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리크 라인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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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Fredrik Reinfeldt, 1965.8.4 ~
스웨덴의 경제학자 출신 정치인. 당적은 중도연합당으로, 2003년부터 2015년까지 당대표직을 역임했으며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총리를 재직했다.
1. 생애
스톡홀름의 일반출산병원에서 브루노 라인펠트와 비르기타 라인펠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부친이 런던의 셸 회사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가족이 잠시 런던에서 살기도 했지만, 이내 스톡홀름으로 돌아왔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생회장이 된 적도 있었고, 이 때는 열정적인 축구 팬이었다. 젊은 시절 군복무를 했는데,[1] 이 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 정치 활동
18세였던 1983년 중도연합당에 입당했으며, 이 시절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당의 청년 조직인 중도청년동맹(이하 청년동맹)에서 활동했는데, 1990년 스톡홀름 지부 의장이 되었으며 이듬해 총선에 도전해 처음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때마침 중도연합당 등 우파연합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원내 입성과 동시에 처음으로 여당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후 1992년 청년동맹 대표직에 도전해 울프 크리스테르손을 꺾고 당선되었다. 58:55로 라인펠트가 겨우 당선되었는데, 이 때 이념 갈등이 극에 달해 일명 릭셀레 전투라고도 불렸다.[2] 당시 라인펠트는 당의 보수주의 진영을 대변했고, 크리스테르손은 자유지상주의 진영을 대변했는데, 이 때 보수주의 진영이 승리하면서, 향후 당은 보수주의 진영이 장악하게 되었다.[3]
초기만 해도 카를 빌트 총리 겸 당대표와 두터운 친분을 맺었으나, 1994년 총선 패배 이후로 빌트에게서 척을 졌다. 바로 이듬해 "추억의 여행(Nostalgitrippen)"이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서 몇몇 정치인들을 "카를 빌트 같다"며 대놓고 디스하다시피 했으며, 이에 빡친 빌트는 라인펠트를 국회의사당으로 불러 죽어라 꾸짖었다(...). 이후로는 빌트에 대한 비판 강도를 낮췄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당 내에서 소외되다시피 했고, 1999년 보 룬트그렌으로 대표가 교체될 때까지 그 어떠한 당직도 맡을 수 없었다. 물론 그 룬트그렌이라는 사람도 책에서 언급된 "빌트 같은 사람" 중 하나였지만(...).
이렇게 소외되는 듯 싶었지만 반전의 계기가 생기는데, 그것은 바로 2002년 총선이었다. 당시 중도연합당은 15.26%의 득표율로 349석 중 55석을 얻었는데, 문제는 이게 1973년 이후 최저 성적이었다. 이 빼도 박도 못 하는 참패로 룬트그렌은 사퇴 압력에 시달려야만 했고, 이 때다 싶었던 라인펠트는 일단 원내대표직에 도전해 당선되었다. 이후로 승승장구하다가, 2003년 룬트그렌의 사퇴와 함께 당대표직에 도전했고 만장일치로 당대표가 되었다.
당대표 시절, 일명 "새로운 중도당(De nya Moderaterna)"이라는 기치 아래 당의 중도화를 추진했다.[4] 스웨덴이 사회민주당의 장기 집권 하에서 복지 제도가 굳어졌는데, 그간 중도연합당을 포함한 우파는 이러한 정책에 반대로 일관하며 축소를 시도했다가 역풍을 수시로 맞았다. 이를 의식한 라인펠트는 복지에 대한 비판을 가급적 삼갔고, 감세를 주장하면서도 고소득층이 아닌 저소득층과 중산층을 타겟으로 삼았다. 즉 급진적인 변화 보다는 점진적인 변화를 내세운 것. 이러한 좌클릭 덕에 스웨덴 노동조합총연맹의 초청까지 받았는데, 그간 노조가 사민당을 지지하고 중도당을 비판해왔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5]
이에 힘업어 2004년 비공식적인 우파연합을 스웨덴을 위한 동맹(이하 동맹)이라는 공식 연합체로 확대·개편하였고, 2006년 총선에서 178석을 차지해 171석을 차지한 좌파연합을 누르고 정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라인펠트는 41세라는 나이에 총리에 취임하게 되었으며, 1925년 40세에 취임한 리카르드 산들러의 뒤를 이어 스웨덴 역사상 두 번째로 젊은 총리가 되었다.
