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우스

 


로마 제국의 2대 황제
Tiberius | 티베리우스

[image]
TIBERIVS CAESAR DIVI AVGVSTI
FILIVS AVGVSTVS
[1]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디비 아우구스티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전임
아우구스투스
후임
가이우스(칼리굴라)[2]
신상 정보
제호
TIBERIVS CAESAR DIVI AVGVSTI FILIVS AVGVSTVS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디비 아우구스티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TIBERIVS CLAVDIVS NERO[3]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TIBERIVS IVLIVS CAESAR[4]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출생
기원전 42년 11월 16일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로마
사망
37년 3월 16일 (77세)
로마 제국 이탈리아 미세눔
재위 기간
14년 9월 18일 ~ 37년 3월 16일(22년 5개월 26일)
배우자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기원전 19년 결혼 / 기원전 11년 이혼)
대 율리아 (기원전 11년 결혼 / 기원전 2년 이혼)
자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티베릴루스
아버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親父) , 아우구스투스(養父)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
형제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1. 개괄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
2.1.1. 어린 시절
2.1.2. 청년기
2.1.3. 은퇴와 로도스 섬 유학
2.1.4. 후계자 등극
2.2. 황제
2.2.1. 즉위와 위기
2.2.2. 재위 초중반기
2.2.3. 세야누스의 전횡과 몰락
2.2.4. 말년의 공포정치
2.2.4.1. 세야누스 일파 숙청과 복수
2.2.4.2. 근위대장 마크로
2.2.5. 사망
3. 성격
4. 외모
5. 비판
6. 평가와 여담
7. 대중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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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괄


원로원 의원 여러분, 나는 인간의 일을 수행하는 한 인간이며 저의 큰 소망은 프린켑스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리고 후세들이 이러한 내 뜻을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내가 조상들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고, 여러분의 권익을 위해 신중하며, 위험한 상황에서 흔들림이 없고, 국가를 위한 일이라면 인기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과 후세들은 내 명성에 넘칠 만큼 충분히 공헌하는 겁니다. “

타키투스, <연대기>, 티베리우스 4-38, 티베리우스의 원로원 연설 중 일부[5]

로마 제국의 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1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상속자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이자 황후(아우구스타)인 리비아 드루실라(Livia Drusilla, 기원전 58~ 기원후 29)가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하기 전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친아들이다.
선대 황제이자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로마 역대 황제 중 최초의 부자세습 방식[6], 최초의 공동황제 즉위[7] 후 단독 세습 방식[8]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고대 로마가 능력 본위 사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평가처럼 부자세습으로 즉위했어도 능력 면에서는 누구나 알아주는 먼치킨인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제대로 이어받아 로마 제국을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또 오랜 기간동안 제 수명을 다한 국방, 행정, 세금 정책을 마련해 이후 원수정 황제들에게도 많은 부분에서 참고사항이 됐다. 덕분에 당대의 평가는 최악이었을지라도 후세에 이르러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기틀을 잡았고, 티베리우스는 그것을 정착시켰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런 평가와 별개로 당대 사람들에게 살아생전 폭군, 위선자 등의 온갖 소리를 다 들었고, 폐쇄적인 성격과 카프리 섬 은둔 통치로 인해 역대 로마 황제 중 종손자 칼리굴라와 함께 가장 많은 헛소문에 시달렸다[9]. 그리고 이런 소문은 계속 퍼져나가 죽은 이후에도 업적에 비해 과소평가되거나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근대 이후 그가 재평가를 받으면서 현재는 역대 로마 황제 중 명군과 폭군 모두의 모습을 지닌 입체적 황제로 불린다.
하지만 티베리우스의 제위 계승은 선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희망이 아니었고,[10][11] 본인도 그 책임이 막중해 망설이는 상황에서 황제가 되기 전부터 원로원에게 주는 것 없이 대놓고 미움을 받은 탓에 여론도 최악이었다. 그 결과,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 공동황제가 되어 원활하게 그 직위를 이어받았음에도 즉위 시작과 동시에 군대 반란을 비롯해 수많은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가 후계자들인 조카 게르마니쿠스와 친아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연이어 사망했는데, 친아들 사망 이후부터는 나폴리에 머물다가 아예 세상과 연을 끊고 섬에 틀어박혀 원격조정 방식의 통치으로 로마를 통치했다. 따라서 그의 재위 후반은 로마 역사상 비열함과 악랄함을 모두 갖춘 간신 세야누스의 음모와 활개 아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 아우구스투스 일가가 여자 황족들을 빼고 거의 전멸하다시피하고 만다. 여기에 더해 티베리우스가 근위대를 앞세운 공안통치를 하면서 근위대장 세야누스의 음모에 장단을 맞추는 일까지 벌어져 후반기부터는 연이은 친족 숙청, 원로원과 황제의 대립 등으로 상당히 긴장감이 높아졌다. 그래서 당대 사람들과 타키투스로 대표되는 제정 시대 로마인들에게 이 부분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고, 현대에 이르러 로마사 연구자들에게 재평가를 받음에도 그의 재위 후반기 통치 스타일은 이후 로마 제정에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고 비난받고 있다.
이런 국정 운영 스타일처럼 개인적 삶 역시 상당히 모순되고 골치아픈 세월의 연속이었다. 친부모와 양부를 통틀어 가계만 보면[12] 당대 로마 최고의 명문 귀족 가문 자제로 로마 최고 부촌에서 태어났지만, 단 한명 때문에 가족사가 완전히 꼬여서 일생의 대부분을 괴로움에 시달리며 살아야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면 확실한 결점이 있었다고 해도 많은 부분에서 상당히 건전한 사람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젊은 시절 수려한 외모, 뛰어난 지력과 교양, 높은 도덕심과 검소한 생활을 한 탓에 미움을 받아도 전형적인 공화정-초기 원수정 시대의 엘리트 귀족으로 평가받았다. 아울러 10대 후반부터 상당한 수준의 행정실무처리능력과 군사적 능력을 선보였고, 사생활에 있어서도 굉장히 깨끗했다. 그리고 로마 귀족들의 주요 덕목으로 여겨진 건전한 심성과 책임감 역시 상당히 뛰어났고, 주변 측근들의 기록[13]이나 원로원의 비문 등에서 드러나듯 양부에 대한 효심과 율리우스 가, 클라우디우스 가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했다.
역대 로마 황제 중 특이하게도 앞의 사람이나 훗날 그를 많이 참조한 사람과 달리 자신의 권위를 집요하게 거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티베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 이전의 로마 황제 중 유일하게 자신의 신격화를 거부했다.[14][15] 그 밖에도 티베리우스는 등극 후에도 황제로 보이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했으며, 나중에 그의 인내심이 바닥나 버리는 치세 후기에 이르기 전까지 원로원의 제1시민을 자처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역사가들의 악평이 집중되었는데, 당시 식자층이었던 원로원 의원들에게 평이 아주 좋지 않았던 데다, 평소 검소한 정책을 이어가다 보니 오락거리를 원하던 시민들로부터의 평가도 최악이었기 때문이다.[16] 이런 악평 덕분에 당대에부터 역대 로마 황제 중 가장 많은 루머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근대에 들어 티베리우스의 명령서나 속주에서의 행적[17]이 재발견되면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직도 그의 행적에 대한 논란은 많지만, 그가 역사상 손에 꼽힐 정도로 유능한 행정가였다는 사실에 대한 이견은 이제 없다.
그리고 또 한가지 특이점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당시 황제이기도 하다.[18] 개역한글판 성경전서의 누가복음에서는 라틴어 탈격을 적용하여 '디베료'라고 부른다.[19] 여담으로 현대 이탈리아에서는 그를 티베리오(Tiberio)라고 부르는데, 그가 13년 동안 살았던 카프리 섬에는 황제의 이름이 상호명에 들어간 레스토랑, 디저트 가게, 카페, 숙박업소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



2.1.1. 어린 시절


티베리우스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20]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맏아들로 기원전 42년[21] 11월 16일에 로마의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태어났다. 수에토니우스는 위의 기록을 제시하면서 다른 견해도 밝히고 있는데 티베리우스가 외할아버지의 출생지이자, 훗날 티베리우스 시절 원로원의 지시로 운명의 여신상이 세워진 푼디가 티베리우스의 출신지라는 학설과 기원전 43년생 혹은 41년생이라는 학설이 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는 공식 관보와 달력에 기원전 42년에 팔라티누스 언덕이 티베리우스의 출생지라고 쓰여 있고 나머지 학설들은 근거가 부족하다며 부정하고 있다.
반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파[22]였던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반란 때 참여하자 1세 때부터 로마를 떠나서 페루시아네아폴리스, 시칠리아, 그리스에서 도망치며 생활해야 했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도피 당시 네아폴리스에서는 몰래 항구로 도망치던 중, 어린 티베리우스가 2차례 울음을 터뜨려 일행이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으며, 이때 일행들에 의해 버려질 뻔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후로도 어딘가에서(이탈리아 반도로 추정) 어머니 리비아가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할 때 숲에서 산불이 났고 티베리우스 모자는 이 산불에 휩쓸려 죽을 뻔 했다가 간신히 머리와 옷만 그을리고 살아남았다. 그리스에서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였던 스파르타인들의 공공 탁아소로 맡겨지기도 했다고. 이때의 고난들은 티베리우스에게도 가슴 깊이 남았는지 시칠리아에서 어머니가 폼페이아[23]에게 받았던 망토와 핀 금제 장식들을 보관했고 100여 년 뒤인 오현제 시절, 수에토니우스도 바이아이에 남아있던 이 유물들을 보고 기록으로 남겼다(출처: 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 티베리우스편 6장).
티베리우스의 친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노빌레스를 대표하는 클라우디우스 씨족 중에서도 풀케르[24] 가문과 함께 공화정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서깊은 네로 가문[25]의 수장이었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드루수스[26]의 아들로 부모 양쪽 모두로부터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다. 그는 콰이스토르(재무관)의 직분을 맡을 당시 율리우스 카이사르 밑에서 알렉산드리아 전쟁 당시 함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티베리우스의 친부는 카이사르파의 일원으로 있었고, 상관인 카이사르로부터 신임을 받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당시 최고제사장이었던 카이사르에게 제사장 지위를 받았고 그가 정복한 갈리아에서 식민지 건설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2차 3두정치가 시작될 무렵, 티베리우스 네로(티베리우스의 친부)는 프라이토르(법무관)가 되었는데 법무관 임기가 끝날 무렵인 기원전 41년 집정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27]가 아우구스투스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고, 실패하자 페루시아(현재 이탈리아 페루자)로 도주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그도 집정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따라서 페루시아로 들어간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 페루시아는 함락되었고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항복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 네로는 항복하지 않고 프라이네스테로를 거쳐 네아폴리스(오늘날의 나폴리)로 도망쳤고, 여기서 노예반란을 시도하다 또 실패하고는 시칠리아까지 도주한다. 그리고 시칠리아에서 반 옥타비아누스 세력이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28]에게 찾아갔지만 섹스투스는 티베리우스 네로와의 접촉을 피했고 법무관 네로의 파스케스(Fasces)의 사용도 금지하면서 사실상 그를 거부한다.[29] 결국 티베리우스 네로는 가족들을 데리고 그리스로 건너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형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찾아갔다.
티베리우스가 3세가 될 무렵,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협약을 계기로 친아버지 티베리우스 네로 일가에게 사면령이 내려지자 부모와 함께 로마로 귀환하였다. 이후 티베리우스의 부모는 한때 정적이었던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고, 그와 만났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우호증진을 위해 자신보다 7살이나 많은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한 상태였다. 이 결혼이 이뤄지기 전, 옥타비아누스는 사이가 껄끄러웠던 안토니우스와 화해의 뜻으로 정략결혼을 진행했다가 서로 화해한 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처제인 그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첫 결혼으로 이미 전 남편의 아들까지 있던 스크리보니아에 대해 썩 내켜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아내 스크리보니아가 임신 중이었고, 곧 출산을 앞두고 있었음에도 부부 사이는 상당히 험악해져 옥타비아누스 부부의 이혼은 금방이라도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중, 옥타비아누스는 우호 관계였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측과 사이가 험악해지면서, 정략적으로도 가치가 없어진 아내와 이혼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아직 성별도 모르는 첫혈육의 탄생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스크리보니아가 아이를 낳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아이가 태어난 직후 이혼하기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 그리고 우연치 않게도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한때 정적이었지만, 화해한 인사들을 만나면서 티베리우스의 친부모도 만나게 됐다.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인 리비아 드루실라는 상당한 미인인 데다 교양도 풍부하고,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친가)와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입양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상당했던 여장부였다.[30] 따라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는 출신 가문이나 나이로도 훌륭한 배필이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티베리우스 네로의 아내였던 리비아 드루실라를 처음 만난 순간, 엄청난 미인이었던 리비아의 외모와 뛰어난 지성 등 모든 부분에 홀딱 빠져버려 진심으로 리비아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얼마 안가 옥타비아누스는 아내가 첫 혈육인 율리아를 낳자 기다렸다는 듯이 상호 합의하에 이혼했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첫 혈육에게 형식상 관례대로 자신의 외할머니의 이름과 똑같은 율리아라고 지어주고,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인지 결정만 통보한 채, 스크리보니아 모녀에게 무관심했다. 이런 옥타비아누스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스크리보니아 역시 애초부터 옥타비아누스와 이혼할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갓 낳은 딸 율리아를 데리고 곧바로 다른 남성과 재혼해버렸다.
옥터비아누스 부부가 이렇게 이혼하게 된 직후, 최고 권력자 옥타비아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친부를 찾아가 자신이 리비아 드루실라와 결혼해야 한다고 밝히고, 일방적으로 아내와 이혼할 것을 요구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요구는 사실상 명령에 가까운 요청이어서 강제로 이혼이 이루어졌다. 이때 티베리우스 네로는 이혼의 조건으로 유이한 혈육인 장남 티베리우스와 곧 태어날 아이에 대한 친권과 양육권을 옥타비아누스 측에 요청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 측은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뒤, 전 남편이 될 그에게 자신들의 결혼식에서 신부 아버지의 역할을 요구하는 것을 제안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의 부모는 이혼했다.
티베리우스의 부모가 이렇게 이혼하게 된 이후, 이례적일 정도로 결혼 준비가 진행되더니 1월 17일 티베리우스 네로의 둘째[31]임신 중이었던 리비아 드루실라와 옥타비아누스가 티베리우스 네로가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죽자고 반란을 일으키던 사람의 아내를, 그것도 그의 아이를 임신 중일 때 빼앗아서 자신의 아내로 삼은 것.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 리비아의 재혼 이후, 결혼 전 약속대로 티베리우스는 친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된다. 리비아와 옥타비아누스의 결혼 후 3개월 뒤 동생 드루수스[32]가 옥타비아누스의 집에서 태어났는데, 드루수스 역시 태어난 이후 약속대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집에서 자랐다. 티베리우스의 부친은 이혼 후, 두 아들을 키웠는데 끝내 재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마저도 9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이들 형제는 친권을 갖게 된 어머니 리비아와 함께 살게 되어 옥타비아누스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따라서 이때부터 티베리우스는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옥타비아누스 밑에서 자라게 되는데, 친딸 율리아 외에는 자식이 없던 옥타비아누스가 두 형제를 친아들처럼 대우하고 키웠기에 사실상 그의 양자가 된다. 하지만 정식으로 입적된 것은 아니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자신과 성격 등이 여러모로 비슷하고 과묵한 티베리우스보다는 쾌활하고 매력있는 드루수스를 더 예뻐하며 사랑했다고 한다.
티베리우스는 9세의 나이에 아버지가 죽자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대표하여 로스트라에 올라 아버지를 기리는 추도 연설을 했고, 이 나이때부터 로마에서도 최고로 불리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중 가장 영향력있는 네로 가문의 수장이 됐다. 따라서 티베리우스의 이름은 여전히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였다. 이때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의 친모 리비아는 진심으로 남편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의 두 아들을 율리우스 가문에 입적시키기를 바랐는데, 옥타비아누스는 티베리우스 형제를 아들처럼 키우고 사랑했음에도 지극히 정치적 목적을 이유로 양자로 삼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약에 정식으로 입적되어 이름을 바꾸게되면 티베리우스가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대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여 아우구스투스로서는 티베리우스를 그냥 그대로 자신의 밑에 두는 것이 클라우디우스의 가문도 자신의 수중에 넣는 것이 되어 굳이 티베리우스를 입적시키지 않다가, 나중에 그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줄 수밖에 없게 되고 나서야 정식으로 입적시키게 된다.[33] 즉 이때까지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키울 생각은 전혀 없었고, 어디까지나 그를 측근으로 키워서 티베리우스 개인의 능력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힘을 가지려고 한 것이다.[34] 이런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티베리우스는 계부 아우구스투스와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아니었음에도 엄청난 후원을 받게 된다.

2.1.2. 청년기


티베리우스가 12살이 되는 기원전 29년, 양아버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연합함대를 악티움에서 격파한 이후 지중해 세계의 1인자가 되었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 열린 자신의 개선식에서 티베리우스를 자신이 타는 개선전차에 티베리우스의 먼 친척이자 사촌이었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35]와 나란히 타게 했다. 로마에서 개선식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안다면, 또 아우구스투스가 제일 처음 후계자로 밀었던 것이 바로 저 마르켈루스라는 것을 안다면, 그가 자신의 양자 티베리우스를 얼마나 중요하게 기용하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후로도 티베리우스는 로마에서 축제를 주관하거나 키르쿠스에서 트로이 경기의 연장자 무리를 이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출처: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 티베리우스편 6~7장).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마르켈루스를 갈리아 일대의 로마군 전초기지로 데리고 갔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마르켈루스와 함께 처음으로 로마군영과 게르마니아로 향하는 국경 일대를 시찰했고, 황제와 장군들로부터 로마군의 수비방법, 전투태세, 군율, 요새 관리 등 군무를 교육받았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외동딸 율리아와 마르켈루스를 결혼시켰다. 마르켈루스와 달리 티베리우스는 기사계급(에퀴테스)이지만 제국의 2인자인 아그리파의 장녀 빕사니아 아그리피나[36]와 결혼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의 결혼은 로마 상류층에서 굉장히 드물었던 연애결혼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출석한 뒤 티베리우스에게 남들보다 5년 이상 빨리 모든 공직에 취임할 수 있는 특권을 선사했다. 이 조치는 3살 어린 드루수스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19세가 되자 콰이스토르(재무관) 직위까지 부여받는다(출처: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Historiae, 2권 94장). 이 무렵, 티베리우스는 네로 가문의 엄청난 클리엔테스들을 후원했으며, 친아버지 티베리우스 네로를 기리는 검투검기를 포룸 로마눔에서 열었다. 이어 할아버지 드루수스를 기념하는 검투 경기를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열었는데, 소년 티베리우스가 대형 행사들을 주최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 금전적으로 큰 도움을 준 사람은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였다. 이런 까닭에 티베리우스는 일찌감치 최고 명문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대표자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후 그는 3살 아래의 동생 드루수스[37]와 함께 본격적으로 중용되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티베리우스는 갓 공직에 발을 디딘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협공 작전을 펼쳐 이탈리아를 위협하던 알프스 일대 이민족들을 격파했고, 갈리아와 일리리쿰, 라인 강 일대의 게르마니아 전선을 휩쓰는 등 출중한 군사적 재능을 선보였다.
성인이 된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주재하는 재판정에서 아르켈라우스 왕, 트랄레스인, 테살리아인들의 변호를 통해 공적인 삶에 첫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는 지진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원조를 호소하는 라오디케아, 티아티라, 키오스 사람들을 위해 원로원에 탄원하는 일을 맡았다. 또한 검사로서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음모를 꾸민 파니우스 카이피오, 무레나를 대역죄로 고소하여 유죄 선고를 받아내기도 했다. 이처럼 티베리우스는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설계와 자신의 계획대로, 어디까지나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수장, 황제의 친족으로 활약했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아내 빕사니아와 동생 드루수스 부부를 진심으로 사랑해 그들과 사적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인생은 서서히 꼬여가기 시작했다. 먼저 장인 아그리파가 심장질환으로 급사했다. 이어서 누구보다 아끼던 친동생 대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에서 낙마 사고로 중태에 빠졌다.[38] 이때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사고 소식을 듣고, 밀라노 남쪽의 포 강 근처 도시 티키눔에서 밤낮으로 말을 달려 임종 직전의 동생을 만났다. 티베리우스는 도착 후 자신의 품 안에서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는데, 기지 내 군단병들이 자신들의 사령관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의 군단병 묘지에 묻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태까지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군단병들의 주장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이 상황을 전해, 아우구스투스로부터 로마로 드루수스의 유해를 안장할 것을 명령받았는데, 자신의 임지로 떠나지 않고 맨 앞에서 동생의 시신을 직접 이탈리아 국경까지 운반했다. 이때 그는 게르마니아에서 이탈리아 국경까지 가는 길 내내 말을 타지 않고 동생의 관 앞에 서서 걸었다.[39]

2.1.3. 은퇴와 로도스 섬 유학


상술했듯 장인과 동생이 사망한 일들은 "슬픈 일" 선에서 끝나지 않고 티베리우스의 인생을 직접적으로 꼬이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연이은 죽음으로 아우구스투스가 기존에 생각해놓은 후계자 구도가 엉망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슬하에 아내 리비아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 전처 스크리보니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외동딸 율리아가 있었다. 그는 부단히 리비아와의 사이에서 후계를 보려고 했지만 모두 유산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뒤를 이어줄 친아들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우구스투스가 누구보다도 자신의 혈통에 편집광적으로 집착한 까닭에 유아기 때부터 키운 두 의붓아들(리비아의 친아들)을 친아들처럼 대우하고 사랑했음에도 정치적 이유 등을 이유로 양자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40] 하여 그는 외동딸 율리아의 남편이자 자신의 사위를 후계자로 삼고, 그 남편과 율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황위를 잇게 해서 최종적으로 자신의 핏줄이 황제가 되게 하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계산들이 시작부터 완벽하게 어그러졌다는 점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와 재혼 이후 유일한 친혈육 율리아를 외면해오다가 딸이 결혼적령기가 되자 가부장의 권한을 내세워 누나 옥타비아의 아들(본인의 조카) 마르켈루스를 율리아의 남편으로 결정내린 뒤 결혼시켰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이자 사위인 마르켈루스는 로마를 휩쓴 전염병에 걸려 요절해버리고 만다. 따라서 그는 과부가 된 율리아를 곧바로 제국의 2인자이자 자신의 오랜 친구 아그리파(티베리우스의 장인)와 결혼시키는데, 친구 아그리파마저 그의 예상과 달리 먼저 사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우구스투스가 이 무렵 원로원에게 “진지하게 내 후계자로 고려 중이다”라고 말해온, 누나 옥타비아의 사위이자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둘째 아들, 즉 티베리우스의 친동생 드루수스마저 낙마사고로 일찍 사망했다.[41] 물론 드루수스가 후계자가 되는 것은 위에서 말한 "사위를 후계자로 삼아 외손자를 후원하게 한다" 라는 계획대로의 일은 아니지만, 정황상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차남인 드루수스를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켜 후계로 삼은 뒤, 율리아의 아들인 외손자와 드루수스의 딸을 결혼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드루수스와 조카딸 안토니아 부부의 자녀들이 율리우스 가문에 입적돼 후계자가 늘고, 티베리우스의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드루수스의 율리우스 가문의 결합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또 드루수스가 양자가 된다면 드루수스 입장에서는 자신의 두 외손자와는 법적으로 형제관계가 되므로 근친혼을 통해 사위가 다음 후계자가 되는 것이므로 클라우디우스 가문(리비아 드루실라)의 입장과 율리우스 가문(아우구스투스)의 입장 모두에게 최고의 타협책이었다.[42] 하지만 이런 계획도 부질없이 의붓아들 드루수스가 개선식을 앞두고 요절해버리면서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43] 이것은 다시 말해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 후보로 생각한 세 사람이 내리 요절해버렸다는 소리다.
그래도 다행히 아그리파는 죽기 전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남겼다. 아우구스투스는 당연히 자신의 피를 직접 이은 외손자들 중 한 명이 자신의 뒤를 잇기를 원해서, 아그리파와 상의 후 외손자 두 명을 일찌감치 양자로 삼고 황궁에서 직접 키웠다. 이때 그는 두 손자를 양자로 입적시키면서 율리우스 가문에서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이름을 지어줬는데, 그들이 바로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다. 하지만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기대만큼 유능한 인물들도 아니었고, 외조부의 엄청난 지원에도 인망도, 뚜렷한 공적도 이루지 못했다. 더해서 이들이 성장해줄 때까지 후견인으로서 중간다리 역할을 해줄 이들의 친아버지 아그리파도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은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아우구스투스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원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평소 골골대던건 아우구스투스였고, 아그리파는 아주 건장한 사람이었기에 자신보다 훨씬 건강하던, 동갑내기 친구 아그리파가 먼저 죽은 것은 곧 60을 바라보는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정말로 예상 밖의 일이었다.[44]
그리하여 아우구스투스는 유아기 때부터 친아들로 키운 티베리우스에게 아그리파, 드루수스가 맡았어야 할 역할을 맡기기로 결정하고 그를 후계자로 삼게 된다. 그러나 이 결정은 어쩔 수 없이 내린 행동이었다. 다시 말해 아우구스투스는 처음부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티베리우스를 자신의 정식 후계자가 아니라, 자신의 갑작스러운 사망 등으로 황제 자리가 공석이 되었을 때 자신이 가장 믿을 만한 아내의 친아들(본인의 의붓아들)에게 중간다리, 혹은 대타 정도로 생각해 내린 조치였다.[45]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의붓아들 티베리우스의 이혼을 지시한 뒤, 아그리파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율리아와 명령으로 이혼하게 될 티베리우스의 결혼을 지시내린다. 이 결정은 아버지의 명령이기도 했지만, 황제로서의 명령이었다. 그런데 이런 명령의 배후에는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가 있었다.
원래 아우구스투스는 외동딸 율리아가 두번째 남편 아그리파와 사별해 홀몸이 되자 가문에 상관없이 기사계급 출신 남성 중 한명과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결혼 직후부터 자신의 두 아들을 남편의 공식적인 양자로 입적시켜 차기 황제로 만들고 싶어한 리비아는 이 결정에 반대하면서, 후계구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율리아의 결혼상대자는 티베리우스가 되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런 리비아의 판단과 결정은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를 배려하지 않고 강압적으로 명령하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아우구스투스는 평소 일처리와 인간관계가 지나치게 정치적일 정도로 냉정했는데, 본인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차갑지 못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의 친모 리비아가 먼저 가족들의 일이 아니라고 부담감을 덜어주자 본래 그의 방식처럼 티베리우스의 이혼, 티베리우스와 율리아의 재혼을 명령했다. 이는 티베리우스를 아예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계부로 만들어버림과 동시에, 아내 리비아의 가문(클라우디우스)과 자신의 가문(율리우스)의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고, 만약 티베리우스와 율리아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다면 이를 통해 후계자 후보를 늘리겠다는 계산도 담겨 있었기 때문에, 늘 후계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절대 양보해줄 수 없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방적인 결정은 티베리우스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위에도 말했듯이 그는 아내 빕사니아와의 사이에서 소 드루수스[46]라는 아들까지 둔 상태였다. 심지어 저 빕사니아 아그리피나는 바로 아그리파가 율리아 이전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 낳은 딸이기 때문에, 즉 티베리우스는 장인의 딸과 이혼하고 형식적이긴 하지만 장모인 율리아와 결혼하게 된 셈이다. 거기다 티베리우스는 정략적인 이유로 결혼한 케이스가 아닌, 연애결혼으로 빕사니아와 결혼한 사람이었다. 결혼 전까지 동료들과 부하들에게 베스타 여사제 같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혼전순결을 지킬 만큼 상당한 애처가였다. 그래서 금슬이 좋던 빕사니아와 이혼하기 진짜 싫어서 계부에게 제발 안 된다고 사정하고, 아우구스투스를 유일하게 설득할 수 있는 어머니[47]에게 강제적인 이혼과 재혼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명령과 태도는 강압적이고 절대적이었기에 결국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48] 그리고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강제이혼 후에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거리에서 우연히 빕사니아를 만났는데, 빕사니아가 티베리우스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가자 티베리우스는 빕사니아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아그리파와 드루수스의 죽음 이후, 티베리우스는 이런 복잡한 사정으로 사실상 공동 황제로 아우구스투스와 책임을 나누어지게 되며, 황제의 특권 중 하나인 호민관 특권까지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다르게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재혼임에도 처음에는 본인이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또 다시 티베리우스에게 불행은 찾아오게 된다. 원래부터 율리아는 티베리우스와 달리 교양도 부족하고 문란하기 짝이 없는 사생활로 유명했는데 결혼 생활 내내 두 사람은 끊임없이 부딪쳤다. 이런 상황에서 고부갈등이 벌어지고 티베리우스와 율리아 사이에서 얻은 아들[49]마저 얼마 안 되어 잃으면서 부부 관계가 급속히 나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티베리우스는 스스로 최전방 근무를 지원해 전장으로 향하거나 힘든 업무를 떠맡기도 했다. 그럼에도 율리아는 여러 남성들과 불륜관계를 맺는 등 좋지 않은 품행으로 사태를 악화시켰고, 부부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따라서 기원전 6년, 티베리우스는 36살의 나이로 말 그대로 모든 공직을 내던지고 스스로 평범한 자연인이 되어 로도스 섬으로 은퇴를 해버린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율리아와의 문제뿐 아니라 그간 쌓였던 티베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간의 애증어린 갈등이 폭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애초에 티베리우스의 아버지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반발하여 한때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망명생활도 하다가 정적 아우구스투스에게 아내를 빼앗긴 뒤 실의에 빠져살다 병으로 죽었고, 본인 역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던 아내 빕사니아와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 계획 때문에 억지로 이혼해야 했다. 다시 말해 티베리우스 부자는 모두 아우구스투스 때문에 강제 이혼을 하게 된 것.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던 빕사니아 대신 결혼한 것은 로마에게 가장 바람난 여자인 율리아... 거기다 그렇게 해서 결혼한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아들이라도 건강하게 자라 자신의 피로 후계를 이었다면 어느 정도는 위로가 되었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문자 그대로 ‘징검다리’ 역할을 하다가 자신의 뒤는 생판 피도 안 섞인 가이우스나 루키우스에게 강제로 물려줘야만 했다. 진짜 이쯤되면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그냥 섬으로 은둔해서 조용히 살자라고 생각한 것이 성인군자로 여겨질 판이다.[50]
티베리우스가 스스로 로도스 섬으로 도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동안, 율리아는 로마에서 더 화려하고 문란한 사생활로 문제를 일으켰다. 그녀는 공개된 신전에서 관계를 맺거나, 불륜을 저지르면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년 친딸 율리아를 자신이 만든 간통죄로 고발한 뒤, 직접 처벌했다. 이때 그녀는 티베리우스와 이혼을 당해 로마에서 영구 추방되었다. 이때 황제는 내심 티베리우스가 다시 돌아오길 바랬지만,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바람과 달리 무려 7년간 로도스 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51]
아우구스투스는 평소 책임감이 강하고 건실한 티베리우스에게 아그리파 사후부터 의지했다. 그래서 의붓아들이자 사위인 티베리우스가 무책임하게 가족들을 버리고 야반도주하듯 로마를 떠나자 처음에는 단단히 화가 났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은퇴를 선언하고 로도스로 떠났을 때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아내 리비아가 계속 설득하고 본인도 티베리우스를 유아기 때부터 정을 주면서 키웠기 때문에 끝내 자연인 티베리우스에게 로도스로 파견된 황제 대리인 자격을 하사했다. 물론 감히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로도스로 은퇴를 해버렸다는 괘씸함이 있었겠지만, 애초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능력를 인정했고, 본인이 친아들로 여길 정도[52]로 티베리우스를 생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아내의 두 아들을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아꼈음에도 티베리우스를 유쾌하고 사람 좋은 드루수스만큼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53][54]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빕사니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소(小) 드루수스[55]의 성년식 참석을 위해 로마 방문을 요청하자, 후계자들의 반발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원로원 참석을 하지 않고 어떤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전제 아래에서 로마 복귀를 허락해 복귀시켰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계부와의 약속대로 로마 귀환 이후에도 아들을 공적인 삶으로 인도한 이후, 곧바로 카리나이에 있는 폼페이우스의 옛 집에서 나와 에스퀼리누스 언덕의 마이케나스 정원에 위치한 저택으로 이사한 것과 3년간 사적인 일을 제외하고는, 아우구스투스와의 약속대로 원로원에 출석하지도 않았고, 공적인 일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2.1.4. 후계자 등극


