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통

 

[image]
(학대통을 그린 삽화)
郝大通
(1140 ~ 1212)
금나라 때의 도사. 전진교전진칠자 중 한 사람으로 본명은 학승(郝升)이었지만 이름을 린(璘)으로 개명하고 세상에는 법명인 대통(大通)으로 알려졌으며 자는 태고(太古), 도호는 '''염연자(恬然子), 광영자(廣寧子)'''이다.
그의 집안은 부유하여 그 지역에서 가장 부자였으며 일찍이 황제, 노자, 장자 등의 서적을 널리 공부하고 역학에 정통하였으며 왕중양의 제자가 되어 수도하였다.
1175년에 옥주(沃州) 지역에서 걸식하다가 조주(趙州)에서 6년간 수도하였는데 그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불어선생(不語先生)이라 불렀다고 하며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화산파라고 불렸다.
이후에는 북두평(北斗坪)에서 수도하기 위해 동굴을 파던 중에 도우(道友)들의 요청으로 40여년 동안 70여개의 동굴을 파면서 여러 차례 양보하였고 절벽 중간에 동굴을 파서 수도하였다.
그가 죽은 지 한참 지난 시기인 원나라쿠빌라이 칸 때 그는 광영통현태고진인으로 봉해졌다.

1. 사조영웅전의 학대통


소매가 없는 옷을 입고 다니는데, 왕중양의 소매 잘린 옷을 받으며 "소매 없다고 걱정마라. 넌 걱정할 것 없다." 라고 말했다. 소매 수(袖)와 줄 수(授)는 음이 같아서 이는 '가르침은 도를 이루는 것 다음 문제니 스스로 깨달아라'는 뜻. 때문에 학대통의 옷은 스승의 뜻을 기리기 위함.

2. 신조협려의 학대통


사조영웅전에서는 전진칠자의 한명으로만 등장하며 단독으로는 출연하지 않는다. 상당히 괄괄하면서도 시원한 성격으로 불의를 못 참는 호걸기질이 있다. 여러모로 구처기가 닮았다.
신조협려에서는 초반부 중양궁 소동 때 구처기 마옥과 함께 몽고군에 포위당하는 낭패를 겪으며 등장했다. 이때 곽도에게 일장을 얻어맞고 패배하여 감금되어 있었다. 이후 양과의 중양궁 탈출 때 실수로 손노파를 죽인 것 때문에 특히 양과에게 원한을 많이 샀다. 당시 소용녀의 질책을 듣고 자결하려하였으나 구처기의 제지로 살았다.
성격이 다소 괄괄하기는 하지만, 심지가 정의롭고 선량한 인물인지라 손노파의 일 때문에 항상 죄책감을 갖고 살았다. 양과가 영웅대연 때 손노파를 거론하자 자신을 죽여달라고 청할 정도이다.
나중에 이 사람이 화산파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