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 내란

 






'''5·17 내란'''
五一七內亂
5·17 Internal Disturbance

'''일시'''
1980년 5월 17일
'''장소'''
대한민국 전역
'''원인'''
12·12 군사반란 이후 신군부의 본격적인 권력장악 의도
'''결과'''
'''군부의 민주화 운동 분쇄/국보위 설치'''
'''영향'''
신현확 총리(내각)/최규하 대통령 하야
제5공화국 수립
'''피해'''
국회 폐쇄, 내각 총사퇴, 헌정 중단
광주 5.18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대민학살 등), 학생운동 무력화

1. 개요
2. 배경
3. 전개


1. 개요


'''정치활동 일체 금지'''
'''전국 대학에 휴교령 어젯밤 긴급 비상회의서 의결
[1]내외집회·시위 금지
태업[2]·파업을하면 엄단'''
'''5.17 내란''' 또는 '''5.17 쿠데타'''는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인사가 정권 장악을 위해 주도한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다. 그 전 해 1979년12.12 군사반란과 연이어서 보면 6개월이나 걸린,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라는 수식어가 있다.[3]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는 쿠데타의 일환으로서 진행되었다. 다만 서중석 교수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개정증보 3판 머릿말에 의하면 학계 일각에선 이 사건을 쿠데타로 안 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헌법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한 사건을 5.17 내란이라 지칭하고, 이런 비정상적 상태에 저항하는 광주시민들을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무력으로 짓밟은 사건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다.

2. 배경


1972년 10월 유신에 의하여 종신집권 체제를 구축한 박정희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유신정우회, 긴급조치 등을 수단으로 하여 집권을 연장시켰다. 그렇게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던 유신 체제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되면서 막을 내린다. 그리고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 국무총리는 10월 27일을 기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12.12 사태가 터지고 계엄사령관이 교체되는 소란이 계엄령 하에서 일어났다. 이전에도 대한민국 제4공화국이였고, 부마민주항쟁으로 경남 지역 등은 애초에 계엄령이 내려진 데다가 체제의 큰 변화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듬해인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온다. 각 대학은 학생회를 재조직하고, 민주공화당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합의하였다.''' 이대로만 잘 돌아갔으면, 유신 체제는 8년 만에 막을 내렸을 것이다. 또 그 과정에서 점차 학생과 시민들에 의해 비상계엄 해제와 전두환 신군부 퇴진 목소리가 커졌다. 김종필, 김영삼 등은 대선이 곧 치러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정치 행보를 넓히기 시작했으며, 2월 김대중이 사면복권되고 신민당 참여를 거부하면서 재야세력과 합작하여 3파전이 벌어졌다.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을 일컫는 삼김이라는 단어는 이때 최초로 등장했다. 다만 같은 시기 발간된 미국 <뉴스위크> 지 4월 7일자는 한 미국 외교관의 말을 인용해 "김영삼은 무능, 김대중은 과격, 김종필은 부패하다"는 식으로 셋 다 이상적인 지도자감이 아니라고 부정적으로 분석했다.
5월 13일부터 시작된 학생들의 가두시위는 5월 15일에 정점에 달해서, 서울역에는 15만 명의 학생들과 시민이 운집했다. 군부는 저녁 8시까지 이들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했다. 군부가 이를 진압한다는 것은 수도 한복판에서 킬링필드를 만들자는 것과 다름이 없었고, 이는 이승만하다가 쫓겨났던 일이었다. 최악의 경우가 일어날 수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상황이 된다면 6월 항쟁 때처럼 미국과 정치권이 가만히 손놓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더 이상 시위가 과열되면 군부에게 무력 개입의 빌미를 준다며, 전국 학생회장단을 설득하여 ''''시위를 해산하고 학교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틀 후,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군부독재의 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를 위화도 회군에 빗대 서울역 회군이라고 한다.[4][5]

