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오스굿
1. 개요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프로 축구 구단인 첼시 FC에서 활약했으며, 1964년부터 1974년과 1978년부터 1979년 시즌까지 380경기에서 150골을 기록하였다.
그 외에 피터 오스굿은 사우샘프턴과 노리치시티(임대)에서도 뛰었다.
2. 클럽 경력
2.1. 첼시 FC
오스 굿은 첼시 FC와 14세 때 첫 계약을 맺고 리그 컵에서 17세의 나이로 1962 년 12 월 16 일 워킹턴 AFC(Workington AFC) 와의 데뷔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며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장신에 기술까지 좋았던 그는 곧바로 주전으로 올라섰다. 또한 토미 도허티감독 아래서 바비 탬블링,론 해리스,피터 보네티,테리 베네블스등의 동료들과 함께 도허티의 다이아몬드라는 명칭으로까지 불리며 우승까지 노릴 수 있는 좋은 팀의 일원으로 거듭나게 된다.'''"기술, 훌륭한 태도, 뛰어난 양발, 탁월한 제공권을 다 갖추고 있었다.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토미 도허티''''
1966년 10월 6일 리그컵에서 블랙풀 FC의 에믈린 휴즈의 태클로 발목이 부러졌고 1967년 5월 20일에 치뤄진 첼시의 첫번째 FA 컵 결승에 출장하지 못하였다. 첼시는 토트넘 핫스퍼 1-2로 패하는 일을 겪으며 오스굿에게 멘탈적으로 슬럼프가 오는가 했으나, 새 감독 데이브 섹스턴은 그를 4번 유니폼을 주고 미드필더로도 뛰게 하며[4] 자신감을 올려주었고 그 후 준수한 활약을 보이며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s''')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스탬포드 브릿지의 킹으로 등극하게되나 당시 잉글랜드 선수들의 종특..이라고 부를만한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사생활과 연결되어 데이브 섹스턴 감독에 의해 사우스햄튼으로 27만 5천파운드로 이적하게된다.
2.2. 사우스햄튼 FC, 미국으로 건너가기까지
사우스햄튼에서 초반에 10경기 1골밖에 기록하지 못하며 강등권에서 구해내지는 못했으나, 강등된 후 첫시즌은 40경기 13골의 그럭저럭인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이후 점점 폼이 떨어지며 막판엔 노리치까지 임대갔다가, 북미의 신생 클럽인 필라델피아 퓨리 건너갔으나 22경기 0골의 안습한 기록만 남긴채 떠날 수밖에 없었다.
2.3. 다시 친정으로
그 후 성적이 좋지 못한 첼시로 돌아왔지만 팀이 강등되는 건 막지 못하고 79년 시즌도중 은퇴를 선언한다.
3. 국가 대표
재능과 득점력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인 알프 램지(Alf Ramsey)는 플레이 보이로 이름난 그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맘에 들어하지 않았고. 1966년 4월에 알프 램지감독의 1966년 월드컵 40인 대표팀에는 소집되었으나 최종 엔트리 22인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결국 득점은 만들어내지 못한채 4경기 출전에만 그치고 말았다.
4. 플레이스타일
185cm이라는 좋은 체격조건에 괜찮은 발기술까지 곁들여 스탬포드 브릿지의 왕이라 불렸으며 미드필더로도 잠깐 뛴 경력이 있다.
5. 수상
첼시 FC
- FA 컵 : 1970
- UEFA 컵위너스컵 : 1971
- FA 컵 : 1976
6. 기록
[1] 이 동상은 스탬포드 브릿지에 직관을 가본 위키러라면 알겠지만 바로 잘 보이는, 경기장 앞에 서있다[2] 토미 도허티의 지휘아래 60년대 초반의 첼시는 첼시최다득점자였던 바비 탬블링, 첼시최다출장기록인 론 해리스, 골키퍼 최다출장기록 피터 보네티를 포함한 다른 쟁쟁한 첼시의 레전드들과 함께 트레블까지 노릴 수 있었다.[3] 위의 동상에는 스탬포드 브릿지에는 다양한 영웅들이 있지만 왕은 오직 오스굿 하나 뿐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있다.[4] 이 당시는 선수고유의 등번호가 아닌 포지션에 맞는 번호를 주었다. 9번롤은 스트라이커 2번롤은 우풀백 6번롤은 수비형미드필더 등이 이때의 등번호가 유래된 것[5] 링크를 따라가보면 알다시피 실질적으로 현재의 프리미어리그인 1부리그이다[6] 괄호는 임대출장 수[7] 잉글랜드에서 뛴 경기는 418경기,그 중 1부리그 소속으로 뛴 경기는 301경기이다.[8] 잉글랜드에서 넣은 골은 133골, 그 중 1부리그 소속으로 넣은 골 갯수는 76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