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미즈드 4세

 


사산 왕조의 제26대 샤한샤. 재위기간 579 - 590년
1. 즉위
2. 로마와의 전쟁
3. 바흐람 추빈의 활약
4. 몰락
5. 암살
6. 기타


1. 즉위


호스로 1세의 4남. 어머니는 카옌(Kayen). 큰형 호스로 노쉬자드가 암살당한 뒤 태자에 책봉되었고, 아버지호스로 1세의 뒤를 이어 579년에 즉위하였다.
이후 그는 군대와 궁정에 엄격한 규율을 정립시키고 일반 시민들을 보호하는데 주력하였다. 또한 조로아스터교 신관들이 기독교를 박해할 것을 건의하자, 호르미즈드 4세는 두 개의 종교를 인정하여 서로 견제하는 것이 왕권의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하여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결과적으로 기득권 세력인 귀족과 성직자들의 반발을 키우게 되었다. 그 결과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막장 드라마(...)

2. 로마와의 전쟁


호르미즈드 4세는 선대부터 지속된 로마 제국과 동부의 돌궐과의 전쟁을 물려받았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2세와의 평화 협상이 있었지만, 호르미즈드 4세는 아버지가 점령했던 영토를 양도할 것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 후 로마 제국의 마우리키우스가 국경을 넘어 쿠르디스탄에 침입하였다. 그 다음해에 마우리키우스는 메디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남부를 가로지를 것을 계획했으나, 가산 왕조의 장로 알문디르는 그 정보를 호르미즈드 4세에 제공하는 것으로 동로마를 배신했다. 다만 이것은 기록에 따라 다른데, 오히려 당시 장군이었던 마우리키우스가 너무 무리한 진격계획을 세워 백전노장이었던 문디르가 이에 반발한 것이라는 말도 있다. 실제 페르시아는 너무 깊숙히 들어온 로마군을 역공하는데, 다행히도 문디르는 뛰어난 지휘관이었고 마우리키우스와 일시적으로 협력해 이를 다시 역관광시킨다. 그리고 가산 왕국으로 귀환한후 바로 보복을 가해오는 사산 제국군과 라흠족의 연합군을 '가산'의 힘만으로 격파하는 능력을 선보였다. 계획이 탄로난 마우리키우스는 퇴각할 수 밖에 없어서 다급히 로마의 국경에 다다랐으나, 페르시아의 장군 아다르마한과의 교전 뒤 패배하였다.
페르시아의 장군 탐호스로는 582년에 로마의 국경을 넘어 콘스탄티나를 공격하였지만 패배하고 전사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2세는 로마 제국의 군사적 조건이 악화되어 마우리키우스를 콘스탄티노플로 다급히 불러들였다. 그 후 마우리키우스를 대신한 미스타콘은 티그리스와 님피우스가 교차하는 지점을 공략하지만 패배하고 퇴각하였다. 결국 미스타콘은 해임되고 필리피키우스가 그의 직위를 이어 받았다.
필리피키우스는 584년과 585년 동안 페르시아의 영토를 습격했다. 페르시아는 585년에 모노카티움과 마르튀로폴리스를 공격하는 것으로 응전했다. 필리피키우스는 이듬해에 솔라크에서 그들을 격퇴하고 클로모론을 공략하였다. 하지만 공략은 실패하였으며 아미다로 퇴각하여 농성하였다. 그러나 587년에 헤라클리우스에게 명령하는 것을 포기했다.
588년에 로마 제국 군부 내에 반란이 일어났다. 페르시아는 이 반란을 이용하여 콘스탄티아를 다시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로마는 군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나서 이에 대한 반격으로 아르잔느를 공격했으나 역시 실패한다. 그래도 마르튀로폴리스에서는 다른 페르시아의 부대를 격파한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589년에 필리피키우스를 두 번에 걸쳐 격퇴한 끝에 마르튀로폴리스를 점령하였다. 결국 필리피키우스는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시사우라논의 페르시아군을 격퇴했었던 코멘셔루스가 그를 대체했다. 그 후 로마는 마르튀로폴리스를 공격하였고, 공략의 막바지에 페르시아에 돌궐족이 침입하기 시작했다.

3. 바흐람 추빈의 활약


투르크는 페르시아가 로마와 전쟁중인 틈을 타, 발흐와 헤라트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호르미즈드 4세는 투르크의 침입을 격퇴하기 위해 전설적인 영웅인 바흐람 추빈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바흐람 추빈은 발흐로 진군했으며, 돌궐의 왕을 살해하고 그의 자손을 인질로 붙잡는 것으로써 돌궐을 격퇴하였다.
북부의 위협이 제거되자, 바흐람 추빈은 로마와 싸우기 위해 서부 전선을 향해 군대를 돌렸다. 바흐람 추빈은 아라스 강의 전투에서 로마 제국의 로마누스 장군에게 패배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알바니아를 공격하는 로마 제국을 스바네티를 공략하는 것으로 물리치거나 캅카스 이베리아인들의 아제르바이잔 침략을 저지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4. 몰락


호르미즈드 4세는 바흐람 추빈의 명성을 질투하여, 한 벌의 여성용 옷을 보내 착용시키려는 것으로 그에게 굴욕을 주고 싶어했다. 그러나 바흐람 추빈은 매우 위협적인 글을 써 보내는 것으로 응답했다. 격노한 호르미즈드 4세는 바흐람 추빈을 체포하기 위해 병사들을 보냈으나, 병사들은 바흐람 추빈의 편으로 돌아섰다. 결국 바흐람 추빈은 자신에게 모욕감을 준 황제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페르시아로 대군을 진격시켰다.
사실 이렇게 된 데에는 추빈이 황제를 우습게본것과 서돌궐 정벌 이후 전리품 분배문제도 한몫했다. 바흐람 추빈이 돌궐에게서 빼앗은 전리품 중 일부를 황제에게 보내지 않고 자신이 챙긴 것에 분노한 황제가 사죄를 요구했으나, 오히려 그는 거절하는 답장 속에 끝이 구부러진 단검을 넣어 보냈다.[1] 격분한 황제는 이 단검의 양끝을 잘라 되돌려 보냈다.
그 와중에, 바흐람 추빈의 행동을 호스로 2세는 그냥 두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페르시아에 내전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반역세력은 호르미즈드 4세를 퇴위시켰으며 그의 시력을 빼앗고 호스로 2세를 새로운 황제로 선포했다.

5. 암살


호르미즈드 4세가 어떻게 살해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호스로 2세가 암살했다는 설이 있고 이 설이 가장 유력시 되지만, 반대파 귀족이 암살했다는 설도 있다.

6. 기타


아들과 함께 호프 다이아몬드와 연관이 있다는 설도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1] 한마디로 자꾸 간섭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