티베리우스는 상술했듯 스스로 은퇴한 이후, 거의 8년 가까이 로도스 섬에서 조용히 살았다. 이때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는 그를 수도로 데리고 오길 원했지만, 아우구스투스의 공식 후계자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커갈수록 그의 로마 복귀를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세습왕조에 대한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분신같이 키운 예비 후계자 가이우스, 루키우스 형제[56]가 성년식에 접어든 나이가 되자마자, 서둘러 성년식을 치루게 한 뒤 이들을 원로원에 데리고 갔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두 외손자를 위해 원로원과 정치적 타협을 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민중들과 민회까지 원로원과 프린켑스의 협상장에 끌어들여 우격다짐으로 10대 소년들에게 각종 특권들과 집정관 등 공직을 하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또 그는 엄청난 돈을 들여 국가 행사로 자신의 혈육들을 홍보했음에도 호응이 없자, 유벤투스라는 소년단을 만들어 두 손자에게 단장, 부단장 자리를 주고 각종 행사들까지 주최시키는 등 엄청난 지원을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로마 일반 시민들과 원로원 모두에게 인망이 지나치게 없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여기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들에게 기회를 줬는데, 그의 기대와 달리 두 사람 모두 황제의 재목이 아니라는 것이 곧바로 밝혀지게 된다.
아우구스투스의 첫 번째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친모 율리아(티베리우스의 아내)가 간통죄로 기원전 2년 판다테리아로 추방된 이후 티베리우스의 로마 복귀가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그의 귀환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이 무렵부터 거취에 불안을 느껴야 했다.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첫 시험대에 오를 동방 문제 해결 파견 직전, 대 드루수스의 딸 리빌라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그는 외할아버지에게 처음으로 가장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그것은 때마침 발생한 유대 왕국 소요사건과 파르티아의 개입으로 촉발된 아르메니아 문제였다. 고령의 아우구스투스는 당시 동방 문제를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직접 맡기면서, 이 정치적 이벤트를 외교적으로 성공시킨다면 자신의 양자가 단번에 민중들과 원로원에게 인정받을 거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황제 본인이 심혈을 기울여, 동방속주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전직 집정관 롤리우스을 고문단장으로 임명했고 베테랑 원로원 의원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누스, 누미디아의 유바 2세도 포함시켜 경험이 없는 자신의 외손자를 보좌케 했다. 또 티베리우스와 친분이 있으면서 동방, 서방 일대에서 경험이 풍부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5대 황제 네로의 할아버지), 파테르쿨루스 등을 고문단에 임명해 돋보이는 성과를 내야 할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돕게 했다.
그러나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의 바람과 달리 머리아픈 문제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뽑아 선정한 고문단에게 다 맡긴 뒤, 새신부 리빌라를 남겨두고 로마를 떠났다. 그는 로마를 출발할 때부터 요란스럽게 떠났고, 급한 일이 아닌 사람처럼 느긋하게 이동했다.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1년 넘게 가야할 유대 속주와 시리아 속주로 가지 않고 시간을 지체했는데, 이탈리아 반도를 떠난 일행을 태운 배는 부유한 그리스 지역으로 향했다. 이때 황태자는 일행들과 함께 모든 일은 잊어버린 사람처럼 생전 처음 방문하는 그리스, 이집트 여행에 치중했다. 또 얼마나 거만하게 행동했는지 지나가는 도시마다 그를 위해 환영 만찬과 축제를 성대하게 열어줬다. 그래서 그 행렬이 그리스를 출발해 이집트로 가기 전 로도스 섬을 지날 거라고 알려지자, 로도스 섬에서 조용히 공부하면서 학자들과 학술 토론을 나누던 티베리우스마저 그 소문을 들은 뒤 아랫사람처럼 그를 알현하러 마중나와야만 했다.[57] 이때 가이우스 카이사르 일행 중 고문단장을 맡고 있던 롤리우스는 원로원 내에서 티베리우스와 철천지 원수일 정도로 사이가 최악이었다. 롤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공식 후계자에게 스승이기도 했는데, 로도스 섬 방문 당시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거만한 태도로 숙부 티베리우스를 무시하고 모욕한 일이 벌어지게 됐다. 그런데 이런 황태자의 행동을 옆에서 본 롤리우스는 앙숙인 티베리우스가 모욕당하는 것을 방치했고,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면서 겨우 20살이 넘은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부추겨 티베리우스에 대한 적대심까지 키웠다. 따라서 참다 못한 다른 수석고문단 일행들은 이 사건을 해프닝으로 넘어가지 않고,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에 보고했다.
이 당시, 티베리우스는 어린 조카의 미숙함을 이해하면서 넘어갔지만 배후에 롤리우스가 있다는 사실을 안 뒤, 티베리우스 친구들과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이 문제를 가만히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로도스섬 방문 직후, 로마에서는 롤리우스가 황제의 양자이자 사위이며 정부 공식 대리인인 티베리우스가 모욕받는 사건을 의도적으로 방치했다고 논란이 일기도 했고 동방에서는 고문단 사이에서 ‘롤리우스 vs 티베리우스’구도의 미묘한 신경전이 계속 벌어졌다. 이는 양자와 외손자가 서로 앙금을 풀고 잘 해결해내기를 원한 아우구스투스의 심정과 상반된 일이어서 황제는 원로원과 함께 자신의 양자이자 대리인 신분인 티베리우스가 모욕당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정황을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고문단 일행 중 몇명과 가이우스 카이사르 호위 백인대장을 소환해 조사까지 했다.
반면, 로도스 섬에서 문제를 일으킨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이집트에 들렀다. 그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이집트 전역의 유명 관광지와 부유한 도시들을 도는 여행에 치중했다. 그 사이 롤리우스를 포함한 베테랑 고문단들은 서둘러 유대 지방과 시리아 속주에 도착해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이 지시내린 문제 해결에 집중했는데,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스승 롤리우스가 모든 골칫거리를 정리한 이후에야 움직였다. 하지만 이때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도착해 한 일이라고는 도착 후 파르티아와의 국경까지 이동해 파르티아 측과 형식적인 조인식을 거행한 일 뿐이었다. 조인식 종료 직후, 가이우스 카이사르 일행은 로마에 보고서를 보낸 뒤 다음 행선지인 아르메니아로 떠났다. 한편 원로원에서 열린 회의에서 조인식 소식을 들은 아우구스투스는 너무 기뻐하면서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얼마나 외교문제를 잘 해결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원로원에게 자신의 후계자가 일을 잘 해결했다고 자랑했다. 그런데 로마인들과 원로원에서는 이 성과의 보고서를 토대로 한 아우구스투스의 주장에 수긍했다. 왜냐하면 롤리우스가 어려워 보인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공으로 교묘히 잘 돌려 놓은 까닭에 아우구스투스의 칭찬을 비판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이우스 카이사르 입장에서는 불행하게도 얼마 안 가 고문단장 롤리우스가 뜬금없이 파르티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고발됐다. 내통의 증거로 거론된 것은 그가 동방 속주에 도착한 이후 파르티아 왕과 지방 유력자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수령한 행동이었다. 사실 롤리우스는 뛰어난 행정가, 장군이었고 아우구스투스의 열혈 지지자였지만, 늘 자신이 통치하던 속주의 속주민들을 쥐어 짜내거나 뇌물을 받아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행동 자체가 굉장히 위선적이어서 티베리우스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적이 많이 없었다.[58] 그래서 이 당시, 로마에서 그 고발장을 접수받은 아우구스투스는 고발 소식을 보고받고도, 숙고 끝에 소환형을 내리지 않고 넘어갔다. 어떻게 보면 티베리우스 입장에서는 천운일 수도 있는 사건이 이때 벌어지는데, 그동안 롤리우스를 믿고 따르던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버팀목이던 롤리우스를 맹비난하면서 아우구스투스에게 이 문제를 재차 거론한 것이다. 결국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개입하게 되면서 롤리우스 고발 사건은 새로운 전개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사실 황태자와 스승의 사이는 이탈리아를 떠난 이후부터 서서히 대립관계로 변해갔는데, 롤리우스 고발 사건 이후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이 문제를 아우구스투스에게 제기하면서 틀어지게 됐다. 따라서 황제와 원로원에게 신뢰를 잃었다고 판단한 롤리우스는 고발 소식을 들은 뒤 비관하다가 현지에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해버린다.[59]
이렇게 황태자의 고문이자 스승인 롤리우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자, 젊은 황태자가 아르메니아 문제 해결의 중책을 떠맡게 된다. 사실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을 올바르게 통제해주던 고문 롤리우스에게 적정선 수준으로 컨트롤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문단의 빈자리가 생기자 그는 더 오만해졌으며, 자신을 수행하던 군대와 수행원들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따라서 아르메니아 도착 후,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거만한 태도와 언행들로 자존심 강한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자극하더니, 결국 아르메니아 왕실과 귀족들까지 피해를 입히는 폭동사태를 유발시켰다. 이때 생긴 폭동은 함께 온 로마군에 의해 진압됐지만,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동방에서 다툼에 휩쓸리게 됐다. 그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공격을 당해 복부에 심각한 상처를 입고 도망치듯 소아시아로 탈출했다. 그 이후 그는 편지를 보내 외할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내버리고 자연인이 되어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외손자 가이우스가 편지로 은퇴선언을 하자, 이를 평소 투정으로 여기고 자상한 어투로 달래며 로마로 속히 돌아오라고 설득했다. 그럼에도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아우구스투스의 말을 듣지 않았으며, 귀국을 거부하고 소아시아 일대를 떠돌아 다녔다. 그러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얻은 상처 후유증이 악화돼 그해 4월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선박에 오르기도 전에 죽었다. 이렇게 어이없게 자신의 후계자가 사망하자 그 소식을 들은 아우구스투스는 굉장히 절망했다. 이에 앞서 둘째 손자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군복무를 위해 히스파니아로 향하던 중 뜬금없이 그리스계 도시인 마르세유에서 머물다가 갑작스레 질병에 걸려 별 공적이나 능력도 증명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따라서 유일한 후계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죽음은 그동안 그가 공들여 완성한 후계구도가 완전히 끝장났다는 사망선고였다. 하지만 다른 로마 시민들이나 원로원에서는 슬픔에 잠긴 아우구스투스를 위로해줬음에도, 이번 사건으로 완전히 무능함을 드러낸 아우구스투스 외손자의 요절을 추모하지 않았다.[60]
이런 일련의 급변사태가 벌어진 것이 티베리우스가 로마로 귀환하고 3년 후 일이었다. 황당하고도 어이없게 두 외손자를 잃어버린 아우구스투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두 외손주가 사망한 이후, 다음 계획을 세워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 게르마니쿠스를 차기 황제감으로 점찍고 실행에 옮긴다. 자신의 피가 흐르는 게르마니쿠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였고, 티베리우스의 친동생 대 드루수스의 아들로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61] 안토니아였기에 티베리우스와는 달리 양친을 통해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피를 잇고 있었다. 성년식을 갓 치룬 티베리우스의 친조카 게르마니쿠스는 이 당시 18살에 불과했지만,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처럼 외외종조부와 외외종손 사이였기에 이 당시 황제와 가장 가까운 남자 피붙이였다.[62]
사실 아우구스투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살아있을 무렵부터, 죽은 드루수스와 조카 안토니아의 삼남매[63]의 법적 보호자 역할을 하면서 후원하고 있었다. 또한 두 공식후계자의 여동생이자 자신의 첫번째 외손녀인 아그리피나[65]를 일찌감치 게르마니쿠스와 약혼시킨 상태였다. 이 당시 티베리우스의 조카 게르마니쿠스는 10대 후반에 불과했지만, 천성적으로 용감하고 쾌활한 성격을 가진데다 뭇사람에게 호감을 줄 정도로 누구에게나 상당히 겸손했다. 이런 성격은 아버지 드루수스를 쏙 빼닮았다고 하는데, 부모 모두 상당한 외모를 가진 까닭에 게르마니쿠스는 잘생긴 외모를 가진 데다 키가 상당히 큰 미소년이었다.[66] 여기에다 결혼 이후에도 가정에서의 화목한 삶을 중요 덕목으로 생각하는 아우구스투스의 평소 철학처럼 아내 아그리피나와 이미 화목한 가정 생활도 하고 다복했다. 따라서 그가 후계자가 되면 아우구스투스가 그렇게나 원하던 자신의 직계 혈통이 황제를 잇게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게르마니쿠스는 아직 경험이 많이 부족했고, 그 뒤를 잇기에는 너무 어렸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서는 또다시,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의 후견인이 되어줘야 했다.
결국 서기 4년, 로마로 귀환했던 티베리우스는 정식으로 계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되어 이름을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꾸고,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모든 특권도 포기했으며 율리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들어갔다.[67] 이때 게르마니쿠스보다 2살 어린 친아들 드루수스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인 율리우스 가문에 자동적으로 손자로 입적됐기에,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 자리는 조카 클라우디우스에게 물려주게 된다.[68][69] 또한 티베리우스의 전처 율리아가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낳은 막내 아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됐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친아들 소 드루수스가 자신과 함께 율리우스 가문에 들어갔음에도,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와의 약속대로 죽은 동생의 아들이자 친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아들로 삼았다. 이때 다음 황제 자리는 게르마니쿠스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 것은 덤.
같은 해,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2번째로 호민관 직권을 부여받게 된다. 동시에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의 아들이자 율리아와 결혼했던 시절 티베리우스의 양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되어 있던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두 사람과의 양아들 관계가 파기되고 추방되게 된다.[70] 이로써 티베리우스는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아들이며 카이사르의 손자이자 율리우스 가문의 후계자이며 유일한 정치적 후계자임이 확고히 굳혀지게 된다.
후계자 시절에도 티베리우스는 감출 수 없는 출중한 재능으로 전공을 세우는데, 바루스의 3개 군단이 게르마니아 땅에서 궤멸당했을 때 라인 강을 지키면서 뒷처리를 담당했고, 달마티아의 반란 진압에서도 공을 세워 입지를 더욱 단단히 굳히기도 했다. 그리고 2년 뒤 돌아와서 미뤄두었던 일리리아에서의 전쟁 개선식을 거행했다. 곧이어 집정관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와 속주를 공동 관할하는 자격을 부여하고 다음 5년 동안 그를 도와 인구조사 임무를 맡기게 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그러다 서기 13년 로마군 총사령관과 종신 호민관 직권을 아우구스투스와 공동으로 지명받아서 공동황제에 오르게 된다.

2.2. 황제



2.2.1. 즉위와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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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은 신임 프린켑스가 저지른 첫번째 범죄(Primum Facinus novi Principatus)였다." - 타키투스, <연대기>

결국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황제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상당한 약점을 안고 시작해야 했다. 먼저 타키투스가 자신의 책인 <연대기>에서 밝혔듯이 티베리우스의 치세는 아우구스투스의 손자 아그리파 포스투무스[71] 처형사건으로 불길하게 시작됐다. 포스투무스는 포악하고 잔인했으며 고집 센 사람이었고, 힘이 황소도 때려 잡을 정도로 장사였다. 여기에 황실 사람 중 누구도 컨트롤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많아 서기 7년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황량한 섬으로 유배된 상태였다. 그는 율리아의 유일한 아들이었기에 리비아의 친아들일 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티베리우스에게 큰 위협이 될 인물이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후계자인 '아들' 티베리우스가 가진 불안정된 권력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죽기 전 티베리우스에게 포스투무스를 처형하라고 조언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조언에 따라 백인대장 등을 보내 포스투무스를 죽였다. 하지만 이 결정은 그렇지 않아도 '냉소적이고 거만한 위선자' 이미지 탓에 원로원 내 귀족들에게 대놓고 미움을 받던 티베리우스의 이미지[72]를 "친족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프린켑스"로 만들어버렸다. 로마시대의 역사가들이나 현대 연구자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율리우스 가문원을 죽이라고 조언한 것을 믿지 않는다.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이라는 태생적인 지위가 티베리우스와 리비아에게 큰 위험이 된 건 분명했기에 아마 티베리우스 또는 리비아 아니면 둘 다의 의도에 의해서 살해되었을 걸로 추정하고 있다. 티베리우스의 이 판단은 아우구스투스라는 원수정의 설계자가 죽은 후 첫 즉위라는 불안정성에서 이루어진 불가피한 조치라고 생각되었을 것이나 이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 아우구스투스 핏줄을 자주 살해하게 되는 선례를 만들어내었기에 결과적으로 왕조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아우구스투스가 생전에 작성한 유언장에서 그를 아예 '대타'라고 명시를 해버리면서 티베리우스는 즉위식도 거행하기 전에 장례식 후 면전에서 정통성에 큰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아우구스투스가 양자 티베리우스를 친양자로 법적 입양을 하면서도 이를 불쾌해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임종하면서 "저토록 굼뜬 주둥이에 내맡겨지다니, 아 불쌍한 로마 시민들이여"라고 한탄했다.”는 내용의 악의적인 비방성 뜬소문이 돌면서, 일반 민중들에게도 폐쇄적이고 경직된 사람으로 인식되게 됐다. 그래서 대타인 그로서는 당연히 정통성이 약할 수밖에 없고, 이는 황권의 약화를 야기해 그가 정국 운영에서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펴기 힘들게 만들었다.[73] 실제로 이 약점은 재위 시작부터 티베리우스를 딜레마에 빠트려 모순적인 행동을 하도록 강요했는데, 티베리우스 본인은 공화정을 존중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정통성이 약하다보니 자신에게 반발하는 자들에게 인정을 베풀 여력 따위는 없었다. 하여 그는 오랜 기간 동안 황제라는 칭호를 받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등극 이후 주저하지 않고 가장 먼저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여 근위병들을 불러 자신을 호위케 하는 모순된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티베리우스는 본디 공화정 시대를 대표하는 귀족인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다. 때문에 그는 적어도 초기에는 나름 공화정의 전통을 계승하려고 애썼고, 아우구스투스 때처럼 원로원을 무조건 황제의 의견에 찬성만하는 거수기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원로원의 진정한 동의를 통해 원로원으로부터 주권을 부여받고 싶었는데, 그런 티베리우스가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약점 때문에 근위병들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다보니 원로원은 원로원대로 등극하자마자 황제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는 티베리우스가 좋게 보일 리가 없었고, 결국 삐딱하게 "아우구스투스가 지명했으니 어쩔 수 없이 지명한다.", "마음에 안 들지만 어차피 너는 황제고 우리는 거수기잖아? 너 마음대로 해."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해버린다. 이렇게 되자 티베리우스는 더 이상 원로원의 사정을 보아줄 수가 없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저런 원로원의 태도 때문에 그들은 정말로 손만 드는 거수기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것이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의 끊임없는 충돌의 시작이었다.
거기다 이런 내적인 갈등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사방에서 위험이 대두되어 티베리우스를 더욱 더 조심히 행동하게 만들었다. 위에서 티베리우스가 정식 후계자가 되는 과정에서 방해가 될까 처형된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의 노예였던 클레멘스는 주인의 복수를 위해 대규모 군대를 조직하기도 했고, 귀족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는 비밀리에 반란을 계획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티베리우스는 스스로를 "나는 늑대의 두 귀를 붙잡고 있다."고 종종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장군으로서 공적을 수없이 쌓은 일리리쿰과 게르마니아 주둔 군대들로부터 파업을 선포받기에 이른다.
일리리쿰과 게르마니아 땅의 군대는 봉급 인상, 복무연한 단축, 아우구스투스의 유증금 증액 등을 요구했고, 자신들이 티베리우스를 투표로 뽑지 않았기에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도나우 전선에서 일어난 파업은 친아들 소(小) 드루수스를 파견해 수습하도록 했고,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라인 강에서의 파업은 심각했다. 이에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로 내정된 게르마니쿠스가 파견되었지만, 군대는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게르마니쿠스황제로 옹립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하려 들었다. 이에 게르마니쿠스는 군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식으로 황제의 명령서를 위조해 일단 군인들의 불만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불만을 품은 군사들을 한밤중에 야습해 살해하고, 반란의 주모자들을 체포해 처형했다. 이어 군대를 이끌고 라인 강 너머로 쳐들어가 피로 피를 씻은 다음에야 반란은 잦아들었다. 군대의 불만은 이로써 적당히 수습되었지만, 군사들이 게르마니쿠스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던 것과 게르마니쿠스가 황제의 명령서를 위조했던 일은 뒤에 불화의 불씨가 된다.[74]

