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팔용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공산주의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최팔용은 1891년 7월 13일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읍 남당리에서 전주 최씨 최중한(崔中漢)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향리 서당인 당남숙(塘南塾)에서 한학을 배웠다고 하지만 그 외에는 그의 집안 내력과 재력 등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이 미비해 확인할 수 없다. 그는 20살이 되던 해인 1910년 신학문을 습득하기 위해 일본에 유학했는데, 이 과정 역시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함경도에서 설립된 학교들 중 한 곳에서 재학 후에 유학을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팔용은 일본에 가서 대학에 입학할 준비에 착수했다가 한일병합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와서 영어와 수학을 독학했다고 한다. 이후 서울로 상경해 1910년 10월 10일에 강화양이 서북협성학교를 인계받고 이를 발판으로 설립한 오성학교(五星學敎)에 들어간 그는 1915년 제5회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일본에서 와세다대학 정경과에 입학했고, 대학 재학 중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이하 학우회)에 가입했다. 학우회는 종래의 도별 유학생 구락부를 기초로 하여 1912년 10월에 조직된 단체로, 전체 한인 유학생을 통할하는 중추기관으로 장기간 유학생의 모든 활동을 관활했다. 학우회는 정기총회나 졸업생 환소애회, 웅변회, 망년회, 신입생 환영회 등 회합이 있을 때마다 배일사상을 고취시켰다. 또한 학우회는 기관지로서 1914년 4월에 <학지광(學之光)>을 창간해 학생으로서의 사회적 의무감과 이에 따른 계몽의 필요성, 서구 문명의 소개, 지식인의 현실 참여 필요성 등을 역설했다.
최팔용은 1917년 2월 4일 학우회 결산총회에서 부원으로 선출되었고, 9월 30일 결산총회에서 평의원과 <학지광> 편집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1918년 2월 10일 정기총회에서도 편집부장을 맡아 2.8 독립 선언으로 수감될 때까지 편집부장을 역임했다. 그는 학지광에 총 5개의 글을 기고했는데, 그 중 1917년에 쓰여진 3개의 글은 사람의 본질과 도덕에 대해 강조하는 내용이었지만 1918년과 1919년에 쓰여진 글은 개인보다는 사회를 고찰하는 내용이었다.
2.2. 2.8 독립 선언
1918년 4월 13일, 최팔용은 동경 YMCA에서 개최한 와세다대학 동창회 주최 웅병대회에 참가해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그는 같은 해 11월 동기방학을 이용해 서춘, 김상덕, 윤창석(尹昌錫) 등과 함께 동경에서 웅변회를 열어 독립론에 관하여 논의했다. 유학생들은 웅변대회에서 위원을 공천하여 뽑은 후 독립운동에 관한 일을 위임하기로 했고, 이때 선출된 인물이 최팔용, 김도연, 서춘, 윤창석, 백관수, 김상덕, 송계백, 이종근, 최근우, 전영택 등 10명이었다.무릇 국가 또는 민족이 멸망한다 해도 반드시 영구히 망하는 것은 아니다. 또 국가, 민족이 융성한다 해도 또한 영구히 융성되는 것은 아니다. 보라! 멸망의 길을 걷던 폴란드는 지금 독립이 되고, 이에 반해서 천하에 위엄을 자랑하던 러시아 제국은 지금 망하지 않았는가?
그 후 영국인이 고베에서 발행하는 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ser)>에서 "세계약소민족동맹회에서 윌슨 대통령에게 약소민족의 독자적 권리를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소식을 보도했고 뒤이어 12월 15일 동경 조일신보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거류하는 한인들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3십만원의 거액을 모집하였다>는 기사를 접하자, 최팔용 등은 12월 28일 명치회관에서 유학생 망년회를 개최해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한국독립론을 주제로 의견을 교환했고, 12월 30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 선언을 발표하기로 결의했다.
