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대학교/역사

 





1. 개요
2. 한성여자대학(1972~1977)
3. 한성대학(1978~1992)
4. 한성대학교(1993~현재)
5. 관련 문서


1. 개요



'''한성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설립자는 우촌 김의형이다.
1945년 설립된 재단법인 한성학원[1]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대학의 역사보다 캠퍼스의 역사가 더 길다.[2]
현재의 한성대와 한성여중,여고는 일제강점기 시대 여학생들에게 기예 등 가정과목을 가르치던 학교인 경성여자기예학교를 우촌 김의형 박사가 해방 후 인수하여 세웠다.[3]따라서 대학 건물 중에는 한성대 설립 '''이전'''에 만들어진 건물도 있다. 이후 학교법인으로 바뀐 한성학원은 한성대 바로 옆에서 한성여중과 여고를 운영하고 있다.
한성대학교 상상관 1층에 한성 아키비움이라는 역사관을 운영하고 있다.

2. 한성여자대학(1972~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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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여자대학(현 한성여자고등학교 교사) 교사 신축 당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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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정원에서 내려다 본 한성여대(19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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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여자대학 1회 신입생 모집공고(1973년)'''
1972년 한성여자대학이라는 이름의 4년제 야간 단과대학으로 설립되었다.
한성대는 설립 초기에 행운이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전술한 대로 1972년에 설립되었는데 이는 서울지역 신규 대학설립 '''막차'''를 탄 것이다. 이후 강력한 수도권 팽창 억제정책이 시행되면서 서울지역에는 신규 대학의 설립은 물론 기존대학의 정원증가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4] 2~3년만 늦었어도 한성대학교는 설립되지 못하거나 인수도권 대학으로 설립되었을 것이다. 이는 서울 강남에 한성대보다 2~3년 늦게 대학을 설립했으나 규제에 묶여 정규대학이 아닌 4년제 학력인정 학교로 제한되어 경기도 용인으로 옮겨 정식 대학이 된 강남대학교, 대학 설립 논의가 꽤 오랫동안 오고 갔으나 시기를 놓쳐서 결국 인서울이 아닌 대전에 대학을 설립한 배재대학교 등과 비교된다.
하지만 개교 초기부터 10여 년 동안은 대학이라고 보기에는 좀 미흡했다. 지금 한성여고 교사로 사용하고 있는 7층 건물이 개교 당시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대학 건물로 사용했던 '''유일한 건물'''이었다. 건물 하나, 운동장 하나짜리 대학(?)시절을 보냈던 것. 당시엔 지금의 한성대학교 부지에 한성여중, 한성여고가 있었다. 넓은 운동장[5]에 이미 1960년대에 만들어진 정규 규격 실내체육관[6], 50m*25m 정규 규격 수영장 및 어린이용 보조수영장까지, 여중,여고 치고는 크고 아름다운 교정이었다. 그래서 한성여자고등학교 부속대학이라는 농담도 있었다. [7]

3. 한성대학(1978~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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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대학 종합관(현 한성여자중학교 교사) 전경(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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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대학으로 교명 변경 후 최초 신입생 모집공고(1978년)'''
1978년 남녀공학화하여 한성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서울지하철 4호선 삼선교역에서 한성대입구역으로 역명 변경을 계기삼아 대학 당국은 대학 확장에 적극적으로 힘쓰게 되어, 1986년 중,고교부지로 대학이 이전하고 한성여고는 당시의 한성대 건물로 가게 된다. 이전 직후 건축을 시작해 1988년에 완공한 건물이 지금 대학본관으로 쓰고 있는 우촌관. 이후 구 한성여고 수영장 부지에 과학관(현 공학관)을, 체육관 옆에 창의관을, 운동장 스탠드 부지에 연구관을 건설하면서 오늘날의 한성대 캠퍼스의 틀을 짜게 된다.
그러나 인지도는 아직 낮아, 1988년 상황을 기준으로 대학 구내에 외부 기관, 이를테면 방학 TOEIC 특강 현수막이라든가, 기업체 홍보포스터 같은 것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참고로 동숭동에 있는 방송통신대학교 구내에서도 볼 수 있었다. 지하철 역명이 한성대입구역으로 바뀌었을 때 지역 주민들조차 처음 접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4. 한성대학교(1993~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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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대학교 가을 전경(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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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대학교 1998년도 신입생 모집공고'''

'''2003년 한성대학교 홍보영상'''
1993년 정규 4년제 대학으로 정식 승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후 한성대의 인지도가 크게 높아진 이유는 1994년 수능제도와 함께 일명 본고사로 불리웠던 대학별고사의 시행 때문이었다. 15년 만에 본고사가 부활되어 대부분의 대학에서 본고사를 본다고 했는데 준비상의 문제로 대부분의 대학에서 본고사를 포기하여 결국 (1994년 당시) 9개 대학만이 본고사를 보았는데 문제는 그 대학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대부분 명문대라고 불리던 8개의 대학과 한성대학교. 그 덕분에 본고사를 치르는 9개 대학과 그 외 대학을 분리해서 게재한 대입 배치표에서도 커다란 홍보효과를 보았고 당시 상위권 대학들과 함께 주류 언론에 많이 나오게 된 한성대는 명문대학과 함께하는 대학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인지도 급상승이라는 결론을 얻어낼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과정과 언론보도로 인해 1995년 대입부터는 웬만한 중상위권 대학들이 모두 본고사를 보게 되었다. 이 94학번 본고사 시행이야말로 한성대학교에서는 신의 한수가 된 셈. 응답하라 1988에서 극 중 TV뉴스가 나오는 장면에 한성대 본고사 뉴스가 송출되고 있는 장면이 있었다.

5. 관련 문서


한성대학교/캠퍼스
[1] 부산의 사학법인인 한성학원과는 별개이다. 부산 한성학원 산하 대학은 경성대학교이다.[2] 위 대학 로고에서 since 1945는 재단 설립년도를 의미한다. 사실 지금 내로라 하는 명문대학도 중, 고교 등의 중등교육기관, 심지어 유치원 설립부터 대학의 기원으로 삼는 곳이 많으므로 한성대학교가 1945년에 설립되었다고 우겨도 이상하지 않다.[3] 경성여자기예학교는 교장을 비롯, 모든 교원과 학생들이 일본인이었으며, 해방 이후 미군정의 불하를 통한 것이 아닌, 우촌 김의형 박사가 당시 일본인 교장에게 직접 시설을 인수받은 것이다. 따라서 일부 적산에 기반한 학교 역사를 가지고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현재 한성학원 산하 학교들이 경성여자기예학교의 역사를 계승한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4] 신규 대학설립은 지금도 어렵지만 기존대학의 정원증가는 몇몇 핑계를 대서 1990년대 초반부터 특정 학과에 한해 특정 상황에서 일부 허용되었다. 지금은 상위권대학 중심으로 내실을 기하기 위해 오히려 알아서 정원을 줄이고 있는 실정이다.[5] 현재 미래관 부지가 여중운동장, 현재 운동장이 여고운동장[6] 이 체육관은 이후 한성대가 냠냠. 그러다가 2000년대에 같은 위치에 개축했다[7] 연세대, 고려대를 위시한 소위 명문대학도 대학 설립 이후 상당 기간 동안 건물 하나, 심지어 교실 하나짜리로 버텼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 생긴 대학들도 마찬가지. 어떻게 보면 신설 대학이 거쳐야 할 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