2.2.2. 재위 초중반기


이렇게 군사적인 위협이 안정되자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뜻을 이어받아 귀족들과 부유층 시민들에게 지나친 사치와 향락을 하지 말 것을 촉구했으며[75] 검소한 절약 생활로 국고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본인 역시 겸손하게 행동하고 일개 시민보다 더 공손하게 굴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생일과 겹치는 평민들의 축제일에 자신의 이름으로 신전에 봉헌하거나 동상과 흉상을 허락없이 세우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새로운 공공건물을 만들지도 않았고, 검투사 경기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기에 시민들은 지루해했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티베리우스의 검소한 정책 기조 덕분에 로마는 수백년을 이어갈 기반을 탄탄하게 다지게 되는데, 바로 이 점이 그가 시민들에게 인기가 떨어지게된 주요 원인이었다는 소리다.[76]
티베리우스가 인기가 떨어진 원인 중 하나로 그가 집권 이후 민회와 평민회를 없애버린 것도 들 수 있다. 당시에 매년 선거로 인하여 지나치게 비용이 많이 들었던 탓에 선거를 폐지하고 호민관, 안찰관, 재무관, 법무관, 감찰관, 집정관, 총독, 행정관, 군단장까지 이른바 명예로운 경력이라고 하는 선출직 공무원을 선출할 권한을 원로원에 돌려주었는데 이로써 지금의 미국 대통령이 상원의 동의를 받아 장관과 차관을 임명하는 것처럼 황제가 원하는 인물을 원로원이 승인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탓에 원로원은 시민들과 단절되어버렸고 시민들은 정치참여 기회를 잃어버려서 군인이 아니면 정치적인 영향을 주기 어려워졌다. 그로 인하여 티베리우스는 인기가 더 떨어져 버린다.
티베리우스는 황제에 등극한 후에도 딱히 자신의 잘못도 아니고 아우구스투스 때문에 원로원에도 욕먹고, 군대에도 욕먹고, 시민들한테도 욕먹고, 같은 편이라고는 하나 없이 사방팔방으로 까이게 된다. 여기에다 티베리우스는 전처 아그리피나 빕사니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외아들 소 드루수스가 있었지만 친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소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아우구스투스 밑에서 정치, 행정과 관련된 제왕교육을 받았고, 판노니아 반란 건에서도 볼 수 있듯 기대를 충족시킬만한 능력을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인재였다. 여기에 더해 아버지처럼 인기가 없는 사람도 아니었고, 원로원과 민중들에게 인기도 상당히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복잡한 것이, 소 드루수스는 분명 황제의 아들이고 또 능력이 뛰어남에도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결코 황제는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티베리우스의 다음 황제는 티베리우스의 동생 대 드루수스가 남긴 아들 게르마니쿠스가 내정이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은 뒤 자신의 혈육인 게르마니쿠스를 타베리우스의 양자로 삼게 해 법적으로 자신의 손자로 만들었다. 이때 그는 2살 차이인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 모두에게 나란히 제왕교육을 받게 하면서, 3년마다 함께 집정관을 받는 특권 등을 수여했다. 이 조치는 티베리우스 이전의 공식 후계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밟았던 코스였는데,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대타였던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역할은 소 드루수스가 담당하게 됐다. 문제는 아우구스투스의 이런 계획대로라면 소 드루수스는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죽어도 넘버2로서 황제를 보좌해주는 황제의 동생이 최고인 상황이었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와 나란히 영예와 경험을 얻고 있어도, 유사시 대체자로 즉위할 수는 있는 위치였기에 티베리우스 입장에서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이런 불리한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양자로 입적되기 전 계부 아우구스투스와 친모 리비아의 결정에 동의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이렇게 황실 내 서열도 복잡한 와중에 티베리우스에게는 훗날 만악의 근원이 될 원흉, 세야누스(Lucius Aelius Sejanus ? ~ 31. 10. 18.)가 접근해 신임을 얻어가고 있었다.
한편, 아우구스투스 시절 잠깐 중단되었던 게르마니아 정복은 게르마니쿠스의 주도하에 계속 이어졌다. 게르마니쿠스는 승승장구해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궤멸당했던 바루스의 군단기 3개 중 2개를 되찾는 등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덕분에 티베리우스와는 달리 게르마니쿠스는 시민들로부터의 인기도 대단했는데, 이 원정이 진행되는 와중에 티베리우스는 돌연 게르마니쿠스를 동방에 파견한다는 명목하에 수도로 소환해 버린다. 이에 게르마니쿠스는 시간을 더 달라고 간청했지만 티베리우스는 라인 강 너머로 진격하는 것을 금지했고, 게르마니아 정복은 조용히 일단락되었다. 이에 대해 티베리우스가 너무 커져가는 게르마니쿠스를 견제하기 위해 그의 게르마니아에서의 전공이 확립되기 전에 소환해버렸다는 의견도 있고, 그런 것치곤 게르마니쿠스를 대 파르티아 전선에 보내면서 외교관 직책에 군통수권까지 모두 쥐어줬다는 점에서 정말 필요해서 내린 조치라는 의견도 있다. 또 설사 게르마니아를 완전히 정복한다고 해도, 당시 긴축재정에 시달리던 로마로서는 정복한 게르마니아에 군대까지 주둔시키며 그 영토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던 이유도 있고.[77] 하지만 중요한건 당시 사람들은 모두 전자의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유야 어찌되었든 게르마니쿠스는 소아시아로 옮겨간 이후로도 훌륭한 처신과 뛰어난 능력으로 적에게까지 인정받으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있었는데, 티베리우스가 조카를 보좌시키기 위해 시리아 총독으로 파견시킨 피소가 게르마니쿠스와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면서 오해를 일으켰다. 그러다가 게르마니쿠스가 황제와 이집트 장관 허락없이 가족들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여행을 온 일이 벌어져 논란도 벌어졌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잘못을 지적하고 혼을 냈지만 더 이상 언급을 금지하고 넘어갔다.[78] 그런데 호시탐탐 게르마니쿠스의 실수만을 노리던 피소가 티베리우스의 경고와 달리 직속상관인 게르마니쿠스에게 이 문제를 딴지걸더니, 급기야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있던 안티오키아를 부인과 함께 무단으로 떠나는 항명까지 일으킨다.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되는데, 건강하던 게르마니쿠스가 피소가 떠난 그날 밤 두통과 어지러움을 호소하고 쓰러지더니, 이곳에서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돌연 사망하고야 만다. 이 죽음에 대해서는 말라리아 때문이라는 것이 현대의 정설이지만, 문제는 위의 게르마니아에서 소환한 일도 있고, 티베리우스가 보낸 피소와의 갈등도 상당히 유명해져서 당대의 모든 이들이 티베리우스가 피소를 사주해 게르마니쿠스를 죽인 것이 아니냐면서 의심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게르마니쿠스 부부와 피소 부부가 쌍으로 원수 지간이 되어서 게르마니쿠스의 아내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아그리피나는 물론이고, 게르마니쿠스 본인마저 자신이 피소 부부에게 암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복수해달라고 유언을 남겼을 정도.[79]
인기가 하늘을 치솟던 게르마니쿠스가 죽은 뒤, 법적으로 아버지였던 티베리우스가 국장으로 열린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아서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게르마니쿠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친어머니였던 소 안토니아와 친할머니 리비아 역시 충격으로 쓰러지게 돼 티베리우스는 이들을 병간호하느라 참석하지 못했고, 이를 사실 그대로 알렸지만 민중들이나 원로원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터라 문제가 더 커지게 됐다.[80] 이미 미운털이 박힌 탓에 민중들은 크게 흥분해 쓰레기를 신들의 제단에 쳐박거나 혹은 아예 쳐부수어 그를 죽인 운명에 대한 분노를 애꿎게 표출하는 등 난동을 일으킬 정도라, 의심의 대상이 된 티베리우스를 아주 곤란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티베리우스도 의심가는 행동을 하기는 했는데, 장례식도 불참한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게르마니쿠스 추모 열기가 일었던 중 독살 혐의로 기소된 피소 재판에서 매일같이 참석해 아버지 자격으로 피소 쪽을 날카롭게 공격했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사건을 꼼꼼히 검토한 뒤, 끝내 암살 혐의자들에게 관대하게 판결을 내렸다. 판결 직전 피소는 주위의 비난과 압박감에 못이겨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는데,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에게 항명을 여러 차례 일으키고, 직속 상관이자 최고결정권자인 자신에게 동방지역 전권을 위임받은 황태자의 조치들을 취소시킨 피소에 대해서는 명백히 유죄로 판결내렸다. 반면 독살 사건에 대해서는 모든 정황을 종합해 함께 기소된 피소의 아들은 관대하게 처분했고, 주술을 부리고 동방 마술사들에게 저주를 요청했을거라고 의심받던 피소의 아내 플랑키나는 무혐의 처리로 하면서 재판을 마무리했다. 이 조치는 게르마니쿠스가 정말로 병으로 죽은 것이라면 지극히 합리적인 처결이지만, 민중들은 그런 판단을 못 할 정도로 게르마니쿠스를 사랑하고 있었고, 이것이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죽였다는 소문과 결부되면서 의혹이 끊임없이 커져갔다.[81]
하지만 어찌되었든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의 후임으로 내정했던 게르마니쿠스는 죽었고, 이에 후계구도는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여기서 유력한 후보로 지목된 것이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인 네로 카이사르,[82] 드루수스 카이사르,[83] 가이우스[84]들과,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인 클라우디우스,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장자이자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두번째 연장자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소 드루수스)였다. 하지만 황제인 티베리우스가 이들 중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지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이 있으니 티베리우스가 대놓고 자신의 친아들인 소 드루수스에게 황위를 물려주기는 힘들었지만, 유언장에 명시됐던 게르마니쿠스가 죽은 마당이니 일단 아들인 소 드루수스에게 황위를 물려준 다음, 그 다음 후계자를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로 한다면 충분히 명분도 챙길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이는 좋든싫든 아우구스투스가 생전부터 내린 결정들을 가장 가까이서 보아온 티베리우스의 경험에서 충분히 도출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실제로 게르마니쿠스 사후, 소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의 공식적인 보호자이자 후원자가 되면서 원로원에게도 다음 후계구도가 어떻게 될 지 충분히 예상케했다.[85] 이때 게르마니쿠스의 미망인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를 믿지 못해 결국에는 소 드루수스의 어린 쌍둥이 아들 형제가 자신의 아들들을 밀어내고 차차기 황제가 될거라고 의심해 이를 걱정했는데, 티베리우스는 그녀의 의심과 달리 네로 카이사르를 소 드루수스의 딸이자 자신의 손녀인 율리아와 약혼시켰으며, 20년 이들을 결혼시켜 입지를 강화시켜줬다. 또한 소 드루수스와 함께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 중 가장 먼저 성년식을 치룬 네로 카이사르에게 16살 이상 로마 남성들이 입는 토가를 입혀 원로원으로 데리고 갔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소 드루수스와 함께 그를 원로원에 소개했고, 5년 일찍 공직을 시작할 특권을 부여했다. 또한 치안 판사 직위를 내려주고, 네로 카이사르를 위해 로마에 이를 홍보하는 돈을 하사했다. 즉 티베리우스는 차기 황제는 자신의 아들인 소 드루수스에게 물려주고, 소 드루수스는 다시 사위인 네로 카이사르의 후견인이 되어 그를 차차기 황제로 만든다는, 어떻게 보면 예전 아우구스투스가 세웠던 것과 거의 흡사한 후계구도를 설계한 것이다.[86]
이후 이 계획대로 소 드루수스는 22년 아버지와 처음으로 공동 집정관에 취임했는데 신구갈등과 황제와의 갈등으로 복잡한 원로원 관계를 본인이 직접 나서 완만히 통제했고, 공사 수주 중 발생하는 비용문제 해결과 비리 문제를 잡아내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었다. 또 로마를 떠나 네아폴리스(나폴리) 근처로 떠난 티베리우스 대신 내정을 담당하는 중에도 행정에서 능력을 증명해 평가가 좋았다. 따라서 고령에 접어들어가던 티베리우스는 능력을 증명해준 아들에게 호민관 특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원로원에 알렸는데 원로원 역시 소 드루수스의 호민관 특권 부여에 대해 동의해 무난히 통과됐다.[87] 하여 티베리우스가 세운 후계구도는 제법 잘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런데 서기 23년, 건강하던 티베리우스의 아들 소 드루수스가 갑자기 급사한다.
소 드루수스의 죽음에 대해 당시에는 병사로 알려졌지만, 진상은 드루수스의 아내인 리빌라가 근위대장인 세야누스와 불륜을 저지르고 결탁해 드루수스를 독살한 것이었다.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와 상당히 대립했는데 그 원인은 티베리우스의 아들이 세야누스에 대해 일찌감치 파악한 까닭이 컸다. 그래서 세야누스는 자신이 티베리우스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의도적으로 리빌라에게 접근해 불륜의 관계가 되었고, 리빌라를 온갖 말과 약속으로 구워 삶아 재혼을 약속하고 소 드루수스를 제거하기로 한 뒤 리빌라의 주치의 등과 공모해 드루수스에게 아주 약간씩 독을 먹여 암살해 병사로 위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은 훗날 세야누스가 체포되어 처형당할 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고, 이 당시 세야누스는 자신이 죽인 드루수스를 잃어 상심한 티베리우스의 곁에서 그 빈자리를 채우며 차곡차곡 신임을 얻어간다.[88]
하지만 그것으로 티베리우스의 마음이 다 채워질 수 없었고, 로마를 비롯한 만사에 염증을 느낀 티베리우스는 결국 서기 26년 근위대장 세야누스에게 로마를 맡기고 카프리 섬에 은둔, 이는 치세 끝까지 이어진다.

2.2.3. 세야누스의 전횡과 몰락


비록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에게 로마를 맡기고 카프리 섬에 은둔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세야누스에게는 원로원과 황실에 대한 대처만 맡긴 것이고 실제 행정은 전부 티베리우스가 처리했다. 그리고 이 멀리 떨어진 섬에서도 모든 행정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던 것은 전임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우편제도와 우편배송시스템을 만들어놓은 덕분이었는데, 황제가 어디에 있던 간에 적어도 빠르면 몇시간 뒤에서 늦어도 20일 정도면 총독과 행정관들이 제국 각지의 소식을 적어 보낸 보고서가 도착했다. 이를 통해서 황제는 상황에 맞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고 훗날 사람들이 그의 정치적 능력을 먼치킨이라 평가하는 이유다. 사실 정치적 능력이라고 하기 보다는 행정적 능력에 가깝지만.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황제가 장기간 부재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긴축재정 때문에 지루해진 시민들은 그가 어린 소년, 소녀들과 성관계 등을 즐긴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씹으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89]
그럼에도 티베리우스는 돌아오지 않았고, 심지어는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가 사망했을 때에도 코빼기 하나 비추지 않았다.[90] 티베리우스는 카프레아이(카프리 섬)에 방대한 시설을 갖춰 두어 사실상 그곳은 황궁이나 다름없었으며, 이탈리아와 연락선으로 연결되어 있어 통신에도 불편함이 없었다. 또 그가 카프레아이로 떠날 당시, 그의 몇 안 되는 친구들도 함께 거처를 옮겨 함께 살았기에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았다.[91] 다만 바다가 험해지는 겨울에는 티베리우스는 로마와 제국 각 속주들의 연락망을 위해 카프레아이와 가까운 본토로 돌아왔다.
이렇게 되자 로마는 완전히 세야누스의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후계구도에 관한 일만은 여전히 티베리우스가 단호하게 전권을 쥐고 있었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티베리우스는 아들 소 드루수스가 급사하기 전후로 아들에게 보호를 받던 게르마니쿠스의 세 아들 중 성년이 된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새로운 공식후견인이 됐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네로 카이사르의 동생 드루수스 카이사르도 원로원에 데리고 가 자신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데뷔시켰다.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형 네로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5년 먼저 공직을 경험할 특권 등을 똑같이 하사받았으며, 형과 함께 각종 특권들을 선사받았다. 이런 티베리우스의 조치들은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었고,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들은 후계자로 적합한 인물들이어서 원로원에게 찬사를 받았다. 그러다 친아들 소 드루수스가 급사한 직후인 23년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을 후계자로 못박은 후, 24년엔 아예 친동생 대 드루수스의 손자이자 자신의 법적손자가 된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위해 이들의 건강을 소원하고 비는 제사를 지내면서 이들 형제를 홍보하기에 이른다. 티베리우스는 비록 친아들을 잃었지만, 그 아들의 사위인 네로 카이사르에게 황위를 물려줄 것이라는 걸 확고히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런 티베리우스의 행보는 황제가 될 야심을 품고 있던 세야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전혀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25년 세야누스는 일단 황제가 될 혈통과 명분을 얻기 위해 죽은 소 드루수스의 미망이자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피를 잇고 있는 리빌라와 재혼할 뜻을 밝혔지만, 티베리우스는 이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며 리빌라와의 재혼은 씨알도 안 먹힐, 분수에 맞지 않을 일이라고 통보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세야누스는 방법을 바꿔 티베리우스 외의 아우구스투스 남성 황족들의 씨를 완전히 말리는 방식으로 자신이 황제에 오르겠다고 결심하고, 티베리우스가 자신에게 준 권한을 이용해 고발과 날조, 협박 등을 통해 걸림돌이 되는 정적들을 제거하기로 한다.
이때 그에게 가장 유력한 방해물로 타켓이 된 것은 당연히 게르마니쿠스가 남긴 두 아들들과 게르마니쿠스의 미망인 대 아그리피나였다. 따라서 그는 이들을 제거하기로 하고 실행에 옮긴다.
세야누스는 아그리피나 모자를 몰락시키는 과정에서 아주 교활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바로 네로 카이사르와 제위 경쟁을 하던 동생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부추겨 세 모자간을 이간질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파벌을 만들어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를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갈라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티베리우스와 대 아그리피나 사이의 갈등을 이용해 아그리피나가 반역을 꾸미고 있다고 티베리우스를 속여 자신이 날조한 증거들을 믿게 했다. 따라서 카프레아이에 머물던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가 내민 증거에 따라 서한을 통해 대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측근들을 반역죄로 고발했다. 이때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의 사위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를 반역에 참여한 공범으로 위조해 함께 반역죄로 고발했는데, 원로원에서는 황족인 이들 모자에 대한 처벌을 티베리우스가 확실히 정할 때까지 결정을 거부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다시 한 번 아그리피나 모자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고,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의 운명은 그대로 결정됐다.
이렇게 세야누스 입장에서는 생각보다 쉽게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그리피나는 아직까지도 남편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한 피소 부부의 배후가 티베리우스라 의심해 반티베리우스 파벌까지 만들어 사사건건 대립하며 티베리우스에게 이를 갈고 있었고, 아우구스투스의 손녀라는 자부심이 하늘을 찔러 그녀를 미워하는 이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세야누스의 정부가 된 리빌라 역시 평소 아그리피나를 미워한 까닭에 집안팎에서 합세해 쪼아대니, 아그리피나로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손주사위인[92] 네로 카이사르는 비록 어머니의 후원을 받고 있었어도 티베리우스가 직접 차기 황제로 결정내리고 후원하던 청년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국가의 적으로 규정된 것은 의외의 일이긴 하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세야누스가 또 다른 황위계승자인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그의 파벌을 움직여 네로 카이사르를 찍어내는데 동원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어찌되었든 세야누스의 음모대로 아그리피나 모자는 티베리우스의 손에 국가의 적으로 규정돼 서로 다른 섬으로 추방됐다. 이때 어머니와 함께 억울하게 반역죄로 엮여 폰티아로 추방된 네로 카이사르는 얼마 후 유배지에서 풀려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31년 10월 세야누스가 몰락할 무렵, 일찌감치 스스로 곡기를 끊어서 자살했다.[93] 그런데 수에토니우스는 자신의 책을 통해서 유배된 폰티아로 사형집행인이 가자 네로 카이사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네로 카이사르를 끝장낸 이후, 세야누스는 이용가치가 다한 게르마니쿠스의 둘째 아들 드루수스 카이사르마저 말도 안 되는 사건을 만들고 위조해 제거한다. 당시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형과 함께 처음으로 원로원에 공식 후계자로 소개된 이후 복점관 등을 지내면서 평가가 괜찮았기에 세야누스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나름 우호적이더라도 반드시 제거할 대상이었다. 이때 세야누스는 겉으로는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차기 황제로 밀어주며 그를 가장 후원하는 측근인 척하면서, 티베리우스의 아들인 드루수스를 독살했을 때와 똑같이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아내 아이밀리아 레피다[94]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불륜관계를 맺었다. 당시 세야누스 입장에서는 이들 부부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은 소 드루수스보다 훨씬 쉬웠는데, 우선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아내인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부주의한 여성인데다 남편을 너무 쉽게 배신했다. 따라서 그녀는 남편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자주 충돌을 일으켰고, 끝내 자신의 남편이 30년 억울하게 체포될 당시 음모임을 알고 있음에도 뻔뻔하게 남편을 공격했다.[95] 따라서 계획대로 수사관 카시우스 세베루스[96]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반역 혐의로 고발한 뒤, 세야누스가 이를 받아들여 체포 후 강제로 황궁 지하실에 유폐시키는 방식으로 티베리우스의 또 다른 공식후계자를 몰락시켰다.
세야누스는 이렇게 티베리우스 이외의 율리우스 일가[97]를 모조리 제거한 뒤, 아직 미성년자인 게르마니쿠스의 막내 아들 가이우스(칼리굴라)마저 제거하려고 했다. 다만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인 클라우디우스의 경우는 뇌성마비라는 설이 유력하기에 더 이상 자신과 후계를 다툴 경쟁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반대로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라는 정통성을 노리고 자신의 장녀를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결혼시키려고 노력하기도 했다.[98] 결국 세야누스는 처음 원했던대로 리빌라와 재혼하지는 못했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혈족의 씨를 말려버리며 자신이 황제가 될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는 이렇게 야심을 키워 나가면서도 겉으로는 티베리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티베리우스와 공동으로 집정관으로 임명되고, 결국에는 원로원 의원직까지 손에 넣으며 권력의 절정을 맞이하였다. 이때 세야누스는 많은 반대파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하며 권력을 휘두르고, 원로원 내 친세야누스 세력을 만들며 티베리우스마저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이 때가 서기 30년으로, 당시 티베리우스 외의 아우구스투스 후손들을 거의 제거한 세야누스의 권력과 위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는 로마인들 눈에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자 최고 권력을 곧 쥘 사람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후계자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체포된 이후 상황들을 본 이후부터 이미 세야누스의 이런 속셈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본능적인 촉은 티베리우스의 동생 대 드루수스의 아내 소 안토니아가 "세야누스는 위험한 인물이다. 우리 가족을 도와달라."고 요청한 편지가 그에게 전달된 순간부터 확신이 됐다. 이때 소 안토니아는 로마에서 세야누스에게 감시당하는 와중에 마지막 남은 손자 가이우스(칼리굴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그리스인 노예 팔라스[99]를 은밀히 카프리 섬으로 보내 도움[100]을 요청한 상태였다. 제수씨 안토니아의 편지 내용이 워낙 급박했고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고발과 유폐 과정에도 의문이 많았기에 티베리우스는 서둘러 가이우스를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였다.[101]
아울러 이때부터 세야누스 제거 작전을 시작했는데, 프라이토리아니 전체를 직접 움직일 수 있던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가 임페라토르라고 해도 쉽게 제거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인물이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일단 세야누스를 자신의 동료 집정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그를 찍어내기 위한 준비공작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관습으로 집정관 가운데 한명은 로마에 반드시 머물러야 하는데, 티베리우스는 카프리에 틀어박혀 있으므로 세야누스는 발이 로마에 묶여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세야누스는 그때까지 티베리우스에게 전달되는 서신, 면회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로마에 발이 묶이자 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인해 새로운 정보를 손에 넣은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의 음모를 확신하고 그를 찍어낼 결심을 하게 된다.
거기다 세야누스의 부하의 밀고까지 더해져 그의 반역은 완벽히 드러나지만, 티베리우스는 능청스럽게도 겉으로는 여전히 그를 신뢰하는 척을 하면서 프로콘술 명령권까지 쥐어주며 호민관 특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갖게 하였다.[102]
그리고 마치 자신이 이제 세야누스에게 후계를 양도하려는 것처럼 돌연 집정관을 사임하는데, 집정관은 공동 사임이므로 세야누스도 자동으로 사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야누스가 이를 의심하기도 전에 나이비우스 수토리우스 마크로를 세야누스 대신 근위대장에 임명하는데, 이때 티베리우스의 행동은 아주 신중했고 내전 당시의 젊은 아우구스투스와 비슷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마크로에게 도움을 구한다고 말하며 그가 세야누스를 제거하기 위한 도구용이 아닌 것을 간접적으로 약속했으며, "세야누스를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말했다.
티베리우스의 서신을 가지고 로마에 도착한 마크로는 티베리우스가 만든 각본 아래 행동했다. 먼저 그는 세야누스에게 근위대장에서 해임되었음을 알리며 동시에 내일 원로원에서 세야누스에게 호민관 특권이 주어진다고 알려주었다. 마지막 남은 권한인 호민관 특권을 준다는 것은 곧 세야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세야누스는 매우 기뻐하면서 자신이 티베리우스의 덫에 걸린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리하여 다음날, 세야누스는 당당하게 원로원에 출석하였다.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서한을 전달받은 집정관 레굴루스는 낭독을 시작했다. 이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처음에는 시시한 국정 문제를 줄줄히 늘어놓으며 시간을 끌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사이 신임 근위대장 마크로는 거액의 하사금을 미끼로 근위대를 장악해두고, 소방대장 라코는 부하들을 팔라티누스 주변에 배치하여 봉쇄, 근위대의 무력 발동에 대응하였다.[103]
이 즈음에서 레굴루스가 낭독하는 서한도 세야누스 파의 의원들을 비난하는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세야누스 본인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변해갔다. 이에 낭독이 시작될 때 세야누스 주변에서 아부와 아첨을 하던 의원들은 슬금슬금 세야누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세야누스에게 티베리우스 자신이 고발자가 되어 국가반역죄를 선고하고, 그 증거를 나열하였으며, 원로원에게 세야누스를 즉시 처형할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끝맺어졌다.
낭독 직후 원로원은 환호했으며, 황제가 될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세야누스는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자신의 이름을 3번이나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세야누스는 반항도 하지 못하고 구속되었으며 바로 그날 밤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렇듯 참으로 티베리우스다운 대처로 세야누스의 반역을 큰 장애없이 처리하기는 했지만, 세야누스의 권세가 워낙 강하고 근위대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 역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세야누스가 근위대로 반란을 일으킬 것을 경계하여, 긴급시에는 유폐되었던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풀어주고 군대를 지휘하여 세야누스에 대항하라는 지시도 있었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카프리에서 세야누스가 속주의 군단으로 도망칠 것도 생각하고 선박도 준비해 해상봉쇄작전도 염두해두고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세야누스가 믿던 근위대는 신임 근위대장 마크로가 티베리우스의 이름으로 많은 보너스를 주었기 때문에 세야누스를 돕지 않아 일이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의 여파는 상당했다.

2.2.4. 말년의 공포정치



2.2.4.1. 세야누스 일파 숙청과 복수

원로원 의원 여러분![104]

만약 내가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쓰면 좋은지, 바꾸어 말하면 이 경우 절대로 써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모든 신과 여신들께서 날마다 나 자신이 타락해가고 있다고 느끼는 것보다 더 비참하게 나를 파멸시켜 주시길!

