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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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전쟁 전의 형세
3. 제1차: 보헤미아-팔츠 전쟁(1618~1620)
4. 제1.5차: 팔츠 수복전 (1621~1623)
5. 제2차: 덴마크 전쟁(1625~1629)
6. 제3차: 스웨덴 전쟁(1630~1635)
7. 제4차: 프랑스-스웨덴 전쟁(1635~1648)
8. 결과
9. 여담
10. 참고문헌

독일어: Dreißigjähriger Krieg
스웨덴어: Trettioåriga kriget
스페인어: Guerra de los Treinta Años
프랑스어: Guerre de Trente Ans
체코어: Třicetiletá válka
영어: Thirty Years' War

1. 소개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중부유럽을 무대로 벌어진 전쟁을 일컫는 말. 서유럽 최후의 종교 전쟁이자[1] 서양 최초의 국제 전쟁[2]으로서, 나폴레옹 전쟁, 세계 대전 못지 않게 유럽사에서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온 대사건이다.
전쟁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 신성 로마 제국의 구심력의 부재: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북부, 보헤미아, 스위스 칸톤 등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국가들의 군주들과, 360개의 자유도시들의 모임이었다. 이미 약했던 황제의 권력은 갈수록 약해지는 반면 구성원들은 점점 강해지는 바람에, 30년 전쟁의 시발점이었던 종교 전쟁은 제국을 유지하려는 제국파와 독립을 추구하는 구성국가들의 싸움으로 번진다. 애초에 이들을 묶어주는 것은 제국 황제가 가진 가톨릭의 대리자라는 타이틀인데, 로마 가톨릭의 권위는 추락하고 개신교라는 대안이 생기면서 이런 국가들의 독립 의지는 구체화된다.
  • 프로테스탄트의 대두와 자유도시 발달: 당시 자본의 발달로 자유도시가 성장하자, 기술자들은 가톨릭의 중세적인 교리가 돈이 안 된다고 판단하여, 신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서, 가톨릭으로 정치가 겨우겨우 통합되어 왔던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 제도에서 다수의 자유도시들이 신교도의 교리를 지지하는 희대의 국가 이념 분열 사태가 열리게 되었다.
  • 유럽 국가들의 이득 계산: 가뜩이나 유럽 중앙이었던 독일지방은 확고한 충성심이 희박한 시절이었다보니, 모든 유럽의 귀족들이 독일 지방에 하나씩 영지나 공장이나 가족을 두고 있었던 지경이었다. 이러한 주변의 유럽국가들은, 종교대립과는 관계없이 그냥 본인들의 이득에 따라서 각 독일 지방의 영지와 도시를 더 뜯어먹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종교가 지배했던 중세에서 종교적 연대보다는 자신의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근대적 형태의 국가로 이행해가는 과정으로 보기도 한다.
결국, 이 전쟁은 구교(제국보수파)와 신교(자유도시파)의 영주들이 떼돈을 버는 자유도시들을 놓고 패를 갈라싸운것에 더 가깝다(...). 물론 시발점은 종교분쟁이었지만, '''구교 국가임에도 이해 관계에 따라 개신교 연합으로 참여한''' 프랑스 때문에 종결된 전쟁이기도 했다. 신교들은 전술적인 발달사를 많이 남겨서 전적이 클 것이라는 착각이 있으나, 세력 구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톨릭 동맹의 압도적인 강세였고 신교 측의 기술은 금방 벤치마킹되어 큰 차이는 없었다. 이 전쟁의 결과물인 베스트팔렌 조약 역시도 독일이 분열되기를 바랐던 같은 가톨릭 동맹의 프랑스의 판단이 작용했다. 당시 프랑스의 가톨릭 추기경이자 실권자였던 리슐리외는 수세기에 한 번 나오는 현명한 명재상이었는데,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세력인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2세가 갑자기 중앙권력 강화를 꿈꾸는 뻘짓을 하자, 프랑스의 미래를 위해서 '''종교가 뭐든지 간에 독일이 하나로 뭉치면 큰일난다'''라는, 수백 년 앞선 선견지명으로 신교동맹을 도와서 '종교의 자유'라는 명선언문으로 독일의 정치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노린 것이다.[3]
총 4번에 걸쳐 따로 벌어진 전쟁이 서로 깊이 관련돼 있기 때문에, '30년 전쟁'으로 묶어서 호칭하고 있다. 유럽러시아, 영국, 오스만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제외하면 전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가버린 탓에 이 전쟁은 본격적인 세계 외교사의 기점으로도 기록되고 있다.
30년 전쟁을 평가하자면 종교 전쟁으로 시작해서 쩐의 전쟁으로 끝난 전쟁이라 볼 수 있다. 전쟁이 30년씩이나 진행된 것은 유럽 각국이 참여해서 길어진 면도 있지만, 신교나 구교나 한 쪽이 압도적인 세력을 갖지 못한 측면이 크다. 한쪽이 우월한 세력으로 상대방을 완전히 격멸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이 장기화 된 것이다.

