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노프 전투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8년 9월 26일 베를린을 지키던 프로이센군이 베를린 북부의 토르노프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스웨덴군을 습격한 전투. 프로이센군이 승리했다.
2. 배경
스웨덴은 30년 전쟁 때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맹활약으로 '북방의 사자'로 일컬어질 만큼 국제 질서에서의 위상이 치솟았고 이어진 몇 차례의 북방전쟁에서도 연전연승하며 발트해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대북방전쟁 때 러시아, 폴란드, 하노버, 덴마크, 프로이센 등에게 협공당한 끝에 패하면서, 스웨덴 제국의 영광은 100년도 안되어 종식되었고 발트해에서의 종주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후 스웨덴은 '자유 시대'를 맞이해 귀족 중심의 의회내각 제도로서 국정을 운영하면서 외국과의 전쟁은 가급적 자제했다.
그러나 수많은 스웨덴인들은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을 추억하며 발트해의 패권을 되찾고 싶어했다. 또한 18세기부터 세력이 급격히 강해진 프로이센이 발트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스웨덴 정부는 큰 위협을 느꼈다. 이에 스웨덴은 역시 발트해의 종주권이 프로이센에게 위협받는 걸 원치 않았던 러시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슐레지엔을 반드시 되찾고 싶어한 오스트리아와 연합해 프로이센에 대항했다. 스웨덴은 이 연합을 통해 프로이센을 굴복시킬 경우 과거 프로이센에게 빼앗겼던 포메른 서부지역을 되찾기를 희망했다.
그러던 1756년 프리드리히 대왕이 작센을 침공하자, 스웨덴은 프로이센이 베스트팔렌 조약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며 이를 전쟁의 구실로 삼았다. 이후 스웨덴은 1757년 3월 21일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함께 독일의 자유를 보장하는 군사 행동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프랑스는 스웨덴에게 재정 지원을 약속했고, 스웨덴은 이에 따라 2만 가량의 병력을 독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757년 9월 13일, 스웨덴군은 포메른을 전격 침공했고 9월 22일에 프로이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당시 스웨덴군은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병력 수와 물자 모두 부족했으며 병사들의 훈련 상태도 엉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포메른 지역의 몇몇 마을을 점거했을 뿐 더이상 남하하지 않았다.
프로이센 측은 처음엔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랑스에 전력을 쏟느라 이들의 존재를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세 강대국들과 격전을 치르며 국력 소모를 감당하기 어렵게 된 프로이센은 스웨덴군이 소규모나마 베를린에서 멀지 않은 북방 영토에 주둔하고 있는 걸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이들이 러시아군과 합세하거나 프랑스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 대규모 병력을 육성한다면, 가뜩이나 사방에서 사방에서 전장을 치르고 있는 프로이센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베를린 수비를 맡고 있던 칼 하인리히 폰 베델 장군에게 스웨덴군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 사령관: 칼 하인리히 폰 베델
- 병력: 1,500명 ~ 2,000명
3.2. 스웨덴군
- 사령관: 알 수 없음.
- 병력: 600명
4. 전투 경과
1758년 9월 무렵, 포메른에 주둔하고 있던 스웨덴군의 일부는 페흐벨린 마을 남쪽 지역에서 현지조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9월 26일, 약 600명 가량의 스웨덴군이 토르노프에서 약탈하던 중 베델 장군이 파견한 1500~2000명의 프로이센군에게 공격당했다. 후사르 기병대는 스웨덴 기병대를 요격했고, 드래곤들은 토르노프 광장에 대열을 형성한 스웨덴 보병대를 공격했다. 스웨덴 기병대는 금방 붕괴되었지만, 스웨덴 보병대는 적 드래곤들의 여섯 차례의 공세를 모두 격퇴했다. 그러나 기병대가 무너진데다 수적으로 우세한 프로이센 보병대가 접근해오자,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후퇴했다.
5. 결과
스웨덴군은 이 전투에서 4명의 장교와 158명의 병사들을 잃었고, 프로이센군 후사르 기병대는 1명의 장교와 30명의 병사를 잃었으며 드래곤 부대는 2명의 장교와 120명의 병사를 잃었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여세를 몰아 적을 추격하다가 이틀 뒤 페흐벨린 전투를 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