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

 




'''大金'''
암바안 안취운 ・ 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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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년/1115년[1] ~ 1234년'''
'''이칭'''
금조(金朝)
'''위치'''
동북아시아
'''수도'''
상경회녕부(上京會寧府, 1115~1153)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 1153~1214)
남경개봉부(南京開封府, 1214~1233)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皇帝)
'''주요 황제'''
태조 완안아골타
태종 완안오걸매
세종 완안오록
'''언어'''
여진어, 중세 중국어
'''문자'''
여진 문자, 한자
'''종교'''
여진 샤머니즘[2], 대승 불교, 도교, 유교
'''종족'''
여진족, 한족
'''통화'''
교초(交鈔) 등
'''국성'''
완안(完顔)
'''성립 이전'''
생여진
요나라
'''멸망 이후'''
몽골 제국
동하, 동요, 후요
언어별 명칭
여진어
''/amba-an antʃu-un/'' (암바안 안취운)[3]
중세 중국어
大金 (다낌)
만주어
ᠠᠮᠪᠠ ᠠᡳ᠌ᠰᡳᠨ ᡤᡠᡵᡠᠨ (암바 아이신 구룬) / ᠵᡠᡧᡝᠨ ᡤᡠᡵᡠᠨ (주션 구룬)
중국어
大金 (다진) / 金朝 (진차오)
거란어
nik(니크) / niku(니쿠)
1. 개요
2. 국명에 관하여
3. 발흥
4. 정치
5. 왜 남송을 멸망시키지 못했나
6. 위기
7. 몽골 제국과의 23년 공방전
7.1. 칭기즈 칸의 침공: 1211년~1215년
7.2. 무칼리의 침공 : 1216년~1229년
7.3. 오고타이 칸의 침공 : 1229년~1232년
7.4. 개봉 포위전과 금나라의 멸망 : 1232년~1234년
7.5. 이후
8. 문화
9. 고려와의 관계
9.1. 초기
9.2. 칭신
9.3. 칭신 이후 ~ 금나라 멸망
9.4. 그 밖의 이야기
10. 역대 황제
11. 추존 황제
12. 계보
13.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1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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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15년에 세워져 1234년에 멸망한 여진족이 동아시아에 세운 나라로 개조는 완안아골타. 수도는 초기에 상경 회령부였으며 후에 금나라의 4대 군주인 해릉왕이 연경으로 옮겼다.[4] 황성은 '''완안(完顔)'''. 이건 한국식 독음이고, 금계종의 여진문사전에 따르면, 금대 여진어로는 '''온얀'''(/Won-{g}ian/)[5]이라고 읽었다고한다. 만주어 발음으로는 '''왕야'''(Wanggiya) 또는 '''왕얀'''(ᠸᠠᠩᡤᡳᠶᠠᠨ, Wanggiyan) 중국식 황성은 왕(王)씨이다. 원조비사몽골의 기록에서는 '주르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을 몽골어로 부른 이름이다. 금대 여진어로는 '''주션'''(/ʤu-çiɛn/)[6], n음이 탈락하면 '''주셔'''(/ʤuʃə/)로 발음한 것으로 추정된다. 만주어로도 '''주션'''(ᠵᡠᡧᡝᠨ, /ʤuʃən/). 영문으로는 한어병음 표기를 따라 Jin Dynasty라 부르며 상술한 Jurchen을 쓰기도 한다.

2. 국명에 관하여


금은 중국식 국호이고, 자신들의 언어인 여진어로는 '''암반안취운 구룬'''(Amban Antʃun Gurun), 만주어로는 '''암바 아이신 구룬'''(Amba Aisin Gurun)이라고 불렀다. 모두 대금국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국호인 금(Antʃun)은 안출호수(按出虎水)에서 유래했는데 안출호(按出虎)는 금대 여진어로 금을 뜻하는 'Antʃun'을 음차한 것이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Won-{g}ian Akutta)가

"요나라는 빈철(賓鐵)로부터 국호(國號)를 정했는데, 그것의 견고함을 취한 것이다. 빈철은 견고하지만 종국엔 녹이 슬어버리니, 오로지 완안부의 색인 백색을 띠는 금만이 변치 않고 녹슬지도 않는다."

며 금(Antʃun)을 국호로 삼았다.[7][8]
다만 《흠정만주원류고》 편찬자들은 금조의 국호가 안출호수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을 안출호(Antʃun)가 금을 뜻하는 것인지 알지 못해[9] 이 주장을 억지라고 기술하면서, 금 시조 함보가 신라 땅에서 나온 게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신라 왕성인 김씨를 국호로 삼았다고 생각된다 기술하기도 했다.

3. 발흥


여진족은 발해 멸망 후로 한동안 만주 지역을 떠돌며 거란족에게 숨죽이며 지내야 했는데, 이 거란(요나라)이 슬슬 막장 테크를 밟게 되자 세력을 키우기 시작해 12세기 초 부족 통일을 매듭짓는다. 이후 금태종 때 거란에게 맨날 터지던 송나라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송나라는 그간 자신을 괴롭혔던 요나라를 제거할 기회라고 생각해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다음 목표는 뻔히 송나라라고 반대한 신하들도 있었지만 요나라를 향한 증오가 커서 깔끔하게 씹은 건 덤.
어쨌든 1125년에 금은 송과 연합해 요나라를 멸망시켰는데, 문제는 이후 북송송휘종이 잔머리를 굴려서 요의 잔당들과 꾸며서 배신을 때리자, 빡친 금이 1년 만에 북송의 수도 개봉을 갈아버리고 화북 일대를 점령해버렸다는 것이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고 하는데, 이때 송은 황제·상황·황후·황자·황녀가 죄다 금에 끌려갔다.(...) 그리고 이때 북송 역시 망하고 그나마 임안(현재의 항저우)을 수도로 하는 남송은 유지해 중원의 반쪽이나마 사수하게 된다.
'''건국으로부터 화북을 점령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12년'''이다. 그야말로 중원의 다크호스 왕조. 아골타의 형이 동북 9성 돌려달라고 고려에 애원했던 때가 1109년인데, 이때부터 따져도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짧은 기간만에 당시 동북 아시아의 두 거대 제국을 무너뜨린 셈. 고려 입장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공 바치던 애들이 순식간에 대제국을 이루었으니 여러모로 황당했을 듯. 다만 이때 금에 무너진 북송 모두 변방(전자는 서쪽, 후자는 남쪽)으로 도망간 황실에 의해 재기에 성공하긴 했다.
맹안모극(猛安謀克, Miŋgan Moumugə)이라는 유목 민족 특유의 군사 조직이 힘을 발휘했고 두꺼운 갑옷을 입은 금나라의 철기병은 매우 막강했기 때문에 20년도 안 지난 기간에 요나라와 북송을 무너뜨리고 화북을 얻었다.[10] 특히 금나라의 초중장기병대인 '괴자마' 같은 경우 말에 2~3겹의 갑옷을 입히고 자기 자신도 갑옷을 덮었으며, 군마 3마리를 쇠사슬로 연결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11][12] 1126년, 송나라의 지방관이 전공을 세울 목적으로 금나라 사신 일행을 공격했는데 '''사신을 호위하던 17명의 기병과 궁기병들에게 송나라 보병 2000명이 처발렸다는 기록[13]'''이 있을 정도니 얼마나 용맹하고 전투에 능했는지 짐작 할 수 있다. 거기에 북송을 공격하면서 얻은 공성 무기들과 초기 형태의 화약을 노략하고 그것을 응용하여 기상천외한 신무기들을 개발했는데 대표적으로 '''로켓의 시초'''라 할 만한 비화창(飛火槍)과 화약 작렬탄인 진천뢰(震天雷)가 금나라 때 나온 무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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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 철기병 복원도.
그 밖에 금나라의 전쟁 관련 기록들을 보고 싶다면, 아래의 링크들을 참조할 것.[14]
여진군의 전투 방식
무슨 여진족이 용, 호랑이, 물개, 원숭이냐?
여진군을 창과 활로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
철부도에는 도끼가 딱이지!
왜 송나라 사람들은 여진족을 무서워 하였을까요?