- 타키투스, <연대기> 중 티베리우스의 서한 마지막 문구 중 일부[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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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야누스 제거 후인 티베리우스의 재위 말년은 타키투스가 공포정치, 공포시대라고 자신의 저서에 표현할 만큼, 숙청과 고발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그의 재위 말 몇년은 죽은 혈육들을 위한 대대적인 복수 국가 기강 잡기 의 연속으로 흘러갔다고 한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남아있는 친혈육들을 보호하면서 원로원 내 반대파를 가차없이 제거하는 공포정치를 더욱 강화하는데 주력했고, 이런 모습은 그가 숨을 거둔 순간까지 계속됐다. 이 결과, 말년의 티베리우스는 과거의 티베리우스와 달리 자비와 관용 따윈 신경쓰지 않았고, 본인과 황실의 반대파를 가차없이 제거하는 공포정치를 더욱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세야누스와 공모했던 세야누스파 의원들은 친족들을 모두 잃은 티베리우스에게 반역죄로 모조리 처형되거나 추방됐으며 법적 절차에 따라 모든 재산들을 압류당했다. 기록들에 의하면 말년 티베리우스의 대대적인 세야누스 일당 숙청은 그 규모가 대단했고 그 과정들이 매우 잔인했다고 하는데, 혈육을 비극 속에 잃은 티베리우스는 꾸준히 세야누스 친구들과 지지자들을 색출하고 도망간 사람들을 추적해 모조리 죽였다.
세야누스와 그 핵심측근들이 처형된 직후 세야누스의 시체는 시민들에게 모욕을 받고 티베르 강에 버려졌다. 동시에 세야누스의 동상은 모두 파괴되고 세야누스의 이름이 적힌 동전 등은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남아 있던 세야누스의 가족들도 티베리우스의 명으로 모두 반역죄인이 되어 그 씨를 남기지 않고 모두 처형되는데, 세야누스의 오른팔로 활동한 세야누스의 장남과 삼촌 블라이수스는 즉시 처형됐다. 그리고 세야누스의 남은 자녀들도 모조리 연좌죄로 처벌받았는데, 어린 차남과 장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로마에서 처녀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처녀였던 장녀는 처형 직전에 망나니들이 강간한 후에 처형했다고 타키투스가 기록한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세야누스 몰락 직후부터 수 많은 고발장이 원로원에 도착했고 매일 같이 세야누스파 처벌이 논의됐다고 한다. 이때 티베리우스도 고소장을 보냈고 자신이 로마에 있는 것처럼 서한을 계속 보내며 세야누스 잔당 사냥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억울하게 엮인 이들도 있었다. 바로 게르마니쿠스의 최측근이었던 전직 법무관 세르바이우스, 테르무스이었다. 두 사람은 세야누스에게 말 그대로 이용당했다가 이를 알고 대립한 인사들었는데, 그럼에도 어떤 이유 때문인지 티베리우스의 서한에 이름이 그대로 적혀 공모자로 공격받고 반역죄로 엮여 심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원로원은 이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주면서 이들을 구명하려고 했는데, 억울하게 죽은 친족들을 위한 복수와 세야누스에 대한 분노로 가득찬 티베리우스에겐 통하지 않았다.
따라서 세야누스파 숙청 기간동안 고발된 이들은 매일 같이 나왔고, 고발과정에서도 계속해서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고 추가폭로와 새로운 고발이 현직 법무관과 티베리우스의 이름으로 진행됐다. 이때 세르바이우스나 테르무스 같이 억울하게 엮인 이들 외의 대다수의 세야누스파 사람들은 자신의 범죄혐의가 사실임에도 원로원에서 “난 결백하다”, “세야누스와 난 친구가 아니다”라고 거짓말을 하거나, 물귀신 작전으로 다른 인사를 거론하기도 했다. 또 사형을 면하기 위해 추가폭로를 하겠다며 형량을 줄이는 딜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세야누스파에 대한 티베리우스의 대대적인 고소는 멈추지 않았고, 용서는 없었다고 한다. 이 결과, 아예 포기하고 발악을 하면서 저주를 퍼붇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중 십중팔구는 자기변호로 점철된 거짓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타키투스에 따르면, 세야누스와 우정을 나눴다고 고발당한 인사 중 예외도 단 한 명 있었다고 한다. 바로 원로원 내에서 기사계급에 속한 마르쿠스 테렌티우스였다. 이 사람은 같은 신분의 세야누스와 우정을 잠시 나누다가[106] 세야누스의 권세가 올라갈 무렵부터 손절한 케이스였는데, 결국 반대파들에게 억울하게 고발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원로원에서 최후변론의 기회를 가지게 됐는데, 마르쿠스 테렌티우스는 거짓말 대신 대담하게 “그렇소. 난 한때 세야누스와 우정을 나눴소이다”라고 시원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후 그는 담담하면서 호소에 찬 목소리로 ‘어차피 부인해도 난 죽고, 인정해도 죽습니다. 나는 고발장 내용처럼 세야누스라는 나쁜 놈의 동료인것도 맞고 이 사람이랑 더 친해지고 싶어서 한때나마 그랬소이다’라고 말한 뒤, 티베리우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도 나쁜놈인 세야누스를 그들의 가족 구성원처럼 대우하고 사위 취급했다며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를 자꾸 믿고 그에게 집정관 자리도 주고 하니 자신은 다른 동료들처럼 “카이사르[107]께서 그를 부재 중인 당신의 국정 담당 대리자로 여기시니까, 세야누스가 하는 일은 모두 카이사르께서 지시한 내용이니까, 나는 원로원 안에서 카이사르를 존경하는 뜻에서 ‘세야누스에게도 뭐라도 해야 하는구나’하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신 카이사르 당신에게 저를 비롯한 원로원 여러분 모두는 카이사르를 위한 보호 의무와 복종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세야누스가 당신(티베리우스)에게 우리의 생사여탈권과 권력을 (세야누스가)부여받은 것을 반대도 못하고,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와 우정을 나눠야 하는 처지가 됐습니다”고 자신과 원로원 내 다른 동료들의 심정을 말했다.
또 최후 진술 마지막 연설 부분에서는 “카이사르께서는 본인이 한 잘못은 왜 용서하시고 처지가 비슷한 저는 반대로 처벌받아야 합니까? 또 세야누스가 몰락하기 전 그 관계를 끊은 나와 원로원 동료들까지 당신과 달리 유죄를 받아야 합니까?”라고 변호한 뒤 “원로원 여러분도 알듯이 나는 16년동안 세야누스와 우정을 나누려고 시도했지만 거기까지였소이다. 그런데 고발한 인간들과 원로원 여러분 중 대부분은 대놓고 세야누스의 해방노예와 집안 문지기들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하고 우정을 가졌소이다. 그런데 누가 올바른 상황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그러겠소이까. 나도 여러분들처럼 그때 국가 전복 음모와 임페라토르[108] 암살계획은 처벌받아야 하는 나쁜 행동이고 반역이라고 당연히 생각했고 우리는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또 저는 모두 알듯이 이미 세야누스와는 완전히 갈라선 상태였습니다. 그건 카이사르 당신께서도 잘 아시고, 원로원 여러분들도 다들 알지 않습니까.”라고 최후진술을 했다고 한다. 따라서 원로원은 이런 테렌티우스의 배짱에 감격했고, 형량을 사형이나 유형이 나오지 않게 결론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 역시 이 진술을 서한으로 보고받은 뒤, 이 사람의 용기에 감동했는지 몰라도 테렌티우스가 세야누스와 친구 이상이고 반역죄 공범이라는 고소장을 파기해주고, 고발한 사람들을 역으로 기소해 죄를 묻고 사형, 유배형 등에 처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세야누스의 뒤처리를 하며 티베리우스가 경악할 일이 일어나는데, 세야누스의 전처 아피카타가 자살을 강요당해 죽으면서 유서로 티베리우스에게 편지를 써 드루수스 독살의 진상을 알린 것이다. 이에 분노한 티베리우스는 31년 아직 살아있던 며느리 리빌라에게 자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카시우스 디오 등의 기록에 따르면 티베리우스가 며느리 리빌라를 그냥 자살시키지 않고, 제수씨이자 리빌라의 어머니 안토니아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때 딸 때문에 사위, 큰며느리, 첫째 손자, 둘째 손자 등 혈육들을 모조리 잃은 안토니아는 살려달라고 사정하는 딸을 방에 유폐시킨 뒤 아무 것도 주지 못하게 해서 굶겨 죽였다고 한다.[109]
그리고 이 무렵, 아그리피나도 큰 아들 네로 카이사르의 뒤를 따라 사망하는데, 사인은 역시 아사.[110] 이러다보니 그가 '폭군'이라는 인식은 더욱 강해졌고, 그의 말년에는 모두가 저 더러운 늙은이 왜 이렇게 안 죽어라고 한마음으로 생각했을 지경이었다.[111]
티베리우스의 대대적인 세야누스파 사냥은 이후에도 계속됐는데, 이것은 세야누스의 농간으로 거의 모든 혈육들을 잃은 늙은 황제의 집요한 복수로 잔혹하게 흘러갔다. 그 예로 연좌죄가 보편화되지 않은 로마에서 옛 세야누스파 인사들의 어머니, 누이들까지 “죄인이 죽었는데 운다”는 이유로 자살을 강요당해 죽었고, 세야누스 파의 일가 여성들은 남성들만 대상이 되는 국가 전복혐의 대신 그들이 흘린 눈물과 비통함을 이유로 티베리우스에게 비난받고 처형됐다. 그래서 세야누스파 중 한명인 푸피우스 게미누스의 늙은 모친 비티아는 죽은 아들을 위해 눈물을 이유로 국가 전복 혐의와 비슷한 방식으로 탄핵돼 바로 처형됐고, 노예들과 해방노예 가족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같은 해인 33년, 게르마니쿠스의 둘째 아들인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황궁 지하실에서 석방되지 못한 채 결국 생을 마감했다. 간신히 세야누스의 마수를 피하나 싶었던 그는 반역죄 혐의와 난잡한 동성애 범죄라는 억울한 누명을 벗었지만, 황실의 지하에 갇힌 채로 침대를 뜯어먹을 지경까지 굶주리다 아사했다. 이때 이야기에 따르면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를 몰락시킬 무렵, 세야누스를 너무 믿은 것을 후회하면서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석방시켜려고 했고, 로마와 이탈리아에서는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다행히 석방된 뒤 카프레아이로 향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하지만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황궁 지하실에 여전히 강금돼 있었고, 이런 혼란한 상황 중에 음식은 제공되지 않았다. 또 티베리우스는 카프레아이 별궁에서 후계자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그가 너무 오래 지하실에 투옥된 탓에 생사를 확신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던 간에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황궁 지하실에서 굶어 죽은 채 시신이 되어 나왔는데, 이때 그의 생존을 기대한 원로원은 크게 슬퍼했고, 그가 투옥 중 작성한 일기장은 원로원을 큰 슬픔과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다.
기록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후계자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죽기 9일 전 이미 그의 생존을 바란 탓에 그가 사망한 이후 굉장히 슬퍼하고 분노했다. 따라서 후계자의 생존을 몹시 바랬던 황제는 원로원에 보낸 편지들을 통해 매일 같이 원로원의 행태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면서, 그와 자신의 삶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언급했다. 또 티베리우스는 편지들을 통해 자신이 세야누스 같은 인간들 때문에 본인의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이 파탄남을 지적하기도 했고, 옛 세야누스파들의 발언이나 원로원의 행태를 그대로 적고 이 내용이 담긴 서한을 원로원 회의장에서 공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이 자신을 저주하고 복수가 나쁜 일임을 알고 있어도 억울하게 죽은 혈육들을 위해 자신이 복수해 모조리 죽이겠다고 밝혔다. 또 어느날에는 그가 어떤 이유로 인해 그 많던 친혈육을 잃었는지에 대한 과정을 분노가 담긴 문구로 지적하고, 그 결과을 언급한 뒤 이를 원로원에 대한 비난으로 귀결해 발표했다. 아울러 황제는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성추문을 일으킨 범죄자로 몰린 것에 대한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정신착란자 행세를 하다가 반역을 일으켰다고 모함한 인사들과 원로원은 똑같다고 강하게 비난했다[112]. 그런데 티베리우스의 이런 행동은 간혹 죽은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성추문으로 인해 이름을 더럽힌 사실까지 들추어 죽은 친혈육까지 비난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하필 이 시기에 티베리우스의 서한장을 통해 접수된 비난과 고발 내용을 담당한 법무관들은 황제의 오락가락한 비난과 고소장에 대해 상당히 곤욕을 치뤘는데, 이 사건을 전담한 법무관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경우에는 이 고민을 하다가 원로원과 이 문제를 상의한 뒤, 결국 황제의 요청에 따라 세야누스파로 지목된 이들을 '티베리우스가 원하는대로' 반역죄로 고발해 조사를 집행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드루수스 카이사르 사후, 티베리우스 시대는 세야누스 몰락 직후 상황 못지 않게 친족들을 위한 황제의 보복조치로 인해 로마와 이탈리아에서는 과거 마리우스술라의 내전을 연상시킬 정도로 숙청이 매일같이 벌어졌고, 원로원 전체는 매일같이 공포분위기가 조성됐다. 세야누스의 정체를 안 이후, 티베리우스는 예전과 달리 자신과 혈육들을 비난한 인사나 음모를 꾸몄다고 이야기가 나오면 관용 대신 무조건 잡아서 제거했고, 자신과 친족들에 대한 비방은 곧 비방자의 처절한 몰락과 숙청으로 결론났다.
티베리우스는 이 당시 숙청 대상자들을 원로원에 이를 통보할때 근위대장 마크로 등을 보내 서한장을 전달한 뒤, 집정관이나 원로원 인사들이 서한장을 회의장에서 읽게 했다. 이때 서한장에는 그 인사들의 실명을 공개됐고 황제는 정중하게 말하는 듯 하면서도 글귀 하나하나에서는 분노와 복수심이 가득찬 어조가 느껴졌다. 또 그는 비방자들에게 “죽일 놈” 등의 원색적인 비난 용어를 사용해 그들 스스로 공포감을 느끼게 했고, 이 서한의 끝은 늘 로마법 절차대로 본인 또는 법무관의 고소, 고발이었다. 아울러 황제가 서한장으로 알린 모든 고소 사건은 원로원 심의 후 재판을 거치는 합법적 방법으로 진행되고 형은 추방형이나 사형으로 결론나고 이 조치는 신속하게 집행됐다. 그래서 원로원 의원들은 "카이사르여, 그 분노는 잘 알지만.." 등등의 발언들을 조심히 내뱉으며 티베리우스의 날선 고소장에 자신들의 이름이 오르지 않도록 주의했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티베리우스가 보낸 이런 서한들은 프라이토리아니를 앞세운 가운데 항상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공개됐고, 황제는 이런 자신의 서한에 대해 그들의 입장을 명확히 요구해 이를 보고받았기 때문에 공포분위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티베리우스의 재위 말기 동안, 티베리우스는 일가 친인척과 자신을 향한 비난과 음모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했다.죽은 친혈육들 외의 일에는 보통 무관심했는데, 반역 이야기에도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그래서 타키투스에 따르면, 황제는 자신의 외삼촌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리비아 드루실라의 남동생)가 자신의 친구 베스쿨라리우스에게 비난받고 그의 표적이 되자 굉장히 분노했다고 한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베스쿨라리우스가 카프리섬에서 같이 살던 친구임에도 그를 직접 고발한 뒤 원로원에서의 심리를 통해 반역죄로 처형했다[113]. 또 그는 직계친인척에 대해서는 상당히 과보호하면서도 이중적으로 변했다. 그래서인지 후계자 네로 카이사르의 아내였던 친손녀 율리아 리비아의 재혼에는 무관심했고, 침울해한 반면[114][115] 동생의 손자(게르마니쿠스의 아들), 손녀(게르마니쿠스의 딸) 중 가이우스, 율리아 리빌라, 율리아 드루실라 결혼에는 집착을 보일 정도로 신경을 쓴 뒤 후보자들의 인간됨까지 살핀 끝에 손수 배필을 정해 결혼적령기가 되자마자 결혼시켰다. 이 외에도 티베리우스는 조카 게르마니쿠스 사망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피소 부부를 이때부터 굉장히 증오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피소의 아내 플랑키나가 대 아그리피나가 죽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죽었을 때, 그녀가 악행을 저지른 끝에 파멸해 뒤졌다고 표현까지 하며 좋아했다. 반면 대(大) 아그리피나 사망 소식에는 일절 애도의 표현은 없었고 끝까지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피나가 문란한 사생활로 문제를 일으켰던 문제 있는 귀부인이라는 헛소문을 전혀 막지 않았는데, 이때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 보낸 서한을 통해 아그리피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정확한 문장으로 정리해 "아그리피나가 음탕하고 누구누구의 정부였다는 말이 왜 나왔겠느냐"라고 대놓고 비꼬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자신과 종손자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를 씹어 댄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해 반역죄로 고발한 뒤 추방, 사형 판결 후 처벌했고, 과거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성추문을 진실로 왜곡한 인사들과 세야누스파에 속한 도망자들을 끝까지 추적해 그 가족의 씨를 말렸다. 이런 이유 때문에 타키투스에 따르면 친 티베리우스파, 반 티베리우스파에 상관없이 황실과 황제에 대한 음모는 곧 처벌이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동생 대 드루수스의 최측근이자 자신의 참모였던 전직 법무관 섹스투스 베스틸리우스[116]를 황제의 식탁에서 추방시킨 뒤[117] 그를 처참하게 몰락시킨 뒤 죽였다. 기록에 따르면, 베스틸리우스는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칼리굴라)를 비꼬며, 섬에서 방탕하게 지낸다는 풍자시를 지었는데, 이는 티베리우스의 역린을 건들고 말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카이사르(티베리우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풍자시로 만든 이유를 직접 언급한 서한을 보내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는데, 고령의 베스틸리우스는 자신이 총애를 잃었다고 판단해 혈관을 잘라 자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이런 그를 말린 뒤 탄원서를 통해 “베스틸리우스가 농담으로 한 풍자시인데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는데, 티베리우스는 냉혹한 답변서를 보내며 "(풍자시가)거짓말이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그래서 베르틸리우스는 체념하고 스스로 혈관을 풀어버리는 방식으로 죽었다. 그 외에도 가이우스 안니우스 폴리오의 아들을 비롯해 유니우스 실라누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등 명문귀족 원로원 의원들과 저명한 연설가 등이 정적들의 모함 등으로 애꿏은 피해를 입어 죽임을 당했는데 이들 중 몇명은 티베리우스 측근과 친구들의 탄원서와 끊임없는 설득 끝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2.2.4.2. 근위대장 마크로

시간이 흘러 세야누스가 몰락한 이후 2년이 지난 33년, 당시 로마 사람들은 “원흉 세야누스가 죽고 복수도 끝난 만큼 티베리우스가 로마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런 기대는 원로원도 가지고 있었는데 원로원에서는 티베리우스가 동생 드루수스의 손녀들의 배필을 선택하고 서한을 보내 가볍게 추천사를 덧붙이며 기분이 좋아보이자, 로마 귀환 요청의 뜻을 간곡히 전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마모될대로 마모된 티베리우스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서한을 통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무작정 "로마로 돌아와달라"고 요구하는 원로원의 행동을 대놓고 지적했다. 또 티베리우스를 몹시 미워한 타키투스의 표현에 따르면, 이때 그는 특유의 아주 애매한 말로 수도를 비우고 있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 나서 좀 더 중대한 문제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고 한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게 자신이 로마에 오지 못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고 한다.

저는 국가를 위해 몸을 (암살)위험에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원로원에 등원할 때에는 언제나 친위대장 나이비우스 코르두스 수토리우스 마크로와 소수의 프라이토리아니 부관, 백인대장을 동반할 수 있도록 해주길 요청합니다."

- 타키투스, <연대기>

이에 당시 원로원과 두 집정관은 황제의 요청에 따라 황제를 경호하는 프라이토리아니 경호 인력의 위계, 인원수를 따로 규정하지 않는 포괄적 결의안을 통과시켜줬다. 하지만 누구보다 믿었던 세야누스에게 진짜 암살될 뻔하고 혈육들이 비극 속에 희생된 경험을 한 티베리우스는 여전히 불안한 로마로 돌아갈 생각도 안 했다고 한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살아있는 동안 수도의 성벽 근처에도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고, 회의장 근처에는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고리대 사건'이 터지면서 티베리우스는 더더욱 위기 의식을 느끼고 거취의 불안함을 재확인했다.
티베리우스가 수도 귀환을 거부하면서 벌어진 고리대 이야기에 대해 타키투스는 원로원이 티베리우스의 요구안에 따라 황제의 호위인원과 관련된 포괄적 결의안 통과 무렵에 폭발해 일이 커졌다고 한다. 사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와 루키우스 술라가 집정관이 된 해(서기 33년)'에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에서 이전까지 사채업자들이 이자의 원금을 자기들이 정하고, 이탈리아 본토 내에서 벌어진 금융대부와 <종신독재관 카이사르 법> 위반 소식을 처음 보고받았다.
사실 티베리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지나친 고리대나 롤리우스 같이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증식한 가렴주구들을 매우 혐오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말년부터 티베리우스는 혐오, 비난 수준을 넘어 고리대의 경우, 자비없이 반역죄 수준으로 모조리 죽였고 연좌죄까지 적용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와 로마에서 금융대부를 하는 기사계급과 부자들이 티베리우스를 대놓고 무시하고, 직접적으로 그에게 도전했기 때문이다. 맨 처음 고리대를 통한 이자놀이 문제가 발생했을 당시, 황제는 같은 일이 터질 때마다 큰 문제를 발생시킨 이 소식에 굉장히 분노했음에도 이전 로마의 권력자들과 마찬가지로 법적 테두리 내에서 대응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를 진짜 미워한 타키투스가 오히려 티베리우스 편을 들 정도로,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에서의 고리대는 금융대부와 토지 소유 문제가 결합된 로마인들의 생존문제와 직결된 탓에 그 불행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고 위험한 일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처음 보고를 받을 당시, 소송을 법무관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에게 맡기면서 원로원에게 심리를 담당케하고 과거 12동판법을 통한 이자 제한 조치와 기원전 347년부터 호민관들이 입법한 고리대 제한법령,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법적 할아버지가 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리대 제한 법령 등의 전례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그럼에도 로마 부자들은 섬에만 틀어박혀 있는 티베리우스를 무시했는지, 아니면 티베리우스가 해봤자 얼마나 심하게 하겠냐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간 큰 행동을 대 놓고 했다. 그들은 법적 이자를 넘는 이자놀이를 꾀한 것을 넘어, 자신들의 이익을 지나치게 추구한 나머지 그 선을 넘는 행동을 계속했다. 이들은 수백년째 그들과 자신들의 조상들이 이전까지 법을 어겨가며 마음대로 이자를 받고 편법적으로 재산을 불리는 것을 왜 티베리우스가 개입하냐고 불만을 드러냈다. 그리고 황제와 민회 의결을 조롱하는 듯 간악한 돈놀이로 로마와 이탈리아에 화폐부족 문제를 발생시키면서 맞대응했다[118].
당시 고리대금업자들이 한 방식은 오래되고 로마를 오랫동안 괴롭힌 그 방식이었고, 필연적으로 폭동과 항의는 로마 최고권력자와 원로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의 간교한 계책으로 인해 로마와 본국에서는 통화까지 부족해졌는데, 이는 모든 부채가 일시에 회수된 이유와 많은 현금이 황제 개인금고와 국고에 쌓여있던 상황 때문이었다고 해도 문제를 초래했다. 그래서 이 일은 국가 기강 잡기에 여념이 없던 티베리우스에게 명분을 제공하고 만다.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일단 원로원을 통해 즉각 대응에 나서며, 원로원을 앞세워 사전에 각 채권자들에게 "대부 총액의 3분의 2를 이탈리아의 토지에 투자하라"고 명했고, "채무자는 같은 비율만큼의 부채를 곧 현금으로 갚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시 옛법을 들춰내는 방식의 자발적인 시정요구 방법을 사용했다. 즉, 시간을 주면서 고리대금업자들에게 마지막 경고를 날린건데 이런 정중한 경고에도 고리대금업자들은 티베리우스가 앞세운 원로원의 결의안을 비웃엇고, 한술 더 뜬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로마와 이탈리아 내 채권자들 대부분은 원로원을 통해 발표된 티베리우스와 로마정부 명령을 무시하면서 물러서지 않고, 법적 테투리 이상을 넘어가면서 이자놀이를 계속했다. 또 채무자들에게 전액을 다 갚을 것을 요구하고, 채무자들의 신용 실추를 수치로 여기게끔 사회분위기를 조성했다.
그 결과, 수도 로마의 경우 원로원과 법무관 사무소들은 채권자들의 행패와 협박 이상의 행동에 분노한 채무자들이 몰렸고, 이들의 항의로 몸살을 앓게 됐다. 그런데 이때도 티베리우스는 어떤 상황이 전개될 지 뻔히 알았다는 듯 행동할 뿐 최후의 수단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우선적으로 개인 국고를 통해 1억 세스테르티우스가 훨씬 넘는 거액을 직접 풀어 황제 개인이 무상으로 고리대 피해자들을 돕고, 일반 로마민중들에게 무상으로 3년의 기한을 정해 돈을 빌려주도록 했다. 그래서 로마민중들은 평소 돈을 풀지 않은 티베리우스의 이런 시혜책에 상당히 놀랐는데, 많은 이들은 은둔정치를 해도 놀라울 정도로 발 빠른 황제의 대응방식과 시혜책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원조에도 사태는 빨리 해결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원로원이 황제에게 받은 1억 세스테르티우스의 기금을 각 은행에 할당하고 3년간 무이자로 대출한 조치 외에는 굉장히 무력하게 행동했고, 토지 매입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의결 사항과 달리 일을 신속하게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는 수백년째 로마를 괴롭힌 고리대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던 로마 권력자 중 한명이었고 애당초 이런 부류의 비열한 행동을 진짜 혐오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서둘러 이 문제를 해결짓고 싶어했고, 가이드라인까지 마련해 일일이 원로원에게 이를 서한으로 해결토록 해줬다. 반면, 당시 원로원과 로마 행정관료들은 "황제가 섬에 틀어박혀 있고, 보고도 늦을텐데 천천히 해도 된다"하는 느긋하고 급한 일이 아니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이는 타키투스가 자신의 저서에서 고리대 문제가 더 빨리 해결되지 못한 이유가 됐다고 대놓고 언급할 정도로 사태를 키우고 말았고, 시간이 지체될 수록 티베리우스의 심기만 건들게 되면서 공포시대를 초래하게 됐다고 한다.
따라서 참다못한 티베리우스는 더이상 원로원과 로마 관료들에게 고리대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도록 기회를 주지 않았으며, 자신이 얼마나 진지하고 신속히 이 문제를 해결할 지 몸소 보여줬다. 이는 그가 즉위 직후, 원로원이 무기력하게 행동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면서 자신에게 그 책임을 떠맡기는 행태를 경멸해 대놓고 "노예가 준비된 사람들"이라고 원로원에게 일갈을 했던 일화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결국 티베리우스의 서한이 원로원에 당도한 직후부터 다시 로마에는 피바람이 몰아쳤다. 오랫동안 쌓인 원로원의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행동들은 고리대 문제 등으로 정신없던 늙은 황제를 자극한 만큼, 황제에게 시범케이스로 지목된 사람은 반역죄와 연좌죄를 통한 숙청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던 콘시디우스 프로쿨루스와 그의 누이 산키아는 반역죄로 처형됐다. 타키투스는 이때 일에 대해 머리 끝까지 열이 받은 황제가 손수 콘시디우스 프로쿨루스를 반역죄로 기소하는 것을 시작으로 고리대 및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고리대 문제에 직접 개입했다고 한다. 따라서 콘시디우스 프로쿨루스는 불길한 예감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생일을 축하다가 그 자리에서 원로원으로 끌려가 유죄를 선고받고 살해됐다. 이후, 티베리우스의 조치는 전방위적으로 시작됐고, 반역죄로 기소된 프로쿨루스의 누이 산키아가 2번 타자로 고발돼 물과 불을 제공받지 못하는 조치와 고문를 받고 최후에는 반역죄로 잔혹하게 숙청됐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원로원은 뒤늦게나마 티베리우스가 고리대 문제는 물론이고 자신들의 무기력한 행동에 대해 가만두지 않을건지 직감했다고 한다. 따라서 콘시디우스 프로쿨루스 남매가 고리대 혐의를 통한 반역죄 기소 후 숙청된 이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본국 이탈리아 내에서 불법적 고리대 사업을 한다면 황제의 지시 후 법무관들이 고발하는 방법으로 기소돼, 국가 전복 혐의 수준에 버금가는 형량을 선고받고 모조리 처형됐다[119]. 다행인 것은 이 당시 원로원 의원들의 경우에는 고리대에 개입해 이자놀이를 하는 불법행위를 하지 않았고, 티베리우스의 심기를 건들지 않는데 주력해 피해가 적었다는 건데 그래도 다시 시작된 황제의 차가운 서한과 고소, 고발은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낭독되고 그 분위기는 살벌했다.
특히, 이때 티베리우스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이탈리아에 거주하면서 편법적 고리대 사업을 하던 수 많은 기사계급 사람들은 이 혐의로 고발될 경우, 모두 처형되고 그들의 모든 재산은 압류됐는데 여기에는 눈감아준 인사들도 전직 법무관 등 고위직 출신이거나 지방 유력자라고 해도 죄다 포함돼 처벌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종국적으로 원로원 역시 온전히 넘어가기 힘들게 됐는데, 티베리우스의 대대적인 고소장에는 소방대장 라코의 며느리 폼페이아 마크리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폼페이아 마크리나 일가 사건은 이 케이스의 전형이었다고 하는데, 일단 이자놀이를 하다가 기소된 폼페이아의 경우에는 다행히 추방형에 처해졌다. 반면 이를 방치했던 그녀의 오빠, 남동생 등 그 일가는 전직 법무관까지 있던 최상류층이었음에도 그녀와 달리 명예와 목숨을 모두 잃게 됐다. 따라서 폼페이아 마크리나 사건으로 그녀의 친정 식구들은 죄다 공직에서 쫓겨난 뒤 단죄됐고 그들은 반역죄로 기소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유죄판결을 받고 모조리 처형됐다. 또 이 귀부인의 시댁 역시 연좌죄로 인해 그녀의 친정 식구들처럼 풍비박산이 났는데, 그녀의 남편 아르콜리쿠스와 시아버지 라코는 상급 기사계급인데다 엄청난 지방 유력자임에도, 또 라코는 세야누스 처단 당시 소방대장으로 공을 세웠다고 해도 티베리우스에게 면죄부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라코와 그의 아들은 폼페이아 마크리나가 기소되고 티베리우스의 조치가 단행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아울러 티베리우스 또는 고발인들에게 기소 내지 고발돼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주변인들도 혀도 내두를 방식으로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거나 비참하게 몰락한 뒤 그 재산이 몰수됐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은 대역죄인들을 다루듯 처형 후 티베리스 강에 던져지고 감시인들이 그 주변을 그 시체가 썩을 때까지 지키면서 시체를 몰래 회수해가지 못하게 감시했다. 그래서 퀸투스 폼포니우스 같은 사람들은 티베리우스에게 찍힌 동생 푸블리우스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첫 희생양인 프로쿨루스 남매 중 산키아를 고발하면서 다른 문제로 자신과 그 가족이 숙청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여기에 더해 고리대 사건은 그 규모가 커지면서 다시 세야누스파 잔당 중 감옥에 가둬진 죄수들에게 그 불똥이 튀게 됐으며, 감옥 안에 있던 죄수들이 모두 참수형을 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티베리우스가 개인 비리나 일탈행위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로마와 이탈리아 내에서의 고리대 문제와 불법 행위들은 놀라울 정도로 근절됐다. 따라서 이런 사회분위기는 나름 로마에 공포감을 조성했어도 꾀나 긍정적이었는데, 이런 경우가 대부분 그렇듯 여기에는 애꿏은 피해자도 있었다. 바로 히스파니아 굴지의 사업가 섹스투스 마리우스가 대표적인데, 그는 친족과의 성추문(그가 딸을 범했다는 의심)을 이유로 고발됐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예전의 그처럼 냉철하게 이를 재조사하지 않고, 절차에 따라 인간보다 못한 범죄자인 그를 처형하라고 명했다. 그래서 마리우스의 막대한 재산과 그가 소유한 수많은 금광들이 모조리 몰수됐고, 마리우스를 비롯한 사건의 관련자들은 모조리 절벽에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처형됐다.이런 이유로 인해 모든 로마인들은 죄없는 마리우스가 명예도 잃고 처형된 뒤 재산이 몰수됨을 추모했다.
아울러 이때부터 로마와 이탈리아에서는 세야누스 처단에 앞장선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마크로가 라코 숙청 직후 문자 그대로 세야누스처럼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따라서 타키투스는 당대 로마인, 특히 원로원 인사들의 발언이나 일화를 적으면서 티베리우스의 근위대장 마크로가 벌인 대대적인 기소와 끊임없는 원로원 견제를 지적하고 마크로가 티베리우스의 통제를 받았음에도 했던 일들이 세야누스 이상으로 악랄하고 음험했음을 기록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마크로의 원로원 견제 및 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세력 숙청 작업은 티베리우스가 서한으로 명령해 내린 것이 아닌 마크로의 판단 아래 이뤄진 조치들이었고 지극히 티베리우스의 실질적 후계자 가이우스의 권력 안정화를 위한 사전작업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원로원은 이런 마크로의 행동에 대해 “마크로 저놈이 세야누스보다 더 악랄하게 분위기를 몰아간다”며 분노했는데, 사실 마크로는 세야누스와 달리 황실 전체를 사적인 이유로 숙청대상으로 올리지 않고 나름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입장에서는 꽤나 일처리를 잘했다. 다시 말하면, 마크로는 이 시기동안 전적으로 티베리우스 사후 후계자들을 위한 조치로 세간에 욕을 먹는 일들을 대신 처리했기에, 이 문제로 골몰하던 티베리우스에게 신임을 받았을지언정 질책을 받거나 공격당하지 않았다. 또 마크로가 사적 감정으로 몇명을 기소해 처벌했어도 나름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다고 한다. 바로 네로의 친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기소가 대표적인데, 이 사람은 진짜 악랄했고 문제도 많았다. 네로의 친아버지는 마크로에게 간통 및 국고황령 사유로 고발됐다. 그런데 이 사람의 경우에는 진짜 악랄했고 문제도 어떤 사람보다 많았지만,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거액을 들여 원로원 최후 변호를 철저하게 준비했다고한다. 그러나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국고횡령, 거액의 사기, 폭행, 협박, 근친상간, 간통 등의 각종 혐의로 기소된 이후, 그렇게 노력했어도 뚜렷한 혐의와 증거들로 인해 모두 유죄로 결론났다. 특히 이 사람은 티베리우스에게 단단히 문제 많은 범죄자로 찍혔는데, 늙은 황제는 그의 어머니 대 안토니아가 황족이고, 아버지 루키우스가 젊은 시절 자신과 함께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싸운 동료이자 오랜 친구였다고 해도 용서해주지 않고 손수 사형을 언도했다. 따라서 네로의 친아버지는 티베리우스에게 직접 사형 판결을 받고 지하 감옥에서 처형을 기다리다가 죽을 상황에 몰렸는데, 티베리우스가 노환으로 사망하면서 사형이 중지됐고 이후 가이우스(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 말년 기소된 이들에게 사면령을 언도하면서 죽기 전 가까스로 석방됐다.