2. 전쟁 전의 형세


이미 전 세기에 있었던 마르틴 루터종교개혁 운동으로 독일은 1530년대에 한 차례 큰 내전이 치러졌고, 당시 황제 카를 5세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지속적인 제후 반란을 진압해내긴 했지만 그만큼 국고의 소모가 심하여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주선했다.(자세한 것은 카를 5세 문서 참조.) 그 결과 일단 루터파에 대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나 이 조약은 기본적으로 영주 개인의 신앙을 기반으로 영지의 신앙을 결정 짓는 난점이 있었다. 그래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약발이 먹혔는지, 16세기가 끝날 때까지는 그런 대로 큰 갈등 없이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가장 중요했던 변화는 칼뱅파의 득세였다. 아우크스부르크의 화의는 어쨌든 가톨릭과 루터교 간의 협약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칼뱅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 칼뱅파도 신앙의 자유를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문제가 생겼는데 영주가 칼뱅파라면 문제 없이 넘어가겠지만, 가톨릭이라면 그대로 이단 확정. 루터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곱게 보지는 않았다. 오죽하면 루터파 측에선 '칼뱅파의 이 그 무시무시한 무함마드교를 잉태했다'는 중상모략까지 할 정도였다.[4] 칼뱅파의 교세가 확장될수록 혼란은 더욱 커져서 칼뱅파 신하가 어린 루터파 영주를 칼뱅파로 몰래 개종시키는 등의 일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같은 개신교라도 루터파와 칼뱅파의 감정의 골은 깊어져 갔다.
이는 일단 새로 세력을 막 불리려는 두 개신교 종파 간의 싸움이란 측면도 있었지만, 원론적으로 루터교는 가톨릭 교회의 교리만 거부하지, 종교에 따라 오는 정치-사회적 조직과 구조는 기존의 중앙 집권화를 이룬 절대주의적 모델을 중심으로 성장한 반면, 칼뱅파는 도시민들이나 정치적으로 이 시절 진행 중이었던 권력의 중앙 집중화에 반발하는 지역 봉건 영주들을 중심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당장 루터교의 안방이라 할 수 있는 작센, 브란덴부르크, 덴마크, 스웨덴 같은 곳들은 죄다 나라의 수도를 중심으로 군주들이 조직화된 관료 집단을 기반으로 강력한 중앙 권력을 휘두른 반면, 칼뱅교가 퍼져나간 네덜란드, 남프랑스, 스코틀랜드, 헝가리, 라인 강변의 자유도시 등의 지방들은 이런 상업 문화가 발달한 도시들이었거나 런던, 파리, 빈 등 군왕들이 거주하는 수도의 권력 팽창에 맞서 지방 영주의 자치권을 둘러싼 갈등이 펼쳐졌던 지역들이다.
가톨릭 쪽 상황도 그리 좋은 편만은 아니라서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측은 개신교 쪽에 강경한 입장인 예수회가 강성했던 반면, 프랑스나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보다 온건한 입장이었던 카푸친 작은형제회[5]가 영향력이 있었다. 앙숙인 에스파냐에서 예수회가 대세라서 프랑스에서는 카푸친 작은형제회를 밀어준 것도 있다.
전쟁의 공식적 발단(casus belli)은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전쟁의 조짐은 전부터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도나우뵈르트 사건이다. 인구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인 이 도시는 지리적으로 "내륙시(市)"로 가톨릭인 바이에른 주에 둘러싸여 있었다. 1606년 4월 25일, 이 도시의 소수 가톨릭이 정부에 예배행렬을 할 것을 요구했고, 예배행렬을 혐오하며 우상숭배 취급하는 개신교 교리상, 정부는 거부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가톨릭 신자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중재를 요구했고, 가톨릭의 수호자인 황제는 너무 당연하게도 가톨릭 신자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황제는 도나우뵈르트에게 교황령의 파문과 비슷한 형벌인 추방형을 선고했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바이에른 주의 왕인 막시밀리안 1세 공작은 [6] 도나우뵈르트를 정벌, 자신의 영토에 종속시켰다. 이에 충격받은 중부유럽의 프로테스탄트 소도시들은, 루터파 칼뱅파 불문하고 네덜란드, 영국, 당시 개신교였던 프랑스를 포함한 프로테스탄트 연대를 설립한다. 이에 대응해 바이에른 주의 막시밀리안 1세는 스페인, 제국의 가톨릭 제후국들과 협정을 맺고 가톨릭 연대를 창설한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을 점점 가시화되고 있었다.

3. 제1차: 보헤미아-팔츠 전쟁(1618~1620)


합스부르크 가의 영지였던 보헤미아(체코)는 동생 마티아스(신성 로마 제국)의 봉기로 수세에 몰린 루돌프 2세를 협박해 신앙의 자유를 받아냈다.[7] 그런데 마티아스는 이미 고령에 자식이 없었던지라 친척 중에 쓸 만한 후계자를 찾게 되는데 이것이 영 시원찮아서 그나마 고르게 된 게 사촌 동생뻘인 페르디난트 대공이었다. 왜 시원찮았는가 하면 페르디난트 대공이 이때까지 워낙 조용히 살다보니 에스파냐 쪽에선 듣보잡 급의 인지도를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에스파냐 측에서 '그런 애송이를 후계자를 삼느니 우리가 쓸 만한 사람 찾아서 추천해 줄까요?'라고 물어볼 정도였다. 페르디난트는 에스파냐의 인정을 받기 위해 많은 돈을 써야 했는데 재산이 많은 편은 아니었던지라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빚을 안고 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어렵사리 후계자 선정은 마쳤지만, 또 하나의 문제가 황제로 선출되는 과정이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황제는 7명의 선제후들의 합의를 통해 선출하게 되는데 마인츠 선제후를 비롯한 3명의 선제후[8]는 가톨릭이었고 팔츠를 위시한 3명의 선제후[9]가 개신교였다. 남은 한 명의 선제후가 바로 보헤미아 왕이었는데 이 보헤미아 왕과 황제를 겸하고 있던 마티아스는 순조로운 권력 이양을 위해 보헤미아 왕위를 페르디난트에게 물려주기로 한다.
보헤미아 지역은 얀 후스의 영향으로 개신교의 영향이 컸지만 양형 영성체 방식을 행하는 가톨릭의 모습도 공존하고 있었다.