1919년 1월 6일 오후 7시, 최팔용은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 웅변대회를 개최했다. 이 웅변회에는 700~800명의 유학생이 참여했고, 연설한 이는 최팔용을 비롯해 와세다 대학의 송계백, 고등사범학교의 서춘, 동경제국대학의 김철수, 정칙(正則)중학교의 김상덕, 동양대학의 이종근, 고등상업학교의 최근우였다. 최팔용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14개조에 의하여 우리 조선도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취지의 인사말을 한 후, 이 회의 개최목적에 대해 민족자결주의를 응용하고 민본주의를 채택해 일본의 군국주의를 타파하고 조선의 독립을 상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1월 7일, 독립운동대회가 열렸다. 이때 국민대회를 열고 그와 동시에 외국 대사, 공사에게 독립운동에 관하여 서면을 낼 것을 결의했다. 이후 독립운동에 관한 토의를 재개하려 했지만 일본 경찰이 회장에 들어와 회를 해산하고 최팔용을 비롯한 10명의 임시실행위원을 포박하여 경시청에 구류했다가 풀어줬다. 1월 중순, 대표자 제1차 회의가 조선기독교청년회에서 열렸다. 이때 회의에 참여한 이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분열의 모습을 연출하고자 실행위원 중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이 탈퇴 성명을 발표하게 했다. 이에 일본은 다른 실행위원들에게만 감시하게 되었고, 최팔용은 일제의 감시를 따돌린 채 독립선언 준비에 착수했다.
최팔용은 독립선언서 중 국문과 일문은 이광수에게 맡겼고, 영문은 전영택에게 맡겼다. 그리고 이렇게 번역한 독립선언서는 일본의 각 기관 및 각 외국공사관에 보내기로 했으며, 자금 문제와 관련해 부책자로 김철수, 김상덕을 지정하고 국내파 대표로는 최근우를, 국외파 대표로는 장덕수와 이광수를 선정해 대표자 상호간의 연락과 일반 유학생과의 연락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는 상하이에 있는 장덕수와 비밀리에 연락해 대표로서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하려고 했지만, 마침 상하이, 베이징 등지를 거쳐 동경에 온 이광수로부터 김규식 박사가 상하이에서 파리로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그는 자신이 대표로 파견되는 걸 포기하고 김규식을 자신들의 대표로 승인했다.
2월 1일, 최팔용은 여운형의 지시로 동경에 온 여운홍을 만나 해외 동향에 대해 협의하고 여운홍에게 2.8 독립 선언에 대해 알려줬다. 이윽고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학우회의 결산 총회가 있다는 명목하에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대회가 열렸다. 회장인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한 후, 사회를 맡은 최팔용이 대회의 명칭은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바꾸고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했다. 최팔용은 백관수를 지명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했고, 김도연에게 결의문을 읽게 했다. 그리고 최팔용 외 10명이 서명한 활판 인쇄의 조선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이날 조선청년독립단은 <민족대회소집청원서>, <독립선언서>, <선언서에 부친 결의문>이라는 인쇄물을 각 대신, 귀족원, 중의원, 각국 대공사, 조선총독부, 각 신문잡지사 등에 보냈다.
최팔용이 선언서를 단상에 걸고 실행방법을 발표하자, 모여있던 관중들이 열광했다. 그들은 독립을 요구하는 혈서를 일본의회에 제출할 것에 동의했고, 이후 가두시위 행진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경찰이 들이닥치면서 무산되었다. 경찰들은 대회장을 포위한 뒤 최팔용을 비롯한 주요 인사 30명을 체포했다. 이후 10명의 서명위원과 기타 17명은 함께 감옥에 갇혔고, 2월 10일 동경지방재팜소 형사과에 송치되었다. 그들은 내란죄로 몰렸지만 나중엔 출판법2조 위반이 적용되었고, 2월 15일 1심 재판에서 최팔용과 서춘이 금고 1년, 김도연, 김철수, 박한수, 윤창석은 금고 9개월, 송계백, 김창규, 이종근은 금고 7월 15일 형을 선고받았다.
최팔용 등은 이에 불복공소해 3월 2일에 공소심을 받고 형이 그대로 이어지자 다시 상고해 법정투쟁을 벌여 3월 12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최팔용 외 9명의 공판이 열렸지만 한인 학생 2백여 명이 방청하려 몰려왔기 때문에 인정신문만 하고 17일로 연기했다. 이후 재판부는 최팔용, 서춘에 대한 제1심의 징역 1년을 취소하고 각각 징역 9개월에 처했고, 나머지는 공소를 기각했다. 이후 최팔용은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어 9개월 간 복역했다.