4. 정치


기본적으로 요나라와 비슷하게 분리적 관인 통치를 했다. 건국 초창기엔 요나라와 발해의 제도를 많이 참조하고 한자거란 문자를 본떠 여진 문자라는 독자 문자도 개발하는 등 여진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이후 중원에 정착하자 자진해서 유교를 받아들이고 한족을 적극 기용하는 등 급속히 한인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중원을 침략한 초창기에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불태웠으며[15], 산동에 있는 공자 사당인 공묘(孔廟) 역시 공자가 뭔지도 모르는(...) 여진족 병사들이 도굴하고 파헤치려던 것을 마침 같은 자리에 있던 발해인 출신 금나라 관료 고경예가 그 광경을 보고 '''"대성인(大聖人)이 계신 곳이다."'''라고 뜯어 말려서 겨우 무사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던 나라가 중원에 정착하고 한화된 이후에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유학을 장려하였고 황제가 공자묘에 제사를 지냈으며 금나라가 점령한 곡부에 거주하는 공자의 직계 자손들에게 '연성공'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다른 한족 왕조들처럼 이들을 우대했다. 이는 유목 민족 출신의 정복 왕조의 군주도 일단 중국을 지배하고 유교의 내용을 접하게 되면 제왕의 통치와 군림을 뒷받침해주는 이데올로기로서 충과 효를 강조하는 유교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복 왕조의 군주조차도 유교를 국시로 받아들이게 되고 유교를 대표하는 공자를 성인으로 특별 대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젠 이런 과정에서 공자 가문의 정통성이 좀 꼬였는데, 금나라가 중원을 공격하기 직전 공자 가문은 남송 정부와 함께 곡부를 떠나 남하해서 절강성에 터전을 잡고, 그 곳에서 남송이 부여한 연성공 작위를 얻어서 공자 후예로 인정받았다. 같은 공자 가문에서 2개의 연성공이 나오게 된 것. 금나라가 인정한 가문을 '북종', 남송이 인정한 가문을 '남종'이라고 부른다. 이후 쭉 남북종으로 나뉘다가 원세조 쿠빌라이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남종 측에게 곡부에 돌아가 가문을 이으라고 명하였으나, 남종 측에서 연성공 직을 반납하고 북종 측에게 본래 공자 가문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 정통성 문제가 정리되었다. 이 부분은 공자 문서의 '공자의 후손' 항목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
금세종은 여진족들의 복장과 풍습이 한족의 것과 유사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한족 복장의 착용과 머리 모양을 법으로 금지도 하였지만 흐지부지되었다. 당시 금나라의 상류층을 중심으로 남송 의복을 입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나온 정책이었다. 금나라는 남송에게서 조공을 받는 등 상국 노릇을 했지만 지배층을 중심으로 남송 문화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남송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보고 세종 이후 재정이 급격하게 나빠진다. 후대의 청나라는 금나라가 한족 문화에 빠져버린 것을 금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보고 중원에 들어오자 만주족의 옷과 변발을 한족에게 강요하였다. 물론 만주족마저도 청나라 말기 이후로는 옷과 변발을 제외하면 거의 한족 문화에 동화되어버렸고 오히려 자신들의 의상이 한족 전통의상으로 잘못 알려지는 부작용을 야기했지만...
여진 문자는 금세종의 보급 노력에도 차츰 여진족 스스로가 배우는 것을 경시하고 한자 사용을 더 선호했다.(...) 초창기의 여진 부족 체제에서 유래한 정치 제도는 유명무실화하고 경의와 사부를 설치하여 한인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를 실시했다.[16] 또 중국식 신관제를 반포하고 중국식 백관의 의제와 조복을 채택했다. 초기에는 악비 등의 무장이 남송에 있어 이래저래 고생했지만 나중엔 한족과의 혼인도 빈번해 적인지 아군인지도 애매한 입장이었지만 기를 쓰고 공격은 했다. 이렇듯 금나라는 군사력으로는 한족에게 역사상 최초로 중원을 빼았기고 황족들이 몽땅 다 포로로 잡히는 사상초유의 굴욕을 안겨줄 정도로 강력했으나 문화적으로는 한족에 차츰 동화되는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하술되어 있듯이 피지배층인 한족들도 지배층인 여진족들의 풍습에 물드는 경우도 있었다.
송사전 금 열전에 따르면 초창기인 금태종 때만 해도 완안올출로 하여금 후손인 만주족처럼 정복지의 송나라 백성들에게 중국식 복장을 금지시키고 변발령을 내려 따르지 않으면 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나중에 가면 1150년에 중국식 의복 착용 금지령을 폐지하고 '''황제와 관료들의 조복, 공복, 제복 및 황후와 비빈들, 명부의 복장은 모두 송나라 제도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나라 시대 관복 그림 참조 북송 황실의 면류관 등 다수의 황실 제복들이 카이펑에 남아서 금나라 황제들과 관료들은 그 의상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금희종이 처음으로 중국식 면류관과 곤룡포를 입었다. 해릉양왕 때부터 한족 문물들을 급속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금세종 때 다시 여진의 의상을 고수하지만, 장종 이후로 다시 급격한 한화 현상이 일어났다. 하지만 중국 사극이나 무협 드라마에는 이런 점을 무시하고 한족화한 금나라 말기임에도 금나라 출신 인물들은 벙거지를 쓰고 가죽 옷을 입은 전형적인 북방 민족 복장을 하고 나온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 사극무인시대에서는 고증에 맞게 금나라 관리들이 송나라식 관복을 입고 등장한다. 서민들은 흰색 의상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5. 왜 남송을 멸망시키지 못했나


금나라는 세종부터 금 장종까지 근 50년이 조금 안 되는 전성기를 누렸다.[17] 그러나 그렇게 급하게 힘을 키운 금나라는 내부적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금 태종의 사망과 악비(岳飛), 한세충(韓世忠) 등의 활약으로 금군이 강남에서 쫒겨나 화북으로 물러간 뒤로, 금은 남송에게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세폐 등을 받아냈지만 '''남송을 멸망시킬 능력이 없었다'''. 금은 분명히 그 이후에도 남송의 멸망을 노리는 군사 작전을 시도한 바가 있지만 다 실패로 끝나버렸다. 한마디로 한족을 남쪽으로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할 역량까지는 가지고 있었지만 중국 전역을 완전히 다 차지할 역량까지는 없었던 것.
사실 남송을 치는 데 있어 금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남송의 경제력이 믿을 수도 없을 만큼 가공한데 반하여,[18] 회남 이남 땅을 남송에 내주는 금나라의 경제력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결함 국가 수준'''이었다. 특히 금세종 이전까지 국가예산에 대한 회계도 없다시피 했으며 건국때부터 꾸준히 재정난에 시달렸다. 민간에게 납속을 받아 관직을 주는 상황이 금의 전성기었던 금 세종 대에도 나타났으니 그만큼 금의 재정상황이 매우 열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의 해릉양왕이 소위 벌송(伐宋)군을 일으켜 남송을 공략하려다가 모두 실패했으며 나중에는 송군이 아닌 반란군에게 죽었고, 후퇴하는 금군의 뒤를 친 남송에게 숙주(宿州)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물론 해릉양왕의 뒤를 이은 금세종은 장군 복산충의(僕散忠義)를 시켜 금나라 군대가 이를 수복시켜서 즉시 숙주를 되찾았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금 세종은 되려 서둘러 정전 이야기를 추진하라고 명령했다.
사실 일시적인 기세를 이어가는 일이면 몰라도 장기적인 전쟁에 있어 경제력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금나라는 군사적인 우위에도 정작 경제를 남송이 보내는 세공(歲貢)에 크게 의존하는 터라 남송과 전쟁이 벌어지면 천문학적인 전쟁 비용이 나올 뿐만 아니라 남송의 경제적 지원도 모조리 끊긴다. 심지어 남송에게 받은 세공조차 남송과의 무역으로 오히려 상당부분이 남송으로 다시 유출되는 상황이었다. 이때문에 고려 사신이 금에 왔을 때 금세종이 조공받는 나라의 체면에 걸맞지 않게 외화유출을 막기 위해(...) 직접 고려 사신들의 사무역을 통제했을 정도였다.[19] 남송 정도의 나라를 무너뜨리려면 장기전은 필수적인데, 정작 금은 장기전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금 세종이 추진한 화약에 따르면 남송에서 금에게 주어야 할 물건은 은 20만 냥, 비단 20만 필이었는데, 이는 일전의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에서 줄어든 액수이며, 세공(歲貢)이라는 칭호에서 세폐(歲幣)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즉 상하관계의 급이 완화된 것이다.[20] 금나라는 그만큼 다소 양보를 하더라도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남송의 지원을 받아내야 할 만큼 절박했다.[21]
물론 남송도 북벌하여 금나라를 칠 만한 수준이 아니라서 남송의 북벌군은 번번히 금군에게 격퇴되어 수비는 가능했다. 결국엔 금이나 남송이나 서로의 공격은 막을 수 있어도, 치명상을 주기엔 힘들었던 것이다.
금나라의 2번째 문제로는, 터무니없이 적은 여진족의 숫자 때문에 민족 갈등의 문제가 있었다. 당시 여진족은 금나라 인구의 7분도 1도 안되었고,[22][23] 이때문에 해릉왕이 남송을 공격했을 때 거란인들과 해족을 징집하자 그들이 이에 반발하여 서북쪽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해릉왕이 남송정벌을 위한 원정을 떠났기 때문에 반란군은 아예 서북쪽을 점령한 상황이었다. 이후 금세종에게 진압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게다가 문화 수준이 본래 낮은데 역대급 속도로 지배민족이 되었기 때문에, 소수의 여진족이 그야말로 한족(漢族)의 바다에 표류하는 형태라 어느새 여진족들이 자기네의 낮은 문화 등을 부끄러워하는 풍조가 생겼다.[24] 게다가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은 만주의(그것도 문명에서 더 멀고, 더 기후가 척박한 동만주 베이스)[25] 자연환경에 맞게 반농반목을 해왔던 여진족의 경제가 중원으로 들어가면서[26] 너무나도 빨리 농경으로 바뀌면서, 적응을 제대로 못하고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는 여진족들이 나타났다.[27]
금 세종은 여진족의 민족적 자존심을 강조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명색이 지배민족인 그들의 빈곤도 없애야 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관유지에서 농사를 짓던 한족들의 땅과, 세금을 안 내는 토지를 빼앗아서 여진족에게 줬다. 그런데 이렇게 여진족을 도와주다보니 절대 다수인 한족들의 반감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여기에 더해서 금세종 시기에는 한족을 대상으로 한 세금도 증가했다. 땅에 등급을 매겨 세금을 거뒀는데 문제는 높은 세금을 내는 등급은 한족이 많이 배정되었다. 그나마 금세종 시기에는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공정하게 매겨보려고나 했지 그 이후는 뭐...
금나라 이전의 요나라의 경우는 연운 16주를 차지했지만 그곳이야 중원의 북동부 가장자리 일부였고 기본적으로는 북방의 국가였기 때문에, 중간중간 소위 한화 성향이 강해질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유목 국가의 성격이 강해서 이런 내부적 혼란은 비교적 덜했다. 반면 금나라는 근본이 어찌되었건 아예 중원 깊숙히 들어와서 뿌리를 박은 만큼, 이런 부분에서 혼란은 필연적이었다.[28][29]
게다가 금나라에 의해 조국을 잃은 거란인들도 복잡했다. 여진족은 거란족을 어느 정도 대우하면서 여진족과 거란족의 통혼을 장려했는데, 어떻게든 거란족을 끌어들이고 숫자가 적은 여진족의 단점을 보완하려고 했다.[30]

사자를 보내어 이들(거란인)을 이주시켜, 여직인(女直人)[31]

과 같이 살게 하고, 남혼여빙(男婚女聘)[32]을 점차로 풍속화하는 것이 장구지책(長久之策)이다.

─ 대정(大定) 17년(1177) 세종의 조칙 ─

하지만 이 방책은 실패했다. 회유책과 강경책을 반복한 금나라의 거란족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고, 세종은 거란인과 통혼을 장려하면서도 거란족 관료 수를 줄였으며, 세종의 뒤를 이은 장종(金章宗)은 마침내 거란 문자 사용까지 금지시켰다. 그 결과 거란족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몽골의 침입 당시 거란족은 반란을 일으키고 몽골에 협력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이 당시 저 멀리 서방에 과거에 도망친 거란인들이 세운 서요의 존재도, 거란인들의 민족성이 남은 데 영향이 있을 것이다.