  • 여기서 양형 영성체는 성체성혈을 같이 받아 먹는 것으로서, 중세 이후 성혈 영성체는 정해진 이들에게만 한정되었고, 트리엔트 공의회로 1564년부터 독일에서 1년간 잠시 시행되었다가 철회되었다. 그러나 보헤미아 지방은 예외적으로 2세기 전 후스파 전쟁의 종결 당시 후스파 중 온건파였던 양형 영성체파와 가톨릭 세력과의 타협으로 '형식적으로 로마 교황의 수장권을 받아들이되 성혈과 성체 모두 치루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이후 양형 영성체가 재도입 된 것은 대단히 최근인 20세기 중반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이루어졌다. 현재는 한국을 포함한 교황에게 허가 받은 주교하의 대부분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성사, 견진성사, 혼인성사, 성품성사, 병자성사 파견 미사 등에서 시행될 수 있다. 되려 오늘날은 개신교가 양형을 많이 한다는 게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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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되었건 문제가 된 것은 뒤를 이어 보헤미아 왕이 된(그리고 유력 계승 후보인) 골수 가톨릭인 페르디난트 2세가 가톨릭 신앙만을 강제하려 했고 이에 분노한 귀족들이 왕성에서 가톨릭 관리(황제 대리인으로 와있던) 2명과 황제 대리인의 비서를 전방 수류탄 시킨 '''제2차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위 이미지)'''이 일어난다.[10][11] 보헤미아 왕은 선출되는 방식이 특이했는데 약 1,400명의 귀족 가문의 대표가 의회에 모여 왕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마티아스가 부탁하고 설득해서 1,400명이 모여 페르디난트를 뽑아놨더니 뽑아논 지 3일도 안 돼서 저런 협박을 한 터라 분노가 더했다.
이를 계기로 1618년 겨울 보헤미아 귀족들은 본격적으로 마티아스 황제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초기에는 오스트리아에서도 보헤미아에 동조하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해서 빈을 포위하기도 하는 등 보헤미아 반군이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보헤미아 의회에서도 페르디난트를 대신할 새로운 왕을 찾는데, 여기서 선택된 사람이 팔츠 선제후이자 영국제임스 1세사위였던 프리드리히 5세[12]였다. 보헤미아 왕 자리를 권유받은 프리드리히 5세는 고민에 들어갔다. 선제후로서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권력이 있는 보헤미아 왕을 겸하게 된다면 황제 선출 회의에서 구교 측 페르디난트를 강하게 견제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황제의 자리에 올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보헤미아를 덥석 먹었다가는 합스부르크의 어그로를 사서 역공에 시달릴 가능성도 있다. 결국 프리드리히 5세는 여러가지를 고려한 끝에 장인의 나라인 영국의 지원을 믿고 왕위 수여를 위해 영지였던 팔츠를 떠나 보헤미아로 떠나게 된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떠나가는 와중에 "팔츠령을 보혜미아로 가져가는구나"라고 말했고 이는 나중에 다른 형태로 실현되고 말았다. 지못미(...). 더구나 지원해 줄 거라 믿었던 장인마저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 왕위에 오르는 것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1619년 11월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로 가던 중 마티아스 황제가 죽었다. 프리드리히가 보헤미아로 왕위를 잇기 위해 '''가고 있던 중이라''' 쫓겨나긴 했어도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 왕 자격으로 회의에 출석하게 된다. 회의 결과 수년 동안 여기저기 밑밥을 깔아논 페르디난트가 황제에 오르게 되었다. 심지어 공석이었던 프리드리히 5세를 대신해 나온 팔츠 측 대리인도 대세에 밀려 페르디난트를 선출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2세가 황제가 되자마자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 왕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3]
그렇다고 보헤미아 왕이 된 프리드리히 5세도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앞에도 서술한 바와 같이 보헤미아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지대에 위치한 특이한 경우였는데, 프리드리히 5세도 여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게다가 프리드리히의 아내이자 영국 제임스 1세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도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는데 여자가 통치에 나서는 것은 보헤미아의 정서상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결국 1년 만에 보헤미아의 여론은 '독일 왕 괜히 데려왔다'로 모아진다.
게다가 프리드리히 5세가 칼뱅파였던 탓에 다수를 차지하던 루터파의 지원을 얻지 못했던 반면,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2세는 바이에른 공 막시밀리안과 그 수하였던 명장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를 위시한 가톨릭 세력과[14] 스페인의 지원을 얻는다. 프리드리히는 에스파냐의 원군은 다른 개신교 세력이 막아줄 거라 기대를 하고 황제와의 대결에만 집중하려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독일과 보헤미아의 개신교 세력이 기대할 수 있는 주요 외국은 같은 개신교 국가인 스웨덴과 영국, 그리고 가톨릭이지만 합스부르크와 숙적인 프랑스와 사보이 공국이었다. 우선 스웨덴은 당시에는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발을 뺄 수 없는 상태였다. 프랑스는 프리드리히가 또다른 숙적 영국왕의 사위라는 점 때문에 지원을 주저했다.
한편 프리드리히 5세가 합스부르크의 공격에 대비해서 사보이 공작[15] 밑에서 용병 군대를 이끌던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를 보헤미아로 데려왔었는데 이때 부대를 빌려오며 했던 약속이 '부대 빌려주시면 황제 선출 회의에서 공작님 밀어드릴께.'였다. 당근 황제는 물 건너갔고 먼 곳까지 대여한 부대를 돌려받기도 쉽지 않게 된[16] 공작은 열 받은 나머지 페르디난트가 에스파냐 쪽에 요청한 원군을 그대로 독일 방면으로 통과시켜 준다... 프리드리히가 믿었던 영국군도 네덜란드 방면의 에스파냐군에게 발목 잡혀 팔츠에는 도착하지 못했다. 결국 스피놀라[17]가 이끈 에스파냐 군이 팔츠를 손쉽게 점령하며 프리드리히 5세는 본진을 잃고 멀티만 남는다.
1620년 11월 8일 보헤미아 빌라호라(백산)에서 부쿼이 백작이 이끌던 제국군 3만과 안할트 백작이 중심이 된 보헤미아+독일군 2만의 전투가 벌어진다. 결국 제국군의 대승리로 전투가 끝나고 프리드리히 5세가 네덜란드로 망명[18]하면서 1차 시기는 종결되었다.

