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자 샤 팔라비

 


[image]
'''휘'''
레자 샤 팔라비
(رضا شاه پهلوی‎)
'''출생지'''
이란 숭고국 마잔다란, 알라슈트 마을
'''사망지'''
남아프리카 연방 요하네스버그
'''왕조'''
팔라비 왕조
'''종교'''
이슬람
'''배우자'''
타지 올-몰룩 외
'''재위 기간'''
1925년 12월 15일 - 1941년 9월 16일
'''생몰 년도'''
1878년 3월 15일 - 1944년 7월 26일
1. 생애
2. 사후
3. 여담
4. 매체에서

이란 팔라비 왕조의 초대 샤한샤(, 황제).

1. 생애


페르시아 북부 마잔다란 지방의 알라슈트라는 산마을에서 군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8개월에 아버지를 잃고 테헤란으로 이사했다. 16살에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에 일개 병사로 입대했다. 기관총의 명수로 알려졌으며 고속승진을 해 준장까지 진급했다. 장교 시절에는 레자 칸(Reza Khan)으로 불렸다.
당시 페르시아는 카자르 왕조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후 소련[1], 영국 등 열강의 획책으로 정치적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레자 한은 1921년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 휘하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테헤란을 점령, 스스로 육군대신이 되어 1919년 체결된 영국-이란 협정을 무시하며 치외법권을 철폐하는 데 성공한다. 1923년 10월부터는 총리대신을 겸직하였으며, 총리 취임과 함께 국회에서 '전하' 칭호를 받았으며[2] 내정 개혁에 착수한다.
1925년 10월 31일 카자르 왕조의 폐지를 의회에서 의결하였는데 원래 레자칸은 케말 파샤를 추종하는 공화주의자로 터키처럼 공화국으로 이행하려 하였으나 기득권의 상실을 우려한 보수 성직자들과 이란 민족주의의 득세로 석유이권을 침해받을 것을 염려한 영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12월 12일 이란 국회가 레자 칸을 황제로 추대하였으며, 사흘 뒤인 15일 황제로 즉위, 팔라비 왕조를 열었다. 1926년 4월 15일에 대관식을 가졌다.
왕위에 오른 레자 샤는 본격적으로 국내 개혁에 착수한다. 1926년 사법 개혁, 1927년 국립은행의 창설, 1929년에는 징병제를 도입한다. 미국에서 재정고문관을 초빙하여 재정 개혁을 하였고, 차별 풍조를 없애기 위하여 여성 해방을 결의하고 1936년에는 히잡 금지령을 내리는 한편, 1934년 테헤란 대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 개혁에 노력했다. 또한 중앙집권을 추진하며 1938년에는 이란 횡단 철도를 완성해서 사회간접자본 육성에도 진력했다.
대외적으로 국제연맹에 가맹하였으며, 1935년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 제국'으로 통일하고 국왕(king)으로 번역되던 왕호인 를 황제(emperor)를 의미하는 샤한샤로 격상하였다. 국가 근대화를 추진한 것은 지지를 받았으나 정치적으로는 황제 독재가 강했기 때문에 반발이 심했다. 특히 일련의 세속주의 정책 때문에 성직자들과 매우 충돌이 컸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에 참전하지는 않았으나, 레자 샤는 영국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으로 나치 독일과 거래하기 시작했고, 소련의 물자 수송 요구도 거부하게 된다. 이란이 소련으로 향하는 렌드리스 물자가 통과하는 기점이어서 철도가 엄청 깔렸던 데다가, 이란인들의 반영 폭동까지 일어나게 되자 불안해진 영국과 소련이 1941년 8월 사전 경고나 선전 포고도 없이 무단 침공, 나라가 두쪽나고 레자 샤는 영, 소에 굴복하고 추축국과 단교했다. 게다가 두 나라의 압력으로 황태자 모하마드 레자에게 양위하고 퇴위, 모리셔스를 거쳐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망명해 그 곳에서 별세했다.

2. 사후


1950년 5월 7일 이란으로 이장되었으며, 이 때 이란 국회에서 대제 칭호를 헌정했다. 테헤란 교외 레이(Rey)에 영묘가 세워졌으나 1979년 이슬람 혁명 때 파괴되었다. 반제정주의자들이 그의 유해를 찾는 데 실패했었는데, 이집트로 옮겨졌다는 설도 있었지만 2018년 옛 영묘 부근에서 그의 유해로 추정되는 미라가 나와 파문이 일기도 했다.#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는 할아버지의 유해가 맞다고 말했다.# (이후 재매장되었다고 한다)

3. 여담


북방 출신의 무장으로, 쿠데타 4년 후 역성혁명을 일으키고, 이후 아들에게 양위했다는 점에서 조선 태조와 공통점이 있다.
다만 본인이 염두해 둔 롤모델은 케말 아타튀르크였고, 사실 왕정에 더해 오스만 왕조를 무너뜨리고 현대 터키 공화국을 건국한 케말 파샤가 현대 터키사에 미친 입지에 비하면 이란 혁명으로 인해 과소평가 당하는 측면이 있는 인물이다.

4. 매체에서


하츠 오브 아이언에서 이란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소련과 영국에게 각각 이란 침공 선택지가 있지만, 그저 합병하거나 괴뢰화할 뿐이고 공동 행동 따위도 없어서 실제 역사대로 전혀 안 굴러간다. 아들인 팔라비 2세에게 양위하는 것도 당연히 없다. 앞으로의 패치가 필요한 부분.

[1] 러시아 혁명 후 이란 북부에 군사개입을 해서 길란 지방에 이른바 '페르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우기도 했다.[2] 영어로 번역된 호칭이 Highness였으므로 각하가 아닌 전하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