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학살
1. 개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계엄군이라고 하고 사실상의 반란군의 폭동적 시위진압은 '''광주 학살'''이라고 명명될 정도로 잔혹했다. 일베저장소, 지만원, 배인규, 윤서인, 송시인, 안정권, 얼음사이다 등 극우 세력이 폭동의 주체를 신군부가 아닌, 신군부에 저항하는 시민들로 왜곡하고 있으므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첨부하였다.
'''피고인들이 국헌문란의 목적이 없는 계엄군을 동원하여 위에서 본 것처럼 난폭하게 이(광주시민들의 시위)를 제지한 것은 강압에 의하여 그 권한 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어서 국헌 문란의 폭동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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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법 1996.12.16, 선고, 96노1892, 판결
[image]'총을 쏘면 안 된다'는 정치사회적 윤리를 ''''총만 안 쏘면 된다''''로 왜곡한 잔인한 방식이었다.
<오월의 사회과학>, 최정운, 123p
사진 출처.
- 광주학살 진상규명 및 학살원흉 처벌 범국민대회
- 연세대생 광주학살 부정비리원흉 처단을 위한 단식농성
-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공청회'
-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을 위한 범국민 진상조사위원회
2. 배경
내용은 12.12 군사반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5·18 민주화운동/전개 문서들을 참고.
3. 전조
'''18일 새벽 2시''', 제7공수특전여단 33대대가 전남대학교를 점령했다. 도서관에 공부하려 모인 학생들과 5.17 내란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에 당황해서 모인 대학생들은 공수부대에게 막혀 학내에 구속됐다. 진주한 33대대는 교내를 수색해 학생들을 무차별 공격하고 연행해갔다. 이때 학생들 중에는 농성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멀쩡히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날벼락을 맞은 사람들도 있었다.[3]
5월 18일 '''새벽 0시 20분''', 저녁에 짜장면을 먹고 도서관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공수부대들이 들이닥쳐 두들겨 패서 복통 및 구토 발생
전남대학교 병원 기록, 5.18 의료 활동 <자료 기록 및 증언>, 광주광역시의사회, 115쪽에서 재인용
"'''새벽 2시쯤''' 되었을 것이다.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문을 쾅쾅 차는 소리가 들렸다. 공수부대가 진입한 것이다. 그들은 내게 중앙도서관 열람실의 비상 키를 요구하더니 도서관 열람실을 샅샅이 수색한 후 공과대학 본관으로 갔다. 이어 학생들이 끌려나왔고 마구잡이로 두들겨 맞았다.
고광윤 씨(당시 전남대 직원) 증언[4]
"처음 부상자가 병원에서 온 것은 18일날 아침으로 생각되는데 전남대생 대여섯 명이 '''6시 반에서 7시 사이'''에 공부하러 가다가 군인들에게 맞아서 머리등지가 다쳐서 왔다. 그래서 머리를 꿰매고 치료해 주었는데 이 학생들은 데모를 한 것도 아니고 실제 공부하러 갔는데도 무차별로 두들겨 맞은 것 같다."
노준채(노준채외과의원장. 당시 노준채외과의원장), 공수부대원도 입원치료, 5.18 의료 활동 <자료 기록 및 증언>, 광주광역시의사회, 198쪽
비슷한 시각, 7공수여단 35대대는 조선대학교를 점령했다. 이곳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최초로 본 병원 응급실을 찾아온 환자는 손○○(27세, 남)로 '''5월 17일 저녁''' 도서관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공수부대원들이 들이닥쳐 곤봉으로 복부를 가격해 복통과 구토를 호소하며 5월 18일 오전 8시 20분경에 응급실로 내원하였다. 기록에는 "복부좌상(타박상), 2주"라고 적혀있었다."
김현종(당시 전남대병원 외과 레지던트),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53쪽
"80년 5월 17일 조선대학교 본관에 위치한 방송국에서는 조선대 방송국 개국기념식 및 학원자율화를 위한 선후배 간담회가 있었다. 1부는 방송국 개국행사, 2분은 선후배 간담회로 그후까지 철야농성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밤 11시쯤 31사단 소속 통신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학교 통신물을 점검한다는 이유로 본관의 방송국으로 올라왔다. 형식적인 점검 후 그들이 나가자 나는 화장실에 갔다. 잠시 후 방송실에서 험한 욕설이 흘러나오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요란했다. 교내에 계엄군이 진입한 것이다. 그때가 '''밤 12시쯤'''이었다."
진호림 씨(당시 조선대 학생) 증언[5]
4.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이전
※ 5월 18일 부상자 사례 : 보기 / 접기
이러한 7공수여단의 행위에는 '''이유나 원칙도 안 보였다'''고 당시 기자였던 김영택은 증언하고 있다.[23] 아래에 나와있는 수많은 증언들과 사례들을 보아도 이는 명백하다.
「기동대원들은 갑작스런 공수부대의 출현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반면 의아스럽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공수대원들의 인상은 한마디로 끔찍했다. 술이나 약물에 취해 있었다고는 확실히 말할 수 없으나 살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또한 그들은 진압에 나오면서 임전태세를 갖추고 나왔을 것이며 명령에 의해서 죽으라면 죽을 정도로 훈련 속에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공수부대의 모습을 본 시위대는 무서움에 한 순간 모두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몇몇 사람들은 아마도 시위에 가담하지 않은 방관자나 구경꾼들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우리도 같은 군인의 입장이었지만 무섭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시민들 역시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공수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진압자세를 취했고, 대장으로 보이는 지휘자는 '시민 여러분, 해산하십시오' 하고 핸드 마이크로 외쳐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수대원들은 3-5명씩 무리를 지어 시위대를 향해 쫓아가 불문곡직하고 시민들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군화발로 차는 등 터무니없는 무력행사를 하는 것이었다. 기동대는 중앙극장 앞에서 방패를 들고 겁먹은 표정으로 공수대원들의 진압 과정을 지켜보면서 해도해도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기동대는 목격자가 되어 다소 안정감 속에서 공수부대에게 적의를 느끼며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수대원들의 무자비한 진압은 오히려 시민들의 시위를 자극할 뿐이었다.'''
공수대원들은 시민들을 무작정 두들겨 팬 뒤 기진맥진한 상태의 사람을 질질 끌어다 트럭에 실었다. 트럭에는 더 이상 실을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사람들을 트럭에 던져댔고, 공수대원 2명은 트럭 위를 걸어다니며 사람들을 차 바닥에 바짝 엎드리게 하면서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 공수대원은 총을 들고 서서 마치 짐승 다루듯 군화발로 지근지근 밟았다. 사람들은 차 바닥에 엎드려 신음했고,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등까지 살이 벗겨졌다.
트럭은 불과 몇 초 만에 사람들로 가득 찼다. 잡혀온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트럭은 어디론가 가버렸다. 아마도 상무대나 31사단으로 옮겼을 거라고 짐작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까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은 계속되었다. 공수부대가 나타난 이후 기동대는 진압은 하지 않고 쉬면서 공수부대의 진압 과정을 임무 수행하듯 지켜보았다.
8시경 공수부대가 장악한 거리를 뒤로 하고 기동대는 부대로 복귀했다. 통금시간이 당겨진 이유로 9시경 점호를 마치고 바로 잠을 잤다.
이날의 충격적인 일들을 경험한 나는 대원들 2명과 함께 죽음의 도시, 칠흑 같은 화정동 잿등을 지켜보며 소주를 마셨다. 대원 중 몇 명은 너무나 끔찍한 광경을 떠올리고 잠을 못 이루며 울먹이고 있었다. 우리들 역시 공포와 분노를 느끼고 공수대원의 강렬한 인상과 참혹했던 진압 모습을 다시 생각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까 걱정했다.
「젊은 여성이나 양복이라도 반반히 입은 청년들에 대한 반란군의 폭행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은 청년이 계엄군에 발각되면 일단 워커발로 짓이기고 몽둥이 찜질을 한다. 생명의 위험을 느낀 청년이 달아나면 끝까지 추적, 그 청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더 이상 운신을 못할 때까지 갖은 폭력을 행사했다. 내가 목격한 장면 중 한 청년은 금남로 중간에서 계엄군에게 붙들려 얻어맞다 옆 골목으로 도주해 무등고시학원으로 도피했는데, 뒤쫓던 계엄군은 고시학원 계단 위를 무장한 채 따라가기에는 거추장스러워지자 소총에 장착된 대검을 뽑아 청년의 등 뒤에 던졌다. 이어 합류한 한 무리의 병력은 학원 안에서 공부하고 있던 수험생들을 무자비하게 내갈겼다.
- 김충근(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금남로 아리랑, 5.18 특파원, 212」
당시 그 현장은 심재영 심산부인과의원장도 목격했는데, 여기서 "신혼 부부" 증언이 김택영 기자 증언과 교차 검증된다. 심재영 심산부인과의원장의 증언을 보면 이 신혼 부부는 카메라로 찍다가 구타 당한 듯 하다.「일요일이었다. 날씨는 아주 화창했다. 평균 기온 16.3도로 아침을 약간 쌀쌀했지만 낮의 최고 기온은 25.1도까지 올라간 아주 쾌청한 날씨였다.
세째 일요일이어서 상가에는 문을 닫고 쉬는 점포가 눈에 띄게 많았다. 한달이면 대개 첫째와 세째 일요일은 쉬는 날로 정하는 점포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농촌에는 바야흐로 모내기철을 앞두고 그 준비에 온 힘을 쏟고 있어서 집앞과 논밭에는 활기가 넘쳐 흘렀다.
그런 일요일이었다.
광주직할시 북구 북동 180번지 앞 큰길. 금남로의 연장이어서 그냥 금남로길이라고 불리어지는 길이다.
...얼룩무늬 군복에 머리에는 방석망이 달린 헬멧을 쓰고 손에는 방패와 방망이를 든 1개중대 가량의 공수부대 군인들... 대결이 이 횡단보도 위에 도착할 무렵 내려진 명령이었다. 그러자 군인들은 횡당보도선에 맞추어 일제히 멈추어서서 대오를 가다듬고 있었다.
유동 3거리에서 450m쯤 떨어진 횡단보도. 여느 횡단보도와 마찬가지로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이 횡단 보도는 북동 180번지와 누문동 62번지를 연결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로 들어가는 길로 이어져 있다.
짧고 숨막히는 시간이 흘렀다. 시계의 짧은 바늘이 4자 위에 서고 긴 바늘이 12자 위에 이르렀다.
바로 4시 정각이었다.
바로 이때였다. 대열을 따라온 초록색 1.5톤급 차량 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금속성으로 위압적인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거리에 나와있는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빨리 돌아가십시오."
...스피커에서 귀가를 종용하는 방송이 나온 지 1분이 지났을까. 이번에는 짧은 순간을 두고 엄청난 명령이 뒤따라 튀어나왔다.
시민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거리에 나와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
딱 한마디. 이 명령 이외 어떤 세세한 행동지침이 나올 법한테 그렇지도 않았다. 아무런 군더더기도 없었다.
...
이 명령이 떨어지자 현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돌변해버렸다... 시위했던 학생들만 잡는 것이 아니라 젊다고 보여지는 사람이면 보는 대로 두들겨 패고 잡아 끌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
'저놈 잡아라' '저기 간다'는 소리와 동시에 '아이구' '억' 소리가 터져 나와 거리는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횡단보도 바로 옆, 북동 276번지 3층 건물 2층에 있는 동아일보 광주지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2명의 공수부대원이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는 듯한 자세로 뛰어 올라왔다.
두 사람 모두 대검이 꽂혀 있는 M16 소총을 앞으로 내밀고 서슬이 퍼렇게 되어 있었다. 마치 총검술 시범을 보이는 자세처럼 착검한 M16 소총을 앞으로 겨누고 있었다. 곧 아무에게라도 방아쇠를 당겨 버릴 자세, 아니면 금방 찔러 버릴 듯한 그러한 모습이었다.
...
마침 일요일인데도 출근한 정은철 총무는 바깥의 시끌벌적한 사태와는 관계 없이 자기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그는 '시위를 한 일도 없음은 물론 구경조차 하지 않았던 터라 무슨 상관이 있으랴'는 듯 태연하게 자기 일을 부지런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두 군인은 다짜고짜로 정 총무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정씨는 의자와 함께 뒤로 벌렁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두 군인은 정씨를 마구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짓이기는 것이었다.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큰 일이었다.
...
정 총무는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반항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두 군인은 사무실 바닥에서 기진맥진해 찍 소리도 못하는 정 총무의 두발을 양쪽에서 하나씩 붙잡고 끌고 내려갔다. 바닥에 끌린 채였다. 마치 죽어있는 짐승을 끌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2층 계단을 내려갈 때도 그대로 끌고 내려갔다.
...이 날 그는 자기가 맡은 구역의 수금 실적이 나빠 하루 전날 지사장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일요일인데도 출근했다가 당한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담당 구역 수금을 하기 위해 출근한 '''배달학생 박준하 군(광주공고 1년)도 수없이 맞고 짓밟혔다. 그리고나서 끌려나가다 계단에서 실신해버렸다. 그러자 비로소 그들은 그대로 팽개쳐 두고 내려가 버렸다.'''
...동아일보 광주지사 바로 앞쪽에는 2대의 트럭이 유동 3거리 쪽을 향해 정차해 있었다.
...
그 차량에는 길거리와 건물 안팎에서 붙잡혀 끌려온 사람들이 가득가득 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머리와 코, 입에서 피를 토해 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들의 하얀 옷자락은 피에 젖어 엉망으로 되어있었다.
어떤 사람은 기진한 듯 눈만 껌벅껌벅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 사람이 붙잡혀왔다. 그의 머리나 코에서는 피가 줄줄 쏟아져내렸다. 웃옷은 갈기갈기 찢겨진 채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끌고 온 군인이 대기 중인 군인에게 인계하면 또 한 차례 군화발이 날아오고 몽둥이 세례가 쏟아졌다. 그리고 짐짝 실리듯 트럭 위로 이끌려 올라갔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또 다른 군인이 '이 새끼 머리 숙여'라며 군화발로 머리와 등을 짓밟는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아야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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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택시 한대가 지나가려다가 이들에게 붙잡혔다.
감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와 색동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예쁜 새색시가 차에서 끌려 나왔다. 한 눈으로 보아도 신혼 부부임에 틀림 없었다... 이 길은 시내 중심가에서 광주공항이나 고속버스 터미널 또는 광주역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다. 그래서 이 신혼 부부는 공항이나 역 쪽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그들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택시에서 끌려나오자마자 신랑은 무자비한 몽둥이와 장작개비 그리고 군화발 세례를 받았다. 이유도 없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는데 신랑은 '아이구, 눈이야'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붙잡고 땅바닥으로 뒹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신부도 군화발로 채였는지 한복은 엉망이 된 채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사람 살려!"
신부는 자신의 몰골은 돌아보지도 않고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신랑을 붙잡고 엉엉 울며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이 쌍년"
군인들은 또 다시 신부를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하더니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
-당시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 김영택의 증언. 김영택, 현장기자가 쓴 10일간의 취재수첩, 1988, 사계절, 11~22」
지나가거나 시위를 하던 많은 여성들도 공수부대에 걸려 잔인한 구타를 당했다.공수부대가 진입해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하는 처음 장면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공수부대가 처음으로 구타나 마구잡이식 진압이 시작되는 곳이 계림종지역이었다고 생각되나 아마 거의 같은 시각에 수창국민학교 앞에서도 공수부대원들이 나타났다. 시간은 대략 18일 오후 3시경으로 짐작하고 있는데 병원 앞에서 수창국교 부근까지에서 학생들과 공수부대가 처음에는 대치하고 있었다. 공수부대에는 군인 짚차가 한 대 있었고 V자형으로 15명 정도가 도열해 있는 가운데 중간지휘자가 대열의 중간 뒤쪽에 서 있었다. 얼마 후 이 지휘자는 무언가 명령을 내렸는데, 이 때부터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과 시민들을 쫓아가 닥치는 대로 구타를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쑥색 얼룩무늬 옷을 입고 머리에는 한쪽이 균형이 맞지 않는 공수부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이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얼굴은 검정색이 도는 구릿빛이면서도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표정 자체가 꼭 술 먹고 화난 사람처럼 심상치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정상적인 얼굴 표정은 아니었으며 수창국교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지역에서도 동시에 무차별 가격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때 '''별 생각 없이 구경하던 사람들이 갑작스레 구타를 시작하자 도망가지 못하고 심하게 맞은 경우가 많았다.'''
이 때부터 병원으로 부상자와 환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해 치료와 함께 사실은 병원 뒤쪽 담을 통해 피신시키는 일을 했었다. 부상 환자는 대부분 상처가 오른쪽 머리 부위에 많았는데 오른손잡이 공수부대원이 도망가는 사람을 때렸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도망가는 사람은 대부분 뒤쪽에서 때린 상처가 많았으며, 곤봉으로 맞아 3~5cm 정도가 찢어져 있어 꿰매고 또 병원 앞으로 보낼 수 없어 담을 넘어서 보내곤 했다. 대부분 부상자는 가명으로 치료했으며, 13~14명 정도의 부상자를 그날 치료한 것 같다.
