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

 



'''홍성담
洪性淡 | PARK Saeng-Kwang'''

<colbgcolor=#e3c545> '''출생'''
1955년, 전라남도 신안군
'''국적'''
대한민국 [image]
'''직업'''
화가
'''학력'''
목포고등학교
조선대학교 미술과
'''사이트'''
홍성담의 그림창고[1]
1. 개요
2. 생애
3. 작품
3.1. 민중판화
3.2. 민중미술
4. 논란
4.1. 박근혜 출산 그림
4.2. 세월오월
4.3. 리퍼트 대사 피습 그림
5. 참고 자료
6. 관련 문서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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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화가로 민중 미술가이다. 그는 과거 5.18 광주민주화 운동 때 시민군으로 참전하고 5.18을 주제로 한 판화를 제작하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민중미술 예술가로서 현재도 활동 중이다.

2. 생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지고 난 뒤에 독일, 일본, 미국, 스웨덴 등에서 광주에 지원을 많이 했습니다. 한데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릴 시각매체라고는 신문 보도사진 말고는 없어요. 그래서 판화 작업을 한 겁니다. 그 때문에 나를 일러 '5월 화가'라고 하는데, 그 땐 작품이 아니라 '운동의 도구'라고 생각했어요.

홍성담은 1955년 신안 하의도에서 태어나 목포고등학교을 졸업하고 조선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78년 그는 결핵에 걸려 무안 지역의 요양소에서 지냈는데, 그곳에서 윤한봉김남주 등 반유신운동을 펼치던 전남 지역 운동권 인물들을 만났다. 그들과 함께 홍성담은 결핵 치료 이후 '광주자유미술인협회(광자협)'를 결성하여 민주화운동과 문화예술운동에서 활동했다. 특히 1980년에 발생한 5.18 민주화운동은 그의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그는 25세였는데, 광주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으며[2] 선전조로 활동했고, 이 사건을 통해 민중미술에 더욱 더 관심을 가지고 뛰어들게 된다. 이후 그는 '''판화를 제작하면서 5.18과 관련된 장면들을 그려냈고, 그 그림들은 나중에 <새벽>[3][4]이라는 판화 연작이 되어 5.18을 대표하는 그림이 된다.''' 1985년에는 민중미술을 담당하는 예술가들의 단체인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결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1987년 6월 항쟁 때도 5.18처럼 선전조로 활동했다. 1988년에는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민미연)'를 결성했다.
1989년, 홍성담은 민미연 산하 예술가들과 함께 '''<민족해방운동사>'''라는 연작 걸개 그림을 그리는데 참여했다. 이 그림은 한국 근현대사를 11개 부문으로 나누어 그린 대형 걸개그림이었는데, 전체 그림을 이으면 세로 2.5m, 가로 77m인 대작이었다.[5] 그런데 이 그림을 촬영한 슬라이드 필름이 평양에서 개최된 축전에 전시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안기부와 검찰은 홍성담이 그린 그림을 문제 삼았다. 홍성담은 광주민중항쟁도'라는 5.18을 다룬 그림을 직접 그렸는데, 공안당국은 그 그림이 "반미, 반파쇼, 반봉건 투쟁의 시각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으로 형상화하여 제작함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주장과 활동에 동조"했다면서 트집을 잡았다. 홍성담은 이 일로 잡혀가 물고문까지 당했으며[6] 간첩으로 몰렸다. 다행히 인권변호사들이 적극적으로 변호를 해주고, 국내외 각지에서 구명 운동[7]이 일어나 간첩죄 등에서는 무죄를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이적표현물 제작에 있어서는 유죄 판결을 받아야 했다.[8]
이후 홍성담은 지속적으로 민중미술와 관련된 작품들을 그리며 활동했다. 가나아트센터, 학고재 화랑, 독일 행체화랑 등 여러 곳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으며, 광주 북구청에 대형 벽화를 그려 설치하기도 했다. 또 정치사회에서 벌어지는 등에도 관심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사회참여적인 성격을 띠었고, 상황에 따라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극심한 논쟁을 몰고 오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2005년 결혼하였고, 현재는 안산시에서 작업장을 차려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계속 하고 있다.[9]

3. 작품



3.1. 민중판화


횃불행진
가자 도청으로
대동세상1
대동세상2

"5월 판화는 '''항쟁의 일상성까지를 간명하고 절제된 시선으로 부감'''해내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통해 광주에서 학살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에 이르렀다. 삶의 온기가 흐르고 있는 이 연작 판화는 항쟁의 진실만이 아니라 나중에 이 땅의 '''민주화 운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치까지 형상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이를 '대동세상'이라 이름하였다. - 소설가 서해성의 평가


3.2. 민중미술


민족해방운동사 연작 中 <광주민중항쟁도>

4. 논란


홍성담 작가는 기본적으로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전력에다가 사회의 여러 사건들에 대해 작품으로 목소리를 내는 사회참여적, 진보 경향을 보이는지라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그의 회화적 표현과 관련한 표현의 자유 문제가 부각됐다. 아마 이에 따른 논란과 그에 대한 판단은 그림을 보고 이해하는 감상자의 몫일 것이다.

