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 2012년에 등록된 동명의 정당 - 한나라당(2012년)[1]
  • 2014년에 등록된 동명의 정당 - 한나라당(2014년)[2]
  • 희망한나라당이라는 당명을 썼던 정당 - 친박연대(2017년)
  • 호주에 있는 one nation party - 일국당
  • 변경된 당명으로의 활동 -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대한민국 여당
열린우리당
(2004.5~2007.2)

한나라당
(2008.2~2012.2)


새누리당
(2012.2~2017.2)
구 로고(1997.11.21 ~ 2004.03.22)
신 로고(2004.03.23 ~ 2012.02.12)
한나라당
영문 명칭
Hannara Party
Grand National Party
창당일
1997년 11월 21일
당명 변경
2012년 2월 13일 (새누리당)
2017년 2월 13일 (자유한국당)
해산일
2020년 2월 17일 (미래통합당 창당)
통합 정당
신한국당, 통합민주당
(1997년 11월 21일 신설합당)
미래희망연대 (2012년 2월 6일 흡수합당)
이념
보수주의, 자유보수주의

내부계파:
보수자유주의[3]
국민자유주의[4]
국민보수주의[5]
반공주의
신보수주의[6]
신자유주의[7]
사회보수주의
정치적 스펙트럼
중도우파 ~ 우익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0길 18
(여의도동, 한양빌딩)[8]
대통령
이명박 / 17대 (2008.2~2012.2)
의석 수
176석 / 295석 (18대 국회, 당명 변경 직전)
당 색
파란색 (#0000A8, ~ 2004년 3월 23일)
파란색 (#0095DA, 2004년 3월 23일 ~)
정책 연구소
여의도연구소
국제 조직

1. 개요
2. 성향
2.1. 분파
3. 정강·정책
3.1. 전문
3.2. 강령
3.3. 기본정책
4. 당명
5. 당가
6. 역사
6.1. 전신과 창당
6.3. 이명박 정부 - 다시 여당이 되다
6.4. 박근혜 정부 - 촛불에 의해 탄핵당하다
6.5. 2차 당명 개정 이후
7. 계파 갈등
8. 역대 전당대회
9. 역대 당대표
9.1. 총재
9.2. 대표위원
9.3. 대표최고위원
9.4. 원내총무/원내대표
10. 역대 선거 결과
10.1. 대통령 선거
10.2. 국회의원 선거
10.3. 지방선거
10.4. 재보궐선거
12. 그 외
12.1. 성소수자 문제의 스탠스
1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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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민주당이 신설합당으로 창당해서 2012년 2월 12일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 보수정당.[9] 현재 제1야당인 국민의힘의 법적 전신이자 정치적 계승의식을 밝힌 공식적인 최초의 당의 역사다.[10]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출범 이후 대한민국 보수정당계의 가장 큰 전성기를 누린 정당이다. 야당이었던 국민의 정부참여정부 시기에도 그 존재감은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계 정당보다도 강했다. 특히 참여정부 말기~이명박 정부 초기에 그 위세가 절정에 이르러 4회 지선, 17대 대선, 18대 총선에서 3연승을 거두게 된다. 가히 보수정당 최고의 리즈 시절. 이 당시엔 20대민주당 지지율은 19.5%에 불과한 반면 한나라당은 무려 53.1%에 달했었다.# 17대 대선 때는 대통합민주신당정동영 후보가 서울에서 24.5% 득표한 것에 비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54.2%를 득표했는데, 이는 제6공화국 출범 이후 서울지역 최고 득표율이자 2위와의 최다 표차 신기록이다.
2011년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건이 벌어져 민심이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고 당시 대통령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2012년 열릴 총선과 대선에서 패색이 짙어졌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게 됨에 따라, 결국 19대 총선을 앞두고 이미지 쇄신을 위하여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교체하게 된다. 이후 2017년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자유한국당으로 2차 당명 변경을 하였다.
민주화 이후 최장수 정당명이다.[11] 또한 최장수 정당법인이기도 하다. 중간에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으로 2차례 당명 변경만 이루어졌으니, 1997년 11월부터 2020년 2월까지[12] 자그마치 22년 동안 존속했다.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hannara.or.kr'이었다.

2. 성향


전신인 신한국당 시절 IMF 금융위기로 인한 경제위기로 김영삼 대통령이 인기를 잃으면서 보수 내부의 헤게모니를 상실했고 뒤이어 등장한 삼김청산을 외친 개혁적인 성향의 이회창을 중심으로 보수가 재편하는 와중에 한나라당이 창당했다. 이회창은 삼김청산 과정에서 당내 다수파이자 김영삼의 계파인 온건보수 세력을 적으로 돌렸고 그러면서 강경보수 세력과 손을 잡았다. 이로 인해서 보수정당이 개혁적 면모가 퇴조하고 보수화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다만 이회창이 건재했을 때는 개혁보수 세력을 수혈하기도 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는데 2000년대 초반 이회창이 2번의 대선 패배를 당한 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이회창이 영입했던 박근혜노무현 탄핵의 역풍 속에서 당의 새로운 리더십으로 자리잡으며 상황이 바뀌었다. 강경보수 세력은 차츰 박근혜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한편 2000년대 중반에는 신보수주의 열풍이 불면서 신자유주의가 도입되었고 이 시기 이후 경제적 자유주의가 확고하게 보수정당 전체의 지도이념이 되었다.
그리고 2007년 대선경선을 기점으로 온건보수 세력들은 이명박 대통령으로 집결하였고 중도실용 노선을 천명하며 자유보수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녹색성장을 외치면서 녹색보수주의의 맹아를 보여줬다. 경제정책으로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과거 박정희식 친대기업적 관치경제가 혼합된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다만 신보수주의적인 정체성은 명확해서 친미, 친서구적인 외교노선을 뚜렷이 하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집권 중후반기부터 불어닥친 정권의 부정부패와 무상복지 열풍으로 인해서 다시 온건보수는 헤게모니를 상실했고 박근혜가 김종인과 함께 경제적 자유주의와 거리가 먼 진보적인 성향의 경제민주화를 슬로건으로 총선과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정작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도리어 강경보수 세력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보수정당은 우경화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경제정책과 복지정책은 과거보다 좌경화되어 친대기업적인 관치경제적 요소가 늘어나고 경제적 자유주의가 퇴조하였으나 그렇다고 김종인이 바라는만큼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가 사회보수주의적인 성향이 강화되어서 사회 전반의 영역에 걸친 보수화를 추구했다. 이후 이런 성향은 2010년대 내내 이어졌고, 야당 시절에는 이명박 정부 때처럼 경제적 자유주의의 성향이 강화되었다.

