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카나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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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빌헬름 2세의 장례식에서. 가장 좌측의 인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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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릭스마리네의 제독이자 독일 국방군 정보국 아프베어(Abwehr)의 국장, '''반나치''' 인사이다.
2. 출생과 제1차 세계대전
1887년 새해 첫날, 베스트팔리아의 도르트문트의 이탈리아계 실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4]
1905년 뮈르빅의 독일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해군 생활을 시작,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엔 그라프 슈페 제독이 이끄는 카이저마리네 아시아함대 소속의 경순양함 SMS 드레스덴의 정보관으로 근무중이었다.
1917년, 드레스덴은 아르헨티나 앞바다에서 벌어진 포클랜드 해전에서 아시아 함대가 전멸하는 와중에 살아남아 도망친 유일한 전투함이었으나, 컴버랜드 만에 정박해 있는 동안 이들을 우연히 발견한 영국 해군의 순양함들과 교전 후 항복, 자침하여 전사자 6명을 제외한 승조원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카나리스 역시 포로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나 곧 탈주했고, 유창한 에스파냐어와 영어 실력, 한 독일 사업가의 도움으로 1917년 10월 독일로 귀향하는 데 성공했다.(여러 국가들을 거쳐가는 기나긴 여정이었는데 도중에 '''영국을 경유'''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귀국 후 육상의 정보장교로 에스파냐 파견 업무 등을 맡다가 그 해 말 잠수함 함장으로 부임, 전쟁 말기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지중해에서 상선 18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3. 전간기의 행보
3.1. 우익 활동, 고속 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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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소령(1924~1929) 시절의 카나리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는 계속 해군에 남기로 했고 종전 이듬해인 1919년 에리카 바그라는 여인과 결혼, 두 명의 딸을 두게 된다.
많은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급속도로 확산되어 가던 사회주의 세력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우경화되었고 좌익 세력에 반대하는 군인들의 모임인 자유군단[5] 의 회원이 되기도 했다.
작아진 군 규모로 인해 진급길이 막히다시피 했던 바이마르 공화국 군대에서는 이례적으로[6] 고속으로 진급하여, 1931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해 경순양함 베를린과 도이칠란트급 전함 슐레지엔의 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후부터 자신의 주특기라 할 수 있는 정보 관련 업무를 맡게 되었고, 이때부터 독일 내 고위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정치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는 당연히 나치당의 주요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나치당의 집권에 그도 협력했다.
1935년 1월, 카나리스는 아프베어의 국장에 취임했고, 얼마 뒤 소장으로 승진하면서 에스파냐를 거점으로 한 독일 스파이 조직을 구성하였다. 에스파냐 내전에 주저하던 히틀러를 설득, 독일이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반란군을 지원하도록 유도하기도 했였다.
3.2. 히틀러에 반기를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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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러, 괴벨스와 카나리스, 견장이 달리고 밑단이 긴 대례복을 입고 있다.)
카나리스 제독은 투철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1937년까지는 히틀러의 지지자였으나 1938년부터 히틀러의 모험주의와 대외침략 노선이 독일을 재앙으로 이끌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반 히틀러 인사로 전향해 그를 비밀리에 방해하기 시작했다. 비록 실패했으나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시도를 막아 보려 했고 프랑코를 움직여 독일이 지브롤터를 직접 지배하는 것을 막았다.
또한 카나리스는 1938년과 1939년의 미수로 끝난 히틀러 암살음모에 간여하기도 했는데 그 때부터 카나리스의 이름은 독일 상류계급의 반 히틀러 모임인 폰 클라이스트 모임에서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후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 쿠데타를 일으켜서 히틀러를 제거하려고 했고 이를 위해 영국의 MI6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허세에 쫄은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삽질하는 바람에 이들은 졸지에 닭 쫓던 개 꼴만 나 버렸다.
카나리스는 1939년 "네덜란드 전쟁의 공포"라는 문건을 만들어 영국에 넘겨주었는데 내용인 즉슨 전쟁이 시작되면 독일이 네덜란드의 비행장을 영국에 대한 공격의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네덜란드를 침공할것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 허위정보로 영국을 움직여 히틀러를 실각시키기 위한 계획이었으며 비록 선전포고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으나 영국이 이를 경계해 1939년 2월 프랑스에 영국 육군과 공군을 배치시키도록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이 동안 한 때 자신의 부하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해군 통신장교 출신으로, 불명예스러운 이유로 중위 계급에서 해군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카나리스의 부서에서 일했다.)는 나치당의 보안조직인 SD의 책임자가 되어 카나리스의 라이벌이 되었는데, 직속상관인 하인리히 힘러에게조차 큰 존경을 표하지 않던 그가 카나리스만은 함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7] 그의 생전엔 두 기관간의 트러블이 생각만큼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이드리히는 아프베어를 자기 휘하에 두고 싶었고 암암리에 카나리스를 감시하고 있었다. 카나리스는 아프베어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하이드리히와 협력하는 척을 했다.