신혼 부부까지 무자비한 구타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 신혼 부부로 당시 공용터미널 중간 부분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공수부대원들이 택시를 세우고 이 부부를 끌어내려 무작정 곤봉 등으로 때렸다는 것이다. 남편은 아래턱이 빠진 상태로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부부가 함께 머리 등에도 상처가 났었다. 나중에 이 부부가 병원에 다시 온 적이 있었는데 남자는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이 학생이나 구경하던 사람을 때릴 때는 3~4명이 한 사람을 거의 반 죽음 상태까지 집중적으로 구타하는 수법을 써서 부상자들은 두피가 갈라지고 그 자리에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들 부부도 택시에서 신혼 부부답게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공수부대원 여러 명이 달려들어 집중 구타를 해 남자는 거의 반죽음 상태였고 여자는 옷이 다 찢어져 입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아주머니들이 옷을 입혀서 산수동 쪽으로 데려다 주었는데 정말 딱한 일이었다.
심재영(심산부인과의원장. 당시 심산부인과의원장), 상대는 대부분 오른쪽 머리 부위, 5.18 의료 활동 <자료 기록 및 증언>, 광주광역시의사회 , 206~207
「젊은 여성들의 경우 계엄군은 다짜고짜 블라우스 등을 찢어 걷어내거나 대검으로 바지와 치맛자락을 찢어 여자를 거의 나체 상태로 만든 다음 폭행을 가했는데, 방망이나 구둣발길이 날아가는 신체의 부위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젊은 여자, 그것도 옷 맵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 부위가 여체의 특정 부위들에 집중되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는가? '''백주겁탈, 폭력난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등의 표현들이 얼핏 떠올랐으나 그것 역시 광주 상황을 전하기엔 적절치 못하였다.'''
-김충근(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금남로 아리랑, 5.18 특파원, 212~214」
「공수 놈들이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60살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새끼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놈들은 '이 씨팔 년은 뭐냐?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군화발로 할머니와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화발로 뭉개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의 교복 상의를 대검으로 찢고 여학생의 유방을 칼로 그어 버렸다.'''[26]
여학생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가슴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박남선,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121~122」
공수부대원들은 이런 여성한테 옷을 입혀주는 행위조차 막아섰다.「 11대 군용 트럭의 대열 맨 마지막 차량 위에서는 22~23세 가량의 처녀인 듯한 여성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하얀색 투피스 스타일의 윗옷은 피투성이가 된 데다 갈기갈기 찢겨진 채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젖가슴이 보일 정도로 걸처져 있었고 아랫도리는 완전히 벗겨진 채였다. 아가씨는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고 있었다. 처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두 다리를 소아마비 환자처럼 구부리고 있었다. 발 아래에는 그녀가 입었던 팬티며 스커트가 피로 얼룩진 채 함부로 버려져 있었다... 그녀는 차량 옆에서 군홧발로 채이고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아 쓰러져 있었다. 그러자 군인들이 '이년 봐라'하면서 옷을 붙잡고 일으키다 옷이 찢겨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군인들이 다시 '쌍년 올라가'라고 욕지거리를 하며 군홧발로 걷어차자 차 위로 올라갔는데, 또 다시 발길질로 군인들이 그녀를 맞았던 것이다. 윗옷마저 거의 찢겨져 완전히 나체 상태로 바뀌기 직전이었다.
- 김영택(동아일보 기자),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1996, 40쪽」
공수부대원들은 광주제일고등학교까지 들이닥쳤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던 곳인데, 일본제국 경찰조차 함부로 드나들지 않았다. 일본제국 경찰들은 적어도 교장실에 들러 사전 양해는 구하고 연행해갔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은 군화를 신고 그대로 교실에 들어가 수업 받던 학생들을 두들겨 짓밟았다.''' 이날 교실에 있던 학생들은 10대 때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해 그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방송통신고교에 적을 두고 일요일 수업을 받던 어른 학생들이다. 이들도 시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학자금이 없어 정규 고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 직장 때문에 공부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정복을 입고 있던 한 육군 간부도 두들겨 맞았다. 그 군인은 재빨리 뛰쳐나와 교문 밖으로 나왔다. '''"나도 군인인데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라며 말하며 빠져나갔다. 눈물이 난 건지 눈 언저리를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27]「이때 한 40대가 남자가 하얀 가운을 들고 나와 이 아가씨에게 던져 주려다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공수부대원들은 이 남자에게도 군홧발과 몽둥이 세례를 여지없이 가했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서석병원 사무장이었다. 병원장 김상수(45) 박사로부터 가운과 팬티를 구해다 주라는 지시를 받고 병원 간호사의 것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16시 45분쯤이었다.
이 같은 광경은 행인을 물론 이 건물 저 건물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고 있었다. 시민들은 살기등등한 공수부대원들의 행패를 이미 겪었거나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터라 감히 나와서 만류하거나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에 대한 탄식은 자신도 모르게 이 입 저 입에서 튀어나왔다.
...한 마디, 두 마디가 모여 군인들의 귀에도 들렸음인지 그들은 병원 사무장이 던져주려 했던 가운을 홱 던지며 "입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를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 해 비틀거리며 얼굴을 감싼 채 군인들의 무리 속에서 빠져 나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 김영택(동아일보 기자),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1996, 40쪽」
그날 고등학교에선 체육대회를 했는데, 그 대회에 참여한 사람들도 수난를 당했다. 조선대 의대 4학년 재학 이민오 씨는 광주일고에서 하는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가 공수부대원들에게 쫓겼다. 그러다 교장관사에서 막혔고 공수부대원들한테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엄청난 중상을 입었는데 '''췌장과 비장이 파열됐다'''고 한다.[28]
그 무차별 폭력 속에서 결국 사망자가 나왔다. '''사망자는 청각장애인이었다.''' 김경철 씨다. 그는 평범한 시민들이었고 시위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나, 공수부대의 잔혹한 폭력진압으로 인해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1980. 5. 18. 조선대학교 의과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민오 씨는 광주일고에서 있었던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가 주변에서 쫓아온 공수부대원들을 피해 광주일고 교장관사까지 도망쳤다. 하지만 교장관사의 안방까지 추격해 온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구타당한 뒤 광주 서부경찰서를 거쳐 상무대로 연행됐다. 5. 19. 밤 상무대 영창에서 심각한 복통과 구토를 호소한 그는 이날 24:00경 광주국군 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 후송 당시 구타 후유증으로 췌장 및 비장 파열, 복막염 등이 발생하여 위험한 상태였다.
-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70~771」
다방에선 청년 한 사람의 머리를 잡고 끌어내서 포승으로 묶은 뒤 트럭에 내던졌다. 청년의 머리에는 피가 흘렀다. 여자 하나가 '학생이 아니다'라고 울부짖자 공수부대원들은 땅에 내동댕이쳤다.[29]「김경철 씨는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었다. 갓 백일이 지난 딸이 있는 평범한 가장이었던 그는 친구들과 점심식사 뒤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당했다. 부상당한 그는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9일 03:00에 사망했다. 검찰 검시조서에는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 뇌안상검부열상, 우측 상지전박부 타박상, 좌견갑부 관절부 타박상, 진경골부, 둔부 및 대퇴부 타박상 등이 사인이며, 사망진단서에는 후두부타박상에 의한 뇌출혈이 직접사인었다. 그의 시신은 군 당국에 의해 광주통합병원 영안실로 옮긴 후 상무대 내 101사격장에 매장됐다가 가족들에 의해 망월동에 안장했다.
-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0쪽」
당시에 기록된 5.18 사태일지에 따르면, 조선대 입구 철로변을 지나가던 학생 11명을 공수부대원들이 총개머리판으로 구타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다.[30]
공수부대의 진압이 어찌나 잔혹했던지,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진저리를 쳤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을 정도로 공수부대의 진압은 잔혹한 것이었다.
「어느 할아버지는 '저럴 수가 있느냐. 나는 일제 때에도 무서운 순사들도 많이 보고, 6.25 때 공산당도 겪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저러는가. 죄가 있다고 해도 저럴 수 없다. '''저놈들은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 하면서 통곡했다. 어느 중년의 사내는 '나는 월남전도 참전해서 베트콩도 죽여봤지만, 저런 식으로 죽일 바엔 그냥 총으로 쏴 죽이지. 저놈들을 죽여버려야 해' 하면서 오열을 터뜨렸다. 온 거리는 피의 강,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51」
4.3. 대검살육
계엄군이 땅바닥에서 대검을 주워 장착하는 모습(링크 영상 9:14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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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갑자기 "악"하고 비명소리가 들려요. 그래서 보니까 쓰러져가지고 공수부대가 허벅지에서 대검을 뽑는 장면이 눈에 딱 들어오더라고요. 그러니까 늦게 간다는 이유 가지고 빨리 가지 않는다는 이유를 가지고 공수부대가 와서 찔러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제 눈으로 분명히 목격했어요.
1989년 2월 23일, 광주특위 제29차 회의 청문회, 이광영의 증언 中
※ 대검 관련 사망자 명단 : 보기 / 접기
※ 5월 21일 이전 사망자 : 보기 / 접기
어떤 젊은 남매는 멀쩡히 길을 지나가다가 공수부대원들한테 얼굴에서 피를 흘릴 만큼 두들겨 맞았다. #
학원이 많아 학원가 거리라고도 불렸던 금남로 1가 YWCA 건물 옆길에서 두 여인이 걸어갔다. 공수부대원들은 그 중 20대로 보이는 여자를 갑자기 진압봉으로 때렸다. 다른 여자가 항의하자 마찬가지로 진압봉으로 때렸다. 고시학원에서 나오던 학생들은 그 광경을 보고 '우~'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자 공수부대원들은 그 학생들을 두들겨 팼다. 학원 안에 있던 학생들도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야유를 보냈다. 그러자 이번엔 학원 안으로 들어가서 조경숙(20) 씨를 비롯한 수강생 50명을 진압봉과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패고 최용범(20) 등 10명은 밖으로 끌고 와서 밖에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두들겨 팼다.[45] #[46]
군인들은 오후에 더욱 잔인해졌다. 11공수여단 63대대 부대원들의 증언이다.
「우리 부대가 처음 광주에 도착한 19일 오전은 전날의 잔혹한 진압 때문인지 학생들의 시위가 있기는 했지만 간혹 몇백 명쯤 모여 구호를 외치다 군인들이 쫓아가면 도망할 뿐 그렇게 격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오후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학생들의 시위와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에 화가 난 군인들은 난폭해지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시장이나 거리 어디서고 젊은이들은 무조건 잡아서 두들겨 패패고 옷을 벗기고 진압봉과 총검으로 때리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천여 명의 공수 요원들은 흩어져 시위하던 학생들이 건물이나 주택으로 도망을 가면 쫓아 들어가 거기 있는 젊은 사람들은 다 데모대로 간주하고 무자비하게 밟고 때렸다. 그러다 보니 '''생업의 현장에서 혹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애꿎게 잡혀 짓밟힌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내가 속한 중대 병사들이 한 여관에 들어가 한 젊은이를 찾아내 얼마나 심하게 다루었는지, 얼굴과 머리에 피가 낭자하고 공포에 질린 그 사람이 살려달라고 애처롭게 빌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사정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에게 잡혀 온 사람들은 옷을 벗기고 군화에 채이며 머리를 땅에 박고 줄지어 앉아 있다가는 군용 차량에 실려 공수요원들이 주둔하고 있는 전남대나 조선대로 온갖 학대를 다 받아가며 연행되어야 했다. 시장이나 길가에 서 있던 그곳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처음에는 용감히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태가 도를 넘는 순간부터는 감히 대드는 사람도 없고 다들 눈치만 보며 숨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무자비한 진압을 통해 시내를 평정하고 돌아오던 지휘관들과 공수부대 요원들의 자신만만한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한 마디로 '개새끼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감히 까분다'는 식이었다.''' 19일인지 20일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시내를 돌다 돌아와 보니 조선대 교정에는 군인들에게 잡혀 온 수백 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그 넓은 운동장에서 수십 명의 군인들에게 사정 없이 맞고 짓밟히고 있었다. 그들은 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시궁창을 기어야 했고, 운동장 선착순을 수십 번씩 해야 했고, 그 중에서도 늦는 이들은 군홧발과 진압봉에 채이고 맞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또 20일인가 그 다음 날인가도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헌병대가 쓰고 있던 체육관 건물에서 두 명의 젊은이가 하얗게 죽어 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 차량에 실려 오던 도중이나 아니면 그런 와중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일 것이다. 매 맞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군용 트럭으로 수송하면서 그 속에 몇 발씩 가스탄을 터뜨린 군인들도 있었다 하니, 그런 와중에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그런 처참한 상황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11공수여단 63대대 이경남씨의 증언, 20년만의 고백 -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 1999년 당대비평 - 20세기 야만과 결별하기 위하여, 207~208」
오후 7시 30분쯤 최미자(19)씨는 학동 남광주역 부근에 있는 친구집에 가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장갑차다'고 외쳤고, 사람들은 골목길로 달아나고 최미자씨도 같이 달아났다. 장갑차를 타고 온 공수부대원들은 대검질과 함께 발길질을 했고, 그 중 최미자 씨는 오른쪽 겨드랑이와 젖가슴 사이 오른편을 대검에 찔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47]「이와 같은 방법으로 계속 연행 구타 등을 하니 참 무고하게 길을 가다가 많은 젊은이가 피해를 보았죠. 또한 조직적으로 시위를 했던 시위대는 별로 연행자가 없었으리라 나는 생각하오.
-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 「광주사태에서 나는 무엇을 했나 - 광주사태 당시 투입됐던 어느 계엄군의 수기」,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38」
금남로를 뺀 도로에는 시내버스와 택시들이 운행을 했는데, 공수부대원들은 그 차들을 세워 운전자들을 마구 두들겨 패는 일을 벌였다. 부상자를 병원으로 운반해준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런 기사들 구타 사건들은 운전 기사들을 분노하게 했다.[48]
동구청 건물 1층에서 전투복을 입은 경찰국 작전과장 안수택 총경은 시민을 몇 명을 방면해줬다가 공수부대 장교한테 '왜 폭도들을 빼돌리느냐'면서 두들겨 맞았다. '''군이 경찰까지 두들겨 팼던 것이다.'''[49]
경찰들은 공수부대에게 쫓기기도 했다.
1989년 국회청문회를 대비해 보안사에서 작성한 문건에도, 계엄군이 무차별로 구타하고 무혐의 가게 종업원 및 배회자는 연행했으며, 버스와 택시를 검문해서 학생들은 모두 연행했다고 나온다.[50]병원 숙소가 11층에 있어서 밖에 상황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한 번은 도청 쪽을 쳐다보고 있자 군인들이 경찰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경찰들이 골목을 쫓기며 군인들이 뒤에서 쫓고 있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을 목격했다.
김승호 (성모안파의원장. 당시 전남대병원 안과 레지던트 1년차). 눈알이 터진 환자도, 5.18 의료 활동 <자료 기록 및 증언>, 광주광역시의사회, 162쪽.
시민들은 그 순간들을 자기 집에서 쳐다봤다. 군인들은 마이크로 말하며 '문을 닫아라', '커튼을 쳐라', '내려다 보면 쏴버리겠다'고 위협을 하고, 베레모를 쓴 지휘관이 지휘봉을 들고 금남로 2가와 3가 사이에 나타나 길 양쪽을 올려다보며 문을 닫고 내려보지 말라며 소리를 질렀다.[51]
19일 오후 5시쯤에 광주시 서구 월산동 32의 22 4통 1반에 사는 김안부(36)씨는 광주공원 근처 전남주조당 앞 공터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이는 공수부대원들에게 맞아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시체는 전남대병원 영안실에 안치됐고 부인인 김만복씨는 이 사실들을 다른 사람들에 전해 시민들은 사망자가 나왔다는 걸 알게 됐다.[52] 그러나 당시 전남대 의대의 시체 검안서에서 뇌가 손상되는 '뇌좌상'과 머릿속에 총탄이 박힌 '맹관총상'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총격으로 인한 최초 사망자가 아닌가 하는 보도가 있었다.
중앙일보 취재 기자인 김충근 기자는 피곤해서 방공호에서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있었는데, 군인들에게 짓이겨진 시체 2구를 버리는 것을 목격했다.[53]
4.5. 화염방사기 살상 의혹
화염방사기를 운반하는 계엄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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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때 공수부대가 대검뿐만 아니라 '''화염방사기'''까지 시위진압에 동원했다는 주장과 증언이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공수부대는 이날(19일) '''화염방사기'''까지 시위진압에 사용한다. 화염방사기는 살상용 무기다. 이날 시위대에 대한 위협용으로 등장한 화염방사기는 그 뒤 21일, 전남대 앞과 시청 앞에서 실제 진압용으로 사용된다.(212쪽)
이 시간(20일 오후 2시 20분쯤) 서방 삼거리에서는 공수부대의 '''화염방사기'''가 불을 뿜어 시위대 선두에 섰던 시민들이 까맣게 그을려 쓰러지는 장면이 목격되며...[54]
(255쪽)
3공수특전여단의 진압은 곤봉세례와 최루탄 사용에 그치지 않는다. '''화염방사기'''까지 시민·학생들의 시위진압에 동원된다.[55]
방위병 신분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화염방사기 공격을 받은 최병옥 씨(당시 21세)는 간신히 화염을 피하긴 했지만 고열로 얼굴이 익는 피해를 입는다."차를 타고 가던 중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자 인근 주택 화장실로 피신했다. 이미 3명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곳까지 쫓아온 공수가 갑자기 화장실 창문으로 '''화염방사기'''를 대고 불을 뿜어냈다. 순간 숨이 꽉 막혀 뛰쳐나가 그 집 안방 장롱 속에 숨었으나 이내 붙잡히고 말았다. 끌려간 다음 날부터 얼굴은 껍질이 벗겨지고 진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화염방사기의 등장은 곧 공수부대의 진압이 이성을 잃었음을 의미하며(...)(302 ~ 303쪽)
『正史 5·18』, 광주매일 正史 5·18 특별취재반, 1995
이윽고 (20일) 오후에는 대규모로 시위가 전개되었고 2시 30분경 서방삼거리에서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를 쏘아 여러 명의 시민들이 그 자리에서 타죽었다.