4. 제1.5차: 팔츠 수복전 (1621~1623)


보헤미아를 회복한 페르디난트 2세는 팔츠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고민에 빠진다. 바이에른 공 막시밀리안에게 지원을 받을 때 해줬던 약속이 팔츠 선제후 자리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제후란 게 선출회의에서 알 수 있듯이 황제가 누구에게 주고 빼앗고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먼저 다른 선제후들의 반발이 거셌고 영국과 에스파냐 쪽에서도 프리드리히 5세를 폐위시키는 대신 그의 아들을 즉위시키는 것을 제의해 왔다. 하지만 막시밀리안에게 이미 약속을 했던 황제는 교황의 지원을 얻어 막시밀리안을 팔츠 선제후로 즉위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에 신교 측 선제후들은 승인을 거부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그리고 네덜란드에 망명 중이던 프리드리히 5세가 팔츠를 되찾기 위해 결성한 군대에 호응하여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동생이었던 크리스티안과 바덴변경백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등이 군사를 일으킨다. 문제는 네덜란드에서 프리드리히 측 군대를 이끈 것이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였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돌리며 새 고용주를 찾고 있던 만스펠트는 모두 퇴짜를 맞고 자금난에 허덕였다. 여기에 새로이 영국과 네덜란드의 지원을 얻게 되면서 여유가 생기고 막시밀리안에게 눈 뜨고 선제후 자리를 뺏기기 직전이었던 프리드리히 5세는 즉시 전력감을 찾고 있었다. 이에 부합했던 게 만스펠트의 용병대였다. 급하게 선금을 치르며 만스펠트를 영입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문제는 일단 숫자는 얼추 제국군과 대등해졌지만 따로따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만스펠트가 팔츠 회복을 위해 알자스로 진군을 시작하고 크리스티안과 바덴 변경백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리 없는 제국군도 먼저 틸리를 통해 바덴 변경백을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크리스티안을 추격하는데 크리스티안은 군자금을 벌기 위해 신교 구교 가리지 않고 도시들을 약탈하고 있었다. 어렵게 만스펠트와 크리스티안이 근접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크리스티안이 틸리군에 따라잡혀버린다. 결국 도강 교두보에서 대포와 보급품을 포기했으나 대다수의 병력과 약탈한 물자를 보존한 채로 만스펠트와 합류한다. 젊고 자신만만한 크리스티안은 결전을 원했으나, 휘하 용병이 유일한 자산이었던 만스펠트는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만스펠트는 프리드리히 5세와의 계약을 해지했으나, 일단은 연합해서 네덜란드를 공격 중이던 스페인군을 격파하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사이 틸리는 남부 독일을 정복했으며, 이에 힘입어 페르디난트는 독일과 보헤미아를 자신의 추종자를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국내외에 반발을 불러왔고 특히 할버슈타트 주교구는 분쟁의 중심에 있었다.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막내아들[19]을 이곳의 대주교로 임명하고자 했으나, 크리스티안이 이곳을 점령하고는 덴마크왕의 아들을 대주교로 선언하고는, 도시를 내버리고 네델란드로 후퇴해버렸다. 이로인해 크리스티안은 할버슈타트의 광인이라는 악명을 얻게된다. 그는 만스펠트와 네델란드의 오라네공과의 연합을 구상한 듯 하나, 만스펠트는 여전히 전투를 거부했고, 약탈품으로 기동이 느려진 크리스티안의 부대는 네덜란드에 도달하기 직전에 틸리의 군대에게 덜미를 잡혀 1623년 8월 8일 슈타트론에서 괴멸당한다.

