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규상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현재까지 변절 의혹이 일고 있다.
2. 생애
한규상은 1896년 4월 16일 경상남도 진주군 진주면 평안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도쿄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1916년에 졸업하고 진주에서 사립학교 교원을 지냈다. 그러던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걸 알게 되자, 이강우(李康雨)·김재화(金在華)·강달영(姜達永)·박진환·박용근·강상호 등과 만나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10일에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제작하여 비밀리에 배부했다. 이 사실을 눈치챈 일본군경은 경계를 삼엄히 하며 각 학교에 임시휴교령을 내려서 타지방에 사는 학생들에게는 여비까지 주어 강제 귀향시키는 한편, 일본인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정탐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한규상은 이 상황에서도 다른 동지들과 만나 조직을 확대시켰고, 광림학교(光林學校)의 악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졸업한 천명옥(千命玉)·박성오(朴星午)[1] ·김영조(金永祚)·이영규(李永圭) 등에게 시위행진 때의 주악을 부탁했다. 이윽고 3월 18일 오후 1시경, 이영규가 비봉산에 올라 나팔을 불자, 이를 신호로 3개 지역에 흩어져 있던 시위대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악대를 선두로 행진을 시작했다. 일제 헌병대와 경찰대는 이들을 제지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소방대를 투입시켜 물감과 오물을 뿌리고 곤봉으로 군중을 난타했다. 하지만 군중은 아랑곳하지 않고 모여들었고, 오후 4시경 3만 명에 달하는 군중이 경상도청 앞에 집결했다.
그러나 저녁 무렵에 일제 헌병대와 경찰대가 옷에 물감이 묻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3백 명이 체포되었는데, 그 중엔 한규상도 있었다. 그는 1919년 9월 6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천황의 은사령이 있은 직후 출옥했다.
이듬해인 1920년, 한규상은 이봉하, 이종준, 이창익, 장도빈, 김억, 노자영, 전영택, 김성룡, 김동인, 최팔용 등과 함께 한성도서주식회사를 설립해 도서 출판 및 판매, 기타 도서 및 인쇄에 관한 일체의 사업을 주관했다. 그는 한성도서주식회사의 간행물 대다수에 발행인으로 명시되었으며, 1927년부터 1947년까지 한성도서주식회사 회장으로 재직한 이종준은 그의 처남이었고 1947년부터 1955년까지 사장을 지낸 이창익은 그의 여동생 한영숙의 남편이었다.
한편, 그는 출옥 후 총독부로부터 의사 면허를 취득해 경남도립 마산병원 의무 촉탁을 시작으로 관공리로 일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마산에서 공의(公醫)를 지냈다. 공의는 일제 말 지원병 신체검사 등을 수행하며 일제의 녹봉을 받던 의사를 가리키던 명칭이었다. 8.15 해방 후에는 진주도립병원장을 지냈으며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인 진주 3.1 동지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1971년 4월 16일 진주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한규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그러나 일제 말에 마산에서 공의를 지내는 등 일제에게 협조한 것 때문에 현재까지 변절 논란이 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