『오월의 사회과학』, 최정운, 1999, 137쪽
급한 김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는데 문을 닫고 보니 4명이 거기에 같이 갇힌 꼴이 되었지요. 그런데 아뿔사! 공수부대 놈들이 기어코 우리를 쫓아와 화장실 창문에 '''화염방사기'''를 대고 불을 뿜어내지 않겠어요. 순간 숨이 꽉 막혀 문을 열고 뛰쳐나갔어요.
그 밖의 화염방사기 사용 관련 증언들이다.소방서 앞에는 꽤 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계엄군들은 '''화염방사기'''를 들고 시민들을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직접 사람들을 향해 쏘지는 않고 높은 각도로 쏘고 있었다. 시민들을 살상하기 위해서 쏘는 것이 아니라 위협용으로 쏘는 것 같았다. 나도 군대를 갔다 왔지만 말로만 들었지 총구에서 불이 뿜어나오는 화염방사기는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아무리 위협용이라 해도 무기 하나 들지 않은 시민들을 향해 살상용 무기인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는 것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너무나 잔인했다. 한편에서는 분노가, 또 한편에서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생겼다.
그러나 1995년 검찰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화염방사기 사용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개정증보판)에서는 계엄군이 살상용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는 내용은 싣지 않았다.<화염방사기 사용 여부>
군 관계자들은, 화염방사기는 토치카 또는 장갑차 공격용으로서 인체에 화염을 방사하였다면 전신 중화상으로 대부분 사망하고 말았을 것이라며, 광주에서 화염방사기로 화염을 방사한 적이 없고 당시 화염용 약품 자체가 지원된 일이 없으며, 다만 소요진압용 작용제(CS 분말)나 소요 군중 식별용 유색수를 넣어 이를 살포하는 데 화염방사기를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바, 달리 화염방사기로 화염을 방사하거나 화염방사에 의한 화상 사망 사실을 인정할 자료를 발견하지 못하였음(211~212쪽).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1995
하지만 박종규 당시 3공수여단 15대대장의 체험기에는 당시 공수부대가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는 내용이 있다.(19일) 오후 3시경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 운집한 시민들이 소방서 부근에 진을 치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에게 돌을 던졌다. 공수대원들이 달려오면서 공중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쏘자 엄청난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108쪽)
그 시각(20일 오전) 광주역, 공용터미널, 서방 삼거리를 경비하던 3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화염방사기는 최루가스를 대량 살포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138쪽)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면개정판),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7
그리고 2007년 국방부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11, 12, 13대대가 광주역에 무사히 도착하는 데는 엄청난 위험이 있었다. 대대가 완전히 포위되어 시위 군중의 돌과 몽둥이에 대대가 해체 직전의 위험까지 갔다고 한다. '''화염방사기''', 가스분출기로 겨우 통로를 열어 쫓기듯 돌아왔다고 한다.
3공수여단의 「전투상보」에는 광주역에서의 작전이 "가스탄, '''화염방사기''', '''M203발사기''', E-8발사통" 등으로 시위대를 제지했다며 발포와 과격진압 사실을 은폐했다.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2007, 81쪽
4.6. 최초의 발포, 계림동
19일 오후 4시 50분께 5월항쟁의 첫 총성이 울린다. 광주고 인근에 있던 장갑차에서 발포한 것이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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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동 발포사건으로 인한 최초의 총상 환자인 김영찬 씨는 5.18 당시 대수술을 거듭한 후, 다행히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현재까지도 생존해 있다.참고(4) 5월 19일 상황
(...)
17:00경 공수부대원의 사체가 있다는 허위 제보를 받고 사직공원을 수색하고 복귀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 일부 병력이 광주고등학교 부근 동원예식장 길 건너편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의 강력한 포위 공격과 최루탄 연기로 인해 공수부대 장갑차가 방향 감각을 잃고 보도 턱을 들이 받고 정지하자, 시위대 수명이 불붙은 짚단을 장갑차 뚜껑을 열고 장갑차 속으로 던져 넣으려 하였고, 이에 장갑차에 타고 있던 장교가 장갑차 문을 열고 '''M16 소총으로 위협 사격'''하였는데, 그 와중에서 김영찬(19세, 조대부고 3년)이 대퇴부 등에 '''총상'''을 입었음.(72쪽)
(1) 발포 경위
(...)
광주에서의 최초의 발포는 5.19. 17:00경 광주고등학교 부근에서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바, 5.19. 17:00 사직공원으로 수색하고 복귀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 장갑차가 광주고등학교 부근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가 장갑차를 포위 공격하면서 불붙은 짚단을 던져 장갑차 문을 열고 공포를 쏘고 다시 '''위협 사격'''하는 과정에서 주위에 있던 '''고등학생 1명이 총격'''을 받아 부상한 것(...)(198쪽)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1995
4.7. 광주역 집단발포
(5) 5월 20일 상황
(...)
광주역 앞에서 5갈래의 방사형 도로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최루탄을 쏘며 수천명의 시위대와 대치, 공방을 벌이고 있던 12, 15대대는 20:00경 시위대가 드럼통에 휘발유를 넣어 불을 붙여 굴려 보내고, 트럭, 버스 등 차량 돌진 공격을 계속하자 인도로 피하거나 가스탄 투척 등으로 시위대를 저지하였고, (...) 차량 돌진 등 시위대의 강력한 공격에 위협을 느낀 대대장들이 실탄 지급 등 지원을 요청하자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22:30경 위협용으로 사용하되 위협용 이외의 사용시에는 사전에 보고하라는 지시와 함께 경계용 실탄을 대대에 갖다 주도록 지시하여, (...) 경고 방송에도 불구하고 시위대가 해산하지 아니하자 차량에 거치한 '''M60 기관총을 위협 사격'''하고, 권총과 M16으로 공포 사격을 하고, E-8 발사기로 최루탄을 발사, 시위대를 해산한 후 광주역에 도착 (...) 3공수여단 소속 대대들이 광주역에 합류한 후에도 전남대 쪽과 KBS방송국 쪽에서 시위대가 여러 차례 차량 돌진 공격을 감행하였고, 3공수여단은 장교들의 '''권총, M16 발포'''와 E-8 발사기 발포로 돌진 차량을 저지하고, 시위대를 해산(...)
5.20. 밤 광주역 일대에서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김재화(남, 25세), 김만두(남, 44세), 김재수(남, 25세), 이북일(남, 28세)이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으며, 최영철(남, 39세), 김명환(남, 16세), 나순돈(남, 20세), 강인곤(남, 20세), 정현택(남, 24세)과 성명불상자(25-30세) 1명이 총상을 입었음.(87 ~ 90쪽)
(1) 발포 경위
(...)
또 5.20. 23:00경 3공수여단이 광주역 일대에서 시위대와 공방을 벌이던 중 트럭, 버스 등 시위대의 차량 돌진 공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수세에 몰리자,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 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하여 이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하여 발포하고, 광주역으로 실탄을 전달하러 가던 특공지원조가 시위대와 마주쳐 진로가 막히자 위협 사격을 하고, (...) 그 와중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것(...)(198 ~ 199쪽)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1995
※ 광주역 시위 관련 부상자 사례 : 보기 / 접기
5. 5월 21일의 집단발포와 살육
※5월 21일 집단발포 부상자 사례 : 보기 / 접기
5.1. 개시
21일 오후 1시가 되기 직전, 시위 진압을 위해 지원 나왔던 기갑학교 소속 장갑차 한 대가 시위대에게 화염병을 맞아 불이 붙었다. 장갑차가 뒤로 가자 시위대 장갑차가 계엄군 저지선을 향해 돌진했다. 그 돌진에 한 명이 쓰러지고, 다른 한 명[57] 은 깔려 사망했다. 장갑차가 지나간 뒤 시위대 중 한 명이 쓰러진 계엄군의 총인 M16을 들었는데, 고장이 났는지 그냥 버렸다.[58] 계엄군은 도청 분수대 뒤와 도로 주변으로 피신했다. 계엄군은 장갑차를 향해 총을 쏘았고,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서 장소 밖으로 나갔다. 그 뒤 버스 두 대가 계엄군 쪽으로 돌진해서 분수대를 돌았고, 계엄군은 버스들을 향해 사격을 했다. 버스에 탔던 운전사 한 명이 사망했고 버스는 분수대를 들이받고 멈췄다. 그 뒤 시위대 중 일부는 차량과 함께 도청 쪽으로 몰려들었다. 그 때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일부는 그대로 돌진했고 일부는 애국가를 불렀다.[59]
5.2.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60]
「나는 오른쪽으로 도청 앞 광장, 왼쪽으로는 금남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건물의 3층에 서 있었다. 하기식을 알리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금남로를 메운 시위군중들도 주섬주섬 기립 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 때 시위대 맨 앞쪽 사람들이 등 뒤쪽으로 피를 뿜으며 길바닥에 꼬꾸라졌다.[61]
그런 다음 귀를 찢는 총성들이 들렸다. 눈을 오른쪽으로 돌렸을 때 도청 앞 광장에 정렬해 있던 군인들은 맨 앞열이 무릎 쏴, 다음 열이 서서쏴 자세로 총격을 가하고 있었다.[62] 그런 다음 두 열의 총격이 끝나면 무릎쏴 자세의 대열이 후미로 빠져 트럭을 타고 빠져나가는 그런 교대형태로 광주의 공식적인 집단 발포명령을 집행되었다. 당시 내가 바로 그 지점에 있지 않았다면 애국가가 집단 발포명령의 신호가 되는 참담한 비극을 증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총알이 총성보다 빠르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그때 금남로 거리에 가로 걸린 '봉축 부처님 오신 날'이라는 석탄일 축하 아치와 그 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피비린내 나는 인간 살육이 빚어내는 극과 극 사이의 대조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 김충근(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금남로 아리랑, 5.18 특파원리포트, 223」
「우리 대대에 속한 병사가 깔려 죽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일어났다. 장갑차가 밀려나면서 공수요원들의 저지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도청 앞 광장은 돌진하는 시위대와 그들의 차량들로 채워지게 되었는데, 다급해진 군인들은 누구에 의해서인지 모르나 사격으로 대응하였다. 발포와 함께 시위대는 흩어졌고, 우리는 도로에 낮은 포복으로 엎드려 몸을 숨기고 있어야만 했다.
내 기억에는 그때 '''장갑차가 도로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캘리버 50 기관총으로 무수하게 사격을 했다. 그것은 단순한 위협사격이 아니고 분명 실제 조준 사격이었다.''' 어떤 자는 도청 앞에서 시위대에 의해 발포가 시작되어 대응사격을 하였노라고 말하기도 한 모양이나, 내가 알기로는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하고 무력으로 대응한 것은 이런 일들에 의해 군인의 사격이 시작된 이후의 일이지, 먼저 하였거나 함께 사격으로 맞대응한 것이 아니다. 그때는 수백 명의 군인들이 도청 앞 도로에서 무방비 상태로 엎드려 있었는데,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시위대로부터 총격을 입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만약 그랬다면 노출된 우리 중에 하다 못해 다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어야 할 텐데 그런 일은 없었다. 더구나 오후 4시쯤 도청에 있던 우리 여단의 병사들이 조선대로 퇴각할 때 도로를 걸어서 퇴각하였는데, 만약 이때에 시위대가 총을 가지고 사격을 할 수 있었다면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까?
- 11공수여단 63대대 이경남, 20년만의 고백 -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 1999년 당대비평 - 20세기 야만과 결별하기 위하여, 216」
5.3. 무차별 조준사격[63]
1시 10분 경 시민들은 한국은행 광주지점과 금남로 3가 양쪽 보도에 집결했다. 공수부대는 장갑차 1대씩을 금남로와 노동청 쪽으로 돌려놓고 사수 10명은 금남로 쪽 큰길을 향해 앉아쏴 자세를 하고 있었다. 한국은행 광주지점과 금남로 3가 지하사강가 공사장 위에 있는 큰 길에 모여있던 젊은이들은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같은 구호들을 외쳤다. 그리고 애국가를 불렀다. 그 뒤 한참 침묵이 흘렀다. 몇 명이 다시 구호를 외쳤고, 젊은이 5, 6명이 큰 길 한복판으로 뛰쳐나갔다. 도청광장에서 400m쯤 떨어진 금남로 한복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공수부대원들은 앉아쏴 자세로 조준해서 쏴버렸다. 젊은이들 머리와 가슴과 다리에서 피가 쏟아졌다. 몇 명이 쏜살같이 뛰어나와 시체와 부상자들을 데려갔다. 또 다시 5, 6명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흔들면서 구호를 외쳤고, 공수부대원들은 다시 쏴버렸다.[64]
「도로에 나와 단순히 구호를 외치거나, 차량으로 도로를 진행하거나, 총상자들을 구호 또는 호송하려 하거나, 심지어는 시위 현장 부근에서 구경하기 위해 나타난 경우 등 구체적으로 총기 발사나 차량 돌진 등 군에 대하여 직접적 위협을 가하고 있지 아니한 상태에까지 발포가 이루어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 '''당시 실탄 및 사격 통제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음이 확인되었음.'''(201쪽)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1995」
「1천여 명의 민중들이 다시 한국은행 광주 지점과 금남로 3가 양쪽 보도에 집결했다. 공수부대가 장갑차 1대씩을 금남로와 노동청 쪽으로 돌려놓고 사격자세를 갖춘 상태인 채 10여 명의 사격수들은 금남로쪽 큰길을 향해 앉아 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 때 한국은행 광주지점과 금남로 3가 지하상가 공사장 위의 큰 길에 묘여 있던 젊은이들이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갖가지 구호를 외쳐댔다. '계엄령 해체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최 돼지 물러가라' '끝까지 광주를 사수하자' '연행자를 석방하라' 등 그 동안 외쳐온 구호는 모두 쏟아져 나왔다. 그뿐만 아니었다. 젊은이들은 차분하게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연도의 많은 시민들은 물론 이들과 대치하여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던 계엄군도 이 애국가를 듣고 있었다. 어떤 행사의 전주곡인 듯 노래 소리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장중하게 울려 퍼졌다.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애국가이기나 했다. 잠시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한참동안 침묵이 흘렀다. 몇 사람이 다시 구호를 외치고 있는 가운데 5, 6명의 젊은이들이 큰 길 복판으로 뛰쳐나갔다. 그 중 한 명은 대형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도청광장으로부터 3, 4백m 떨어진 금남로 한 복판에서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해체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이 건물 저 건물에서 많은 시민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때였다.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쳐대던 5, 6명이 그대로 쓰러졌다. 머리와 가슴과 다리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앉아 쏴 자세를 취하고 있던 공수부대 저격수와 미리 주변 옥상에 배치되어 은신하고 있던 저격수들이 정조준하여 사격한 것이다. 시위민중을 향해 공개적으로 가해진 정조준 발사였다. 땅에 떨어진 태극기에도 피가 흥건하게 젖어들었다. 아스팔트길은 시체와 신음소리와 태극기와 피로 덮여 있었다. 몇 명이 쏜살같이 뛰어나와 시체와 부상자들을 들어냈다. 더욱 놀라운 일이 그 다음 벌어졌다. 또 다른 5, 6명이 역시 태극기를 들고 나와 흔들면서 구호를 다시 외치기 시작했다. 또 다시 사격이 일제히 가해졌다.
- 김영택 기자의 증언,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175~176에서 재인용」
「일단 동시다발적인 총소리는 조준사격이 아니라 공포였다. 공중을 향해서 쏘니까 실탄이 아스팔트 위에 툭툭 떨어지고 도청 분수대 주변에 연기가 자욱한 것이 보였다. 실탄은 별로 많이 지급이 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공포를 쏘고 난 다음 장갑차 한 대가 노동청을 향해 서 있었는데 내가 서 있는 곳과는 직선거리 10미터도 못 되어 장갑차 안에서 탄창이 꼽혀진 띠를 공수들에게 던져주고 또 탄박스를 내려주는 것을 훤히 볼 수 있었다. 공수들은 탄박스를 받아 탄창에 실탄을 기웠다. 장교인 듯한 사람이 공수들을 보고 소리쳤다. '''"이 개새끼들! 조준사격 안 하냐?"'''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계급장을 확인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공수들은 실지 장교인지 사병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공수들은 그때부터 도청 앞에 돌로 난간을 만들어놓은 곳에 길어 조준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무릎앉아쏴', '서서쏴' 자세를 취하고 총을 쏘는 공수들도 있었다. 만약 시민들이 총을 들었다면 어떻게 광장에서 공수들이 산개를 해서 총을 쏠 수 있었겠는가. 장갑차에서도 사격을 했다.