2.1. 분파


  • 중도 ~ 중도우파
    • 보수자유주의 분파
주로 강경 소장파들이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보수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이들은 국보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대체입법을 하는 식으로 악법을 교체해야한다고 주장하였고 내셔널리즘 자체가 점차적으로 비판받는 상황 속에서 공동체 자유주의를 외치던 박세일같은 국민자유주의 성향에 가까운 정치인도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존재하기 힘들어보인다. 이 분파는 사실상 거의 뿔뿔이 흩어지거나 아래의 자유보수주의로 보수화되면서 사라졌는데 왜냐하면 이회창이 당권을 잡는 과정에서 민정계와 제휴하고 민정계가 부활하면서 국보법 폐지를 외치는 목소리가 먹혀들기 힘들어졌고 오히려 보수정당 내의 색깔론 공세를 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0년대 중반 열린우리당이 창당될 때 넘어간 사람들도 있다.
  • 자유보수주의 분파
온건 소장파나 신한국당 시절 주류였던 상도동계가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친이계의 경우 이명박 정부중도실용주의를 표방했는데 집권후반기 들어서 우경화되어서 완전한 중도주의로 보기는 힘들다. 꽤나 스펙트럼이 넓은 분파다. 보수정당에 위기 상황이 올 때마다 쇄신을 외치면서 당 개혁을 주도하려고 했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2004년 총선 참패 후에 신보수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하며 경제적 자유주의를 이념적으로 적극 수용하였다. 지금의 개혁보수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 우파
    • 국민보수주의 분파
정확히 언제 이들이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냥 수십년에 걸친 정치적인 역동성의 과정에서 사멸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맞다. 핵심적인 이념은 반공주의 특히 냉전적 반공주의 이념이고, 강한 대북정책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보수와 진보를 대북관으로 판단했다. 그 외에는 사회문화적으로 보수적이고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보다는 강력한 리더쉽을 선호하였고,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선호하면서 지방자치에 부정적이었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경제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의 친대기업적 관치경제를 지지하는 성향을 가진 신보수주의 이전의 보수였다. 엄밀히 말해서 경제적 자유주의 성향을 가졌다고 보긴 어렵지만 시장경제의 원리와 자본주의에는 동의하고 수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적극적 재정정책으로 인한 인위적인 경기부양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뿐이다. 또한 복지국가에 대해서 호의적이고 큰 정부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면모가 존재했다. 2000년대 중반 박근혜를 중심으로 강경보수가 전반적으로 재편되면서 와해되었다.
  • 사회보수주의 분파
신보수주의운동 이후 등장했다고 볼 수 있는데 자유보수주의 분파가 신보수주의를 수용하고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흘러왔다고 보는 것이 편하다. 사회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반공주의 이념으로 대표되는데 2010년대 이후 주류계파가 되었으며 2020년까지 계속해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3. 정강·정책


1997년 11월 21일 처음으로 만든 판이다.[13]

3.1. 전문


국가발전과 국정운영을 주도해온 신한국당과 정통야당의 맥을 이어온 민주당이 통합한 「한나라당」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확립함과 동시에 깨끗한 정치와 튼튼한 경제를 이룩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분열과 부패의 구정치구도와 행태를 청산하는 정치혁신으로 국민대통합의 선진민주정치를 구현하고,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체제를 바탕으로 안정 속의 개혁을 통해 국민의 삶의 질을 더욱 높여 나가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루어 인류의 공동번영에 이바지하는 「21세기 위대한 선진한국」을 창조할 것을 다짐하면서 우리의 강령과 기본정책을 밝힌다.


3.2. 강령


1.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며 정치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깨끗하고 합리적인 새로운 정치문화를 창출함으로써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주민자치ㆍ생활자치를 구현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정착 발전시켜 전인류의 평화와 발전에 기여한다.

2. 우리는 자율과 협동, 창의와 공정을 바탕으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고 경제정의를 실현함으로써 활력 있는 선진경제를 이룩한다.

3.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국가발전과 선진대국 진입의 근간임을 자각하여, 과학기술의 획기적 진흥을 통한 과학기술 선진국으로의 도약과 정보화 시대의 세계중심국가가 되도록 한다.

4. 우리는 온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며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통해 복지사회를 건설하고 참여와 협력의 공동체적 노사관계를 정착시켜 선진산업사회를 이룩한다.

5. 우리는 교육의 기회균등을 보장하고 지속적인 교육개혁으로 교육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높이며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중시하며 국제화시대에 부합하는 도덕적이고 유능한 인재를 육성하고 민족문화를 창달하여 인류문화 발전에 기여한다

6. 우리는 쾌적한 환경을 향유할 인간의 기본적 생존권을 보장하며 개발과 보전이 조화를 이루는 환경친화적인 자원절약형사회를 지향하여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건강한 녹색사회를 구현 한다.

7. 우리는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여성의 참여기회를 확대하며 여성의 능력을 적극 활용하여 국가발전에 기여하게 함으로써 남녀가 평등하게 대우받는 사회를 이룩한다.

8. 우리는 외부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도록 자주적 방위역량을 구축하고 주변국과의 안보 협력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확고한 국가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한다.

9. 우리는 화해와 협력을 통해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공영(共榮) 공동발전을 적극 추진하여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며 능동적인 외교를 펼침으로써 세계의 중심국가로 도약하고 국제적 협력과 노력에 적극 동참하여 세계평화와 인류의 번영에 기여한다.


3.3. 기본정책


1. 깨끗하고 생산적인 21세기의 새로운 정치 구현

2. 활력있고 공정한 선진경제의 건설

3.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도약

4. 「삶의 질」을 높이는 선진복지사회의 실현

5. 자율적이며 창의적인 인간교육과 새로운 민족문화의 창달

6.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조성

7. 여성참여 기회의 확대와 실질적 남녀평등 사회의 실현

8. 확고한 국가안보역량의 강화

9. 통일실현과 세계평화에 기여

아래는 새누리당의 정강 및 정책으로 바뀌기 직전의 버전이다.

1. 미래지향적 선진정치

2. 큰 시장·작은 정부의 활기찬 선진경제

3.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질서

4. 부지런하고 정직한 사람이 잘 사는 나라

5. 일자리가 넘치고 중산층이 두터운 나라

6. 과학기술강국과 정보복지사회

7. 자생복지체제를 갖춘 그늘 없는 사회

8. 양성평등사회

9. 국제적 분업과 지역적 특성에 입각한 지방화

10. 안전하고 편안한 나라

11. 품격 높은 문화대국

12. 교육입국과 인재대국

13. 지속가능한 친환경사회

14. 더불어 살아가는 나눔의 공동체

15.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

16. 실용주의 외교 추구

17. 굳건한 안보체제의 확립

18. 한반도 통일노력과 통일 이후 대비 전략 수립


4. 당명


  • 한국어: 한나라당(한자 혼용 시: 한나라黨)
  • 영어: Hannara Party 또는 Grand National Party (GNP)[14]
  • 중국어
  • 일본어
    • 신자체 한자 사용: ハンナラ党
    • 구자체 한자 사용: ハンナラ黨[15]
    • 발음 표기
조순 총재가 직접 지은 '한나라당'이란 이름은 '하나'란 뜻과 '크다'는 뜻[16]을 함께 갖고 있고, 한민족의 '한(韓)'과도 통하는 등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다. 당시로선 드문 순우리말 당명이었다.

5. 당가



(1절) 나라를 책임질 우리는 하나
자유와 정의 넘치는 통일한국 만드세
미래 위한 횃불 들고 함께 나아가자
(후렴) 민족의 꿈을 이루는 새희망 한나라당
국민과 하나되어 사랑받는 한나라당
(2절) 헌신과 봉사의 열정 모아서
희망찬 미래 향하여 우리 두 손 잡았네
21세기 통일한국 함께 열어가요
한나라당의 당가는 다른 정당의 당가와 달리 상당히 호평을 받았다. 민주노동당 당가 같이 너무 운동권 느낌이 크지 않는 데다가, 민주통합당국민의당 같이 좀 심하게 유치하지도 않아 여러모로 호평을 받았다.
이후 1차 개명한 정당인 새누리당 당가가 거의 동요급의 수준으로 낮아짐으로 인해 혹평을 받았다.

