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흐벨린 전투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8년 9월 28일 독일북부 페흐벨린에서 스웨덴군과 프로이센군이 맞붙은 전투. 스웨덴군이 프로이센군을 격파했다.
2. 배경
스웨덴은 30년 전쟁 때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맹활약으로 '북방의 사자'로 일컬어질 만큼 국제 질서에서의 위상이 치솟았고 이어진 몇 차례의 북방전쟁에서도 연전연승하며 발트해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대북방전쟁 때 러시아, 폴란드, 하노버, 덴마크, 프로이센 등에게 협공당한 끝에 패하면서, 스웨덴 제국의 영광은 100년도 안되어 종식되었고 발트해에서의 종주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후 스웨덴은 '자유 시대'를 맞이해 귀족 중심의 의회내각 제도로서 국정을 운영하면서 외국과의 전쟁은 가급적 자제했다.
그러나 수많은 스웨덴인들은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을 추억하며 발트해의 패권을 되찾고 싶어했다. 또한 18세기부터 세력이 급격히 강해진 프로이센이 발트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스웨덴 정부는 큰 위협을 느꼈다. 이에 스웨덴은 역시 발트해의 종주권이 프로이센에게 위협받는 걸 원치 않았던 러시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슐레지엔을 반드시 되찾고 싶어한 오스트리아와 연합해 프로이센에 대항했다. 스웨덴은 이 연합을 통해 프로이센을 굴복시킬 경우 과거 프로이센에게 빼앗겼던 포메른 서부지역을 되찾기를 희망했다.
그러던 1756년 프리드리히 대왕이 작센을 침공하자, 스웨덴은 프로이센이 베스트팔렌 조약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며 이를 전쟁의 구실로 삼았다. 이후 스웨덴은 1757년 3월 21일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함께 독일의 자유를 보장하는 군사 행동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프랑스는 스웨덴에게 재정 지원을 약속했고, 스웨덴은 이에 따라 2만 가량의 병력을 독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757년 9월 13일, 스웨덴군은 포메른을 전격 침공했고 9월 22일에 프로이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당시 스웨덴군은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병력 수와 물자 모두 부족했으며 병사들의 훈련 상태도 엉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포메른 지역의 몇몇 마을을 점거했을 뿐 더이상 남하하지 않았다.
프로이센 측은 처음엔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랑스에 전력을 쏟느라 이들의 존재를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세 강대국들과 격전을 치르며 국력 소모를 감당하기 어렵게 된 프로이센은 스웨덴군이 소규모나마 베를린에서 멀지 않은 북방 영토에 주둔하고 있는 걸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이들이 러시아군과 합세하거나 프랑스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 대규모 병력을 육성한다면, 가뜩이나 사방에서 사방에서 전장을 치르고 있는 프로이센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베를린 수비를 맡고 있던 칼 하인리히 폰 베델 장군에게 스웨덴군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베델은 토르노프 전투에서 스웨덴군을 격퇴한 뒤 여세를 몰아 페흐벨린으로 진군한다.
3. 양측의 전력
3.1. 스웨덴군
- 사령관: 칼 콘스탄틴 드 카놀
- 병력: 800명, 야전대포 3문 + 증원군 1,500명
3.2. 프로이센군
- 사령관: 카를 하인리히 폰 베델
- 병력: 보병 5,000명, 기병 1,000명
4. 전투 경과
페흐벨린은 하벨강에서 20km 남쪽에 있는 도시로, 토르노프에서 불과 몇 km밖에 떨어지지 않으며, 린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린-루흐 도로의 교두보를 형성하는 곳이다. 베델 장군이 이 성벽이 없는 도시를 탈환한다면 스웨덴군이 베를린을 향해 더이상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었다. 페흐벨린에 주둔한 병력은 2개의 보병대 700명과 기병 100명, 대포 3문이었다. 헤프벨린의 도로는 경기병대에 의해 통제되었고 서쪽, 남쪽, 동쪽을 잇는 도로엔 장애물이 세워졌다. 스웨덴군은 도시로 진입하는 세개에 관문에 각각 하나의 대포씩 설치했다.
9월 28일 새벽 3시, 베델은 군대를 둘로 나눠 페흐벨린의 동쪽과 남쪽 입구를 향해 진군했다. 이들은 어둠을 틈타 새벽 5시까지 적에게 발각되지 않은 채 행진했다. 새벽 5시, 베델의 포병대가 스웨덴 포대를 공격했고, 적이 오는 걸 눈치채지 못했던 스웨덴 포병대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채 패퇴했다. 이후 척탄병들을 앞세운 프로이센군은 2개의 관문을 돌파해 도시 내부로 진입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스웨덴군은 천천히 후퇴하면서도 탄환 세례를 퍼부으며 2시간 동안 시가전은 완강하게 벌였다. 프로이센군은 이들을 북문과 린 다리 북쪽으로 밀어내는 데 큰 손실을 입었다.
이윽고 다리 북쪽으로 밀려난 스웨덴군은 대열을 갖춘 채 적을 향해 일제 사격을 퍼부었고 뒤늦게 전열을 재정비한 스웨덴 야전포병들도 호응했다. 이들의 이러한 침착한 수비에 막힌 프로이센군은 공세를 중단했다. 바로 그때, 스웨덴의 증원군 1,500명이 랭겐에서 몰려왔다. 이에 프로이센군은 적과 포격전을 벌이는 동시에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공략하려 했으나 적의 거센 저항으로 실패했다. 베델은 아예 다리에 불을 지르려 했지만 스웨덴군의 적절한 진화 작업으로 실패했다.
그러던 중 스웨덴군 주력부대의 선봉부대가 근처에 이르렀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베델은 더이상의 공세를 포기하고 군대를 수습해 데흐토프 근처의 진영으로 후퇴했다. 이리하여 페흐벨린 전투는 스웨덴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스웨덴군은 이 전투에서 5명의 장교와 91명의 병사를 잃었고 9명의 장교와 22명의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다. 또한 그들은 많은 탄약마차와 보급 마차를 상실했다. 한편 프로이센군은 장교 1명과 병사 13명이 사망했으며 2명의 장교와 33명의 병사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베델은 스웨덴군을 축출하려던 게획을 포기하고 베를린 수비에 전념했고, 스웨덴군 역시 프로이센군의 막강한 전투력을 두려워해 베를린 진공을 감행하지 못한 채 포메른에 그대로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