우리 전경들은 그 총을 사용해 보지 못했는데 캐리버 50이었을 것이다.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아니라 손잡이 같은 것을 당겼다. 장갑차 위에 총이 달려 있었는데 시위군중들이 있는 노동청과의 거리는 1백미터도 채 못 되었다. 다연발 총으로 쏘아 한 사람이 푹 쓰러지고 나면 사람들이 흩어졌다. 사람들이 불과 몇 분 만에 다시 모여 시체를 떼메고 가고 나면 또 모이고 그러면 또 한 사람이 푹 쓰러지고 그러한 것을 세 번이나 보았다. 그곳으로 다시 오면 분명히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모여들고 또 모여들고 하는 것이 꼭 불을 찾는 불나방들 같았다. 나는 그러한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생각했다. .
5.3.1. 저격수들
저격수 요원들은 무장하지 않은 시위대나 시민에게 무차별로 총을 쏘기로 하였다.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당시 공수부대원들 만나 면담해서 알아낸 것을 따르면, '''실탄을 받은 공수부대원 중 일부는 주변 건물 옥상에서 저격병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65]
「시위 군중에 대한 계엄군의 공격 양상을 살펴보면, 몇몇은 위협사격을 했으나 몇몇은 조준 사격했다. 전남도청 앞 발포가 있은 뒤 공수부대원 일부에게 실탄이 지급됐다. 그중 일부는 주변 건물 옥상에서 저격병의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11공수여단 62대대 5지역대장 박○○ 소령도 검찰진술에서 도청 앞 사격이있은 뒤 주변 건물에 저격병을 배치하였다고 진술했다. 우리 위원회의 조사에서 11여단 62대대 소속 한○○ 일병은 광주관광호텔 옥상에 4명이 1조가 되어 올라갔으며 사수의 지시에 따라 조준경이[66]
달린 총으로 주동자나 총기를 휴대한 시위대를 조준사격했다고 고백했다.[67]
-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 보고서, 89」
「저격수 요원들이 금남로 쪽으로 향해 아스팔트에 '엎드려 쏴' 자세로 저격 준비를 갖추고 주요 건물을 장악하기 시작했읍니다. 그 때 전일빌딩 옆 건물에서 젊은 청년이 "이 개새끼들아 나 죽여라"하면서 다리를 절룩거리며 저격수들 바로 앞 20~30m 거리의 도로 중앙에 나와서 앉는 것입니다. 저격수들이 몇 발의 사격을 가하자 옆으로 쓰러지는 것입니다. 골목에 있던 시위대가 시체를 가지러 나오자 또 사격이 실시되자 그 시위대 역시 쓰러진 것입니다.
-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 「광주사태에서 나는 무엇을 했나 - 광주사태 당시 투입됐던 어느 계엄군의 수기」,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51」
- 오후 2시쯤 금남로에서 벽에 몸울 숨기고 있던 한 시민이 목에 총을 맞고 숨지는 것을 바로 앞에서 목격했습니다. 조준사격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 건물 위에서 조준사격을 하는 모양입니다. 오후 2시쯤 움직이는 것은 모두 쏘아 도청 일대에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 장재열 (중앙일보 기자), 아직도 굳지 않은 핏자욱, 5.18 특파원 184~185」
나이 먹은 시민들의 증언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사건 당시 도심지 내에 저격병이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거나 경험했다는 게 증언들의 공통분모.「도청 앞 공수대원들이 발포했다, 주변 건물에서 매복조가 저격했다는 등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금남로 2가 상업은행 부근에서 시위대 물결 속에 휩쓸려 있을 때였다. 오후 2시 10분께 총성이 울리는가 했더니 옆에 있던 한 시민이 어깨에서 피를 뿜으며 스러졌다. 가슴이 멎는 느낌이었다.[68]
- 조성호 (한국일보 기자), 오월 고아주의 회상, 5.18 특파원 198」
참고로 5.18 이후 박상증 목사와 민승연 선생이 그 당시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제작한, 5.18 당시의 참상을 가감 없이 담아낸 비디오 "오! 광주(혹은 오 광주여)" - '''일부 잔혹한 장면이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를 보면(14분 50초부터), 정말로 조준경을 붙인 M16을 들고 다니는 계엄군의 모습이 확인된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 대한민국 국군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트라이럭스(Trilux)제 4배율 L2A2 SUIT 조준경을 저격수(현재로서는 엄밀히 지정사수)들에게 지급하여[69] M16에 부착하고 다니게 했는데[70] , 문제는 베트남 전쟁으로 얻은 교훈을 북괴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써먹은 게 아니라, '''10여 년 뒤 보스니아 내전의 세르비아 저격수들이 행한 저격수 거리(Sniper Alley) 사례 같이, 무고한 시민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총기난사 학살'''에나 써먹은 것.
거기다 더 속 터질 만한 사실은, 이 트라이럭스 SUIT 조준경은 '''하나 당 몇십만원 대의 가격을 자랑하는 고가품'''인데, 위의 조사 결과 보고서 각주에 따르면 11공수여단 장비 중 이 조준경이 무려 '''9개'''나 손실됐다. '''그러니까 하나회 똥별들은 명분도 없고 정당성도 없는 무차별 자국민 학살극이란 미친 짓만을 위해, 나라를 지키려고 들여다 놓은 귀하고 값비싼 장비를 1개도 아니고 9개씩이나 무의미하게 날려 먹은 것이다.'''
전남대생 김광석(21) 씨는 점심을 먹고 금남로로 나왔다가 친구가 총을 맞고 쓰러지는 걸 보았다. 김광석 씨는 친구를 병원으로 옮기려고 일으켜 세우다가 뒤이어 날아온 총탄에 가슴을 맞고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71][72]
13 시 30분엔 시민들이 노획한 장갑차 1대가 쏜갈같이 달려왔다. 장갑차 위에는 윗옷을 벗고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태극기 휘두르며 '광주만세'를 외치던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은 공수부대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 때 충장로 입구 도심(Do-sim) 빌딩 5층에선 어린 아이들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내다보려는 걸, 건물주 황호정(62) 씨가 이를 막고 창문을 닫으려다, 총탄 세례를 받고 숨졌다.[73] 금남로 광주우체국 자리에 있었던 나라서적 창업주 역시 이 저격으로 서울대에 다니던 둘째 아들을 잃었다. 사실 이들은 그냥 창문을 열고 내다본 민간인들이었지만, (2차)[74] 진압군들에게는 사진채증 우려가 있는 '''잠재적인 목격자''' 등등 어떤 식으로든지 시위대에 동조할 사람들로 비춰졌던 것.
5.4. 전남대학교 집단발포
※ 5월 21일 전남대 앞 부상자 사례 : 보기 / 접기
최미애 씨는 오후 전남대 앞 평화시장 입구에서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기다렸다. '''공수부대원들은 총을 쐈고 최미애 씨는 날아온 총탄에 머리를 맞고 숨졌다. 최미애씨는 임신 8개월이었고, 8개월 된 뱃속 아기도 마찬가지로 죽었다.'''[78][79]
전남대학교 주변에서 살고 있던 안두환(46)과 장방환(57)은 21일 공수부대에 의해 구타당하면서 연행되었다. 이들은 그 날 이후 행방불명 상태에 있다가 5.18이 진압된 이후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암매장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5.5. 헬기 기총소사
또한 지상의 공수부대 뿐만 아니라, 비행하고 있던 '''헬리콥터에서도 사격'''을 가했다. 이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충격적인 게, 하다못해 지상 보병의 경우 공포를 느끼고 우발적으로 사격했다는 변명이라도 가능하지만, 헬기 같은 항공기는 그런 변명이 불가능한 부분이다. 그리고 헬기 사격은 그 특성상 사전에 기지에서 탄약을 보급 받고 와야 하는 물건인데, 후술하겠지만 21일은 아직 시위대가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던 상황이라 반란군 측이 주장하는 정찰과 선전 목적으로 헬기를 투입했었다면 반대로 채공 시간을 위해 철저히 비무장 상태로 비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 반란군은 시위 초반부터 광주 시위대의 해산할 목적이 아니라, 애초에 시위대를 철저히 계획적으로 사살할 목적으로 헬기 등으로 중무장한 군대를 투입한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헬기라는 물건은 최소 사단 이상에서 관리하는 고급 장비다. 이 말인 즉슨 전두환 반란군의 사격 명령이 최소 소장급 이상(사단장의 계급)의 핵심 반란군이 주도한 것을 추측할 수 있고, 실제로 황영시 계엄 부사령관이 지시한 정황이 발견되었다.
처음 헬기 공중 사격은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시민들의 증언이 많이 나왔지만, 군부에서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당사자 중 한 명인 조비오 신부는 1988년 청문회에 출석하여 5.18 당시 헬기 기총소사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서 헬리콥터 사격을 주장하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사람이 그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 보여. 그 헬리콥터에 그 안에 있는 사람이. 그러다가 이 정도 높이에서 스윽 가면서 픽, 드르르륵 쏘는 거라. 민간인을 향해서 발사를 했다? 이건 군인의 무력 폭력 아니냐는 말이야.
조비오 신부
1995년 검찰은 헬기 공중사격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논란으로 끝나는 듯 했지만...'''(4) 헬기 기총 소사 여부
광주에서 무장 헬기의 공중 사격으로 많은 인명 피해가 야기되었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 (...) 이에 대하여 당시 육군항공단 근무 관계자들은 헬기 기총 사격은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야기하는 것으로 그러한 사격을 실시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군 관계자료상으로는 5.21. 2군사령부가 전교사에 수송용 헬기인 UH-1H 10대, 무장 헬기 AH-1J(코브라) 4대를 지원하고, 사태 기간 중 헬기가 총 48시간 동안 무력시위를 하였다는 기재 외에, 실제 공중 사격 실시 여부에 대하여는 아무런 기재를 발견할 수 없었음. (...) 광주시내 적십자병원, 기독병원, 전남대학병원의 각 당시 진료기록부와 응급실 관계자들의 진술을 검토해 보아도 그 당시 각 병원에서 헬기 총격에 의한 피해자가 내원(來院)하였거나 입원, 치료를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고,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 165명에 대한 광주지방검찰청 사체 검시기록에서도 특별히 헬기 기총 사격에 대한 사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음.(207 ~ 210쪽)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1995
사건이 발생한 지 36년 후 2016년, 옛 전남도청 앞에 있는 전일빌딩을 조사한 결과 전일빌딩보다 높은 곳에서 사격했음이 유력한 탄흔이 180여 개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1980년 당시 금남로에는 전일빌딩보다 높은 건물이 없었으므로, 공중에서 사격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근거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헬기 사격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국과수는 형태로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을 근거로, 사격이 헬리콥터에 탑재된 거치형 기관총[80] 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2017년 2월, 5.18 당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M61 발칸포 탄피 3점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AH-1 코브라 공격헬기에 장착되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M61 발칸기관포의 구경은 20mm다. 항공기 공격이나 부가적으로 구식 전차나 장갑차량들을 공격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며, 급이 일반 기관총과는 전혀 다른 무기이다. 탄의 크기로나 총신이 회전하는 개틀링 기관총 특유의 탄 분산도로 볼 때 경무장한 시민군에게도 쓸 만한 물건이 아니다. 특히나 일반 시민이나 구조대 간호사등 의료 지원자들이 뒤섞여 있는 상황이라면, 그야말로 공중폭격이나 다름없는 무차별 광역 학살이다. 이런 대구경 탄환에 사람이 맞으면 목과 사지가 산산히 분리된다. 제압 후엔 피격자들은 사실상 치료는 커녕, 이미 현장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중화기는 그 무게 때문에 유혈진압이라도 민간인 상대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점을 생각해보면, 전두환 반란군이 아예 작정하고 학살을 계획해 저지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이없게도 이 증언이 최초로 나왔던 1989년에는 당시 항공여단장이었던 송진원이 '''반성은커녕 이 헬기 사격을 증언했던 조비오 신부와 다큐멘터리 제작진을 상대로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2017년 문재인 정부하에서 출범한 국방부 특조위는 헬기 사격 여부를 조사했고 2018년 2월 7일, '''38년만에 헬기 사격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980년 5월 21일과 27일에 헬기 사격이 있었으며, 이를 입증하는 증거로 계엄사의 헬기 작전 지침이 공개되었다. 또한 황영시 당시 계엄사 부사령관의 지시와 김재명 당시 육참 작전차장이 헬기 사격을 지시한 내용도 드러났다. 국방부, 38년만에 5·18 계엄군 헬기 사격 공식 인정.
5.6. 자위권 발동
헬기 사격 등 반란군의 학살이 시작되자, 성난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기 시작했다. 신군부 세력은 이 사태에 대해 논의를 하였다.
반란군 수장 전두환은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다.[81][82] 오후 16시 30분엔 국방장관실에서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성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김종곤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윤자중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 류병현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진종채 제2군사령관, 백석주 연합사부사령관,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이 모여서 회의한 결과에 따라 신군부 반란 세력이 부리던 계엄군의 소위 말하는 자위권 발동이 공식으로 결정됐다.[83]
5.7. 반란군의 후퇴와 살육
21일 집단발포 이후 시민들이 저항권을 발동하고 무장을 시작하자 반란군은 작전 방향을 광주시를 외곽 봉쇄하는 것으로 바꾸고 광주 시내의 군인들을 후퇴시켰다. 그리하여 오후 4시경부터 공수부대는 광주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후퇴하면서 군인들은 혹시 모를 시민군 또는 시위대의 반격을 방지하기 위하여 닥치는 대로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이 일로 반란군의 퇴각로 주변에 살고 있던 시민들이 총에 맞아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조선대 부근 양복점에서 일하던 송승석은 저녁 7시경에 총소리가 들리자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와 보았다. 마침 반란군은 그 주변 지역을 지나던 중이었고, 총알이 날아와 그는 좌측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다.
택시 회사에 다니던 전정호는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결국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한편 반란군의 퇴각 차량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도 있다. 학운동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던 임수춘은 가게 근처에 있다가 과속을 하던 반란군 차량에 치였다. 그는 이 사고로 머리가 으깨진 처참한 모습으로 사망했다.
6. 연행자 학살
검찰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공수부대원들은 날씨가 더운데도 '''사람들을 한 트럭에 과다할 정도로 쑤셔 넣었고 안에 최루탄까지 터트렸으며, 차가 교도소에 도착했을 때까지는 6명이 죽었다.'''[84] 또한 철수하는 과정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시체 12구를 암매장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85] 어떤 인간들은 '시민군이 묻은 걸 수도 있다'고 우겨댄다. 그런데 그 암매장 사람들 중에선 공수부대원들한테 연행당한 사실이 분명히 밝혀진 사람들도 있다. 안두환(남, 46세), 장방환(남, 57세)은 공수부대원들한테 연행되었는데 광주교도소 지역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86]
「포승줄로 손이 묶이고 굴비처럼 엮어진 채 서 있는 자세로 병기수송 차량도 같은 밀폐된 트럭에 실려갔다. 한 트럭당 삼십 명쯤 탔는데 작은 유리창이 양쪽으로 두 개가 있었고 유리창 바깥쪽은 철망이 씌워져 있었다. 차는 전남대 후문 쪽으로 빠져나갔다. 유리창 틈으로 내다보니(나는 팔이 부러져서 뒤로 손을 묶이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몸을 움직이가 편해 간신히 유리창으로 바깥을 볼 수 있었다) 전남대 정구장 쪽 비탈에 두 명의 아가씨가 가슴에 '전두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고 씌어진 천을 두른 채 움직이지 않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죽어 있는 것 같았다.
이송되는 도중 그 밀폐된 차 안에다 최루탄을 쏘았다. 순식간에 생지옥이 되었다. 전원이 묶여 있는 상태에서 코피를 흘리고 오줌을 쌌다. ...
목적지(광주교도소)에 도착했을 때는 어둑어둑했다. 차에서 내려보니 내가 탄 트럭에서만도 서너 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살아 있던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최루탄 때문에 얼굴 피부가 벗겨져 지도를 그려놓은 듯 빨갛게 되어 있었다. ...차에서 내린 장소는 교도소 면회실 근방이었는데, 우리는 내리자마자 곧바로 '원산폭격' 기합을 받았다... 구타당하던 중 매에 못 이긴 한 사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돈으로 안 될 게 뭐 있느냐. 돈 먹어라!" 라고 소리치면서 자기 옷 속에서 만 원짜리 묶음 4뭉치를 꺼내어 확 뿌렸다. 지폐들이 원산폭격 자세로 있는 우리들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공수대 여섯 명이 그 사람에게로 달려들어 M16 개머리판으로 짓이기자 그 사람은 이내 쭉 뻗어버렸다. 그리고 원산폭격 자세에 있는 우리 머리 위로 총성과 함께 총알이 핑핑 지나갔는데, 총에 맞은 사람은 없었다. 시체처리 장면을 못 보게 하기 위한 위협사격인 듯하였다.
갈증으로 오줌을 마시는 사람도...