6. 역사



6.1. 전신과 창당


한나라당의 전신은 1990년 1월에 창당된 민주자유당(민자당)이다. 당시 대통령 노태우가 총재로 있던 여당 민주정의당(민정당)과 야당이던 통일민주당(김영삼)과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의 이른바 3당 합당으로 탄생한 것. 특히 신민주공화당의 전신인 민주공화당은 1963년 박정희가 창당했고 전두환이 창당한 민정당은 그 기반을 일부 흡수하였기 때문에, 한나라당을 깔 때 뿌리가 군사정권 시기의 집권당인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이라는 공격이 많은 편이다. 다만 YS가 집권한 후엔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공화계와 민정계가 가차없이 축출당함으로써 실질적인 민정계는 절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떨어져 나간 공화계와 민정계가 3당 합당에 버금가는 DJT연합을 통해서 김대중 정권을 탄생시키는데 공헌했다.
어찌 됐든 민자당은 1992년 말의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정권을 재창출하는데 성공하지만, 2년여 지난 1995년 초 김종필이 김영삼과의 갈등 끝에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이하 자민련)을 창당하면서 떨어져 나가고 그 해 말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비자금 문제와 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되면서 구설수에 오른다. 결국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꿨고 이듬해 15대 총선에서는 139석을 얻으며 상당한 선전을 한다.
15대 대선 국면이던 1997년 11월 21일에는 통합민주당[17]과 합당하면서 지금의 당명인 한나라당을 쓰게 되었다.[18]

6.2. '잃어버린 10년'


그러나 새정치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 후보 김대중자유민주연합 김종필의 연대(일명 DJP연합)에 패하면서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10년의 세월을 겪게 된다.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 161석의 과반의석을 점하던 한나라당은 철새들의 국민회의 및 자민련으로의 이적으로 과반의석을 상실하게 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당시 상도동계와 민정계, 공화계 중 반(反) 이회창 계열이 탈당한 것이다. 그래도 친 이회창 세력의 민정계와 공화계, 상도동계 덕분에 제1당을 유지했고, 통합민주당 출신까지 합해서는 안정된 의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2000년 16대 총선에서 예상[19]을 뒤엎고 과반에 육박하는 제 1당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사실상 승리하게 된다. 물론 민정계, 공화계, 상도동계의 원로 정치인들이 은퇴, 공천 탈락, 낙선하지만 다른 의원들 상당수가 당선되며 한나라당 내 민정계와 상도동계, 통합민주당 계열 원로 및 중진들의 세는 크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신진인사들이 재선에 성공, 새로운 신진 정치인들도 탄생했다.
당시 민정계는 15대 총선보다 더 세가 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세를 과시하였다. 당시 한나라당에 남아있던 민정계 정치인은 총 49명이었다. 당시 자민련이나 새천년민주당 세력까지 합치면까지 합하면 당시 국회 내에 남아있던 민정계와 공화계는 총 62명이었다. 비록 제15대 국회 때보다 더 세가 줄었지만 국회 내에서 민정계와 공화계는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일부 의원들이 당선무효 또는 지방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의원 직을 사퇴하거나 잃은 뒤 재보궐선거를 통해 다시 국회 과반의석을 확보하였고, 연이어 정치신인들이 탄생하거나 재선에 성공했고 중진들과 원로들도 복귀했다. 또한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의 국회의원들이 한나라당으로 입당하며 의석이 계속 늘어났다. 그리고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압승을 거두었으나, 이어 치뤄진 16대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비리, 그리고 병풍의혹 등으로 패했다. 이미 15대 대선부터 알려진 96년 안풍사건, 97년 세풍사건, 총풍사건의 "3풍"도 여전했지만, 97년 대선 말 기승을 부린 병풍사건과, 2002년 차떼기 의혹이 그야말로 결정타. 이후 한나라당은 개혁 소장파들이 탈당한다.
[image]
이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으로 17대 총선에서 큰 위기에 몰린다. 중진들과 원로 정치인들이 많이 은퇴하거나 공천 탈락, 또는 낙선한다. 이 때 한나라당 내에서 민정계 정치인들이 많이 없어지고 있었다. 같은 보수정당인 자민련도 같은 상황을 겪었다. 하지만 여전히 민정계와 공화계, 상도동계의 원로 정치인들과 중진들이 무사히 당선되며 아직까지 그 중에는 민정계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정치신인들도 탄생했다. 당시 살아남은 민정계와 공화계는 세가 줄어들었음에도 아직은 건재했다. 이에 자기반성 차원에서 기존의 당사[20]에서 천막당사로 잠시 옮겼었다[21]. 구 여의도 중소기업박람회장 부지로 이후 서울국제금융센터가 자리잡은 곳이다. 이후 일부러(...) 조금 허름한(?) 건물로 옮겼었다. 그 위치는 강서구 염창동 274-17[22], 등촌역LG전자 강서본점 자리다.[23]
그러나, 이런 흑역사를 뒤로 하고 천막당사 시절을 거쳐 2006년 지방선거, 승리로 다시 힘을 비축해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 지금도 한나라당 내부에서 뭔가 일이 터지면 당의 일부에서는 '천막당사 시절을 생각하라!'는 투의 반성조의 발언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당 내부에서도 충분히 반성을 하고 되새겨 볼만한 과거였던 듯하다. 특히 2006년 지선의 경우 한나라당이 광역단체장 16곳 중 호남과 제주[24]를 제외한 12곳을 휩쓸고 기초단체장 155곳을 쓸어가며 압승했고 광역비례 정당듣표도 53.9%로 과반을 넘겼다. 이후의 재보선에서도 연전연승했고 2007년 4.26 재보선 패배[25]를 빼면 한번도 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가지 '반전'으로, 이 천막당사의 임대료는 오히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당사 건물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천막 당사를 설치하기 위해 서울특별시에 임대료로 약 4200만원을 지불하였는데, 총 기간은 50일 정도였다. 반면 당시 열린우리당 당사의 건물 임대료는 월 2500만원 선. 이 때문에 당시에도 보여주기식 행사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으며, 부지 임대에 대한 서울시의 특혜 논란도 약간 있었다(당시 서울시장들이 모두 한나라당이었기도 했다).

