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로 1세

 


사산 왕조의 제25대 샤한샤. 재위기간 531 - 579년
1. 개요
2. 위기의 사산 제국
3. 호스로 1세의 치세
3.1. 내정
3.2. 외치
4. 평가


1. 개요


'''Anushirvan'''[1]
사산 왕조를 최전성기로 끌어올린 명군. 사산 왕조는 이 시기 최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이 시기 정점에 도달한 사산 왕조의 문화는 여러 민족에게 영향을 끼쳤다.
카바드 1세의 널리 알려진 네 아들 가운데 3남. 큰형은 카우스(Kawus), 둘째형은 자마습(Zamasp), 바로 밑 동생은 크세르크세스(Xerxes). 3남인 호스로는 이들 중 카바드 1세에게서 압도적으로 편애를 받으며 자라왔다고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에프탈 추장의 딸로 투란도트 전설의 주인공이 되는 네완도트(Newandokht)이다. 당시 에프탈의 군주였던 에프탈 3세[2] 의 딸 혹은 손녀로 그녀의 오빠는 아스페베데스라고 로마인에게 불렸던 장군으로 아미다 정벌의 선봉장이었다. 페르시아어로 당시 우즈베키스탄의 투란저지대를 의미했던 투란의 공주(dokht) 라는 의미의 조어이다. 사산 왕조 황실에 에프탈의 피를 가진 황후는 그녀 이외에도 한 명이 더 있는데, 바로 호르미즈드 4세의 황후 후라드도트(Khuraddokht)이다. 에프탈은 다섯 명의 추장이 통치하였는데 1세인 쿤한, 3세인 네완, 5세인 후라드의 이름만 알려져 있다.

2. 위기의 사산 제국


호스로 1세의 즉위 전 사산 제국은 그야말로 국가 막장 테크를 착실하게 밟아나가고 있는 상태였다. 에프탈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국가 재정은 휘청거리고 있었고, 그나마도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막대한 전쟁배상금으로 파산 직전의 상태에 몰려 있었다. 급기야 호스로 1세의 아버지인 카바드 1세는 에프탈에게 인질로 보내지고, 할아버지인 페로즈 1세는 에프탈과의 싸움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왕가의 권위가 실추되어 수차례 왕권에 도전하는 귀족들과 내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혼란은 자연스럽게 민중들의 불만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기존의 조로아스터교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신흥 종교인 마즈다크교가 큰 인기를 끌면서 사회적인 혼란은 점점 가중되기만 했다. 마즈다크교는 부패한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좋은 의도를 바탕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방법으로 완전한 부의 분배와 계급제도의 완벽한 철폐를 주장했다. 쉽게 말해 공산주의의 6세기 버전. 물론 역사가 말해주듯 20세기의 경제력과 기술력으로도 달성하지 못한 완전 평등 사회를 고대 페르시아에서 구현한다는 것은 헛된 꿈에 가까웠다. 현실을 고려하여 실현 가능한 진보적 사상으로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면 민중들의 삶에 크게 이바지 할 수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마즈다크교는 재산의 공유를 넘어 '''여성의 공유를 주장'''하는 등 그 혁명성을 제어하기 어려워지면서 혼란만이 가중되고 있었다.
문제는 마즈다크교가 요구하는 수많은 개혁안 중 '부패한 귀족의 개혁'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카바드 1세가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이 마즈다크교를 후원했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는 귀족들과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어마어마한 반발을 샀을 뿐 아니라, 따지고 보면 계급제도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황제의 자리에 있는 카바드 1세의 입장에서 마즈다크교의 급진적인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왕권 강화라는 기존의 목적은 달성했으되, 사회의 혼란은 더더욱 심화시킨 셈.
외교적으로도 불안한 기류가 이어졌다. 동쪽의 에프탈은 강화를 맺고 공물을 바치며 간신히 평화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기본적으로 유목 민족인 에프탈이 언제 다시 호전적인 태도로 돌변할지 알 수 없는 상태였고, 100년 가까이 지속된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도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본래 동로마와 사산 제국은 공공의 적인 카프카스 산맥 북쪽의 이민족을 방어하기 위해 사산 제국이 군사를 동원해 전쟁을 벌이는 대신 동로마가 그에 따른 지원금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동로마는 구체적인 조약을 맺은 적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지원금 제공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당장 국고가 텅텅 비기 일보 직전이었던 카바드 1세는 이 지원금을 요구하며 동로마와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결과로 지원금을 약속받아 사산 제국은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었지만, 오랜 평화가 깨지고 동로마와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3. 호스로 1세의 치세