그런 후 우리들은 교도소 안에 있는 창고(사형집행자 대기실)에 수용되었다. 며칠째 물 한 모금 입에 대보지 못했으므로 탈진 상태에 빠진 우리가 물을 달라고 아우성치자 공수 한 명이 "야, 오줌 줘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수 한 명이 즉석에서 물컵에다가 오줌을 싸서 주었다. 한 사람이 그걸 덥썩 받아 마치 시원한 냉수를 마시듯이 벌컥벌컥 받아마셨다.''' 꿀꺽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지금도 귀에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다. 우리는 이미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었다. 그 때 느꼈던 치욕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창고에 수용된 후에도 무릎을 꿇은 채 대검, 곤봉, 총 개머리판, 군화발 등으로 매일 수백대씩 구타당했다. 이러한 살인적인 구타는 석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교도소에 도착한 다음날은 잡혀왔던 예비역 해병 중사(본인이 그렇게 신분을 밝혔음)가 매를 이기지 못하고, "나 죽여라." 하고 외치며 달려들었다. "오냐, 죽여주마." 하면서 5, 6명이 개머리판으로 짓이기니 그대로 죽어버렸다. 또한 그들은 작전 나갔다가 대원이 죽거나 부상당하면 그 시체를 갖다놓고, "너희 같은 놈들이 죽였다. 너희들도 이렇게 죽어봐라." 하면서 짐승을 잡듯이 두들겨패서 한 명씩 한 명씩 죽였다. ...무릎 꿇은 자세에서 발가락을 바짝 곧추 세우고 있게 하다가 견디다 못해 발가락이 펴지면 대검으로 발가락을 짓이겨 버렸다. 일명 '닭발요리'라고 하는 기합이었는데, 말 그대로 닭발을 쪼듯이 탁탁 두들기며 짓이겼다.
- 증언자료)살인적인 고문에 죽어나가는 사람들/강길조」
7. 광주시 외곽 봉쇄 작전과 민간인 학살
7.1. 외곽 봉쇄 작전
19시 30분에 계엄사는 전교사한테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히 차단하라(작전 지시 80-5호)'는 지시를 내렸다(보안사, 광주사태일일속보철, 383-1980-89, 236쪽). 이 명령에 따라 3공수여단 265/1261 병력은 광주교도소를 경계하며 남부 고속도를 차단했고, 7공수여단 82/604 병력과 11공수여단 163/1056 병력은 광주-화순 도로를 차단했고, 20사단은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했다.[87]
7.2. 광주교도소/효천역 부근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히 차단한 계엄군들은 시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했다.
7공수여단은 5월 22일 13시 16경 29번 국도 너릿재터널 입구에서 화순에서 광주로 오던 1/4톤 트럭에 총을 쏴 1명을 연행하고 1명을 쏴죽였다.[88]
광주교도소 부근은 광주-담양을 오가는 길목이었다. 그리고 3공수여단의 임무는 광주교도소 경계뿐만 아니라 남부 고속도로를 차단하는 것도 있었다. 당연히 많은 민간인들은 광주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3공수여단은 지나가지 못하게 그 부근을 차단하고 민간인 학살을 여러 번 벌였다.[89]
김성수 씨는 화물차를 운전하는 사람이었다. 사건 당시 고향인 진도로 가려고 아내와 딸을 데리고 시내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계엄군이 막았고, 다시 북쪽에 있는 담양 쪽을 나가려 했으나 계엄군(3공수여단)이 막았다. 아내 김춘화씨는 울면서 보내달라고 사정했지만 거절했다. 계엄군은 '돌아가지 않으면 죽이겠다'며 총으로 위협까지 했다. 김성수 씨는 어쩔 수 없이 아내와 딸을 차에 태웠고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차를 향해 계엄군은 무차별로 쏴댔다. '''돌아가라 시켜서 돌아간 건데 오히려 그 사람들을 무차별로 쏴댄 것이다.''' 김성수 씨는 의식은 있었지만 아내와 딸은 혼수상태였다.
아내인 김춘화씨는 뇌수술을 3번이나 받고 정신이상 증세까지 걸렸다. 나중에 차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딸 내향(당시 5살) 씨는 하반신 마비가 됐다. 출처, 출처.
그 외 교도소 주변은 민간인 학살이 여럿 있었다.
합수부는 이걸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이라 날조했다. 그 내용을 따르면, 당시 광주교도소에 복역 중인 류락진의 동생 류영선과 처 신애덕이 시위에 가담했고, 그 시위대가 교도소를 습격해서 류덕진을 구출하게 선동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류영선은 교도소를 습격하다 총상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 1차: 광주교도소습격기도사건(보안사, 383-1989-8, 89쪽) 2차: 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118쪽.]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사를 해봤는데 이게 조작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 신애덕은 합수부한테 예비검속 당한 딸 류소영을 찾고 있었다. 류영선은 5월 21일 전남도청 앞 발포 대 머리를 총에 관통당해 사망했다. 합수부는 '도청앞에서 죽은 시민이 교도소 습격했다'는 왜곡을 벌인 것이다.「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 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3공수여단이 철수해 봉쇄작전을 수행했던 광주교도소 부근에서도 민간인 살상이 발생했다. 당시 3공수여단이 경계했던 광주교도소 부근은 광주-담양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했다. 광주교도소는 민간인 학살이 빈번하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설명됐다.
-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94~95」
이렇게 이미 진상규명이 완료됐는데, 유사역사학 추종자들은 아직까지 시민들이 교도소 습격했다고 날조(혹은 아무런 증거도 없고 정황증거도 성립하지않는 유사학을 주장)한다. 이 세력들은 이러면서 '광주교도소가 광주-담양을 오가는 길목이라는 것', '3공수여단은 남부 고속도로 차단일까지 맡았다는 것'은 절대 설명하지 않는다.
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118쪽
7.3. 주남마을 버스 학살
김춘례는 23일에 할아버지 제사를 가려고 기숙사 동료인 고영자와 함께 시민군들한테 찾아갔다. 사정을 들은 백대환은 데려다 주기로 했고 17명과 함께 도청에서 출발해서 화순으로 향했다.[90] 그 때 군인 한 명이 도로변에 나와 차를 멈춰라 그랬다. 버스는 그걸 무시하고 세게 달렸다. 그렇게 무시하고 달리니 산 쪽에서 차를 향해 총을 쏘았다. 차 안에 있던 젊은이 2~3명은 산에다 총을 쐈다. 남학생들은 머리에다가 총을 들고 항복했고, 여학생들은 손을 흔들고 살려달라고 했다. 그래도 총알이 계속 날아왔고 사람들은 엎드렸다.[91] 총알은 계속 날아왔고 15명이 사망했다. 3명이 살아남았다.
홍금숙과 부상자 2명은 주남마을 여단 상황실로 이송됐다. 간호봉사원들은 전남대병원으로 후송할 것을 요구했으나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거부했다. 11공수여단 작전보좌관인 김 소령은 부상자들을 데려온 것을 책망까지 했다. '''군인들은 부상자 2명(채수길, 양민석)을 인근 야산으로 데려간 뒤 쏴죽였다.''' 당시 현장 부근에는 11공수여단 간부들이 있었는데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정 중사는 사실을 알고도 제재 조치를 하지 않았다.[92]
7.4. 진월동 어린이/청소년 학살 사건
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트럭에 탄 채로 진월동 원제부락 저수지 옆길을 통화갈 때 10대 남자아이들 15명이 저수지에서 놀고 있었다. 이런 아이들을 상대로 자위권(?)이 발동됐다.[94]변사자: 전재수 ('''10세''')
사인: 우측늑골하부에서 좌측늑골하부부분으로 관통상
비고: 5. 24. 13:10경 '''앞마을 동산에서 같은 마을 어린이 2명과 놀던 중 총상을 입고 사망.'''[93]
변사자: 박현숙 ('''16세''')
사인: 하복부 총상
변사자: 방광범 ('''13세''')
사인: 두개골 관통 총상
비고: 5. 24. 13:50 '''효덕동 소재 저수지에서 목욕하고 귀가 중 총상.'''
'''링크 출처 :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트위터'''
<5.18 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 중 일부 사망자,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피해자 중 '''일부'''의 목록.
원제마을 저수지 옆길을 지나던 공수부대는 무장 시위대를 발견했다. 이 때도 수하를 한 뒤에 거부시에 발포해야 했으나 수하 없이 발포를 하기 시작했다.
뒤따르던 군인들은 주변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일부 군인들은 저수지를 향해 발포했다. 방광범(13)은 피하지 못하고 총알에 맞아 죽었다. 진제마을 뒷동산의 청주한씨 선산에도 몇 명 아이들이 놀았다는데, 그 아이들을 향해서 발포가 일어났다. 이 때 전재수(10)가 사망했다.[95]"또 5. 21. 18:49 전교사는 '확인사격 지시(전상자전 제611호. 5. 21. 20:55)'를 하달했다. 수하 불응시 사격하라는 지시였다. 330) 그러나 송암동 20사단 사건, 광주교도소 발포, 주남마을과 녹동마을 주민들에 대한 총격 등은 수하 자체가 없는 발포였다. 5. 24. 외곽 봉쇄 작전 부대교대 지시가 내려졌다. 이때 전 부대 에 사격을 중지하고 먼저 확인한 뒤 불응하거나 먼저 사격하면 대응 사격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하지만 이 지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이날 하루 두 차례나 오인사격이 있었다. 두 차례의 오인사격이 있고 난 뒤 2 군사령부에서는 16:00에 군부대 상호간의 충돌방지를 지시했다"
- 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102쪽
당시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의 증언이다.
'''아들이 쏜 총에 어린애가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술만 취하면 광주에서 못된 짓을 했기 때문에 죄를 받고 있다며 울지요.'''
5.18 당시 진압군으로 참전했다는 과거로 우울증에 시달린 이성우 씨 모친이 <일요신문> 1995년 10월 1일자에 남긴 증언.
「광주 외곽에 있는 송정리 비행장으로 새 거처를 잡고 아마 거기에서 최종적으로 시내 탈환을 위한 작전을 시행하려고 한 모양인데, 천여 명의 병사들이 수십 대의 군용 차량에 탑승하여 장갑차를 앞세우고 비행장으로 출발한 것은 오후 1시경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미 우리들은 개인당 580발의 실탄과 수류탄이나 가스탄등의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고, 시위대의 기습에 대비하여 실탄을 장전하고 경계하며 차량 이동을 하게 되었다. 국도를 따라 한참을 이동하던 중 간간이 민간 마을을 향해 사격을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곳은 광주 시내로부터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이었고 마을의 주민들이나 아이들도 시내의 소요와는 무관하게 평소처럼 모내기를 하거나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그런 곳이었는데, 지금도 나는 왜 군인들이 그런 마을을 지나며 사격을 해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두 발씩 들리던 총성은 이내 콩볶는 듯 하는 요란한 소음으로 바뀌었고, 논에서 모내기를 하던 농부들이나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던 어린이들, 그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 놀던 아이들이 총소리에 놀라 혼비백산 흩어지고 자빠지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96]
당시 군인들의 말로는 시위대가 나타나 그랬다는데 사실 여부는 모르겠다. 당시 사정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가 안 되겠지만, 내 느낌으로는 실탄 장전이 된 소총을 가진 군인들이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움직이는 물체를 향해 본능적으로 사격을 해댄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한다. 후에 알고 보니 이런 와중에 애꿎게 총에 맞아죽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여럿이었다.
- 11공수여단 63대대 이경남, 20년만의 고백 -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 1999년 당대비평 - 20세기 야만과 결별하기 위하여, 216-217」
7.5. 송암동 군 오인전투와 분풀이 민간인 학살
송암동 일대를 지나갈 때 11공수여단 62대대는 APC 장갑차를 앞세워 철수하던 도중 갑자기 도로 양편의 매복지에서 90밀리 무반동총으로 인한 사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인해 트럭 4대가 파괴되었다. 이에 공수부대는 즉시 트럭에서 내려 매복지를 향해 무차별 응사해 무력화시켰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응사당한 대상은 광주 육군보병학교 소속 교도대였다. 이로 인해 9명의 사망자와 33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수하 없는 발포였다. 1995년 7월 20일 동아일보.
아군한테 총격을 받은 11공수여단은 민간인들한테 화풀이를 했다. 군인들은 김금순 씨 집안 들어와서는 방이고 화장실이고 다 뒤지며 모두 나오라고 소리쳤고, 집 안에 있던 권근립 씨와 김승후 씨와 임병철 씨가 밖으로 나갔다. 11공수여단은 그 세 사람을 총살했다. 김승후 씨는 오인사격 현장 근처에 데려가서 쏴죽였다. 권근립 씨는 고랑에 데려가서 쏴죽였다. 권근립 씨는 손이 끊어져서 덜렁덜렁거렸다. 그걸 목격한 사람은 권근립 씨의 어머니인 김근순 씨였다. 권근립 씨 옆에는 임병철 씨도 쓰러져 죽어있었다. 더 나아가 군인들은 칠면조 우리에 난사해 2백여 마리를 죽이고 젖소까지 쏴 죽이는 등 가축까지 살해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지하실에 숨어 있는데 군인들이 집으로 쑥 들어와서 방이고 화장실까지 다 뒤지고 이불까지 다 내려서 깔아놓고 난리를 치더니 큰방으로 들어와 서랍을 열어서 담배하고 라이터하고 시계 같은 것을 가져가 버리고 모두 나오라고 소리를 질러요. 그래서 손을 들고 아들하고 김승후, 임병철이가 밖으로 나갔지요.
군인들은 젊은 사람 셋만 데리고 나가 말 좀 들어본다고 했대요. 지하실에 있던 나는 이런 사정도 모르고 밖에 나가보니까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노인들 보고 '우리 아들 어디로 갔소' 했더니 밖으로 데리고 갔다고 합디다. 우리 영감은 저기 경상대학 입구에 가서 농사를 짓는데 영감도 안 돌아오고 아들도 없지, 그래서 이 계단에 앉아서 영감도 죽고 아들도 죽고 어찌해야 좋을까 하고 울고 있으니까 영감이 들어 오대요. 영감하고 나하고 둘이서 아들을 찾으러 나갔는데 군인들 차 두 대가 불에 타고 있고 철뚝 너머 바로 근처에 김승후란 사람이 쭉 뻗어 있어요. 그래서 저 사람은 죽었는데 우리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허둥지둥 신작로 길을 걸어 나가보니까 고랑에서 우리 아들은 여기 손이 끊어져서 덜렁덜렁하고 등을 맞았는지 피를 흥건히 흘리고 병철이와 함께 똑 같이 엎어져 있대요.
- 국회 5.18 광주특위 현장검증소위원회에서 행한 권근립의 어머니 김금순의 증언 내용,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 5.18 광주민중항쟁연구 235쪽에서 재인용」
시민군과 교전하다 오인사격한 것이 아니였다. 시민군에게 피해를 입어 시민군을 잡으려다 총살을 죽인 것도 아니었다. 같은 아군한테 총격을 받아 피해를 입어놓고는 화풀이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엄청난 차량행렬이 나타나자 시위대로 오인... 계속 해서 1번, 3번, 5번, 7번 차량에 대해 정확하게 한 대씩을 빼고 사격을 실시하는 것입니다. 저휘 차량도 앞부분에 로켓탄을 맞아 차량 앞부분은 오간 데 없고 앞쪽에 탑승했던 4~5명이 부상으로 살려달라는 고함소리, 수천 발의 총성, 수류탄 소리 등... "지옥, 그것이 지옥이다"는 표현밖에 없었읍니다... 그때까지 저는 광주를 지키던 시위대와의 격전인 줄 알았습니다. ...야산에서 젊은이 2명을 시위대라고 잡아왔읍니다. 양손을 뒤로 꽁꽁 묶이고 얼굴은 형체를 알 수 없게 구타를 당해서 오는 시위대에게 너도나도 개머리판으로 때리기 시작했읍니다. 그리고 옆에 흐르는 물에 "엎드려"하고 시켰읍니다. 온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읍니다. 자신들은 절대 시위대가 아니라고 주장했읍니다. 근처의 모 연탄공장에 다닌다고 했읍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랬읍니다. 하지만 변명이 통하지 않았읍니다... 헬기가 계속해서 사상자와 20~30명에 달하는 부상자를 거의 다 나르고 있을 즈음, 뒤쪽으로부터 리어카에 실은 농부 한 사람을 딸이 끌고 왔습니다. 논에서 일을 하다가 총에 맞아 놀라고, 그 딸은 겁에 질려 울지도 않았습니다. 논에서 일을 하다가 무슨 죄가 있다고...
