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크리스토프 폰 슈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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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2.1. 초기 경력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2.3. 7년 전쟁


1. 개요


프로이센 왕국의 군인. 몰비츠 전투에서 지리멸렬한 지휘를 선보인 프리드리히 대왕을 대신해 불리한 상황을 승리로 이끌어낸 명장이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슈베린은 1684년 울리히 폰 슈베린과 안나 루카레티아 폰 라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1700년, 16살의 슈베린은 삼촌인 데틀로프 폰 슈베린 중장의 휘하의 보병 연대에 배속되었다. 1701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이 연대는 네덜란드 전선으로 배속되었고 슈베린은 셀렌베르크와 블렌하임에서 근무했다. 1706년 라밀리스 전투에 참가한 슈베린은 1707년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의 군대에서 중위에 임명되었고 1708년에 대령으로 진급했다. 1709년 말프라켓 전투에 참가한 슈베린은 1712년 스웨덴 사령관 스텐보르크의 군단에 배속되어 가데부슈에서 복무했다.
1713년, 슈베린은 몰다비아 남동부의 도시인 벤데르에서 억류된 칼 12세와 함께 있었고 나중에 스웨덴으로 돌아간 뒤 1718년에 스웨덴 육군 소장에 임명되었다. 1719년, 슈베린은 메클렌부르크로 쳐들어온 하노버군과 맞섰고 3월 6일에 월스무흘렌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1720년 스웨덴을 떠난 슈베린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외교 공관에 고용되었다. 그러다가 1722년 1월 프로이센 보병 연대의 지휘를 맡은 슈베린은 그때부터 프로이센군의 핵심 장교가 되었다.
1730년, 슈베린은 프로이센의 황태자(미래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탈영 사건에 대한 군사재판을 담당한 집행관 중 한 명이었으며, 황태자를 사형시키라고 외쳐대는 국왕을 온 힘을 다해 만류했다. 그 후 1731년에 중장으로 진급했고 1733년 메클렌부르크에서 복무하며 그곳에서 친프로이센 지지자들의 입지를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1736년 3월 8일 검은 독수리 훈장을 수여받은 슈베린은 1739년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많은 행정 업무를 종사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년 6월 30일, 슈베린은 프로이센 원수로 임명되었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슐레지엔 침공 작전에 힘을 보탰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이 반격을 가해오면서 벌어진 몰비츠 전투에서, 슈베린은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여러 차례 작전 상의 실수를 지적했지만 독선적인 성향이 강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고, 전투를 치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대왕은 몰비츠 전투에서 시종일관 지리멸렬한 지휘를 보이는 바람에 전투에서 패할 위기에 몰렸다. 이에 슈베린은 대왕에게 "이 전투는 가망이 없으니 일단 물러서십시오."라고 조언했고, 대왕은 잠시 고민한 끝에 그 말에 따르기로 하고 지휘권을 슈베린에게 넘긴 후 자신은 후방으로 퇴각했다. 이후 슈베린은 군대를 수습해 철수 준비를 하다가 오스트리아군 기병 지휘관과 아군 기병대 지휘관이 거의 동시에 탄환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한 장교가 어느 방향으로 철수해야 하냐고 묻자, 슈베린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는 적의 본대를 넘어 퇴각한다.

이후 슈베린은 보병대를 이끌고 반격을 개시해 적 보병대를 무찌르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훗날 자신은 몰비츠 전투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며 "몰비츠는 나의 학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1742년, 슈베린은 브리그와 니세 요새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다가 1744년 전쟁이 재개되자 군대를 지휘해 글래츠에서 행군하여 프라하 요새 아래에서 대왕의 군대와 합세했고 1744년 9월 16일 프라하 요새를 공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이 보헤미아에서 철수하게 되었을 때, 슈베린은 후위대를 맡아 성공적인 철수 작전을 이끌어냈다. 그 후 그는 은퇴하여 그의 소유지에서 수년간 평화롭게 지냈다.

2.3. 7년 전쟁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하자, 슈베린은 다시 전장에 나타났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작센 침공을 지휘하는 동안, 슈베린은 동부 보헤미아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1757년 프러시아군이 보헤미아의 침공을 진행하자 슈베린은 프러시아 기둥 중 하나를 이끌었다. 그는 프라하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합류했다. 대왕이 즉시 프라하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슈베린은 병사들이 며칠 동안 강행군을 하느라 지칠대로 지쳤으니 휴식을 줘야 한다며 전투를 하루만이라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의 적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가 오기 전에 승부를 보고 싶었기에 슈베린의 요청을 거부했다. 슈베린은 이에 맞서 몇차례 말다툼을 벌였으나 끝내 대왕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전투에 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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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뒤이어 벌어진 프라하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슈베린은 스터보홀리 북동쪽 댐에 올라가서 보병대의 상황을 살펴보다가 보병대가 무너지는 것을 보자 즉시 전장으로 달려가서 보병대를 집결시켰다. 그리고는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부대기를 들고 전장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그는 오스트리아군 병사들의 총탄 세례를 한 몸에 받고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