6. 위기


세종때는 그나마 통치가 잘 되었지만, 이후에는 금의 국세가 기울게 된다. 게다가 이때 최강인 몽골 제국이 북쪽에서 내려오면서[33] 금나라는 방비를 위해 방위비를 많이 지출함에도 불구하고 영토를 야금야금 뺏기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에서도 남송을 틈만 나면 공략하며, 남송의 도움도 못 얻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는 몽골과 남송의 연합을 불러와 금나라의 멸망에 기여를 하게 된다.

7. 몽골 제국과의 23년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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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7.1. 칭기즈 칸의 침공: 1211년~12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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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5년경의 상황, 화북평원이 몽골군에게 넘어가고, 요동지역은 몽골의 점령지역과 포선만노의 동하, 야율유가의 동요가 같이 공존하고 있다.>
금나라는 이전부터 피지배민족인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거란족,몽골족 등 또 다른 유목민족을 회유하는 정책을 쓰곤 했는데, 이와 더불어 다른 유목민족을 차별하고 이간질시키는 정책을 써서 유목민족에게 악명이 높았다. 징기스칸이 금나라를 아예 밀어버릴 작정을 한 이유가 바로 이런 정책때문이였다.
1206년 몽골 고원을 통일한 칭기즈 칸은 내부를 안정되게 한 후, 1211년 쿠릴타이 회의에서 금나라와의 전쟁을 결정하고 몽골의 모든 병력(추정치 약 9만~12만명)을 총동원하였다. 그리고 위에 나온 이유로 유목민족의 적이나 다름없던 금나라를 공격하였다.
1211년 가을, 몽골군은 금나라의 첫 방어선인 오사보에서 금나라군과 겨뤘다. 수적으로는 금나라군이 훨씬 우세했으나,제베가 우회해서 후방을 기습했고, 여러 요충지에 분산배치된 몽골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했다.
오사보를 뚫은 몽골군은 흩어져 있는 금나라군을 규합한 완안승유의 군대와 또 맞붙게 되는데, 이번에도 무칼리의 별동군이 우회해서 금군의 후위를 위협하여 승리를 거둔 뒤. 이후 패잔병을 수습한 금나라군과 회화보에서 싸워서 또 승리를 거두었다.[34] 이후 금나라는 성채전에 의지해야 될 정도로 불리해졌다.
이후 회하보 인근을 초토화시킨 몽골군은 이제 만리장성의 관문인 거용관 부근에 도착했다. 거용관은 알다시피 수도인 연경(베이징)에서 불과 50~60km 정도 떨어진 말 그대로 최후의 관문이기에 금나라에게 매우 중요한 최전방이였고,이를 아는 금나라군은 거용관 근처 100리에 마름쇠를 잔뜩 깔아놔서 몽골군이 침공 못하게 막아놨다. 하지만 이후 몽골군이 샛길로 우회해서 거용관을 뚫었고, 마침내 금의 수도 연경(베이징) 부근까지 도착했지만 금나라의 구원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하였다.
이후 칭기스칸은 자신의 아들인(주치,차가타이,오고타이)를 시켜서 대동(다퉁) 인근의 도시를 초토화시켰고, 인근의 목초지를 급습해서 군마를 모두 빼앗았다.이로 인하여 금나라는 보병 위주로 군사를 운영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금나라는 요동에도 목초지가 있기에 만약 요동 일대의 거란족과 사이가 좋았다면, 기병을 어느정도 양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금나라는 요동이나 화북지역의 유목민족에게 악명이 높았고, 여기에다 거란족이 몽골과 손을 잡는다는 소식을 들은 위소왕이 거란족의 부족장을 죽이고, 일반 백성을 강제 이주 시키는 등 탄압 정책을 시행하였기에 요나라 왕족의 후손인 야율유가를 필두로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바람에 실패하였다.[35]
한편 휴식을 취한 몽골군은 1212년 다시 금나라를 두 갈래로 나눠서 침공했는데, 징기스칸의 본부대는 대동을 포위하고 구원하러온 금나라군을 격파했고, 제베의 부대는 요양(랴오양)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대동을 포위하는 도중에 징기스칸이 화살을 맞아서 부상을 입었고, 다시 변경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1213년 7월, 몽골군은 금나라를 굴복시키기 위해 재침공하였고, 이전에 한번 뚫려서 철벽방어를 한 거용관을 피해서 다른 관문인 자형관을 뚫은 뒤에 수도에서 온 구원군을 격파했고, 이후 별동대를 보내 후방에서 거용관을 공격해서 다시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후 금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포위했고, 이와 동시에 몽골군은 병력의 일부를 남긴 채로, 단 11개의 성을 제외한 모든 화북지역의 성들을 초토화시켰다.
한편 연경 포위가 1214년까지 계속되자 위소왕 이후에 즉위한 선종은 막대한 세폐와 자신의 딸과 부인을 보내는 조건으로 강화를 체결하였고, 몽골군은 이에 응하고 철수하였다.
급한 불을 끈 선종은 1214년 6월 수도를 연경에서 방어에 용이한 남쪽의 개봉(카이펑)으로 옮겨 몽골의 남침에 대비하고 연경에는 황태자와 수비군 일부를 남겨 지키게 했다. 하지만 이에 자극받은 징기스칸은 연경을 포위했고, 무칼리에게 대정(츠펑) 부근의 요하 일대를 공략하게 하였다.
1215년 무칼리는 20만 정도의 금나라군을 격파하고 대정을 점령하였고, 이후에도 요하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이전에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러 간 포선만노는 대진국을 세웠고, 이후 몽골을 피해 동쪽으로 가서 동하를 세웠다. 그리고 징기스칸은 이 때, 연경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동요를 세운 야율유가는 몽골에게 정식으로 복속을 선언하였지만, 자신만의 독립적인 나라를 세우길 원한 일부 거란족들은 이에 불만을 갖고 야율유가를 축출하였고, 나머지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후요를 세웠다.

7.2. 무칼리의 침공 : 1216년~1229년


칭기즈 칸은 1216년에 서요, 1219년에 호라즘 왕국을 침공하였고, 이에 따라 몽골의 주력군은 서방 전역으로 차출되었다. 중국 방면에는 무칼리가 이끄는 소규모 몽골군만이 남았는데, 약 2만명의 몽골인과 4만~7만명의 타민족 군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칼리는 축소된 군대를 이끌고도 1217년~1218년에 산동(산둥성) 일대와 대정 일대를 점령하였으며, 후요를 진압하기 위해 동하와 고려와 연대해서 궤멸시켰다., 그리고 1223년까지 개봉 부근을 제외한 나머지 곡창지역을 정복했다.
한편 이때의 금나라는 30여년간 휴전상태에 있던 남송을 침공하여 국력을 회복하려고 하였으나, 1217년부터 1224년 사이에 걸쳐진 대송 전쟁이 별다른 소득이 없이 국력만 낭비하였고, 오히려 남송의 금에 대한 적개심만 키우게 되었다.[36] 뿐만 아니라 이 전쟁으로 그동안 남송에서 매년 바치던 막대한 세폐가 끊기면서 경제적 손실이 가중되었다.

