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자생물학

 



1. 개요
2. 초기 역사
2.1. 개념
2.2. (분자)구조적 접근의 시작
2.3. 정보적 접근과 물리학자들의 참여
2.4. 생화학적 접근
2.5. DNA의 발견
2.6. 왓슨과 크릭, 이중나선을 발견하다
2.7. RNA#s-1, 아미노산, 오페론
3. 현재 연구 성과
3.1. CRISPR-Cas9
3.2. PCR과 DNA 복제(Cloning)의 발견
3.3. 웨스턴 블로팅과 단백질 확인
3.4. 생물 정보학
3.5. 인간 유전체 사업
3.6. 위상수학과의 접목
4. 대학교 교과목 및 수험과목으로서의 분자생물학
4.1. 별도의 학과로 개설된 경우


'''유전체 편집이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 크리스퍼(CRISPR)'''[1]

1. 개요


Molecular biology,
분자 수준에서의 생명 현상을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가 눈으로 보는 생명 현상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규명하는 생물학의 분과이다. 진화생물학, 계통분류학 등 분자생물학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생물학 분야에서도 분자생물학적 개념과 실험 방법이 중요하게 쓰이고 있다. 겉으로 봐선 거의 흡사한 두 종이 DNA로 살펴보니 사실은 전혀 다른 속, 심지어 과 수준에서 다른 경우가 생기곤 한다.

2. 초기 역사



2.1. 개념


분자생물학이란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1930년대 록펠러재단의 워렌 위버였다. 그는 1938년 새로운 과학분야로 "분자 생물학"을 지칭했으며, 이에 부응하여 여러 물리학 연구소(특히 보어연구소)가 연구방향을 생물학적으로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분자생물학은 그 당시부터 존재하지 않은 개념이란 것이다. 본격적인 분자 생물학의 시작은 15년 뒤인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내어 유전현상의 메커니즘을 분자적 수준으로 낮춘 것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분자생물학저널(Journal of Molecular Biology)는 1959년에야 등장했다.
분자생물학은 크게 세 가지 접근 방법에 의해서 갖추어졌다. 하나는 구조적 접근, 하나는 생화학적 접근, 하나는 정보적 접근이다. 또한 1940년대 물리학자들과 화학자들이 대거 생물학에 뛰어들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2.2. (분자)구조적 접근의 시작


1912년 영국의 윌리엄 헨리, 윌리엄 로랜스 브래그(Bragg) 부자는 X선의 회절 현상을 평면형 반사 실험으로 밝혀내였다. [2] 이를 통해서 여러 생물 분자의 구조를 밝히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특히 케라틴등의 단백질핵산의 구조를 밝히는 작업이 1930년대 후반 J.D. 버널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러한 영국의 오랜 분자구조 연구의 전통은 1959년 케번디시 연구소의 존 켄드류와 막스 페루츠의 헤모글로빈과 미오글로빈의 발견(1962년 노벨상 수상)과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DNA 구조 발견에 경쟁하던 모리스 월킨스, 여성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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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23년 헝가리의 과학자 에베시는 동위원소라듐D[3]가 납과 같은 화학적 특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활용해서 "방사선 추적"법을 개발했다. 1935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보어연구소에서 일하던 에베시는 다시 중성자를 쏘아 만드는 인공 방사성 원소 연구를 통해 의 동위원소인 인32로 쥐의 생체 내의 인 대사작용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2.3. 정보적 접근과 물리학자들의 참여


닐스 보어는 1932년부터 생물학에 불확정성의 원리를 도입하려는 작업("생명과 빛(Life and Light)")을 시작했다. 유기체에 대한 기계적, 환원적, 화학적 접근이 아닌 보다 높은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시작했던 것이다. 괴팅겐의 원자물리학자 막스 델브뤽은 록펠러 재단의 연구장학생으로 코펜하겐의 보어에게 가서 그의 적극적인 추종자가 되었고 이 접근을 더욱 구체화 하였다. (1935년, "유전자 변이와 유전자 구조의 본성에 대해(“On the nature of gene mutation and gene structure”)")
1938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간 델브뤽은 칼텍에서‘파지 그룹’을 통해 단백질(박테리오파지)에 집중하여 자신의 이런 연구를 구체화 시켰고, 젊은 물리학자(이탈리아 출신 살바도르 루리아, 허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1942년, 델브뤽과 루리아는 박테리아의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저항력이 돌연변이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결정적인 계기가 또 있었다. 1944년 말, 슈뢰딩거는 <생명이란 무엇인가(What is Life?)>라는 역사적인 책을 내면서 유전자를 "정보 운반체"로 간주하자며 생명체를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물리법칙"이 필요하다고`주장했다. 그는 여기서 유전물질의 여러 후보를 거론했는데, 가장 유력한 후보는 단백질이었다.[4]
(제2차 세계대전과 록펠러 재단의 (근 20년간의) 아낌 없는 지원으로) 미국으로 넘어온 대규모의 과학자 집단, 기술적인 발달, 패러다임의 전환, 이 모든 것은 결국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모든건 다 갖추어졌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생화학이 빠졌다.

