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 해전

 

'''Battle of Falkland Island'''
[image]
'''날짜'''
1914. 12. 08.
'''장소'''
포클랜드 섬
'''이유'''
아시아 지역에서 철수하는 독일 해군(카이저마리네)의 그라프 막시밀리안 폰 슈페 제독의 함대를 저지하기 위해
'''교전국'''
[image] 영국
[image] 독일 제국
'''지휘관'''
[image] Doveton Sturdee(더브턴 스터디)
[image] Archibald Stoddart(아치볼드 스토다드)
[image] John Luce(존 루즈)
[image] Graf Maximilian von Spee(그라프 막시밀리안 폰 슈페)

'''결과'''
독일 함대의 순양함 5척 중 4척 침몰, 태평양 전대의 본국 귀환 실패
태평양 전대를 이끌고 독일 본국으로 돌아가려던 슈페 제독의 패배,
영국제 신형 순양전함의 성능 입증.
'''병력'''
본문 참조
'''피해규모'''
본문 참조
1. 전쟁 전 상황
1.1. 영국
1.2. 독일
2. 양국의 주요 세력과 해전의 경과
2.1. 양국의 주요 세력
2.2. 해전의 경과
2.2.1. 독일의 시점
2.2.2. 영국의 시점
2.2.3. 개전
3. 결과
3.1. 양국의 피해
3.2. 의의


1. 전쟁 전 상황



1.1. 영국


코로넬 해전의 패전 이후 영국 해군성은 슈페 제독이 다음에 포클랜드에 나타날 것을 예상하고 스터디 (Doveton Sturdee) 제독에게 신형 순양전함 인빈시블 (HMS Invincible)과 인플렉서블 (HMS Inflexible)을 이끌고 포클랜드로 향할 것을 명령했다. 이것으로 포클랜드에 있던 영국 함대는 순양전함이 2척 증강되었으며, 12'' 16문의 함포를 가지게 되어 화력이 크게 상승하였다.

1.2. 독일


한편 독일의 슈페 제독은 이전 코로넬 해전에서 많은 석유와 탄약을 소모한 후라 상황이 그리 좋지 못했다. 이에 근처를 지나던 캐나다 상선을 나포하여 석탄을 3일의 시간을 들여 적재한 후 남미를 남단해 포클랜드로 향했다. 이 3일 이라는 시간은 당초 슈페 제독이 예상한 것 보다 오랜 시간이었는데, 이렇게 시간이 지연된 이유는 석탄을 적재한 항구의 규모가 작고 시설이 열악해 모든 화물을 인력으로 적재해야 했기 때문이다.
캐나다 상선에서 빼앗은 석탄으로 연료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부족한 탄약을 수급하는 것은 상선을 약탈하는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이에 포클랜드의 스탠리 항 (Port Stanley)을 공격해 영국의 무선 전신국을 파괴하고, 영국 총독을 체포하여 석탄과 탄약을 탈취하기로 계획했다.

2. 양국의 주요 세력과 해전의 경과



2.1. 양국의 주요 세력


영국 함대 주력
영국
함명
함종
HMS Invincible
CC[1]
HMS Inflexible
CC
HMS Carnarvon
CA
HMS Cornwall
CA
HMS Kent
CA
HMS Bristol
CL
HMS Glasgow
CL
HMS Canopus
Pre-Dreadnought Class B[2]
독일 함대 주력
독일
함명
함종
SMS Scharnhorst
CA
SMS Gneisenau
CA
SMS Leipzig
CP[3]
SMS Dresden
CL
SMS Nurnberg
CL