6.3. 이명박 정부 - 다시 여당이 되다


이후 차곡차곡 힘을 길러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며 이원복, 윤두환, 정진석, 이주영 등이 정계에 복귀하고 신상진, 임해규, 차명진, 고희선, 정진섭, 고조흥, 이진구, 정희수, 김정권 등의 정치 신인들이 정치에 진출하며 지지율이 상승하였고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대승을 거쳐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경제살리기 공약[26]으로 2007년 17대 대선에서 승리하게 되어 10년만에 여당이 된다. 이후 2008년 18대 총선에서도 과반수의 의석인 153석[27]을 확보하게 된다.[28] 이때 한나라당의 친이계는 박근혜의 힘을 빼고자 친박 공천학살을 단행하여 친박계 의원들이 대거 탈당해 친박연대와 친박 무소속 연대를 결성해 친이계에 맞섰다. 이 때문에 당시에 현역 의원들 중에서 공천 탈락, 불출마, 낙선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남아있던 민정계들이 거의 공천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무소속, 친박연대 당선 후 복당한 사람까지 합하면 현역 의원들 중에서도 당선된 예도 있고 이 때 당시 민정계는 거의 정치에서 물러났지만 그래도 아직 약간이나마 건재했다. 그리고 정치신인들도 많이 정치에 진출했다. 당시 남아있던 민정계 출신은 김일윤, 이상득, 김형오 등이었다. 또 정몽준은 친이계 중 이상득계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검역 문제로 인한 2008년 촛불시위, 당내에서 2007년 경선부터 갈라진 자유선진당과 친박(박근혜)계열, 그리고 친이(이명박)세력의 내부 다툼[29] 등으로 인해 2009년 4.29 재보선에서 5곳의 선거구 중에서 한나라당 후보는 단 한곳에서도 당선되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당시에 구본철, 윤두환, 김일윤이 의원직을 잃었는데 한나라당이 차지하였던 2곳은 민주당에 빼앗기고, 그래도 친박 계열 무소속이 당선된 경주는 보수텃밭을 사수했다. 당시 그나마 살아온 보수성향 정치인도 친박 성향이었던 정수성이었다.
같은 해 10.28 재보선 역시 5곳의 선거구에서 치러졌는데, 수도권 2곳을 민주당에 내주고, 텃밭인 경남 양산시(당시 단일 선거구. 2016년 분구)에서도 고전 끝에 신승[30]을 거두는 등, 야당에 3:2로 패배하여 심상찮은 민심을 겪어야 했다.[31] 당사자들은 재보궐에서 이만하면 잘했다고 자축했으나, 한나라당이 확실히 승리한 곳은 민주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은 강원도 강릉시 뿐이었다. 그래도 권성동이 정치에 진출했고, 박희태 전 대표가 복귀하며 이재오의 공백으로 흔들리던 친이계가 규합되었다. 당시 한나라당 계열 정당에서는 허범도가 의원직을 잃었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수도권을 주축으로 혼전이 예상되었다. 야당 측에서는 야권 단일화를 추진했고, 한나라당 입장에서도 세종시 문제 등 몇가지 이슈로 인해 한나라당이 야당이었던 2006년보다는 고전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그러나 선거 직전 터진 천안함 사태로 북풍을 몰아 어느 정도 우세할 것으로 내다보았지만...
선거는 한나라당의 참패였다. 여당은 선거 전까지는 상당한 우세를 자신하였으나, 막상 선거가 끝나고 보니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서울시장마저 한명숙 후보가 상당히 따라왔으며[32] 부동의 텃밭이라고 생각했던 경남과 충남, 강원도[33]에서도 김두관, 안희정, 이광재 후보에게 져버렸을 정도다. 2030 유권자들은 한나라당 지지자의 2배 이상이 민주당을 지지했다. 특히 만년 텃밭 경남에서의 패배는 당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패배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당내 내분이 다시 불 붙었다. 경남 도지사를 비롯해 경선에서 승리했으나 본선에서 져버린 친이 계열은 패배의 책임을 추궁받았다. 친박도 역시 박근혜 전 대표가 친박 계열 후보들만 지원 유세를 해줬는데도 친박은 단체장 자리는 하나도 얻지 못했다. 이후 친박은 선거 직후인 6월 29일 자유선진당, 민주당과 함께 세종시의 행정도시화를 중단하는 수정안을 부결시켰으며, 이로서 친박이 여당내 야당 노릇을 한다는 사실이 뚜렷해졌다. 결국 친이/친박 모두 대선 후보 지지율 동반 하락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
세종시 수정안 부결에도 불구하고, 당시만 해도 현직 대통령의 힘이 아직 강한 집권 3년차였다. 2010년 7월 14일의 제11차 전당대회에서도 안상수, 나경원, 정두언 등 대표적인 친이계 의원들이 대거 대표와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친박계 의원은 서병수 한명으로 그나마도 꼴찌였다. 무당파나 개혁계 후보들도 당선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7.28 재보선에서 승리하며 친이계의 좌장격인 이재오가 돌아왔고 이상권, 한기호, 윤진식, 김호연 등의 정치 신인들도 탄생했다. 이후 잠깐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오르게 된다.
하지만 친이계는 나름대로 이명박 대통령과 각을 세우며 차기를 준비하려고 했지만, 이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불만(소위 "진노")만을 샀다. 이른바 보온병 논란과 함께 안상수 대표의 이미지는 무참하게 무너졌다.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김태호 의원[34]을 제외한 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패했으며, 심지어 민주당 측 이광재 지사의 비리문제로 터진 강원도지사 재보궐 선거에서조차 또 패했다. 한나라당의 텃밭이었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을에서 거물인 강재섭 전 대표가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게 나가떨어진 것[35] 역시 치명타였다.
결국 안상수 대표는 사퇴했으며, 한나라당은 지리멸렬해지기 시작했다. 당대표에 홍준표 의원을 선출하며 당을 일신하려는 노력을 해 보았지만,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이 발의한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인하여 그야말로 나락의 길로 떨어지게 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측했듯이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투표율(33.3%에 미치지 못하는 25.8%) 미달로 개봉도 하지 못한 채 끝나버렸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약속한 대로 서울시장을 사퇴하게 되었다.
이 여파로 홍준표 체제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최고위원이던 나경원 의원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세웠지만 20~40대 유권자들의 이반과 후보자에 대한 각종 의혹과 그에 대한 반박 등으로 인하여 여론이 나빠졌고 결국 야권 단일후보인 무소속 박원순 후보에게 1:1 정면 대결에서 패배하였다.[36]
그 여파는 커서, 당 내부에서는 백가쟁명식으로 당 쇄신 요구가 분출하기 시작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선관위 DDOS 공격 사건이 벌어지자 당은 사면초가에 몰렸다. 여당은 그럼에도 한미 FTA 강행 처리를 주도했으나 이 역시 야당에게는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었다.
결국 12월 8일 남경필, 원희룡(당시 소장파), 유승민(당시 친박) 최고위원이 사퇴한 데 이어, 9일에는 홍준표 대표까지 사임하면서 최고위가 사실상 와해되었다.관련 기사 이에 결국 박근혜가 구원투수로 재등판하게 되었다.
2011년 12월 말 비대위가 설치되어서 위원장에 박근혜가 임명되었으며 각종 쇄신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이 폭로되면서 한나라당이란 브랜드 자체의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 관련기사 결국 상황을 타개하고자 2012년 2월 당의 이름을 바꿔 재결성하게 되었고, 기본적인 당헌과 규칙, 당원들은 새누리당이 승계하게 된다.

6.4. 박근혜 정부 - 촛불에 의해 탄핵당하다


2012년 박근혜가 당권을 장악한 후 한나라당은 친박 성향의 미래희망연대와 합당하였고 이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이후 19대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새누리당은 과반을 차지하면서 승리를 거뒀고 18대 대선에 대비해서 대통합 행보를 내세우며 호남 출신의 동교동계를 포섭하고 선진통일당과 합당하며, 이회창 전 대선후보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리하여 민주화하고 제6공화국 최초로 대선에서 과반의 득표율을 달성하였다.

2014년에는 6회 지선에서 여론조사상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으나,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정국이 돌변하면서 무승부격의 결과를 얻었다. 이후 제 3차 전당대회를 통해서 김무성을 대표로, 유승민을 원내대표로 하는 새누리당의 2대 지도부가 선출된 후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는 총 15개 의석 중 무려 11개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는데, 애초에 기존 의석이 새누리당 당선자가 많았던 지역이긴 하지만 민주당계 텃밭이던 호남에서 이정현 후보가 당선된 것은 이변으로 받아들여졌다. 보궐선거에서 나경원, 정미경, 이정현이 당선되며 정계에 복귀했고 홍철호, 이종배, 배덕광, 김용남, 유의동, 김제식 등의 정치신인들도 탄생했다.
2015년에는 2016년에 있을 20대 총선을 앞두고 친박과 비박간의 계파갈등이 이뤄지는 가운데 2016년 3월 24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직인 날인 거부 사태가 터졌고 그 결과 20대 총선에서 122석을 획득하며 원내 2당이 되면서 기존의 보수정당 최악의 선거결과라는 17대 총선의 121석 다음의 참패를 겪었다. 그리고 2016년 10월 24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겪으면서 당이 휘청거리기 시작했으며 총선 전부터 있었던 계파갈등의 불신까지 더해져서 당을 분당 위기로 몰고갔다. 여기에 더해서 12월 3일에는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었다.

한편 정계개편도 동시에 이뤄졌는데 2016년 11월 22일에는 남경필 경기도지사와 김용태 의원이 탈당하였으며 12월 27일에는 29명의 의원이 탈당하였다. 그리하여 99석의 원내 2당으로 주저앉았다.