2.4. 생화학적 접근


1869년에 이미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미셰르)는 붕대고름에서 백혈구를 추출하여 핵산(당시엔 뉴클레인Nuclein)을 발견한 상태였지만, 세포에서 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기도 아니었고, 유전은 커녕 멘델의 유전자란 개념도 20세기 초반에야 재발견 되는 판국에 무슨 의미를 가질리가 만무했다. 1909년 멘델이 재발견 될 즈음이 돼서야, 애키발드 개러드는 멘델의 유전자론을 두고 효소를 통한 대사과정에서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을 낸다. 그때 막 결핍에 따른 "대사성 질환"이란 개념을 제시한 것인데, 역시 묻혔다. 각기병이나 괴혈병이 그 뒤에야 원인이 밝혀졌다는걸 생각하면 된다.
결국 1928년 영국의 프레드 그리피스가 "형질전환의 원리(Transforming Principle)"를 발견(주장)했고, 1930년대가 돼서야 유전이니, 효소니 하는 생화학적 접근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초파리 연구로 유명한 칼텍의 모건은 유전의 원리에 대해서는 밝혀냈다. 이제 유전자에 무언가 방사능으로 이상을 주면 형질이 변한다는 것 까지는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것은 물리적 근거는 부족한 상태였다.
모건의 제자이자 록펠러 재단의 포스닥 연구장학생이었던 조지 비들은 초파리로 1931년부터 6년을 씨름하다가 1937년이 돼서야 스탠퍼드 대학 교수로서 붉은빵곰팡이로 유전자의 생화학적 연구를 시작했다. 이 연구에서 비들과 에드워드 테이텀은 각 유전자는 한 개의 효소의 합성만을 조절한다는 "1유전자 1효소"설을 주장한다. 물론 이것도 현대의 기준에서는 틀린 이야기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유전자와 단백질(효소)의 생산을 조절, 통제하여 세포의 대사를 조절한다는 이야기는 엄청난 이야기였다. 하지만 생화학이 "분자생물학"과 결합하는데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2.5. DNA의 발견


1944년 O. 에이버리 등은 무독한 박테리아와 죽은 유독한 박테리아를 섞으면 무독성 부분이 유독하게 된다는 형질변화를 관찰했다. 이때 현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물질을 추출하니 그것이 DNA. 에이버리는 DNA가 유전 물질이라는 주장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발견은 에이버리 등이 이 주장에 대해서 스스로가 너무 단순하고, 환원론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매우 모호하게 출판되었다.
결국 DNA가 주목받기 위해서는 8년을 더 기다려야했다. 파지그룹이 연구를 시작한지 15년 가까이 된 1952년, 앨프래드 허쉬와 마사 체이스(허쉬와 체이스)가 DNA와 단백질에 표지(각각 방사성 동위원소 -35, -32)를 달아 어느 물질이 움직여서 박테리아를 변이(감염)시키는지를 밝혀냈다. 결과는 그랬다. '''유전물질은 DNA였다.''' [5] 이쯤에서 준비 된 영웅이 나올 때가 되었다. 왓슨과 크릭이었다.