전쟁 발발 직전, 카나리스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의 브리핑을 듣고는 이 정보를 MI6에 흘리기도 했다.
4.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의 행보
4.1. 영국과의 접촉, 그리고 의심
전쟁 발발 후, 카나리스는 전선을 방문하여 SS가 벌이는 여러 전쟁 범죄행위를 목도하였다. 또한 아프베어가 수집한 여러 잔혹행위도 보고받았다. 이런 것에 충격을 받은 카나리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반 히틀러 운동에 가담하였다. 1940년 1월 카나리스는 해군 대장으로 진급했고 히틀러에 반대하는 독일 장교들의 비밀 모임인 검은 오케스트라(Schwarze Kapelle)를 비밀리에 이끌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아프베어는 MI6와 접촉하여 영국이 수집한 소련군 정보를 입수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카나리스와 MI6와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1942년부터 카나리스는 직접 에스파냐를 정보 수집의 명목하에 자주 방문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영국의 정보원과 자주 접촉하였다(일부 정보원들은 비시 정부 치하의 프랑스에서 만나기도 하였다.). 카나리스는 이들을 통해 독일 군부가 히틀러를 제거한 후 영국과 협상할 의향을 수 차례 타전했으나, 처칠의 무조건 항복 요구로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SD가 붙잡은 영국측 요원을 아프베어의 "이중간첩"이라는 핑계로 빼내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하이드리히의 의심이 깊어졌고 이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도 영국과의 접촉을 멈추지 않았다. 1942년 6월 하이드리히가 체코에서 암살되면서 아프베어의 통폐합 시도는 잠시 중단되었으며 SD와 공존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당시 독일의 대표적인 반나치인사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8] 가 아프베어에서 근무했다. 당시 독일 남자는 누구나 군에서 복무하도록 되어 있었고, 이는 목회자도 예외가 없었다. 나치에 미움을 사고 있던 본회퍼는 최전방으로 배치될 수도 있었는데 그 외 친분이 있던 카나리스는 본회퍼가 아프베어에 속하도록 서류를 만들고 정보수집을 명목으로 영국과 미국의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허락했다. 단, 정기적인 보고서를 제출하는 조건이었다. 훗날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성공하면, 발키리 작전이 발동되고, 본회퍼가 영국 등에 선을 넣어 강화협상을 준비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활약은 카나리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던 것이다.
4.2. 최후
비록 제독과 아프베어는 하이드리히의 죽음으로 잠시 수명을 연장받았으나 후임자로써 하이드리히보다 의욕적으로 아프베어를 병합하려고 했던 신임 국장 하인리히 뮐러 아래 움직인 SD의 보고 등을 통해 히틀러는 점점 제독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 의심은 점점 커져갔다. 결국 1944년 2월, 마침내 카나리스는 아프베어 요원 두 명이 연합군에 귀순한 사건을 빌미로 국장에서 해임되어 강제 예편되었으며, 그 이후 아프베어는 SD와 합병되었다. 그리고 몇 주 뒤, 히틀러는 카나리스를 가택 연금시켰으며, 이것은 그가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개입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7월 20일의 암살 미수 사건 이후 SS에게 체포된 인원들이 고문을 못 이겨 한 자백에서 카나리스 제독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미 카나리스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참패 직후, 모종의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성공하면 히틀러를 포함한 나치 고위당원들을 체포하여 전쟁범죄자로 기소하고 임시 정부를 수립, 연합군과 협상하면서 종전을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힘러는 히틀러의 몰락 후 자신의 생명과 지위를 보존할 일종의 안전 장치로써, 영국과의 접촉에 유용하게 쓰일 가능성이 큰 카나리스를 당분간 손대지 않았고, 히틀러 역시 그를 가만히 놔두면서 제독과 접촉을 시도하려는 반체제 인사들을 최대한 낚을 요량으로 카나리스의 처분을 유보했다. 그러나 곧 힘러는 자신의 계획이 별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 카나리스를 체포하여 군법회의에 넘겼고 재판정은 주저없이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수감되어 있던 카나리스[9] 는 독일의 항복을 한 달여 앞둔 1945년 4월 9일,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 한스 오슈터 장군 등 다른 연루자들과 함께 플로센베르크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는데, 연합군이 수용소 근처까지 진격함에 따라 서둘러 집행한 것이었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카나리스의 부하들이었던 육군 장성들인 에르빈 라호우젠과 한스 기제비우스가 카나리스 제독의 이러한 반히틀러 행위를 증언함으로써 그의 공로가 세상에 알려졌다.
