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 도허티
1. 개요
영국(스코틀랜드)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알트링검 FC 감독을 맡았다.
그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선수 생활을 했고 1961년부터 1988년까지 감독 직을 수행했다. 20세기 중후반 수많은 축구 명장들을 양성한 스코틀랜드 출신 답게, 그 또한 전술을 짜고 시즌을 꾸려나가는 능력이 뛰어났고 첼시와 맨유 등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명장으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그에게 결여된 능력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선수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게 만드는 용인술이었다. 그는 선수들을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자신의 뜻에 무조건 복종할 '로봇'으로 취급했으며 선수들이 조금이라도 불복종하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처벌을 가했다. 결국 그는 가는 곳마다 선수들과 불화를 일으켜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감독 생활을 은퇴한 뒤에는 언론 매체의 축구 평론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별명은 'Doc'.
2.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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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 시절 도허티.
도허티는 어린 시절 논 리그의 Shettleston의 유스팀에 입단하면서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그 곳에서 계약금 3파운드를 받고 기량을 갈고 닦았다. 이후 도허티는 1946년 17살의 나이로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영국 군대에서도 축구 활동을 계속했고 얼마 안가 영국 육군 축구팀의 주전 선수가 되었다. 제대 후, 도허티는 1947년 셀틱에 입단했다. 그는 훗날 셀틱의 감독 지미 맥글로리가 자신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자신은 그를 본받아 감독 생활 때 적용했다고 밝혔다.
도허티는 셀틱에서 2년간 머무르며 9경기 3골을 기록하다가 1949년 11월 잉글랜드의 축구 구단 프레스턴 노스 엔드로 이적했다. 도허티는 프레스턴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일구었다. 도허티는 라이트 하프백으로서 탁월한 수비력을 과시하며 1958년까지 9시즌 동안 323경기 출장하여 5골을 기록했다. 이 시기 도허티는 1950-51 시즌 2부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54년엔 FA컵 결승전까지 진출했지만 웨스트 브로미치 알비온에게 3:2로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이렇듯 프레스턴에서 대활약한 도허티는 1951년 국가대표로 뽑혀 1959년까지 25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다.
1958년, 도허티는 정든 프레스턴을 떠나 아스날로 이적했다. 그는 아스날에서 1961년까지 3시즌 동안 83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다. 이후 1961년, 그는 첼시의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했고 4경기만 출전한 뒤 1962년에 은퇴했다.
3. 감독 경력
3.1. 첼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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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2월, 도허티는 첼시의 제안을 수락하고 첼시의 선수 겸 코치로 부임했다. 그 로부터 2달 후, 첼시의 감독 테드 드레이크가 팀이 강등 위기에 몰린 책임을 지고 경질되자, 도허티는 곧바로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그는 팀을 강등 위기에서 구하지 못했고 결국 첼시는 1961-62 시즌 강등되고 말았다. 하지만 보드진은 도허티를 계속 믿어보기로 결정했다. 이후 도허티는 1962년 여름 나이가 많은 선수들을 대거 방출하고 테리 베너블스, 바비 탬블링, 피터 보네티, 그리고 베리 브릿지 등 어린 선수들을 영입하여 팀의 핵심 구성원으로 삼았다. 또한 그는 첼시의 홈 유니폼을 하얀색에서 파란색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이로서 첼시는 구단 창립 이래 함께 해왔던 하얀색 홈 유니폼을 버리고 파란색 유니폼을 채택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도허티가 구축한 첼시의 스쿼드는 일명 "도허티의 다이아몬드"라고 불렸다. 그만큼 그가 구축한 선수진은 실로 놀라운 경기력을 선보였다. 그들은 1962-63 시즌에 단숨에 승격에 성공하며 강등 된 지 한 시즌만에 도로 복귀했고 다음 시즌엔 리그 5위를 기록했으며 1964-65 시즌엔 레스터 시티를 격파하고 리그 컵을 우승했고 FA컵에서도 4강에 진출했지만 아쉽게도 리버풀에게 2:0으로 패했다. 또한 첼시는 1964-65 시즌에 맨유와 선두권 경쟁을 치열하게 벌였다. 조금만 더 하면 구단 역사상 2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러던 1965년 4월 22일, 일이 터지고 말았다. 당시 첼시는 리버풀에게 FA컵에서 패하긴 했지만 아직 리그 우승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블랙풀 원정을 가게 된 도허티는 블래풀 시내 호텔에 돌아와야 할 통금 시간을 어긴 8명의 선수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는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첼시는 6:2 대패를 당하며 리그 우승이 좌절되었고 결국 3위에 그쳤다. 