5. 제2차: 덴마크 전쟁(1625~1629)


여기서 페르디난트 2세는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5세를 적절하게 용서해 주라는 청원도 있었다. 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페르디난트는 이를 거부했고 프리드리히의 작위를 파면한 다음, 그의 영지를 몰수하였으며, 기존의 그의 영지와 작위를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20]에게 하사한다. 이는 프리드리히가 대외의 신교국들에게 가톨릭을 신봉하는 절대 권력의 황제 출연을 경고한 꼴이 되었고 대외적으로 경각심을 사게 된다. 특히 프랑스는 자신들의 전략적 안보와 연결된 라인팔츠 지대에 가톨릭 합스부르크의 세력이 들어서게 되는 것에 경계심을 갖게 된다.
이 무렵 집권한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는 합스부르크에 대항하는 포위망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영국(!) - 프랑스 - 네덜란드 - 덴마크 - 스웨덴의 연합으로 합스부르크를 억누르려 시도했다. 영국은 제임스 1세가 사위의 복권을 바라고 있었고,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독립 전쟁으로 바쁜 와중에 배후의 북독일 지역에 강력한 가톨릭 합스부르크 세력이 들어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단, 영국과 프랑스는 직접적인 개입을 꺼렸으며[21], 덴마크와 스웨덴을 내세웠다.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은 누가 작전 지휘권을 가지는가의 문제로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었다. 스웨덴은 개입을 위해 전쟁 중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휴전까지 맺은 상태였으나, 정작 영국과 프랑스는 덴마크를 지지했다. 이에 빡친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을 재개하면서 동맹에서 이탈했고, 덴마크만이 독일을 침공하게 된다.
덴마크는 전통적으로 홀슈타인 등의 가까운 독일 영토를 두고 독일 제후국들과 대립 관계에 있었다. 전쟁으로 제국이 혼란해진 틈을 타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영국, 네덜란드의 후원을 업고 독일 영토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였다.[22] 이에 신성 로마 제국은 황제군의 수장으로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가톨릭 연합세력인 가톨릭 리그는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를 수장으로 하여 덴마크군에 맞섰다. 반대편에서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의 용병대, 그리고 브라운슈바이크의 공작 크리스티안이 나왔다.
틸리와 발렌슈타인이라는 드림팀 앞에서 덴마크군은 여지없이 깨져나갔다. 크리스티안 4세의 군사적 능력은 이들을 당해내기에는 영 모자랐고[23], 만스펠트는 새롭게 제국군을 맡은 발렌슈타인을 깔보았다가 데사우 전투에서 대판 깨지며[24], 이후 베네치아에 지원을 요청하러 가다 급사하면서 역사에서 퇴장한다. 연전연패한 덴마크는 심지어 본토인 유틀란트까지 유린당했고, 해군을 앞세워 독일 해안가를 약탈하는 전법으로 맞서지만 대세를 돌리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덴마크군은 이 전쟁에서 패한 뒤, 뤼벡 평화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유럽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발렌슈타인은 덴마크에 '''대단히 관대한 조건들'''을 제시했다.
  1. 앞으로 덴마크 왕이 신성 로마 제국의 일에 개입할 때는 덴마크의 국왕이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 슐레스비히 공작의 자격으로만 개입할 수 있다.
  2. 전쟁 배상금은 없다.
  3. 포로는 즉시 교환한다.
덴마크 전역을 유린하고 있는 승자의 요구라고 보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관대한 조건이었다. 그 덕분인지 덴마크는 3차 전쟁기에 중립을 지켰으며, 4차 전쟁기에는 오히려 구교측에 가담했다가 토르스텐손 등의 스웨덴을 주축으로 하는 신교 군에게 안드로메다 관광 열차를 타게 되기도 했다.

6. 제3차: 스웨덴 전쟁(1630~1635)


덴마크의 침공을 물리친 페르디난트 2세는 이때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황제는 그 기회를 다시 발로 차버리고 만다.(…) 이 시기에 페르디난트가 왜 독선적인 움직임을 보였는지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석될 수 있는데, 1차적으로는 그의 독실한 종교관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특히 페르디난트는 절대 권력을 추구했다기보다는 전쟁을 등에 업고 절대 권력을 행사한 쪽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이 시점에서 독일 내에서 페르디난트에 반항할 수 있는 군주가 없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나온 것이 복권 칙령(Edict of Restituion), 한 마디로 요약하면 1555년 이후 진행된 모든 변동된 교회 재산을 1555년 이전으로 되돌리라는 것. 신교 정권이 들어선 곳에서 야금야금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잠식한 것들이 적지 않아서 이게 법적으로는 옳은 조치이기는 한데, 문제는 이 상황이 무려 70년에 걸쳐서 진행된 것이라 이제 와서 황제의 말 한마디에 정리될 수 없는 지경까지 와버린 것. 구체적으로는 신교도 주교 영주에 의해 통치되는 영지와 신교도 영주에 의해 강탈당한 영지를 가톨릭 지역으로 되돌리는 것인데, 마그데부르크, 할버슈타트, 브레멘과 남독일 지역이 이에 해당된다. 복권 칙령의 대상인 신교도 제후들은 당연히 반발했고, 황제 편을 들던 가톨릭 제후들 역시 자기들도 빼먹은 게 많았기 때문에 반발한다. 심지어 황제의 최대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마저도 복권 칙령에 반발한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이를 제국 의회의 의결없이 황제의 칙령으로 밀어 붙였고, 발렌슈타인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강제로 집행했다. 이는 프랑스가 보기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북독일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였다.
여기에 페르디난트는 발트해로 진출한 발렌슈타인을 통제하지 못했다. 특히 황제는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발렌슈타인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황제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이를 방관했다. 발렌슈타인은 스웨덴과 보호 조약을 체결한 항구도시 슈트랄준트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25] 한편,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에게 그가 정복한 메클렌부르크 공국의 공작위를 수여했는데, 이는 소지주 출신이 황제의 말 한마디로 독립 군주가 되었다는 점에서 제국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였다.
마침 페르디난트는 아들인 페르디난트 3세를 제위 승계 예정자인 '로마 왕'으로 만들어야 했으며, 스페인은 황제가 독일 내에서 승리했다고 판단하고 네덜란드 공격을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의 주도로 소집된 가톨릭 동맹은 회의를 통해 페르디난트 3세의 승계를 원한다면 발렌슈타인의 공작위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1630년에 레겐스부르그에서 소집된 회의에서 선제후들은 발렌슈타인의 해임, 토지반환령 철회 등을 요구했으며,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의 해임에는 동의하여 가톨릭 선제후들을 진정시키고 바이에른과 밀약을 맺으려고 했던 프랑스를 잠시 몰아냈다.[26] 하지만 황제는 종교적 열정 때문에 끝내 토지반환령의 철회를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황제파의 주도권은 다시 가톨릭 동맹이 장악하게 되었고, 신교 선제후였던 작센과 브란덴부르크는 안 그래도 발렌슈타인에 시달렸는데 토지반환령까지 강행되니 결국 황제와 적대하고 스웨덴에 붙게 된다. 게다가 이 와중에 스웨덴이 침공함으로써 제국은 전보다 더 확실히 둘로 쪼개지게 되었고, 전쟁은 본격적으로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스웨덴의 사자왕이며 유능한 지휘관이자 스웨덴을 열강의 지위에 올려놓은 왕인 구스타프 2세 아돌프(1594~1632)는 발트해 지역을 보다 더 확실하게 장악하고 싶어했다. 루터파이기도 했던 그는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포메른에 상륙하여 독일 침공을 개시한다. 이때 프랑스가 합스부르크가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스웨덴을 지원했고[27], 제국 내부에서도 신교파 도시였던 마그데부르크에서 황제군 용병들의 대학살극[28]이 벌어지면서 같은 루터파였던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그 1세를 위시한 많은 신교도 제후들이 분노하며 스웨덴군에 가세했다.
든든한 지원군들을 얻은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황제군을 일방적으로 박살냈다. 황제군 사령관 틸리 백작과 파펜하임은 겨우 목숨만 건져 달아날 수 있었다. 스웨덴 측은 구스타프의 혁신적인 군제 개혁이 이루어 낸 성과에 고무되었고, 이후 전쟁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붙였다. 또 이 전투의 여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는데, 우선 스웨덴이 생각보다 잘 싸워준다고 판단한 프랑스가 지원 규모를 크게 늘렸다. 또한 브란덴부르크, 하노버, 헤센 등의 제후들은 신교도였음에도 1, 2차 전쟁에서 황제군에게 호되게 당했던 탓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들마저 스웨덴을 믿고 다시 황제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호재가 겹치면서 더욱 막강해진 스웨덴군은 레흐 강 전투에서 황제측 총사령관 틸리까지 전사시키며 기세를 올렸다. 이에 페르디난트는 내쫓았던 발렌슈타인을 다시 호출했는데, 발렌슈타인은 스웨덴군에게 이길 수 없음을 인정, 시간을 끌기로 결정한다. 독일 전역을 헤집고 다니는 스웨덴군은 뤼첸 전투에서도 황제군을 격파하는 등 연전연승했으나, 이 전투에서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전사하게 된다. 그의 전사 이후에도 스웨덴군은 지속적으로 전투를 계속하였고 1634년 발렌슈타인은 스웨덴과의 화평을 준비하나 페르디난트 2세에 의해 암살당해[29] 뜻을 이루지 못한다.
구스타프의 죽음은 신교 동맹군의 결집력을 약화시켰다. 브란덴부르크와 작센은 전투에 소극적이었고,[30] 신교 측의 주요 세력이었던 스웨덴군의 구스타프 호른과 작센-바이마르 공작인 베른하르트는 서로 반목했다. 반면 황제군 입장에서 양날의 검 같았던 발렌슈타인의 죽음은 이 무렵 본격적으로 유럽 무대에 데뷔한 페르디난트 3세가 군 통수권을 확고히 가질 수 있는 기회였다. 이후 전투를 계속한 끝에 페르디난트 3세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31]가 이끄는 황제군은 신교군을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제압하고 1635년 프라하 조약을 통해 전쟁은 일단 종결된다. 이제 독일 북부에 잔존해 있는 소규모 스웨덴군만 몰아내면 되었다.