5. 평가
5.1. 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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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에 건립된 카나리스 제독의 묘소)
카나리스는 상기 언급한 수 차례의 히틀러 제거 시도 뿐 아니라 유대인 수백명을 포함한 나치의 피해자들을 구출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아프베어의 요원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가지고 독일을 떠나 피난할 수 있었으며 이는 앞서 언급한 영국과의 접촉 및 쿠데타 획책과 맞먹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5.2. 비판과 반론
카나리스의 공적에 대한 비판도 물론 존재한다. 그가 구한 수많은 유대인들은 제독이 유지하고 있던 아프베어 국장이라는 직책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나, 역설적으로 그 직책은 그가 그토록 구하려 했던 수많은 유대인들과 소련군 포로, 연합군 스파이 등을 비인간적인 수용소에 수감하거나 고문, 처형하는 등[10] 을 지시하는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그 역시 일단 자신의 목숨과 직책, 그리고 자신이 통솔하는 조직과 조직원들의 안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애초부터 자신의 영달을 생각했다면 앞서 언급한 일들을 벌였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모든 유대인과 반나치주의자 등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없었고 조직이 SS에게 넘어가면 그마저도 못하게 될 것이므로 그로서는 최소한의 현실적인 타협이었을 것이란 이야기다.
또한 알려진 것과 달리 그가 쿠데타의 실행에 대해 계속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11] , 결국 1944년 7월의 암살 미수 사건이라는 어설픈 실패만을 불러왔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단지 적당한 기회를 엿보았을 뿐이라는 지적도 있으며 수 차례의 히틀러에 대한 암살을 그가 사주하거나 묵인해 왔다는 사실을 들 때 그가 쿠데타에 소극적이지 않았다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그의 주특기라 할 수 있는 정보 업무 또한 사실상 실패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카나리스가 그의 성향상 이를 알면서도 방기한, 즉 일종의 태업으로써 일부러 행한 것인지는 모르나 아프베어는 전쟁기간 내내 연합국 정보부에 철저하게 농락당했다.
6. 기타
EBS에서 방송했던 제2차 세계 대전사 다큐멘터리 중 한 편이 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보러가기)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나 책 등도 서구에선 많이 나왔지만, 국내에선 그의 인지도가 낮은 편이라 정식 발매된 바는 없다.
에이레 계 영국인 소설가 잭 히긴스의 작품인 독수리는 내리다에서도 아프베어 국장으로 등장한다. 동부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아프베어의 행정직으로 부임한 육군 산악중령 막스 라들에게 힘러가 꺼낸 처칠 암살 계획에 관한 아이디어를 내 보라고 하고는 막상 중령이 다 짜서 내니 수고했는데 히틀러가 어차피 다 까먹을 테니 그만 잊으라고 해서 중령을 벙찌게 만든다.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임무에 부하들을 사지로 밀어넣고 싶지도 않고, 영국과의 물밑 접촉에 하등 득이 안 될 일이라 하고 싶지도 않았을 그의 입장이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12] 동 소설을 원작으로 한 1976년작 영화에서는 베테랑 배우 안소니 퀘일이 카나리스를 연기했다. 라들 대령[13] 에게 히틀러의 조야하고 성마른 기질을 성토하는 대사가 인상적이다.[14] 또한 회의에 동석한 나치 권력자들을 가차없이 비판한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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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니 퀘일이 연기한 카나리스
사진 찍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서, 업무상 찍어야 하는 초상 사진이나 행사 때 덤터기로 같이 찍힌 것 외엔 개인 사진이 정말 드물다고 한다. 정보기관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사진에 찍히는걸 기피하긴 하나 아프베어처럼 기관의 존재 자체는 공개되어 있는 경우 기관의 최선임자 등 일부 인원들은 신원을 감추는 게 불가능하니 해당사항이 없다. 경쟁 기관이던 SD의 수장이나 현 CIA, 국가정보원 등의 경우에도 기관장과 그 및의 차장보 등의 인원들은 아예 대놓고 소개해 둔다.
