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키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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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Flavius Mauricius Tiberius Augustus
그리스어: Φλάβιος Μαυρίκιος Τιβέριος Αὔγουστος
생몰: 539년 ~ 602년 11월 27일
재위: 582년 8월 14일 ~ 602년 11월 27일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582년부터 602년까지 제국을 통치하며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발칸 반도를 침략한 아바르족을 격퇴하며 2세기 만에 다뉴브 강을 건너 야만족의 영역에서 전쟁을 치뤘다. 또한 지중해 서부에서의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강화해 제국이 유스티니아누스 1세 말기 이래 오랫동안 겪었던 곤경에서 벗어나 번영하는 듯했다. 그러나 제국의 재정은 전임 황제 티베리우스 2세의 낭비와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고갈 지경에 이르렀고, 이 때문에 긴축 정책을 실시하다가 시민과 군대의 반발을 사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마우리키우스는 539년 카파도키아의 아라비수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혈통에 대해 여러 설이 존재한다. 일부 자료는 그가 카파도키아의 그리스인이라고 기술되었고, 또다른 자료는 그가 그리스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이라고 적었다. 역사가 에바그리우스 스콜라스티쿠스(539~600)는 마우리키우스가 오래된 로마인의 후예라고 주장했지만 신빙성은 없다. 마우리키우스는 560년대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상경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곳에서 당시 황실 친위대인 엑스쿠비토레스 병단의 코메스였던 티베리우스 2세의 수행원으로 발탁되었다. 티베리우스가 574년 카이사르로 지명되었을 때, 마우리키우스는 그를 대신해 엑스쿠비토레스 병단의 코메스로 임명되었다.
577년 말, 마우리키우스는 제국 동방의 동로마 제국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578년 사산조 페르시아가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자, 그는 즉각 반격에 나서 그들을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으로 몰아냈다. 호스로 1세는 예전과는 달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동로마 제국군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려 했지만 협약에 도달하기 전에 사망했고 후계자 호르미즈드 4세는 협상을 중단했다. 이에 마우리키우스는 새 왕중왕 등극으로 페르시아가 어수선한 틈을 타 가산 왕국과 연합하여 사산조 페르시아를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581년, 마우리키우스는 알 문디르 3세가 지휘하는 가산 왕국군의 지원을 받으며 사산조 페르시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으로 진격했다. 그의 군대는 함대를 동반하여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해 아나타 요새를 공략했고 뒤이어 메디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남부를 가로질렀다. 그런데 문디르는 이 정보를 호르미즈드 4세에게 제공했고 페르시아군은 너무 깊숙이 들어온 동로마 제국군을 향해 역공을 가했다. 그러나 문디르는 다시 동로마 제국과 협력하기로 하고 페르시아군을 격파했으며, 마우리키우스는 이 틈에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우리키우스는 국경에 다다랐을 때 페르시아의 장군 아다르마한과 교전을 벌여 패배했다.
582년, 페르시아는 자국의 영역을 침범한 동로마 제국에게 보복하기 위해 탐호스로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해 콘스탄티나를 공격했다. 그러자 마우리키우스는 응전했고, 탐호스로는 마우리키우스에게 패배한 직후 전사했다. 하지만 발칸 반도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자, 티베리우스 2세는 마우리키우스를 급히 소환해 상황을 수습하게 했다. 마우리키우스를 대신해 동방의 제국군을 통솔하게 된 미스타콘은 티그리스 강과 님피우스 강이 교차하는 지점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결국 미스타콘은 해임되고 필리피키우스가 그의 직위를 이어받았다. 한편 티베리우스 2세는 가산 왕국의 문디르가 배신하는 바람에 아군이 위험에 처했다는 마우리키우스의 보고를 받자 곧바로 문디르를 체포해 처형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의 충실한 동맹이었던 가산 연맹은 붕괴되었다.
2.2. 황제 즉위
582년 8월 13일, 티베리우스 2세는 임종을 눈앞에 뒀다. 그는 죽기 일주일 전에 후계자로 마우리키우스를 지명하고 자신의 둘째 딸 콘스탄티나와 결혼하게 했다. 티베리우스 2세는 연설문을 준비했지만 임종을 앞둔 시점에서 그걸 읽기엔 힘이 들었기에 제국의 수석 사법관 사크리 팔라티가 대신 읽어줬다. 그 연설은 마우리키우스가 제위 계승자임을 공표하는 것이었는데, 마지막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582년 8월 14일 티베리우스 2세는 사망했고 마우리키우스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이 소녀와 함께 나의 주권을 너에게 넘겨주노라. 언제나 형평과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가짐으로 훌륭한 통치를 해 나의 선택을 빛나게 하라."
