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카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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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Casals. 스페인에서 태어난 첼리스트, 지휘자, 작곡가.
(1876~1973)

1. 생애
3. 레퍼토리
4. 음반
5. 악기

'''왜냐하면 저는 지금도 조금씩 발전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죠.'''

파블로 카잘스, 95세 때 기자가 아직도 6시간씩 매일 연습하는 이유를 묻자


1. 생애


카잘스는 1876년 12월 29일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 역시 카탈루냐어식인 '파우 카잘스 이 데필료(Pau Casals i Defilló)'이다. 그의 아버지가 작은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했기 때문에 카잘스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악기를 접할 수 있었다. 4살때부터 오르간, 피아노, 플룻,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6살때는 대중들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그가 본격적으로 첼로를 연주한 것은 11살때 부터였다고 하며, 그 전에도 아버지가 만든 첼로 비슷한 악기로 연습은 했다고 한다. 12살때 바르셀로나 음악원에 입학한 카잘스는 첼로와 음악이론등을 배우기 시작했고 13살때 중고 악보상점을 뒤지던 중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집을 발견하게 된다.
돈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그는 카페 토스트라는 작은 가게에서 연주하는 것으로 돈을 벌던 중 작곡가 이삭 알베니즈의 눈에 띄게 되었으며, 이후 스페인 왕비의 비서에게 추천장을 받아 바르셀로나를 떠나 마드리드 왕립 음악원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이 맘때 그가 발견한 악보가 바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이어서 잠깐 파리에서도 공부를 했지만 1년만에 다시 카탈루냐로 돌아오는 그는 17세의 나이에 마드리드 교향악단과 협연을 하면서 본격적인 솔리스트로서 활동을 하게 된다. 또한 비슷한 나이의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와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와 같이 카잘스 트리오를 조직, 1937년 해체할 때 까지 다양한 연주활동과 녹음활동을 하게된다.[1][2]솔리스트로서는 다양한 지역에서 활동을 했다. 1904년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1915년에는 스페인 가수 수잔 멧칼페와 결혼을 했지만 1928년에 별거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1957년까지 이혼은 하지 않았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솔리스트로서의 활동 뿐만 아니라 지휘쪽으로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그의 이름을 딴 파우 카잘스 오케스트라를 조직하면서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는 1936년까지 연주활동을 하기도 한다. 이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고 프랑코의 독재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카잘스는 프랑코 정권에 대놓고 반감을 드러냈고, 이에 당시 프랑코의 수하 중 한 명은 대놓고 라디오에서 '널 잡기만 하면 다시는 첼로를 연주할 수 없도록 팔꿈치 아래 두 팔을 완전히 잘라버리겠다'며 협박을 했다. 결국 카잘스는 1938년 10월 19일 카탈루냐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외로 도피한다. 1939~42년에 프랑스 남부와 스위스 지역의 한적한 마을에서 가끔씩 연주회를 열었다. 백악관에서 연주회를 열었던 게 주목받아, 1963년 12월 6일 케네디 대통령이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다. 산 후안에서 심장마비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해 1973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바흐무반주 첼로 모음곡과의 관계


그저 그런 연습곡 정도로 여겨지던 바흐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재평가받게 하고, 첼로의 구약성서라 불릴만큼 엄청난 지위로써 끌어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알기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카잘스가 처음 발견하고 초연한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다만 지금처럼 모음곡 형태가 아니라 연습곡 정도로만 인식이 되었던 것으로, 카잘스가 이를 발견한 이후 약 12년에 걸친 연구 끝에 이를 완전한 모음곡 형태로써 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카잘스가 이 곡에 대해 한 일은 크게 두 가지로, 첫번째는 그가 가지고 있던, 활 쓰는 법이라든가 템포 등이 적혀있지 않은 악보(바흐의 아내인 막달레나의 필사본)에 템포와 운궁법을 지정함으로서 이 곡에 대한 이해와 연주를 좀더 쉽게 만든 것이며, 두번째는 일반적인 형태의 첼로를 위해 작곡되지 않은 5번·6번 모음곡을 연주가 가능하게끔 정리한 것이다.
5번 모음곡의 경우는 스코르다투라(연주의 편의성이나 음색적인 효과를 누리고자 일반적인 조현과는 다르게 조율하는 것)을 이용해 가장 높은 현인 A현을 G음으로 낮춘채 연주하라고 지시되어 있는데, 카잘스는 바흐가 지시한대로 음을 낮추는 것이 연주하는 데에는 편하지만 음색이 둔해지고, 현재의 테크닉으로는 일반적인 조현으로도 연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해서 바흐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연주하였다.(시대연주가 활성화된 요즘에는 바흐의 지시를 따르는 경우도 많다.)
6번 모음곡은 비올라 폼 포사라고 하는 바흐가 고안한 5현 악기를 위해 쓰인 모음곡인데(일부에서는 피콜로 첼로를 위해서 작곡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5현으로 된 만큼 악보를 봐도 낮은 음자리표만 써져있는 다른 모음곡과는 달리 6번 모음곡은 대부분이 가온음자리표로 되어있을 정도로 음역대가 더 높고 5개의 음을 한번에 연주해야 하는 등 연주가 불가능한 부분도 일부 있는데 이를 연주가 가능하게끔 정리하였다.

3. 레퍼토리


주 레퍼토리는(첼로나 지휘나 레퍼토리가 비슷하다 ) 바흐와 베토벤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브람스슈만과 같은 낭만파음악이 많은 편이다. 또한 첼로로 편곡한 소품들도 꽤 연주한 편이다. 낙소스에서는 이러한 음원들만 모아서 5장의 음반으로 발매하기도 했다.

4. 음반


그가 남긴 음반들은 1920년대부터 그가 사망하기 전인 1970년대까지 녹음되었다. 그중 192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의 음반은 첼리스트로서 녹음한 것이 대부분이며, 이후의 음반들은 주로 지휘자로 나섰을 때의 연주를 담은 것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그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가장 유명하다. 이미 저작권이 만료된 지 한참 지난 음반이어서 이곳저곳에서 마구 음반발매를 하고 있다. 그만큼 이 음반이 아직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듯.
그밖에도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나 조지 셸과 같이 연주한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도 추천할만하다. 그밖에 그의 친구들인 자크 티보(바이올린)와 알프레드 코르토(피아노)와 함께 작업한 트리오 음반도 많다. 또한 그가 백악관에서 초청받아 연주한 실황 음반도 존재한다.
다만 대부분의 음반이 레코딩 초창기에 이뤄져서 음질이 조악한 것들이 많은 편이다.

5. 악기


그의 애기 이자 평생을 동반했던 첼로는 마테오 고프릴러 이다. 고프릴러는 18세기 이탈리아 베니스 현악기 제작계에서 도메니코 몬타냐나 와 양대산맥을 이루던 대가이다.

[1] 이들은 정치적인 견해의 차이로 인해 해체한다. 알프레드 코르토가 비시 정권에 협력을 하면서 카잘스와의 사이가 틀어진 것이다. 또한 나치의 위협을 받은 자크 티보 역시 프랑스를 도망쳐야만 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카잘스는 훗날 코르토와 화해를 하지만 티보와는 전혀 교류를 하지 않는다.[2] 이 트리오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 내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