7. 주요 보직 내역
- 1938. 6. 1 ~ 1944. 2.12 : 국방군 정보국장
- 1944. 2.13 ~ 1944. 3.20 : 국방군 총사령부 명령 대기발령
- 1944. 3.21 ~ 1944. 6.30 : 해군 총사령관 명령 대기발령
- 1944. 7. 1 ~ 1944. 7.23 : 국방군 전시 상공업체제 특별참모부장
- 1944. 7.23 ~ 1945. 4. 9 : 7월 20일 사건 연루 및 히틀러에 대한 모의 혐의로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 감금
- 1945. 4. 9 : 플로센베르크 강제수용소에서 교수형 집행
8. 진급 내역
- 1906. 4. 7 : 해군 사관후보생(Fähnrich zur See)
- 1908. 9.28 : 소위(Leutnant zur See)
- 1910. 8.29 : 중위(Oberleutnant zur See)
- 1915.11.16 : 대위(Kapitänleutnant)
- 1924. 1. 1 : 소령(Korvettenkapitän)
- 1929. 1. 1 : 중령(Fregattenkapitän)
- 1931.10. 1 : 대령(Kapitän zur See)
- 1935. 5. 1 : 소장(Konteradmiral)
- 1938. 4. 1 : 중장(Vizeadmiral)
- 1940. 1. 1 : 대장(Admiral)
9. 주요 서훈 내역
- 시기 미상 :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 시기 미상 :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 시기 미상 : 잠수함 전투 기장
- 시기 미상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16]
- 시기 미상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41. 9.16 : 핀란드 1급 공로 십자장 검장
- 1943.11.11 : 독일 은십자 훈장
[1] 후임 방첩청장은 힘러의 측근인 발터 셸렌베르크 SS 소장이고, 반나치 인물이었던 방첩청 차장 한스 오스터 육군소장은 히틀러 암살계획의 중책을 맡았으나 실패 후 체포되어 카나리스와 함께 사형당한다. 한스 오스터가 체포되면서 반나치 활동의 행동대장격 역할은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대신하게 된다.[2] Kriegsverdienstkreuz[3] 카나리스의 오른쪽 가장 앞의 인물은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그 오른쪽 옆은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4] 그는 자신이 그리스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제독으로 활약한 콘스탄티노스 카나리스의 후손이라 생각해 해군이 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후에 그리스를 방문해 받은 콘스탄티노스의 초상화를 그의 집무실에 걸어놓기도 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그의 조상이 17세기에 북이탈리아에서 독일로 이주한 후 원래 성을 Canarisi에서 Canaris로 바꾼 것이였다.[5] 1차 대전 종전 후 제대 군인 및 우익 장교(바이마르 공화국은 군인들의 정치 활동을 폭넓게 보장했다. 히틀러 집권 후부터는 군인을 포함한 공무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는 등 제약이 심해졌다.)들에 의해 독일에서 조직된 극우 의용병 단체이다. 좌익의 무장 단체 스파르타쿠스단을 괴멸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해체 후 구성원 상당수가 돌격대 등에 가입하기도 했다.[6] 에르빈 롬멜도 1920년대 내내 대위 계급에 머물러야 했을 정도였다.[7] 해군 장교 시절 처녀를 강간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에게 약점을 잡혔다는 설이 있다. 당시 법에는 강제 퇴역까진 아니었으나 에리히 레더 제독의 지인이었기 때문에 불명예 퇴진시켰다는 설이 있다. 자세한 기록은 그가 정보국을 장악한 이후 자신에 관한 기록을 파기하여 알아낼 수 없다.[8] 당시 나치는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합한 제국교회(Reichs kirche)를 만들고, 나치에 충성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제국교회는 "히틀러는 메시야다"라는 신앙고백을 강요했는데 이에 반발한 개신교인들이 조직한 교회가 있었다. 이 교회는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이고 본회퍼는 이 고백교회의 신학교 교수이자 지도자급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다. 당연히 나치는 그를 감시하고 방해했다.[9] 수감기간 동안 다른 인사들에 비하면 비교적 정중한 대우를 받았는데, 비록 반체제 인사들 중 고위급에 속하는 중죄인이었으나 국방군 내에선 육해공군을 불문하고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기에 SS라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어 고문 등을 당하지는 않았다.[10]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독일 국방군 또한 적극적으로 이러한 전쟁 범죄에 가담했다. SS의 그것보단 그 규모나 목적, 우발성 등에 있어서 차이가 나기에 100% 같은 범주에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11] 카와구치 카이지의 지팡구(만화)에 카나리스 제독에 대한 이 같은 시각이 묘사되어 있다.[12] 그리고 얼마 뒤 힘러가 어떻게 빼냈는지 그 계획서를 보고는 라들 중령을 불러 제독을 배제한 채 계획을 진행시킨다.[13] 소설에서는 라들과 슈타이너가 중령이었으나, 영화에서는 두 사람 다 대령으로 등장한다.[14] '''"Today is Wednesday. By Friday he will forget it. But Himmler will not."(오늘은 수요일일세. 그러니 금요일까지 총통은 잊어먹을 거야. 하지만 힘러는 아닐 테지.)'''[15] '''아돌프 히틀러는 웬 허섭쓰레기 서커스 단장, 요제프 괴벨스는 초딩 꼬맹이, 마르틴 보르만은''' '''욕심쟁이, 그리고 무솔리니는 자동인형(꿔다 놓은 보릿자루)'''이라 한다.[16] 제1차 세계 대전 때 철십자 훈장을 받은 인원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이를 받을 만한 수훈을 세운 경우, 새 훈장 대신 제1차 세계 대전 때의 훈장 위에 달아 중복 수여자임을 표시토록 한 부속이다.(이렇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