3. 전개


5월 15일 서울역 회군 이후 자신감을 가지게 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정부를 몰아붙여 1980년 5월 17일 21시 30분 경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국무회의에 상정하게 했다. 이 때 신군부가 표면적으로 내세운 계엄령의 확대 이유는 '사회 혼란에 따른 북한의 남침 위기'였다.
5월 16일 오후 10시 10분,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한 원유가 폭등에 대처하기 위해 중동 순방 중인 최규하 대통령이 예정보다 하루 전에 귀국했다. 바로 다음 날인 17일, 외부와의 모든 전화선이 끊어지고 중앙청 내부 계단과 복도에 1~2m 간격으로 무장군인들이 배치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신현확 국무총리 주재 하에, 청와대 수석비서관과 장관들이 참석한 확대국무회의가 열렸다.[6] 공포에 짓눌린 민간인 내각은 밤 9시 40분에 전국에 비상 계엄 선포를 의결하였다. 전화선까지 차단된 상황에서 '''단 8분만에, 아무런 토론과 설명도 없이''' 이루어졌다. 5.16 군사정변 당시 상황을 오판하여 쿠데타를 지지한 윤보선이나, 무작정 도망간 장면보다도 어이없는 통과였다.
밤 11시 40분, 신군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최 대통령은 문화공보부 장관 이규현을 시켜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최 대통령은 특별선언을 통해 "이 중대한 시기에 일부 정치인, 학생 및 근로자들의 무책임한 경거망동은 이 사회를 혼란과 무질서, 선동과 파괴가 난무하는 무법지대로 만들고 있어 우리 국가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하면서 "이러한 상태가 더 이상 계속된다면 우리의 국기마저 흔들리게 할 우려가 없지 않아 단안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했다.
변한 건 딱 두 가지. 사실상 정국과 상관 없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로 인해 지역 계엄이 전국 계엄으로 바뀌어 명령 체계에서 대통령과 계엄사령관 사이의 국방부 장관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허수아비인 상황에서 이것은 기회를 노리고 있는 신군부에게 모든 전권을 맡겨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권을 쥐게 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이희성 대장이 신군부에 의해 추대된 '바지사장'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정국은 사실상 신군부가 쥐었다.
계엄 전인 16일에 국방부에선 주영복 장관의 주재로 군단장급 이상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가 긴급 소집되어 '시위 진압에 군을 투입할 것인가'란 의제로 회의를 벌였다. 회장은 국방부 장관실로 하였지만 이보다 앞서 당시 육참총장인 이희성은 총장실에서 지휘관끼리 입을 맞추자는 의도로 사전 리허설을 했으나, 지휘관들 사이에서 군 투입 관련 찬반 양론으로 나뉘어져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후 회의에선 주영복이 "북한의 도발에 대비해야 할 시점에 학생들이 데모를 일으켜 사회가 어수선하니 군이 나서서 수습해야 한다"는 취지로 주재를 안종훈 군수기지 사령관이 군 투입 반대 의사를 밝혔으나, 정호용이 "현재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만약 이것을 놔두면 점점 위험해집니다. 국회가 개회되면 국가를 오도할 사례가 많아집니다. 소수 주장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다수가 군 개입을 지지해야 합니다"라고 하여 분위기를 띄우자, 장성들은 군 투입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채 44명의 육/해/공 지휘관들은 백지 명부에 서명을 하고 말았다. 이 사정을 당시 3군단 사령관 전성각은 아래와 같이 증언하였다.

'''이날 회의는 군을 떠날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반대의견을 낼 수 없는 분위기인 것으로 기억된다.'''

- 원 출처: <장군의 비망록: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장군들의 이야기> 1권 '전성각 장군(김문 글)' - 별방. 1998.

