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노첸시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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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5대 첼레스티노 3세

'''제176대 인노첸시오 3세'''

제177대 호노리오 3세
1. 개요
2. 교황이 되기전
3. 교황이 된 이후
4. 선종
5. 기타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창공, 즉 보편적 교회 안에 두 개의 거대한 광채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 두 광채란 교황권과 왕권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직권입니다. 그러나 낮을 지배하는 태양이 밤을 관장하는 달보다 더 위대하고 달이 태양으로부터 그 빛을 얻듯이 교황이 왕보다 더 위대하고 왕권은 그 권위를 교황권으로부터 얻습니다


1. 개요


'''"교황태양, 황제"'''이라는 말까지 나온 중세 교회 최전성기의 교황이다. 본명은 '로타이레 디 세니'(Lothaire di Segni)이며, '''36살의 젊은 나이에 교황에 선출'''되었다. 이는 전임자 첼레스티노 3세가 80대 중반의 고령에 선출되어 92살에 사망했던 점 때문에, 추기경들 사이에서 "젊은 교황을 뽑아 시국에 강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견해가 일치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 교황이 되기전


1161년 태어난 로타이레는 1190년 무렵 외삼촌 클레멘스 3세에 의해 부제급 추기경에 임명되었고, 1198년 1월 8일 첼레스티노 3세가 선종하자 그날 거행된 장례식 직후 바로 열린 콘클라베에서 선출되었다. 로타이레는 로마, 파리, 볼로냐 등 당대 최고의 명문 대학교에서 공부하며 신학법학에 조예가 깊었고, 달변가이기도 했다. 거기에 외모도 준수했다고.

3. 교황이 된 이후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의 지위와 권한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자처한 최초의 교황이며, 이는 그만큼 교황권이 무소불위의 절정기에 도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1]
인노첸시오 3세는 교묘한 배후조종과 파문을 번갈아 써가며 독일 정치에 개입해 자기 뜻대로 프리드리히 2세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만들었다. 프리드리히는 1212년 12월 9일 마인츠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3년 뒤 아헨에서 다시 대관식을 치러 로마왕으로 인정 받았다.[2][3]
독일 왕권 분쟁만이 아니라 인노첸시오 3세는 리처드 1세의 동생인 존 왕에게도 간섭하여, 캔터베리 대주교의 서임을 둘러싼 논쟁 끝에 존 왕을 파문하고 프랑스 왕과 연합하여 전쟁에 자신이 없던 존 왕을 위협했다. 결국 존 왕은 인노첸시오 3세의 위협에 굴복해 잉글랜드 전체를 교황의 봉토로 바치고 이를 다시 수여받음으로써 스스로 교황의 봉신(封臣)이 되었으며, 봉신의 의무로 매년 1,000 파운드의 세금까지 납부하기로 약속해야 했다.[4]
군주들의 문제에 대한 개입 외에도, 인노첸시오 3세 시대에는 신앙적으로 중요한 일이 많았다. 남프랑스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새로운 신앙운동은 정통 교회를 거부[5]하여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결국 인노첸시오 3세는 1208년 교황 사절 피살 사건을 계기로 소위 '알비 십자군'을 결성해 남프랑스의 '''반(反)교황 세력인 카타리파를 처단'''하였다. 그러면서도 인노첸시오 3세는 교회 자정(自淨)의 필요성도 인식, 1210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인준하고 순회 설교의 권리도 인정하여 어느 정도 교회의 자정을 위한 노력도 실시하였다. 도미니코 수도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이 때 허가된 건데, 인노첸시오 3세가 프란치스코의 새로운 신앙 운동을 알비파처럼 탄압했다면 2013년에 선출된 새로운 교황의 이름도 달라졌을 것이다.
한편 1215년 인노첸시오 3세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열어 교회 개혁과 신앙 및 윤리 문제, 새로운 신성 로마 황제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승인, 탈선해 버린 제4차 십자군을 대신한 새로운 십자군 운동의 계획 등을 논의하였다.[6] 라테라노 공의회는 '''중세 최대의 공의회'''로 1,200여 명의 주교, 수도원장, 사제들이 참석했다.
이 외에 인노첸시오 3세 때의 유명한 사건은 '''제4차 십자군의 탈선'''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주도한 제4차 십자군은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인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약탈한 뒤 라틴 제국을 세우는 것(1204)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스 교회를 무력으로 짓밟아 굴복시킨 뒤 콘스탄티노플에 라틴인의 교회가 세워졌기에 그리스인들의 증오심은 대단했으나, 인노첸시오 3세는 어쨌든 동서방 교회의 일치가 이루어졌다고 자평했다. 교황 스스로 말하길 "콘스탄티노플이 좀 더 빨리 라틴인의 손에 들어 왔다면 성지(聖地)가 짓밟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 했다고 한다.[7] 다만 당시 교황이 전해들은 사실은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에 굴복했다는 소식 정도였고, 엔리코 단돌로가 사망하고 나서 콘스탄티노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전해들은 이후에는 '파멸의 한 사례에 불과하며 지옥의 과업'이라는 평가로 수정했다.

4. 선종


라테라노 공의회를 끝낸 뒤 교황은 1216년 7월 16일, 새로운 십자군 원정에 대한 조율을 위해 머물던 페루자에서 선종하였다. 유해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5. 기타


결투 재판을 금했다.

[1] 젤라시오 2세 교황에 대해 주교회의에서 주교들이 이 칭호를 사용해 언급한 적이 있으나, 공식적인 교황의 칭호로써 사용을 확립한 이는 인노첸시오 3세가 처음이다.[2]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제관은 인노센시오 선종 후인 1220년 11월 22일에 그의 후임 호노리오 3세로부터 정식으로 받게 된다.[3] 어릴 때부터 후견인 자격으로 프리드리히를 '보호'하고 마침내 황제로까지 만들어 주었으니, 인노첸시오 3세는 이제 신성로마제국의 거대한 판도도 교황의 발아래 있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그가 선종한 뒤의 상황은 정반대로 진행되어 교황과 황제의 갈등이 격화되었다.[4] 이런 상황에 분노가 폭발한 잉글랜드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의 결과가 바로 1215년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의 체결이다. 한편, 이렇게 당한 전례가 있어 이후의 잉글랜드 왕들은 교황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게 된다.[5] 카타리파영지주의를 주장하여 육신은 사악한 것이며 세상을 빛과 어둠의 이원론적 구조로 보았는데, 이는 그리스도교보다 마니교에 가까웠다. 비슷한 주장을 한 정교회의 이단 교파가 9세기의 바오로파카타리파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보고밀파 였다.[6] 새로운 십자군 원정 계획은 1217년 결실을 보아 명목상 예루살렘 왕인 장 드 브리엔의 지휘하에 1218년 시작되었지만 이집트 공략에 실패하여 좌절되었다.[7] 호르스트 푸어만,『교황의 역사 : 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 161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