7.3. 오고타이 칸의 침공 : 1229년~1232년


1227년 칭기즈 칸이 죽고 2년 뒤 오고타이 칸이 뒤를 이었다. 오고타이 칸은 먼저 금나라에 화평 사절을 보냈으나, 금은 몽골 사절을 죽이는 것으로 답하였다. 그러자 격노한 오고타이 칸은 금을 침공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황하 북부의 대부분은 이미 몽골에게 넘어가 있었고, 금나라의 영역은 서쪽의 장안에서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서 황하 남쪽의 낙양과 개봉을 지나 황해에 이르는 길고 넓은 띠 모양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황하 연안, 특히 수도인 개봉 근처의 금나라 영토는 강과 수로, 요새들이 겹겹히 있어서 몽골군의 장기인 기병이 마음대로 활동하기 힘들었으며, 금나라의 남쪽 국경은 상대적으로 기병이 활동하기 수월했지만 몽골이 그쪽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송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당시 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할 통로는 크게 두 곳이 있었다. 첫째는 화북의 몽골 영토에서 황하의 중류나 하류를 도하한 뒤 그물같은 수로망을 피해 금의 수도인 개봉을 공격하는 길이었고, 둘째는 아예 서쪽으로 움직여 장안을 지나 동관을 돌파하여 동쪽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이에 대비하여 금나라는 낙양에서 개봉까지 이르는 길에 20만 대군을 배치해 몽골군의 황하 도하를 막는 동시에, 동관에도 군사를 두어 서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당시 금나라의 국력은 완전히 기울어 있었지만, 완안진화상이라는 명장이 등장하였고, 역시 금나라 최후의 명장 중 하나인 완안합달이 버티고 있었으며, 시대를 잘못 타고났지만 명군의 자질이 있었던 금나라 애종이 국가의 역량을 최대한 집결시켜 몽골제국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몽골군의 본격적인 침공은 1230년부터 시작되었다. 오고타이 칸은 먼저 장안에서 시작하는 두번째 루트를 선택하였는데, 이를 위해 몽골의 명장 수부타이에게 동관을 공략하라고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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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과 동관 지역의 지도>
당시 금나라의 장수 완안진화상은 군중의 일을 처리하다가 월권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18개월동안 갇혀 있었는데, 본래는 사형죄였으나 금애종은 완안진화상을 석방하여 몽골군과 싸우는 선봉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완안진화상은 '''대창원에서 400명의 병사를 이끌고 8,000여명의 세계 최강 몽골군을 격파하였다.''' 대창원의 승리는 몽골군이 1221년 파르완 전투에서 '''잘랄 웃 딘'''에게 패배한 이후 처음 겪는 완패이었는데, 파르완 전투는 6만에 가까운 병력이 소수인 몽골군을 격파한 전투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월등한 다수의 몽골군이 더 적은 수의 적에게 패배한 최초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완안진화상은 정원대장군 직을 받게 되었다.
이때 완안진화상이 이끈 부대가 충효군(忠孝軍)이다. 충효군은 금나라 말기 정예부대로,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나이만, 강족, 위구르 족, 그외 기타 거란 여진 등까지 섞인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말을 탈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병전력이 부족한 말기 금나라에 있어서 아주 강력한 전력이었다. 충효군은 비록 전투력이 강해도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 제어하기 어려운 부대였는데, 완안진화상은 부대의 규율을 바로잡고 민간인을 함부로 약탈하는 것도 막았다.
다음해인 1231년 몽골군은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세를 시작하였다. 먼저 서쪽에서는 경양을 포위하고 그 전년도처럼 대창원을 거쳐 동관으로 진입하려 하였다. 동쪽에서는 이와 조금 차이를 두고 한인 출신 장군인 사천택이 이끄는 몽골군이 남하하여 황하 북쪽에 아직 남아있던 금나라 영토인 위주(衛州)를 공격하였다. 위주는 금의 수도인 개봉의 바로 북쪽에 있어서, 위주를 빼앗긴다면 비록 황하라는 천연 장애물이 남아 있다고 해도 수도 방어에 상당한 압박을 받게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몽골군의 양동 공격에 대응하여 금나라는 대장군 이랄포아(移刺蒲阿)이 지휘하는 일군을 서쪽으로 보내 경양을 구원하는 한편, 완안합달과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파견하여 위주를 돕게 하였다.
서쪽 방면의 금군은 또 다시 대창원에서 승리를 거두고 경양의 포위를 푸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이랄포아는 위주로 이동하여 완안합달의 군대에 합류하였다. 이랄포아가 합류한 동쪽 방면의 금군은 이러한 수적 우세에 힘입어 서전에서 몽골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완안합달-이랄포아 연합군에게 패배한 몽골군은 북쪽으로 물러면서 일부의 군대를 금군의 배후로 은밀히 이동시켰는데, 이 몽골 별동대가 금군의 후방을 급습하는 동시에 후퇴하던 몽골군이 역습을 가해오면서 금군은 크게 패하였고 위주를 몽골에게 내주었다.
한편 다시 서쪽 전선에서는 이랄포아가 위주를 구원하러 이동한 뒤 몽골군이 다시 대규모 공세를 퍼부어 대창원을 함락시켰고, 몽골군의 기세에 당황한 금군은 장안을 포기하고 그 지역의 모든 인구를 동쪽으로 피신시켰다. 금나라는 장안의 동쪽에 있는 동관을 아직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랄포아와 완안합달이 지휘하는 금군은 동관에 머무른채 소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안안진화상이 지휘하는 1천명의 병력은 동관을 공격한 몽골군을 격파하였다.
동관의 서부를 완전히 장악한 몽골군은 이곳에서 여름을 보낸 뒤, 툴루이의 제안에 따라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금나라의 수도 개봉을 공격하였다. 당시 금나라의 국경을 보면 북쪽과 서쪽은 각각 황하와 험준한 산맥을 경계로 몽골을 접하고 있었고, 남쪽은 평야 지대를 두고 남송과 접하고 있었는데, 기병이 주력인 몽골군은 황하를 도하하거나 산악지대를 돌파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툴루이가 지휘하는 서군은 금군이 집결해 있는 동관을 크게 우회하며 남동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한중을 돌파하여 남송의 영토를 통과한 뒤, 한수를 건너 남쪽으로부터 개봉을 급습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오고타이 칸이 이끄는 북군은 낙양과 개봉 사이의 몽골 영토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금나라의 군대의 관심이 서남쪽의 툴루이에게 쏠리는 사이 안전하게 황하를 도하할 기회를 엿보기로 하였다. 또한 일군의 몽골군은 동쪽에서 금나라를 위협하였다.
툴루이가 한수를 건너자 완안진화상은 동관의 수비병을 제외한 금나라의 마지막 정예병 20만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파하려고 했다. 금나라군은 한수 건너에서 벌어진 몇 차례 전투에서 격렬하게 싸운 끝에 몽골군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몽골군의 기동력 때문에 잠시 시간을 늦췄을 뿐이다.
한수를 건너는 데 성공한 툴루이는 수적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완안진화상을 견제하기 위한 일부 병력만 남기고 금나라군이 주둔한 곳을 우회해서 개봉으로 진격했다.[37] 이를 알게 된 금나라군은 개봉을 향해 진군했지만, 몽골군이 인근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기습전략을 펼쳐서 금나라군이 개봉까지 휴식없는 강제행군을 하게 만들었고, 이 가운데 거센 비와 폭설까지 내리는 바람에 금군은 굶주리고 서서히 지치기 시작하였다.
금군이 개봉에서 120km 정도 떨어진 균주성 근처의 삼봉산(三峰山)까지 도달했을 때 몽골군이 금군을 포위하였다. 몽골군은 의도적으로 균주 방향의 포위망을 일부 열어주었고, 많은 금군이 탈영하여 균주성 방향으로 흩어지자 몽골군은 이를 기습하였고, 결국 금나라의 남은 정예병은 궤멸되었고 명장 완안진화상도 몽골군에게 스스로 찾아가 죽기를 자처해서 죽음을 당했다. 마침내 균주성이 몽골군에게 함락되었고, 이 때 동관에 있는 11만 병력도 개봉을 향해 가는 도중에 몽골군에게 궤멸되면서 이제 몽골군의 진격로엔 아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황하 이북이 무주공산이 되자 이를 틈타 북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고타이 칸은 황하가 얼어붙을 때를 기다려 친위대를 이끌고 안전하게 강을 건너와 남쪽으로 진군하여 툴루이와 합류하였다. 오고타이 칸의 합류로 몽골군의 군세는 5만명까지 불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몽골군은 개봉을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7.4. 개봉 포위전과 금나라의 멸망 : 1232년~1234년


개봉에 도착한 몽골군은 개봉성 주변의 참호를 모두 메꿔서 장애물을 없앴고, 마침내 개봉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개봉은 원래 있는 인구에 피난민까지 합쳐져서 인구가 막대하게 불어났고, 양식이 떨어지는 속도는 이전보다 더 빨라졌다.
그럼에도 이에 맞선 금군은 진천뢰와 비화창 등의 화약무기를 사용해 몽골군에게 거세게 저항하였고, 이로 인해 전투가 장기화되어서 양측의 피해가 서로 커지자 수부타이는 금나라와 화의를 맺고 군대를 물린다. 몽골군은 비록 물러갔지만 이 당시 개봉에선 양식이 부족해지고 100만명이나 되는 피난민을 먹일 식량이 없어지자 백성들은 굶어죽어가고 심지어는 식인을 하는 행위가 벌어지는 등 생지옥이 펼쳐졌다.
마침내 그동안 금나라에게 이를 갈던 남송이 몽골의 동맹 제의에 응해 명장 맹공을 필두로 한 3만 명의 군대와 30만 섬의 식량을 몽골군에게 제공하면서 전쟁은 금나라에게 완전히 불리해졌다. 결국 이런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애종은 개봉을 버리고 채주로 피신했다. 이에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개봉성을 포위하고 황제마저 떠난 개봉은 더 이상의 저항력을 상실하고 결국 최립이라는 장수가 개봉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개봉은 결국 몽골군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개봉을 함락한 몽골군은 채주까지 진격했고 때마침 맹공이 이끄는 남송군까지 합류해서 채주성을 포위하였다. 몽골과 남송은 채주성 근처의 연강과 시담호라는 두 개의 물줄기를 점령해서 채주 쪽으로 돌려서 채주는 수해와 굶주림으로 인해 '''생지옥'''이 되어갔다. 1234년 애종은 황족 완안승린에게 황위를 양위하고 몽골-남송 연합군이 채주 성문을 무너뜨리고 공격해 올 때 유란헌이라는 곳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는 실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결국 애종이 죽은 다음날 채주는 함락되었고 완안승린은 황위를 물려받은지 하루도 안되어 몽골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하고, 이로써 금나라는 1234년 멸망하고 말았다.

7.5. 이후


최후의 거점인 채주이 함락되었지만, 금나라의 부흥운동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 중에 한명인 곽하마는 2년동안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몽골군에게 대패를 당했고,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곽하마 자신도 자결하였다. 결국 금나라는 최후의 명맥마져 끊어졌다.
그리고 이전부터 금나라에 앙심을 품던 몽골군은 여진족을 상대로 대학살을 했고, 일부 여진족은 이를 피해 고려로 피난가서 하층민을 이루기도 했다.[38] 그리고 남은 여진족과 금나라 지배 하에 있는 한족은 원나라의 하층민이 되었다.[39]
그러다가 1368년 몽골 제국의 일부인 원나라가 명나라의 초대 황제인 주원장에 의해 북쪽으로 쫒겨나자, 비로소 자신들의 원래 근거지인 만주로 돌아갈 수 있었다.

