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폰 만토이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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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1. 개요


프로이센의 장성. 7년 전쟁 시기 포메른 방면 프로이센군 사령관으로서 스웨덴군과 맞섰다.

2. 일생


만토이펠은 1696년 11월 7일 프로이센 포메른에서 태어났다. 그가 속한 만토이펠 가문은 포메른과 쿠를란트 일대에 걸친 발트해 남쪽 지역에 퍼져 살아간 오래된 귀족 집안이다. 1714년, 만토이펠은 브레빌 보병대에 입대하면서 프로이센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고, 1715년 상병으로 진급한 상황에서 프로이센군의 포메른 공세에 참가했다. 그 후 1716년 7월 1일 소위로 진급했고 1720년 2월 23일 2등 중위가 되었으며 1723년 6월 7일에 중위로 승진했고, 1734년에 대위로 승진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42년 5월 17일, 그는 코투지츠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그는 1743년에 소령이 되었고 1744년에는 중장으로, 1746년에는 알트-슈베른 보병대의 대령 및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1757년 5월 6일 프라하 전투에 참가한 만토이펠은 쿠르트 크리스토프 폰 슈베린 원수를 보좌했다가 슈베린이 병사들을 선두에서 독려하던 와중에 오스트리아군 병사들이 쏜 총탄에 맞아 전사하자 그가 대신 지휘했다. 이후 6월 18일 콜린 전투를 치른 만토이펠은 스웨덴의 침략에 대항할 장군으로 지정되어 포메른으로 파견되었다. 그해 9월, 만토이펠은 포메른에 있는 병사들을 긁어모아 5천 명 가량을 간신히 모은 뒤 여러 개의 탄약고를 확보해 보급로를 완비한 뒤 병사들을 훈련시큰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당시 스웨덴군의 병력은 1만 8천 명으로 만토이펠이 보유하고 있는 병력의 3배가 넘었지만, 그들 역시 훈련이 잘 되지 않은 오합지졸인데다 강추위로 동사자가 늘어났고 전염병 마저 창궐한 터라 스트랄순트 항구에 박혀 있을 뿐 군사 작전을 감히 감행하지 못했다.
1758년 8월 중순, 만토이펠은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후 그는 총 9,700명의 병사들을 확보해 스웨덴군과 대치했다. 이때 스웨덴군은 비로소 공세에 착수했지만 구스토우 전투에서 패한 뒤 도로 스트랄순트 항구로 후퇴했다. 이후 1759년 1월, 프로이센군은 만토이펠의 지휘하에 뎀민(1월 18일)과 앙클람(1월 21일)을 공략하고 스트랄순트를 봉쇄했다. 하지만 스웨덴군은 이곳에서만큼은 완강히 저항했고, 만토이펠의 공세는 지지부진해졌다. 이후 만토이펠은 러시아군이 포메른으로 진입하는 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친히 정찰에 나섰고, 스웨덴군 사령관 자코브 아브레크 랜팅스하우젠은 이 기회를 틈타 8월 21일 페네 강을 건너 포메른을 향한 본격적인 공세를 개시했고 발트해의 섬인 우제돔 마을을 공략하여 1,750명의 포로를 확보하고 대포 130문을 노획했으며, 프로이센 소함대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던 선박들을 노획했다.
1760년 1월, 만토이펠은 포메른으로 돌아와 겨울 공세를 개시했다. 이 공세는 처음엔 잘풀리는 듯 했지만 추위가 악화되자 동복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프로이센군에서 동사자가 속출하면서 지지부진해졌다. 이에 스웨덴군은 반격에 나서 앙클람을 점령했고 1월 27일 피엔담에 주둔하고 있는 프로이센군을 기습했다. 만토이펠은 적의 습격에 맞서 분전했으나 끝내 150명의 병사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이후 그는 스웨덴으로 끌려갔다가 다시는 스웨덴과 맞서 싸우지 않겠다는 약조를 맺고 프로이센으로 귀환했다.
이후 그는 군직에서 은퇴했다가 1762년 4월 7일 스웨덴이 프로이센과 휴전을 체결하자 군직에 복귀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미 고령이었던 그는 곧 은퇴했고, 1778년 7월 10일 포메른의 구트콜라츠에서 사망했다. 향년 8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