7. 제4차: 프랑스-스웨덴 전쟁(1635~1648)


프라하 조약 이후로도 꾸준하게 충돌이 존재했다. 황제군은 프라하 조약을 통해 외국 세력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작센과 브란덴부르크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제후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군에게는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해안 지대의 신교 세력을 완전히 일소할 수는 없었다. 스웨덴 입장에서는 위대한 왕이 전사한 마당에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었으나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박살이 나는 바람에 처음 상륙한 포메른으로 후퇴해 버티기만 시전하는 중이었다. 다행이 폴란드와의 평화가 유지되면서 폴란드와의 전쟁에 대비해 준비했던 군대를 독일로 보낼 수 있었고, 전장에 있던 재상 옥센셰르나가 스톡홀롬으로 복귀하여 군대의 보급을 정상화시켰다.[32]
페르디난트 3세와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는 아버지 세대와 달리 전쟁을 겪으면서 성장했던 세대였기에 종교적 열정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마드리드의 스페인 정부는 지속적으로 현지 사정을 잘 아는 페르난도의 정책에 태클을 걸고 통제하려 들었고, 스페인 본토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어 페르난도를 지원할 경제적 여유가 부족했으며, 결정적으로 1640년에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이 일어난다. 프랑스의 압박은 독일을 지원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페르디난트는 스웨덴과 강화를 맺으려 애썼으나, 포메른을 얻으려는 스웨덴의 의지와 프랑스의 막후 조정이 그를 좌절시켰다. 무엇보다도 국가 전체가 합스부르크에 포위된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전쟁에 참여해서 합스부르크를 몰아내야 했고, 독일 밖의 이해 관계로 전쟁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가톨릭의 대표적인 세력이면서도 합스부르크 가문과 경쟁관계에 있던 부르봉 왕조 프랑스는 지속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연맹을 지원하고 있었으나 황제군이 우세를 보이자 기어코 '스웨덴을 동등한 동맹으로 승인하고 스웨덴을 배제한 강화를 거부하는 대신 프랑스는 라인 강 좌안을 얻는다'는 내용의 콩피에뉴 조약을 체결하여 전면적으로 참전했다. 프랑스는 독일 남부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고, 프랑스의 침공에 호응해 스웨덴도 반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3차전까지 신교 측에서 싸웠던 작센[33], 2차전의 주역이던 덴마크는 이번엔 황제측에 가담하게 된다.[34]
전쟁은 스웨덴군의 총사령관으로 사자왕 시절부터 적들과 싸워온 요한 바네르[35], 레나르트 토르스텐손 등의 활약에 힘입어 프랑스 & 스웨덴군의 우세로 흘러간다. 프랑스는 뇌트를링겐에서 패배했던 용병대장 작센-바이마르의 베른하르트를 잘 구워삶아 알자스 지방을 점령했고, 때마침 베른하르트가 요절하는 바람에 그의 군대를 공짜로 조종할 수 있게 되어 더욱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반면 황제 측은 전쟁 초기와 달리 전장을 이끌 인재가 심각하게 부족했고, 그 때문에 연전연패를 반복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독일 전 지역이 오랜 기간 전쟁터가 되어서 이 시점에서는 독일과 헝가리의 자원이 바닥이 나 있었다. 스웨덴과 프랑스야 본토는 털리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원을 쥐어짜낼 수 있었지만, 전쟁 말기가 되면 황제군은 자금이 완전히 떨어져서 군대를 소집하지도 못한다.[36] 1642년 사자왕 구스타프가 황제군에게 굴욕을 안겨줬던 브라이텐펠트에서 황제군은 스웨덴군에게 또다시 패배했고 작센은 스웨덴의 손아귀에 들어온다. 결국 작센은 GG를 쳐 1645년 스웨덴군과 화평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한다. 새로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 즉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라하 조약을 씹고 스웨덴과 독자적으로 평화 협상을 체결했다.
스웨덴군은 북 독일과 보헤미아, 프랑스는 라인란트와 남 독일을 휩쓸었고 황제군은 최후의 반격으로 프랑스를 침공하나 보급이 하도 개판이라 군대가 침공 도중에 소멸(...)당하는 비운을 겪으면서 이마저도 실패한다. 게다가 프랑스의 서부를 위협하던 스페인은 해상에서는 네덜란드의 마아르텐 트롬프[37]가 이끄는 함대에 대패하고, 육지에서는 로크루아 전투의 패배로 사실상 자국 방어에 급급하게 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1645년 얀카우, 뇌르틀링겐에서 황제군은 연달아 대패, 1648년 베벨링호벤 전투로 쐐기를 박고, 페르디난트 3세는 프라하에서 굴욕적으로 도망가야 했다.[38] 황제는 평화조약을 맺고 싶어했지만 이젠 프랑스-스웨덴이 완전히 다 이긴 거나 다름 없는 상황이어서 황제의 평화 요청을 별로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 측의 상황도 극단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던 데다 아직 건재한 스페인도 무시할 수 없었다. 바이에른이 주축이 된 황제군은 프라이부르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냈고, 이는 프랑스 입장에서 협상 테이블에 나올 동기가 되었다.[39] 프랑스의 지원을 받던 네덜란드는 로크루아 전투 이후로는 오히려 프랑스를 두려워하게 되어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둘 사이의 완충 지대로 남겨놓고 싶어했다. 또한 여차하면 오스만[40]까지 참전할 상황이라 프랑스는 결국 협상을 받아들였고,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전쟁을 종결짓게 된다. [41]
베스트팔렌 조약은 당시까지 명목상 계속되던 스페인의 네덜란드 지배를 공식적으로 종결시켰고,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독립국의 지위를 얻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국가들에겐 <황제와 제국을 적대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란 조건하에 상호 또는 외국과의 동맹을 비롯한 거의 완전한 통치권을 부여[42]함으로서 황제의 직위는 사실상 이름만 남는 상태가 되었다. 또한 스페인이 유럽의 패권을 잃었고 그 대신 프랑스와 스웨덴이 패자가 되었다.