8. 문화


여진족 고유의 문화 토대 위에 거란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한족 문화를 받아들였다. 여진 문자가 대표적으로 여진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거란 문자와 한자를 사용했었다. 거란 문자나 한자를 참조하여 여진 문자를 만들면서 거란 문자는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서서히 한족화로 인하여 한자를 더 많이 쓰게 되었고 여진 문자는 쓰이지 않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금나라 조정은 여진인이 남송의 의상 착용을 금지하는 조칙을 세종, 장종 때 두 번이나 내렸다. 이는 거꾸로 보면 조정의 명을 한쪽 귀로 흘리고 남송 의상을 입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 조칙을 통해 남송의 문화가 금나라에서 크게 유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금나라는 남송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사치품을 수입하느라 무역에서 항상 적자를 봤다.[40]
하지만 그 반대의 현상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금나라 치하의 한족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남송에서도 여진족 패션 스타일이 유행했다. 여진족들은 장신구들을 착용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걸 보고 한족들이 따라 했으며 여진족의 호복을 입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여진 문화 유행 현상을 보고 당대 한족 지식인들이 혀를 찰 정도였다. 예를 들어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남송의 문인 범성대는백성들이 말하길 오랫동안 호복에 익숙해져 제도가 오랑캐처럼 되었다고 언급했다.[출처] 연운 지역을 포함한 화북의 한족들은 요나라와 금나라의 지배를 거치면서 남송의 한족들과 언어, 복장, 풍습에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금로도경에 따르면 금나라 사람의 의복은 좌임[41]이라는 점만 빼면 중국의 옷과 모양이 비슷하다고 적혀있고 조정의 공복들은 송나라 제도를 썼다고 했지만, 일상 생활에서 입는 옷들은 송나라의 의상과는 꽤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원으로 들어오기 전 수렵을 많이 했던 여진족 전통의 영향을 받아 동물 문양, 특히 사슴 문양을 선호했다고 한다. 요나라와 북송을 정복하면서 거란[42]과 한족의 의복을 수용하여 여진 전통 의상에는 변화가 생겼지만, 아예 한족 의상을 그대로 착용했던 요나라 남면[43] 의상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변발의 경우 발굴 유물과 앞머리를 밀고 뒷머리를 남겨 땋아서 묶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볼 때 후손인 만주족의 변발과 흡사하거나 변발을 양갈래로 늘어뜨린 모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건국한지 12년 만에 제국 2개를 무너뜨리고 화북을 장악했지만 12년 전까지 동북 변방의 수렵 민족인 생여진이었기 때문에 금나라 초반기의 경우 주변 나라들보다 부족적인 성격이 짙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황제와 신하들이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고 술을 퍼마신다든가 황제가 신하에게 곤장을 맞는다든가(...)[44] 황족들과 귀족들의 의복이 일반 백성들과 별 차이가 없다든가 제대로 된 황궁도 없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뜻이다. 변두리 수렵 부족이 20년도 안 돼서 갑자기 제국을 건국해 출세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종의 문화 지체 현상. 과거 북송의 땅이었던 화북을 통치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약탈만 하고 사람을 무참히 죽여대기만 하니 땅은 황폐화되고 조정에 저항하는 민란이 일어나는 건 당연지사.
이런 현상은 금희종 이후 중국식 제도와 문물들을 수용하면서 거의 사라졌다. 해릉왕은 북송의 황궁을 본받아 천도한 중도(연경)에 으리으리한 황궁을 지었고 세종과 장종은 한문에 능했고 서화와 서예 솜씨도 수준급이었다.[45] 한문학은 많은 여진 귀족들을 매료시켰고 많은 여진 귀족들이 한족 문화에 흠뻑 취했다. 대표적으로 세종의 손자이자 저헌거사(樗軒居士)라고 불렸던 완안숙(完顔璹)은 금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칭송받았으며 현대에까지 그의 시가 전해 내려온다. 완안숙과 사귀던 조병문, 원호문, 왕약허 등 금나라의 한족 시인들도 유명했는데, 대표적으로 현대에 널리 알려진 금나라 시대 한시로는 안구사가 있다.
전각(벽돌조각이나 부조를 세기는 것)공예가 발달되었고, 무덤에는 여러 조각들을 세긴 벽돌로 두성되기도 했다. 송나라의 영향으로 도자기, 칠기도 발달되었다.
대승불교, 유교, 도교, 여진족 고유 토속신앙 등을 주로 많이 믿었으나, 일부 무슬림들도 있었다고 한다.

9. 고려와의 관계



9.1. 초기


당장 《금사(金史)》 고려전에 "금인은 고려의 말갈에서 떨어져나온 것에 기원한다.'[46]라 써져 있고 금이 성립되기 전 여진은 고려를 상국으로 섬겼다. 하지만 이후 금나라가 세력이 커지자 역으로 고려에게 칭신을 요구해왔다. 그래도 전반적으론 대대적인 전면전을 치른 요나라-고려 시절과 달리 전면적인 충돌은 없이 지낸 편.
금나라가 건국 이전부터 고려는 북방의 여진족을 회유하고 속민으로 삼아 영토를 넓혔다. 하지만 완안아골타의 숙부인 '''영가'''와 아골타의 형 '''오아속'''이 등장하여 완안부의 세력이 심상치 않아지자 숙종이 여진 정벌을 시도하나 그닥 큰 재미를 못봤다. 고려는 절차부심하여 예종 대에 본격적으로 18만 대군을 이끌고 정벌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윤관동북 9성 개척(1107년).
이 시점에서 고려의 1차 목표는 자국 영토 확장 및 북방 안정이라서, 여진의 성장 및 건국을 저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되려 금나라의 성장에 도움을 줬다는 평가도 있다. 게다가 정작 동북 9성은 개척이 어려워 다음해 여진에게 되돌려주게 된다. 고려가 1109년의 갈라수 전투에서 패함에 따라 북방에서의 정책을 재검토할 수 밖에 없기도 했다.[47][48]
어쨌든 완안아골타가 본격적으로 금나라를 건국하자(1115년) 두 나라 관계는 상당히 미묘해졌다. 고려로서는 금나라를 정벌할 군사력은 없는데 예전에 신하였던 금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인정하기란 명분 상으로 어려웠고, 금나라로서는 배후의 고려가 영 거슬리지만 눈 앞의 요나라송나라가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금나라가 건국된 1115년, 금나라와 고려의 이해 관계가 가장 충돌하는 지역은 사실 동북 9성보다도 '''보주(保州), 오늘날의 평안북도 의주'''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요나라의 멸망이 코 앞으로 다가오자 금나라와 고려는 각기 군사를 보내어 이 지역을 얻으러 경합한다. 일단 금나라가 요나라의 땅이었던 보주 점령에 가까워지자 고려는 즉시 아골타에게 사신을 보내 보주 반환을 요구한다. 아골타는 '''"爾其自取之(그대들이 직접 탈취하시오)"'''라고 대답한 뒤 즉시 부하들에게 전갈을 보내어, "아놔 고려가 공격하러 올 거임! 얼른 대비를 해야 됨!"이라며 경고한다.[49]
하지만 단순히 "너님들이 가져갈 테면 가져가봐."라고 한 건 아니고 고려와 금나라 사이의 암묵적인 외교였다. 당시 요나라는 금나라가 밀고 내려오자 고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고려는 당연히 거부했고, 이후 요나라가 점령하고 있는 보주 일대를 두고 양 국가가 만나게 된 것이다.
고려의 요구에 아골타는 사신을 통해 직접 탈취하라고 언급했지만 당시 보주는 '''아직까지도 요나라의 땅'''이었다. 이를 고려 쪽에서 치러간다면 '''고려는 요나라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작게는 두 나라 간의 연계를 막기 위한 목적이었고 크게는 우군을 만들려는 금나라의 의중이 담겨있는 말이었고 고려도 이를 파악하고는 '''군사적 움직임보다는 외교적인 움직임으로 먼저 항복을 권유'''하엿고 결국 거란 관리 쪽에서 고려로 항복(1117년 3월)하며 보주와 내원성은 고려의 땅이 되었다. 당시 고려가 유연하면서도 이득을 챙기는 외교를 했음을 잘 알려주는 사례 중 하나.
이후 금나라는 형제의 맹약을 맺자(물론 금나라가 형)고 요구(1117년)해 왔으나 고려는 무시했다.
사실 숙종, 예종 대는 여진(금)과의 사이가 전혀 좋지 않았다. 특히 예종의 여진 정벌이 큰 효과를 못본 후엔 서로 팽팽하게 노려 보고만 있었다. 예종은 위에 대한 답변으로 재위 14년(1119년) 8월에 사신을 보내지만 국서에 금 황제를 "너(彼)"라고 칭해서 금나라는 사신을 거부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군사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고 팽팽한 긴장감만이 감돈다. 일단 고려는 천리장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했다. 금나라 역시 1124년 "고려가 혹시라도 침략해오면 너의 군대를 정돈하여 그들과 싸워라. 하지만 함부로 먼저 고려를 침범한 자는 승전을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리겠다."며 압록강 주변에 군사를 두어 고려를 방비하는 한편, 불필요하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한다.[50]

9.2. 칭신


금나라는 1125년, 마침내 요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를 사로잡고 요나라를 끝내 멸망시킨다. 이에 인종은 1126년 3월 신묘일에 모든 관료를 소집, 금을 상국으로 대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했다. [51]
당시 고려인종이 즉위한 지 5년이 지난 때로 이자겸, 척준경 일파가 권력을 잡았다. 고려사 인종 세가에 따르면 토론 당시 모든 신하가 반대했으나 오직 이자겸, 척준경만이 동의했다고 한다. 같은 달 을미일엔 종묘에 점을 쳐서 물어보았다고 한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정말 반대가 극심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다하다 종묘에 점을 치기까지 하니...
결국 금나라에 숙이기로 결정, 1126년 4월 정미일에 사신을 보내 번국(藩國)을 칭한다.
보면 알겠지만 계속해서 질질 끌어오던 호칭 문제가 두달만에 결정나는걸 볼 수 있는데 일단 국왕이 더 이상 숙, 예종 처럼 강경파가 아닌데다가 금이 요를 없앨 정도의 국력임을 인식하여 빠르게 결정했을 것이다. 그 여진족과 칼을 맞댔던 '''척준경'''이 앞장서서 금나라에게 숙이자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금나라의 강성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정권을 주도하는 이자겸, 척준경 일파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권력에 금이 갈수도 있으니까.
허나 이자겸 일파의 이러한 결정은 고려 내부에서 반발이 컸다. 무엇보다 당장 같은 해에 이자겸은 쫓겨난다.... 고려사에 따르면 인종9년(1131년) 9월 정유일에 대간이 한 신하를 고발했는데 무관이 문관직에 임명돼서이기도 했으나 그가 공공연히 "국가가 나에게 천 명의 군대를 주면 금국(金國)에 들어가 그 주(主)를 사로잡아 바치겠다!"라고 떠들고 다녀서 외교적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삼일동안이나 간쟁했으나 인종은 끝까지 그를 임명시켰다. 윤관의 아들 윤언이의 경우엔 그들은 우리 조정의 부속이고 늘 조천(朝天)[52]해오던 자들인데 어떻게 우리가 숙일 수 있냐고 아주 분노했다고 묘지명은 기록했다.
그렇다고 해서 고려 조정이 이미 정한 금나라와의 관계를 되돌리진 않았는데, 요나라 멸망 직후 칭신한 바로 다음해인 1127년(금나라 천회 5년)에 북송이 시원하게 망테크를 타면서(...) 딱히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 북송/고려와의 관계를 참고.
어쨌든 금나라는 고려가 숙이고 들어온 사실에 기뻐하여 이전에 이미 빼앗긴 보주(의주)를 고려의 영토로 인정했다.
참고로 이 보주성 반환 도중에 금나라에선 땅은 주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금나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고려에선 '''이미 다죽었다'''고 사실상 반대를 뜻하여 돌려보내지 않았다.

