쟁의 참혹함으로부터 지켜내고자 한다. 영화 크레딧에 실화의 주인공인 중국인들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그 영국인 종군기자는 자신들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었다고. 난징 대학살과 일본군은 초반에만 등장하는, 사건의 발단부 같은 역할이고 황시로 가게 된 후부터는 고아들과의 일상과, 전쟁으로 인한 아이들 강제 징집 등의, 중국과의 마찰 등을 다룬다.
- 욘 라베 - 2009년작. 독일인 플로리안 갈렌베르거 감독 작품이고, 독일/프랑스/중국 합작 영화이다. 위의 난징 안전지대를 설정한 욘 라베에 대한 작품이다.
- 난징! 난징! (南京! 南京!) - 2009년작. 영어 제목은 City of Life and Death(삶과 죽음의 도시). 중화인민공화국의 루 추안 감독이 만들었다.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 93% 스코어를 받았다. 다른 난징 영화와 달리 서구에서도 평가가 좋은 편. 욘 라베가 나온다.
- 진링의 13소녀 (金陵十三釵) - 2011년작.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12명의 소녀와 1명의 소년이며, 고전소설인 홍루몽의 등장 인물들인 금릉십이채에서 이름을 따왔다. 영어 제목은 The Flowers Of War. 배트맨으로 유명한 영국 영화 배우 크리스찬 베일이 주연을 맡았다.[58] 중화인민공화국의 감독 장예모가 감독을 맡았다. 영상미는 뛰어나나, 관객에게 주는 메시지는 별로 없는 중화 애국주의 프로파간다 영화. 남경 외국인 구역으로 간신히 탈출한 중국군 부상병과 기생들이 크리스찬 베일의 보호로 여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일본 점령군 장교는 자신들의 승전 기념 연회에 초빙할 여학교 합창단원을 모집하게 되고[59] 결국 기생들이 여학생들을 대신해서 여학생으로 분장해서[60] 점령군에게 간다는 스토리. 2년 전에 나온 루 추안 감독의 난징! 난징!의 비해 서구 평론가의 평가는 좋지 않다. 일본군이야 당연히 답이 없는 악마집단이었지만 중국군경우엔 애국심을 너무 강조한다. 심지어 단체로 자폭공격하는 장면에선 '당시 중국인들은 애국심이 있어서 당연히 그렇게 했다'는 게 직접 내레이션으로 나온다. 2009년작 난징! 난징!에 비하면 매우 단순하고 프로파간다 색채가 강하다. 그나마 장예모의 전작에서 보여주는 미적인 아름다움이나 웅장한 화면구성은 꽤 볼 만하다. 문제는 그런 미적인 아름다움을 즐길만한 주제가 아니라는 점.
- 49일·제(四十九日·祭) - 2014년작 후난 위성TV에서 제작한 드라마.
- 난징 1937 - 1995년작 영화.
11.1. 그 외 매체
모토미야 히로시의 "나라가 불탄다"는 난징 대학살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우익의 항의를 받아 연재중단되었다.
그린호넷의 파트너인 케이토는 <그린 호넷: 오리진>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일본군에 입대했지만 난징 대학살의 참상을 보고 빡쳐서 자신의 부대와 부대장을 살해한뒤 일본군의 군수공장 등을 사보타지하다가 부상입은걸 그린 호넷이 도와줘서 미국으로 피신했다는 설정이다. 케이토는 원래 일본인으로 설정되었지만 40년대에는 한국인이나 필리핀인으로 바뀌기도 했는데 난징 대학살 등으로 일본인의 이미지가 안좋아져서 그렇게 되었다.
바이오쇼크에서 이수종 박사는 난징에서 거주하다가 쳐들어온 일본군에게 아편을 팔면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은하영웅전설의 블러디 나이트도 난징 대학살에 따온 것으로 보인다.
11.2. 참고 문헌
- 아이리스 장, 난징 대학살
- Jean-Louis Margolin, e réévaluation du massacre de Nankin #
- 니시노 루미코, 731부대 이야기
11.3. 참고
- 학살
- 버마 대학살 - 희생자수로는 난징 대학살 이상이다. 무려 100만명 이상이 일제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했다고 추정된다. 참고로 학살을 지시한 악마는 기무라 헤이타로.
- 마닐라 대학살 - 이쪽도 난징 대학살에 묻혀서 그렇지, 사상자 숫자는 난징 대학살에 비해서도 결코 적지 않다. 다만 마닐라 대학살은 전쟁에서 지고 있을 때 벌인 것이지만 난징 대학살은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을 때 벌인 것이란 점에선 난징 대학살이 훨씬 엽기적인 점이라 할 수 있다. 실제 난징 대학살이 다른 일본군의 범죄보다 관심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사건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을 때 벌어진 점이었다는 것이다.
- 홀로코스트 -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상단에 기재된 모든 학살극의 희생자를 다 합쳐도 홀로코스트 하나에 못 미친다.
- 일본의 중국대륙 무차별 폭격 - 최종보스. 홀로코스트를 능가하는 대학살이다. 이로 인해 민간인만 1,000만 명 넘게 죽었다.
- 100인 참수 경쟁
- 욘 라베 - 난징에 남겨진 50~60만명 중에서 20~30만명만 죽고 반수가량 살아남은 건 순전히 그의 공. 문서 참고.
- 사카이 사부로#s-3.1 - 위안부 피해자들을 비하함과 동시에 난징 대학살의 규모를 축소하는 발언을 했다.
- 간도 참변 -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