3. 총리 시절
총리에 취임한 뒤로 그간 스웨덴의 복지 정책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을 추진했으며, 그 예로 중도연합당이 오랫동안 추진해 왔던 감세 정책이 있다. 취임한 지 2년밖에 안 되 세계 금융위기를 맞이했는데, 이를 빠르게 대처해 경기 침체를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스웨덴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경기를 회복하는 나라로 기록되었으며, 이 덕분에 2010년 무난히 재선에 성공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중도주의적 사회 정책들을 실천에 옮겼다. 일례로 보다 더 관용적인 이민 정책 등을 펼쳤고, 이에 대한 일환으로 불법체류자들을 대상으로 한 단일의료보험제도 도입 및 친가정복귀 규제 완화 등이 있다. 특히 임기 말인 2014년 스웨덴이 대규모 이민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는데, 이에 대해 국민들에게 마음을 열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러한 좌클릭은 오히려 독이 되기도 했는데, 특히 라인펠트 치하에서 스웨덴 제1 보수정당인 중도연합당이 좌경화하면서 외교, 사회 정책에서는 사민당과 큰 차이가 없어졌다. 이는 사민당의 장기집권에 회의를 느낀 유권자들에게 "중도연합당=사민당 2중대"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하였고, 결국 일전부터 지지율을 스멸스멸 늘려가던 극우 정당인 민주당이 2010년 처음으로 원내에 진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에는 아예 중도연합당을 위협할 정도로 세가 급상승하게 되었다.
또한 아무리 경제적으로 실용주의를 펼쳐도 우파는 우파인지라, 여전히 복지 제도에 대한 축소는 계속되었다. 이것은 사민주의가 녹아든 스웨덴 국민들의 반발을 제대로 초래했다. 한 예로 복지 예산이 축소되면서 유치원 급식으로 제공되던 빵이 어느 순간부터 딱딱한 빵으로 교체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학부모들을 제대로 분노하게 만들었다.
결국 2014년 총선에서 좌파연합이 재집권했으며, 라인펠트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4. 이후의 삶
2014년 12월 31일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고, 이어 2015년 1월 10일 당대표직도 내려 놓았다. 신임 대표로는 아나 킨베르크 바트라가 선출되었는데, 그는 라인펠트가 비판했던 경제적 자유주의 계열로, 울프 크리스테르손과 가까운 사람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당 내 중도주의 세력은 몰락했으며, 당은 도로 우경화하게 된다.
스웨덴 역사상 두 번째로 젊은 총리, 전후 최연소 총리라는 기록을 세웠지만, 대신에 50세도 안 되어 쓸쓸히 몰락했다.[6] 현재는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5. 각주
[1] 대한민국처럼 스웨덴도 징병제 국가이다. 2010년 잠시 폐지되었으나 2017년 부활.[2] 물론 릭셀레라는 도시에서 치러진 대회라 붙은 이름이지만, "전투"라고 불렸을 정도로 매우 뜨거운 열기를 보였다는 것.[3] 물론 크리스테르손은 훗날인 2017년에 대표에 오르고, 이미 2015년부로 당은 자유지상주의 진영이 장악하게 되었다.[4] 영어로 번역하면 "The New Moderates". 참고로 한나라당도 2004년 총선 당시 박근혜 대표 하에서 "New"를 강조했었다. 당시 로고만 봐도 알 수 있다.[5] 대한민국에서 일부 보수 진영으로부터 좌파, 사회주의라고 공세를 당하는 더불어민주당조차 민주노총 등에게 지지는커녕 오히려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유럽의 사민당들은 기본적으로 노조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에서 이런 류의 사민당이 힘이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6] 한국에서는 50세에 정치를 하면 젊은 정치인으로 간주될 정도로 그만큼 연령대가 높지만, 스웨덴 등 서구라던가, 심지어는 동남아조차 젊은 정치인들이 대세다. 즉, 이런 나라들에서는 50세가 그렇게 젊은 건 아니라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