9.3. 칭신 이후 ~ 금나라 멸망


서화는 이미 매마르고, / 西華已蕭索

북새[53]

는 여전히 멍청하다. / 北寨尙昏蒙

앉아서 문명의 아침을 기다리는데, / 坐待文明旦

천동의 해가 밝아온다. / 天東日欲紅

- 보한집 권상에 기록된 고려 외교관 진화(陳澕)의 시. 밀려난 남송과 강호 금나라를 모두 무시하고 있다.

대체로 무난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내부적으로는 팽팽한 긴장감이 있었다.
고려 의종 재위 2년(1148년) 2월, 금과 외교 문제가 발생했다. 의종은 금에 보낸 표문에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았고, 보낸 사신을 배신(陪臣)이라고 쓰지 않았던 것.[54] 이걸 두고 금에서 이걸 처벌해야 될지 금 황제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결말은 고려사에 적혀있지 않다. 하지만 고려가 금을 꺼림칙하게 여겼다는 것은 짐짓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특히 칭신한 지 40년이나 지난 1164년에 금-고려 국경 지역의 작은 군사 분쟁이 벌어졌다. 대충 말로 풀긴 했지만, 금나라와 고려 양국은 분쟁의 원인이 서로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고려 기록에는 병마 부사 윤인첨이 '恥削土(치삭토 : 국토가 줄어듦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 말이 남아서, 겉으로는 화목해 보여도 속으로는 불만이 있었음을 암시한다.[55]
무엇보다도 금-고려 관계가 요동친 사건은 1170년 무신정변이다. 1170년 겨울에 고려는 갑자기 금나라 사신의 입국을 거절하더니[56], 이듬해 사신을 보내어 '''"의종이 정신이 혼미해서 동생(명종)이 대신 왕이 됐어요. 데헷"'''이라고 알린다. 당연히 금나라 조정에선 말도 안된다며 난리를 쳤다. [57] 금나라는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왕이 병에 걸려 물러난 것이 아니라 폐위된 것임을 알아낸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 끝에 '''고려 내부의 문제라고 판단''', 명종의 왕위를 인정했다.
1175년, 금나라는 대략적인 사실을 알다가 비로소 사건의 진상을 아는데... 바로 조위총의 난 때문. 조위총은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의방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했다고 알리며, '''자비령 서쪽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40여 성을 바치겠으니 도와주십시오'''라 요구한다. 하지만 금나라는 거부하고 오히려 조위총의 사신을 붙잡아 고려 조정에 보냈다. "잘했지?" 하고(...). 이 사건을 단순히 '금나라가 멍청해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금나라의 영역 확대 의지가 소극적인 성격이었다고 읽어낼 수도 있고, 그냥 단순히 이웃 나라의 내부 문제에 개입하기가 싫어서라고도 볼 수도 있고 다 어느 정도 해당되지만 주전선은 남송과의 전선이었고 그 다음 전선도 고려가 아니라 몽골과 거란 등 북방전선이었다.[58] 애초에 금나라는 자국 내부마저도 못 통합하는 판국인데 전선을 더 늘려봤자 혼란이 더 일어날 가능성에 그냥 넘어갔다.
이후로는 큰 사건 없이 조공하고 책봉하며 생일에 사신 보내고 하는 평범한 일들만 일어났다. 이 사건은 금나라의 변경 지역 통제력이 약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역사상 최강, 최악의 기마민족이 동북아시아에 들이닥쳤다'''. 위소왕 시절 이후로 금나라가 남쪽으로 밀려나 교류가 끊겼다. 1216년에는 몽골군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위기에 처한 금나라가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지만 고려 조정에서는 이 사신을 받는 것을 계속 거부하는 등 철저히 무시했다.[59] 금나라가 중원을 차지한 직후의 상황과 달리 당시의 금나라는 고려가 도와줘도 멸망당할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니 고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금나라의 멸망을 방치하는 게 훨씬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60] 금나라 건국 이전 여진족 시절의 역사적 악연도 있었기에 더더욱.[61]
고려는 북송이나 요나라와는 유교, 불교 서적과 대장경 등을 수입하는 등 문화, 사상적으로 밀접한 교류 관계를 가졌으나 금나라와의 교역은 의례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고려와 금나라의 교역 관계는 항목 참조.

9.4. 그 밖의 이야기


뒷날 누르하치후금(청나라의 전신)을 세운 것처럼, "금"은 전형적인 여진족(만주족)의 국호로 자리잡았다. 청나라 황족의 성인 아이신 기오로(愛新覺羅)에서의 '아이신'은 금, 기오로는 '씨(氏)'를 뜻한다. 자신들이 금나라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것. 그러나 환빠들은 금은 신라 왕족의 성씨인 씨를 뜻하고, 愛新覺羅가 "新羅를 사랑하고 기억한다(愛覺)"라는 말을 섞어 놓은 것이라며, '''여진·만주족은 신라의 후예'''라고 말한다.

10. 역대 황제


금나라 추존 황제들과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 복원도[62]
  • 추존 황제는 목록에서 제외
'''대수'''
'''묘호'''
'''시호'''
'''휘'''(여진식/중국식)
'''연호'''
'''재위 기간'''
'''능호'''
초대
태조
(太祖)
응건흥운소덕정공
인명장효대성무원황제
(應乾興運昭德定功
仁明莊孝大聖武元皇帝)
완안아골타(完顏阿骨打)/
완안민(完顏旻)
수국(收國, 1115년 ~ 1116년)
천보(天輔, 1117년 ~ 1123년)
1115년 ~ 1123년
예릉(睿陵)[63]
2대
태종
(太宗)
체원응운세덕소공
철혜인성문열황제
(體元應運世德昭
功哲惠仁聖文烈皇帝)
완안오걸매(完顏吳乞買)/
완안성(完顏晟)
천회(天會, 1123년 ~ 1134년)
1123년 ~ 1135년
공릉(恭陵)
3대
희종
(熙宗)
[64]
홍기찬무장정효성황제
(弘基纘武莊靖孝成皇帝)[65]
완안합라(完顏合剌)/
완안단(完顏亶)
천회(天會, 1135년 ~ 1138년)
천권(天眷, 1138년 ~ 1141년)
황통(皇統, 1141년 ~ 1149년)
1135년 ~ 1149년
사릉(思陵)
4대
-
해릉양왕(海陵煬王)[66]
완안적고내(完顏迪古乃)/
완안양(完顏亮)
천덕(天德, 1149년 ~ 1153년)
정원(貞元, 1153년 ~ 1156년)
정륭(正隆, 1156년 ~ 1161년)
1149년 ~ 1161년
해릉왕릉(海陵王陵)
5대
세종
(世宗)
광천흥운문덕무공
성명인효황제
(光天興運文德武功
聖明仁孝皇帝)
완안오록(完顏烏祿)/
완안옹(完顏雍)
대정(大定, 1161년 ~ 1189년)
1161년 ~ 1189년
흥릉(興陵)
6대
장종
(章宗)
헌천광운인문의무
신성영효황제
(憲天光運仁文義武
神聖英孝皇帝)
완안마달갈(完顏麻達葛)/
완안경(完顏璟)
명창(明昌, 1190년 ~ 1196년)
승안(承安, 1196년 ~ 1200년)
태화(泰和, 1200년 ~ 1208년)
1189년 ~ 1208년
도릉(道陵)
7대
-
위소왕
(衛紹王)[67]
완안과승(完顏果縄)/
완안영제(完顏永濟)[68]
대안(大安, 1209년 ~ 1212년)
숭경(崇慶, 1212년 ~ 1213년)
지녕(至寧, 1213년)
1208년 ~ 1213년
-
8대
선종
(宣宗)
계천흥통술도근인
영무성효황제
(繼天興統述道勤仁
英武聖孝皇帝)
완안오도보(完顔吾睹補)/
완안순(完顔珣)
정우(貞祐, 1213년 ~ 1217년)
흥정(興定, 1217년 ~ 1222년)
원광(元光, 1222년 ~ 1223년)
1213년 ~ 1223년
덕릉(德陵)
9대
애종
(哀宗)
[69]
순황제(順皇帝)
완안영갑속(寧甲速)/
완안수서(完顔守緒)
정대(正大, 1224년 ~ 1232년)
개흥(開興, 1232년)
천흥(天興, 1232년 ~ 1234년)
1223년 ~ 1234년
-
10대
소종
(昭宗)
[70]
말황제(末皇帝)[71]
완안호돈(完顔呼敦)/
완안승린(完顔承麟)
성창(盛昌, 1234년)
1234년
-