2.6. 왓슨과 크릭, 이중나선을 발견하다


1950년, 시카고 출신의 제임스 왓슨은 살바도르 루리아에게 인디애나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51년 박사후연구원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케번디시 연구소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물리학자 프랜시스 크릭을 만났다. 이들은 모두 <생명이란 무엇인가?>의 열혈 독자들이었으며, 크릭은 전쟁 이후 연구분야를 바꾸려고 전전하다가 막 헤모글로빈에 대한 X선 회절연구를 막스 페루츠와 시작하던 참이었다.
이 둘은 윌킨스와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얻은 결과를 통해 DNA 분자가 0.34 나노미터(3.4 옴스트롬)만큼 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나선구조라는 것까지 확인했다. 문제는 이제 어떤 나선구조냐는 것. 왓슨과 크릭의 경쟁그룹은 대략 세 그룹이었다. 예컨데, 1950년 칼텍라이너스 폴링이 발표한 단백질의 폴리펩티드 사슬과 알파 나선, 베타 병풍 구조를 밝힌 이후 이 그룹도 여기에 뛰어들었다. 다만 폴링은 삼중나선 구조를 주장했고, 이것이 그가 실패한 원인이 되었다. [6]
왓슨과 크릭은 여러 가설들을 구상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에르빈 샤르가프(컬럼비아 의대로 망명)와의 대화 속에서 샤르가프는 아데닌티민, 구아신시토신의 비율이 1:1이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수학자 존 그리피스는 같은 종류의 염기보다 다른 종류의 염기들이 수소결합력이 강하다고 보는게 이론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을 제시했다.
결국 왓슨과 크릭이 이겼다. 이들은 X선 결정학 기법으로 점점 모형을 검토해 나갔으며 윌킨스의 실험실에서 (발표되지 않은) 최신 정보도 계속 얻어내었다. [7] 결국 1953년 4월, <네이처>지에 그들의 논문이 나왔고, 윌킨스와 프랭클린의 논문은 바로 뒤에 실렸다. 1쪽 짜리의 경제적(?)인 단 한편 논문, 하지만 그 논문으로 그들은 DNA 구조 연구 레이스에서 이겼고, 분자생물학을 상징하는 인물들이 되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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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ure. 1953 Apr 25;171(4356):737-8
9년 뒤인 1962년, 왓슨과 크릭은 윌킨스와 DNA 이중나선 발견의 공로(정확히는 핵산 구조 연구)로 노벨 의학상을 받았다. 프랭클린은 그때 이미 없었다. 그녀는 이후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 연구로 전향했고, 1958년 X선 회절 실험에서 방사능을 지나치게 많이 쏘인게 원인이 되어 난소암으로 사망한 상태였다. 역사는 '''쓴''' 자의 역사라고, 왓슨은 그의 유명한 저서 <이중 나선>에서 프랭클린에게 정당한 평가를 하지 않았다. 물론 프랭클린 역시 성격이 까칠해서 결정적인 한 발을 놓쳤던 셈이었고, 노벨상을 받지 못한 탓은 그녀의 이른 죽음 탓도 있지만, 그녀를 과학계의 여성 차별의 상징으로 평가하는 목소리도 높다.

2.7. RNA#s-1, 아미노산, 오페론


1950년대 후반에는 영국의 오초아, 콘런드에 의해 DNA 이외에 RNA#s-1가 발견되었고(1959년 노벨의학상 수상) 1957년~1958년 크릭은 "센트럴 도그마#s-2"라는 가설을 주창한다. DNA가 RNA를 거쳐 '''단백질로 가는 한 방향으로만''' 유전'''정보'''가 이동한다는 것이다. 50년대 내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사실 "돌연변이"나 단백질에 더 관심이 많았던 터였지만, 크릭의 이러한 주장은 후학들에 의해 입증되면서 60년대 이후에 과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9]
  • 왓슨과 크릭이 스승들보다 노벨상을 빨리 탄 건 맞지만, 네이처가 잡지 양을 늘리고 출간 횟수를 2배나 많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까지 이들의 논문을 인용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 많은 논문 가운데 겨우 양이 많지 않은 한 개를 썼단 이야기다. 더구나 대부분의 분자생물학자들이 "유전 물질을 밝혀내자"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기에, 8년 뒤 DNA와 단백질의 메커니즘이 증명되기까지 왓슨과 크릭의 연구는 한 가설에 불과했다. 1953년 가장 주목을 받은 논문은 프레드릭 생어의 세포의 단백질을 분리하는 방법(이른바 Sanger Method)이었다. 그는 1958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1960년대 초반에는 오초아와 NIH(미 국립 보건원)의 니런버그(니렌버그)는 각자 DNA의 배열 순서(유전암호)가 아미노산을 만들어낸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특히 니런버그는 1961년 우라실로만 이루어진 RNA사슬(UUU)은 페닐알라닌이라는 아미노산만을 합성한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이후 4년간 아미노산 20개와 RNA 암호의 관계를 밝혀내었다. 니런버그 등은 1968년 노벨의학상을 수상했다. 이로서 RNA의 "번역(Translation)" 과정이 설명되었다.
또한 1959년~1961년 프랑수아 자콥과 자크 모노(Monod)는 mRNA를 발견하고, 유전자가 '작동'-'조절'-'구조'의 세 유전자로 구성되어, 조절유전자의 억제물질로 구조유전자의 발현이 조절된다는 음성 피드백, 즉 오페론 가설을 제기했다(1965년 노벨상 수상). 이로서 RNA의 "전사(Transcription)" 과정이 설명되었다.
마치 전쟁 전 물리학에서 매년마다 노벨상 급 연구가 쏟아졌던 것처럼 유전학 역시 엄청난 연구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스승보다 제자가 먼저 받는건 기본.

