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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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제국의 영토 확장,괄호안의 숫자는 상실한 연도
'''스웨덴 제국'''
'''Stormaktsti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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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문장

1611년/1638년[2] ~ 1721년
위치
스칸디나비아 반도, 핀란,
수도
스톡홀름
언어
스웨덴어
민족
핀란드인, 노르웨이인, 스웨덴인
종교
루터교회
주요 사건
1600년 스웨덴-폴란드 전쟁
1610년 잉그리아 전쟁
1611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즉위
1630년 30년 전쟁
1643년 토르스텐손 전쟁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1655년 제1차 북방 전쟁
1674년 스코네 전쟁
1700년 대북방전쟁
1721년 전쟁 패배로 해체
1. 개요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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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세기 ~ 18세기에 걸쳐 발트 해의 패권을 장악하였던 시절의 스웨덴 왕국을 일컫는 통칭으로 발틱 제국이라고도 부른다.
보통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즉위한 1611년을 시작으로 대북방전쟁에서 패해 제국이 해체된 1721년까지를 의미한다.

2. 역사


스웨덴은 칼마르 동맹으로 덴마크군이 수도를 점령하면서 사실상 덴마크에게 지배당했지만 구스타프 바사에 의해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 지속적으로 대립했다.
1611년 사자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즉위하고 나서 러시아, 폴란드와의 연이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30년 전쟁에서는 가톨릭 동맹을 상대로도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전사한 뤼첸 전투에서도 이겼다.[3] 프랑스가 30년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쟁을 끝낸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시기의 스웨덴은 과거부터 핀란드와 에스토니아를 소유한 데다가 30년 전쟁에 개입한 결과 서 포메른, 오데르 강, 베저 강 입구를 장악했다. 구스타브 2세는 전쟁뿐만 아니라 내정 개혁에도 힘썼으며 특히 이전까지 용병이 주축이 되었던 전쟁에서 귀족들에게 토지를 지급하고 군사를 징병할 수 있는 상비군 제도를 도입했다. 이후에 잘 발달되지 않았던 러시아나 브란덴부르크 등의 동유럽의 군주들이 이것을 차용하기도 했다.
여러 번의 전쟁에서 큰 이득을 본 스웨덴은 잉그리아(Ingria)라는 이름으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일부, 핀란드,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일대를 지배하였으며,[4] 독일 북부 포메른 지방[5]을 차지하고, 뉴스웨덴(델라웨어 주), 아프리카 황금해안 등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거의 반세기동안 계속된 전란에서 덴마크,[6] 폴란드-리투아니아,[7] 러시아를 압도했다. 이후에는 구스타브 아돌프의 유일한 자식인 크리스티나 여왕[8]이 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스스로 퇴위하는 사태가 일어나 바사 왕조가 끝나 버렸다(당시 스웨덴 국법에 따르면 국교가 복음 루터 교회였고, 복음 루터회가 아닌 왕족은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스웨덴의 국왕은 크리스티나 여왕의 외사촌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칼 10세가 계승했다.
칼 10세 구스타브 시기에는 폴란드, 덴마크와 다시 전쟁을 치러서 리보니아와 스코네 일부 지역을 획득하였고 폴란드 왕으로도 추대되었다. 1675년 브란덴부르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네덜란드와 연합한 덴마크와의 전쟁에서도 영토를 상실했다가 루이 14세의 중재로 독일 북부의 포메른과 현재 스웨덴 남부인 스코네 지역을 다시 차지했다. 프랑스는 유럽의 강력한 국가였고, 그런 프랑스가 스웨덴이 지속적으로 세력을 유지하도록 도왔기 때문에 비교적 스웨덴이 유리하기도 했다.
스웨덴의 성장을 견제하려고 폴란드의 왕이자 작센의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와 러시아의 왕 표트르 1세는 동맹을 체결, 1700년 대북방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스웨덴의 왕 칼 12세의 반격을 받아 초전에 러시아군은 패배했고, 이어진 폴란드에 대한 집중 공격에 아우구스트 2세는 폐위당하고 작센으로 쫓겨났다.