11. 추존 황제


묘호
시호
성명
재위 기간[72]
능호
비고
시조(始祖)
의헌경원황제(懿憲景元皇帝)
완안함보(完顔函普)
941년 ~ 960년
희릉(熙陵)
태조 추숭, 금의 시조
-
연목현덕황제(淵穆玄德皇帝)
완안오로(完顔烏魯)
960년 ~ 962년
희릉(熙陵)
태조 추숭, 함보의 장남
-
화정경안황제(和靖慶安皇帝)
완안발해(完顔跋海)
962년 ~ 983년
건릉(建陵)
태조 추숭, 오로의 장남
헌조(獻祖)
순렬정소황제(純烈定昭皇帝)
완안수가(完顔綏可)
983년 ~ 1005년
휘릉(輝陵)
태조 추숭, 발해의 장남
소조(昭祖)
무혜성양황제(武惠成襄皇帝)
완안석노(完顔石魯)
1005년 ~ 1021년
안릉(安陵)
태조 추숭, 수가의 장남
경조(景祖)
영렬혜환황제(英烈惠桓皇帝)
완안오고내(完顔烏古迺)
1021년 ~ 1074년
정릉(定陵)
태조 추숭, 석노의 장남
세조(世祖)
신무성숙황제(神武聖肅皇帝)
완안핵리발(完顔劾里鉢)
1074년 ~ 1092년
영릉(永陵)
태조 추숭, 오고내의 차남, 태조의 부친
숙종(肅宗)
명예목헌황제(明睿穆憲皇帝)
완안파자숙(完顔頗刺淑)
1092년 ~ 1094년
태릉(泰陵)
태조 추숭, 오고내의 4남
목종(穆宗)
장순효평황제(章順孝平皇帝)
완안영가(完顔盈歌)
1094년 ~ 1103년
헌릉(獻陵)
태조 추숭, 오고내의 5남
강종(康宗)
헌민공간황제(獻敏恭簡皇帝)
완안오아속(完顔烏雅束)
1103년 ~ 1113년
교릉(喬陵)
태조 추숭, 핵리발의 장남
휘종(徽宗)
윤공극양효덕현공우성경선황제
(允恭克讓孝德玄功佑聖景宣皇帝)
완안종준(完顔宗峻)
-
흥릉(興陵)
희종 추숭, 희종의 부친
덕종(德宗)
헌고홍도문소무열장효예명황제
(憲古弘道文昭武烈章孝睿明皇帝)
명숙황제(明肅皇帝)
완안종간(完顔宗幹)
-
-
해릉양왕 추숭, 해릉양왕의 부친
해릉양왕 폐위 이후 삭탈
예종(睿宗)
입덕현인계성광운문무간숙황제
(立德顯仁啓聖廣運文武簡肅皇帝)
완안종요(完顔宗堯)
-
경릉(景陵)
세종 추숭, 세종의 부친
현종(顯宗)
체도홍인영문예덕광효황제
(體道弘仁英文睿德光孝皇帝)
완안윤공(完顔允恭)
-
유릉(裕陵)
장종 추숭, 장종의 부친

12. 계보


금 황제 계보
세조
(추존)
1. 태조
휘종
(추존)
3. 희종
덕종
(추존)
4. 해릉양왕
예종
(추존)
5. 세종
7. 위소왕
현종
(추존)
6. 장종
8. 선종
9. 애종
2. 태종

13.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 코에이징기스칸 4에도 당연히 등장한다. 시나리오1, 시나리오3에 등장. 망하기 직전 금 장종 ~ 애종 시기로, 영토 자체는 만주와 화북을 장악해 잘 표현한다. 역사적으로는 쇠퇴기이지만 완안진화상이라는 먼치킨이 있는 데다[73] 당시 선진적이고 생산력도 좋은 지역인 화북을 장악했다는 저변도 있고 진천뢰가 있어 이 게임의 공성 종결자인 화포병를 징병할 수가 있어서 플레이하기 쉬운 세력.
  • 문명 5 시나리오 몽골의 비상에서 적국으로 등장한다. 제일 가까운 데에 있어서 1번 타자로 썰리는 역할(...). 비주얼은 람캄행 모습으로 이름이 장종으로 바뀌어서 등장한다. 중국식 발음이 Jin이라서 가끔 진나라로 오역도 한다. [74]
  • 정충악비에서는 악비와 대립하는 악역들인 동시에 드라마의 중요한 한 축으로 등장한다.