3. 현재 연구 성과



3.1. CRISPR-Cas9


CRISPR(Clustered Regularl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
science지에서 2015년의 10대 획기적 연구 성과로 거론.
기존에 알려진 방법보다 손쉽게 원하는 유전자를 원하는 기관에서 제거할 수 있다.
CRISPR system은 원래 원핵생물의 면역체계로 2008년에 덴마크 요구르트 회사에서 발견되었다. 2012년에 제니퍼 다우드나 교수와 에마뉘엘 샤르팡티에 교수가 CRISPR-Cas9를 이용한 유전자 가위의 개발을 주제로 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2020년에 이 업적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10]

3.2. PCR과 DNA 복제(Cloning)의 발견


PCR, 즉 polymerase chain reaction은 적은 양의 DNA를 수만배로 복제하는 과정이다.[11]. 하지만 과거의 PCR은 E.coli의 polymerase를 사용했기 때문에 한 cycle을 돌릴때마다 효소를 새로 넣어줘야 했었고[12],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이후, 캐리 멀러스라는 사람이 Thermus aquatics라는 호열성 박테리아에서 뽑아낸 taq polymerase로 인해 PCR은 그 전보다 훨씬 싸지고, 간단해졌다. 자세한 내용은 PCR 항목 참조.
여기서 다룰 클로닝은 정확히는 molecular cloning이라고 한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DNA를 벡터에 넣어 플라스미드로 만든 다음, 그것을 대장균에 다시 형질전환 해서 필요할때마다 대장균을 키운 다음, 그 플라스미드를 다시 뽑아 쓸 수 있다. 이는 DNA 제한효소[13]의 발견으로 인해 가능해 진 것인데, 이 제한효소가 특정 염기서열을 자른다. 즉, 제한효소를 이용하면 염색체의 특정 부위를 자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자른 DNA를 벡터에 붙이는 효소도 있으며, 그것을 우리는 리가아제, 혹은 라이게이스라고 한다. 이 라이게이스가 DNA 제한효소에 의해 잘린 특정 DNA를 벡터에 붙이고, 이것을 다시 형질전환을 통해 대장균에 넣으면 그 벡터를 가지고 있는 대장균이 완전히 죽지 않는 이상, 대장균을 키워서 플라스미드를 뽑아 쓰는것만으로 필요할 때 그 DNA를 쓸 수 있다.
여기서 DNA가 들어가는 벡터는 용도에 따라 종류가 상당히 많다. 해당 유전자를 과발현[14]시키는 벡터도 있고, 뒤에 형광 단백질이 붙어있는 벡터도 있다. 요즘은 원하는 유전자를 넣을 수 있게끔 특정 제한 효소로 자를 수 있는 그냥 벡터만 팔거나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벡터들은 벡터를 파는 회사에서 유전자 지도를 제공하며, 여기에 어떤 제한 효소로 어디가 잘리는지가 나와있다.
요즘은 특정 벡터에 여러분이 원하는 DNA를 붙여서 대장균에 둔 다음, 여러분이 원하는 벡터에 그 DNA를 붙일 수 있는 LR reaction이라는 것도 있다. 보통은 엔트리 벡터에 특정 유전자를 붙여놓고 반응을 진행한다. 예를 들어서 A라는 벡터에 a라는 유전자를 붙였는데, 유전자를 붙이기를 원하는 벡터는 B 벡터이고, B 벡터에는 b 유전자가 붙어있다. 이 때, LR reaction을 진행하게 되면 A 벡터에 b 유전자가, B 벡터에 a 유전자가 붙게 되는 것. 이 반응을 진행하는 효소는 특정 부위를 인식해 유전자를 떼다 붙인다. 이것의 장점은 벡터에 일일이 유전자를 붙일 필요 없이 한 벡터에 붙여놓고 효소랑 원하는 벡터, 그리고 유전자가 붙어있는 벡터만 넣어주면 된다는 게 장점. 즉 일일이 벡터에 유전자를 붙일 필요가 없다는 게 장점이다.