차량이 거의 다 불에 타버리고 다시 뒤쪽 저희 소속대 쪽으로 가니 철군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아까 잡혀왔던 젊은 사내 2명은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 때 모모 장교가 '◯◯◯ 사살시키라'라고 말하자 '예' 하면서 M16 자물쇠를 풀더니 앞의 젊은이에게 3발을 탕, 탕, 탕 하고 쏘고 다시 뒤의 젊은이에게 3발을 쏘자 파르르 물 속에서 떠는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너무나도 보잘 것 없고 비참했읍니다. 다시 모 하사관은 확인사살을 한다고 죽은 젊은이에게 사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제가 꿈속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 「광주사태에서 나는 무엇을 했나 - 광주사태 당시 투입됐던 어느 계엄군의 수기」,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57」
조갑제 기자는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조갑제는 5.18이 "학살이라 할 수 없다"고 하며 "서로 살기 위해 싸웠다"고 한다. '''아군끼리 죽여넣고 민간인을 끌고 와 화풀이로 죽이는 행위'는 민간인 학살이 아니란 말인가?''' 일부는 조갑제 기자의 주장을 가장 신뢰 있는 주장이라고 말한다. 광주를 직접 겪었기에 가장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갑제 기자는 5월 23일부터 광주를 목격했으며, 18~19일부터 광주를 목격한 기자는 한두 명도 아니다. 또한 군인들 사이에서도 학살 증언이 나온다. 유일한 기자의 증언도 아니고 가장 객관적인 건 더더욱 아니나 일부 사람들은 여러 기자들과 군인들의 증언을 무시한다. 거기다 조갑제의 주장에 반박을 하려 하면 유일한 권위인 것처럼 내세워 묵살하려 한다. 예로 리그베다 위키에서 한 유저가 조갑제의 주장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는데, '기적의 역사학자'들이 몰려와서 그 사람을 비난하는 일도 있었다.'''김문수''' : 그럼 그 영화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입니까?
'''조갑제''' : 완벽한 거짓말입니다. 공수부대가 굉장히 난폭하게 진압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이 도화선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민간인 집단 학살은 없었습니다. 서로 총을 들었으니까 서로 살기 위해 싸운 겁니다. 이것은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 검찰부의 수사보고서를 통해 입증된 사실입니다.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는 민간인이 166명, 군인 23명, 경찰 4명은 총 193명이고 광주 시위 관련 행방불명자로 인정되어 보상금이 지급된 사람이 47명입니다. 이 사건이 만약에 학살이라고 한다면 숫자가 이럴 수 있겠습니다.
(생략)
'''김문수''' : 그렇게 된 겁니까?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영화를 이기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예 전부가 거짓말이면 반박이 쉬운데, <화려한 휴가>처럼 일부는 진실을 놓고 결정적인 부분은 왜곡하면 기술적으로 반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박해도 사람들이 이미 기억된 내용을 수정하려 들지 않겠지요.
'''조갑제''' : 맑은 물에 빨간 물감을 5%만 타면 물 전체가 붉은 색으로 변합니다. 5%의 거짓과 95%의 진실로 만든 칵테일이 되는데,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안고 가는 거지요. 결과적으로는 국가가 피해를 봅니다.
'''김문수''' : 그런데 조 선생님 말씀이 사실이라면 제가 아는 광주 사태와는 완전히 다른 겁니다. 저만이 아니고 제 주위의 운동하던 사람들은 거의가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처럼 알고 있습니다.
김문수, 조갑제 할 말은 한다-나는 일류국가에 목마르다
이 사건에 대해 송기숙 교수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 글에 대해 강준만 교수는 송기숙의 말을 인용해 이러한 만행에 대해 학살을 저지른 주체들은 인간이길 포기한 동물이었고, 이후 한국은 '동물의 왕국'으로 전락해 역사의 퇴행과 반동을 겪게 된다고 해석했다.「못자리에서 피사리하는 농부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히고 저수지에서 목욕하는 중학교 1학년짜리를 오리 사냥하듯 쏘아죽였으며, (중략) 국민이 나라를 지키라고 세금을 내어 월급 주고 그 세금으로 사준 총으로 적이 아니라 제 국민을, 더구나 어른도 아니고 아이들까지 이토록 잔인무도하게 죽였다. 적진에서도 이럴 수 없는 일이다. 그게 지휘관의 의도가 아니었다면 그 책임자는 자결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지휘관은 없었다. '''모두가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이다.''' 아니,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 무자비한 살육의 공포로 국민을 누르고 정권을 잡았으므로 처음부터 인간이 아닌 자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 그런 인간이 아닌 짓을 했던 것이다.
- 송기숙 글,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엮음,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 1990, 풀빛, 173」
8. 5월 27일 진압 작전과 살육
8.1. 상무충정작전
8.2. 전남도청에서의 진압
8.3. 전남도청 이외 지역에서의 학살
5월 27일 새벽 3시, 마지막 가두방송 후 반란군은 탱크를 앞세워서 광주를 5개 방향으로 공격해 오고 있었다. 반란군은 광주시내로 다시 들어오자마자 시민군의 저항을 받았는데, 그들을 모두 유혈제압하면서 광주 도청으로으로 쳐들어 갔다.
그때 YWCA 쪽에서 시민군 70여명 정도가 빌딩, 학교 등에 포진되어 있었다. 시민군들이 하나둘씩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광주도청 쪽으로 가는 길들에 있던 시민군들을 제압하면서 광주도청에 4시경에 도착했다. 그리고 전남도청 전투로 반란군은 전남도청에 있던 시민군들을 괴멸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시내 구석 구석에 있는 시민군을 학살했다. 그들은 아직 시민군이 남아있는 YWCA, 광주공원, 월산동, 계림국민학교를 공격, 함락시킨다. 그리고 6시경, 모든 광주시내는 반란군이 점령해버리면서 항쟁은 끝난다.
9. 5.18 관련 증언들이 편향적이다?
''''공수부대원에 대한 이야기는 한쪽 편만 듣고 생각하는 것이다'라는 주장 자체가 5.18 공부를 안 했다는 인증이며 사학계를 우습게 보는 것이다.'''
일부 세력은 '일방적으로 한쪽 편만 들고 5.18을 평가한다', '좌편향'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조국을 위해서라면 반정부적인 시민들은 당연히 처단해야 한다고 아예 미친 듯이 주장하고 있다. 이건 마치 박근혜 탄핵 철회를 요구하며 태극기를 자랑스럽게 흔들어대는 극우파 세력을 보는 듯 하다.
공수부대원들이 무차별 공격했다는 사실은 시위대의 편향된 주장이 아니라 '''제3자들도 똑같이 증언하는 내용'''이다.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가 취재한 내용에도 자세히 실려있다. 중앙일보 장재열[97] 기자 역시 마찬가지로 같은 증언을 한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차에서 내려서 자기 근처를 지나던 젊은이들을 '불문 곡직하고' 마구 때려팼다고 한다. 그 중 한 젊은이는 무등경기장 부근에 있는 광주교에서 다리 난간에 떨어질 때까지 두들겨 맞았다. 당시 취재팀이 취재한 내용에는 '대검으로 찔러', '여자, 팬티만 남기고 마구 때리고 폭행', '도망가는 시위대에 칼 던져' 같은 것들이 써있었다.[98] 같은 중앙일보 기자인 김충근 기자[99] 도 마찬가지 증언을 한다. 김충근 기자는 7공수여단이 벌이는 짓들을 보고 '만행, 폭거, 무차별 공격' 따위 표현들을 쓰려 했으나, 이 같은 행위들을 표현하기에 적절하지 못해 성이 차지 못했다. 그러다 떠올린 단어가 '인간 사냥'이다. 당시 7공수여단이 벌인 행위를 나타날 때 널리 퍼진 표현이 '인간 사냥'인데, 보다시피 시위대가 말한 표현도 아니고, 파시스트들이 너무 좋아하는 홍어하고도 관련이 없다. 또한 여자들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여자들을 때리는 부위를 보고 '백주겁탈, 폭력난행, '''성도착적 무력진압''''이란 표현을 생각했다고 한다.[100]
참고로 당시 한국 기자들은 시위대들한테 혐오를 받고 공격까지 당했다. 예로 '인간 사냥'이란 표현을 쓴 김충근 기자만 해도, 차를 타고 있는데 시위대한테 화염병 공격을 받아 차가 불에 휩싸인 적도 있다.[101] '''그런데도 저런 증언을 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공수부대원조차도 그런 증언을 한다. 위에 본 11공수여단 63대대원 이경남 씨와 나OO씨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니 '공수부대원에 대한 이야기는 한쪽 편만 듣고 생각하는 것이다'라는 주장 자체가 '''왜곡의 일종'''이다.
9.1. 결론
1980년 5월 광주의 반란군은, 국제인권감시단에서도 대놓고 나치 돌격대에 비유했을 정도로, 이 순간만큼은 나치 인종청소부대나 다를 바 없는 극악무도한 범죄자 집단이었다. 반란군 출신자들은 반정부 반란군[103] , 빨갱이, 좌경분자를 잡는 건 줄 알았다는 핑계를 대지만, 반란군은 '''누가 봐도 반정부 반란군, 빨갱이, 좌경분자로 보이지도 않는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임산부, 평범한 주부들과 노약자들을 이유 없이 살해'''하고, '''심지어는 변태 살인마처럼 여성의 가슴에 칼질을 하거나''' 강간까지 일삼아 댔다. 피해자들의 여러 사례들을 보면 5.18 당시 광주의 반란군은 빨갱이를 잡는다는 핑계로 학살과 강간을[104] 신나게 즐겨 댄 사이코패스 변태 살인마들이자 야만인들이었다고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 그런 변태 살인귀들 주제에 대다수의 반란군 출신자들 그리고 (계엄군 출신자들이 포함된) 특전동지회로 대표되는 가해자 옹호 세력들은 적반하장은 기본에 뻔뻔하게도 피해자 코스프레까지 일삼고 있다.[105](중략)1980년 5월 한국에서 군부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했을 때 미국정부의 반응을 살펴보자. '아시아 인권감시단'[102]
은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사흘동안 나치 독일 돌격대와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여성, 어린이, 노인 등을 포함한 비무장 시민을 무참히 살육했다."''' 고 고발했다. 이 단체는 그러한 광란으로 최소 2천여 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전두환과 시민위원회로부터 동시에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민주주의를 촉구하는 시민위원회는 미국 정부가 전두환의 만행을 견제해 줄 것을 요구했다. 반면 전두환의 요구는 미 8군이 광주 시민 진압을 위한 2만명의 군 병력 이동을 허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전두환의 제안은 미국 정부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고, 미국 정부는 확고한 지지를 과시하기 위해 미 해군과 공군을 배치하기도 했다.(...) consider the response when General Chun's military dictatorship in South Korea crushed the democracy move-ment in Kwangju in May 1980. '''Paratroopers "carried out three days of barbarity with the zeal of Nazi storm troopers," an Asia Watch investigative mission reported, "beating, stabbing and mutilating unarmed civilians, including children, young girls, and aged grandmothers."''' Two thousand people were killed in this rampage, they estimate. The US received two requests for assistance: the citizens committee that had called for democracy requested help in negotiations; General Chun requested the release of 20,000 troops under US command to join the storm troopers. The latter request was honored, and US naval and air units were deployed in a further show of US support.
놈 촘스키의 저서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Year 501: The Conquest Continues) 중 99~100p 에서 발췌(1993년)
그래서 신군부 세력과 계엄군의 행위를 각각 반란 행위와 '폭동적 시위진압'으로 규정한 법원의 판결과, 희생자들을 무장 폭동이나 북한군 및 북한 간첩으로 왜곡하는 주장에 대한 비판을 섞어서 '당시 계엄군이야말로 폭도이자 반란군이자 북한군이었다'라는 표현도 나오고 있다.
반란세력인 신군부가 광주 학살을 일부러 일으켰는지, 예상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일어난 건지, 혹은 직접적으로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학살이 일어나게 방조한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당시 신군부는 공수부대원들한테 힘겨운 충정 훈련을 주며 제대로 쉬지도 못하게 해 공수부대원들을 정신적으로 미치게 만들고, 시위와 학생들한테 혐오를 갖게 만들면서 군기도 엉망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해산이 아닌 체포 위주로 진압을 하게 함으로서 최소한의 제한조차 사라진 상태였기에 이런 학살이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김영택 씨처럼 '신군부가 처음부터 일부러 광주를 노리고 했다'는 가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정해구 씨를 비롯해[106] 보통은 신군부 세력의 과잉 대응으로 주장하고 있다. 신군부의 의도적인 만행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5월 27일 도청진압 작전을 수행한 소준열(1931~2004)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이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을 나무라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소준열에게 공수부대의 사기를 죽이지 말라며 항의 편지를 보낸 것이다.
당시 전라남도 경찰국 국장 안병하 씨는 공수부대들이 시민들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와중에도 진압 경찰들에게 무력진압을 하지 말아달라고 명령했다가 5.18 직후에 신군부에 의해 동빙고 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이후 '자진사직' 조건으로 풀려났다. 이를 보면 그때 경찰 라인도 신군부에 의한 과잉 진압 지시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고, 신군부는 치안력보다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시국을 수습하려고 했다고 보면 하급 지휘관들의 충성심의 발로와 무관하게 신군부의 책임은 면할 수 없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으로써 이승만의 부정선거, 박정희 유신독재처럼, 전두환 정권은 이어지는 노태우 정권까지 5.18 민주화운동으로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고,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예가 되었다.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을 강한 정치적 성향의 투사 혹은 폭도로 구분하는 것은 정치적인 의도가 내포된 것일 뿐이다. 바로 옆에서 같은 시민이 무자비한 폭력에 희생되는 것을 보고 울분을 느낀 평범한 인간으로써 상식을 벗어난 폭력 집단에게 내 가족 내 이웃을 지키자는, 가장 기본적이고 정의에 충실한 보편적인 국민들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본 시민들은 분노와 슬픔을 느끼며 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것을 반란군과 군부 반란정권에 대한 분노로 한정할 수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 인간의 존엄성(인간다움)을 보장받고 지켜나가고자 하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열망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광주 시민들의 5.18을 '민주화운동' 혹은 '민주항쟁'이라고 부를 수가 있는 것이다.
10. 상부의 명령이 없었는가?
위와 같은 주장에서 보듯, 최정운 교수는 <오월의 사회과학>에서 '공수부대의 특수한 훈련'에 포커스를 맞춤으로써 공수부대의 광적인 폭력은 상부의 지시나 명령에 의한 걸로 볼 수 없다고 주장을 했다. 그러나 강준만 교수는 최 교수의 주장에 대해 공수부대는 물론 군의 명령전달 방식에 대한 이해부족이라고 반박했다. 애시당초 충정 훈련 자체가 신군부의 지시와 명령에 의한 것으로 비추어 보아 해당 표현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공수부대들의 살육은 분명히 의도적인 행위였다. 가능한 한 많은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그와 같은 살육을 자행하고, 시민들이 이 광경을 보며 분노와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면 더 신이 나서 해대는 것이었다.'''
<오월의 사회과학> 최정운 저. p72.
그리고 헬기 사격이 확인되면서 최소 사단장(소장) 이상의 고위직이 시위대 사격을 지시했다는 정황이 확인되었고, 실제 조사에서 황영시 계엄군 부사령관이 헬기 사격을 지시한 정황이 파악되었다. 이쯤 되면 반란군 수장 전두환이 몰랐다는 주장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고, 최소 묵인했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동조 아예 전두환 본인이 사격을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상황이다.
11. 반란 공수부대가 학살을 하게 된 원인들
5.18 당시 진압군이었던 이경남 목사의 의견.
11.1. 충정 훈련
독재 정권 시절부터 1993년 이전까지 '충정부대'로 지정된 수도권 인근의 군부대에서 실시하던 공세적 시위 진압 훈련이다. 보통 시위 진압에 동원되는 전경 부대는 방패와 곤봉을 이용하지만, 충정 훈련에서는 방패를 운용하지 않고 대신 소총, 대검, 곤봉을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훈련했다. 즉 시위자들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시위대를 공격해서 해산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는 훈련이었다. 충정 훈련은 훈련 자체 강도도 대단히 높았는데, 그 훈련을 하는 시간도 1980 초반 이전보다 많아졌다. 훈련을 위해 부대에서 퇴근도, 영외 거주도, 외출 및 외박도 하지 못하게 했다. 80년 2월부터는 특전사는 다른 교육 훈련은 포기하고 오직 충정 훈련에만 여념이 없었다. 충정 훈련 진행을 위해서 다른 전술 훈련 일정도 전부 삭제했을 정도. 한 지역대는 폭도 역을 맡고, 다른 지역대는 방어하는 부대원을 맡아서 강도 높은 훈련을 수없이 하였다.[107]
당연하지만 충정 훈련으로 인해서 계엄군이 그런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는 시각은 계엄군을 옹호하는 논리는 되지 못한다. 오히려 충정 훈련 때문에 계엄군이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 논리는 계엄군들 입장에서도 완벽한 자폭인데, 저 논리를 따를 경우 "5.18 계엄군은 고작 자기들이 고된 훈련 때문에 화 난다는 이유로 무차별 살인과 강간을 저지르고 다닌 희대의 쓰레기들" 이라는 소리가 되기 때문.
11.2.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
당시 공수부대들의 진압 목적은 해산이 아니라 체포였다고 11공수여단 하사는 증언했고, 실제 2군사령관의 강조사항에서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하도록 지시했다.[108]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5월 18일 오후 4시에 7공수여단이 투입되어서 군인들에게 가장 먼저 내려온 지시는 '''"거리에 있는 사람 전원 체포하라"'''였다.