4.1. 박근혜 출산 그림


논란이 된 문제의 그림(사람에 따라 거부감과 혐오감이 들 수 있음)
2012년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린 그림이 논란이 되었다. 이른바 '박근혜 출산 그림'이라고 알려진 이 그림은 평화박물관에서 개최된 '유신의 초상'이라는 전시전에서 <골든타임 - 닥터 최일혁, 갓 태어난 각하에게 거수경례하다>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다. 이 그림에는 '''박근혜가 출산하여 박정희와 닮은 아이를 낳고, 놀란 집도의가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결국 이 그림은 박근혜 후보에 대한 인격적 모독, 성적모욕, 여성비하 등의 문제로 논란을 빚었다. 박근혜 후보의 소속 정당인 새누리당에서는 맹비난을 퍼부었는데, 대표적인 친박 정치인 이정현은 "딸이 아버지를 낳는다는 식의 풍자는 인륜을 넘어 천륜까지 거스른 것으로, 이렇게 상대 후보를 폄하해서라도 정권을 잡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며 홍성담은 물론이고 민주통합당문재인까지 싸잡아 비난했다. 이에 홍성담은 "정치인에 대한 신격화는 향후 파시즘과 독재의 근본 바탕이 된다는 위험성을 간단한 풍자그림으로 비판했을 뿐"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
한편 몇 년 후, 박근혜 탄핵 이후에 그려진 더러운 잠도 이 사건과 비슷하게 진통을 겪었다.

4.2. 세월오월


원본 그림(위)과 수정본(아래) [10]
2014년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그린 <세월오월>이 논란이 되었다. 이 그림은 광주 비엔날레에 전시될 예정이었는데 ''''박근혜를 허수아비로 묘사''''[11] 한 부분 때문에 논란이 되어 전시를 거부당했다. 결국 작가 본인이 박근혜 그림 위에 그림을 테이프로 붙여 수정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광주 비엔날레에 참여하기로 했던 몇몇 작가들이 항의 표시로 자신의 작품을 자진 철거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3년 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박근혜가 탄핵됨으로써 이 그림은 2017년 광주시립미술관에 걸개그림으로 내걸릴 수 있게 되었다. #

4.3. 리퍼트 대사 피습 그림


홍성담은 2015년 발생한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을 다룬 그림 <김기종의 칼질>을 그렸는데, 이 그림도 논란이 되었다. 그림에서는 김기종마크 리퍼트 대사에게 칼질을 하려는 순간을 담아놓았는데, 가운데에 그려진 탁자에 적혀진 글이 '''김기종을 옹호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었다. 문제의 글에는 "조선침략의 괴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쏴죽인 안중근 의사도 역시 우리민족에 대한 절망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조선에게 형님의 나라인 일본의 훌륭한 정치인을 죽인 깡패도적쯤으로 폄하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를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민족주의자'라고 넌지시 욕을 했다."라고 적혀져 있었다. 논란이 퍼지자 이 그림을 전시하기로 했던 서울시립미술관은 작품의 전시를 철회했다. 홍성담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그 사건을 옹호한 게 아니라 그 사건 자체가 왜 일어나게 됐는지, 우리 삶과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를 돌아보고 의논하고 토론하고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작품을 제작했다"고 했다. #

5. 참고 자료


5월 화가 홍성담과 '민족해방운동사'
홍성담 : 국가폭력과 싸우는 화가

6. 관련 문서



7. 여담


[1] 이 사이트에서 홍성담 작가의 그림을 볼 수 있다.[2] 1980년 5월 21일에 발생한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를 직접 목격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와 주변인들이 총에 맞은 한 사람을 구조했는데, 그 사람은 배에 총을 맞아 창자가 빠져나온 상태였다. 헌데 창자에 아직 다 소화되지 않은 보리밥알이 햇볕을 쐬며 반짝거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5.18을 떠올리면 아직도 그 보리 밥알이 생각난다고 한다.[3] 이 판화는 총 50점의 판화로 구성되어 있다.[4] 링크에서 밑으로 내려가면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연보라색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판화 연작 <새벽>의 작품이다. [5] 이 작품들은 전국의 대학과 시위 장소에 내걸렸는데, 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양대학교에서 열린 집회에서 경찰이 허락도 없이 소각해버렸다. 다행히도 그림들을 찍은 슬라이드 필름은 남아 있었다.[6] 그는 자신을 고문한 고문기술자의 얼굴을 익혀두었다가 나중에 몽타주를 그려서 공개했다. # 비슷한 사례로 1986년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으로 연행되어 고문당한 심진구(1960~2014)도 정형근 등 고문수사관 5명의 몽타주를 그렸다.[7] 대표적으로 국제앰네스티가 1990년 홍성담을 '올해의 양심수' 3인 중 하나로 선정하였다.[8] 놀라운 것은 이 때 대법원 주심대법관이 이회창이었다![9] 여담으로 그가 안산에 정착해서 작업장에서 겪은 일이 하나 있다. 당시 그의 작업장은 단원고등학교 옆에 있었기에 그 학교의 학생 2명이 와서 작업장의 일을 돕는 알바를 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세월호 참사 당시에 목숨을 잃었다. 놀란 그는 진도 팽목항으로 달려갔는데 거기서 그 학생의 시신이 인수되는 것을 학생의 가족들과 함께 지켜보아야 했다. 그리고 이후에 벌어진 정부의 실책들을 목격하며 세월호 참사5.18오버랩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실제 증언 나중에 홍성담은 세월호를 다룬 연작을 그려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로하였다.[10] 아닌 게 아니라 김기춘 비서실장이 원본의 그림을 보고 노발대발했는데 수정한답시고 내놓은 것이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닭으로 묘사한 위의 수정본인 것. 이걸 또 걸고 넘어지자니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닭대가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모양새라서 화를 내지도 못하고 결국 블랙리스트를 대대적으로 만들게 되는 데, 이 때 만들어진 블랙리스트로 김기춘 비서실장이 감옥에 갔다.(...)[11] 원본 그림을 보면 박정희김기춘이 허수아비가 된 박근혜를 조정하고 있고, 그 허수아비와 5.18 당시 시민군과 대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