3.3. 웨스턴 블로팅과 단백질 확인


전기영동된 단백질을 불변 영역에 검출 효소가 붙은 항체를 사용해서 검출해내는 실험 기법. 분자생물학에서는 발현시킨 단백질을 검출하기 위해 많이 사용한다. 자세한 내용은 웨스턴 블로팅 참고.

3.4. 생물 정보학


프레드릭 생어는 여기서도 다시 한번 등장한다, 그는 DNA의 염기 해석법을 1970년대에 개발하여 1980년 두 번째 노벨 화학상을 받았고, 바이러스미토콘드리아의 전체 염기를 발견했다. 로저 스타턴을 통해 세계 최초의 서열정보분석 프로그램을 만들어 Bioinformatics, 생물정보학의 창시자에 한발을 올리기도 했다.

3.5. 인간 유전체 사업



3.6. 위상수학과의 접목


관련 컬럼
핵산과 프리온이 일종의 '끈'이기 때문에 근래 들어서는 끈을 다루는 수학 과목인 매듭이론을 접목하고 있다.

4. 대학교 교과목 및 수험과목으로서의 분자생물학


보통 대학교에서 2~8학점 정도 강의로 개설된다. 의과대학에 있어서도 필수과목이다.
주로 DNA와 RNA의 구조, 복제, 전사, 번역, 조절 등 유전 발현을 분자수준에서 탐구하는 학문.

세포생물학+분자생물학 = 분자세포생물학

분자생물학+유전학 = 분자유전학

이런 식으로 교과서를 저술하는 경우도 있다.
시험과목으로 나오는 경우는 M/D/PEET, 변리사 2차 정도가 있다.