6.5. 2차 당명 개정 이후


2016년 20대 총선에서 122석으로 얻으면서 노무현 탄핵 정국 이후에 치러진 17대 총선의 121석 다음으로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원내 2당이 되면서 패배하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겪으면서 새누리당은 분당되었고 2017년에는 분당 세력에 의해서 중도우파 성향의 바른정당이 창당된 뒤에 자유한국당으로 2번째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이후 93석까지 당이 쪼그라든 상태에서 3월 10일에는 대통령 박근혜가 파면되면서 여당의 지위를 잃고 '구(舊) 여권'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편 대선 직전인 5월 6일에는 바른정당에서 탈당해온 국회의원 12명과 정갑윤 의원이 복당하여 107석의 원내 제2당이 되었다.
이후 2017년 5월 9일에 치러진 19대 대선에서는 항간의 예상을 깨고 홍준표 대선후보가 24.0%의 득표율로 2위를 차지하며 실버크로스를 달성했고 21.4%를 차지한 3위 안철수와 6.76%를 차지한 4위 유승민을 앞질렀다. 동년 11월 4일에는 홍준표 대표에 의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제명되었다. 11월 8일에는 바른정당 탈당사태바른정당에서 8명의 의원이 탈당해 이튿날 복당하였고, 11월 13일 주호영 의원이 추가 탈당해 다음 날 복당하였다. 같은 날 홍준표 대표는 "건국 시대의 상징인 이승만, 조국 근대화의 상징인 박정희, 민주화 시대의 상징인 김영삼 대통령의 사진을 당사에 걸겠다."고 말하고 난 후에 서울 여의도 당사를 비롯해서 전국의 시도당에다가 초상화를 걸었다. 여기에 대해서 자유한국당 전 대변인 김철근은 이승만과 박정희, 김영삼은 모두 전임자를 극복하고 역사적인 발전을 꾀했으며 자유한국당이 1990년도 3당 합당을 통해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에 뿌리가 있기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을 기리는게 맞는다고 해명했다.
2018년 1월에는 김세연 의원과 박인숙의원이 바른정당을 탈당하고 복당하였으며 2월 9일에는 늘푸른한국당이재오 대표가 당을 해산하고 자유한국당에 흡수 통합하였다. 3월 16일에는 당 소속인 김기현 울산시장이 압수수색을 당하였는데 이후 이 사건은 문재인 정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으로 불거졌다. 5월 6일에는 강길부 의원이 탈당하였고 6월 13일 치뤄진 7회 지선에서는 17개의 광역자치단체장 중에서 2석[37]을 획득하는 최악의 참패를 겪었는데 이는 홍준표 대표의 온갖 막말이 누적된 결과라는 지적을 받았다. 참고로 광역의원 비례대표 합산 전국 득표율에서는 27.76%를 차지했는데 이것은 더불어민주당이 획득한 51.42%의 득표율에 한참 미치지 못한 참패였다. 이로 인해서 TK 자민련이라는 비판이 공공연히 나왔다. 같은날 치뤄진 12곳을 두고 벌어진 재보궐 선거에서도 송언석 의원의 1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더불어민주당이 싹쓸이해갔다.
2018년 6월 14일 홍준표 대표는 지선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6월 20일에는 8선 의원인 친박계 좌장 서청원 의원이 국민의 분노를 자초한 책임을 지겠다며 탈당했다. 7월 16일에는 친노계 출신인 김병준 전 국민대 교수가 혁신비대위원장을 맡았다. 11월 29일에는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바른미래당에 입당했던 오세훈 전 서울 시장이 입당하였다. 12월에는 바른미래당 소속이었던 이학재 의원과 류성걸 의원이 바른미래당을 탈당한 후 복당하였다. 김병준 비대위 시절에는 홍준표 대표 시절보다 지지율이 상승하여 리얼미터 기준으로 25%대까지 상승하였다.
2019년 2월 8일에는 2019년 자유한국당 공청회 5.18 망언 논란이 일어났고 2월 중후반에 전당대회를 앞두고 태극기 세력이 대거 유입하여 친박이라고 평가받는 황교안 전 총리가 압도적으로 당 대표 후보 지지율 1위를 받으며 당대표가 되었다. [38] 이후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30%를 회복하면서 비토층을 다시 확보하는데 성공했으며 패스트트랙 무렵을 전후해서 리얼미터 기준 중도층 지지율도 민주당을 거의 따라잡아서 5월 2주 주간지지율 기준 오차범위까지 따라잡았다.

2019년 7월 2019년 일본의 대한국 수출 통제가 이루어지고, 이에 반발하여 2019년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이뤄질 정도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거세진 상황에서, 이번 수출 통제의 잘못은 일본보다 문재인 정부 측이 더 크다고 주장하는 등 대다수 국민들의 정서와 정반대되는 행보를 보였고, 그 결과 지지율이 추락하였다.

2019년 8월 말부터 조국 사태로 인해 그 동안의 불상사들[39]을 만회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잡았고 조국에 대한 여러가지 논란과 부정적인 여론조사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결국 조국 임명을 강행하면서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크게 올라 부활하였다. 2019년 10월에는 개천절과 한글날에 이뤄진 대규모 광화문 집회의 영향으로 인해서 민주당과의 지지율 차이는 오차범위로 좁혀졌다. 거기다 문재인이 임명하고 여당이 옹호했던 윤석열 총장의 지휘로 전방위적으로 조국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이 펼쳐지면서 조국에 대한 여러가지 의혹들이[40] 드러났다.
그러나 2019년 10월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셀프표창장 사태 및 인재 영입 1호로 박찬주 전 장군을 영입하려다가 각종 망언과 갑질 옹호로 거세게 역풍을 맞으면서 지지율은 다시 조국 사태 이전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당이 위기에 빠진 상태에서 황교안 대표의 영수회담이 거절되자 황교안 대표의 8일의 단식 이후 국내 여론이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1월 말부터 필리버스터#s-3.2.5를 하겠다고 한 것이 민식이법과 관련돼서 부정적인 여론을 얻은데다가 황교안 대표의 청년들이 52시간보다 더 일해야 한다는 발언까지 겹치면서 또다시 지지율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2019년 12월에는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 설치 법안을 저지하기 위해서 모든 법안에 필리버스터를 거는 등 제대로 된 입법활동을 보여주기는커녕 협의조차 거부하는 태도로 여론이 많이 식었다. 이후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다른 야당들이 여당과 야합하여서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하였다.

2020년 1월에는 선거법 개정안에 대한 대응으로 위성정당 비례자유한국당의 창당을 공식화했다. 또 입당 보류자의 입당을 전면허용하였으며 여러 국회의원들이 총선을 앞두고 불출마 선언을 하였다. 그 와중에 자유한국당과 새로운 보수당이 '보수통합 추진위원회'와 신당 결성에 합의하였으며 추진위원장에는 박형준이 선정되었다. 이것은 황교안 대표가 유승민이 제시한 '보수재건 3원칙'[41]을 수용하였기 때문이었다.

2020년 2월 9일 새로운보수당의 핵심 중진인 유승민이 자유한국당과 신당 창당 형식으로 합당을 추진하고, 본인은 차기 총선에 불출마하겠다고 밝혔다. 2월 13일에는 손학규계에 속했던 이찬열 의원이 2007년 탈당한지 13년만에 복당하였고 새로운보수당과 전진당과의 신설합당이 의결되면서 16일 미래통합당의 창당이 공식화되었다.