스웨덴군은 30년 전쟁 당시 제국군, 폴란드-리투아니아군, 러시아군, 덴마크군을 전부 다 돌아가며 패배시킬 만큼 강력한 전력을 가졌다. 덴마크-노르웨이, 폴란드-리투아니아, 루스 차르국, 브란덴부르크 등이 모두 연합하여 달려들었는데도 18세기 초반 대북방전쟁의 끝무렵까지만 하더라도 스웨덴의 정예병들을 상대하기 어려웠다. 다만 해군의 경우 증강하려고 했던 계획도 계속 실패하고 여전히 강력한 해양 세력이었고 엄청난 전력의 네덜란드 공화국의 지원까지 받았던 덴마크를 상대로 계속 열세였다. 심지어 폴란드-리투아니아 해군[9]을 상대로도 많은 패배를 겪었다. 전쟁에서 여러 번 덴마크의 본토인 셸란 섬과 유틀란트 반도까지 위협했던 스웨덴이 점령에 실패하고 결국 여러 세력의 연합을 물리치지 못한 건 이런 해군의 부재도 컸다.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을 지속했던 스웨덴은 1709년 군세를 재정비한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수세에 몰렸고 폴란드도 아우구스트 2세가 복위하여 반격에 나섰다. 여기에 덴마크, 프로이센, 하노버 왕국까지 전쟁에 가세하여 스웨덴을 굴복시키면서 결국 한때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스웨덴은 핀란드, 포메른을 제외한 발트 해 영지를 모조리 빼앗긴다.
스웨덴은 인구 등의 규모에 비해 엄청난 규모의 영토를 확장했다. 게다가 확장한 영토는 모두 스웨덴을 둘러싼 국가들이 일시적으로 약해진 틈을 타서 점령한 것이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의 원한을 샀다. 30년 전쟁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신성 로마 제국도 규모는 엄청났고 신성 로마 제국 내 선제후국이었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만 해도 결코 적은 세력이 아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또한 그랬고 루스 차르국도 마찬가지였다.
스웨덴 제국은 처음부터 실질적인 규모에 비해 구스타프 아돌프, 칼 12세 같은 군주, 토르스텐손 같은 장군과 옥센세르나 같은 명재상의 지도 아래 제도, 기술, 체제적인 면에서 혁신적이고 질적으로 우위인 역량을 발휘해서 팽창, 유지되었다. 그러나 당시 서유럽은 강력한 왕가, 지도자들이 계속 치열하게 서로 땅을 점령하고 작위를 얻기 위해 경쟁하던 상황이었고 제도적인 것은 빠른 전파와 확산에 의해 쉽게 좁혀졌다. 그리고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주변에 만들어놓은 수많은 적들을 상대로 관계를 다시 우호적으로 바꾸지도 못했다. 17세기 중후반 스웨덴의 적들이었던 덴마크, 폴란드-리투아니아, 루스 차르국 셋 다 서로 사이도 좋고 않던 관계인데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이런 경쟁국들이 동맹을 체결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당시 스웨덴은 제대로 된 동맹이 스웨덴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세력을 상대하는 사이에 라인강을 공격한 부르봉 왕조 프랑스, 합스부르크 가톨릭 세력에게 위협당하는 네덜란드밖에 없었다. 상당히 빈곤했던 국가인 스웨덴이 행정 개혁으로 관료 집단을 키우고, 군대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부유했던 네덜란드의 자금 지원은 30년 전쟁 종결 이후 스웨덴의 발트해 패권으로 인해 북방 무역에서 손해를 본 네덜란드가 동맹을 끝내면서 많은 재정적 타격을 주었고, 프랑스는 지정학적인 이유로 맺은 동맹이라 스웨덴이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가 아닌 폴란드, 덴마크 같은 프랑스의 이해가 크게 안 걸린 국가와 싸울땐 지원해주지도 않았다. 30년 전쟁 도중만 하더라도 우방이었던 독일계 개신교 국가들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스웨덴이 일방적으로 스트랄준트를 비롯한 포메라니아의 교역 도시들을 차지하자 반감을 가져서 군사적인 위협이 사라지자마자 관계를 청산했다. 그래서 17세기 후반의 여러 차례에 걸친 스웨덴의 전쟁은 결국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1] 원래는 스웨덴어로 '강자의 시대'라는 뜻의 일반 명사지만 북유럽을 호령했던 이 시기의 스웨덴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도 쓰인다.[2] 식민제국의 시작[3] 다만 뤼첸 전투는 스웨덴이 전술적으로 승리하고 전략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성공했지만, 스웨덴군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양측의 피해는 비슷하거나 발렌슈타인군이 오히려 더 적었다. 스웨덴군은 국왕도 전사하고 정예 부대들이 크게 소모되어서, 이후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웨덴 군이 소멸되어버리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4]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 혹은 그 북쪽의 현재 핀란드 국경 근처의 러시아 영토인 지역을 카렐리아(Karelia), 또는 카리알라(Karjala)라고 한다.[5] 현재 독일의 메클렌부르크-포어폼메른 주의 동북부 일부 지역.[6] 스웨덴의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북유럽 최강국이었으나 이후에 많이 밀렸다.[7] 대홍수라 불리는 제2차 북방 전쟁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다.[8] 위로 세 명의 형제들이 있었지만 모두 사산되거나 생후 1개월만에 사망했기에 구스타브 2세가 전사한 시점에서 유일한 직계 왕족이었다.[9] 그단스크(단치히) 자유시의 무장 상선단이 주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