2.2.5. 사망


티베리우스의 이런 대대적인 복수혈전과 공포정치 외에도, 그는 후계자 선정과 교육에 열을 올렸다. 이 당시 율리우스 가문 내에서 그의 남은 후계자 후보는 남자혈육 중 본가를 합쳐도 3명 정도였는데, 그 중 클라우디우스를 제외하고 가장 유력한 황족은 티베리우스의 친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와, 게르마니쿠스의 셋째 아들인 가이우스(칼리굴라)였다. 이때 티베리우스의 손자인 게멜루스는 너무 어렸던데다, 티베리우스가 죽은 해인 37년이 돼서야 티베리우스의 지시로 카프레아이 별궁으로 건너와 제왕교육을 받게 됐다. 반면 게르마니쿠스의 살아남은 아들 칼리굴라는 모계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아 정통성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세야누스가 몰락하기 전에 카프레아이 별궁으로 건너가 티베리우스 치근거리에서 지극히 ‘티베리우스적인 방식’으로 후계 수업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120][121]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확실히 친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에게 애정을 품고 있었고 18살이 된 혈육에게 제위를 넘기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생각과 달리 소 드루수스의 아들은 전형적인 10대 소년에 불과했고 제위를 물려받기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들인 동생 대(大) 드루수스의 아들과 손자가 건재한 상태인 탓에 유리하진 않았다고 한다. 이중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동생의 손자 가이우스는 로마인들에게 외모와 혈통, 혈기 왕성한 청년인 탓에 인기가 많고 기대도 높았다. 그런데 가이우스 칼리굴라는 두 형을 비롯한 연이은 혈육들의 죽음 이후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숨기면서 티베리우스의 밑에서 속마음을 숨기는 법을 배웠고, 카프레아이로 건너간 이후에는 격한 감정과 분노를 통제하면서 종조부의 여러 정치술들을 연마하고 있었다. 이는 티베리우스 역시 잘 알고 있었는데, 고령의 황제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젊은 가이우스가 티베리우스 밑에서 '제2의 세야누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힘을 키우던 마크로 세력에 대해 지극히 자신의 방식대로 접근해 견제하고 있는 부분이었다고 한다. 이 당시 칼리굴라는 아내 유니아 클라우디아가 출산 중 사망해 홀로 된 상태였는데, 근위대장 마크로가 자신의 여러 호의를 이용해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아내 엔니아를 이용해 가이우스를 유혹하고 결혼약속을 받아 내게 하는 술수[122]를 본인이 역이용해 티베리우스 후계자로 자신을 확정짓는데 활용 중이었다. 이런 가이우스의 행동은 훗날 그가 마크로의 아내 엔니아를 꼬셔 결혼약속을 하고 난 뒤, 티베리우스를 배게로 질식사 시킨 다음 제위에 올랐다는 막장 소문의 배경이 된다. 그리고 타키투스에 따르면 이런 가이우스의 고단수 행동[123]은 후계자 문제로 고민하던, 그의 종조부 티베리우스에게 반감을 사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타키투스 생전 소문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떠보는 투로 수수께끼 같으면서도 그 뜻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이 이야기에 대해 "예를 들면"이라는 문구를 먼저 거론하면서 그 소문을 기술했는데 이때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처럼 권력욕을 키우던 마크로에게 "자네는 솟아오르는 태양에 마음을 빼앗겨 지는 태양을 버리고 있어"라고 말했고, 같이 있던 25살의 후계자 칼리굴라 역시 자리에 있자 종신독재관 술라를 거론해 그의 속마음을 은근히 떠보았다고 한다. 또 타키투스는 소문에서 전해진 카프레아이 이야기에 대해 말하면서 어느날에는 티베리우스가 술라 이야기를 꺼냈고, 이를 경청하고 있던 가이우스가 루키우스 술라 이야기가 나오자 비웃듯 미소를 띠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티베리우스는 이런 종손자에게 "가이우스는 술라의 악덕은 다 갖추어도 미덕은 하나도 지니지 못할 것이야."라고 말한 뒤 눈에 눈물을 머금으면서 같이 있던 친손자 게멜루스를 꼭 껴안고 가이우스의 음험해보이는 얼굴을 보면서 "네(칼리굴라)가 이 애(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죽일 거야. 그리고 누군가가 너도 죽이겠지."라고 예언했다고 한다[124].
후계자 선정에 고민하면서도 쉽게 결론을 못 내리는 상황에서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아들인 조카 클라우디우스를 차기 황제로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클라우디우스가 온화한 성격에 46세로 나이가 적당히 지긋하면서도 아우구스투스와 자신의 친혈육이라는 점, 그리고 문학에 취미가 많고 역사가인데다 여타 다른 취미들도 고상해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과 동시에 그는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를 하기에는 지극히 온화한 성품인데다, 그의 의지가 박약한 것[125]을 이유로 걱정했다고 한다. 아울러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조카가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임에도 법적으로는 율리우스 가 사람이 아닌 카이사르 가 남성인 것도 걱정했다고 한다. 이런 탓에 세간에게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에 멀쩡한 성인 남성 한 명과 곧 성인이 될 청년이 있는데, 본가 내 카이사르 가 혈육을 후계자로 삼아 아우구스투스의 유덕과 가문의 이름에 비웃음과 모욕 대상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를 들을 것을 매우 신경썼다고 한다. 따라서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는 즉위 당시에는 훌륭한 후계자들이 있던 상황과 반대로 이런 저런 복잡한 사정을 이유로 후계자 선정에 대해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본인 스스로도 확실히 생존시 평판보다 사후에 로마인들에게 나올 평가를 더 신경쓰고 있다고 서술했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는 이런 태도와 별개로 30살부터 언제나 의술을 비꼬고, 자기 자신의 판단 아래 남의 충고를 무시한 채 건강을 관리한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건강은 갈수록 나빠져 갔고, 고통을 참으면서 기력이 정정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런 황제의 건강 악화 중 수도 로마에서는 티베리우스 사후 벌어질 권력 교체를 노린 일들이 마크로 주도 아래 연이어 터졌다. 먼저 그 시작은 데키무스 라일리우스 발부스가 푸블리우스 비텔리우스의 전 아내 아쿠티아를 반역죄로 고발한 뒤 유죄를 받아낸 일이었는데, 이때 호민관 유니우스 오토는 원로원에서 "고발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주자"는 동의안을 거부해 발부스와 오토 간의 대결이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오토가 파멸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울러 로마내에서 난잡하고 음란한 행동으로 이름을 떨친, 귀부인 알부킬라가 자신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의 아버지), 루키우스 아룬티우스를 비롯한 다른 2명의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불경죄로 고발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런 일들에는 임페라토르 티베리우스의 서한도 없는, 지극히 근위대장 마크로 주도로 모든 심문과 노예들에 대한 고문이 이뤄졌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마크로가 노쇠한 티베리우스가 곧 죽을 것을 알고, 자신이 아룬티우스에 대해 품고 있던 원한을 풀기 위해 일련의 죄를 황제 몰래 날조했다고 판단했다. 또 원로원과 로마사람들은 그동안 티베리우스 밑에서 온갖 해로운 행동을 배운 칼리굴라가 세야누스 이상의 끔찍한 근위대장 마크로의 지도를 받는 것을 걱정했는데, 이는 피고로 고소된 아룬티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헤노바르부스, 마르수스 등이 자기 변호를 구상하는 것과 달리 자살을 결심하고, 자신의 결정을 말리려는 친구에게 세야누스와 마크로를 비교하는 말을 진지하게 한 뒤 "티베리우스가 숨을 거둔다면 어린애에서 갓 벗어나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티베리우스, 마크로에게 온갖 해독을 다 배우고 있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더 비참하게 예속될 것이네. 나는 이런 상황을 걱정한다네"이라고 말하고 자신의 혈관을 자르고 죽었다.
이렇게 마크로가 세야누스처럼 온갖 활개를 치기 시작하고, 칼리굴라는 어떻게든 그 뒤를 잇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별궁에서는 티베리우스의 건강과 체력이 눈에 띨 정도로 쇠약해지고 있었다[126].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후계자를 확실히 정하는 것을 망설인 티베리우스는 결국 칼리굴라를 차기황제로 지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그가 그나마 게멜루스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유언장에 게멜루스를 칼리굴라와 함께 자신의 공동상속인이자 공동황제로 지명하는 것뿐이었다.[127] 이 유언장을 작성한 뒤, 티베리우스는 서기 37년에 79세로 사망한다.[128][129]
이리하여 25살의 젊은 황제 칼리굴라가 온 제국의 환호에 뒤덮여 그의 뒤를 이었다. 카프레아이에서 티베리우스 임종을 사촌동생 게멜루스, 티베리우스의 친구와 측근 등과 함께 지킨 그는 함께 이탈리아 본토로 건너왔다.[130] 이때 잘생긴 외모에 상당히 큰 키를 가진 칼리굴라를 본 민중들은 “우리의 별”, “귀염둥이” 등으로 젊은 칼리굴라를 환영했고, 원로원 역시 아우구스투스와 게르마니쿠스의 직계인 칼리굴라에 대한 기대감으로 찬사를 보냈다. 반면 칼리굴라, 게멜루스와 로마로 함께 돌아온 티베리우스의 관은 칼리굴라 일행을 환호하는 민중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돼 성난 민중들이 "티베리우스를 티베리스 강에 던지자!"라고 외쳐대는 지경이 됐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칼리굴라가 압도적인 군중들의 환호를 등에 업자, 원래부터 티베리우스와 사이가 나빴던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유언을 깡그리 무시하고서 칼리굴라만 단독황제로 인정해버렸다. 이때 칼리굴라는 사촌동생이자 티베리우스의 친손자 게멜루스를 자신의 양자로 삼고, 아예 프린켑스 유벤투티스라는 직책까지 줘서 차기 황제로 못박아버렸다. 그러나 이런 상황도 8개월 뒤, 심한 열병을 앓고서 사경을 해매다가 깨어난 직후 심각한 불안감과 신경질적인 증세를 보이게 된 칼리굴라가 게멜루스를 의심하더니 끝내 살해하면서 비극적으로 끝나고 만다.[131][132] 따라서 티베리우스의 대는 칼리굴라 즉위 1년도 안 돼서 끊기게 됐고, 법적으로 마지막 혈육인 칼리굴라마저 약 4년 뒤 원로원과 근위대 일부로 하여금 불만을 품게 만들었다가 암살당하면서, 티베리우스 사후 불과 4년만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칼리굴라’로 이어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은 로마 역사에서 완전히 멸문했다.[133]

3.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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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베리우스의 최측근 출신인 파테르쿨루스를 비롯한 당대 로마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젊었던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놀라울 정도로 성실하고 부지런했다고 한다. 또 즉위 전부터 죽을 때까지 공공도덕과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어릴 때부터 과묵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냉정하고 비정한 사람으로 여겨졌는데, 이런 성격은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고 한다. 또한 양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사랑과 정을 자신의 명예, 가문의 명예 못지 않게 중요시하였고 그에 따른 책임감이 대단했다고 한다.
공공에 대한 책임감도 상당했던 만큼 티베리우스는 황제가 되기 전까지는 여러 번의 승전으로 얻은 전리품 등을 아우구스투스 포룸에 있는 카스토르 신전 재건 비용으로 기부할 정도로 인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즉위 후에는 건물 건축, 경기와 행사 주최 등 돈 들어가는 일에는 인색하다고 까일 정도로 아꼈고, 말년에는 다른 사람들이 경기나 행사를 개최하는 일도 못마땅해 했다.
  • 티베리우스는 확실히 폐쇄적이고 낯을 많이 가렸다. 그런데 이런 성격은 갑자기 생긴게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유아기 때부터 아우구스투스 밑에서 자랐고 친어머니가 리비아 드루실라임에도 본래부터 사교적이지도 않았고, 사교 모임 등에 참석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런 혼자 있기 좋아했던 성격은 재위 말년에는 극에 달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이런 폐쇄적이고 낯을 가리는 성격은 그가 원로원과 민중 모두에게 비정하고 냉혹한 이미지가 굳어지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추가로 그는 아우구스투스 부부를 비롯한 자신의 가족들, 네르바 황제의 할아버지 같은 극소수의 오랜 친구, 파테르쿨루스 등 극소수의 최측근 외의 사람들과는 교류가 적었다.
  • 도통 마음을 쉽게 여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친동생 드루수스 부부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다정다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20대, 30대 시절 아우구스투스 부부, 동생 드루수스 부부와 그의 첫 아내 빕사니아와 사적 시간을 보낸게 대부분이었고, 제수씨 소 안토니아가 사별 이후에도 홀로 조카들을 키우는 것을 굉장히 존경했다고 한다. 또 사생활적으로도 주변 측근들과 정적들도 놀랄 정도로 단점이 없어서 결혼 전까지 게르마니아 전쟁 와중에 병사들에게까지 “베스타 여사제 같다”고 반놀림을 당할 정도였다고 한다.
  • 어린 시절부터 과묵했지만 라틴어와 그리스어 실력이 뛰어났고, 그리스-로마 문학을 좋아한 '문학 소년' 이었다고 한다. 이런 티베리우스의 문학소년적 기질은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고 하며, 젊은 시절부터 독서와 시짓기, 작문 등은 티베리우스의 취미 중 하나였는데 이는 그가 교양이 상당한 사람으로 평가받은 이유였다. 특히 왠만한 교양인들도 쉽게 하지 못하던 ‘좋아하는 그리스 시인들의 문체로 시문 짓기’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지었는데, 이 솜씨는 단순히 따라하기 수준이 아닌 그의 문학적 기질과 실력을 발휘할 정도였다.
  • 양부 아우구스투스와 마찬가지로 재위 내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그리스어를 비롯한 외국어에서 차용된 단어 사용을 공문서와 공식 칙령 표기에 넣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티베리우스의 모국어 사랑은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재위 초기 원로원으로부터 ‘지나치게 재미없고, 과도한 매너리즘과 현학적 표현’이 가득하다고 비난받았다. 그런데 정작 티베리우스는 외국어인 그리스어에 굉장히 능통했고, 모국어였던 라틴어 실력 역시 상당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대 로마인들은 그의 이런 모국어 애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오늘날 학자들에게도 티베리우스의 이런 라틴어 공문서 사용은 긍정적인 측면이 많았다고 평가받는다.

  • 티베리우스는 상당한 미남이었고, 타고난 파트리키였음에도 사치와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후임자 칼리굴라나 그를 롤모델로 삼은 도미티아누스[134]와 달리 젊은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평범한 재질로 만들어진 투박한 토가 차림을 항상 유지했고, 일상생활에서도 투박한 토가 차림이나 평범한 복장들을 굉장히 선호했다고 한다. 아울러 요란하거나 이국적인 악세사리에 관심도 없었고, 비단 재질로 만든 의상이나 고급 재질로 만든 토가에도 흥미가 없었다.
  •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아첨꾼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원로원 의원들이 인사를 하기 위해서든 공무 때문이든 간에 자신이 탄 가마에 접근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원로원과 상류층 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 대부분에게 행동거지가 문제있는 사람으로 여겨졌고, 죽을 때까지 인기가 진짜 없었다. 또한 "주인님(도미누스)"이라는 칭호를 누군가가 아첨하며 자신에게 부르자 화를 내며 "도미누스는 우리 집 노예들이 나를 부를 때나 쓰는 말이다!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반면 그는 자신에 대한 욕, 비방, 조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쿨하게 넘기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대로 말하고 생각하는 자유가 국가의 척도"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은둔 이후에는 고발장에 대해서만은 예전과 달리 민감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 상당히 이성적이었던 사람이라서 신이나 종교적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소홀히 여겼다. 그러나 점성술만은 신봉했다. 그래서 젊은 시절 티베리우스는 공직 다 내려놓고 로도스 섬에 가서 틀어박혀 지낼 때도 점성술 책인 호로스코프를 끼고 살았다고 하며, 카프레아이 섬 은둔 이후에는 점성술을 가지고 전문가들과 학자들을 불러놓고 토론까지 나눌 정도였다. 따라서 풍자작가 유베날리스(Iuvenalis)는 티베리우스를 두고 "카프리 섬에서 점성술사들에 둘러싸인 늙은 지배자"라고 비웃기도 했다. 아울러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세계가 완전히 운명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었고 천둥에 기겁하곤 했다고 한다. 또 그는 하늘이 갑자기 어둠침침해지면 번개를 막아준다고 여겨지던 월계관을 썼다고 한다.

4.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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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외모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135]
먼저 티베리우스는 크고 건장한 체격을 가졌으며, 어깨와 가슴은 넒고 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균형잡혀 있었다. 왼손잡이인지 몰라도 오른손보다는 왼손을 더 잘썼는데, 손가락으로 새로 딴 싱싱한 사과를 뚫을 정도로 힘이 세고 손가락을 튕기면 소년이나 청년 머리통을 부술 수 있었다고 한다.
얼굴은 잘생기긴 했지만 피부가 희였고 때때로 뾰루지가 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뒷머리를 목덜미 아래로 길게 길렀는데 이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남자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는 눈이 상당히 컸고, 잠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밤의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또렷이 볼 수 있었던 신비한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136]
티베리우스의 걸음걸이는 목을 쑥 내밀고 큰 키로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늘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함께 걷고 있던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매우 천천히 이야기했고, 손가락을 많이 움직였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이런 특징을 싫어했고, 이 행동의 원인이 오만함 때문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수에토니우스는 동시에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이나 민회에서 티베리우스의 태도가 원래 그런 것이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대신 용서를 구했다고 기록했다는 점에서 볼 때 어느 부분이 맞는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티베리우스는 하늘색(caesii)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강철체력을 자랑할 정도로 강건했고 죽음을 맞은 마지막 날까지 건강했다. 그래서 30세가 지나서는 의사의 조언이나 도움없이 스스로 판단에 따라 건강을 관리했다고 한다. 그는 죽기 직전 병에 걸렸을 때조차 의사가 치료를 권유할 때, 자신은 이제 죽을 때가 됐다면서 치료를 거부하고 노환으로 사망했다.

5. 비판


티베리우스는 프라이토리아니가 정치와 황실에 개입하는 것의 선례를 만든 첫 번째 황제였다.[137] 티베리우스는 수도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져 주둔하고 있던 근위대를 한데 모아 수도 로마를 억압하는 강대한 군대로 재편성했다.
전임자인 아우구스투스는 근위대를 수도 로마에 은근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카드로만 활용했을 뿐이지만, 티베리우스는 실제로 근위대를 이용한 정치를 했다.[138] 이는 근위대를 이용해 반대파를 탄압하고 쉽게 정국을 장악할 수 있다는 유혹에 굴복한 것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과 마찬가지였다. 근위대장인 세야누스는 반대파 숙청과 황실의 위험분자 숙청(특히 대 아그리피나와 관련된 일파들)을 주도했으며, 심지어는 근위대를 이용한 쿠데타까지 기도하기도 했다.[139] 한마디로 근위대의 정치 개입과 쿠데타 기도의 선례를 처음 만들었고, 이는 로마 제국의 하나의 전통과 관례와도 같은 현상이 되어버린다.[140]
물론 티베리우스는 지극히 유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근위대를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 그는 지극히 노련하게 세야누스의 반란을 사전에 뿌리뽑았고, 근위대가 제국의 일상적인 통치에까지 손을 대지 못하도록 했다. 그렇지만 모든 황제가 티베리우스와 같이 유능했던 것은 아니어서, 이들이 근위대를 잘못 건드리면 황위는 물론 목숨까지 빼앗길 수 있었다.
한마디로 티베리우스는 지극히 위험한 요소를 정치제도 안에 끌어들였으며, 이 대가는 로마 제국이 존속하는 내내 치르게 된다. 한마디로 그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로마를 통치했고, 비록 그는 잘 해냈지만 후대 황제들에게 여러 가지로 나쁜 선례를 남겼다.[141] 제국의 첫 번째 근위부대로 이름높은 프라이토리아니는 결국 4세기에 들어서야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해체된다.