7. 계파 갈등



선행 조직이었던 민주자유당이나 신한국당 역시 계파간 갈등이 심하긴 했지만 이회창계와 반이회창계가 다투던 전반기를 지나서 한나라당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계파 간 갈등이 절정에 이르러서 공천학살과 경선/공천 불복 후 탈당이 밥먹듯 일어났다. 민주자유당의 계파갈등이 민정, 민주, 공화의 3자 대결이었다면 한나라당의 계파갈등은 그 유명한 친이 vs 친박의 양자구도였기 때문.
사실 계파간 갈등이 이렇게까지 심했던 이유는 한나라당이 가진 폭넓은 정치적 스팩트럼이 주 원인이다. 당시 한나라당 vs 민주당계 정당의 구도는 영호남간의 지역구도가 강해서 한나라당에는 극우적 인물, 중도 우파 성향의 인물 뿐 아니라 개혁적인 인사들까지 여럿 포진해 있었고 다양한 정치 스팩트럼을 가진 이들이 모이다보니 자연히 계파갈등이 심해진 것.
다만 2004년을 전후로 열린우리당이 창당하면서 개혁적 색채가 강한 인물들은[42] 열린우리당으로 이탈하고 남은 인물들 중 민정계를 필두로 한 강경 우파세력들은 박근혜, 상도동계[43]를 필두로 한 온건 우파세력들은 이명박을 중심으로 뭉쳤고 여기에 당권을 잃은 이회창계 세력, 그리고 자민련에서 다시 넘어온 충청계들까지 합세하며[44] 계파간 갈등은 자연스레 눈덩이처럼 커졌다.
결국 이는 17대 대선, 그리고 18대 총선을 거치며 폭발. 대선에서 승리하며 당권을 장악한 친이계가 친박계의 서청원, 김무성 등을 대거 공천 탈락시키고 이에 반발한 친박계가 친박연대, 친박 무소속 연대를 만들어서 이른바 이재오, 이방호 낙선운동을 벌이며 경남 사천에서 이방호 후보가 강기갑에게 밀려 낙선하고 이재오 역시 은평구에서 낙선했다가 보궐선거로 다시 돌아오는 등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홍준표[45][46] 대표 체제가 무너지고 이명박 정부 말기로 들어서면서 마땅한 대권주자[47]를 세우지 못한 친이계는 자연스레 당권을 빼앗겼고 박근혜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하여 친이계를 사실상 궤멸시키면서 계파간 갈등 역시 친이 vs 친박에서 친박 vs 비박으로 변화.

8. 역대 전당대회




9. 역대 당대표



아래 대수는 총재, 비대위, 권한대행 등을 가리지 않고 매겨져 있다.

9.1. 총재


  • 1대: 조순(1997.11.21~1998.8.5)[48]
  • 권한대행: 이기택(1998.8.5~1998.8.30)
  • 2대: 이회창(1998.8.30~2000.5.22)[49]
  • 권한대행: 강창성(2000.5.22~2000.5.31)
  • 3대: 이회창(2000.5.31~2002.4.1)
  • 권한대행: 박관용(2002.4.1~2002.5.13)[50]

9.2. 대표위원


  • 초대: 이한동(1997.11.21~1998.4.9)[51][52]

9.3. 대표최고위원


  • 2대: 서청원(2002.5.13~2003.1.29)[53][54][55]
  • 권한대행: 박희태(2003.1.30~2003.6.25)[56]
  • 3대: 최병렬(2003.6.26~2004.3.22)[57][58]
  • 4대: 박근혜(2004.3.23~2004.7.4)[59][60]
  • 권한대행: 김덕룡(2004.7.5~2004.7.18)[61]
  • 5대: 박근혜(2004.7.19~ 2006.6.15)[62]
  • 권한대행: 김영선(2006.6.15~2006.7.10)[63]
  • 6대: 강재섭(2006.7.11~2008.7.2)[64][65][66]
  • 7대: 박희태(2008.7.3~2009.9.6)[67][68][69]
  • 8대: 정몽준(2009.9.6~2010.6.3)[70][71]
  • 비상대책위원장: 김무성(2010.6.3~2010.7.12)[72]
  • 9대: 안상수(2010.7.13~2011.5.8)[73][74]
  • 비상대책위원장: 정의화(2011.5.8~2011.7.3)[75]
  • 10대: 홍준표(2011.7.3~2011.12.9)[76][77][79][80]
  • 권한대행: 나경원(2011.12.9~2011.12.11)
  • 권한대행: 황우여(2011.12.11~2011.12.18)[81]
  • 비상대책위원장: 박근혜(2011.12.18~2012.2.13)[82]

9.4. 원내총무/원내대표



  • 1대: 목요상(1997.11.21~1997.12.21)
  • 2대: 이상득(1997.12.22~1998.04.19)
  • 3대: 하순봉(1998.04.20~1998.8.27)
  • 4대: 박희태(1998.8.28~1999.1.14)
  • 5대: 이부영(1999.1.15 ~ 2000.6.1)
  • 6대: 정창화(2000.6.2 ~ 2001.5.13)
  • 7대: 이재오(2001.5.14 ~ 2002.5.16)
  • 8대: 이규택(2002.5.17~ 2003.6.29)
  • 9대: 홍사덕(2003.6.30~ 2004.5.18)[83]
  • 10대: 김덕룡(2004.5.19~2005.3.4)[84]
  • 11대: 강재섭(2005.3.5~2006.1.11)
  • 12대: 이재오(2006.1.12~2006.7.12)
  • 13대: 김형오(2006.7.12~2007.8.26)
  • 14대: 안상수(2007.8.27~2008.5.17)
  • 15대: 홍준표(2008.5.18~2009.5.20)
  • 16대: 안상수(2009.5.21~2010.5.3)
  • 17대: 김무성(2010.5.4~2011.5.5)
  • 18대: 황우여(2011.5.6~2012.2.13)[85]

10. 역대 선거 결과



10.1. 대통령 선거


연도
선거명
후보자
득표수 (득표율)
결과
1997년
15대
이회창
9,935,718 (38.7%)
낙선(2위)
2002년
16대
이회창
11,443,297 (46.6%)
낙선(2위)
2007년
17대
이명박
11,492,389 (48.7%)
당선

10.2. 국회의원 선거


연도
선거명
지역구 (비율)
비례대표 (득표율)
총 의석 (비율)
결과
2000년
16대
112 / 227 (49.3%)
21 / 46 (39.0%)
133 / 273 (48.7%)
원내 1당
2004년
17대
100 / 243 (41.2%)
21 / 56 (35.8%)
121 / 299 (40.5%)
원내 2당
2008년
18대
131 / 245 (53.5%)
22 / 54 (37.5%)
153 / 299 (51.2%)
단독 과반

10.3. 지방선거


연도
선거명
광역단체장 (비율)
기초단체장 (비율)
광역의원 (비율)
기초의원 (비율)
1998년
2회
6 / 16 (37.5%)
74 / 232 (31.9%)
244 / 616 (39.6%)

2002년
3회
11 / 16 (68.8%)
155 / 232 (66.8%)
467 / 682 (68.5%)

2006년
4회
12 / 16 (75.0%)
165 / 230 (71.7%)
557 / 733 (76.0%)
1,621 / 2,888 (56.1%)
2010년
5회
6 / 16 (37.5%)
82 / 228 (36.0%)
287 / 762 (37.7%)
1,247 / 2,888 (43.2%)

10.4. 재보궐선거


연도
국회의원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1997년 12월

1 / 1

1998년 4월
4 / 4

1998년 7월
4 / 7

1998년 11월

0 / 1

1999년 3월
0 / 2

1 / 1

1999년 6월
2 / 2

1999년 6월

1 / 1

1999년 8월

1 / 1

1999년 9월

1 / 1

1999년 9월

0 / 2

1999년 10월

0 / 1

1999년 10월

0 / 1

1999년 12월

2 / 2

2000년 1월

2 / 2

2000년 6월

4 / 7
23 / 32
0 / 57[86]
2000년 10월

0 / 2
6 / 9
0 / 37[87]
2001년 4월

4 / 7
5 / 6
0 / 14[88]
2001년 10월
3 / 3

2002년 8월
11 / 13

2002년 12월
1 / 1

0 / 1
3 / 3
0 / 4[89]
2003년 4월
2 / 3

1 / 2
2 / 4
0 / 23[90]
2003년 10월

1 / 4
6 / 9
0 / 66[91]
2004년 6월

3 / 4
13 / 19
28 / 38
0 / 53[92]
2004년 10월

2 / 5
5 / 7
0 / 35[93]
2005년 4월
5 / 6

5 / 7
8 / 10
0 / 21[94]
2005년 10월
4 / 4

2006년 7월
3 / 4

2006년 10월
1 / 2

1 / 4
1 / 1
1 / 2
2007년 4월
1 / 3

1 / 6
3 / 6
17 / 38
2007년 12월

4 / 13
7 / 12
20 / 25
2008년 6월

1 / 9
7 / 29
1 / 14
2008년 10월

1 / 2
2 / 3
2 / 9
2009년 4월
0 / 5

0 / 1
1 / 3
0 / 5
2009년 10월
2 / 5

2010년 7월
5 / 8

2010년 10월

1 / 2
1 / 1
2 / 3
2011년 4월
1 / 3
0 / 1
2 / 6
2 / 5
12 / 23
2011년 10월

0 / 1
8 / 11
4 / 11
6 / 19

11. 비판 및 논란




12. 그 외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 당 이름을 패러디한 듯한 핵나라당이 창당준비위원회가 나오기도 했다.[95] 핵나라당의 대표는 '정희원'[96]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실제로 출마하지는 않았지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만든 공보가 뭔가 허경영스러워서(...) 인터넷에서 유머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분이 돌아온다!! 핵.나.라.당!
대표적인 멸칭으로는 2002년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 전달사건 이후 사용되기 시작한 '차떼기당', 어감상의 이유로 사용된 '딴나라당'이 있다.[97]