11.3. 시위대를 불순분자라 판단
당시 상층부는 시위를 '불순분자의 소행'이라 인식했고, 현장에서 진압을 하던 공수부대원들 역시 시위를 '불순분자의 소행'이라 생각했다.[109] 거기에 충정훈련 중 병행된 정신교육에서조차 "시위 군중의 배후에는 빨갱이가 도사리고 있다.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때리고 짓밟아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계엄군 출신자들도 이런 식의 변명을 하며 자기합리화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그 예시), 물론 아래에서도 나와 있듯 그런 말을 들어봤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산부나 초등학생 어린애를 불순분자/빨갱이/반정부 반란군이라고 진지하게 믿고 쏴 죽일 정도의 처참한 지능 수준으로 대체 특수부대인 공수특전여단에는 어떻게 들어갔냐? 그딴 걸 핑계라고 대냐?"''' 혹은 '''"저딴 저능아들이 특수부대인 공수특전여단에 들어갔다니 그 때 군대들은 고압적이기만 한 쓰레기 군대인 게 뻔하지"'''라는 식으로 비아냥대며 오히려 더욱 더 계엄군을 욕할 뿐이다.
11.4. 개판인 지휘와 군기
"폭동인데 길가는 애들은 왜 죽여? 저수지에서 목욕하고 나오는 애들은 왜 죽이는데? 머리에 조준사격하는데?"
"'''공수부대가 12살짜리 애도 구분을 못한다고?''' 길가던 여고생도 배에 총맞고 죽었는데?"
"뭐여 시벌 '''애랑 성인을 구분못할 정도로 눈깔애자가 공수부대를왜함''' ㅋㅋㅋ"
"'''성인 남성이랑 11살짜리 애랑 구분도 못할리가 있나.''' 병신인가"
"오인사격 시발ㅋㅋ 존나 웃기네. '''투입된 공수부대들 애랑 총든 남자도 구분 못하는 ㅂㅅ집단들'이었다고 인정하는 꼴''' 보소"
"공수부대 수준 ㅋㅋㅋㅋㅋㅋㅋ 애랑 어른도 구분 못하는 당나라부대 ㅋㅋㅋ"
"아프리카 민병대도 그런 실수는 안 하겠다 ㅋㅋㅋㅋ"
"님아 '''군인이 저수지에서 노는 어린애들을 적으로 인식한다구여?'''"
"님아 '''적을 '조준' 하는데 그게 지나가는 어린애인지 총든 성인인지 못알아봐여?'''"
"어떤 미친놈이 애새끼도 구분을 못하냐? 그딴 놈들이 피아식별은 어째 할라고"
"애어른 구별 못하는 새끼들은 북한이랑 어떻게 싸우냐?"
"설령 야간이었다 쳐도 체격차 때문에 실루엣으로 구분 될텐데 '''사망시각 보니 13시 50분 9시 13시 50분''' 애미터짐 "
"완전 베트남 전쟁수준 적국, 진압 대상이 아니라 쏘고보는 대상 취급. 자국민이라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11살 초등학생 저수지에서 놀고 들어오다 두부관통상맞은게 폭동진압이구나"
- 기갑 갤러리에 올라온 5.18 민주화운동 폭동설 반박글에 달린 댓글들 중, 일베저장소 쪽 유저로 추정되는 유동닉이 계엄군의 어처구니 없는 범죄를 옹호하자 어이가 없어진 다른 유저들이 단 반박 댓글들. #[110]
5.18 민주화운동에서 계엄군들이 저지른 만행과 추태들은 '''군사정권 하에서의 대한민국 국군(심지어 특수부대라는 공수특전단조차)의 제3세계 반군이나 민병대만도 못한 처참하기 짝이 없는 질적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방증'''이라고 볼 수 있다.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라는 중범죄를 제외하고도, '''5.18 당시의 계엄군은 묻지마 살인과 강간에 환장한 무식한 미개인들을 대충 모아다 군복 입혀놓고 공수특전여단이라 이름 붙인 유사 군대 수준의 무언가'''라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을 여러 한심한 행동들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5.18 기간 동안 내내 수하나 신원 확인을 '''제대로 하려는 척도 안 하고 그냥 눈 앞에 사람이 보이면 (전혀 저항할 힘도 없는 노약자나 학생들, 심지어 어린이들까지) 그냥 마구잡이로 무장이든 비무장이든 무조건 쏘고 보거나 폭행을 가했기 때문이다.'''[112](중략)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옛 광주교도소에 주둔했던 3공수여단 15대대 부사관 출신 김모씨는 지난 22일 5·18기념재단 관계자와 현장을 둘러보며 37년간 간직해온 기억을 털어놨다.
김씨는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었던 1980년 5월 21일에 전남대 퇴각 명령을 받고 호남고속도로가 바라보이는 교도소 서쪽에 배치됐다.
그는 "부대원과 함께 '''고속도로를 오가는 차량을 향해 총을 쏘았고''', 멈춰선 차 안에서 시신을 수습했다"고 5·18재단에 증언했다.[111]
5월 19일 광주고 앞에서 발포가 이뤄졌는데도 전교사나 31사단은 상황 보고를 받지 못하고 사실조차 파악 못했다. 20일엔 광주역 앞에서 3공수여단이 총을 쐈고, 2군사령부는 실탄 통제를 지시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에는 전달되지 않았고, 이 지시가 내려간 뒤에도 11공수여단에는 실탄이 분배됐다. 공수여단은 5월 20일 밤과 21일 아침에 중대장급은 간부들한테 실탄을 분배했다. 당시 공수부대는 실탄 분배나 발포 같은 사실을 도청 발포 전까지 상급 부대한테 허가를 받지 않았다.[113] 그리고 5월 24일 하루에만 계엄군끼리 벌인 아군 사격이 두 번이나 일어났다.[114] 5월 24일 원제마을 인근에서 발생한 아군간 사격에 대한 분풀이를 하겠다면서, 가까운 원제마을, 진월마을로 내려가 주민들에게 총을 발포했다. 이 때 도로변에 있는 주택들을 일일이 찾아가 주민들에게 총을 발사했다. 또한 인근 저수지에선 물놀이하던 초등학생이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화풀이 학살 이후엔 도로에 머무르면서 해당 도로를 지나가던 모든 차량들에게 무차별로 총알을 난사했다.
전교사의 전투상보에선, 연락장교 능력이 부족하고 임무가 미숙해서 정확한 상황전파를 실시 못했다고 분석했다. 또한 전교사는 18:49에 확인사격 지시를 내렸는데 수하 불응시 사격하라는 지시였다. 그러나 수하 자체가 없는 학살이 여러 번 일어났다.[115]
또한 공수부대원들이 술을 마시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것은 시민들은 물론 군인들까지 증언하는 내용이다.[116] 공수부대 장병들이 술을 마신 이유에 대해선 증언이 엇갈리는데, 일시적으로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막걸리 등을 대신 마셨다는 주장과[117]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게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술을 배급했다는 주장[118] 등이 있다.
또한 여기에는 장병 개개인의 피로와 스트레스도 작용했다. 위에 언급한 강도 높은 충정 훈련 진행, 부대의 장거리 이동, 그리고 제대로 지휘가 되지 않는 상황으로 인한 식사와 휴식의 부실함 등으로 인해 장병들의 피로와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이것이 시위대에 대한 불순분자라는 인식과 지역 혐오 등과 겹쳐서 말 그대로의 화풀이와 증오로 인한 폭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이들이 '''공수부대'''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계엄군의 정당성을 오히려 더욱 떨어뜨리는 요소가 된다. 공수부대는 항공기를 이용하거나 경우에 따라선 임야를 기어다니며 장거리 침투를 감행한 후, 적 후방에 침투하여 고가치 표적 및 적 수뇌부를 격파하는 한편, 언제 올지 모르는 아군의 도달을 기다리며 적극적인 적후방 교란 및 파괴 행위를 벌이는 정예 특수부대이다. 적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산골에 비트 파고 짱박혀서 며칠동안 대소변 바지에 싸 가며 잠복해야 하는 경우, 적 점령지에서 탈출하기 위해 험지에서 기도비닉을 유지하는 초장거리 행군 등도 당연히 상정된다.
따라서 특전사라면 어떤 훈련이 있든, 어떤 스트레스를 받든, 항상 냉정을 유지하고 자신의 임무에 가장 충실할 줄 알아야만 하는 부대이며 병사들인 것이다. 적 후방에서 최대한 제한적이며 계산된 게릴라전을 벌여야 하는데 쓸데없는 민간인 학살에 열을 올린다면? 비트 까고 며칠 대기해야 하는데 스트레스로 미쳐 민간인 구역에 진입하여 약탈을 자행한다면? 그 날로 작전 실패하는 것이다. 이것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공비들이 민간인을 쏴죽인 병크짓이 어떠한 결과로 돌아오는지 알 수 있다. 5.18 당시 공수부대가 보여준 모습은 분명 수준 이하의 모습이었고[119] , 이는 당시 특전사가 감히 '정예'라는 이름을 달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점을 낳게 만든다.
단, 이 모든 주장은 상부에서 내려진 명령이 '''상식적인 선에서 내려진 명령일 경우'''에 한해서 맞는 말이다. 상부에서 내려진 명령 자체부터 비상식적이었다면, 혹은 명령 체계에서 별도의 개입이 존재했고 거역할 수 없는 위치에서 내려온 개입이었다면, 공수부대원의 책임은 불의에 항거하지 않은 점 한 가지로 좁혀지며[120] , 신분이 군인 그것도 정예 중 최정예병임을 감안하면 그마저도 따지기 힘들다.
11.5. 지역혐오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위에 같은 잔인한 공격을 하면서 '전라도놈들 다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외쳤다. 시민들은 자극을 받고 공포에 떨었다. 이런 지역 차별 발언에 대해 항의하는 시민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남았다. "전라도놈 30만명 죽여버린다고 했다."며 "어디 그런 소릴 하냐"고 항의하는 모습이다.
사건 당시 계엄군 내부 보고.
[image] [121]
당시 현장에 있던 공수부대원, 11 공수여단 63대대 이경남 씨의 증언
[image] [122]
여기서 주어를 보라. '11공수단', '어떤 군인들'이라고 지칭한다. '''한두 명이 외친 것이 아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곳이 호남 지방이었다. 예로 71년 대선 당시 중앙정보부는 영남 지방에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흑색선전물을 뿌려대는 등 지역감정을 조장한 바 있다. 한국일보. 그리고 지역 차별이 가장 심했던 곳이 바로 군대였다. 당장 하나회가 대부분 영남 출신들로 구성됐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123] , 장교들의 진급에서부터 사병들의 내무반에 이르기까지 공공연히 호남 차별이 이루어졌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레 호남의 심장부인 광주에서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위에서 언급한 다른 요인들과 맞물려 공수부대의 진압이 '충정 작전의 교범'을 벗어나는 만행의 심리적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124]
당시 23세의 청년이던 이선 씨도 아래와 같이 증언하였다.
하지만 이는 일부 지휘관들의 발언이라고 하더라도, 당시 광주에서 공수부대원들의 과잉 진압이 분명했음을 알려주는 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까지 무차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거나 적어도 이민족 개념을 가졌으니 저렇게 할 거라고 보았고, 거기에 경상도 군인만 왔다는 소문이 당연하게 퍼졌다는 것이다. '어떻게 같은 인간으로써 악한 감정을 갖지 않고서 광주 시민들에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적어도 광주에 온 공수부대원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들은 '미움받는 백성, 한 많은 백성 전라도 사람'들을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개돼지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도망가는 사람의 등 뒤에서 착검한 총을 휘둘렀고, 잡은 사람을 때릴 때도 얼굴과 머리를 주로 때렸다.
이선 씨의 증언. 한국현대사사료연구원 편,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 1112」
사실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사회에는 전라도에 대한 혐오와 멸시 정서가 가득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전 MBC 앵커 신경민은 대학생이던 1970년대에 어느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러 만났는데, 만난 자리에서 여학생이 신경민 앵커더러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전라도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학생은 "내 부모가 전라도 사람과는 연애도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전라도 사람과 사귀지 않겠다."라고 말하면서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떠났다고 한다.[125]
뿐만 아니라 강준만 교수가 1995년 11월에 출간한 인문 도서인 <전라도 죽이기>를 보면, 전라도에 대해서 평범한 한국 대중들이 가진 혐오와 멸시 정서가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 무수히 나온다. 어느 경상도 출신 독자는 강준만 교수더러 "내 자식들이 행여 전라도 출신 사람들한테 나쁜 일을 당할지 모르니, 나는 전라도 출신 사람들한테 무슨 좋은 일을 해주고 싶지 않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이에 강준만 교수는 그 독자한테 "정말 잔인하십니다!"라고 한탄하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을 정도(...)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사회에 전라도에 대한 혐오와 멸시 정서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더 있는데, 1970년대 어느 일본인 남성이 한국인 여성과 사귀다가 결혼을 결심하고 그 여성의 부모를 찾아가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자, 그 부모가 놀라서 당황하다가 결국 아버지가 결혼 허락을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관인 게 "...그래도 전라도 사람과 결혼하는 것보다는 낫지!" 였다는 일화도 있다. 참고로 1970년대 한국은 지금보다 반일 감정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강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일본인과 결혼하는 게 전라도 출신과 결혼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면, 전라도 출신들은 한 마디로 같은 나라 사람 취급도 못 받았다는 뜻이다.
물론 한국 현대사의 전라도 혐오와 멸시 정서는 1970년대 전라도 출신인 김대중과 대통령 선거전을 벌이던 박정희와 그의 참모들이 지역감정을 이용하여 정치적 이득을 보려고 한 공작에서 본격화되었다.[126] 그러나 그런 정치적 사실을 차지하고라도 197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 전라도에 대한 혐오와 멸시 정서가 매우 심했고, 일반인들도 그런 혐오 정서에 적극 편승하여 전라도를 멸시하는 데 가담했다. 당장 박정희가 죽고 광주 민주화 운동이 끝난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전라도 출신들은 비열하고 사기를 치는 나쁜 족속이다.", "내가 군대에서 경험을 했는데, 전라도 출신들은 믿을 수 없다."라는 식의 헤이트 스피치들이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일부 네티즌들은 "만약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로도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전라도 지역에 대한 폭력적 탄압을 계속했다면, 전라도 분리독립 움직임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결코 허튼 소리라고 무시할 수도 없다. 같은 나라 안에서 저렇게 계속 멸시를 받을 바에야 차라리 분리독립을 해서 따로 떨어져 사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11.6. 극단적 반공주의
사실 근본적인 원인은 여기에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광주민주화운동 때, 무자비한 학살이나 심지어 성폭행까지 저지른 공수부대원들을 두고 "같은 국민한테 어떻게 저렇게 잔인한 만행을 저지를 수가 있나?"라고 의문을 제기하지만, 그러나 그 같은 만행들은 광주민주화항쟁보다 30년 전에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사건이나 제주양민학살사건 등 이미 벌어진 광경들이었다.
보도연맹학살이 벌어지던 1950년 한국전쟁 무렵, 미군이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서 탈환하자, 피난을 갔다 돌아온 대통령 이승만은 기자회견장에서 "비록 부모 형제라고 할지라도 공산당이라면 용서 없이 처단해야 한다."라고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이승만은 원래부터 극단적인 반공주의, 파시즘적인 태도로 인해 미국에서도 말들이 많았다.
"이승만은 모든 자유주의자와 자신에게 반대하는 좌익세력들은 추방되어야 하며, 그들은 언론의 자유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 미국 텍사스의 푸트만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던 마우리 메버릭(Maury Maverick)이 1949년 8월 록펠러재단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발췌
"이승만은 파시스트다.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접근방식은 극단적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는 모두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미국의 내부 안전부서(department of Internal Security)에서 근무한 케네스 E. 맥더걸 대위가 1954년 10월 발간한 책에서 발췌
[127]"한국정부가 재판도 없이 사람들을 죽였다. 공산주의자가 아닌데도 단순히 이승만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다."
- 미군 소속 첩보 기관인 특무대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가 1951년 4~5월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발췌
그리고 이승만 정부 하에 이루어진 보도연맹학살로 인해 대한민국 각지에서는 무려 20만 명에 육박하는 민간인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군과 경찰 및 반공청년단에 의해 무참히 학살을 당했다. 다음은 그러한 학살 내용을 담은 신문 기사들이다.
"6.25 사변 당시 당지에서도 무고한 양민들이 54명이나 학살당한 사실이 새로이 드러났다. 지난 25일 그 당시의 생환자인 오모(당시 대한청년단 단장) 씨는 동 진상을 다음과 같이 폭로했다. 당시 읍내 남선(南鮮) 곡산회사에 주둔한 육군 부대(대장 김삼환 상사)에서는 보련(보도연맹: 주) 관계자 및 회색분자라 하면서 양민들을 대량 검거하여 동 회사의 창고와 전 상은(商銀) 창고에 가두었다가 이들을 매일 몇 사람씩 트럭에 싣고 김해군 생림면 나박고개에서 총살시켰다 하며, 당시 생환자 7명은 거의가 현재 불구의 몸이 되었다 한다."
- <국제신보> 1960년 5월 28일자 기사
"부산 지검에서는 6.25 때 울산군에서 770명의 양민이 학살된 사건에 대하여 본격적인 수사를 전개했다. 이에 따라 27일 하오에는 그 당시 울산경찰서 운전수였던 김해진 씨와 이정희, 조광희 씨 등을 증인으로 환문하였다.
