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누스 2세

 



1. 개요
2. 생애
2.1. 대제의 조카
2.2. 미심쩍은 즉위
2.3. 아바르족의 침공
2.4.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공
2.5. 페르시아의 침공과 다라 상실
2.6. 미쳐버린 황제
2.7. 유스티누스 2세의 양위
3.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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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Flavius Iustinus Iunior Augustus
그리스어 Φλάβιος Ἰουστίνος ὁ νεώτερος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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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520 ~ 578년
재위 565 ~ 578년[1]
동로마 제국의 황제. 565년부터 578년까지 제국을 통치하면서 사산 왕조아바르 칸국, 랑고바르드족 등 외세의 침략으로 많은 영토를 잃어 '실지 황제'라는 별칭이 붙었다. 하지만 이 결과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말기 재정이 파탄 지경이 되어버린 제국의 암울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전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으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2. 생애



2.1. 대제의 조카


유스티니아누스 왕조는 조카 상속 전문이었다. 유스티누스 1세 - 유스티니아누스 1세 - 유스티누스 2세 모두 조카 상속으로 이어졌다. 유스티누스 2세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누이 비길란티아와 둘키디오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2.2. 미심쩍은 즉위


명망이 높았던 명장이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사촌이었던 게르마누스는 1순위 제위 계승자였는데, 이탈리아 원정군을 모집하다가 550년에 세르디카에서 급사하였다. 이후로는 게르마누스의 장남이고 유스티니아누스의 (5촌)조카이며, 라지카 전쟁에서 활약하였던 동명이인 유스티누스가 후계자로 촉망받았다. 게다가 그는 대제가 사망할 당시에 수도 근처의 군 사령관이어서 마음만 먹으면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제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대신인 칼리니쿠스는 당시까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조카를 주목한 듯하다. 칼리니쿠스와 원로원은 대제의 유언이라고 주장하며 유스티누스 2세를 추대하였고, 내심 제위 계승을 예측하고 있던 사령관 유스티누스는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유스티누스 2세는 그를 포함한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친척들을 황궁에 소집하였다. 초대된 유스티누스는 황제 다음가는 2인자의 자리를 보장받았고, 융숭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다음날, 황제의 명령으로 대장군 유스티누스는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갇혔고, 이후 유스티누스 2세는 그를 용서하며 이집트 행정 총독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속임수였다.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유스티누스는 침상에서 암살되었다. 그의 잘린 목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당시 서고트 왕국의 스페인 역사가 요한은 암살 명령을 내린 주체가 황후 소피아였다고 기록하였다.

2.3. 아바르족의 침공


유스티누스가 황제에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아바르족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다. 사절단은 유스티누스에게 선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자기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던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보다 앞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제국의 변방을 위협하는 부족들에게 보조금을 지불해 안정을 꾀했다. 하지만 아바르족은 보조금을 꼬박꼬박 받고도 562년에 트라키아를 침략했고 유스티니아누스가 제의한 판노니아를 터전으로 삼지 않겠다고 거부하기도 했다. 유스티누스는 이런 믿을 수 없는 자들에게 끌려간다면 제국의 위신이 실추될 것이며 재정이 파탄 지경에 이른 상황에서 보조금 지급을 지속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고 사절단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그는 유스티니아누스가 보조금 지불을 약속한 다른 부족들과 사산조 페르시아에게도 보조금 지불을 거부했다.
아바르족은 황제의 이 같은 태도에 분노했고,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로 이동한 후 자신들이 롬바르드족의 옛 영토를 새 터전으로 삼으면서 세력을 키운 뒤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 제국을 응징하기로 한다. 568년, 아바르족은 달마티아로 쳐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유스티누스는 군대를 소집하고 자신의 근위대장인 티베리우스에게 지휘를 맡겼다. 그러나 3년간의 전쟁에서 딱히 우세를 점하지 못한 티베리우스는 더이상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황제에게 강화를 요구했다. 결국 유스티누스는 571년 아바르족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은괴 8만 개를 아바르족에게 지불해야 했다.

2.4.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공


567년, 오스트리아 일대에 거주하던 롬바르드족은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고 이웃 민족인 게피다이족을 공격해 섬멸했다. 그리고 이듬해(568) 봄, 롬바르드족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벌인 20년 전쟁의 여파가 가시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 관료들이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이는 바람에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러 주민들은 침략자에 저항할 의욕을 잃었다. 따라서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에 침입했을 때 어느 누구도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롬바르드족은 파비아를 3년간 포위해 함락시킨 것 외에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남하했다. 그러면서도 라벤나에 주둔한 제국군을 의식해 라벤나 주변 지역을 공격하지 않았다. 롬바르드족의 왕 알보인은 토스카나에 자리를 잡았고 휘하 귀족들은 좀더 남쪽으로 가서 스폴레토와 베네벤토에 독립 공국들을 세웠다.
롬바르드족은 이탈리아에 정착한 뒤 현지 주민들과 통혼하고 언어와 문화를 배웠다. 다만 그들은 라벤나, 나폴리,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베네치아 등 동로마 제국군이 주둔한 주요 도시 및 남부 지역을 건드리지 않았고 이탈리아에서의 동로마 제국의 세력권을 존중했다. 이 당시 유스티누스는 아바르족의 침략에 맞서 싸우느라 이들을 저지할 수 없었고, 결국 롬바르드족이 북이탈리아의 패권을 확립하는 걸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2.5. 페르시아의 침공과 다라 상실


