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상업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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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99~1999년까지 존재한 은행으로 우리은행의 전신이다.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cbk.co.kr', PC통신 명령어는 'go cbk'였으며, 노조는 한국노총 금융노련 소속이었다.커가는 꿈 밝은 내일 상업은행
수많은 기업의 주거래 은행이었으며 서울특별시청, 청와대 등 중요한 거래처가 많았다. 청와대를 제외하면 거의 후신인 우리은행에 계승되고 있다.
2. 역사
1899년 민병석 등이 주축이 되어 일본 은행들에 맞서고자 대한천일은행을 발족했다. 지방에 지점을 확대하며 사세 확장을 했고 황실 특혜를 받으며 일본 다이이치은행이 지원했다. 1905년 경제위기 및 화폐개혁으로 휴업하였고 1906년 명목상 황실 추천인 일본인 재정 고문이 추천한 상인들 중심으로 재출범하여 민족 경제 형성에 장애가 되었다. 1911년 조선상업은행으로 행명을 변경하였고 1912년 한성공동창고와 합병하였다. 1924년 조선실업은행, 1925년 대동은행, 1928년 삼남은행 등을 흡수합병하였다.
해방 이후 남북 분단으로 이북의 지점들을 잃어버린 채 1950년 한국상업은행이 되어 1956년 증권거래소에 상장하였다. 1972년 국내 은행 최초로 민영화되었고 1974년 일본 도쿄에 처음 해외사무소를 세웠으며 1982년 은행신용카드연합회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1984년 서울투자금융을 인수한 뒤 1989년 상은리스와 상은시스템, 1991년 상은신용관리를 설립하였다. 1992년 서통투자자문을 인수한 후 1994년 상업증권 및 상업상호신용금고를 제일은행에 매각하였으며 1996년 상은파이낸스를 세웠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예금보험공사가 공적자금을 투입하였고 1998년 한일은행과 대등합병하면서 창립 100주년을 맞던 1999년 한빛은행을 출범하였으며 한국상업은행을 존속법인으로 했다.[2] 상은리스, 상은신용관리, 상은시스템 등 한일은행 자회사들과 업종이 겹치는 자회사들도 합병되었다.
3. 행훈
'''창조혁신, 신의성실, 홍익금융'''
4. 행가
4.1. 구 버전
1959년 창립 60년을 맞아 제정되었으며, 작사는 박철주, 작곡은 김동진이 맡았다.
4.2. 신 버전
1979년 1월 15일부터 창립 80년을 맞아 제정되었으며 작사는 박두진, 작곡은 박재열이 맡았다.
5. 역대 은행장
1921년부터 1952년까지는 '두취'란 명칭을 썼다.
5.1. 대한천일은행
5.2. 조선상업은행
- 이봉래 (1911~1912)
- 조진태 (1912~1924)
- 와다 이치로 (1924~1931)
- 박영철 (1931~1939)
- 호리 타다시 (1939~1945)
- 윤호병 (1945~1946/1948~1950)
- 이종태 (1946~1948)
5.3. 한국상업은행
- 윤호병 (1950~1954)
- 안명환 (1954~1957)
- 신판국 (1957~1960)
- 이필석 (1960~1961)
- 문종건 (1961~1965)
- 전신용 (1965~1966)
- 서진수 (1966~1968)
- 임석춘 (1968~1971)
- 김봉은 (1971~1975)
- 배수곤 (1975~1979)
- 공덕종 (1979~1982)
- 주인기 (1982~1983)
- 김상찬 (1983~1986)
- 박종석 (1986~1988)
- 이현기 (1988~1992)
- 김추규 (1992)
- 정지태 (1992~1998)
- 배찬병 (1998~1999)
6. 자회사
- 상업증권: 1994년 제일은행에 매각됨.
- 상은리스: 1999년 한일리스금융에 합병됨.
- 상업상호신용금고: 1994년 제일은행에 매각됨.
- 상은투자신탁운용: 1999년 한빛은행 출범 후 한빛투자신탁운용-우리투자신탁운용-우리자산운용 등으로 바뀌다가 2014년 키움투자자산운용에 합병됨.
- 상은신용관리: 현 우리신용정보.
- 상은시스템: 1999년 한일은시스템과 합병됨.
- 상은파이낸스: 1999년 폐업.
7. 관계사
- 대창흥업: 행우회 출자 인력/관리업체. 1999년 한일흥업에 합병됨.
8. 스포츠
- 상업은행 야구단 (1962~1993)
- 상업은행 축구단 (1969~1993)
- 상업은행 여자농구단 (1958~1998, 현 아산 우리은행 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