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침공

 


Иранская операция, Англо-советское вторжение в Иран, Операция ,,Согласие’’ (러시아어)
Anglo-Soviet invasion of Persia, Anglo-Soviet invasion of Iran, Operation Countenance (영어)
(페르시아어) بیرلشیک کراللیک و شوروینین ایران ایشغالی
1. 개요
2. 원인
3. 전개, 그리고 종료
4. 영향


1. 개요


1941년 8월 25일에서 9월 17일까지 이루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번외편.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자본주의의 모국 영국과 최초의 사회주의 공화국 소련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는 동맹의 관계가 되어 버렸다. 이 두 나라가 공동으로 실행한 첫 작전이 바로 페르시아 침공.

2. 원인


북아프리카 전선에 독일군이 등장한 이후로 패퇴를 거듭하고 있던 영국은 동시기에 일어난 이라크 왕국의 반영정권 성립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의 뿌리 깊은 반영정서를 체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영정서는 페르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건 영국의 탓이 큰데 19세기 이후 여러 이권 문제로 영국군이 심심하면 페르시아에 침공하거나 개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의 입장에서는 원인에 상관없이 벌어진 전쟁에서 승리해야 살아남을 상황이었으며 영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이라크는 비교적 쉽게 진압했으나 소련-영국의 긴장관계 속에서 나름대로 힘을 키운 팔라비 왕조가 친독을 전면에 내세운다면 영국군은 독일군 이전에 반영폭동에 시달리다 지리멸렬할 수 있었다. 거기다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가 보유한 이란의 유전들은 전쟁수행에 필수적이었다. 또한 위에서 말했듯 당시 이라크 왕국을 침공한 직후라 바로 옆 동네인 이라크에 대규모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 침공하기 최적의 조건이었다.
소련 역시 개전 이래 참담한 패퇴를 거듭하여 병력 및 장비물자의 소모가 극심해졌으나 이를 보충할 여력은 충분치 않았다. 주요 산업시설을 모두 뜯어내어 우랄산맥 쪽으로 이전하는 중이라 사실상 주요 생산시설이 마비된 상태에선 아무리 인적자원이 풍부한 소련이라 하더라도 이들을 무장시킬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영국으로부터 렌드리스를 통해 물자 및 장비지원을 받기로 했으나 가장 짧은 루트인 영국-무르만스크 항로가 유보트의 공격과 함께 나치 독일, 핀란드군이 무르만스크로 다가오면서 점점 위험해지고 있었다. 이에 소련은 북방항로의 대체로서 페르시아를 통한 보다 안전한 렌드리스 루트를 확보하기로 했다. 이렇게 영국과 소련의 입장이 맞아떨어지자 페르시아 침공이 결정되었다.

3. 전개, 그리고 종료


1941년 8월 22일, 영국군은 이라크 방면에서 제8, 10인도보병사단과 제2인도기갑여단, 제4기병여단, 제21인도보병여단을 투입하여 사트 알 아랍 수로 및 아바단을 확보하고 트랜스 이란철도를 확보하며 테헤란으로 북상했다. 소련군도 같은 시각에 트랜스코카서스 전선의 44, 47, 53 3개 군을 투입하여 카스피 해를 통한 수륙양공책으로 철도 및 해안을 따라 남하하며 역시 테헤란으로 진격했다.
팔레비 왕조는 당시 중립국이던 미국에게 자국의 중립적 위치를 호소하며 구원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오직 페르시아의 영토에는 변동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만 하며 사실상 구원요청을 거부했다. 한마디로 말해 닥치고 연합군의 통치를 받으라는 것이다. 결국 8월 30일, 영소 양군은 테헤란 서쪽 100km 지역에서 합류했으며 팔레비 왕조는 영소 양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테헤란의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의 외교공관을 폐쇄했다.
그러나 영국군과 소련군은 진격을 멈추지 않고 9월 17일 테헤란을 점령한 후 당시 팔레비 왕조의 국왕이던 레자 샤 팔라비를 퇴위시킨 뒤 남아프리카로 유배 보내고 그 아들[1]을 새 샤로 옹립하는 것으로 짧은 전쟁을 종결지었다.

4. 영향


이후 이란 제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소군이 주둔하며 사실상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란은 렌드리스의 중요한 루트가 되었으며, Tu-4 문서에 나오듯이 소련에 불시착한 미군 폭격기 승무원들이 귀환하는 루트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왕국은 영국(인도 제국)과 소련의 경계선에 존재하며 독일과의 관계가 페르시아보다 멀었기 때문에 완충지대의 의미로서 중립국으로 존재를 용인 받았다.

[1]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1919~1980, 재위 1941~1979) - 이란 혁명으로 쫓겨난 바로 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