2.2. 해전의 경과



2.2.1. 독일의 시점


독일의 '슈페 제독'은 최근 영국 함대의 기함이 방문한 이후 군함이 스탠리 항에 없다는 소식을 듣고, 애초 계획대로 남대서양의 포클랜드 섬을 공격하기 위해 장갑순양함 '그나이제나우 (SMS Gneisenau)'와 경순양함 '뉘른베르크 (SMS Nurnberg)'에게 스탠리 항으로 접근해 항내를 정찰한 후, '무선전신국'에 포격을 가할 것을 명하였다.
영국 함대가 스탠리 항에 없다고 판단해 작전을 속행하던 그나이제나우와 뉘른베르크는 항 내에서 영국 순양전함 특유의 마스트를 발견하고, 혼비백산하여 침로를 변경해 기함인 장갑순양함 샤른호르스트 (SMS Scharnhorst)가 있는 위치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당초 코로넬 해전 이후 캐나다 상선에게서 물자를 탈취할 때 슈페 제독이 예상했던 대로 시간이 걸렸다면 독일 함대는 영국 함대를 마주치지 않고 본국으로 귀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몇 문제로 물자의 적재에 3일이 소모되어 이것이 독일 함대와 영국 함대가 조우하는 원인이 되었다.

2.2.2. 영국의 시점


그런데 이들이 포클랜드 섬의 스탠리 항에 도착할 때 쯤, 영국의 순양전함 전대를 지휘하는 '스터디 제독'이 스탠리 항 내에서 석탄을 보급하고 있다가 독일 순양함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즉각 함대를 출항시킨다.
그 때, '그나이제나우'가 항구 입구로 접근해 스터디 제독의 함선에 포격을 가하였다. 정박해 있던 영국 함대는 바로 독일군에게 반격을 가하고자 하였으나, 항구 내에서 침몰한 함선의 잔해가 방해가 되어 쉽게 항구를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영국 함대는 간신히 스탠리 항을 빠져나왔다. 이미 독일 함대는 도주를 시작해 거리는 24km나 벌어져 있었다. 하지만 영국 함대가 기동력이 더 뛰어났기 때문에 점점 독일 함대를 따라잡아 1250시 경에는 독일 함대 최후미함인 방어순양함 라이프치히 (SMS Leipzig)가 함포의 사정권 안에 들어왔다.

2.2.3. 개전


스터디 제독의 명령으로 포문이 열렸고, 독일 함대와 영국 함대의 화력 차이는 영국 함대에 증원된 순양전함 인빈시블과 인플렉서블의 영향으로 너무도 확연했다. 큰 화력 차이로 전투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슈페 제독은, 남은 함대라도 무사히 탈출 시키고자 자신의 전함이자 기함인 그나이제나우를 제외한 나머지 함대에게 분산 도주를 지시했다.
이후 1730시 경 부족한 화력에도 분투하던 그나이제나우가 결국 침몰하였고 슈페 제독도 그의 기함과 함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그의 희생이 무색하게 도주하던 뉘른베르크와 라이프치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영국 순양함에 의해 침몰당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는 경순양함 드레스덴 (SMS Dresden)[4] 한 척만이 도주에 성공하였다.

3. 결과



3.1. 양국의 피해


영국 함대의 피해
사망
10 명
부상
19 명
독일 함대의 피해
SMS Scharnhorst
CA
침몰
SMS Gneisenau
CA
침몰
SMS Leipzig
CP
침몰
SMS Nurnberg
CL
침몰
SMS Dresden
CL
중파
사망
1,871 명
포로
215 명

3.2. 의의


포클랜드 해전에서의 패배로 일본에 밀려 본국으로 귀환하려던 태평양 전대가 뿔뿔이 흩어져 실질적인 전투력을 낼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독일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던 슈페 제독이 전사하고 그의 함대마저 괴멸되어 독일 해군의 방어선에 큰 구멍이 생기게 되었다.
또 피셔제독이 생각한 영국식 순양전함의 개념이 실전에서 증명된 사례이고 반대로 영국식 순양전함의 한계를 보여준 건 유틀란트 해전이다.

[1] CC가 순양전함의 분류기호다. CB는 대형순양함.[2] 1920년 이전에 건조된 전함의 기호는 BB가 아니라 B이다.[3] Protected Cruiser, 방어순양함[4] 이 배의 정보관으로 근무하던 사람이 바로 빌헬름 카나리스로, 후에 '''히틀러 정권 내의 반나치주의자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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