6. 평가와 여담


티베리우스라는 한 인간의 삶에 대한 평가를 하자면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성공적이었을 삶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내부를 뜯어보면 친모, 양부와 권력속에서 얽힌 관계와 좋은 관계를 맺었던 친동생 대 드루수스와 친아들 소 드루수스의 죽음에 더불어 양부의 권력 관계의 희생양으로서 파탄난 가정생활과 아끼던 조카 게르마니쿠스의 죽음과 그에 따른 소문과 오해, 아그리피나와의 대립 등의 일이 이어지면서 내면적으로 이미 정신적인 한계에 몰려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즉위 초기부터 계속된 원로원의 행태에 환멸을 느껴 제 풀에 지친 나머지 본인 스스로 은둔을 택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양부 아우구스투스와 맞먹을 만한 통치력으로 로마 제국의 기틀을 완벽하게 다졌지만 좋지 않은 선례들을 남겨놓았다. 즉, 그의 정치 행적이 인격적이라고는 볼 수 없어 현제라고 볼 수는 없지만 로마 역사상 양부인 아우구스투스오현제[142],콘스탄티누스 대제등과 함께 정점에 선 통치력을 보여준 명군이라 평할만하다.
반대파에 대한 잔인한 처벌과 카프리섬 은둔 중에 떠돌던 음란한 생활에 관한 소문이[143] 그를 '악명 높은 황제'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그러나 프리츠 하이켈하임이 티베리우스의 통치와 사생활을 길고 지루한 청교도적 시대였다고 표현했듯이, 티베리우스는 성격이나, 통치술의 방식에서 문제가 있다고 해도 사치와 향락을 멀리함으로서 국고를 탄탄히 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로마 제국 전반의 소프트웨어/하드웨어 인프라를 안정화했던 유능한 황제였다. 또 그는 원로원의 평가와 달리 그의 행적 등이 밝혀지면서 실상이 드러난 결과 민주적으로 자신에 대한 비난 연설을 받아들였던 일 등이 재평가되었다. 현재의 역사학자들은 그를 로마 제국의 초석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 사람으로 재평가하고 있다.
먼저 티베리우스의 행정능력은 거의 신의 경지에 오른 수준으로, 카프리 섬에 은둔해 있으면서도 제국 전체의 돌아가는 사정을 손금 꿰듯이 읽고 있었고 필요한 일들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처리했다. 그가 제국 전체에서 안 돌아다닌 지방이 없을 정도[144]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선대의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가 정보수집체계를 완비한 덕분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우편제도와 도로를 완비하고 치안을 잡아준 덕분에 황제가 카프리 섬에 은둔해도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에 동방의 군대와 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시리아 속주 총독(이름은 분명하지 않다.)과 유대 속주의 장관이었던 폰티우스 필라투스[145]를 즉각 해임조치하는데 그때 당시에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이스라엘 땅에서 시리아 속주의 산하에 있던 유대장관인 빌라도가 행정능력이 너무 무능력했다는 점을 보고 내린 조치다. 그리고 일을 제대로 하는지 감시하고 항상 보고를 할 책임이 있던 시리아 총독도 행정능력이 떨어진다고 보고 해임조치를 하게 된다.
지출, 팽창을 적당한 선에서 억제한 것 역시 티베리우스의 공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를 정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이 때문에 바루스의 3개 군단이 궤멸한 토이토부르크 전투와 같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로마군의 역량을 생각해 보았을 때 게르마니아는 언젠가는 정복되었겠지만, 그러기 위해 로마는 값비싼 물적, 인적 희생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146] 게르마니아의 물산이 변변찮았다는 것을 감안하면[147] 세금 수입에 비해 속주를 유지하는 비용 역시 만만찮았을 것이다.[148]
사실 앞서 언급했던 재정 문제만이 아니라, 원로원 귀족들을 견제하는 것은 원수정 유지에 꼭 필요한 임무였다. 티베리우스는 재위 후반기에 반역죄로 기소된 귀족들의 재산을 국고에 넣었는데, 이는 안정적으로 원수정 체제를 정착시키는 것에 도움을 줬고 로마 제국의 부의 집중을 해소하는 효과도 있었다. 부유층과 권력층을 억제하는 것은 인기는 없었을지 몰라도 제국에 꼭 필요한 임무였다. 그는 수도 로마에서는 피바람을 일으켰지만, 안정적인 세수 체계를 통해 제국의 방대한 속령들은 완벽하게 관리했다. 제국의 유지라는 임무를 속주민들의 고혈을 짜내지 않고도 완수했던 것이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티베리우스가 유능한 황제인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무작정 현제로 평가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그래서 서양학자 중 크리스 스카레와 같은 이들은 그를 야누스와 같은 황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티베리우스의 가장 큰 단점으로 거론되는 부분은 가식과 체면치레를 지나치게 싫어한 나머지 정치인에게 필수적인 언플능력과 포용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체질적으로 정치질과 아예 담쌓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반박의 의도가 좋아도 언행이 지나치게 직설적이어서 툭하면 후대의 절대군주 옹정제 마냥 대놓고 면박을 주곤했다. 티베리우스의 달 건이나 도미누스 호칭 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율리우스(7월) 달과 아우구스투스 (8월) 달에 이어 9월을 티베리우스로 부르자고 제안한 사람에게는 '그럼 역대 제일인자가 열두명을 넘어가면 그땐 어쩔거냐?'라고 따졌고, 자신을 도미누스라고 부른 사람에게는 '나는 같은 공화국 시민인데 왜 노예처럼 비굴하게 도미누스라고 부르느냐'고 화를 냈다. 이런 태도 때문에 분명 좋은 의도로 말을 하고도 뒤에서는 오히려 위선적인 폭군이라고 씹혔다. 이는 아무리 통치능력이 출중해도 결국은 그의 생전 인기를 지나치게 깎아먹은 가장 큰 원인이 됐는데, 특히 그가 젊은 시절부터 보인 성격적 결함 중 내향적이고 과묵한 성격과 아부 등의 뻘소리에 대해 결벽증 수준으로 혐오스러워 한 행동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투스가 살아생전 여러 번에 걸쳐 원로원 회의 중 티베리우스의 본심을 이해해달라고 편을 들면서 변호했고,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가 모두 생존해있던 당시에는 원로원과 측근들에게 "드루수스를 진지하게 내 후계자로 생각 중이다"고 했을 지도 모른다.
티베리우스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제국 통치에 원로원이 필요없다는 것을 대놓고 드러낸 황제이다. 전임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의 반대에 부딪치면 일을 이렇게 처리했다.
법안 제안 → 원로원의 반대 → 기다리거나 혹은 먼저 모범을 보인다 → 결국 통과
예를 들어 아우구스투스는 군단병의 퇴직금 제도를 위해 상속세를 도입할 때, 자신 역시 막대한 돈을 기부하여 재원으로 삼았다. 한마디로 해서 원로원이 반대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든 다음에 합의에 의해 처리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법안을 이렇게 처리했다.
법안 제안 → 통과
왜 반대 프로세스가 없냐하면, 티베리우스 입장에서 보면 일단 원로원이 무기력했고 그에게 비협조적이면서 온갖 책임을 황제에게 모두 돌리고 그를 대놓고 미워했다. 다시 말하면 황제 본인 입장에서 보면 전임자처럼 하려고 해도 파트너인 원로원의 수동적인 행동과 책임 회피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단 티베리우스는 즉위 초부터 양부 아우구스투스처럼 행동하려고 하면서 원로원을 제국 통치의 의미있는 파트너로 규정하고 원로원 의원 중 곤궁해진 사람들에게 돈을 흔쾌히 지급하고 여러 문제까지 해결해줬다. 또 그는 먼저 손을 내밀면서 원로원에게 협력을 구했고, 늘 원로원을 존중한다고 말하고 공화정 시대때 원로원 위상을 생각해 그들의 책임과 권한도 보장하고 이관시켜줬다. 아울러 티베리우스는 자제력과 인내심이 떨어진 카프리섬 시절에도 수동적인 그들에게 가이드라인까지 잡아줬다. 그러나 이때마다 원로원은 제 일이 아닌 것처럼 느긋하게 일처리를 하거나 황제 눈치만 봤다. 오죽했으면 티베리우스는 분통이 터져서 원로원에게 "노예가 될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고 일갈을 날리고, 자기 눈치를 보지 말라면서 연설과 토론의 자유까지 계속 보장해주고 세야누스파가 숙청되기 전까지는 그래도 이런 이유로 보통은 보복도 안했다.
하지만 원로원의 입장을 대변한 타키투스나 디오 카시우스, 수에토니우스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 입장에서는 티베리우스가 "자유롭게 말하고 투표도 하고 내가 한 잘못도 말해라"라고 한 것은 오히려 부담스럽고 진짜 위선적이었다. 먼저 원로원 입장에서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원수정 체제는 역설적으로 티베리우스가 말한 옛날처럼 책임감있게 하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이래 반역죄와 간통죄 같은 것이 만들어진 상태에서 세야누스, 마크로로 대표되는 친위대장과 친위대가 자신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하는 상황에서 티베리우스 말처럼 "할 말 다하고 자유롭게 정책입안도 하면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프린켑스정의 현실상 초기라고 해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원로원으로서는 본래부터 냉혹하고 군대의 힘을 배경으로 둔 절대 군주 티베리우스에게 반대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재위 후반에 행여나 반대파로 지목된 의원이 있다면, 그는 공개적으로 비난받고 이후에는 곧 숙청당하거나 반역죄로 고발당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 집권 후기의 원로원은 거수기에 불과했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유일하게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더군다나 황제가 카프리 섬으로 은둔해버린 다음에는 황제가 보낸 편지를 읽고 법안을 통과시켜주는 것이 원로원의 유일한 역할이었다. 의원들은 황제에게 대항할 힘이 없다보니 자괴감을 곱씹어야 했고, 속으로 반감을 키워갔다. [149]
아울러 그가 원로원에게 비난받은 또 다른 이유는 누가 보더라도 프린켑스의 힘은 커지고 강력한 견제무기들이 늘어가는 상황에서 위선적으로 행동한 것 때문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즉위 초부터 늘 회의장 안팎에서 "나와 원로원 여러분은 동등한 관계이고 저에게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털어놓도록 합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원로원 의원들은 그렇게 못했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는 분명히 그들 입장에서 보더라도 유능하고 행정, 군사, 외교적으로 휼륭한 프린켑스였다고 하지만, 원로원을 최고법원으로 만들고 이를 대놓고 활용하면서 자기 동료들이 반역, 횡령, 협박, 뇌물과 같은 일에 연류되면 제 손으로 동료를 처벌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의 중 그나이우스 피소의 경우에는 티베리우스를 폐하라고 표현하면서 "폐하께 여쭙겠습니다. 몇 번째로 투표하시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티베리우스의 뜻을 먼저 파악하려고 했고, 원로원 의원들은 황제가 말을 하거나 서한장을 보내면 반역죄로 숙청하기 전에 덫을 놓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또 원로원 입장에서 티베리우스를 바라보면, 자신들에게 민회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선출권을 넘겨줬다고 해도, 책임은 자기들이 지고 처벌을 본인들이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계속 벌어지고 제도화됐다. 티베리우스는 말로는 "아우구스투스처럼 하고, 여러분은 동료이므로 존중하겠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눈 앞에서 벌어진 실상은 원로원 의원이나 속주총독, 장관들의 뇌물, 횡령, 독직과 반역죄 재판을 원로원에 설치하고 꾸준히 유죄판결을 내려지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150] 즉, 눈 앞에서 동료들이 반역죄 같은 혐의로 기소돼 처벌받는 상황에서 숙청되는 것을 보는 원로원 입장에서 티베리우스가 "계급장 떼고 할 말 다 해봐라"라고 말하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설상가상 원로원은 세야누스 숙청 이후 벌어진 재위 후반부터는 티베리우스가 보낸 서한이 발표된 이후 "침묵하지 말고 여러분의 생각을 말해달라"고 한 뒤 진짜 솔직히 말하면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거진 황제나 법무관에게 반역죄 같은 것으로 고발받고 처벌받았다. 그래서 원로원 의원들은 대개 침묵하거나 조심스럽게 "당신 말이 맞습니다" 등으로 의견을 개진했는데, 이렇게 말하거나 행동하면 티베리우스는 이런 그들에게 "수동적이다", "스스로 노예가 되려고 준비된 인간들이다" 같은 욕을 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재위 후반부터는 일상화되게 되자 당하는 원로원 입장에서는 티베리우스를 위선자라고 욕하고 관계가 파탄날 수밖에 없었다.
또 대중들에게 잘 다가갔던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그는 원로원, 일반민중 모두에게 재치있게 표현하거나 애둘러 말하는 재주가 매우 서툰 황제였다. 그래서 그와 원로원과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파탄났고, 민중들은 전임자와 달리 여러 수혜를 베풀지 않고 설명조차 안하는 그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때 티베리우스는 문제 해결 역시 본인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해 해결했고,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판단해 행동했다. 또 재위 중반 이후에는 세야누스나 마크로로 대표되는 근위대장과 근위대를 정치에 개입시켜 이를 통해 해결하는 첫 선례를 만들었고, 말년에 카프리 섬에 은둔하면서 제국을 원격조종하면서, 반역죄를 통해 정적들을 로마법의 합법적 처벌 절차대로 제거하고 이런 방법을 후계자 가이우스(칼리굴라)에게 전수하면서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던 로마 내 황제 대 원로원 구도를 바꾸지 않고 일방적으로 끌고 갔다. 그러면서 그는 칼리굴라를 카프리 섬으로 불러 그곳에서 제왕교육을 시키면서 자신이 어떻게 원로원을 대하고 반대파에게는 어떤 방식을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교육시켰다[151].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로마 황제'의 좋은 규범만큼이나 나쁜 규범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티베리우스의 불행은 고위공무원에게 필요한 모든 자질을 완벽하게 타고났으나 대중정치가로서의 자질만은 약에 쓰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 피치못하게 로마제국이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되는 복잡미묘하고 애매한 시기에 제국 최고의 거물정치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데 있을 것이다.
이런 황제로서의 평가 외에 티베리우스는 그의 삶 전반이 전반적으로 대단히 불우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런 영향의 결과, 모든 것에 지칠대로 지쳐버린 그가 결국 택한 것이 ‘은둔’이었다는 분석도 나온다.[152]
알루미늄의 생산을 금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로마의 역사학자인 플리니우스의 저서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한 여행자가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잔을 티베리우스에게 주었지만, 티베리우스는 이 금속이 금, 은의 가치를 떨어뜨릴까 두려워 알루미늄의 개발을 금지시켰다(덤으로 알루미늄을 바친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사실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데, 19세기 전기분해법[153]이 개발되기 전까진 순수한 알루미늄을 제련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워서 금, 은보다 더 귀하게 여겨졌다. 구두쇠인 티베리우스가 생산을 금지하게 한 것도 이해가 갈 것이다.
도미티아누스가 무엇보다 열심히 읽었던 것이 티베리우스가 남긴 기록들이었다[154]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는 지나치게 엄격한 통치로 동시대인들의 불만을 샀지만 통치방식 면에서는 후대 황제들의 모범이 되었다.
오현제 중 한명인 네르바와도 인연이 있는 황제이기도 하다. 네르바 가문은 증조부때부터 대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깊은 협력 관계를 맺고 있던 귀족 가문이었는데, 당대 최고의 법률가 중 한명인 네르바의 할아버지는 티베리우스의 조력자이자 몇 안 되는 진정한 친구로 유명했다. 또한 네르바의 외숙모는 티베리우스의 손녀 율리아가 낳은 딸이었으며, 네르바의 아버지 역시 티베리우스 시절 원로원 의원이 된 뒤, 칼리굴라 시대에 집정관이 되었다.

7. 대중문화에서


미디어에는 카메오로 많이 나오는 편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시절 황제이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된 영화에서 로마황제가 나온다면 십중팔구 그라고 보면 된다. 영화 벤허에서 개선식 때 등장하는 황제가 바로 티베리우스, 영화 성의에서의 로마 황제도 티베리우스. 이 두 영화에서는 잠깐 등장하지만 1950년대 당시의 인식으로는 의외일 정도로 개념찬 황제로 나온다.
  •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라 독살과 방탕에 빠져서 몰락하는 인간으로 그렸다. 애완동물이 벌레에게 먹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살아나서 음식을 달라고 요구하다 칼리굴라에게 살해당한다. BBC의 드라마판의 1화에선 원하지 않는 권력싸움에 어머니의 등쌀에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생인 드루수스에게 자신이 사랑한 사람은 오직 셋뿐이라고 얘기하는데,[155] 아버지는 사망, 빕사니아는 주변 인물의 강요로 이혼했기에 드루수스에게 제발 조심하라고 얘기하는 나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후에도 빕사니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빕사니아의 재혼 소식을 듣고 그녀에게 따지러 왔다가 이혼을 후회하며 차라리 같이 죽자고 얘기할 정도로 절망한다.[156] 그리고 이후에는 권력에 의해 더더욱 차가운 인물로 변한다.
  • 모 종교집단 지도자는 황제의 이름을 따서 타이베리움을 타이베리움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광물이 지구상에 나타나기도 전에, 등장을 예견하면서.[157] 하필 타이베리움이 처음 지구에 나타난 곳이 테베레 강이어서 그 이름이 무난히 받아들여진다.

7.1. 칼리굴라#s-5.1


틴토 브라스 감독의 1979년작 영화인 칼리굴라#s-5.1에서는 칼리굴라가 황제에 오르기 전 초반부에 등장, 피터 오툴[158][159]이 티베리우스 역을 연기했다. 하지만 애초에 영화의 기획의도가 포르노였던지라, 딱히 고증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160][161] 다만 칼리굴라야 본인의 삶 자체가 포르노에 가까웠던 만큼(...) 이 부분에 있어서는 고증도 맞고 오히려 이 덕분에 작품성이 살아났다고 보기도 하지만, 티베리우스에 관한 부분의 고증은 거의 허구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위 문서에서도 부분부분 상술한 티베리우스에 대한 나쁜 소문들은 전부 모아서 길지도 않은 영화 초반부에 몰아서 보여준다.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서 어린 소년, 소녀들을 모아서 성관계를 즐긴다는 부분은 아예 더 과장해서 영화에 옮겨놓았고,[162] 티베리우스의 죽음도 위에서 소개한 가설 중 하나인 칼리굴라와 결탁한 마크로가 베개로 눌러서 질식시키는 이야기를 채택했다. 특히 티베리우스가 지나가다가 술에 취해 졸고 있는 경비병을 발견하자, 아예 배가 풍선처럼 부풀 때까지 술고문을 한 다음 손수 그 배를 갈라버리는 장면이 명장면.
그리고 실제로도 절친한 친구였던 네르바[163]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뒤를 이을 칼리굴라가 손자인 게멜루스를 죽이고 로마를 쑥대밭으로 만들것임을 뻔히 다 알면서도[164] 자신은 늙어서 지쳤다면서 딱히 막지도 않는 등[165], 고증과 동떨어진 행적과는 별개로 말년에 마음이 마모되고 피폐해진 모습은 제법 그럴듯하게 묘사했다.[166] 거기다 황태자이자 이미 성년이 다 된 칼리굴라에게 예전 칼리굴라라는 별명을 얻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에게 재롱을 떨던 춤을 춰보이라며 갈궈대는 모습은 꼬장꼬장한 꼰대 그 자체.[167] 또 몇몇 의원들의 처형을 요청하는 문서들을 가져다주자, 그것들을 읽지도 않고 도장을 쿵쿵 찍어서 넘기는 모습에서는 말년의 공포정치의 모습도 보여준다.[168] 거기다 먼 카프리 섬에 은둔하면서도 칼리굴라가 여동생인 드루실라와 검열삭제를 하거나 마크로의 아내와도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등의 로마의 세세한 사정을 손에 훤히 꿰고 있다. 그리고 이걸 칼리굴라와 마크로에게 농담처럼 툭툭 던져서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등, 평소에는 나태하면서도 수틀리면 절대자인 로마 황제답게 차갑게 상대를 쪼개버릴 것 같은 날선 송곳 같은 모습을 제대로 열연해냈다.
참고로 저 네르바는 실제 역사에서는 티베리우스 치하에서 집정관까지 지낸 뒤,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 은둔하자 자발적으로 따라올 정도로 몇 안 되는 친우이자 충신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티베리우스 면전에다가 대고 위대한 카이사르는 이라면서 황제 취급도 안 하면서 모욕하고, 다음 황제가 될 칼리굴라에게도 이딴 게 황제를 제대로 할 수나 있겠냐라는 투로 대놓고 무시하는 까칠한 모습으로 나온다. 그러자 티베리우스가 자기가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하자, 자신에게도 다 방법이 있다고 하고는 티베리우스가 죽기 전에 자기가 먼저 선수쳐서 자살해 칼리굴라로부터의 화를 피한다.[169]
이렇게 당시 로마에서 떠돌던 소문들을 짜집기해 사실과는 전혀 다른 티베리우스의 모습을 그려놓은 영화지만, 얄궂게도 그 점 덕분에 당시 로마 사람들이 가진 티베리우스의 이미지가 얼마나 시궁창에 막장이었는지를 아주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다는 의의가 있다. 아닌게 아니라 작중 다른 등장인물들이 티베리우스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야말로 하나같이 이 더러운 늙은이 왜 이렇게 안 죽어 딱 이것이다.

7.2. 벤허


1959년작 영화 벤허의 배경이 티베리우스 황제가 다스리던 로마 제국이라서 간간이 언급된다. 영화 첫 장면에서 벤허가 친구 메살라와 우정이 금이 가게 한 말싸움을 할 때, 메살라가 밥상에서 야훼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을 떼어먹을 정도로 믿음이 깊은 유대교 신자인 벤허 앞에서 티베리우스를 '진짜 신'이라며 찬양하는 말을 한다. 그 외에 로마인들 사이에서 유일신처럼 언급되며 절대적인 존재처럼 묘사되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후에 로마 집정관 아리우스가 해적과의 전투에서 이기고 로마에 돌아오는 개선식 장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170] 아리우스의 탄원에 대해 벤허의 위험성을 언급하면서도, 티베리우스는 아리우스 집정관의 요청을 들어 벤허를 사면하였다.[171]
다만 영화에서의 티베리우스의 모습이나 주변 상황은 실제 고증과는 몇 가지 차이와 오류가 보인다. 우선 영화 내에 년도가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대략적인 시기는 극중 등장하는 예수를 통해 알 수가 있는데,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기 때문에 이때를 대략 서기 30년으로 본다면, 벤허가 갤리선의 노예로 활동한 것이 3년에 그 이후로 전차대회에서 몇번이나 우승하다 2년 뒤 자유를 얻었다고 나오니 이 기간을 합치면 대략 4~5년이다. 결국 이 영화는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 쯤에 시작해 서기 30년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벤허가 노예로 끌려가다 아직 목수 일을 하고 있던 예수에게서 물을 받아 먹는 장면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면 오류가 생기는 것이, 벤허가 개선식에서 사면을 받고 전차경기에서 우승했다고 나올 때는 실제 역사에서는 서기 30년보다 바로 앞의 1~2년 동안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때가 티베리우스는 한창 섬에 틀어박혀 있을 때고, 로마는 세야누스의 전횡에 시름하고 있을 때다. 그래서 개선식에서 티베리우스가 나오는 장면은 실제 상황과는 잘 맞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티베리우스는 재위 기간 내내 로마 시민들에게도 근검절약을 강요하고 큰 행사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 벤허가 1~2년의 짧은 시간에 로마의 전차대회에서 5번이나 우승했다는 것도 고증과 맞지 않는다.
또 위에도 나와 있듯이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신격화를 내내 거부했기 때문에 영화에서 메살라가 티베리우스를 신이라고 찬양하는 장면도 다소 부자연스럽고, 티베리우스는 로마 시민들에게서 인기가 정말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다들 티베리우스를 찬양하며 떠받드는 모습도 다소 어색하다고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는데 이건 좀 억지다. 설령 인기가 없다쳐도 죽고싶지 않으면 그럼 대놓고 황제 욕을 할까? 게다가 말년의 티베리우스가 얼마나 무서운 양반이었는데?

7.3. 서브컬쳐에서



7.3.1. 데몬베인


참마대성 데몬베인에 등장하는 악의 세력 블랙롯지의 간부, 안티 크로스 중 한 명. 왠지 얼굴이 킹 크림슨 닮았다.
성우는 ZZ건담의 주인공, 쥬도 아시타와 초수기신 단쿠가의 주인공인 시노부로 유명한 야오 카즈키. 저 야성넘치는 목소리로 끈적끈적한 단어선정 센스와 완전한 여성어 말투를 선보이는지라 기분나쁘다. 매우(...).
키워드는 광대촉수.
마도서 벌레의 신비에 그의 육체는 이미 썩어 문드러진 시체이며 네크로맨시에도 일가견이 있는데다 뭣보다도 능욕과 살해를 사랑하는 미치광이. 페니스라고 쓰고 육창이라 읽는 걸로 여성을 꿰뚫어 죽이는 게 취미다.
이미 죽어있기 때문에 그를 죽일 수 없다. 또한 벌레의 신비가 부여하는 불사의 권능으로 그의 몸은 무한히 무한히 재생한다. 설사 육편 하나 남지 않았다고 해도...재생의 방식을 보면 재생 당시에는 살아있는 인간의 몸으로 복원되지만 복원의 마지막에 순식간에 부패해버리는 듯. 주로 장비하고 있는 긴 강철손톱으로 육탄전을 벌이며 이 강철손톱은 마술처리되어 있어 강도와 예리함이 뛰어나며 공격을 피할 이유가 없기에 무조건 공격 일변도.
또한 벌레의 신비의 권능으로 인해 육체 자체가 무기화된다. 몸 안의 내장은 촉수화해서 적에게 덤벼들며 뼈는 총알의 속도로 적에서 쏘아진다.
약점이란 게 거의 없다. 그를 죽이려면 그의 육체를 완전히 소멸시킬 때 잠깐 보이는 벌레의 신비. 마도서 본체를 완전히 소멸시켜버리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 성격 때문에 데몬베인과 여러 차례 맞붙었으며, 그때마다 강력한 공격과 무시무시한 재생 능력을 통해 데몬베인을 압도했다. 하도 재벌 총공격의 때에도 좀비나 촉수...를 통해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가장 골칫덩이였던 적. 하도우 저택 습격사건 당시 하도 루리를 거의 겁탈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고, 심지어 같은 안티 크로스였던 클라우디우스의 시체마저도 좀비로 부활시켜 써먹기까지 했다.
게다가 라이카 루트에선 레거시 오브 골드의 지구황제포에 의해 파괴되었던 데몬베인을 몰래 회수, 고쳐서 다시 써먹기까지 했다(!) 티베리우스가 기동하는 데몬베인은 레무리아 임팩트를 사용할 수는 없지만, 대신 티베리우스 고유의 원령주법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 결국 산달폰의 지원에 힘입은 쿠로에게 빼앗기긴 하지만.
그러나 결국 알 아지프 루트에서 부활한 알 아지프가 모든 단편을 되찾으면서 결국 완전해진 데몬베인-쿠로-알 삼위일체가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를 다룰 수 있는 위계에 올라서게 되고 처음 다루는 샤이닝 트라페조헤드론의 첫 희생양이 된다. 그곳에만은 끌려가기 싫다고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그에게 쿠로가 타인을 짓밟고 얻은 불사의 몸이라면 끝까지 책임지는 게 도리다.라고 대꾸하는 대목은 절품.

(하도우 루리 루트에선 에셀드레다가, 라이카 루트에선 산달폰이 레무리아 임팩트에 맞아 승멸된 후 남은 벌레의 신비를 태워버려서 사망. 코믹스에선 뒷치기하려다가 티투스에게 벌레의 신비가 찔려서 사망.)
소유 마도서는 벌레의 신비 De Vermis Misteriis, 소환하는 데우스 마키나벨제뷰트.
슈퍼로봇대전 UX에서도 가장 먼저 만나는 안티 크로스로 나오며, 첫 등장 시 발사하려는 크투가가 조조 건담에게 막힌다. 여담으로, 슈퍼로봇대전 시리즈에서 야오 카즈키의 개근은 이 배역이 마지막이다. 후속작인 슈퍼로봇대전 BX에서 끊겼다.
[image]
여담이지만 니트로 플러스 직원들의 낙서장에 원화가 니시씨가 그린 생전의 모습(?).

7.3.2. 테일즈 오브 데스티니


테일즈 오브 데스티니에 등장하는 아쿠아베일의 대왕.
토우케이 령의 영주였으나 그레밤의 아첨에 넘어가서 아쿠아베일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이전에 죠니와 페이트의 소꿉친구인 엘레노아를 강제로 데려와서 그녀가 자살하는 계기를 제공한적이 있다.
물 속성의 요도를 사용하며 기스 하워드님의 진공 던지기를 연상시키는 천지 던지기(천지 뒤집기)와 위력이 강한 와봉섬, 갖가지 가드 불능기술로 일행을 괴롭힌다. PS1판에서는 리온 매그너스가 입막음을 위해 살해, PS2판에서는 죠니 시덴과 정정당당하게 1 VS 1 승부를 치루다가 패배해서 사망한다.

7.3.3. Fate/Grand Order


로물루스 스토리에서 불완전 소환된 역대 황제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인게임에서는 그냥 고스트지만.

7.3.4. 하드 코어: 업라이징


여기에서는 제국의 황제로 등장. 주변 국가들을 침략하는 원흉이자 최종보스로 등장한다. 황제 아니랄까 다양한 공격과 함께 일반 탄알은 잡아내기까지 하는 위엄을 선보인다. 나머지는 항목 참조.