571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아르메니아의 기독교 신자들이 대거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동로마 제국이 자신들을 보호해주길 희망했고 유스티누스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그러자 페르시아의 왕중왕 호스로 1세는 아르메니아의 반란을 철저하게 진압하는 한편 반란의 배후로 여겨지는 데다 보조금 지불을 거부해버린 동로마 제국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하여 양 제국은 572년 초부터 전쟁을 벌였고, 이 전쟁은 중간의 휴전기를 포함할 시 장장 20년간 지속되었다.
573년 11월, 페르시아는 티그리스 강변의 요새 다라를 점령했다. 또한 페르시아군은 시리아를 침공해 재물을 약탈하고 수많은 포로를 끌고 갔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은 이 시기 29만 2천명에 달하는 포로를 잡아갔다고 한다. 에페수스의 요한네스가 저술한 <교회사>에 따르면, 호스로 1세는 투르크의 칸과 동맹을 맺을 때 이 포로들 중 2천명의 처녀들을 선발해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처녀들은 끌려가던 중 큰 강에 이르자 목욕을 하고 싶다며 호위 병사들을 멀리가게 하고는 신앙과 정조를 모두 잃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동로마군은 이렇듯 강하게 밀어붙이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처절하게 저항했으나 불리한 전황을 뒤집지 못했다.

2.6. 미쳐버린 황제


제국이 외세의 침략으로 많은 영토를 잃고 날로 쇠약해지자, 황제는 미쳐버렸다. 에페수스의 요한네스에 따르면, 황제는 광기가 가라앉았을 때 작은 수레에 앉아서 시종에게 수레를 밀고 숙소를 몇 바퀴 돌게 하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걸핏하면 주변 사람을 폭행했고 심지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한다.

그들은 힘센 청년들을 뽑아 황제의 시종이자 간수 역할을 하게 했다. 이 청년들이 황제의 뒤를 쫒아 붙잡을 때면, 힘이 대단한 황제는 청년들을 공격하고 물어뜯기까지 했다. 그 중 두명은 황제에게 머리를 심하게 물려 중상을 입었다.그들은 곧 병원으로 옮겨졌고 수도에는 황제가 시종 두 명을 잡아먹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에페수스의 요한네스, <교회사>

또한 유스티누스는 창문에서 뛰어내리려고 해서 창문에 가로로 막대를 설치해 황제가 창문을 열어도 바깥으로 몸을 던질 수 없게 했다. 그를 진정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아라비아 소부족인 가산족의 지도자 하리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황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족장의 이름을 들으면 공포를 얻고 조용해졌다고 한다.

2.7. 유스티누스 2세의 양위


정신이 나가버린 남편을 대신해 제국의 통치를 맡은 소피아 황후는 574년에 호스로 1세에게 4만 5천 노마스마타의 돈을 주고 휴전에 합의했다. 그녀는 혼자서 제국을 다스리는 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잠시 정신이 돌아온 남편을 설득해 티베리우스를 섭정에 임명시켰다. 이리하여 티베리우스는 소피아 황후로부터 추천받은 자이며 황제는 그의 미덕과 행운을 자신이 현명하게 선택한 성과라 여겼다. 티베리우스가 카이사르 또는 아우구스투스에 오르는 즉위식이 총대주교와 원로원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황궁에서 열렸다.(574년 12월)
하지만 제국의 분란은 멈추지 않았다. 당시 투르크족은 동로마 제국과 손을 잡고 페르시아와 공동 대응하고 있었는데, 동로마 제국이 페르시아와 강화를 맺자 자신들과 상의하지도 않고 전쟁을 멈췄다며 화를 내고 제국을 배신자라고 욕하며 동맹을 깨고 크리미아의 동로마 제국 요새를 점령했다. 또한 577년에는 대략 10만에 달하는 슬라브족이 트라키아와 일리리쿰에 침입해 그곳에 정착했다. 게다가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한 소피아 황후와 티베리우스 부제와의 갈등도 극심했다. 소피아는 티베리우스가 불필요하게 사치스럽다며 비난했고 황실의 재정을 움켜쥐고 티베리우스에게 가족이 먹고 살 만큼만 내줬다. 또한 그녀는 티베리우스의 아내인 이노와 그의 두 딸이 황궁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했다.
578년 10월 5일, 유스티누스가 마침내 사망했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황위에 올랐고 자신을 폐위시키려고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된 소피아를 수도원에 감금했다. 이노는 소피아가 실각한 후에야 비로소 황후의 특권을 차지했고 이름을 아나스타시아로 바꿨다.

3. 참고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 <비잔티움 연대기>
[1] 574년부터는 사실상 티베리우스 2세의 치세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