이후 통금에 걸려 경기에 나오지 못했던 첼시의 주장 테리 베너블스, 조지 그레이엄을 비롯한 8명의 선수들은 감독의 지침이 지나치다며 공동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보드진은 도허티를 여전히 굳게 신임했고 도허티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8명의 선수들과 일단 화해했지만 얼마 후 그들을 팀에서 모조리 방출했다. 도허티는 1965-66 시즌에 FA컵 4강에 진출했고 뒤이어 유로파 대회 중 하나인 인터-시티 페어스 컵 4강에 진출했다. 하지만 1967-68 시즌 리그 성적은 매우 좋지 않아 10위권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는 그가 선수들이 휴식 시간에 나이트를 들락거리는 걸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사생활을 일일이 간섭하고 이래저래 잔소리를 퍼붓고 선수들을 인간이 아닌 자신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수행해야 할 로봇으로 대우하는 것에 선수들이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피터 오스굿, 찰리 쿡, 론 해리스, 피터 보네티, 존 홀린스 등 첼시의 주요 선수들은 도허티가 계속 첼시 감독을 맡는다면 첼시에 남지 않겠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결국 도허티는 1967년 10월 토트넘 핫스퍼에게 패한 후 경질되고 말았다.우리는 이 일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점이 충격적이라고 생각하며 이 일을 공론화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가 통금 시간 후에도 호텔 외부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우린 새벽 2시까지 외부에 있었고 팀의 규율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중략)
그 날의 일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11시에 들어와서 한 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 일행 중 배가 고픈 선수가 있어서 뭘 좀 먹으러 가기로 결정했다. 레스토랑을 떠나서 다시 호텔에 돌아온 것이 2시였고 도허티 감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중에는 취한 사람도 없었고 돌아오는 길에 소란을 피운 것도 아니었다. 외출해서 돌아올 때까지 우린 다 함께 행동했고 여자와 함께 어울리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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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가 이미 결론이 난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왜 감독이 이 나라의 다른 모든 클럽이라면 조용히 처리하고 벌금을 부과했을 사안에 대해 그토록 극단적이고 공식적인 조치를 취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다시 감독을 만나기 전에 조 미어스 구단주를 직접 만나 이 사항에 대해 직접 논의하기를 요청한다. 우리는 모두 함께 행동할 것이다.
3.2. 방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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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아스톤 빌라 축구팀에서 쫓겨나는 도허티 (...)
도허티는 첼시에서 경질된 지 불과 한 달 뒤 로더햄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로더햄에서 한 시즌을 치른 후 1968년 QPR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그는 QPR에서 자기가 원하는 선수를 사 주지 않는 보드진과 갈등을 빚은 데다 선수들의 수준이 자신이 원하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며 선수들을 갈군 것이 오히려 화를 불러와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는 바람에 결국 29일 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이후 도허티는 1968년 12월 아스톤 빌라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그는 1970년 1월 19일 팀을 2부리그 꼴찌로 몰아가는 바람에 경질되고 말았다.
1970년, 도허티는 FC 포르투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그곳에서 16개월 동안 일했지만 1970-71 시즌에 벤피카와 스포르팅 리스본에 밀려 3위에 그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후 1971년 7월 2일, 도허티는 헐 시티의 수석 코치가 되었지만 그해 9월 12일 스코틀랜드의 임시 감독으로 보직을 변경했고 두달 뒤 정식으로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되었다. 그런데 1972년 12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프랭크 오 페럴을 경질하자, 그는 곧바로 스코틀랜드 감독 직을 던져버리고 맨유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3.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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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의 감독으로 부임한 도허티의 첫번 째 경기는 다름 아닌 맨유의 철천지 원수 리즈 유나이티드였고 경기 결과는 1:1 무승부였다. 당시 맨유는 선수진의 나이가 대부분 30대 중반인 노인정(...)이어서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도허티는 일단 1972-73 시즌엔 맨유를 1부 리그에 잔류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다음 시즌에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해 결국 강등되고 말았다. 다행히 맨유는 다음 시즌엔 분전하여 2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여 1부리그로 귀환했다.
