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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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2.1. 초기 경력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2.3. 7년 전쟁
2.4. 이후의 경력


1. 개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장성.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뷔로는 1712년경 쿠를란드 공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원래 독일의 메클렌부르크 출신이었고 덴마크,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군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뷔로는 1732년경 20세의 나이로 오스트리아 힐다우센 보병대 장교직을 획득했고 1735년 8월 6일에 힐다우센 보병대의 대위로 승진했다. 1739년, 뷔로는 이탈리아의 제노바에 주둔한 연대에 복무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이 한창이던 1741년 말, 뷔로의 힐다우센 연대는 린츠로 가서 파사우에서 겨울을 보냈다. 1744년, 힐다우센 연대는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를 급습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라인강에서 보헤미아로 철수하는 오스트리아군에 배속되었다. 1745년 4월 15일, 뷔로는 파펜호펜 전투에서 좋은 활약을 선보여 힐다우센 보병대 소령으로 승진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프란츠 1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에 연대와 함께 참석했다.
1746년, 힐다우센 보병대 지휘관 뷔로는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 장군의 휘하에 배속되어 프로방스 전역에 가담해 레랭 제도에 속한 2개 군도를 점령했고 1748년 7월까지 제노바의 변방에 주둔했다. 그후 1748년 전쟁이 끝난 뒤 오스트리아로 복귀한 뷔로는 1751년 5월 12일 제2 대령이 되었고 1752년 8월 1일에 힐다우센 보병대의 대령 및 지휘관으로 승진했다.

2.3. 7년 전쟁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하자, 뷔로는 힐다우센 보병대를 이끌고 올로모우츠로 파견되었고 10월 1일에 브라운 원수의 지휘를 받으며 로보지츠 전투에 참가했으나 패전을 면치 못했다. 1757년 5월 6일에는 보헤미아로 쳐들어온 프로이센군과 프라하 전투에서 맞붙었으나 힐다우센 보병대가 막심한 피해를 입는 걸 면치 못했고 뷔로 역시 부상을 입었으며, 그의 친척인 어거스틴 폰 뷔로는 치명상을 입고 6월 9일에 사망했다. 뷔로는 이후 리그니츠 방면 오스트리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757년 12월 14일, 모리츠 폰 안할트-데사우 휘하의 프로이센군 15,000명이 리그니츠 요새를 포위했다. 뷔로는 항복을 거부했으나 끝내 요새를 지킬 수 없게 되자 12월 28일 프로이센군과 협상 끝에 깃발과 무기 전체를 가지고 떠난다는 조건하에 항복했다. 1758년 1월 6일, 뷔로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해 봄, 뷔로는 프로이센군에게 포위된 올로모우츠 요새를 구하기 위해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로부터 지령을 받고 6월 22일 1,360명의 보병대와 스톡하우젠 공병대, 장교 2명, 포병 20명을 데리고 올로모우츠 요새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이후 그는 올로모우츠 요새를 끝까지 사수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돔슈테트 전투 이후 보급을 받을 길이 요원해지자 본국으로 퇴각했다. 뷔로는 올로모우츠 요새를 사수한 공적을 인정받아 12월 4일 마리아 테레지아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뷔로는 다운 백작의 여러 전투에 참가해 프로이센군과 맞서 싸웠으나 1761년 프로이센군에게 붙잡혔다. 그는 감시를 받으며 감옥에서 첫 한달을 보냈고 마그데부르크 요새로 이송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억류되었다. 1763년 7년 전쟁이 끝난 뒤 석방된 뷔로는 중장으로 승격되었다.

2.4. 이후의 경력


1773년 5월 1일, 뷔로는 보병대 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주지사로서 임무를 수행하던 뷔로는 1776년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향년 64세. 그는 미혼이었기 때문에 자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