이러한 혼란 속에서 즉위한 호스로 1세는 즉시 개혁의 칼날을 뽑아 들려 했지만, 우선 왕권 확립이 시급했다. 호스로 1세는 카바드 1세의 총애를 받았으나, 그는 어디까지나 3남이었다. 반면 첫째인 카우스는 연장자일 뿐 아니라 북부 지방에서 지방관으로 복무하며 행정적, 군사적 경험을 쌓은 강력한 라이벌이었으며, 마즈다크교 신도로서 대중들의 지지도 확고한 편이었다. 그러나 한때 마즈다크교를 후원했던 카바드 1세는 말년에 이르러서는 마즈다크교의 지나치게 과격한 사상에 완전히 질려버렸고, 호스로 1세를 후계자로 임명한다.
카우스는 이에 반발하여 은근히 반란을 계획했지만, 호스로 1세는 마즈다크교의 신도들을 숙청하는 강경책을 통해 카우스의 지지기반을 크게 약화시켜 손쉽게 반란을 제압한다. 호스로 1세는 마즈다크교의 창시자인 마즈다크와 휘하 신도들을 자신의 궁궐로 초대한 뒤 그 자리에서 기습하여 모조리 몰살시켜 버렸다. 일설에 따르면 마즈다크가 자리에 없는 틈에 신도들을 모두 죽여버린 뒤, '''시체들을 궁궐 정원에 거꾸로 묻어 다리가 허공에 달랑달랑 솟아나와 있도록 만들어''' 마즈다크에게 보여준 뒤 충격에 빠진 마즈다크를 목 매달아 죽였다고 한다. 카우스는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 앞에 끌려가 마지막으로 참회할 기회를 받았지만, 끝내 신념을 바꾸지 않고 일가 친척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마즈다크교를 숙청하고 조로아스터교의 권위를 회복시킨 호스로 1세는 종교계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고, ''''불사의 영혼을 가진 자' (Anushirvan)'''라는 영예로운 칭호도 이 때 수여받게 된다.

3.1. 내정


종교계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음과 동시에 정적을 숙청하는 일석이조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한 호스로 1세는 엄청난 속도로 사산 제국을 뜯어 고치기 시작했다.
첫째로, 페로즈 1세가 에프탈과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하면서 증명했듯, 군사 제도의 개혁이 절실했다. 당시 사산 제국은 거대한 단일 군단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넓은 영토를 수비하기에 비효율적이었을 뿐 아니라 단 한 번의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진다는 치명적인 약점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대를 유지하는데는 막대한 돈이 필요하고, 사산 제국의 재정 상태는 파산 직전의 상태에 몰린지 오래였다.
카바드 1세 역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설문을 돌려 시민들의 재산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지만, 인터넷이나 하다 못해 전화라도 있는 현대와 달리 고대 국가에서 전국 조사는 끔찍할 정도로 오랜 세월이 걸렸고, 카바드 1세가 사망한 뒤 호스로 1세가 즉위하고 나서야 비로소 조사가 일단락 되었다. 축적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호스로 1세는 곧장 세금 제도를 개편했다. 시민의 재산 상황에 따라 적절한 수준의 세금을 책정했고, 보관과 운송이 어려운 현물이 아니라 화폐를 통해 세금을 납부하도록 했다. 시민들은 이전보다 약간 많은 세금을 납부하게 되었으나, 줏대 없는 세금 책정으로 말도 안되는 수준의 세금을 물어 패닉에 빠지는 일이 간혹 있었던 시민들은 세금 액수에 일관성이 생겼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시스템을 환영했다.
또한, 세금을 걷는 체계를 개편함으로서 귀족들의 권력을 견제하는 효과도 거두었다. 페르시아 지방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고대부터 유력 귀족 가문들이 자신들의 토지를 다스렸다. 그 중에는 심지어 사산 제국의 역사보다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토지를 지킨 가문도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세금을 걷는 것은 지방 귀족들의 고유한 권한이었으며, 지방에서 모인 세금이 중앙으로 모이는 봉건적인 시스템을 유지해 왔는데, 이는 당연히 비효율과 부패를 야기하여 실질적으로 중앙 정부에 모이는 세금의 양은 실제 생산력에 한참 밑도는 양에 불과했다.
앞선 개혁으로 세금을 책정하는 권한을 귀족에게서 뺏어온 호스로 1세는 데흐건(dehgan)이라는 관료 계층을 새로 만들어 세금을 걷는 권한 자체를 중앙 정부로 가져와 귀족들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더 이상 지방의 귀족들은 실제로 걷은 세금의 양을 속일 수도 없었고, 그 과정에서 몰래 자신들의 부를 축적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상의 성공적인 개혁으로 사산 제국의 연 수익은 이전의 '''두 배'''가 되어 과거의 쓰라린 기억을 딪고 훌륭하게 재건되었으며, 마침내 군사 개혁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호스로 1세는 3개의 군단을 신설하여 총 4개의 군단을 만들었다. 각 군단은 사산 제국의 각 전선을 수비하도록 하였으며, 각 군단의 지휘관으로 귀족들을 임명하여 귀족들의 불만을 달랬다. 그러나 호스로 1세는 귀족들이 자신의 근거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군단만을 지휘할 수 있도록 조치하여 귀족들이 지방에서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교묘함도 보여주었다. 귀족들과 정면으로 치고 받으며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뚜렷한 성과는 얻지 못한 카바드 1세와는 달리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하며 귀족의 핵심 권력은 죄다 없애버리는 호스로 1세의 능수능란한 정치력을 엿볼 수 있는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각종 기반 시설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우선 조로아스터교 내에 가난한 이를 구제하는 기구를 만들어 마즈다크교의 추종자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사산 제국의 주요 전선에 강력한 요새를 건설했으며, 새로 길을 내어 병력의 움직임을 신속하게 만듦은 물론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양간의 교역도 더욱 활성화 시켰다. 로마 제국과 인도, 중국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에 있는 사산 제국은 이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었으며, 어마어마한 양의 지식을 빨아들였다. 공교롭게도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그리스 로마 전통 다신교를 금지했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의 지식을 공부하던 수많은 철학자들이 사산 제국으로 향했는데, 호스로 1세는 이들을 극진히 환영하여 사산 제국의 국립 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후원해 주었다. 이 행동을 통해 호스로는 철학자들로부터 ''''플라톤의 철인왕(Plato's Philosopher king)''''[3]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기에 이른다.
이렇게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국립 대학교에 국립 병원을 신설했는데, 병원과 함께 지어진 도서관은 무려 259개의 방에 전문 서적이 빼곡히 채워져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지식량을 자랑했다고 한다.[4] 또한 인도에서 의학 지식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체스백개먼을 비롯한 각종 보드게임도 사산 제국으로 흘러들어오게 된다. 사산 제국에서 유행한 보드 게임들은 자연스럽게 교역로를 타고 로마 제국으로 전래되었고, 결국 오늘날까지도 서양에서 누구나 즐기는 보드게임으로 정착하게 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호스로 1세는 조로아스터교의 재정립을 명령했다. 조로아스터교는 오랜 세월 페르시아 지방의 종교였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으로 조로아스터교가 배척된 이래 교리가 완벽하게 정립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구전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호스로 1세의 시기에 조로아스터교의 신화는 샤나메(Shahnameh)라고 불리는 책을 통해 마침내 하나로 모아져 페르시아의 정체성과 민족성을 확립하게 된다.