12.1. 성소수자 문제의 스탠스


미국공화당보다 강경하다. 동성애를 비롯한 차별 금지 법안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다. 정확히 말하면 동성애에 대한 증오발언을 하는 보수정치인들은 많지 않으나, 사회적 반대를 무릅쓰고 동성애 차별 철폐를 외치는 정치인들은 별로 없고, 보수 정치인들은 거의 아예 없다. 동성결혼DADT까지 사실상 모든 것을 다 인정한 미국 공화당보다도 훨씬 강경한 입장. 적어도 공화당은 차별 금지법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미국에서 성소수자를 2등 시민으로 만들자는 발언을 할 수는 없다. 과격한 발언으로 유명한 트럼프조차도 동성애 반대 같은 발언은 하지 않는다.
이런 차이는 한국 사회가 전체적으로 보수적이고 성소수자 유권자의 힘이 미국에 비해 크게 약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성소수자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정치 주도권을 잡을 수 있고, 특히 보수정당을 먹여 살리고 지지하는 보수 유권자들이 성소수자를 썩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수 정당의 지지자들이 대체로 덜 개방적이고, 보수적인 고연령층인 것도 있고,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들도 또한 겉으로 나쁜 말은 안해도 "동성애 존중은 하는데, 강요좀 하지 마라. 우리도 동성애자에게 이성애를 강요하지 않는다."라는 식의 스탠스를 취하기 때문이다.[98]
2007년 당시 이명박 후보는 동성애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는데도 당선되었다. 미국이었다면 난리났겠지만, 한국은 성소수자 유권자들과 얼라이들의 세력이 약해서 별 영향이 없었다. 그리고 민주당 안방인 호남은 한술 더떠서 동성애에 대해 더욱 강경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동성애 지지는 표를 갉아먹는 짓거리에 불과하다.

13. 둘러보기











신한국당

한나라당

한나라당
미래한국당
한국미래연합
통합민주당
민주국민당
(반이회창계)
열린우리당
(개별 합류)
한나라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희망의한국신당
(개별 합류)
한국미래연합
(개별 합류)
민주국민당
(개별 합류)
대통합민주신당
국민통합21
(개별 합류)
자유민주연합자유선진당
미래희망연대국민생각