8. 결과


  • 개인의 종교의 자유: 가장 널리 알려진 파급 효과는 베스트팔렌 조약의 '개인의 종교의 자유'일 것이다. 특히 '개인'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국가 혹은 영지 단위 개념을 희석시켰으며 후의 민주주의 등장에도 영향을 주었다... 여기까지는 교과서적인 설명이고, 사실 17~18세기 들어서도 종교를 명목으로 탄압받는 일은 많았다. 주체가 가톨릭 교단에서 국가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다만 교회령은 1624년의 상태로 되돌리기로 결정하고,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부인된 칼뱅파도 루터파와 같은 자격으로 승인되었다.
  • 프랑스와 스웨덴의 부상: 30년 전쟁이 종결된 후, 유럽의 세력 균형은 근본적으로 변해 있었다. 프랑스는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스페인을 꺾고 유럽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며 스웨덴발트 해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 합스부르크가의 추락: 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는 가장 높은 세수를 담당하던 부유한 지역인 네덜란드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의 주도적인 입지도 상실했다. 네덜란드스위스는 완전히 독립국으로 승인받았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소속 영방국가들에는 완전한 주권이 주어졌다. 따라서 정신적으로는 교황이 주도하고 세속적으로는 황제가 주도하는 유럽의 가톨릭 제국으로서의 신성 로마 제국은 명목상으로만 남은 채 사실상 해체되었고, 약 300여 개의 영방국가(領邦國家)로 쪼개졌다. 이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위를 독점하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몰락하고 북독일의 신교 대제후이던 호엔촐레른 가문브란덴부르크가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 브란덴부르크가 후에 프로이센 왕국의 모체가 되고 독일 통일의 핵심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주권국가들의 공동체라는 근대 유럽의 본질적인 구조 확립으로 여겨진다. 물론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트리아 자체는 이후 부흥에 성공하고 중부 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리잡았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기존의 신성 로마 제국으로서의 영향력은 사실상 소멸했으며 오스트리아의 대외 영향력 역시 기존의 독일 영방이 아닌 동유럽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 국경의 변화: 각국의 국경선도 크게 변했는데, 스웨덴은 서포메른브레멘 대주교령·페르덴 주교령 등을 획득하고, 프랑스는 메스·투르·베르됭의 세 주교령과 알자스의 합스부르크가 영토를 획득했으며, 브란덴부르크는 동포메른·마크데부르크 대주교령·민덴 주교령 등의 영유를 인정, 바이에른은 남 팔츠의 영유와 선제후 위를 인정받았다.
  • 화기와 전술의 근대화: 군사적으로는 냉병기의 중요성을 슬슬 총포류 등의 화약병기가 따라잡기 시작하며, 테르시오가 퇴장하고 선형진의 시대로 넘어가게 되는 과도기로 볼 수 있다. 주로 개신교 진영의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판 나사우,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등의 명장들에 의해 이러한 혁신이 이루어졌으며[43][44], 결국 전쟁 말기에는 선형진이 테르시오를 물리치기에 이른다.[45] 과학 기술과 경제력을 갖춘 화력덕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럽권의 군사력이 다른 지역 문화권을 압도할 발판이 마련된다. 또 30년 전쟁은 최초로 전쟁 프로파간다가 투입된 전쟁, 최초로 군참 제도를 도입시킨 전쟁으로 기억된다.
  • 유례없는 인명피해: 이 결과 독일 각지의 도시와 마을 및 농장들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가령 독일의 도시 마그데부르크의 경우 황제군에 소속된 용병들의 약탈과 파괴로 인해 인구 3만 중 생존자가 5천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보헤미아 지방에 존재했던 49,000개의 마을들 중에서 겨우 6,000개 정도만 파괴를 겨우 면했다고 할 정도니 얼마나 피해가 큰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예전부터 유럽 사회를 괴롭히던 전염병까지 돌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으며 전쟁과 전염병으로 인해 모든 경제활동이 마비 상태가 되고 결혼율 및 출산율은 급감하고 난민이 대거 양산되면서 독일 지역의 인구 손실은 극에 달했다. 30년의 전쟁 기간 동안 사망한 독일인은 무려 800만 명으로 당시 신성 로마 제국 인구의 1/3에 달했다. 가장 피해가 큰 뷔르템베르크의 경우 전쟁 이전 인구의 75%가 사라져버렸으며 브란덴부르크의 인구손실율은 50% 혹은 그 이상의 수치를 기록했다. 특히 종교적 이유로 호구 조사가 쉬웠던 유럽의 사정을 감안하면 실제 피해도 큰 것으로 예상된다. 오죽하면 당시 독일을 방문하던 영국 외교관인 리처드 웨스턴(Richard Weston)이 본국의 장인한테 '독일은 황폐화되었고 군대는 약탈없이는 존재할수가 없다'고 한탄하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는 전쟁 후의 인구 변화 추이를 봤을 때 1/3의 독일인이 죽은 건 아니고 다수의 인구가 전쟁을 피해 피난민으로 살아가다가 전쟁이 끝나고 다시 돌아왔다는 주장도 있다.
전쟁의 주요 무대가 된 독일 도시와 공국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에 참가한 많은 군인들이 용병이며 이들 용병 가운데 대부분 급료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면 당시 왕들과 제후들은 용병들에게 보수를 제때 지급할 만큼 돈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용주들은 급료를 제때 챙겨주려고 노력했지만, 초기를 제외하면 전쟁이 진행될수록 용병이나 군인들이 급료를 제대로 받은 건 거의 드물었다.[46] 이들은 급료를 못 받는 것은 물론 식량과 장비까지 제대로 못 받는 일도 예사였다. 이 때문에 약탈을 하면서도 죽은 적군이나 민간인의 옷과 장비를 벗겨가는 일도 흔했다. 보급품 충당을 위해 시골 마을들과 도시들을 약탈했으며 따라서 이 전쟁에서 하나의 전형을 이루는 이른바 '늑대 전략'이 시작되었다. 쌍방 간의 군대는 모두 진군 중에 약탈뿐만 아니라 강간과 살육, 방화까지 저지른데다 주민들을 붙잡아서 학대하거나 노예처럼 부려먹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주민들은 군대를 매우 두려워했다.
독일은 후일 이 시대를 암흑시대로 정의내릴 정도로 국제적 입지를 상실하고 작은 소국가로 뿔뿔이 분열한다. 30년 전쟁 관련 다큐에서 당시 시대의 기록과 죽은 사람들의 유골을 보면 식인의 흔적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실제로 발굴된 이 당시 독일 지역의 유골들만 봐도 거의 검이나 레이피어에 부러진 게 아니라 요리용 칼에 잘려나간 흔적들이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다. 기록에서도 먹을 게 없어서 교도소의 죄수들을 잡아서 잡아먹는 등 온갖 식인 행위들이 대놓고 등장할 정도이다. 이로 인해 식인 연구가들 사이에서도 식인의 역사를 30년 전쟁 당시의 독일을 그 기원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독일 전역을 폐허로 만들어 현대 독일인들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긴 제2차 세계 대전도 인구대비 비율을 따졌을 경우 30년 전쟁 만큼의 거대한 피해를 끼치지 못했다.[47] 한편 프랑스는 이 전쟁 이후 강대국으로서 유럽의 패권을 호령하게 된다.