[1] 아우구스투스에게 양자로 입적된 이후에는 스스로를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서명했다.[2] 로마 원로원 회의록, 로마 공식 관보를 사료로 기록한 타키투스, 디오 카시우스의 표기에 의거.[3] 태어날 당시 본명[4] 아우구스투스의 정식 양자 입적 후의 공식 이름. 따라서 본인 역시 양자 입적 직후부터 모든 공문서, 사문서에 이 이름을 서명했고, 원로원 역시 그를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또는 카이사르라고 부름.[5] 티베리우스가 자신의 통치철학이자 인생의 가치관을 직접 언급한 말로 원로원 회의록에 실린 내용이라고 한다. 이 부분은 오늘날 티베리우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프린켑스로 있었는지에 대해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적인 발언으로 평가받는데, 타키투스로 대표되는 이들에게는 위선자, 냉혹한 프린켑스라는 증거의 대표적인 예로 인용되고 있다.[6] 친(親) 부자 세습으로 제위를 이은 최초의 로마 황제로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있다.[7] 로마 제정 시대 중 공동황제 개념으로 처음 즉위한 케이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이다.[8] 부자세습으로 뒤를 잇는 황제들이 많이 사용한 방법이다. 대표적으로는 콤모두스, 카라칼라 등이 있다.[9] 거리 내 근거없는 뜬소문과 도시괴담급 이야기들을 집대성해 만들어진 역사책이 바로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역사가 겸 변호사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이다.[10] 아우구스투스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혈통을 중요시한 집착의 화신이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황위를 물려주며 티베리우스 사후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인 게르마니쿠스를 티베리우스 후임으로 하는 것까지 조건으로 붙여버렸다. 거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콤모두스의 관계를 봐도 친자가 있는데 양자에게 제위를 물려주면 내전의 불씨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다른 왕조보다는 능력 본위라는 것이지 로마 또한 혈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왕조는 아니었다.[11] 친구이자 사위인 아그리파를 비롯해 직계 남자친족 마르켈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모두 요절해버렸다. 또 티베리우스의 친동생으로 조카사위이자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아버지 대 드루수스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 생전부터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과 측근들에게 자신의 후계자로 진지하게 고려중이라고 했고 여러 정황상 후계자가 되는 것이 진짜 유력했다. 하지만 드루수스는 집정관 선출 후, 게르마니아 전쟁 개선식 거행 직전 낙마사고로 요절해 아우구스투스는 이 사건 당시 하늘에 대고 신을 원망했고 죽은 양자의 동상을 곳곳에 세워 아쉬움을 표시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70이 다 된 고령의 나이에 그나마 남아있는 남자혈육으로는 누나의 외손자인 대 드루수스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 형제 외에는 없는 상태였는데, 이들마저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까지 갓 20대에 접어들거나 10대였고 제위를 곧바로 물려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즉,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서는 티베리우스 외에는 뚜렷한 후계자가 없는 상황였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 내용처럼 어쩔 수 없이 제위를 물려받게 된 셈이다.[12] 친부모가 모두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라서 혈통적으로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그자체로 평가받는다. 부계는 위세가 대단한 네로 가문이며, 클라우디우스 가문 태생인 할머니를 통해 마르켈루스 가문의 피까지 이어받았다. 또 어머니 리비아는 본래 클라우디우스 가문 전체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풀케르 가문 사람이라서 부모 양쪽을 통해 클라우디우스 가문 중 위세가 대단한 세 가문의 피를 모두 이어받았다. 여기에 더해 어머니 리비아의 법적 출신 가문이 대(大)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소(小)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를 배출한 평민귀족가문 리비우스 가였기 때문에 외조부 리비우스 클라우디아누스를 통해 소(小) 카토와도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13] 대표적으로는 티베리우스 휘하 군단장 등을 역임한 파테르쿨루스 등이 있다.[14] 7월 율리우스, 8월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9월을 티베리우스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황제가 12명을 넘어서면 어쩔 건데?라고 티베리우스가 일갈하자 흐지부지되었다. [15] 여담이지만 9월과 10월을 이름 바꾸려고 시도한 황제가 후대에 있긴 했었다. 기록말살형을 받은 도미티아누스다. 그는 자신의 칭호인 게르마니쿠스와 자신의 이름인 도미티아누스를 각각 9월과 10월의 이름으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는 15년에 그쳤고 9월, 10월은 도로 원래 이름으로 돌아갔다. [16] 물론 이런 악평들과는 정반대로, 티베리우스의 이런 정책 덕분에 로마는 탄탄하게 기틀을 잡아갔다.[17] 보통 통화나 비석 등에 새겨진 금석문들.[18] 다만 의외로 그리스도교에서는 티베리우스에 대한 악평은 하지 않는다. 신약성경 누가복음의 본문에서 티베리우스는 공생애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때의 일이다"라고 언급되고는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언급된 것도, 예수 그리스도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며 유대인들로부터 로마 제국의 권위를 옹호한 사례 정도가 있을 뿐이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황제에게 돌리는 것은, 예수 자신의 사상으로 볼 때도 복음서 저자의 의도로 볼 때도 굉장히 어긋난 생각이다. 실제로 당시 이스라엘의 총독이던 본디오 빌라도에게 책임이 있는가 없는가도 의견이 분분한 상황에, 거의 대륙 하나만큼 떨어져 있던 티베리우스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19] 개역한글판 성경전서의 네 복음서에 등장하는 라틴어 인명 대부분이 그렇다. '아우구스투스'를 '아구스도'로, '클라우디우스'를 '글라우디오'로 '폰티우스 필라투스'를 '본디오 빌라도'로, ''코르넬리우스'를 '고넬료'로 부르는 등. 전부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알고 있는 라틴어 인명의 '-us'를 '-o'로 바꾸고, 'ㅋ, ㅌ, ㅍ' 등의 격음을 'ㄱ, ㄷ, ㅂ' 등의 평음으로 바꾸면 대충 개역한글판 성경전서에서의 표기가 나온다.[20] 오타가 아니라 부자의 이름이 똑같다. 로마에서는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는 경우가 빈번해서 뒤에 대(大), 소(小)를 붙여서 구분하기도 한다. [21] 수에토니우스는 "필리피 전투 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랑쿠스가 집정관이던 해"라고 기록했다.[22]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가문의 부흥을 위해 최대한 자기 가문에 이득이 가게끔 행동한 이 당시 전형적인 로마귀족이었다. 티베리우스의 친부는 부모 양쪽이 모두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인 사람으로 골수 원로원파였던 리비우스 클라우디아누스의 사위가 되었다. 그럼에도 젊은 시절부터 민중파를 대표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밑에서 일한 카이사르파였고, 직속 상관 카이사르 밑에서 카이사르군 해군을 지휘했다. 이후에도 그는 카이사르의 신임을 받아 갈리아 지역의 속주 행정작업 책임자로 파견되기도 했다. 카이사르 암살 당시, 그는 장인이 속한 원로원파와 달리 급진적 원로원파와 손을 잡지 않았고, 장인처럼 원로원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지도 않은 채 급박한 암살 이후 사태를 관망하다가, 삼두파 중 옥타비아누스 대신 안토니우스 쪽과 손을 잡은 인사였다.[23] 폼페이우스의 딸이자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누이.[24] 장님 아피우스의 장남(정확히는 차남) 푸블리우스를 시작으로 하는 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 표기상 클라우디이 풀케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문과 함께 공화정 파트리키 가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명문귀족가문이다. 이런 이유로 보나 데라 스캔들 당시, 피해자이자 당시 법무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조차 풀케르 가문에 속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를 기소하지 못했다. 가문의 대는 최소 3세기 이후에도 이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 가문 출신 중 한명이 3세기 시대의 황제인 푸피에누스인 것으로 최근 연구에서 발표되기도 했다.[25] 장님 아피우스의 차남(정확히는 사남) 티베리우스를 시작으로 하는 클라우디우스 씨족 분파 가문. 표기상 클라우디이 네로네스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처음 티베리우스와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 푸블리우스 시절에는 집정관도 배출하지 못한 클라우디우스 분파 가문이었다. 그러다가 시조 티베리우스의 손자때 이르러서 집정관 등 거물급 인사들을 하나둘 배출해냈다. 그중 한명이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집정관으로서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인데, 그는 시조 티베리우스의 손자이다. 그리고 전쟁영웅 가이우스의 직계손이 티베리우스 황제의 친할아버지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이다.[26]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의 친할아버지로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이자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직계손이다. 또 다른 이름은 아들, 손자와 똑같은 이름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27] 3두의 일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28]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둘째 아들.[29]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지나치게 고지식한 전형적인 로마 귀족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훗날 이런 단점으로 인해 삼두파에게 패하게 되는데, 이 당시에도 끝까지 티베리우스의 아버지의 면담 요청을 절차상 이유 등을 들어 거부했다.[30] 이와 마찬가지로 티베리우스 클라우다우스 네로 역시 외모가 잘생긴 명문귀족이었다. 그는 부계, 모계가 모두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람이었고 젊은 시절부터 카이사르에게 능력으로 인정받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 귀족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본가와의 연결고리를 두텁게 하려는 티베리우스의 외조부는 그를 딸 리비아 드루실라의 남편으로 점찍고 두 사람의 결혼을 진행시켰다.[31] 대 드루수스, 혹은 네로 드루수스. 칼리굴라부터 네로까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 중 3명이 이 사람의 아들, 손자, (외)증손자이다.[32]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가 결혼했을 당시 리비아의 뱃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아이가 아닌가 하는 소문도 파다했다.[33]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수장 자리는 가문 남성 중 가장 연장자인 동생 네로 드루수스의 차남이자 자신의 조카 클라우디우스에게 넘어갔다. 따라서 그는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이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했으며 본인 역시 공식 서명할 때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서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고 했다. 외아들 역시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고 서명을 바꿨다.[34] 이때까지는 아우구스투스에게도 자신의 핏줄을 이어줄 대안이 많이 있었고, 본인과 아내 모두 나이가 젊었다. 더해서 클라우디우스 씨족과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이 가진 힘을 생각해보면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서는 굳이 의붓아들을 입양하기 보다는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가 자라서 자신과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을 돕는게 더 괜찮다고 판단한 듯하다.[35] 아우구스투스의 누이인 옥타비아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첫 결혼을 통해 얻은 아들로 아우구스투스의 친조카.[36]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인 아그리파의 첫결혼에서 얻은 장녀이다. 그녀는 카이킬리우스 아티쿠스의 증손녀이기도 했다.[37] 동생 드루수스도 게르마니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데, 로마는 이를 기리기 위해 그에게 "게르마니쿠스"(게르만을 정복한 자)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붙여주었고, 이는 그의 아들에게 그대로 계승된다. 동생 드루수스의 전공은 대 드루수스 항목을 참고.[38] 아우구스투스는 누나의 사위이자 의붓아들 중 티베리우스보다 아끼고 사랑했던 드루수스가 죽자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원로원과 측근들에게 드루수스를 자신의 후계자(황제)라고 말해온 터라 충격이 더 컸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친조카 안토니아와 결혼해 죽기 전 게르마니쿠스, 리빌라, 클라우디우스 삼남매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리빌라를 결혼시켰고,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입적시키면서 드루수스의 장남 게르마니쿠스를 양자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로 입적시켰다. 그리고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무능함과 거만함 끝에 소아시아에서 요절하자 리빌라를 양자 티베리우스의 외아들과 결혼시켰다.[39] 이야기에 따르면 드루수스는 낙마 당시, 의사로부터 다리 절단을 권유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드루수스가 죽어 유해가 이탈리아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자 평소에 승마를 그토록 꺼리던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말을 타고 이를 마중나갔다고 한다. 이후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는 드루수스의 유해와 함께 로마로 돌아왔다.[40]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와 혈연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내전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했고, 어린 시절 이탈리아 농촌에서 성장한 이유 등으로 유독 혈통에 집착했다. 이런 개인적인 이유 외에도 그는 티베리우스 형제의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네로가의 힘을 지키기 위해서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입적하지 않으려 했다.[41] 정황상 아우구스투스의 이후 행보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해볼 때 티베리우스의 동생 드루수스를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해 양자로 삼을 의도도 있었을 거라고 분석되고 있다.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이 당시 너무 어렸는데 몸이 건강치 않아 골골대던 아우구스투스에게 믿을 남성 친족이라면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두 아들뿐이었다. 이중 자신의 조카사위였던 드루수스는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의 수장도 아니었고, 능력도 뛰어난데다, 로마인 중에서 그가 진짜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아서, 양자로 삼을 경우 티베리우스의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연합이 더 공고해질 최고의 카드였다.[42] 이 계획이 무산된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비록 드루수스가 죽은 다음이긴 해도 외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드루수스의 딸인 리빌라를 결혼시켜 준다. 그러나 이 방법도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해버리면서 부질없이 끝나고 말지만, 그러자 다음에는 아예 드루수스의 아들인 게르마니쿠스와 자신의 외손녀인 아그리피나 부부에게 후계를 물려주기로 후계 방식을 바꿔버리기까지 한다. 심지어 이는 자신의 또 다른 외손자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자신의 누나의 손자, 손녀라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아우구스투스 본인 역시 드루수스를 얼마나 예뻐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43] 드루수스의 죽음이 전해질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하늘에게 신을 원망하는 말을 하면서 왜 드루수스를 나에게서 빼앗아가냐고 통곡했다.[44] 단순히 예상 밖인 정도가 아니라,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가 죽은 후에도 무려 26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45] 같은 후견인 역할이라도 아그리파와 티베리우스의 입장은 전혀 다른데, 아그리파의 경우에는 가이우스나 루키우스 모두 자신의 친자식들이니 중간다리 역할 내지 후원자 역할을 맡는 것이 억울하거나 할 일이 없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손에서 친아들 수준의 대우를 받으며 인생 대부분을 자란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는 말 그대로 자신과는 피 한방울 안 섞인 계부의 아이들을 섭정 자격으로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추측이 아니라 실제 아우구스투스가 유언장을 "가이우스와 루키우스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에게 황제 자리를 넘기지만, 그 다음 황제는 무조건 내 핏줄에게 물려줘야한다"라고 작성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46] 대부분 로마인들이 아버지, 할아버지의 이름을 돌려 쓴 것과 마찬가지의 예인데,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 이름은 티베리우스의 할아버지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죽은 티베리우스의 동생인 드루수스에게서 따왔다. 그리고 애초에 그 동생 드루수스의 이름은 할아버지인 드루수스에게서 따온 것이고, 동생 드루수스도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형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우스라고 지었다. 그리고 그 형의 티베리우스의 이름은 아버지 티베리우스에게서 따온 것이다...[47] 아우구스투스가 내린 결정을 바꿀 수 있던 사람은 그의 누나 옥타비아, 아내 리비아,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와 10대 때부터 친구였던 아그리파와 마이케나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리비아를 제외한 세 사람이 모두 사망한 터라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티베리우스의 친모 리비아가 유일했다.[48]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티베리우스 본인은 물론이고 아내 빕사니아에게까지 해가 미치기 때문이다.[49] 티베릴루스(Tiberillus)라고 하며, 유아기에 죽었다.[50] 황제에 오른 후에도 티베리우스가 말년에 또 섬으로 은둔 했던 것도 이와 연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51] 이 당시 티베리우스가 로도스에서 로마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 중 한 가지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존재도 컸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지위에 위협이 될 티베리우스의 복귀를 허가하지 않으려고 했고, 실제로 티베리우스를 복귀시킬 때 아우구스투스는 이들의 반발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어떤 공직도 맡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어야 했다.[52]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편지들에서 티베리우스를 언급한 부분들은 항상 “나의 사랑하는 아들 티베리우스”,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 티베리우스”, “내 아들 티베리우스”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성년식을 치룬 이후 그를 장남의 자격으로 가족 중대사를 의논할 정도로 티베리우스에게 상당히 의지했다고 한다.[53] 상대적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장남으로 생각했고, 원로원 귀족들이 티베리우스를 비난하거나 안 좋게 말하면 분명한 어조로 이에 대해 불쾌함을 표시하거나 티베리우스의 행동을 변호했다.[54] 드루수스는 태어날 때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그렇게 믿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를 친아들 이상으로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전령을 통해 드루수스가 낙마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 자리에서 절망하며 자신에게 드루수스를 빼앗고 왜 데리고 가냐고 외치며 통곡했다. 그래서 드루수스의 관이 이탈리아 국경에 거의 다 왔다고 소식을 전해듣자마자 평소 말타기를 끔찍히 싫어함에도 손수 말을 몰고 드루수스 유해로 달려 갔다. 훗날 자신의 직계인 후계자 후보들이 모두 탈락하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입적했음에도 드루수스의 아들이자 사랑하는 게르마니쿠스를 다음 후계자로 생각해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차기 후계자로 낙점시켰다. 아울러 신체적 결함으로 적합한 후계자가 되지 못하는 드루수스의 차남 클라우디우스에게도 다른 황실 사람들과 달리 굉장히 다정다감했다. 그래서 아내 리비아가 클라우디우스를 가문의 수치라고 부끄러워함에도 자신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도록 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관심사를 파악하고, 그가 가진 비범함과 연설 실력들이 자신을 기쁘게 한다고 칭찬했다. 또 자신의 친구인 당대 최고의 역사가 리비우스를 그의 스승으로 붙여주며 후원해 어린 나이였던 클라우디우스를 명망높은 역사가로 자리잡게끔 후원했다.[55] 본명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이고, 아우구스투스의 손자로 공식 입적되기 전까지의 이름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였다. 이 이름은 삼촌 대 드루수스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이름인데, 오늘날 알려진 이름인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휘는 아버지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된 이후 바꾼 이름이다.[56] 아우구스투스는 두 외손자를 양자로 입적시킨 뒤 키우면서 이례적으로 본인이 직접 교육을 관장했다. 여기에는 글쓰기, 식사예절, 걸음걸이 등등을 모두 자신과 똑같이 하는 훈련도 있었다.[57] 로마인들의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간의 위계질서가 상당히 강조되고, 가부장법이 있을 정도로 권리를 보장받았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황태자와 신하 간의 관계’라는 특수성을 생각해봐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친모 율리아와는 법적으로 결혼했던 상태였고,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되었어도 계부이자 의붓외삼촌이었다. 또 티베리우스는 집안어른의 자격으로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데리고 다니면서 그에게 군무 경험을 쌓도록 해준 웃어른이자 엄연히 로도스로 파견된 황제의 공식 대리인 신분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티베리우스가 황제 대리인으로서 예를 갖췄다고 해도 당대 로마인들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58] 롤리우스는 티베리우스와 라이벌이었고 그를 굉장히 싫어하는 인물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롤리우스와 마찬가지로 티베리우스 역시 롤리우스를 굉장히 싫어했다. 왜냐하면 롤리우스의 위선적인 태도와 속주민들을 강탈해 막대한 부를 취득한 행동을 굉장히 경멸했기 때문이다. 이런 티베리우스의 태도는 롤리우스가 자살한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는데, 귀국 후 티베리우스는 다시 정치 활동을 재개하면서 평소 그답지 않게 롤리우스를 공개적으로 강하게 비난했다. 이때 그는 원로원에서 롤리우스의 파렴치한 재산 축적과 위선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성토했다.[59] 당시 아르메니아 문제 해결 과정에서 또 다시 같은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버림받은 상태에서 로마로 귀환이 확정될 티베리우스 측의 고발 및 문제 공론화가 벌어질 상황이었다. 따라서 롤리우스 입장에서는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등을 돌린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거라고 분석되고 있다. 실제로 롤리우스가 음독 자살을 한 이후, 그의 막대한 재산들은 국고로 귀속되지 않고 모조리 롤리우스의 손녀에게 상속됐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롤리우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롤리우스 고발 사건을 넘어갔는데, 공식 후계자로 등극하게 된 티베리우스는 롤리우스의 부정한 재산 증식과 약탈에 가까운 착취 문제 등을 거론하면서 맹비난했다.[60] 아우구스투스의 두 외손자는 살아생전 원로원과 민중 모두에게 진짜 인기와 인망이 없었다. 그 원인에는 두 사람의 지나친 거만함과 매력없는 성격 탓도 있었지만, 이들의 어머니 대 율리아의 행실 문제 등이 큰 이유였다고 한다.[61] 아우구스투스의 누이인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의 딸이다.[62] 게르마니쿠스의 처남인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와 조카 대 안토니아가 시집가서 낳은 외종손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의 친부)가 있긴 했다, 하지만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밑에서 언급되듯이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이미 부적격자로 판정받아 유배됐다가 티베리우스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외할아버지의 명으로 처형됐다. 또 게르마니쿠스와 이종사촌지간인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경우에는 친가 자체가 워낙 평판이 안 좋고, 그나이우스 역시 상당히 문제가 많은 사람인데다,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인 게르마니쿠스와는 부계 혈통적으로도 상대가 안 되는 방계 황족 정도였다.[63] 게르마니쿠스, 리빌라, 클라우디우스.[64] 아우구스투스 이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주요 인물들 중 정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장애인이긴 하지만 능력적인 평가로), 대 드루수스, 소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정도이다. 그리고 이들 중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은 사람은 없고 죄다 옥타비아의 자손이거나 리비아가 데려온 자식이거나다...[65] 흔히 그녀와 게르마니쿠스의 장녀와 구분하기 위해 대 아그리피나라고 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율리아와 아그리파의 딸이자 세 번째 아이인데,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은 자손들 중 거의 유일하게 정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64][66] 단점이 있다면 하체가 호리호리했다는 부분이었는데, 이 약점까지 군복무를 하면서 승마 등으로 튼실하게 단련시켰다고 한다.[67]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 되었기에 율리우스 가문의 가장이 아닌 피보호자가 되었다. 따라서 이전처럼 클리엔테스들에게 선물을 하거나 노예들에게 자유를 줄 수가 없었으며, 다른 사람의 유산을 임의로 상속받을 수도 없게 되었다.[68] 드루수스의 둘째 아들로 위에서 말한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미 이때부터 티베리우스의 다음 황제로 게르마니쿠스가 내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69] 참고로 이 조카 클라우디우스의 풀 네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로, 티베리우스 본인과 아버지 티베리우스와도 이름이 거의 똑같다. [70]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있으면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의 계승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아그리파가 후계자 선정에서 탈락된 이유는 성격이 본래 난폭하고 힘이 세서 주변 사람들도 제어하기 힘들었던 ‘망나니’ 내지 골칫거리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 완전한 일처리를 위해 그가 있던 유배지에 병사들을 보내 죽이게 하는데, 힘이 장사여서 죽이기가 아주 힘들었다고 한다.[71] 포스투무스는 입양관계를 통해 파양 전까지는 법적으로 티베리우스의 '동생'이었고, 파양 이후에는 율리아의 양오라버니였기 때문에 외삼촌과 조카 사이였다. 여기에 더해 포스투무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혈육인 율리아가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72] 티베리우스는 동생 드루수스와 마찬가지로 외모가 잘생기고 키가 상당히 컸으며 체격도 좋았는데, 젊은 시절부터 원로원에게 대놓고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은 성격 자체가 상당히 과묵하고, 아부를 굉장히 싫어했기 때문. 여기에다 상대와 대화를 주고 받을 때 천천히 말하면서 손 제스처를 많이 쓰고, 상대의 두 눈을 계속 응시해서 그게 싫다고 미워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그를 유년기 때부터 친아들처럼 키운 아우구스투스는 살아생전 여러 번에 걸쳐 티베리우스를 변호하고, 아버지로서 티베리우스에 대한 오해를 거둬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아우구스투스도 자신이 키운 티베리우스의 이런 행동을 썩 마음에 들지 않아했는데, 재밌게도 두 사람은 성격이 많이 비슷해 전반적으로 차가운 얼음같을 정도로 냉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차이가 있다면, 아우구스투스의 경우에는 정적들과 달리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진심으로 굉장히 따뜻한데다, 원로원의 각종 아부를 흔쾌히 받아줄 정도로 ‘연기’를 잘했다는 점.[73]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공정성을 잃을 정도로 비판적이었던 수에토니우스에게 심하게 까였다.[74] 하지만 그때까지 뚜렷한 전공도 없던 게르마니쿠스가 반란을 잘 처리한 것은 그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75]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상당히 많은 지출 - 그는 시민들의 제정에 대한 지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이런저런 지출을 많이 했다. 게르마니아와 도나우 강 일대의 군사작전으로 인한 군사비 지출도 만만치 않았다. - 이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지출을 수습해야 했고, 긴축재정은 필연적이었다.[76] 당장 티베리우스 시절의 긴축재정으로 상당한 돈을 남겨놓지 않았다면, 아마 로마는 바로 다음 대인 칼리굴라의 과소비에 파탄났을 것이다.[77] 즉 티베리우스는 로마의 재정으로 감당할 수 있는 영토가 딱 라인 강까지라고 판단했다는 소리다.[78] 게르마니쿠스가 티베리우스와 이집트 장관의 허락 없이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한 행동은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누구라도 크게 처벌받을 위법행위였다. 그럼에도 티베리우스는 큰 사건이 될 법한 이 사건을 해프닝처럼 마무리지었다. 그는 황제로서 원칙에 따라 게르마니쿠스에게 편지로 행동을 지적하고, 혼을 낸 뒤 원로원 앞에서도 이 부분을 지적하는 선에서 넘어갔기 때문이다. 만약에 티베리우스가 진짜 자신의 친조카 게르마니쿠스를 견제하려 했거나 꼬투리잡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국법상 엄벌에 처할 수 있음에도 이렇게 혼만 내고, 원로원과 휘하 관료들에게 더 이상 이 문제를 걸고 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피소가 재판을 받을 당시, 명령불복종죄와 함께 이 부분을 딴지 걸고 넘어간 사건은 티베리우스에게 유죄사유 중 하나로 제시됐다.[79] 이에 아그리피나는 끝까지 피소 부부가 남편을 독살했고, 그 뒤를 사주한 건 남편의 양부이자 백부인 티베리우스라고 의심해 갈등을 일으켰다. 