14. 여담


금나라의 역사를 다룬 사서인 금사가 2016년 2월 29일, 드디어 4권짜리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75] 다만 가격이 무려 26만원이나 하는 데다가, 전작인 국역 요사와는 다르게 한자 원문이 빠져 있어서 약간 불완전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그래도 척박한 국내 인문학 환경에서 금사 전체가 번역되어 출간된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는 셈.
[1] 여진 통합은 1113년이고 칭제건원은 1115년.[2] 압카이 허허(ᠠᠪᡴᠠᡳ ᡥᡝᡥᡝ, ''Abka-i Hehe'')라는 하늘의 여신을 섬겼다. 여진의 후예 중 하나인 만주족은 남성화된 천신인 압카이 한을 섬기게 된다.[3] 여진 문자로는 다음과 같다. 참조[4] 『동아시아의 역사II 북방민족-서민문화』,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25쪽.[5] 여진 문자로는 참조[6] 여진 문자 표기 참조[7] 실제 요나라의 국호는 딱히 강철을 의식하고 붙인 게 아니라 그냥 거란족이 살던 강인 요하에서 따왔다. 강 이름이 요(遼)이다.[8] '遼'라는 국호는 2대 황제인 태종 야율덕광이 화북으로 진출하면서 기존의 국호였던 '거란'을 漢化한 것에 불과하다. 이후에도 '거란'과 '요'라는 국호가 倂稱되지만, 정식국호는 '대거란국'이다. 또한 강 명칭에서 나왔다는 것은 좀 더 연구해봐야 하는 것인데, 이전시기에 나오는 '遼河''遼水'라는 곳이 지금의 '라오하'와 반드시 동일한 곳이라는 확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오래된 기록에서 '遼'라는 명칭은 '遼山'을 기준으로 한다.[9] 《흠정금사어해》를 보면 청대의 금은 아이신(Aisin)이었다.[10] 만주에 철이 풍부해서 생산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고구려가 다른 2개 국가(신라,백제)보다 영토 확장을 더 많이 할 수 있었던 것도, 비록 3번째에선 멸망했지만 동아시아 강국인 당나라를 상대로 2차례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만주의 철광 때문이다.[11] 말을 쇠사슬로 연결하는 이유는 한 명이 도망치려고 해도 도망을 못치게 하겠다는 전의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느려터진 중장기병이 투사무기에 엄청나게 얻어맞아 대열이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시도였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이렇게 할 거면 애초에 전차를 만드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물론 저정도로 중무장시킨 말로 전차를 끌게만들면 더 끔찍한 속도가 나왔을 것이다. 지형 문제도 있고 속도로도 전차 특유의 충격력을 잡아먹었을테고, 백병전에서도 위력을 장담할 수 없다. 여진족이 기마술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종족이기도 하고.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실제로 말을 쇠사슬로 연결했을 경우 3마리 중 1마리가 전사하면 다른 2마리도 죽은 말의 시체 때문에 행동불능에 빠진다는 점을 들어, "쇠사슬로 연결했다"라는 문구는 실제로 쇠사슬로 연결한게 아니라 단지 말 세 마리가 한 조를 이루어 일사불란하게 행동한다는 점을 비유한 문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12] 의외로 들리겠지만, 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나라들은 이런 전법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동시대 유럽에서도 기사들이 종종 서로의 과 말 사이에 쇠사슬을 연결해서 돌진하기도 했는데, 이런 전법은 원래 보병이 대다수인 적군에게 고도의 충격력으로 밀어붙여서 대형을 무너뜨리는 일반적인 기병 전술을 극대화한 것으로, 보병들이 아예 도망칠 수 있는 여지를 막아서 적의 대형을 확실히 무너뜨리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런 전술은 기병들 간의 템포가 맞아야 효과를 발휘한다는 문제가 있는데, 만일 어느 한 이라도 스텝이 엉키는 순간, 쇠사슬에 연결된 말들이 줄줄이 넘어지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전술이었다. 그래서 금나라건 유럽기사들이건 간에 자주 사용한 전법은 아니다.[13] 송사 三朝北盟會編 卷36, 靖康 원년 2월 조.[14] 읽어보면 송나라가 여진족을 얼마나 무서워하였는지가 잘 드러난다. 심지어 남송의 고종은 약 90만 명의 대군을 모았지만, 불과 6만 명의 여진족 군대가 남침하는 것을 막지 못해서 허겁지겁 남쪽으로 도망쳤고, 그 일에 금나라에 지나친 공포심을 품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금나라에 화친을 청할 정도였다...#[15] 후신격 국가인 청나라는 중원 입관 전에도 요동의 한족들을 복속시키고 투항해온 한족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유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중원 입관 후에도 유교 사당을 훼손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16] 과거 제도를 실시해 관리들을 선발했지만 과거 제도로 등용된 한족 사대부들은 중간직 위주로 등용되었고 최고위직에 등용되기 힘들었다. 최고위직은 10여개 성씨의 여진족 귀족들이 계속 해먹었다. 금나라 말기까지 한족 사대부들을 중하게 쓰지 않았던 점은 국정의 전문성 향상에 지장을 줬을 뿐 아니라 민족 화합에도 악영향을 미쳤다.[17] 다만 이미 장종 때부터 쇠퇴는 드러난 상황. 사실 금 세종 때가 제대로 된 리즈 시절이었지만 화북 왕조인 데다 전성기가 워낙 짧아서.(...)[18] 이미 요나라 때무터 전연의 맹으로 인해 막대한 셰폐를 갖다바치다시피 했고 금나라가 들어서자 강남 개발에 주력하여 '''더 많아졌다.''' 더군다나 남송때는 금나라한테 화북 지역을 빼앗겨 영토도 인구도 줄었지만 그럼에도 남송은 나름 멀쩡했다. 특히 남송의 추정인구만 해도 무려 8천만에 달한다.[19] 이러면 당연히 조공 받는 나라의 상국 노릇을 하기 어렵다. 그래서 고려는 금나라에 명목상으로만 칭신했을 뿐 실제로는 금을 화친 국가 정도로 취급했으며, 금 또한 고려가 명목상 칭신하는 것을 라지만 모른척하며 넘어가고 고려에 그 이상으로 간섭하지 않았다(혹은 못했다).[20] 공(貢)이라는 글자의 뜻이 짐작되다시피 조공을 바친다, 공녀를 바친다 할 때 그 공 자인 만큼 강한 수직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21] 경제적인 요건도 있지만, 그 밖에도 해릉양왕이 저질러 놓은 문제들이나, 거란족의 반란 등으로 금의 사정이 급했다.[22] 인구 조사에 의하면 여진족 인구는 600만인데, 한족이 (금나라 영토니 당연히 화북에만) 4400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여진족 인구는 이것보다 훨씬 더 적은 약 70만 정도일 가능성도 있다.#[23] 그나마 금나라는 이정도나마 여진족의 비율이 있었지 후대인 원, 청의 경우에는 더 심했다. 이들은 화북뿐만 아니라 강남까지 차지해 인구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24] 그러나 남송의 사신이 한탄할 정도로 화북의 한족들 역시 여진족의 의복이나 풍습을 많이 받아들였다. '오랑캐와 다름없어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 문화가 반드시 한 방향으로만 흐른 건 아니었던 것이다.[25] 청나라의 만주족은 문명과의 거리가 가까운 서만주 베이스였기 때문에 중원의 경제체제에 상대적으로 쉽게 적응하는 편이었다.[26] 중원 관내에서 유목이 가능했던 환경이 한때 있었으나, 이는 주나라 때 끝났다.[27]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땅을 가진 여진족과 땅을 가지지 못한 여진족'''이 나타난 것이다. 땅없는 여진족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건 아니면 그냥 부랑민이 되건 해야 할 텐데 양쪽 모두 결국 부유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28] 아이러니하게도 상술한 것처럼 한족들에게 자신들의 옷과 변발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던 만주족의 청나라가 그러한 혼란을 더욱 심하게 겪었다. 청나라는 금나라와 달리 중국 남부 지역까지 완전히 장악했으며 금나라의 여진족보다도 더욱 오랫동안 중원을 다스렸기 때문이다.[29] 이 점은 독특하게도 비슷한 입장이었던 북위와는 다른 점인데 북위도 화북왕조+한화 라는 점에서는 금나라와 유사했지만 한화에 있어서만큼은 북위는 중앙정부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그에 따른 반발도 많았지만 금나라는 중앙정부는 막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는 것, 그리고 이 때문에 북위는 선비족이 세운 국가면서도 한족 위주로 돌아갔다는 것 때문에 북위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이면서도 결국 선비족의 반발을 샀고 금나라는 한족의 반발을 샀다. 그나마 금나라는 이게 멸망의 원인은 아니었는데 북위는 이것이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30] 적어도 거란족은 여진족처럼 북방 유목민족이란 데서는 여진족이 한족보다 더 가깝긴 했다. 원래부터가 국경 하나 넘으면 있기도 했고. 물론 그런 점이 금나라 치하 거란족의 반여진족 감정을 완전히 커버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정도로 따지면 훗날 금나라 치하의 거란족이 대거 투항하게 되는 몽골 제국의 몽골족이 더더욱 거란족과 가까웠다.[31] 여진. 금사에서는 여직으로 기록되어 있다.[32] 결혼. 즉 여진-거란 간의 통혼과 혼혈을 의미한다.[33] 특히 금나라가 몽골을 핍박한터라 당했던 원한을 갚아주려는 목적도 있었다.[34] 참고로 금나라는 이 세 전투 끝에 40~50만명의 군대를 상실했는데, 당시 금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총 병력이 90~100만명 정도였다는 걸 생각하면, 무려 절반 가까이를 여기서 날린 것이다.[35] 물론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금나라는 60만 대군을 일으켜서 진압하려고 했지만, 당시보병 위주인 금나라군은 몽골 기병의 지원을 받은 야율유가 부대에게 참패하였다, [36] 차라리 이 때 남송을 침공하지 않고, 오히려 몽골군 상대로만 싸웠다면 역사가 어느정도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툴루이가 개봉으로 급습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남송이 영토 통과를 허락했기 때문이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37] 사실 기동력에서 상대적으로 우세한 유목민족이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정착민족의 영토를 유린하고 초토화한 사례는 역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애당초 금나라도 수적으로 매우 우세한 요나라를 상대로 기습해서 대승한 출하점 전투과 호보답강 전투로 인해 생겨났다.[38] 재가승이 이들의 후손이란 말이 있다.[39] 물론 이들도 남송이 있는 강남 지역의 한족들보단 한결 대우가 나았다. 이들은 아예 금나라보다도 더 낮은 최하층민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로 인하여 이에 분노한 한족이 원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서 명나라를 건립하는 데 성공하였을 때 몽골인들이 대량 학살당하는 결말을 낳았지만.[40] 가령 금인들이 기호품으로 사용하던 의 수입이 크게 늘어나 돈이 남송으로 흘러가자 적자를 줄이기 위해 자체적으로 차를 재배해봤지만 품질이 좋지 않아서 외면 받고 차 재배를 포기했다.[출처] 요 금의 역사<이계지 저>[41] 전통적인 한족 의상은 우임이다.[42] 원시적 수렵 생활을 하다가 금나라를 세운 생여진과 달리 거란은 금이 세워지기 한참 전부터 이미 중원의 문화를 수용하고 그것을 응용함으로서 수준 높은 불교 문화를 꽃피우고 유학을 장려하고 있었다.[43] 농경민이었던 한족과 발해인을 다스리던 곳[44] 금태종 항목 참조.[45] 장종의 경우 그 솜씨가 북송휘종과 버금간다는 소리를 들었다.[46] 단, 여기서 칭하는 고려는 북흑수가 신하를 청한 고구려였다는 설과 신라-고려가 고향인 금나라의 시조 완안함보라는 이설이 있다.[47] 사실 고려에게도 깜짝 놀랄만한 일이긴 하지만 기록에서 알 수 있듯 군사적으로 근자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진에게도 고려와의 전쟁은 꽤 충격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어 고려에 저항했음에도 오히려 삶의 터전을 짓밟고 자신들의 생존권마저 통째로 잃기 직전까지 내몰렸다. 하물며 이 전쟁이 영토 전체적으로 벌어진 전쟁이 아니라 여진족 강역에서 벌어진 소모적 국지전일 뿐이었다. 당연히 이는 여진에게 뼈 아픈 교훈으로 남아 후대 요와 북송을 연달아 멸망시키며 기세를 탄 시기에도 고려의 털끝하나 건들지 않았다.[48] 다만 금나라는 한반도가 아닌 중원에 그 목적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고려와의 전선은 안정화시키는 것이 그들의 주 의도였다. 고려 입장에서도 금의 군사력이 요와 북송을 연달아 털어먹을 정도였으니 외교적으로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 사대를 결정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고려와의 전쟁이 여진에게도 꽤 공포심을 남겼다는 것이다.[49] 금사 외국열전 고려조 수국 원년 11월.[50] 금사 외국 열전 고려조 천회 2년.[51] 이전까진 서로 호칭 때문에 계속 국서를 거절 해왔다. 인종 3년 5월 임신일 조에는 고려가 보낸 국서엔 표문이라 하지도 않고 신하라고 칭하지도 않았다고 해서 거부했다고 한다.[52] 제후가 천자를 만나러 가는 것을 이른다.[53] 북쪽 요새. 금나라를 비꼬는 것.[54] 고려는 금의 제후이니 금 황제의 신하이다. 그러니 제후가 보낸 신하는 신하의 신하, 배신(陪臣)이다. 하지만 고려는 무시하고 그렇게 쓰지 않은 것.[55] 고려사절요 권십일 의종 장효대왕 을유 19년.[56] 하필이면 의종의 생일을 축하하러 보낸 사신이었다.[57] 고려에서도 사정을 얘기해선 될 일이 아니라고 여겼는지 사신으로 간 유응규는 아예 단식농성을 했다. 처음에는 명종의 정당성을 묻던 금세종도 제후국의 사신이 굶어죽으면 쪽팔릴 일이라 3일째에 책봉을 약속해줄테니 일단 뭐라도 좀 먹으라고 설득했지만 그래도 요지부동 7일째에 유응규가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자 결국 GG치고 승인해줬다. 이 일로 인해 유응규는 고려로 돌아가자 영웅이 되었고 금세종도 이런 유응규의 충성심에 감탄해 사신을 보낼때마다 유응규의 안부를 물었다고(...).[58] 이 때는 아직 칭기즈칸의 통합 전이었긴 했다.[59] 그러나 금 내부의 식량이 부족했던 탓에 금나라 사람들이 압록강을 넘어와 식량을 구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그 탓에 북방에서 밀무역이 흥했다고 한다.[60] 만약 금나라를 도와줬다면 여몽전쟁이 일어나는 시기도 실제보다 더욱 앞당겨졌을 것이며, 고려가 여몽전쟁으로 입는 피해 또한 실제보다 더욱 심각해졌을 것이다.[61] 후손인 만주족이 휘말린 아편전쟁 또한 만약 실제 역사보다 더욱 장기화되어 청나라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다면 청나라 초기의 나선정벌과는 달리 조선 조정에서 그냥 무시해버렸을 가능성이 높은데, 당시의 청나라는 병자호란으로 인한 조선인들의 악감정도 강했을 뿐더러 금나라 말기만큼은 아니어도 그야말로 사방에서 서양 열강이 조여 들어오는 말 그대로 사면초가의 위기였기 때문이다. 나선정벌 당시의 청나라가 중원을 제대로 장악한 뒤였던 것과 달리 아편전쟁 당시의 청나라는 집권층 및 상층부의 부정부패와 계속된 전쟁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탓에 잘못하면 사분오열되어 멸망할 위험성도 컸다.[62] 4번째 사진부터 13번째 사진들까지 시조 완안함보부터 강종 완안오아속까지의 추존 황제 초상화, 15번째 사진부터 역대 황제 초상화.[63] 또는 화릉(和陵)[64] 또는 민종(閔宗)[65] 또는 무령황제(武靈皇帝)[66] 내란 중에 피살. 금나라 최악의 폭군. 사후 서인으로 격하되었다.[67] 또는 위왕(衛王) 혹은 폐황제(廢皇帝). 정변으로 피살당함.[68] 允濟(윤제)에서 永濟(영제)로 바꿨다.[69] 또는 의종(義宗)[70] 정식 추승은 아니고 속자치통감에 따르면 그를 따르던 친족과 병사들이 올렸다고 한다.[71] 이 황제의 재위 기간은 '''하루도 되지 않았다.''' 중국 역사상 '''최단기간 재 위한 황제.''' 항목 참조.[72] 여진족 추장[73] 시나리오1 한정으로 야율초재가 연경의 인재로 나온다.[74] 단, 성조는 다르다. 晉은 4성이고 金은 1성이다.[75] 예전에도 금사 번역본이 있기는 했지만, 내용을 죄다 잘라먹은 것이어서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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