9. 여담



10. 참고문헌


LEBRUN François, L'Europe et le monde XVIè-XVIIIè siècle, 5ème édition, A.Colin
BOGDAN Henry, La Guerre de Trente Ans, 1618-1648, Perrin
LIVET Georges, La Guerre de Trente Ans, PUF, collection "Que sais-je?"

[1] 이라크 레반트 국가의 준동 때문에 세계 최후는 아니다.[2] 만약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국가로 본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비교도 되지 않게 연대가 앞선다. 당시로서는 세계대전급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만으로 한정하더라도 몰락기의 아시리아가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바빌로니아-메디아 연합군과 전쟁을 벌인 사례가 있다. 30년 전쟁은 당시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식민지로 차지하고 있던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양, 동인도 제도 같은 아시아, 아프리카 일대에서도 주로 이베리아 연합 아래 있었던 포르투갈 vs 한창 아시아, 아프리카 무역으로 뻗어 나가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충돌이란 형태로 유럽의 정치적 사건과 맞물려 식민 세력들이 충돌한, 진정한 의미로 범세계적 전쟁을 수반했다는 의미에서 최초의 세계대전이라 하는 것이다.[3] 무엇보다, 프랑스가 침공한 것은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트롤링이 가장 큰 문제였다. 페르디난트 2세는 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 대왕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신교 동맹들이 워낙에 허접한 바보들이다 보니, 과대 망상을 품고 독일제국의 확장을 꿈꾸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 동맹들이 생각했던 이익과 평화를 위한 국경계획 등을 건드리고, 같은 가톨릭 동맹을 건드려서 독일에 등을 돌리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4] 칼뱅파에서 이슬람이 생겨났다는 것이 아니라 칼뱅파가 이슬람적 성향을 띠고 있다는 비판에 가깝다. 성화상에 별로 비판적이지 않던 루터파와 비판적이던 칼뱅파의 차이, 그리고 이슬람교의 성화상에 대한 태도를 생각해 보자.[5]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세운 수도회프란치스코회의 한 분파. 프란치스코회는 프란치스코 사후 작은형제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카푸친 작은형제회로 분화되었다.[6] 선제후라고도 불림[7] 그래봤자 루돌프 2세는 나중에 자신이 고용한 용병들의 난동 덕에 보헤미아인과 마티아스에 의해 감금되고 얼마 안 가 죽었다. 뒤는 마티아스가 이었다.[8] 마인츠 주교공, 쾰른 주교공, 트리어 주교공[9] 팔츠 궁중백,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10] 대략 아파트 5층 건물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정작 거름더미에 떨어진 바람에 높이에 비해서는 멀쩡했다고는 하는데...자존심에 상처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얼떨결에 같이 창문 밖으로 전방 수류탄 당한 비서는 날벼락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귀족으로 봉해졌는데 여기서 황제가 부여한 작위가 baron von Hohenfall, 우리 말로 하면 고공추락 남작이다.[11] 제1차는 후스 전쟁 때 1419년에 강경 후스파들이 시의회에서 시의원들을 창문 밖으로 내던진 사건.[12] 여담으로 그의 아들인 루퍼트 왕자(Prinz)은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잉글랜드 내전에서 찰스 1세 측에서 싸웠다. 또한 프리드리히 5세의 딸인 팔츠의 조피는 하노버의 아우구스트에게 시집 가는데 이로 인해 명예혁명 이후 하노버 왕가가 들어선다. 참고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의 증조할아버지다.[13]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의 30년 전쟁 편에서 맨 처음 나오는 장면이 바로 이 사건이다.[14] 이 과정에서 공수표를 좀 남발했다. 뒤처리는 잘 했지만 말이다.[15] 지금의 프랑스 남동부 지역에 위치했던 사보이 공국의 영주였는데 에스파냐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가거나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만큼 영향력도 셌다. 먼 훗날 이탈리아 왕국을 만드는 가문.[16] 사보이 공작은 만스펠트에게 회군할 것을 명령했지만 만스펠트가 버티고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 지원이 끊어진 만스펠트는 '안개를 먹으면서 싸울 수는 없다'고 하면서 전장을 이탈한다. 참고로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안토니오 꼬레아의 요청으로 사보이 공국에 뒷공작을 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소설에서도 만스펠트의 '안개를 먹으면서 싸울 수는 없다.'는 말이 나온다.[17] 이탈리아계 스페인 장군으로 이 사람의 증손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알만사 전투, 루차라 전투와 바르셀로나 공방전 등에서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 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과 함께 활약한다.[18] 결국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보헤미아 땅을 밟지 못했고, 그에게는 제위 시기에 빗댄 별명인 '겨울왕'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만이 남게 된다. [19]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1614~1662).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 여담이지만 이양반은 '''시대를 앞서간 예술 마니아'''로 미술에 매우 관심이 많아 예술 작품을 수집하였는데 그것이 '''1000점'''에 이른다고 한다.[20] 막시밀리안 1세는 청년 시절 잉골슈타트 대학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다.[21] 프랑스는 이탈리아 합스부르크령의 주요 요충지인 발텔리나를 임시 점령하기도 했으나, 곧 위그노 전쟁이 터지면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22] 독일내 루터파 신도들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쳐들어왔고 실제 목적은 당연히 북독일 일대를 장악해 발트 해를 덴마크의 내해로 만드는 것이었다.[23] 크리스티안 4세가 똥별은 아니었고 오히려 1611년 칼마르 전쟁에서 그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스웨덴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꽤 능력은 괜찮은 인물이었다. 물론 이때의 구스타프는 당시 16세로 갓 왕위에 올라 경험도 부족했고 스웨덴군 또한 그 유명한 군제개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강군이라 보긴 어려웠기 때문에 30년 전쟁 시점의 사자왕 구스타프를 생각하면 안 된다.[24] 이 무렵의 발렌슈타인은 아직 전공이 별로 없었고, 반대파도 많아 지휘권을 뺏길 위기에까지 몰렸다. 그래서 발렌슈타인은 이 전투에 꽤 많은 것을 걸어야 했고, 그 도박이 성공하여 본격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25] 슈트랄준트는 발렌슈타인이 오기 사흘 전에(...) 스웨덴의 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스웨덴군의 상륙을 허용하는 조약을 맺었다.[26] 이 무렵 이탈리아의 만토바에서 공작이 죽으면서 프랑스 세력인 느베르의 샤를이 후계자가 되었는데, 황제는 이를 거부하고 프랑스와 만토바에서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황제는 저지대의 프랑스 요충지인 카살레와 피네롤로를 스페인에게 넘기면 샤를의 공작위를 허가한다는 제안을 했고, 발렌슈타인을 해임함으로써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의 동의를 얻어냈다.[27] 프랑스가 스웨덴에게 전쟁 자금을 주는 대가로 스웨덴은 독일에서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프랑스의 잠재적 우군이었던 바이에른을 침공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조약 직후 조약 내용을 대대로 광고해서 추기경이 신교와 조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퍼트려 리슐리외에게 굴욕을 안겼다(...). 이는 프랑스와 스웨덴이 대등한 파트너이지, 스웨덴이 프랑스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면모를 보이기 위해서였다.[28] 마그데부르크 시민 2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도시에 남아있던 시민들은 겨우 4천 여명 뿐이었다. 참고로 이 짓거리를 벌인 이유는 군량 부족 때문이었다. 제대로 보급을 받질 못해 군대가 굶어 죽어가는데 페르디난트 2세와 발렌슈타인은 내 코가 석 자라며 (사실 둘다 진짜로 돈이 없었다) 보급을 거절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참다못한 용병들은 보급품을 노리고 마그데부르크를 공격한 것.[29] 반대파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발렌슈타인이 암살당한 것은 분명하나 주체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다. 발렌슈타인 항목에는 발렌슈타인이 배반을 시도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당대의 소문에 불과한 것으로 실제 배신 여부는 불분명하다.[30] 브란덴부르크 입장에서는 스웨덴이 승승장구할수록 브란덴부르크가 실효 점유하고 있는 포메른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인지해서 전투에 소극적이었고, 작센 선제후는 근본적으로 독일 내부의 사정에 외국인이 개입한다는 것에 부정적이었다.[31] 펠리페 4세의 형제. 당시 막 스페인령 저지대의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한 상태였다.[32] 당시 스톡홀롬에서는 태후가 어린 크리스티나 여왕을 사실상 감금하고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으나, 재상이 복귀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33] 작센의 경우는 프라하 조약의 영향이 컸는데, 프라하 조약에서 개신교 측에 북독일 지역의 교구를 내 주는 대가로 여기에 참가한 제후들은 독일에서 외국 세력을 몰아내야 했다. 이 때문에 작센이나 바이에른처럼 양측을 오가다가 조약에 서명한 제후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프랑스와 스웨덴을 적대하게 되었다.[34] 덴마크는 스웨덴을 몰아내려는 페르디난트 3세의 공작으로 오스트리아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35] 이 사람은 후반기에는 예전의 발렌슈타인과 비슷하게 스웨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일의 세속 군주를 노리는 군벌이 되었다. 그 때문에 스웨덴 정부가 골머리를 앓을 무렵 시의적절하게 사망하여 토르스텐손이 그 지위를 이어받는다.[36] 스웨덴도 상황이 비슷했지만 물주 프랑스가 있어서 파산은 면했다.[37] 오늘날 네덜란드의 함선에 그의 이름이 붙어있을 정도로 자국 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 해군 제독이다. 이후 영란전쟁까지 활약하다 전사하는데, 그의 후임이 그 유명한 미힐 데 로이테르였다.[38] 얼마나 자원이 떨어졌는지 스웨덴군이 프라하에 입성하려 했을 때 경비병도 없었고 오히려 격렬한 저항으로 스웨덴군을 막아낸 것은 프라하 시민들이었다. 3개월 넘게 공격을 감행해 프라하 성을 비롯한 블타바 강 서안은 점령했지만 블타바 강 동안의 구시가지는 결국 점령에 실패했다고.[39] 혹시나 바이에른이 완전히 황제 쪽에 붙으면 프라이부르크 전투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40] 오스만은 숙적인 합스부르크를 엿먹이자는 생각으로 전쟁 초반부터 신교 측에 참전한 속국 트란실바니아 편을 들어 신교 측을 지원해주고 있었다.[41] 한편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도 계속되어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종결되었다.[42] 30년 전쟁 전에는 선제후들만이 이러한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43] 특히 스웨덴군은 마차에 현대 자동차의 차축,브레이크 개념의 시초를 적용해 말들의 부상률이 적어져 보급률이 높아졌으며 머스킷의 경량화와 제식화, 포탄 상자의 제식화, 탄통 보급 등을 통해 시대를 뛰어넘는 혁신을 거듭했다.[44] 거기다가 인쇄 기술의 발달로 인해 구체적이고 자세한 사후 전술 평가가 이루어졌으며 귀족들이 사치를 부리기 위해 권총에 보석과 같은 사치품을 달기 위해 매우 정교한 설계 연구를 기술자들에게 맡기다 보니 무기 설계에 관한 연구도 한 차원 진보하게 되었다.[45] 테르시오도 점차 유연해지고 화기 비율이 올라가 큰 차이가 없어지기는 했다.[46] 그 유명한 카이사르, 나폴레옹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전쟁은 엄청난 돈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경제 활동이 힘들다보니 생산력도 줄어드는데, 쓸 돈은 엄청나게 늘어나니 주고 싶어도 줄 급료가 없는 것.[47]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사망한 독일인의 숫자는 최대치로 잡아도 인구의 10%를 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