그리고 '''모든 것이 그들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계엄포고령 10호에 따라 18일 새벽부터 정치 활동이 전면 중단되고, 어떠한 정치적 옥내외 집회 및 시위도 금지되었다. 이어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선포하고 군부대가 진주하였다. 서울역 회군 이후 전국 학생회장단이 모여있던 이화여자대학교를 급습해서 전원 체포하여 학생운동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민주화를 요구해온 재야인사와 사회운동세력을 지명수배해 일제 검거하였다. 거기에 이날 새벽 2시경에 무장한 33사단 병력이 국회를 점령하여 사실상 헌정 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동시에 보안사는 비상계엄 하루 전에 전군 보안부대 수사과장회의를 소집해 17일에 비상계엄 전국 확대 사실, 검거할 블랙리스트 8백여 명을 통보했다. 신군부를 견제할 수 있던 제도권 정치 세력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삼김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5월 17일 당일 김대중은 "사회혼란 및 학생, 노조 배후조종 혐의"로 20여명과 함께 전격 연행되어[7]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뒤에 사형선고를 받게 되고, 김영삼은 오전 10시에 가택 연금되었으며, 김종필은 보안사령부에 감금되었다. 이어 18일에는 김종필, 이후락 등을 포함한 박정희 정권 시절의 거물 10여 명이 부정축재자로 발표되었고, 신군부의 협박 앞에 재산을 헌납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8]
'''단 하루만에 모든 정적들이 제거된 것이다.'''
이날 수배령이 떨어진 이들 가운데 6백여 명이 체포되었고, 신문과 방송들은 수배자들의 명단과 죄목을 경쟁하듯 우수수 쏟아냈다. 5월 21일, 무력감을 느낀 신현확[9] 내각은 총사퇴했다. 내각조차 없는 상황에서 최규하는 완벽한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마지막 저항 시도는 광주 시민들이 시민군을 조직해 공수부대에 맞서 싸운 5.18 민주화운동. 그러나 이미 군대는 신군부 반란세력이 장악한 데다 언론이 통제되고 계엄군이 광주 외곽을 봉쇄한 터라 광주 시민들이 시민군을 결성해봐야 결말은 뻔한 상황이었고, 이 상황에 계엄군의 적극적인 공세가 더해져 결국 시민군과 일반 시민들 사이에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시민군이 붕괴됨으로써 5.17 내란은 전두환이 주도하는 신군부 반란군들의 승리로 끝났다.
광주의 저항 시도까지 유혈진압으로 마무리한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라는 초법적인 기구를 설치하여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국보위 위원장은 최규하 대통령이었으나 바지사장에 불과했고, 모든 실권은 상임위원장 전두환과 신군부가 쥐었다.
무력함을 느낀 최규하가 8월 16일 사임하자[10] 8월 21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전두환을 국가 원수로 추대키로 결의해서, 9월에는 전두환이 박정희의 유산인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99.9%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국보위는 10월 27일 정치규제법을 통과시켜서 이미 명패만 남이었던 국회와 모든 제도권 정당을 강제해산하고, 제5공화국 헌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후 신군부는 여야를 막론하고 관제정당들을 조직하는 등 외향적으론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척 포장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물론 야당인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보안사령부가 만들었다.[11]
1981년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에서 전두환이 90.1%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쿠데타는 결국 반란 세력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1] 집 자세한 것은 참조[2] 쉽게 말해 수박 겉 핥기식으로 일한다는 의미[3] 물론 내전을 포함한 양상의 다른 쿠데타들도 많으므로 실제로 가장 긴 쿠데타라는 것은 아니다.[4] 회군에 반대했던 사람이 서울대 대의원회장 유시민과 복학생 운동권의 리더격인 이해찬, 고려대 총학생회장 신계륜. 이 세 명은 나중에 정계에서 재회하게 된다. 심재철은 후에 한나라당에 입당해 제16, 17, 18, 19, 20대 보수 정당 소속의 국회의원이 되는데, 유시민민주당계 정당~진보 정당의 정치인이 되면서 상당히 비교되었다. 훗날 유시민은 '심재철이 최소한 서울역 회군에 대해서 사과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였다. 심재철은 당시에는 유혈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한편, 당시 경희대 재학생이었던 문재인은 1980년 복학을 하면서 사법시험(22회) 2차에 합격했지만 5.17 내란 때 복학생협의회 활동으로 문제가 되어 계엄령 위반으로 구속된 적이 있었다.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으로, 국가유공자 자격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스스로 받지 않았다고 한다. #[5] 당시 군부는 무력 진압을 공포하고 있었고, 서울대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는 군부로부터 무사귀교를 보장받았다면서 학생지도부들을 설득했다. 유시민은 결정 이후에는 해산 결정을 따르는 입장이었기에 상대적 온건파나 회군 찬성파로 취급되기도 한다. 신계륜의 경우, 당시 남대문에 있었기에 결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상황은 아니었다. 만약 이때 회군하지 읺았다면 어쩌면 5.18을 하루 일찍 서울에서 보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6] 이때 정무수석이던 고건의 행적이 훗날 문제가 된다. 본인은 군정에 반대해서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하고 칩거했다고 하나, 아무런 말 없이 잠적했다가 모든 상황이 정리된 일주일 후에야 나타났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어느 쪽이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관료 특유의 무색무취한 보신주의라는 비판이 많다.[7] 물론 영장 따위 없는 불법 구속이었다.[8] 이에 대해 정치활동을 재개한 7년 후의 제13대 대선 관훈토론회에서 김종필은 '''"5·16이 형님이고 5·17이 아우라고 한다면 나는 고약한 아우를 둔 셈이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9] 대단히 꼬장꼬장한 인물로, 전두환에게도 먼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의 재가를 받아오라는 호통을 치기도 했고, 일제시대부터 고등문관시험을 통과한 엘리트였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기피해 부임하진 않아 후에 친일파인명사전에서도 이의신청에 따라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50년대 말부터 마흔의 나이로 장관에 오른 경제계의 엘리트 관료였고, 이 사임 이후로는 삼성물산 등 기업가로서 지낸다. 하지만 동시에 비상계엄령 해제에 동의하지 않고, 개헌에 대해서 속도 조정을 주문하는 등 최규하를 대신한 정권의 실질적 대변자로서 학생운동계에선 전두환과 맞먹게 취급되기도 했다. "TK 인맥의 대부"라고 불리기도 한다.[10] 이 과정에서 최규하의 하야를 5시간에 거쳐 설득한 인물이 그의 오랜 친구 김정렬로, 그는 이 공로로 제5공화국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낸다. 대통령 최규하가 하야하면서 국무총리 서리인 박충훈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11]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정의당으로 공천 신청을 했더니, 야당인 민주한국당으로 공천 조정이 되었다는 황당한 코메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