1975-76 시즌, 도허티는 맨유를 리그 3위로 이끌었고 FA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사우스햄튼에게 1:0으로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정작 FA컵을 우승한 사우스햄튼은 그 시즌에 2부리그로 강등되었다.) 도허티는 1977년에 다시 한 번 FA컵 결승전에 진출했고 이번엔 리버풀을 2:1로 제압하여 우승을 달성했다. 이 우승은 당시 리그와 유로피언 컵 우승을 달성하며 트레블을 노리던 리버풀의 야망을 꺾어버리는 것이어서 더욱 의미가 컸다. 이렇듯 도허티는 침체되던 맨유의 분위기를 되살려 FA컵 우승을 차지하는 등 분전하고 있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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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도허티와 메리 브라운
1977년 여름, 그는 엄청난 추문에 휩쓸리고 말았다. 당시 맨유의 물리치료사 로리 브라운에게는 아내 메리 브라운이 있었다. 도허티는 개인적으로 로리 브라운과 절친한 사이었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의 집에 가서 담소를 나누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친구의 아내에게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도허티는 메리와 자주 밀회를 가졌고 얼마 안가 서로 정을 통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든 이 사실을 숨기려고 했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결국 두 사람 간의 관계가 세상에 폭로되고 말았다. 도허티는 맨유의 위신을 손상시킨 죄로 경질되었고 그 뒤를 이어 前 첼시 감독이었던 데이브 섹스턴이 부임했다.
이후 도허티는 1949년부터 수십년간 함께해온 아내와 이혼하고 마침 남편과 이혼한 메리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현재까지 부부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3.4. 두 번째 방랑기
물리치료사의 아내와 바람났다가 쫓겨난 도허티는 1977년 9월 더비 카운티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그 팀에서 2년간 활동했지만 78경기 24승 21무 33패로 30.77%의 승률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남긴 채 1979년 5월 물러났다. 며칠 후, 도허티는 QPR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첫 시즌에는 감독을 맡은 지 얼마 안 되어 2부 리그로 강등되었고 두번 째 시즌엔 여러 선수들을 방출하여 팀을 재정비하고 새 선수들을 영입하여 호흡을 맞춘 뒤 성적을 끌어올렸지만 승격엔 실패했다. 그러던 1980년 5월, 도허티는 돈을 많이 써놓고도 승격하지 못한 것에 분노한 짐 그레고리 회장과 마찰을 빚다가 경질되고 말았다.
1981년, 도허티는 오스트리일리아의 축구 클럽 시드니 올림픽 FC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시드니에서 17경기 6승 6무 5패를 기록했다. 그후 1981년 6월 15일, 도허티는 선수 시절 대활약했던 팀인 프레스턴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정작 감독으로서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프레스턴에서 17경기 3승 6무 8패로 승률 17.65%라는 좋지 않은 성적을 남기고 1981년 12월 3일 경질되고 말았다. 도허티는 1982년 5월 16일 오스트레일리아의 축구 클럽 사우스 맬버른에 부임하여 13경기 6승 4무 3패를 거뒀고 1983년 3월 13일에 시드니 올림픽 감독으로 부임하여 21경기 8승 9무 4패를 기록했다.
1984년, 도허티는 1부리그에서 강등된 울버햄튼 원더러스로 부임했다. 그러나 울버햄튼은 2부리그에서 또다시 3부리그로 강등되고 말았고 그는 그 책임을 지고 경질되었다. 이 시기 그는 21경기 연속 무승이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남겼다.(...) 도허티는 1987년 9월 28일 알트링검 FC에서 한 시즌을 보낸 후 1988년 감독 인생을 마감했다.
4. 은퇴 후의 삶
그는 감독 생활을 정리한 뒤 축구 경기를 리뷰하는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07년 5월 맨유가 AC 밀란과의 4강전에서 패하자, 도허티는 "컨디션이 좋은 기존 선수들을 활용하지 않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용병술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퍼거슨을 거세게 비판했다. 그는 "부상에서 막 회복된 네마냐 비디치를 주전으로 기용한 것이 재난을 불러왔다. 쇄골 골절로 경기를 한참 쉬었던 선수를 기용해 (밀란에) 많은 공간을 헌납했다. 부상으로 한참을 쉰 선수를 중요한 경기에 투입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정상적인 사람이 내린 결단일 수 없다."라고 디스했다. 이에 대해 퍼거슨은 "비디치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다. 위험의 소지가 없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퍼디낸드와 비디치 모두를 기용할 순 없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위험 부담이 덜한 방법은 비디치의 기용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말년을 보내다가 2020년 12월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5. 수상
5.1. 선수
1. 셀틱
글래스고 컵 우승 : 1949년
2. 프레스턴 노스 앤드
2부리그 우승 : 1951년
5.2. 감독
1. 첼시
풋볼 리그 컵 우승 : 1965년
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부리그 우승 : 1975년
FA컵 우승 : 197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