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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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Tiberius Constantinus)
그리스어: 티베리오스 2세 콘스탄티노스 (Τιβέριος Κωνσταντῖνος)
생 540경 ~ 몰 582, 재위 574 ~ 582.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574년 정신병에 걸린 유스티누스 2세를 대신해 소피아 황후와 함께 제국을 통치했고, 578년 10월 황제로 즉위 후 많은 영토를 잃고 쇠퇴해가던 제국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러 실책을 저질렀고 582년 의문사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상단에는 티베리우스가 540년경에 태어났다고 적혀 있지만, 사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불확실하며, 단지 6세기 중반에 트라키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552년 이후, 티베리우스는 유스티누스 2세와 친분을 맺었고 565년에 황실 친위대인 엑스쿠비토레스 병단의 코메스로 발탁되었다. 또한 그는 565년 11월 14일 유스티누스 2세 즉위식에 참석했고 566년 1월 1일 집정관 취임식에도 참석했다.
569년, 유스티누스 2세는 아바르족의 보조금 지불을 거부했다가 아바르족이 침입해 수많은 제국민들을 포로로 끌고 가자 급히 티베리우스를 파견해 아바르족과 새 조약에 관해 협상하게 했다. 티베리우스는 여러 아바르족 족장들과 협상한 끝에 그들이 데려갔던 포로를 제국군이 확보한 아바르족 포로와 교환하고 아바르족이 발칸 반도의 동로마 제국 영토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유스티누스는 이를 거부했고, 티베리우스는 아바르족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2.2. 아바르와의 전쟁
570년, 티베리우스는 트라키아에서 아바르족 군대를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그러나 570년 말 또는 571년 초, 그는 또다시 승리를 쟁취하려고 아바르족 군대와 맞붙었으나 대패하고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했다. 이후 더이상 전쟁을 벌여봐야 소용 없겠다고 판단한 티베리우스는 유스티누스와 조약 조건을 의논하려는 아바르족 특사들에게 호위병을 제공했다. 이때 특사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공격당해 물품을 강탈당하고 도와달라고 호소하자, 티베리우스는 책임자를 추적해 훔친 물건을 돌려주게 했다. 이후 유스티누스는 은괴 8만 개를 아바르족에게 넘겨주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에 합의했다.
2.3. 제국의 부제
574년, 소피아 황후는 정신병에 걸린 황제를 대신해 혼자 제국을 통치하다가 힘에 부치는 걸 느끼고 티베리우스를 소환했다. 티베리우스와 소피아는 4만 5천 노미스마타의 돈을 페르시아에게 바치는 조건으로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마무리했다. 그 후 티베리우스는 574년 12월 7일 카이사르에 봉해지고 유스티누스의 양자가 되었다. 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앞서 있었던 이름이 같은 티베리우스 황제가 그렇게 썩 이미지가 좋기만한 황제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게 부담이 되었는지 콘스탄티누스라는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 추가했다.[1] 한편으로 소피아 황후는 황실의 재정을 도맡으며 티베리우스를 통제했다.
티베리우스는 카이사르에 임명된 후 유스티누스가 그동안 악착같이 모았던 돈을 민중들에게 나눠줬다. 소피아는 그의 이같은 행위에 경악했고 티베리우스를 사치스럽다고 비난했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유스티누스 2세가 부과했던 술과 빵에 대한 세금을 없애줘 서민들의 숨통이 트이게 해줬다. 575년, 티베리우스는 발칸 반도의 여러 야만족들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 후 트라키아와 일리리쿰의 군대를 제국 동방으로 보내 페르시아를 응징할 준비에 착수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를 잠식해가는 롬바르드족에 대응하기 위해 바두아리우스 장군 휘하의 증원군을 이탈리아에 파견했다. 바두아리우스 장군은 로마를 롬바르드족에게서 구해냈고 프랑크 왕국의 왕 킬데베르트 2세와 동맹을 맺고 롬바르드족에 공동 대응했다. 그러나 바두아리우스는 불행하게도 576년 롬바르드족에게 패해 전사했고 이탈리아의 더 많은 제국 영토가 롬바르드족에게 잠식되었다.
576년, 사산조 페르시아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 동로마군은 이것에 대응해 페르시아군과 맞서 싸워 그들을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티베리우스가 급파한 유스티니아누스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군은 페르시아 영토 깊숙이 진군했다. 그러나 577년 유스티니아누스는 적의 매복에 걸려 대패해 유프라테스 강을 도하해 본진으로 퇴각했다. 이 소식을 접한 티베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를 경질하고 마우리키우스를 새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야만족 신병 1만 5천명을 동방으로 파견해 페르시아의 침공에 맞설 전력을 갖춰나갔다. 이 야만족 신병대는 훗날 그 유명한 바랑기안 가드의 기반이 된다.