4.1. 별도의 학과로 개설된 경우


일부 대학교에서는 분자생물학과를 따로 떼서 운영중이다. 만약 주변에 생명과학과와 분자생물학과 중에 어디에 진학해야 할지 고민하는 수험생이 있다면 별 차이 없다고 말해주면 된다. 1학년 전공기초가 전부 같아서 한 강의실에 생명과학과와 분자생물학과가 섞여서 수업을 듣기도 하고 생명과학과의 전공필수가 분자생물학과에서는 전공선택으로 선정되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15] 대학원 과정도 분자생물학과 대학원은 '분자생물학을 접목한' 생명과학을 연구하는데, 어차피 다른 대학에서는 이걸 생명과학과에서 다 연구한다. 즉 분자생물학과를 따로 떼서 학과로 만들어도 본질은 생명과학과와 같고 생명과학과의 커리큘럼과는 별 차이 없다는 것이다.
  • : 생명과학부로 통합됨
  • 단국대학교[16] : 학부에는 생명과학과/분자생물학과가 분리되어 있으나 대학원에서는 생명과학과로 통합된다.
  • 세종대학교 : 생명과학과가 없고 분자생물학과만 있다.
  • 부산대학교 : 학부 생명과학과/분자생물학과, 대학원 생명과학과/분자생물학과로 소속이 다르지만 배우는 건 비슷하다. 부산대학교 분자생물학과의 분자생물학 전공 교수들도 분생과는 생명과랑 별 차이 없고 대학원에 갈 때도, 취직할 때도 생명과랑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말한다.
  • 전북대학교
  • 강원대학교 : 학부에 분자생명과학과가 있다. 생명과학과는 자연과학대학에 있지만, 분자생명과학과는 의생명과학대학에 소속되어 있다.
  • 제주대학교 : 생명공학부에 분자생명공학전공이 있다.
  • 동아대학교 : 생명자원대 단과대에 분자생명공학과로 개설되어 있다.
  • 한양대학교 : 자연과학대학에 생명과학과가, 과학기술융합대학에 분자생명과학과가 있다.
  • 전남대학교 : 농업생명과학대학 안에 분자생명공학과가 있다.
[1] 쿠르츠게작트의 영상.[2] 독일 제국의 막스 폰 라우에도 같은 해 X선 회절을 3차원 결정격자로 먼저 밝혀내어 각각 1914년(라우에), 1915년(브래그 부자)가 노벨상 수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아닌게 아니라 라우에는 스승인 막스 플랑크(플랑크 상수와 에너지 양자화의 공로를 아직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음)보다 4년 빨리 노벨상을 수상했던 것이다.[3] 화학원소 라듐(Ra)가 아니라 Pb-210을 달리 부르던 이름이다.[4] 단백질은 종류가 다양했기 때문에 "1효소 1유전자설"과도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다. 반면 핵산은 고작 염기가 4종류 밖에 없었기에 의미있게 여겨지지 않았다.[5] 허쉬는 꽤 훗날인 1969년에야 노벨 의학상을 수상했다. 물론 델브뤽이나 루리아는 아예 1942년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가장 불행한 것은 이때 상을 받지 못한 허쉬의 조수였던 여성 마사 체이스일 것이다. 마사 체이스는 1964년에야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결혼과 직업에서 실패하여 1960년대 말 이후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6] 사실 폴링도 “화학결합의 성질을 연구하고, 이를 복잡한 물질의 구조 연구에 적용"으로 1954년 노벨상을 받았으니, 역시 이쪽도 외도였던 셈이다. 유명한 이야기지만 폴링은 1950년대 반핵, 즉 핵무기 반대로도 외도하고 있었다. 매카시즘에 시달리면도 폴링은 1962년 노벨 평화상도 수상하면서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다. 물론 한계도 있었다. 폴링은 이후 정신병 역시 효소의 결핍에서 생긴다는 "분자의학"을 제창하고, 비타민C에 대해 열심히 연구했지만 결국 지나친 믿음 속에 비타민C가 감기에 특효라는 이야기에서 넘어서 동맥경화(협심증)까지 낫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곧 플라시보 효과라는 반박이 쏟아졌지만 논쟁은 계속되었으며, 폴링은 결국 메가 비타민 이론의 창시자가 되고 만 것이다! 결국 폴링은 삼중나선 구조에 더해서, 노벨상 (2관왕) 수상자도 틀릴 수 있다는, 그것도 아주 크게 틀릴 수 있다는 교훈에 한 획을 더욱 그었다.[7] 이건 윌킨스와 로절린드 프랭클린의 불화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프랭클린은 왓슨을 싫어했고, 윌킨스는 프랭클린을 싫어했기에 왓슨에게 가끔씩 (자신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중요한 정보들을 주었다. 이 엄청난 스토리에 대해서는 위키백과 항목 참조. # 결론부터 말하면, 프랭클린은 DNA를 물 분자가 둘러싸고 있고 인산기가 밖(즉, 염기끼리 결합한다는 것)이라는 것을 왓슨-크릭보다 1년 먼저 알고 있었다. 그나마도 왓슨은 크릭이 바꾸라고 해서 발표 두달 전에야 바꿨다.[8] 크릭이 나이도 더 많은데 '크릭-왓슨'이 아닌 '왓슨-크릭'이 된 것은 동전 던지기의 결과였다.[9] 미셸 푸코의 지식/권력 구도라는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을 받아들인 과학사가들은 분자생물학의 역사가 수사학적 분석과 급진적인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여 "학문적 정당성"을 가진 생물학, 생화학에서 독립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즉, 애초에 분자생물학의 역사가 "언플"의 역사였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만한 정당한 과학적 발견들이 쌓인 탓도 있다.[10]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사이트 참고바람 http://madscientist.wordpress.com/2013/12/20/[11] 1ng의 DNA만 있어도 10번의 pcr cycle만으로도 이론적으로 1024 ng이 생성된다.[12] 효소는 단백질이기때문에 고온에서 변성된다.[13] 세균들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DNA를 절단낼 용도로 가지고 있는 효소. 특정 염기서열을 자른다.[14] 문자 그대로 그 유전자가 코딩하고 있는 mRNA, 단백질이 많아지는 것을 말한다.[15] 심하면 2학년 전공필수나 전공선택도 과목이 겹칠 수가 있다![16] 이원화캠퍼스 계획에 따라 죽전캠퍼스에서 천안캠퍼스로 이전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