이후 아그리피나의 보호막이었던 소 드루수스가 급사하고, 이 틈을 노린 세야누스가 리빌라와 함께 집안팎에서 티베리우스와 아그라피나를 이간질한 뒤, 그녀에게 누명을 씌워 반역죄로 장남과 함께 유배보내버린다.[80] 티베리우스는 장례식 불참을 알린 이후에도 원로원에서 여러 번에 걸쳐 친조카이자 양자인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을 여러 번에 걸쳐 아쉬워했다고 하는데, 민중들은 거짓말까지 한다고 더 폭발했다.[81]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탐탁찮게 보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위에 명령서 위조나 게르마니아에서의 소환처럼 게르마니쿠스와 정책적인 면에서 충돌이 있었고, 게르마니쿠스가 이집트가 황제직할령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사전통보도 없이 가족들과 알렉산드리아에 방문했던 일도 있어서 이를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에게 지적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가 인기가 많다고 해서 이를 견제하려는 성격도 아닌 사람이었고, 이집트 사건에서 보여지듯 잘못을 지적하고 혼내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여기에다 소문처럼 독살 등을 피소에서 사주하는 방법을 이용해 게르마니쿠스를 굳이 죽일 이유도 없었다. 당장 게르마니쿠스가 죽으면 티베리우스가 잃을 것은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이를 몰랐던 민중들은 이 사건 이후 티베리우스를 더 미워하게 됐다. 여기에다 마지막 기대를 갖게 만든 피소 재판마저 결과가 나오니, 티베리우스는 더더욱 민중의 지지를 잃어버렸으며, 집 안에서는 재판 결과에 상당히 실망한 대(大)아그리피나의 끊임없는 반항에 매일 직면해야 했다. 게르마니쿠스 사후 황실 내부에서 내분과 불화가 끊이지 않았으며 통치의 안정성이 떨어졌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티베리우스가 굳이 위험을 감수해가면서까지 게르마니쿠스를 죽일 이유는 없었다.[82] 후에 황제에 오르는 네로의 외삼촌인 사람이지만, 네로와는 동명이인이 아니다. 5대 황제 네로의 이름은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인 반면, 이 사람의 풀네임은 네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정혼받은 약혼녀가 있었음에도 티베리우스의 명으로 파혼당하고 성년식 후 소 드루수스의 딸과 결혼했다. 따라서 그는 티베리우스에게 일찌감치 차차기 황제로 지명받았다.[83] 칼리굴라의 둘째 형으로 풀네임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네로 카이사르가 세야누스의 음모로 억울하게 죽은 뒤 티베리우스에게 후계자로 낙점되고 원로원에 공식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훗날 그는 세야누스의 음모로 황궁 지하실에 강금됐고, 세야누스 숙청 직전 은밀히 명이 내려져 후계자인 그를 풀어주고 근위대를 지휘하게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지만 풀려나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84] 훗날 황제에 오르는 칼리굴라이다. 칼리굴라는 "작은 군화"라는 뜻인데, 그가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를 따라 병영 돌아다닐 때 얻은 별명이다. 이때 어린 칼리굴라의 인기는 거의 아이돌 수준이라, 아우구스투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단병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어떤 짓이라도 할 것 같던 군단병들이 칼리굴라의 모습을 보자 금세 진정하고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하지만 게르마니쿠스는 칼리굴라를 보호하기 위해 이웃 도시로 보내려 했고, 이를 안 병사들은 로마인들인 자신들의 품에서 갈리아 지방으로 칼리굴라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잘못을 크게 뉘우쳤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병사들은 마차를 붙잡아 세운 다음 게르마니쿠스에게 간곡히 용서를 빌기도 했다.[85]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의 관계는 혈연상 사촌, 법적으로는 형제지간이면서 인척관계였다. 그럼에도 둘은 친형제 이상으로 사이가 워낙 좋았다. 소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판노니아 총독으로 있던 중에 밤낮으로 달려 먼저 게르마니쿠스의 유해가 도착할 도시를 들린 뒤 다시 로마로 가서 클라우디우스와 정부 인사들을 데리고 다시 내려갔다고 한다. 이후 그는 직접 게르마니쿠스 유족들을 위로하고 함께 아피아 가도를 통해 로마로 올라간 뒤 모든 장례절차를 주관했다. 이때 그는 상주노릇을 했고, 작은아버지이자 고모부로서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의 보호자가 됐다고 한다.[86]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에서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에게 한 것과 똑같이, 네로 카이사르를 멀쩡히 잘 있던 혼약자와 파혼시키고 자신의 손녀와 결혼시킨다. [87] 로마의 독특한 황제 제도상, 공동집정관과 호민관 특권을 부여 받는다는 것은 거의 공동황제이자 후계자로 임명받은 것이나 다름없다.[88] 한번은 티베리우스가 이동 중에 낙반 사고가 일어났는데, 세야누스는 자신의 몸으로 티베리우스를 보호하여 티베리우스의 믿음을 굳혔다.[89] 수에토니우스가 이를 받아들여 자세히 기록해 두었지만, 그가 가십을 주로 기록했던 것을 감안하면 신빙성은 높지 않다. 심지어 티베리우스에게 비판적인 타키투스조차도 이런 이야기는 싣지 않았고 거기다가 티베리우스 자신은 무척 자기 절제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90]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된 이후에도 황태후 리비아는 남편 아우구스투스 생전처럼 율리우스 가문 내 중대사를 처리하고, 아들 티베리우스에게 정치적으로 간섭까지 했다. 당연히 황제이자 율리우스 가문의 수장인 티베리우스는 지나치게 권력을 행사하던 친어머니에게 가문의 일과 정치에 더이상 개입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리비아는 그런 친아들의 요구를 거부했고 자신이 가진 권한을 행사했다. 따라서 친모자관계임에도 두 사람은 대립하였고 급기야 티베리우스는 어머니 리비아가 남편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누린 특권과 명예들을 박탈하게 된다. [91] 티베리우스의 대표적인 단짝친구로는 훗날 황제가 되는 네르바의 할아버지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가 있다. 그는 티베리우스가 진심을 털어놓고 말할 수 있는 친구이자 황제의 법률자문이었고, 당대 최고의 법률가 중 한명이었다. 네르바는 자신의 집정관 임기가 끝나자마자 친구 티베리우스를 따라 자발적으로 카프레아이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카프레아이에서 티베리우스가 죽기 4년 전에 사망했다.[92] 당시 23살이었던 네로 카이사르는 원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정해준 유니우스 살리누스의 딸과 약혼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 약혼은 티베리우스의 결정에 따라 파기됐고, 네로 카이사르는 티베리우스의 결정에 따라 차기 황제로 확정된 삼촌이자 고모부 소 드루수스의 장녀 율리아와 결혼했다.[93] 또는 백부장 등을 보내 자신을 죽일 거라는 말을 듣고 난 뒤, 본인 스스로 운명을 결정해 자결했다고 한다.[94] 원로원 의원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친척으로 29년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결혼했다.[95]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남편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33년 황궁지하실에서 죽은 뒤, 3년이 지나고서야 죄가 밝혀졌는데 그 과정에서 그동안의 간통이 밝혀졌고, 이후에도 자신의 노예들과 간통관계였음이 또 밝혀져 자살 형식을 빌린 방법으로 처형됐다.[96] 카시우스 일족 출신의 수사관이다. 32년 추방됐으며 추방된 곳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저서들은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동생 칼리굴라 시대에 모든 저서 출판이 금지되었다. 그는 수사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지만, 워낙 냉소적인 냉혈한으로도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상당히 공격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상대를 공격하던 것으로도 유명했다.[97] 소 드루수스, 아그리피나,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98] 대략 20년경의 일인데, 약혼 이야기가 나오고 얼마 안 되어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요절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99] 그리스 출신으로 이 당시 대략 30살에서 37살 사이였다고 전한다. 그는 이 사건 이후,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한 안토니아에게 자유를 선사받고 해방노예가 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안토니아와 그녀의 가족들을 도왔다. 팔라스는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자 훗날 4대 황제가 되는 클라우디우스의 해방노예 관료 3인방 중 한명으로도 유명하며, 게르마니쿠스의 장녀 소 아그리피나의 최측근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100] 세야누스의 음모 사실을 알리고, 티베리우스의 동생 드루수스와 그의 장남 게르마니쿠스의 마지막 혈육 가이우스(칼리굴라)를 보호해달라는 간곡한 호소.[101] 티베리우스는 평상시 냉소적이고 잔정이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친동생 드루수스에게만은 유독 다정다감했고 진심으로 동생을 사랑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형제 간 우애가 아주 좋았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아내 소 안토니아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신뢰했다. 이유는 소 안토니아가 20대 중반에 남편과 사별했음에도 아우구스투스의 강압적인 명령도 거부하면서 재혼을 거부한 뒤 남은 아이 3명을 그 누구의 도움도 요청하지 않으면서 키웠고, 어떤 남자와의 염문도 없을 정도로 남편 드루수스에 대한 정절을 지켰던 부분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 안토니아는 시아주버니 티베리우스와 외삼촌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존경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102] 호민관 특권은 다름아닌 신체불가침특권이기 때문에, 이걸 주면 제거해버리기가 곤란해지기 때문이다.[103] 이 당시 소방대는 단순히 불을 끄는 것만이 아니라 경찰의 업무도 겸하고 있는 무력집단이었다.[104] 자신을 우월화하면서 도미누스라는 표현을 사용케한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티베리우스는 말년 공포정치 중 분노의 일갈을 서한에 보내면서도 늘 원로원에게 존칭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105] 타키투스는 이 문구에 대해 티베리우스가 자신이 공포정치로 한 행동이 얼마나 죄악이고 파렴치한 건지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쓴 내용이라고 언급했다.[106] 그것도 아직 세야누스가 음모를 꾸미기 전이었던, 세야누스의 아버지 생전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고 한다.[107] 황제를 뜻하는 명사가 아니라 티베리우스의 성씨가 카이사르였기 때문에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를 부를 때 카이사르라고 했다. 이는 테렌티우스의 발언 외의 타키투스 저서 중 티베리우스, 가이우스 편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로마에서 카이사르가 황제명사로 변해 원로원에서 사용된 건 클라우디우스 시대부터였다. 따라서 법정에서 최후진술 중 테렌티우스가 티베리우스를 카이사르라고 언급한 것에 대해 타키투스는 마치 티베리우스가 평소 원로원에 있던 것을 연상케 하듯 그를 이렇게 불렀다고 말하고 있다.[108] 원로원 의원들은 기소 당해 변론을 할 때 세야누스 사건을 티베리우스의 공식직책 임페라토르를 사용해 ‘국가 전복 음모계획과 임페라토르 암살계획”이라고 했다.[109] 소 안토니아의 삶을 생각하면 딸 리빌라의 행동은 배신 그 자체였을거라고 분석되고 있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남편이 요절하면서 홀로 세 아이를 키우면서도 외삼촌 아우구스투스의 강압적인 재혼 명령들을 끝까지 거절한 안토니아는 그 흔한 뜬소문도 내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정절을 지키며 자신의 자녀들과 손주들을 손수 키웠다. 물론 이때 남편이 남긴 세 자녀에 대한 기대치도 상당해서 몸이 불편한 막내아들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상당히 냉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해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는 진심으로 그녀를 존경하고 아꼈다고 한다.[110]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비극적인 가족사 덕분에 셋째 아들인 칼리굴라는 로마 시민들의 동정표를 얻었고, 여기에 아버지의 후광이 더해져 그는 티베리우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높은 인기를 얻고서 황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111] 티베리우스가 사망했을 때의 나이는 79세로 그 당시의 평균 수명을 보면 굉장히 오래 살았다.[112] 이는 칼리굴라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 역시 자신의 어머니와 두 형을 죽인 것은 세야누스 외에도 공범인 원로원도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113] 이때 원로원은 베스쿨라리우스가 그동안 했던 악행을 그 자신이 그대로 뒤집어 쓴 것이라고 좋아하면서, 티베리우스의 고발 서한을 열렬히 환호했다고 한다.[114] 타키투스의 표현처럼 20대 중반의 황녀가 다른 젊은 귀족 중 한명과 재혼한 것이 아닌, 55살의 늙은 기사계급 태생의 원로원 신참자인 전직집정관 루벨리우스와 재혼했다는 점에서 안 좋은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울리아 리비아의 재혼은 로마사회에서 “누구에도 환영받지 못한 결혼”일 수박에 없었다고 한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루벨리우스가 북아프리카 속주 총독 시절 벌인 안 좋은 사건과 평판, 그리고 일부러 독신으로 살다가 갑자기 재혼한 이유 등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루벨리우스의 조부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가 로마 역사상 최초로 수사학을 가르친 인물인 점과 그가 기사계급 출신임에도 훌륭한 수사학자 집안에서 자란 뒤 집정관까지 역임한 점, 티베리우스 시대 내내 그 능력이 뛰어났음에도 티베리우스와 원로원 모두에게 안 좋게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고.[115] 이 재혼은 이후에도 재혼 전 신랑의 행보로 인한 이미지탓인지 출신의 차이로 인한 귀천상혼인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결국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클라우디우스 시대 당시, 메살리나 황후는 자신의 남편과 어린 아들을 위협할 정적으로 율리아 리비아와 그녀의 아들들을 생각했고, “제위를 노린다”는 합리적 이유를 들어 견제하다가 43년 반역죄로 기소해 재판 후 유죄로 티베리우스의 손녀와 몇 없는 후손들은 처형과 자살로 모두 제거됐다. 아울러 이 기소 당시 온화한 성격의 클라우디우스 역시 율리아 리비아와 그녀의 아들들의 기소 당시 다른 반역죄 건과 달리 조사 후 끝내 유죄선고를 내릴 수밖에 한다.[116]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 밑에서 상당히 총애받은 인사로 대 드루수스가 각별히 아낀 참모이기도 했다.[117] 더 이상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일가의 지지를 받는 클리엔테스가 아니라는 정치적 사망선고였다.[118] 이 방식으로 반기를 든 부자들은 기사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고, 놀랍게도 원로원 의원이나 고위귀족들은 고리대를 금지한 법을 잘 지킨 탓에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119] 실제로 고리대 문제로 인한 불만은 폭동을 유발하거나 로마 내에서 호민관 같이 신성불가침권을 가진 인사들조차 암살될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고 이때 고리대 문제로 폭동이 시작된 터라 반역죄로 처벌해도 기소된 고리대급업자들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120] 칼리굴라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일 뿐 아니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피, 아그리파의 피, 안토니우스의 피까지 모두 이어받은 후덜덜한 혈통이다. 반면 게멜루스는 티베리우스의 손자로서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아그리파의 피, 안토니우스의 피를 이은 것까지는 똑같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인 안토니아의 외손자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는 아니다. 심지어 게멜루스의 경우, 어머니 리빌라가 세야누스와 불륜 관계를 맺고 황실 남자황족들을 제거한데다 간통 및 반역죄로 처형당한 상태였다. 따라서 세야누스의 아들이라는 루머까지 돌았고, 티베리우스 생전부터 어머니 문제로 정통성에 흠집까지 생긴 상태였다.[121]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곁에서 강한 권력을 가지고 원로원을 상대하는 통치 등을 칼리굴라에게 가르쳤다. 이 때문인지 칼리굴라는 제위를 이어받은 이래 어리고 미숙했다. 따라서 즉위 8개월 만에 중병에서 쓰러진 이후, 건강을 회복한 직후부터 티베리우스 재위 후반과 똑같은 방법으로 정국을 운영했고, 똑같은 방식으로 근위대와 원로원을 대하다가 결국 근위대 손에 암살됐다.[122] 로마에서 원로원 계급 내 결혼은 지극히 이해중심적이었고 형식적인 경우가 많았다. 또 출산이 가능한 여성들이 20살부터 감소한 이유 때문에 기원전 1세기 카토가 자신의 친구 호르텐티우스에게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친구의 아내로 준 일도 있기도 했고, 남편이 먼저 아내를 상대방에게 신붓감으로 제안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123] 마크로가 자신의 아내 엔니아와 함께 공모 후 칼리굴라에게 접근해 그에게 결혼약속을 하게끔 한 일을 마크로 측과의 동맹 형태로 바꾼 일[124] 영화에서는 티베리우스가 게멜루스와 칼리굴라가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면 게멜루스를 죽일 테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125] 두번째 아내의 부정한 행동에 휘둘리고, 해방노예들을 비서로 삼고 통제하면서도 그 결정이 좌지우지된듯한 태도, 그리고 클라우디우스가 어린 시절부터 황실과 원로원 귀족들에게 신체적 장애 탓에 보통은 무시당하고 소외된 일들[126] 명의 카리클레스가 이때 연회를 베풀며 평소처럼 행동한 티베리우스의 맥박을 체크했고, 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짐작한 티베리우스는 일부러 연회를 계속 진행케하면서 카리클레스의 위신을 높여줄 요량으로 오랫동안 긴 안락의자에 누워 자신이 건강한 척 행동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그의 행동에도 의사는 마크로에게 이를 말했고, 주변에 있던 황제 측근들은 서둘러 회의를 연 뒤 속주 총독과 각 군대에 급사를 파견해 그 사망을 대비했다고.[127] 하지만 정통성에서도 칼리굴라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민심도 칼리굴라에게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고, 게멜루스의 나이마저 너무 어렸기에 이 정도로 게멜루스가 칼리굴라를 상대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일설에는 티베리우스가 생전에 게멜루스를 위해 칼리굴라도 트집을 잡아서 죽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지만, 칼리굴라가 처신에 극도로 신중을 기하고 자신을 낮춰 이를 전부 피해갔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을 참고.[128] 이 죽음에 대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기술은 참으로 후덜덜한데 그 내용은 이렇다. "경기장에서 창을 던지는 시범을 보여달라는 요청을 받은 티베리우스는 어깨가 탈골되면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황제가 혼수상태가 되는 일이 길어지자 로마 원로원은 칼리굴라를 황제로 추대했는데, 갑자기 티베리우스가 정신을 차리고 식사를 요구하자 로마와 칼리굴라 모두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모두가 황제가 무슨 광태를 벌일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상황에 빠진 것을 구원한 것은 근위대장인 마크로였다. 그는 잠자고 있던 티베리우스를 베개로 눌러서 질식사시켰다." 브리태니커의 기술에 사용된 자료는 타키투스의 기록에 의거한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은 타키투스의 기록을 참조한 이야기. 다만 티베리우스 치세 당시의 로마인이었던 박물학자 대(大) 플리니우스는 그냥 노화에 의한 자연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티베리우스를 굉장히 혐오했던 타키투스의 기술이었던 만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129] 말년의 스탈린을 다룬 영화 <붉은 황제>에서 스탈린의 죽음 부분은 티베리우스의 죽음에 얽힌 소문과 매우 흡사하게 묘사된다. 죽은 줄 알고 다가갔는데 눈을 번쩍 뜨길래 목을 졸라 살해...[130] 이런 까닭에 칼리굴라가 암살된 이후 나온 소문이 오늘날에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확정된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를 베게로 질식사시키고 억지로 손가락에서 반지를 뺐었다. 이때 근위대장의 아내와 간통을 하고 주변에 거액의 후원금을 미끼로 충성을 받아낸 뒤 본토에 돌아와 실감나게 우는 연기를 펼쳤다”이다.[131] 그나마 게르마니쿠스의 어머니이자 칼리굴라의 할머니, 동시에 게멜루스의 외할머니가 되는 안토니아만이 게멜루스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열병 이후 권력과 자신의 안위에 집착하게 된 칼리굴라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친손자가 외손자를 죽이는 동족상잔을 보고 크게 상심한 안토니아는 얼마 안 가 병으로 사망한다.[132] 안토니아는 바로 저 칼리굴라를 살리기 위해 티베리우스에게 피신을 보냈던 장본인인데, 얄궂게도 그녀의 이런 선택의 결과로 외손자가 죽게 된 셈. 거기다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로 태어나 티베리우스의 제수씨이자 동생 드루수스의 아내로 일찍 남편을 여의고도 오랜기간 생존한 그녀이지만, 자신의 딸이 사위를 독살하거나 다른 손자들을 죽이는데 일조하고, 손자들끼리 죽고 죽이는 등 온갖 못 볼 꼴을 다 지켜봐야했던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133] 이 뒤는 오히려 티베리우스의 원래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황제들이 잇게 되는데, 바로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인 클라우디우스와 그의 양자이자 조카손자인 네로이다. 이 네로는 칼리굴라의 여동생인 소 아그리피나의 아들이라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면서도 아우구스투스의 피도 이은 인물이지만, 결국엔 이 클라우디우스 왕조마저도 27년만에 끝장나고 로마는 네 황제의 해라는 극심한 혼란기에 접어들게 된다. 자세한 것은 을 참고.[134] 원로원 입회때마다 늘 가벼운 흉갑을 안에 입고, 화려하고 재질 좋은 토가 차림을 했던 것으로 유명했다.[135] 수에토니우스가 워낙 안티였기 때문에 과장도 많고 뻥도 많다는 평이다.[136] 수에토니우스는 그러면서도 초능력이 1~2분 뒤에 사라졌다고 기록했다. [137] 이후 근위대가 로마 제국에 미친 해악을 생각하면 이 사실은 진부한 데다가 번역투이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138] 칼을 칼집에 꽂아두고 은근한 협박을 가하는 것과 이것을 실제로 휘두르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다.[139] 물론 낌새를 눈치챈 티베리우스가 재빨리 세야누스를 숙청해버리지만.[140] 베스파시아누스 때 근위대를 해체하고 무력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한번 찾아왔는데, 그 역시 정권 강화를 위해 근위대를 유지해야 한다는 유혹에 굴복했다.[141] 사실 이렇게 된 것은 황제의 지위를 애매모호한 상태로 만든 아우구스투스의 책임도 있다. 본인이야 만렙 정치력으로 별 문제없이 통치했지만 그만한 정치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세계 역사를 모두 뒤져도 흔치 않다. 제국 운영에 대하여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을 택한 것이었는데 그게 나쁜 선례가 되어버린 셈.[142] 트리야누스에게 넘겨주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별다른 행적이 없는 네르바는 제외한다.[143] 한 일화에 따르면, 자신에게 커다란 숭어를 바치려는 어부를 휴식을 방해했다면서, 숭어를 어부의 배에 문지르게(숭어 비늘은 따갑다고...)한 다음, 게로는...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에 나온 이야기이긴 한데, 이 어부가 온 방향이 하필 영 좋지 않았다. 들어가지를 못하게 막으니까 절벽을 타고 올라와서 황제에게 바쳤는데 티베리우스는 이 어부가 휴식을 방해한 것만큼이나 절벽에서 나타난 것에 더 식겁했다고. [144] 아우구스투스 시절 이곳저곳 원정을 다녔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가보지 않은 제국의 중요 지역은 이집트와 아프리카 정도일 것이다.[145] 이 사람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형 처분에 서명한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그 사람이다.[146] 티베리우스의 긴축정책에 대한 정당화는 위의 각주를 참조할 것.[147] 티베리우스는 20대부터 50대까지 30여년을 게르마니아에서 근무한 인물이고, 선제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프로젝트를 동생, 조카, 아들과 진두지휘했다. 따라서 제국 내 엘리트 계층 중 게르마니아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148] 돈을 통크게 쓰면 인기가 유지되지만 재정에 빨간불이 켜지고, 돈을 아끼면 재정이 건전해지지만 인기가 꽝이 되는 것은 모든 로마 황제들의 딜레마였다. 의외로 로마 황제는 그렇게 돈을 마음껏 쓸 수 있는 부유한 존재는 아니었다. 제국군의 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이로 인한 낮은 선방어의 병력 밀도는 훗날 국경선에서의 압력이 가중되고 내부 역량을 뒤떨어지는 시기에 선방어의 한계를 노출시키지만, 이런 적은 수조차도 그리 좋은 대우를 받고 잘 관리되지 못하는 현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자를 보며 속주를 운영한다?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149] 사실 이렇게 된 건 원로원의 잘못도 크다. 티베리우스도 치세 초기에는 원로원과 협력하려고 상당히 노력했다. 문제는 원로원이 티베리우스에게 어려운 일들을 몽땅 떠넘기고는 "우리는 거수기인데 뭐하러 물어보냐?"는 식으로 책임회피를 해버린 것. 사실상 원로원이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태였다. 특히 원로원은 무능하기 짝이 없어 제국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도 못했다. 그러니 칼리굴라가 "내 애마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해야 겠다"고 비꼴 정도였다. 여러 차례 비난과 힐책을 해도 별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티베리우스가 이럴 바에 그냥 나 혼자 통치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만 어차피 원로원은 실권을 가지지 못했고, 유력 원로원 의원은 황제의 견제대상이 되거나 음모에 휘말릴 수도 있었으며, 야심있고 능력있던 원로원 의원들은 제정 전복을 꾸미다 사형당하는 등 아우구스투스 시절부터 원로원의 정치 참여에는 여러 제약이 있었다. 그리고 군단을 거느린 속주 총독직의 경우 어차피 원로원의 유력 귀족들은 임명되지 못하였고 대개 신진 가문이나 비유력 가문 출신들이 임명되었다. 네로 시절까지 고위 귀족 및 황실과 혈연이 있던 귀족들은 종종 음모를 꾸미거나 연루되어 숙청당하는 일이 잦았다.[150]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대표적인 차이점이다. 티베리우스는 재위 초반과 달리 후반부터는 통치만 유효하다면 원로원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접근했다. 여기에는 원로원에게 협력의 손길을 먼저 내민 티베리우스를 원로원에서 삐딱하게 바라본 이유도 있겠지만, 두 황제의 스타일이 달랐던 이유가 컸다. 아우구스투스는 통치체제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중시했고, 티베리우스는 이를 무시한 독선적인 통치를 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문제는 티베리우스와 같은 인물이 정치를 한다면 그래도 노련한 행정이 되지만 칼리굴라와 같이 경험이 부족하고 정치적으로 미숙한 사람이 정치를 했을 때는 그런 거 없다. 로마 황제는 티베리우스 하에서 수도 로마를 비워도 통치할 수 있는 견제받지 않는 절대권력이 되어갔고, 로마는 전제군주제가 된다. 하지만 이 때문에 칼리굴라가 집권해서 벌인 짓을 생각하면... 티베리우스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151]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상황은 칼리굴라가 4여년 만에 암살당하고 종국적으론 티베리우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 중 율리우스 가가 먼저 사라지고, 남은 본가까지 완전히 멸문한 이유가 된다.[152] 한 사람으로서의 삶 자체가 말 그대로 굴곡의 연속이었다. 죽기 전까지 사이가 험악했던 친어머니와의 관계, 마음의 안식처를 준 친동생의 요절, 행복했던 가정생활도 강제 이혼과 재혼 등으로 파탄, 아끼던 조카이자 양아들 게르마니쿠스의 죽음과 이로 인해 발생한 소문과 오해로 벌어진 대 아그리피나와의 대립, 외아들 드루수스의 의문사 등.[153] 이것도 사실 비용이 만만치 않다. 아이슬란드의 주된 산업 중 하나는 풍부한 자연 에너지를 이용한 알루미늄 제련인데, 2008년에 가동을 시작한 알루미늄 제련소 한 곳을 운영하기 위해 700MW, 아이슬란드 전체 전력량의 1/3에 달하는 수력 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해야 했다. 다른 예로, 세계 최대의 알루미늄 제련 회사가 노르웨이에 있는데 풍부한 수력발전자원을 이용한다. 산유국인 노르웨이에 전기자동차가 아주 많이 보급된 여러 이유 중 하나. 애플은 이 회사제 알루미늄을 사면서 친환경 소재를 쓴다고 광고한다.[154] 두 황제는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행정에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원로원과 지속적으로 마찰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그렇다.[155] 하나는 친아버지, 둘째는 아내였던 빕사니아, 셋째가 드루수스.[156] 이때 "당신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변할지 두려워"라고 얘기하는데 그의 우려대로 티베리우스는 점차 권력의 괴물이 되어간다.[157] http://www.youtube.com/watch?v=15u7gDUo-VE&feature=related 에서 확인 가능. http://games.ea.com/cncmovies/tiberium.html 의 C&C-Nod campaign-Kane provides extensive insight on tierium에서도 확인 가능하다.[158]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주연, 그리고 트로이에서 프리아모스왕을 맡아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159] 또 피터 오툴은 2003년 영화 '아우구스투스'에서는 노년의 아우구스투스도 맡은 경력이 있다.[160] 영화제작 과정에서도 이 점 때문에 더 자극적으로 만들라는 제작사의 요구로 감독이 두번이나 강판되었다. 그리서 틴토 브라스 외에 감독이 둘이나 더 있고, 아예 틴토 브라스는 자신의 영화라고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까지 했다.[161] 다만 그저 살색영화라고 폄하하기에는 출연진이 후덜덜한데, 주연인 칼리굴라역의 맬컴 맥도월은 물론이고 티베리우스 역을 맡은 피터 오툴, 거기다 네르바 역을 맡은 것은 당대 영국 셰익스피어극의 1인자였던 존 길구드경이라는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한다.[162] 소년, 소녀뿐 아니라 온갖 이형의 사람들을 모아서 카프리 섬을 무슨 복마전처럼 만들어 놓은 것으로 나온다.[163] 로마의 12대 황제인 네르바의 할아버지다.[164] 칼리굴라와 게멜루스와 함께 식사를 하다가, 칼리굴라와 눈을 마주보면서 옆에 게멜루스에게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면 게멜루스를 죽일테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165] 다만 카프리 섬에서 게멜루스를 곁에 끼고 칼리굴라에게 포도주를 권했는데 그 안에는 독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영악하게도 칼리굴라는 그 잔을 게멜루스에게 권했고 아무것도 모르던 게멜루스가 그걸 마시려 하자, 티베리우스가 그 잔을 뺏어 들고는 옆에 있던 나체 차림의 여시종에게 마시라고 준다. 당연히 그 여시종은 사망(...).[166] 겉모습에서도 배우인 피터 오툴은 나이를 먹은 후에도 상당한 미중년이었지만, 여기서는 흡사 마약중독자처럼 퀭하게 분장을 해놨다.[167] 이때 옆에서는 완전 백치상태로 설정한 클라우디우스가 칼리굴라의 춤을 보고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물론 클라우디우스의 치적을 보면 알겠지만, 클라우디우스는 어느 정도 장애는 있었을지언정 이런 완전 백치는 절대로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고.[168] 네르바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을 동정하며 옆에 있던 칼리굴라에게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라고 안타까워 하지만, 칼리굴라는 태연하게 "이들이 좋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황제께서 사형을 선고하실 수 있었겠나"라며 응수한다. 그러자 네르바는 이 작은 폭군을 보며 "완벽한 논리군요"라고 체념한다.[169] 역사 속 네르바는 티베리우스보다 4년 먼저인 서기 33년에 카프리 섬에서 노환으로 죽었다.[170] 이 장면에서 아리우스와 대화하는 티베리우스를 벤허가 굳은 표정으로 바라본다. 자기 고향과 민족을 탄압하는 장본인이기 때문.[171] 작중에서도 나이가 많게 나오지만, 당시 티베리우스 배역을 맡은 배우 조지 렐프도 나이가 매우 많았는데 그 다음해인 1960년에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