2.3. 황제 마우리키우스
[image] 600년의 로마 제국
마우리키우스는 584년 이탈리아 중북부에 라벤나 총독부를 설치하여 랑고바르드족의 전진을 저지하는데 크게 공헌하였고, 572년부터 간헐적으로 계속되던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 586년에는 솔라콘 전투에서 헤라클리우스[1] 의 활약으로 사산 제국군을 격파하였다. 591년, 동로마 군대는 호스로 2세를 도와 찬탈자인 바흐람 추빈의 군대를 블라라톤 전투에서 격파하고 호스로를 복위시켰다. 따라서 양국 간의 전쟁은 우호적으로 귀결되었으며 그 대가로 호스로 2세로부터 아르메니아와 코카서스의 상당한 영토를 할양받았다. 향후 포카스가 찬탈하고 나서 호스로 2세는 은인 마우리키우스의 복수라는 명목으로 동로마 제국을 침공, 시리아와 이집트 일대를 15년간 지배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솔직히 명분이고, 실제로는 복위를 댓가로 땅을 넘겼기 때문에 국내 권위가 떨어졌고 그걸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땅을 언젠가는 찾아야 했는데, 마침 명분으로 붙일 적절한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자세한 것은 Byzantine–Sasanian War of 572–591, Sasanian civil war of 589–591을 참조하면 좋다. 이 중 영토를 페르시아에서 할양받았던 점이 위키백과 중 전자 문서에서 'Territorial changes : Khosrow II gives the Byzantine Empire most of Persian Armenia and western half of Iberia after the Sasanian civil war of 589-591'라고 적시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지배한 기간은 그 유명한 602-628년의 전쟁이 일어났었으며 이후 얼마 안 있다가 640년대에 아랍이 아르메니아와 코카서스 일대를 점령했던 관계로 얼마 안 된다. 이후 이 지역에 로마가 다시 진주한 것은 400여 년 뒤의 바실리오스 2세였다. 이 때 할양받은 땅에는 구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였던 티그라노케르타(Tigranocerta), 먼 미래에 로마가 대패했던 것으로 잘 알려진 만지케르트가 포함되어 있다. 참고로 티그라노케르타의 '케르타'와 만지케르트의 '케르트'는 같은 표현이다. 저 위의 지도에서는 흑해 해안선이 소아시아와 라지카 사이에서 꺾이는 지점보다도 국경이 꽤나 더 동쪽으로 확장되어 있는데 이 591년의 영토할양을 반영한 것이다. 즉 연도별 영역을 표시하는 지도나 지도 영상에서 591년에 로마 영토가 동쪽으로 확 넓어지는 것이 반영되지 않았다면 오류이다.
마우리키우스가 페르시아 전선에 신경쓰는 동안, 제국의 핵심부인 발칸 반도 일대는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에게 유린당하였다. 582년에 아바르에게 다뉴브 최대의 거점인 시르미움이 함락당하였고, 584년에는 슬라브족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포위당하였다. 침공이 극에 달했던 586년에는 아바르족이 테살로니카를 포위하였고 슬라브인들은 그리스를 관통, 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남하하였다. 591년부터 반격을 개시한 마우리키우스는 592년에 시르미움을 회복하였고 593년에는 아바르 - 슬라브 - 게피데 연합군을 격파한 후 다뉴브 강을 도하하여 북진하였다. 599년까지 다뉴브 강 이남의 야만인들은 일소되었고, 602년에 슬라브인들은 왈라키아에서 대패를 맛보았다. 마우리키우스의 발칸 작전에 대해서는 영어 위키백과에 따로 문서(Maurice's Balkan campaigns)가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싶으면 이곳을 참조하면 된다. 591년 마우리키우스는 다뉴브 전선에서도 맹활약하여 599년까지 아바르족을 다뉴브 강 이북으로 몰아내었다.
한편, 마우리키우스는 서방 한정으로 새로운 속주 체제를 세웠다. 종래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이래의 민정-군정의 엄격한 분리가, 수십 년에서 백 년 가까이 뺏겼다가 다시 찾은 서로마 지역에는 그 득보다는 실이 크다고 판단하여, 민정과 군정을 다시 합치는 형태로(노골적으로 말하면 군사령관이 민간통치를 겸한 일종의 군정의 형태로) 584년 이탈리아 라벤나에 총독부를 설치했는데, 총독은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오로지 황제에게만 책임을 졌다. 이러한 그의 체제 정비는 효과를 봐 롬바르드족이 더이상 남진하지 못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591년, 마우리키우스는 뒤이어 아프리카 속주의 수도인 카르타고에 총독부를 설치해 이탈리아처럼 총독이 속주를 수호하게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탈환한 서방속주에만 민군합동 총독부/총독령[2] 을 설치했고, 기존의 동로마 영역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로 계속 유지되었던 대관구[3] -관구[4] -속주[5] 3층위와 민정-군정 분리 체제를 계속 유지함으로써 이원화했다는 점이다. 7세기 중후반에 아랍에게 뺏기지 않고 남은 영토를 기존 속주-관구 체제에서 테마로 바꾸었을 때도 서방의 총독부를 테마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둠으로써, 이러한 이원적 지방행정구조는 아프리카 총독부가 무너지는 698년은 물론, 라벤나 총독부가 무너지는 751년까지도 테마와 총독부가 공존하는 형태로 계속되었다.