2.3. 계몽 운동
최팔용은 1920년 3월 26일에 형기를 마치고 출감한 뒤 국내로 귀환했다. 그의 동정은 언론 매체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일간 신문들은 그가 열차 편으로 경성에 도착해 닷새간 체류했다가 다시 경성발 열차로 귀향하는 일정을 낱낱이 보도했고, 열차가 함흥역에 도착하자 환영객 50~60명이 마중나왔다. 그날 저녁에는 만찬에 초대하려는 지인들의 권유 때문에 귀향 일정을 하루 미뤄야 했고, 다음날인 4월 25일 버스 편으로 고향 홍원으로 출발할 때도 전송객 수십 명이 그를 둘러쌌다.
고향에 돌아온 최팔용은 여러 청년들과 함께 홍원청년구락부를 조직해 5월 15일 창립총회를 개최했는데, 이 때 부원이 된 이가 400여 명이었다. 그는 홍원청년구락부를 통해 여러 웅변회를 주최하고 운동회를 거행해 부원들에게 독립에 대한 민족의식을 심어줬으며, 방학 동안 귀성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간친회를 개최해 홍원 지역 출신 청년들간의 친목을 도모했다. 그러나 홍원청년구락부는 독립운동금 모집 혐의로 1921년 3월 해산되었다.
1921년, 최팔용은 조선인의 교육이 급선무라고 여기고 서울로 상경해 한성도서주식회사에 들어가 <학생계>를 주간했고, <학생계>에 여러 글을 기고했다. 그리고 여러 차례의 강연회를 가져 정의롭고 진보적인 사회로 바꾸어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고향인 홍원을 기점으로 강연 활동을 시작했다가 서울, 평안도, 함경도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강연회를 열었다. 그러다가 1921년 11월 7일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이틀 후인 11월 9일에 풀려났다.
2.4. 고려공산당
최팔용은 1920년 가을 장덕수, 김철수 등 2.8 독립 선언 때 뜻을 같이한 이들과 함께 최린의 집에 모여서 일본제국주의를 조선에서 몰아내고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는 목적하에 사회혁명당을 조직했다. 그리고 1921년 5월 20일부터 23일에상하이 프랑스 조계 안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고려공산당의 재무와 내지 간부를 담당했다. 내지 간부는 조선 국내의 공산주의 각 단체를 지도할 '전국총회'의 간부진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후 1922년 4월 1일부터 6일간 청년연합회 제3회 정기총회가 열렸는데, 그는 대회 5일째 회의에서 장덕수, 김사국 등과 함께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고려공산당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이보다 앞서 김립과 박진순이 모스크바로부터 40만 루블의 자금을 상하이로 가지고 와서 국내에 송금했다. 그런데 그 자금 대부분이 장덕수 수중에 들어갔고 공산주의 활동 이외의 일에 소비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돈이 공산당선전비로 되어 있었지만, 그 자금을 인수한 이들의 다수는 '조선노동공제회'와 '조선청년회연합회'의 간부급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최팔용, 오상근, 장덕수 등이 그 자금을 인수해 경상, 충청도의 각지에서 순회 강연을 했고, 기관지를 발행했다.
이러한 상황에 분노한 서울청년회는 이 사건을 '사기공산당 사건'으로 지칭하고 사건 관련자들을 제명할 것을 요구하며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청년연합회에서 탈퇴하겠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제명안이 부결되자, 서울청년회는 4월 3일 긴급임시총회를 소집하여 8개 지방 청년 단체와 함께 청년연합회에서 탈퇴했다. 이에 조선청년연합회 제3차 정기총회는 최팔용, 장덕수, 오상근을 조선청년연합회 간부진에서 추방했다. 그리고 2달 뒤인 6월 13일에 다시 임시총회가 소집되었고, 최팔용은 서울청년회에서 제명되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간 최팔용은 1922년 11월 2일 오후 10시경 자택에서 병사했다. 향년 31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최팔용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