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중상

 


1. 개요
2. 설명
2.1. 가톨릭교회의 대응


1. 개요


중세시대 반유대주의루머 중 하나로, 유대인들이 가톨릭 신도의 어린아이를 유대교 예식을 위해 살해한다는 괴소문.

2. 설명


영어로 Blood libel[1] 또는 ritual murder libel.
11세기까지 유럽에서의 유대인 박해는 제도적이지 않았으며, 우발적이거나 공교로운 사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2세기부터 유대인 박해는 종교적 동기를 갖고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 발단 중 하나가 '유대인들은 영아를 납치 살해한다'란 소문이었다.
1144년 영국의 노리치라는 마을에서 한 소년이 실종되었는데, 기독교로 개종한 한 유대인이 '유대인들의 유월절 의식에 쓸 무교병을 만들 때, 기독교도의 피를 넣어야 해서 기독교도 아이를 납치살해했다'라고 증언한 것. 그런데 사건이 유대인에 대한 폭력으로 확대되기 전에 소년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몸에 상처나 피를 빼낸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번 생겨난 소문이 사라지진 않았다. 그 때부터 '유대인은 유대교 의식에 그리스도교 영아를 인신공양한다'는 루머는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되었으며, 이는 세기를 더할수록 여러 바리에이션으로 발전되어, 18세기 파리에선 '유대인이 경영하는 양장점의 탈의실에 여성 혼자 들어가면 납치, 살해된다'라고 구전되기도 하였다.

2.1. 가톨릭교회의 대응


12~13세기 당시의 가톨릭교회는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이미지처럼 이단심문관을 앞세워 철퇴를 휘두르는 신앙의 수호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들 사이에 이리저리 치여다니며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모습에 가까웠다. 그 예로, 인노첸시오 3세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라테라노 성당까지 가는 도중 로마 시민들에게 조롱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뿐 아니라 인노첸시오 3세는 로마 시민들에 의해 로마에서 몇 번 쫓겨나기도 했으며 비상시 피난처로 쓰려고 지어둔 가문 소유의 탑 '토레 다이콘티'마저 손놓고 뺏길 정도였다(...).
그런 허약한 교황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인신 제사를 지낸다는 유언비어와 그 전파속도[2]에는 대경실색해,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금지하는 칙령들을 교황좌에서 여러번 내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민중들에게 다가오진 않았던지, 그리고 교회도 그 흐름을 거부할 순 없었던지(...) 트렌트(Trent)의 성 시모네(Simone)[3]란 성인은 유대인들에게 살해된 아기 순교자라 하여 시성되었다(.....). 축일은 3월 24일.
[1] 블러드 라이블이라고 발음한다[2] 2백년 가량 지나는 동안 전 유럽 대륙에 퍼져나갔다. 당시로선 상당히 빠른 속도이다.[3] 기록상에는 1472년생, 트렌트는 이탈리아의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