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수(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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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성수(韓聖洙)
이명
한성수(韓成洙), 이상일(李相一)
생몰
1920년 8월 18일 ~ 1945년 5월 13일
출생지
평안북도 신의주시 고진면 낙청동
사망지
중국 난징 일본 육군 형무소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초년기
3. 한국광복군
4. 최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초년기


한성수는 1920년 8월 18일 평안북도 신의주 고진면 낙청동에서 한일현(韓一賢)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한정규(韓正奎)는 신의주 일대의 부호로, 1919년 한재(旱災) 때 정주 지역 이재민들에게 열차로 구호 양곡을 실어 구제한 자선사업가였으며,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오산학교 재단에 거금을 기부했고 이승훈과 함께 오산학교의 재단 이사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한성수는 이런 조부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민족의식이 투철했다.
1939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한성수는 1941년 일본 전수대학(專修大學) 경제학과에 유학했다가 철산 출신의 정숙저(鄭淑姐)와 결혼했다. 정숙저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전수대학 재학 중 독립운동 관련 서적을 읽다가 적발되어 정학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던 1944년 초, 그는 학도병(學徒兵)으로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갔다. 정숙저 여사는 그가 끌려가기 전날 가족들에게 "반드시 탈출해서 광복군에 찾아갈 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3. 한국광복군


1944년 2월 16일 중국 강소성 쑤저우 인근의 일본군 부대에 배속된 한성수는 탈출 기회를 노리다가 그해 3월 26일 야밤에 오건, 이종무와 함께 막사를 탈영해 안휘성 부양에 있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합류했다. 제3지대는 김학규가 한인 청년들을 대대적으로 초모하여 창설한 부대였다. 그는 광복군에 입대한 후 광복군 대원들의 교육과 훈련을 위해 마련된 한국광복군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에 입교했다. 당시 그와 함께 한국광복군훈련반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던 김우전은 그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80cm에 가까운 늘씬하고 건장한 키, 항상 동지들에게 다정했던 과묵하고 부드럽고 온유했던 마음, 앞장서서 솔선수범하여 동지들에게 존경받던 성품, 아름답고 풍성한 목소리로 이태리 명곡을 불러줄 때의 열정적인 모습, 무엇인가 사색할 때의 고고한 인품과 철학자다운 인상, 문제의 토론에는 철두철미한 강인한 자세, 그러면서도 멋과 낭만에 가득찬 동지애...(후략)

1944년 10월 22일 47명의 교육생들과 함께 한광반 제1기를 졸업한 한성수는 중국군 소위로 임명되어 다른 11명과 함께 안휘성 부양에 잔류해 제3지대의 기간요원이 되었으며, 적 후방 활동 및 초모공작을 수행해 많은 한인 청년들을 초모해 훈련시켰다. 그해 11월, 그는 제3지대장 김학규로부터 화남 지역 공작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에 그는 홍순명, 김영진(金永鎭)과 함께 상하이로 파견되어 한인 장병들을 은밀하게 모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일제는 상하이에 침략 거점을 마련한 뒤 상하이에 거주하는 친일 한인들을 동원해 정내회(町內會), 인조(隣組), 보갑제(保甲制) 등의 그물망 같은 상호감시체제를 구축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철저하게 색출하고 있었으며,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상으로 흑색선전에 동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성수는 이런 위험한 곳에서도 박윤석(朴允錫), 허암(許岩) 등 10여 명의 한인 청년들을 포섭하고 박윤석의 집에 공작거점을 마련한 뒤 초모 공작을 진행했다.
그러나 한성수는 이 시점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상하이의 한인 갑부 손창식(孫昌植, 창씨명 孫田昌植)을 찾아가 김규식 지대장이 써준 메모를 건네면서 군자금 제공을 요청한 것이다. 손창식은 1932년경에 상하이로 건너간 뒤 '상해정밀기계공예' 기업을 운영하면서 일본군에 무기를 공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단체에 군자금을 지급하며 이중적인 생활을 한 인물이었다. 한성수가 손창식을 찾아갔던 건 이런 이력 때문이었겠지만, 손창식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상해거류조선인회(上海居留朝鮮人會)와 계림회(鷄林會)의 평의원,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일본군에게 여러 차례 거액의 국방헌금을 바쳤으며, 신사참배, 조선 징병제 실시 감사 축하식 거행, 의용대 및 국방부인회 결성 등을 주도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보를 보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독립 군자금을 지원하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손창식은 한성수의 독립군자금 지불을 일언지하에 거부했고, 한성수는 손창식을 방문한 직후인 1945년 3월 13일 동지 홍순명, 김영진, 박윤석, 허암 등과 함께 상하이 주둔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체포된 데엔 손창식과 동향인 김사해(金四海)의 밀고가 있었다고 한다.

4. 최후


한성수는 체포된 뒤 가혹한 고문을 받고 7330부대 임시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정숙저 여사가 한성수의 동료 김영진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한성수는 일본어를 할 줄 알았지만 자신은 조선인이기 떄문에 조선 말만 한다며 자신과 대화를 하고 싶으면 통역을 세우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헌병대는 부득이 일본어 통역을 불러서 재판을 속개했다. 재판장이 "너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학병 출신인데 왜 국어(國語)를 쓰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들은 일본어를 국어라 하지만 나의 국어는 아니고 원수의 말이다. 나의 국어는 오직 한국말일 뿐이다.

또한 김영진의 회고에 따르면, 재판장이 "대동아 전쟁을 어떻게 보는가? 너희들은 대일본 제국이 이번 전쟁에 승리할 것을 믿고 있겠지?"라고 묻자, 한성수는 준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일본은 이번 전쟁에서 기필코 패전하고야 만다. 미·영·중·소 등 연합국의 합동작전으로 태평양 방면은 물론 인면(印緬)전선과 중국전선에서 참패하고 머지않아 무조건 참패할 것이다. 그때 가서는 대한민국을 독립시켜 주지 않은 것을 후회할 것이며, 한국 독립군들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무수히 희생을 당한 것과 같은 고초를 침략자인 너희들도 당하고 말 것이다.

한성수는 군대를 탈영하고 광복군에 가담해 이적 행위 및 군 기밀을 누설했고 치안유지법을 위반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동지들은 3년 이상 5년 이하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후 그는 난징 일본육군형무소로 이송되었다가 1945년 5월 13일 참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25세. 그의 유해는 일본 도쿄에 있는 우천사(祐天寺)에 송환되어 방치되었다가, 1971년 11월 20일 태평양전쟁에서 희생된 한인의 유골 봉환 운동을 벌이던 정기영(鄭琪永) 등의 노력으로 한국에 봉환되어 부산 청룡등산 공원묘역을 거쳐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한성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성수의 미망인 정숙저 여사는 남편이 죽은 뒤 평생 재혼하지 않고 아들과 함께 홀로 지내다가 1985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1990년 아들이 미국에서 먼저 세상을 떠났고, 2000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자신이 20살 때 남편과 결혼했고 4년만에 과부가 되었지만 개의치 않다면서, "20대에 과부가 됐다고 남편 복이 없단 말인가요. 남편 덕에 이만큼 따뜻하게 살고 있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