3.2. 외치


[image]
호스로 1세 치하의 사산 제국 영토
대외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군대를 격파하여 안티오키아를 공략하고 이후 로마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국력면에서 우위를 확보하였고, 동으로는 돌궐과 손을 잡고 에프탈을 쳐서 에프탈 족을 박멸하였으며, 남으로는 아라비아의 오만을 병합했다.
호스로 대제 치하에서 활약했던 자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 아라티우스 (Aratius)
  • 탐 호스로 (Tam Khosrau)
  • 바라즈 브주르 (Varaz Vzur)
  • 아다르 마한 (Adar Mahan)
  • 주라크(Zuraq) 카바드 1세에 이어 호스로 1세를 섬겨온 노장. 일명 아자레테스(Azarethes). 대장군. 544년 에데사 공략전을 이끔

  • 카르다리간 (Kardarigan) '검은 매' 라는 뜻. 호스로 1세 후기 ~ 호르미즈드 4세 시기의 장군. 동명의 아들은 호스로 2세를 섬겼다. 훗날 아들 카르다리간은 아르다시르 3세를 보호하다가 샬바라즈 파로칸에게 살해되었다.

  • 미흐로에 (Mihroe) 555년 사망.

  • 바흐리즈 (Vahriz) 오만 총독을 지낸 해군제독.

4. 평가


한마디로 자세한 설명이 필요없는 인물. 사실 사산 왕조 측의 기록에도 상세한 설명없이 단순히 '이러이러했다.' 식의 기록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만큼 그 업적에 대해서만큼은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1] 불사의 영혼을 가진 자.[2] 본명 쿠슈-네완[3] 플라톤이 주장했던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4] 훗날 사산 왕조를 멸망시킨 이슬람 제국아랍인들은 이 도서관을 그대로 들어 옮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서적들을 싹 쓸어갔고, 유럽이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온갖 이민족 왕국들이 난립하는 혼란기에 신음하고 있을 동안 이 서적들을 근간으로 철학, 자연과학, 의학, 수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발전시키며 황금기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