한편, 마우리키우스는 긴축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주요 행사에 더 이상 돈을 투자하지 않았고 시민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걸 중단했다. 또한 국고가 탕진될 지경에 이르자 지출을 줄이기 위해 군 감축을 감행했다. 서기 588년에 모든 군량의 4분의 1을 감축해 동방군이 폭동을 일으키게 만들었고 599년에는 아바르족이 잡아간 제국군 포로 '''1만 2천 명'''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해 포로들이 모조리 학살당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그의 이 같은 긴축정책은 시민과 군의 불만을 샀고 그가 몰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구글 검색 시 첫페이지에 나오는, 미디엄의 The Seventh Century Transformation of Byzantium에 따르면, 'Maurice was trying to maintain control over war expenses and while he was right in that regard, he was far more frugal than it was politically wise', 즉 해석하면 마우리키우스는 전쟁비용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려 노력했고, 이런 관점에서 옳았기는 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할 정도로 과하게 알뜰했다고 한다. 로마 황제 자리는 근본적으로는 군사적 공적을 쌓고 그렇게 얻은 재물을 시민들에게 잘 베풀어줌으로써 민심을 얻었던 포풀라레스(민중파)의 카이사르와 그를 이은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이어지는 자리이기 때문에, 빵과 서커스로 대표되는 후한 복지와 국고 관리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했는데, 마우리키우스는 후자에 기울어진 나머지 전자를 너무 등한시하다가, 충분히 능력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너무 잃어서 몰락했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재정관리를 빡세게 해서 각계각층의 불만을 샀으며, 여러 반란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살아남아서 천수를 누린 아나스타시우스 1세와 비교할 경우 분명히 마우리키우스가 이점이 훨씬 많았다. 먼저 즉위 시점에서 나이가 60세로 많았고(431년생, 491년 즉위) 비탈리아누스에게 쿠데타를 당했던 510년대 당시 '''80대'''였던 아나스타시우스와 달리 즉위 시점에서 나이가 43세로 적절했다.(539년생, 582년 즉위) 또한, 순수 문관이었던 아나스타시우스와 달리 장군 출신이라 본인이 군 지휘능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발칸 전선 방위라는 군사적 업적을 세울 수 있었으며 여차하면 반란을 친히 진압할 수 있었다. 한편, 단성론을 믿었던 아나스타시우스와 달리 정통 칼케돈파여서 종교계와의 마찰요소가 훨씬 적었다. 또한, 전임자에 의한 계승이 아니라 황후의 일종의 택군(擇君)에 의한 추대로 즉위했던 아나스타시우스와 달리 위에서 보듯이 전임자 티베리우스 2세에게 확실하게 후임자로 지명을 받았다. 591년의 페르시아 왕위쟁탈전 개입에 대한 댓가로 아르메니아와 코카서스 일대의 큰 땅을 할양받은 업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스타시우스와 달리 결국 쿠데타를 막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던 점을 볼 때, 재정을 아끼는 것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것을 위해서 12,000명이나 되는 포로를 (재정능력이 허락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도) 구출해오지 않고 다 죽게 방조한 것의 충격이 당대인에게 매우 컸던 것으로 볼 수 있다.
597년, 마우리키우스는 장남 테오도시우스를 동방의 황제로, 차남 티베리우스를 서방의 황제로 계승시킨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그의 어린 네 아들들로 하여금 알렉산드리아, 카르타고, 안티오크, 라벤나에서 제국을 4등분해 통치하는 것을 고려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와 흡사한 정책이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602년의 반란으로 중단되었다.
2.4. 반란과 죽음
마우리키우스는 602년의 겨울을 다뉴브 강 이북의 숙영지에서 나게 되었는데, 장병들의 불만이 커져서 장군 포카스를 필두로 한 반란이 일어났다. 이후 수도에서도 폭동이 발생하였고, 포카스는 전임 황제와 그 아들들을 처형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마우리키우스는 자신의 눈 앞에서 어린 네 아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연신 아래의 말을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후 마우리키우스와 네 아들의 시신들은 바다에 던져졌고, 머리 다섯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져와 햅도몬에 효수되었다. 후기 로마와 동로마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유튜버 'Thersites the Historian'의 'Maurice, 582-602: Byzantium's First Soldier-Emperor' 영상의 19분에서 21분 40초쯤까지가 이 반란과 죽음에 대한 내용인데, 그 삽화에 효수된 여섯 머리가 나와 있다.
3. 참고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 <비잔티움 연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