2.4. 황제 즉위
578년 10월 정신병에 걸려 고생하던 유스티누스 2세가 사망했고, 티베리우스가 새 황제로 즉위했다. 유스티누스의 황후였던 소피아는 새 황제와 결혼함으로서 자신의 힘과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티베리우스는 이미 아내 이노가 있었기 대문에 거절했다. 소피아는 티베리우스가 처음 카이사르가 되었을 때 이노와 그녀의 아이들이 황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적이 있었다. 이제 황위에 오른 티베리우스는 가족들을 황궁으로 데려왔고 이노를 아나스타시아로 개명했다. 소피아는 분노했고 쿠데타를 꾀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발각되었고 소피아는 수도원에 끌려갔지만 마우리키우스가 즉위한 뒤 다시 궁궐로 돌아온다.
2.5. 업적과 실책
티베리우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우세한 방향으로 끌고 간 후 시선을 서쪽으로 돌렸다. 579년, 그는 이탈리아 전선에 군대를 투입해 롬바르드족이 더이상 남하하지 못하게 하고 라벤나를 보강했다. 또한 그는 장군들을 북아프리카로 파견해 약탈을 일삼는 베르베르인들을 제압하게 했고 에스파냐를 장악한 서고트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가 서방에 군대를 파견하는 사이 발칸 반도의 군대는 약화되었다. 아바르족은 이 틈을 타 시르미움을 포위해 제국을 압박했다. 게다가 슬라브족이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그리스로 이주해 제국을 압박했는데, 티베리우스는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어서 그들이 제국에게 충성을 바치는 선에서 이주를 허락했다. 게다가 제국 동방의 군대는 급료가 제때 지급되지 않자 불만을 품었고 폭동의 조짐이 일었다.
580년, 마우리키우스 장군은 폭동의 조짐이 일던 군대를 빠르게 통제했다. 그후 그는 호스로 1세가 죽고 아들 호르미즈드 4세가 막 즉위해서 페르시아가 어수선한 틈을 타 침공을 개시했다. 581년, 마우리키우스는 가산 왕조의 장로 알 문디르와 연합해 메디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남부를 가로질렀다. 그런데 문디르는 이 정보를 호르미즈드 4세에게 제공했고 페르시아군은 너무 깊숙이 들어온 동로마군을 향해 역공을 가했다. 그러나 문디르는 다시 동로마 제국과 협력하기로 하고 페르시아군을 격파했으며, 마우리키우스는 이 틈에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2] 그러나 마우리키우스는 국경에 다다랐을 때 페르시아의 장군 아다르마한과 교전을 벌여 패배했다.
582년, 페르시아는 자국의 영역을 침범한 동로마 제국에게 보복하기 위해 탐호스로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해 콘스탄티나를 공격했다. 그러자 마우리키우스는 응전했고, 탐호스로는 마우리키우스에게 패배한 직후 전사했다. 하지만 발칸 반도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자, 티베리우스는 마우리키우스를 급히 소환해 상황을 수습하게 했다. 마우리키우스를 대신해 동방의 제국군을 통솔하게 된 미스타콘은 티그리스와 님피우스 강이 교차하는 지점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결국 미스타콘은 해임되고 필리피키우스가 그의 직위를 이어받았다.
이렇듯 티베리우스는 유스티누스 2세 시절 일방적으로 페르시아에게 밀리던 상황을 반전시켜 페르시아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왕중왕 호르미즈드 4세는 티베리우스의 수차례에 걸친 평화 협상 제의를 거부하고 끝까지 전쟁을 감행했다. 결국 동로마 제국은 이후로도 수십년간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지속해야 했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가산 왕국의 장로 문디르가 배신하는 바람에 아군이 위험에 처했다는 마우리키우스의 보고를 받자 곧바로 문디르를 체포해 처형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의 충실한 동맹이었던 가산 연맹은 붕괴되었다.
한편 티베리우스는 인심을 사기 위해 돈을 펑펑 썼다. 그는 즉위 직후 제국 전역에 부과된 모든 세금을 4분의 1이나 탕감했고 즉위 첫해에만 금을 7200파운드나 썼으며[3] 은, 비단, 기타 여러 사치품들을 마구 구입했다. 이 때문에 유스티누스 2세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애써 끌어모았던 재정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2.6. 최후
582년 8월 13일, 티베리우스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햅도몬의 궁전에서 죽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현재까지도 확실하지 않다. 일부 기록에는 그가 자연사했다고 기술되었고, 일부 자료에는 그가 설익고 특별히 즙이 많은 오리 요리를 먹다가 요리에 들어있는 독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그는 죽기 하루 전에 후계자로 마우리키우스를 지명하고 자신의 둘째 딸인 콘스탄티나와 결혼하게 했다.
3. 참고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 <비잔티움 연대기>
[1] 하지만 당대인들은 그냥 티베리우스로 칭했었고, 후대인들도 주로 이름만 부른다.[2] 문디르의 배신에 격노한 페르시아군은 라흠족과 연합해 가산 왕국을 공격했지만, 문디르는 단독으로 이를 격파했다.[3] 그 중 800파운드는 아시아의 군대에 충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