[1] 창당은 2006년에 했지만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으로 변경 등록한 건 2012년이다.[2] 창당은 2013년에 했지만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으로 변경 등록한 건 2014년이다.[3] 16대 총선에서 당선된 미래연대라는 한나라당 소장파를 중심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주장했었다.[4] 공동체 자유주의와 선진화 담론[5] 신보수주의 운동 이전까지 주류를 이뤘으나 이회창의 정계 은퇴 이후 올드라이트라고 불리며 비주류가 되어서 점차 사라졌었다. 다만 박근혜 정부는 사회보수주의를 넘어 국민보수주의에 가까웠다고 지적한 사람들도 있다.[6] 17대 총선에서 최악의 패배를 겪은 이후 2000년대 중반 로널드 레이건마거릿 대처의 이념을 배우자는 열풍이 불었다.[7] 신보수주의 운동 이후 경제적으로 더 우경화되었다. 이후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하는 경제적 자유주의가 경제이념으로 자리잡았다.[8] 천막당사, 염창동 당사를 거쳐 복귀 한 당사로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을 잇따라 배출한 정치명당이라 불렸다고 한다.[9] 정당 법인으로 따진다면 2020년 2월 17일까지 존재했다.[10] 걸어온 길 참조[11] 민주화 이전의 최장수 정당명은 17년 동안 존속한 민주공화당이다.[12] 2020년 2월 미래통합당이 신설합당을 통해 창당되면서 한나라당의 정당법인은 해산되었다.[13] #[14] 외신에서는 후속 정당인 새누리당은 한국어 발음을 옮긴 Saenuri Party를 쓰는 게 일반적이지만 한나라당은 영어로 번역한 Grand National Party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이 보였다.[15] 물론 구자체를 고집하는 소수의 보수파 일본인을 제외하고는 이런 표기는 안 쓴다고 봐도 무방하다.[16] 대전(大田)이 '한밭'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17] 여기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 김대중이 한축을 이루던 당이 민주당이었는데 1995년에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떨어져 나갔고 이 때의 잔류 세력이 민주당 간판을 지키다가 신한국당과 합당한 것. 현재의 민주당은 엄밀히 말하면 새정치국민회의가 2000년에 새천년민주당으로 확대 개편된 것이 이어진 정당이다.[18] 초대 총재인 조순이 작명했는데, 순우리말이라 처음에는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을 쓰는데 저항이 많았다 한다.[19] 중진들, 그것도 대개 영남권 중진들이 대거 탈락하는 공천 파동과 수도권의 강한 민주당세 때문에 고전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선거 직전 정부에서 남북정상회담 실시를 발표하는 바람에 보수표가 대결집(...)해 과반에서 고작 4석 모자란 133석을 얻게 되었다.[20] 민자당 시절인 1994년부터 계획하여 한나라당이 결성된 이후 완공된 당사로, 기존에 건축된 건물을 구매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당사로만 사용하기 위해 민자당에서 지은 당사다. 아시아 최대 규모라고 자부할 정도로 큰 규모에다가, 총재 집무실에 샤워실(...)까지 있었던 까닭에 호화당사라는 비판을 들었다.[21] 차떼기 사건으로 인한 부채를 갚기 위한다는 명목.[22] 도로명주소는 공항대로 541.[23] 2019년 이후 해당 건물은 철거되었고 LG전자는 (구) 화진화장품부지로 이전했다.[24] 제주는 친야 성향의 김태환 당선으로 범야권 13석이었다.[25] 엄밀히 말해서 패배도 아니었다. 범보수, 범야권 무소속 후보들이 선전한 선거였기 때문.[26] 이를 드러내듯 이명박 후보의 슬로건이 "실천하는 경제대통령"과 "국민 여러분, 성공하세요" 혹은 "국민 성공시대"였다.[27] 원래는 180석 이상을 바라보았으나, 친박계와 선진당의 선전으로 153석 밖에 거두지 못한다. 망해도 153석이었으니, 당시 한나라당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알 수 있다.[28] 이후 홍사덕친박연대 지역구 당선자들이 복당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180석 남짓의 초거대 여당이 된다. 거기에 친한나라당 성향을 보이는 8명의 친박연대 비례대표, 18명의 자유선진당 의원들 의 의석을 더하면 개헌선을 넘는 초거대여당이었다. 이는 18대 국회 말기에 통과된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의석이기도 했다.[29] 주로 이재오계와 이상득계의 다툼이었다.[30] 야권 분열 덕택에 박희태 후보가 겨우 이겼다.[31] 그러나 민주당 역시 텃밭인 전주 덕진구에서 무소속 출마한 정동영 전 후보와 무소속 연합을 이룬 신건 후보(전주 완산구갑)에게 참패해 이미지를 크게 구겼다.[32] 개표 결과 0.6% 2만 6000여표 차이었다. 거의 모든 자치구에서 이겼으나 끝내 강남3구의 몰표를 이기지 못하고 져버렸다.(강남 3 선거구에서만 12만6930표 차이가 나왔다. 참고로 다른 22개 선거구에서는 1만표 이상의 차이가 난곳은 불과 3곳이며 3만5245표 차의 관악구를 제외하면 1만 1000표 정도차이 였다.)[33] 북한과 가깝고, 영동 지방의 보수적 정서 때문에 친한나라당 성향이 강한 곳이다.[34] 1998년 37살의 최연소 경남도의원, 2002년 41살의 최연소 거창군수를 거쳐서, 2004년 6.5 재보선 당시 43살으로 최연소로 경남도지사를 지냈던 인물이다.[35] 이곳은 공천 파동의 영향이 컸다. 정운찬 전 총리와 강재섭 전 대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놓쳐버린 경우.[36] 박근혜 전 대표가 선거를 돕지 않은 것도 한 몫 했다는 분석도 있었다.[37] 대구광역시장, 경상북도지사[38] 참고로 한국 갤럽이 조사한 전체 여론의 자유한국당 당 대표 후보 선호도에서, 유일하게 탄핵을 인정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1위를 차지했다.[39]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제19대 대통령 선거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패배[40] 조국(인물)/비판 및 논란/딸 조민 관련 의혹, 조국(인물)/비판 및 논란/학교법인 웅동학원 관련 논란, 조국(인물)/비판 및 논란/코링크PE 사모펀드 투자약정 논란 문서 참조.[41] 박 전 대통령 탄핵 찬반 책임 면제ㆍ개혁보수 노선 설정ㆍ흡수 통합이 아닌 제3의 정당 창당.[42] 대표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핵심 멤버인 김부겸, 김영춘이나 이부영, 이우재, 충남지사 후보로 출마한 양승조[43] 단 상도동계 중에서도 서청원과 김무성은 박근혜를 지지했다.[44] 이들은 대부분 친박에 속했다.[45] "독고다이 정치인"을 자처하고 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도와주고 친이계의 지원을 업어 당대표로 취임하는 등 엄연히 친이계의 일부로 보는게 맞다.[46] 이명박 대통령 탄생에 기여한 정두언을 친이계로 안 보듯 이 때 홍준표와 이명박 대통령의 사이도 썩 좋지 않았다. BBK 저격수임에도 불구하고 법무부 대신 환경부 장관을 제의했기 때문이다. 홍준표는 이 당시 친박에 가까운 무계파로 분류되었으며, 당 대표도 친이계가 아닌 사실상 친박계의 묵인으로 될 수 있었다.#[47] 김문수, 안상수 등이 경선에 출마하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박근혜의 대항마가 될 수 없었다. 인지도나 정치 기반부터가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48] 구 민주당 계열의 수장이다. 그러다가 2000년 16대 총선에서 김윤환과 이기택 등 중진들이 공천탈락을 당하자 자신의 종로 지역구 공천을 반납하고 한나라당을 탈당해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지만 민국당이 망해서 정계에서 은퇴했다.[49] 당시 한나라당의 총재로 재임했으며, 15대 총선에서는 김윤환, 이기택, 한승수 등의 거물을 줄줄이 숙청하기도 했다. 이후 2002년 대선출마 시 당청분리 선언을 하여 당 총재직과 전국구 의원(1번)직을 사임했다.[50] 총재직 폐지 및 대표최고위원 중심제로 변경[51] 2000년 한나라당 탈당 후 자민련 총재, 국무총리 역임. 2007년 복당 후 상임고문 위촉[52] 1997~1998년에는 총재직과 대표직이 별도로 존재.[53] 당시 5선 지역구 국회의원(서울 동작구 갑)을 맡고있었다. 이후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54] 이한동-서청원간의 공백기가 길고 대표위원과 대표최고위원의 역할이 어느 정도 달라서 따로 서술[55] 집단지도체제에서의 대표이다. 당시 최고의원은 서청원, 강창희, 김진재, 강재섭, 박희태, 하순봉, 김정숙 이었다.[56] 서청원 대표 퇴진에 따른 승계.[57] 노무현 대통령 탄핵여파과 불법대선자금 의혹으로 수감된 서청원, 최돈웅 등의 석방가결안 날치기 건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역풍으로 사퇴했다.[58] 단일지도체제에서의 당 대표이다.[59]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총선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소방수 격으로 선출된 대표이다.[60] 단일지도체제에서의 당 대표이다.[61]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62] 당시 최고위원은 박근혜, 원희룡, 김영선, 이강두, 이규택.[63] 박근혜 대표가 커터칼로 피습당하면서 대표직을 수행할 수 없었다. 또한 차기 대선 출마를 위해서 박근혜 대표가 당규에 따라서 사임한 것도 있다.[64] 제18대 국회의원선거에 불출마하고 대표 퇴임 후 정계은퇴했다.[65] 이 당시 박근혜는 당권장악을 위해서 민정계 출신의 강재섭을 지원했고 이명박은 자신의 최측근인 이재오를 지원했다. 결국 강재섭이 대표가 되었다. 그러나 친이계로 갈아타는 바람에...[66] 당시 최고위원은 강재섭, 이재오, 강창희, 전여옥, 정형근 이었다.[67] 경남 양산시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로 사직[68] 당시 최고위원은 박희태, 정몽준,허태열, 공성진, 박순자(여성)이었다.[69] 당시 친박계는 허태열을 지원했으나 친이계가 주류가 된 상황이었기에 6인회의 좌장인 박희태가 유리했다.[70] 지방선거 패배로 사직.[71] 박희태의 사직으로 차순위인 정몽준이 승계받았다.[72] 당시 당 원내대표였다.[73] 보온병을 폭탄으로 착각한 그 분 맞다. 인천시장을 지냈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며, 민선6기 경남 창원시 시장을 지냈다.[74] 당시 최고위원은 안상수, 홍준표, 나경원, 정두언, 서병수이다.[75] 국회부의장직을 겸임했다.[76] 이후 2017년 7월, 한나라당의 후신인 자유한국당의 대표를 맡게 된다.[77] 당시 최고위원은 홍준표, 유승민, 나경원, 남경필, 원희룡이 당선.[78] 당시엔 1인 2표제였다.[79] '친이계는 홍준표를, 친박계는 유승민을 지지하는 구도였다.'고 이전에 기술되어있었는데, 친이계가 민 것은 원희룡이었다. 홍준표는 당시 계파색이 옅은 사람이라 특정 지지층이 없었다. 이 때문에 홍준표는 원희룡에 반대하는 캐릭터로 친박계의 2등표[78]를 모으는 전략을 사용했다.#[80] 딱히 존재감이 없던 유승민이 오로지 친박계의 힘으로 2등을 차지하고, 홍준표가 당 대표가 된 데 반해, 친이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원희룡이 4등에 그치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레임덕이 심화됐다.'한나라당, 계파 해체 신경전‥친이계 '허탈''[81] 원내대표 겸임. 이후 새누리당으로 바뀌고서 당대표.[82] 새누리당으로 당명 개정.[83] 홍사덕 의원까지가 원내총무 칭호 사용.[84] 김덕룡 의원부터가 원내대표 칭호 사용.[85] 당명 개정 이후에도 원내대표직 역임. 2012년 5월 8일에 공식임기 종료.[86]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87]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88]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89]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90]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91]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92]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93]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94]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95] 참고로 10여년이 흐른 지금도 끈질기게 창준위를 구성하고 있다.[96]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대전광역시 중구신정치개혁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97] 실제로 2006년 말에 충남의 어느 고교에서 2학년 2학기 기말고사 문제로 출제되기도 했다! 이에 전여옥 의원이 이를 질타하기도 했다.[98] 민주당 지지자들도 이런 성향의 사람들이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