이들 증인과 3천 명에 달하는 유가족들에 의해 밝혀진 울산 양민학살사건은 다음과 같다. 6.25 때 서장이었던 조정호 씨, 사찰계장 조경래 씨, 형사반장 백인규 씨, 사찰형사 임병문 씨 등과 모 CIC 대원, 모 청년방위대원들은 83년(1950년) 7월 중순부터 9월 중순경까지 7, 8회에 걸쳐 청량면 율반, 정곡 및 온양면 대설리 산골짝, 웅촌면 대복리 산골짝 등에서 옥리 박성용 씨 외 869명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당시 시체운반자인 이정희, 김해진 양씨와 목격자인 심작지, 차천덕 양씨 그리고 학살자 중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울주군 두동면 니전리 이청도 씨 등의 증언으로 사건 전모가 밝혀진 것이다."
- <부산일보> 1960년 9월 28일자 기사
"양산군 동면, 원동면, 물금면, 웅상면, 북면, 양산면, 하북면 7개 면에도 83년(1950년) 8월 24일 주민 700여 명이 공비토벌을 하기 위하여 주둔했던 육군 제23연대와 김종원이 지휘하는 부대와 현지 경찰 등에 의하여 빨갱이로 몰려 총살되었음이 밝혀졌다. 학살된 주민들은 북면 사배고개 뒤와 양산면 도산 뒷산계곡에서 총살된 것인데, 피살자는 주로 20대 청년들과 50세 미만의 남녀가 많았다 한다. 유가족들은 아직 유골을 가려내지 못하고 두 곳에 집단으로 묻어 놓고 있는데, 그 당시 억울한 사정을 알고도 독재정권 하에서는 입도 벌리지 못해 왔다는 것이다."
- <부산일보> 1960년 5월 21일자 기사
이렇듯 보도연맹 학살사건에서 벌어진 잔혹함은 광주에서 다시 한 번 벌어졌다. 세 차례의 정권 교체 그리고 30년이라는 간극에도 불구하고 광주에서 이러한 광경이 재현된 데에는 베트남 전쟁이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부산제빙회사 앞 부둣가에 정박 중인 어선 선실 아래층에는 아비규환이자 생지옥의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언제 끌려왔는지 10여 명의 청장년들이 차마 보지 못할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휘두르는 몽둥이에 사람 살리라는 아우성소리와 개글거리는 비명소리가 귀청이 떨어질세라 울려왔다. 대검으로 귀를 잘린 청년, 팔이고 허벅지고 마구 칼에 찔리어 유혈이 낭자한 청년, 기진하여 까무러친 장년, 어떤 청년은 선실에 끌어내어 로프로 몸을 묶어 바다에 떠밀어놓고는 물고문을 시키는 것이다. 물위에 떠오르거나 헤엄을 치면 배 위에서 몽둥이로 패고 대나무로 물밑에 처넣고는 익사 직전에 끌어내는 등 전무후무한 고문을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몽둥이로 패고 칼로 찌르고 바다에 처넣고 이러한 고문의 반복으로 하루 밤 하루 낮을 선실 속에서 보내는 것이다. 밤낮으로 새로 붙들려오는 자는 인사불성의 참혹한 형체로 변하는 것이다. 지옥선인들 이렇게 처참할 수 있을 것이며 악랄할 수 있겠는가? 고문은 그 수단이 야만적이고 불법한 행위임은 두말할 나위 없겠으나, 그 목적은 고백을 얻자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백을 얻고 죄상을 밝히기 위한 고문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잡힌 자는 무조건 빨갱이요 반송장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무조건 빨갱이가 되라는 것이다. 이런 살인적인 고문을 당하고는 거짓말이라도 안댈 사람은 인간이라면 없을 것이다.
무거운 신음소리만이 선실에 자욱한데, 이윽고 젊은 여자의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옆방 기관실에서 들려왔다. 고문당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는 조용해졌다. 간간이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이튿날 아침 부대원은 킬킬거리며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저희들끼리 웃어댔다. 여자를 고문 끝에 갖은 난행을 한 것이다. 여자는 이튿날도 배에 붙들려 있었고, 사흘 만에 배가 거제도로 떠나는 갑판 위에서 말할 수 없는 곤욕을 당하고 있었다.
밤바다를 달리는 배가 거제도 장승포에 닿은 것은 그날 밤 자정이 가까워서였다. 어두운 선창가에 끌려나온 일행은 다시 포승줄에 묶이고 트럭에 올랐다. 이때, 트럭 옆에서 어떤 군복이 내뱉는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 새끼들 배 안에서 적당히 처치할 것이지 뭐 때문에 여기까지 끌고 와. 가다가 산골짜기에서 쏴 죽여 버려!" 차는 부대 본부로 쓰이고 있는 객주집에서 멈추었다. 수십 명의 군복이 몰려나와 트럭에서 내리는 피의자들을 끌고 부대마당에 세우고 마구 몽둥이로 수없이 패고서는 감방에 몰아넣는 것이다. 감방이라고는 하지만 묵은 골방과 마굿간을 변조한 것으로 두루 아홉 자 정도의 방이었다.
여기에 무서운 고문으로 반죽음이 된 자들만 60여 명씩 두 감방에 수용되었으니 모두가 팔 하나 꼼짝할 수 없게 서서 밤을 새워야 할 판이니 이 숨막히는 고통이란 차라리 죽음보다 못한 것이었다. 그대로 시간은 흘러 아침은 왔다. 아침 점호가 있고 난 후, 부대간부가 감방 문을 열었다.
이때 어떤 젊은이가 "수용자 중에서 생명이 위독한 자가 있으니 이 사람은 달리 편안한 곳에 수용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말이 떨어지자 "넓은 방이 그립거든 이리 나와라. 그리고 위독한 놈도." 이날 이 두 사람은 아침도 못 먹고 총살되었다."
- <부산일보> 1960년 6월 3일자 기사
“아이, 진짜 악랄했지. 경험이 있었으니까. 월남에 다녀온 사람들 아니오. 공수부대란 게 하사관들이 주축인데, 나이도 많고 경력도 많아 공수부대 내에서도 전투력이 월등했지. 그런 하사관들이, 군에 말뚝박기로 작심한 하사관들이 통제가 됐겠소? 팀(지대) 단위로 움직이는 공수부대에서 스물서너살 초급장교 말을 고분고분 들었겠느냐고. 팀원 절반은 하사관인데 그 중 한 둘이 월남전에 다녀온 산전수전 다 겪은 중사, 상산데…. 앞장서서 때려 잡으면 졸병들이 가만있었겠느냐, 말입니다. 육사 나온 대대장 이런 지휘관들은 ‘대검으로 찔러라. 무자비하게 곤봉으로 머리통을 때려라’ 이런 말 안 합니다. 그냥 ‘데모하는 놈들은 끝까지 잡아라. 초장에 기를 완전히 꺾어라 그랬던 거지’”
1972년 10월 유신 이후 1974년~1979년까지 9차례 긴급조치가 발포되었으며, 특히 1975년 9월에 발포된 긴급조치 제9호는 1975년 5월에 발포되어 유신체제 붕괴 때까지 무려 4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이러한 강압정책을 실행할 수 있던 배경에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패망에 대한 위기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1980년 5.17 쿠데타 당시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도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해체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의 명분으로 삼고자 했다.백척간두의 국가운명입니다. 월망 패망의 초기 현상인 국가 현실을 이대로 좌시할 수 없습니다. 나라는 얼마 안 가서 패망의 도가니로 빠져듭니다.
유학성 3군 사령관
당시 국제정세를 이용하려 한 박정희 정부나 신군부의 인식 외에도 5.18 민주화항쟁 당시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등에서 계엄군이 보여준 모습은 한국군 청룡부대의 퐁니-퐁넛 학살에 관한 증언들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이 지적되며, 5.18 민주화항쟁 당시 광주에 파병되었던 익명의 공수여단 초급장교 또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하사관들이 주축이 되어 극단적인 폭력성을 드러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5.18 민주화항쟁 이후 미합중국 국방정보국은 광주를 한국의 미라이라 지칭하며,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을 점령군이라도 된 것 마냥 살상한 것은 신군부의 실세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이 베트남 전쟁에서 실전 경험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128]
"공산당이라면 부모 형제라도 용서하지 말고 처단하라.", "빨갱이는 사람이 아닌 악마니까 모두 죽여야 한다."는 비국민 논리에 입각한 극단적 반공주의는 이승만 정권을 거쳐 박정희 정권 하에서 더욱 강력해졌고, 전두환의 쿠데타 과정에서는 마침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에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학살하는 것으로 그 결과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광주민주화항쟁 당시에 투입되었던 계엄군 병사 개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들은 "빨갱이는 사람이 아닌 악마니까 모두 죽여야 한다."는 한국 정부가 정부수립 이래 세뇌시킨 극단적 반공주의를 그대로 실현했을 뿐이었으니까.
12. 반란군 장병 개개인들의 책임 문제
'''이유야 어쨌든 의무복무 중이거나 무관한 이유로 자원한 사병들 역시 국제법인 제네바 조약을 어긴 범죄자들이다. 다만 참작 여부가 있을 뿐이다.'''
반란군 장병 개개인들의 책임에 대해선 상당히 복잡한 편이다. '범죄에 가담한 장병 개개인이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들을 폭력으로 내몬 전두환과 반란군 상층부에게 더 큰 책임을 돌려야 하며 장병들 또한 또다른 피해자'라는 주장과, '단순히 상부의 명령이라고 하기엔 '''상부의 명령도 없었는데 반란군 개개인들이 자발적인 의지로''' 5.18 당시 내보인 증오와 폭력 행위에 대해선 분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대립하고 있다. 전두환 같은 내란수괴부터 시작해서 당시 반란군 중 범죄에 가담한 장병들까지 전원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129]
또한 PTSD에 시달리는 것과 별개로 아직도 저 당시 지휘관이나 일선 장병들 중 범죄에 참여한 자들은 '''"더 못 죽인 게 아쉽다."'''는 식의 나치군이나 일본군 전범들과 다를 바 없는 태도를 보이는 부류도 상당 수 있다.
다만, 이들의 책임과는 별개로 이런 망언을 하는 태도 역시 PTSD의 한 형태라는 해석은 있다. PTSD의 증세 중 하나가 자신의 경험을 합리화, 정당화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PTSD 문서 참조.
반군 전원을 사형 내지는 처벌하자는 주장은 과한 감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국제 재판을 예시로 든다면 독일 국방군, 무장친위대, 일본군, 보스니아 내전의 세르비아 군의 병사 개개인을 전부 전범으로 처벌한 적이 없었고, 단지 직접 범죄에 참여했고 증거가 있는 자들만 처벌했을 뿐이다. 당시 계엄군 병사들은 징병된 자들이거나 전두환의 쿠데타와 무관한 이유로 자원한 이들인데, 이들 개개인의 범죄 적극도를 따지지않고 진압군인 것 자체로 사형/처벌하자는 건 보스니아 내전에 참전한 세르비아 군에 대한 처벌에서도 존재하지 않던 방식이다.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 친일인명사전에도 일본군에 자원한 조선인들을 전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하지 않는다.[130] 12.12 쿠데타부터 광주학살이 벌어진 배경은 10월 유신인데, 10월 유신 시절 한국은 인민혁명당 사건, 부산·마산 민주 항쟁, 김대중 납치사건, 긴급조치를 보면 알 수 있듯 일제강점기보다 인권적이거나 민주적인 정부가 절대 아니다. 그러니 반란군 전원 처벌이란 의견은 친일인명사전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재 기준보다도 기준이 과하다. 일제강점기에 대입하자면 친일파 등용 기준에 해당하지 않은 일본군 내 조선인들이나 전선에 징병된 조선인들까지 사형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다. 한홍구도 2014년에 낸 '유신'이란 역사학 책에서 10월 유신 내의 군대 인권과 (행정적) 사망자는 '전두환이 나을 정도'로 최악이었다.[131] 광주 학살은 10월 유신 때 일어난 학살인데, 이 때 병사 개개인이 적극적으로 거부한다면 진짜 목숨이 위험하던 시대다(정당화가 된다거나 무고하다는 게 아니라 참작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징병된 사람들이라는 의견은 틀린 게 아니다. 국군통합병원(20사단), 지해남(31사단), 광주-목포간 도로(20사단) 등[132] 처럼 특전사가 아닌 군인들이 민간인 살상을 벌인 사례가 있으며, 징병된 군인들이 포함됐다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당시 공수부대엔 부사관이 아닌 병사들도 포함이 되어있다. 당장 일병들도 여러 명이 확인된다.[133] 말단병사들은 부사관이 아니다.
김정한 박사의 1980 대중 봉기의 민주주의(소명출판, 2013)를 보면 당시 시위대들도 사로잡은 반란군들을 사형한 사례가 '''전혀 없다.''' 일부 시민들이 분노해서 우발적으로 구타한 사례가 있을 뿐이지, 오히려 구타 없이 풀어준 사례들도 있을 정도다. 반란군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징병된 병사들을 처벌하자는 건 항쟁에 참여한 시민들한테도 존재하지 않던 과격론이다. 5.18 민주화운동 문서에서 '항쟁 주체의 성향과 이념' 부분에서도 김정한 박사의 책을 인용했던데, 이 책은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을 읽어보면 당시 시위대는 좌익 세력이 아니라 보수적 개념의 자유주의며, 과격주의자가 아니라고 나온다. 김영택 박사의 5월 18일 광주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 과정(역사공간, 2010)도 여러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역시 시각이 비슷하다.
여담으로 현재도 5월 중순이 되면 특전사 특히 11공수여단과 20사단 등 당시 쿠데타군으로 동원된 군부대에서 현역으로 복무 중이거나 복무했던 사람들에게도 은근히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이 일종의 꼬리표는 전역 후까지 따라붙곤 한다고. 특히 '''앞장서서 민간인들을 묻지마 학살하고 심지어는 강간까지 한 3대 내란 공수특전여단(제3공수특전여단, 제7공수특전여단, 제11공수특전여단)은 현재까지도 욕을 처먹어도 할 말이 없는 집단'''인데, 11공수여단은 '''5.18에서 흉악한 범죄들을 일으킨 61대대, 62대대, 63대대를 아직도 그때 그 이름 그대로 현재까지 편제에 남겨 두고 있는 건 물론'''[134] 5.18 때 사망한 11공수여단 사망자들을 '''"전사자"'''로 표기하고 있었다. 11공수여단 뿐만 아니라 7공수여단 역시 5.18 당시 7공수여단 사망자 추모비에 "80. 5. 27 광주소요진압 시 '''전사'''" 로 표기했고, 이것들보다 한술 더 떠서 3공수여단은 아예 5.18 당시 3공수여단 사망자 추모비에다 '''"대침투작전간 전사"''' 라는 어마무시한 피해자 코스프레 & 역사왜곡 2단콤보 개소리까지 적어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2019년 2월부터 시작된 국방부의 5.18 관련 조형물 전수조사를 통해 폭로되기까지 했다. # 연도를 따져 보면 3공수여단, 7공수여단, 11공수여단은 거의 40년이 넘도록 5.18 때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에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135] 이러고 있으니 욕을 안 먹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며, 다르게 생각하면 군 부대의 탈을 쓴 '''범죄단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주변에 3공수여단, 7공수여단, 11공수여단에 현재 복무 '''중인''' 사람이 있다고 해서 욕하지는 말자. 애초에 40년 넘게 이름도 안 바꾸고 자기네 부대가 저지른 살인과 강간, 내란/반란등 등의 범죄도 제대로 반성 안 하는 여단 수뇌부 놈들 잘못이지, 그들 입장에선 자대를 그리로 배치받았을 뿐인데 욕을 열심히 먹고 있는 것이다.
이후 1997년 대법원의 "5·18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 행위가 아니라 헌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고 판결한 판례에 따라 이전에 '전사'로 등록되어 있었던 계엄군 소속 군인 22명의 분류를 '순직'으로 바꾸었다. 또한 재심사한 22명의 최초사망경위에 있었던 '폭도'라는 말도 삭제했으며, 국방부는 "5·18 계엄군 사망자가 대부분 의무복무 중이었던 하위 계급의 군인으로, 엄격한 상명하복의 상황 속에서 상부의 명령에 따라 임무 수행 중 사망했음을 인정해 국가유공자 요건에 해당하는 '순직-Ⅱ형'으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국립서울현충원 역시 22명의 묘비에 쓰여전 잔사 문구를 순직으로 바꾸기로 했다.#
13. 참고 문헌
13.1. 참고책
-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풀빛출판사
- 김영택, 현장기자가 쓴 10일간의 취재수첩, 1988, 사계절
-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987, 실천문학사
- 김영택,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절판)
- 5.18 특파원리포트 (풀빛신서 153) (절판)
- 80년 5월 광주 (절판)
-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1980년대편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1권
- 박남선,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 김영택, 5월 18일 광주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
- 정해구,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서울의 봄에서 군사정권의 종말까지)
- 정상용, 조홍규, 이해찬, 송선태, 서대석, 이강술, 유시민, 차영귀, 송상규 함께 지음, 기억하는 자의 광주, 프레스바이플 (1990년에 나온 광주민중항쟁 개정판이다)
-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황석영 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13.2. 참고 보고서
- 1995년 검찰 보고서
- 2007년 국방부 보고서
13.3. 참고 학위논문
- 김영택,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 (학위논문 박사, 국민대학교 대학원)[136]
13.4. 인터넷 문헌
- 신군부가 정권탈취과정에서 벌인 광주학살 정리 #
- 5·18민주화운동(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폄훼의 진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