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1864)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승훈
李昇薰'''

'''출생'''
1864년 3월 25일
조선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1]#
'''사망'''
1930년 5월 9일(향년 66세)
평안북도 정주군
'''국적'''
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
'''본관'''
여주 이씨(驪州 李氏)
'''별칭'''
본명(本名)은 이인환(李寅煥)
아명(兒名)은 승일(昇日)
자(字)는 승훈(昇薰)
아호는 남강(南岡)
'''직업'''
독립운동가, 교육가, 사업가
'''가족'''
이석주(부), 홍주 김씨(모), 이승모(형)
'''학력'''
오산학교(설립)
'''종교'''
개신교(장로회)
'''조직'''
만민공동회, 신민회, 자면회, 조선 교육 협회
'''의거'''
3.1 운동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
1. 개요
2. 생애
2.1. 조선의 사업가
2.2. 교육계몽운동
2.4. 이후의 행적
3. 성격과 일화
4. 대중매체에서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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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승훈(李昇薰, 1864년 3월 25일 ~ 1930년 5월 9일)은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 교육자. 호는 남강. 본관여주(驪州). 본명은 이인환이다.

2. 생애



2.1. 조선의 사업가


이승훈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가난한 상민 신분인 이석주(李碩柱)이고 어머니는 홍주 김씨다. 그는 생후 8개월만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6살 때 고향을 떠나 작은 마을인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했다. 이곳은 평양에서 의주로 가는 큰 길에 자리잡은 장시(場市)였으며, 놋그릇을 만드는 유기업(鍮器業)이 크게 발달한 고장이었다.
이승훈은 두뇌가 아주 명석해 7살 때 서당을 다니기 시작했고, <사략>, <무제시>, <소학>, <맹자>, <고문진보후집(古文眞寶後集)> 등을 익혔다. 그러나 10살이던 1973년에 어머니 대신 자신을 길려주던 할머니와 아버지가 2달 간격으로 별세하면서, 그는 5살 위의 형 이승무와 함께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되었다.
결국 더이상의 학업을 중단한 이승훈은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부친의 친구이며 유기상(鍮器商)을 하며 부자가 된 임일권(林逸權)을 찾아갔고, 임일권은 자신이 경영하는 유기점에서 잔심부름하는 사환으로 기용했다. 일일권은 돈으로 직임을 사서 박천군수의 차함(借啣)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임박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는 납청정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으며, 일꾼들을 존중하고 주변인들을 잘 대우했다고 한다. 이승훈은 이러한 그의 배려 덕분에 시간이 남을 때 책을 읽고 글씨를 쓸 수 있었다.
그는 틈틈이 임일권의 상술을 배워 유기에 대한 지식과 상거래 기술을 습득했다. 그는 주인이 시키기 전에 미리 알아서 일을 척척 해내, 임일권이 "저 아이에게 무엇을 하라고 시켜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임일권은 그런 그를 매우 총애했고, 유기공장에서 유기 제조과정을 견습하게 하고 유기행상으로부터 유기 그릇을 판매하는 비법을 전수받게 했다.
이승훈은 사환으로 일한지 3년 후 방문 판매원 겸 수금원이 되었으며, 가게와 공장의 경리 일을 맡기도 했다. 15살 때인 1878년, 이승훈을 평소 눈여겨보던 이도제(李道濟)가 자신의 딸 이경강(李敬康)과 그를 결혼시켰다. 이후 이승훈은 점원 생활을 접고 본격적인 상인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보부상이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지역 일대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다.
24세 때인 1887년에는 임일권이 군수 자리를 산 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이승훈에게 공장과 상점을 맡기려 했다. 그의 정직성과 성실성을 높이 사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훈은 자신의 사업을 일으키기 위해 이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일정 자본을 모은 후에는 정주 인근의 납청정(納淸亭)에 유기공장을 세우고 유기상점을 차렸으며, 평양에는 유기상점 지점을 설치했다.
이승훈은 유기상점과 유기공장에 소요되는 자금 일부를 철산 갑부 오희순(吳熙淳)으로부터 융통하였다. 오희순은 평안북도 삭주군 군수직을 돈으로 사서 오삭주(吳朔州)라 고도 불렸는데, 강직하고 신의를 존중하는 이승훈을 크게 신뢰했다.
신용수 교수의 논문 <남강 이승훈의 생애와 기업경영이념>에 따르면, 이승훈은 거짓을 부패 이상의 부덕으로 여기고 모든 악의 근원으로 간주하고 신용을 중시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경영하는 유기공장의 종사자들을 가족처럼 대했고, 공장경영방법은 근대적으로 개선하는데 앞장섰으며, 노동환경을 일신하여 근로조건 개선에도 힘썼다고 한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그의 사업은 대위기에 직면했다.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가 전쟁터로 변했고, 납청정의 상점과 공장은 물론 평양에 개설한 유기상점 지점마저 파괴되었다. 사업에 큰 타격을 입은 이승훈은 덕천에서 1년간 피난 생활을 한 후 사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사업 자본을 모으기로 하고 철산의 갑부 오희순을 찾아갔다.
오희순에게 돈을 빌렸던 많은 이들이 종적을 감춘 것과는 달리, 이승훈은 오희순에게서 빌린 자본과 이자를 계산하여 자신의 총부채액이 현재 얼마라는 명세서를 내밀었다. 오희순은 이승훈의 진심을 이해하고 빚을 탕감해준 것은 물론, 재기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했다. 이승훈은 납청정의 유기공업을 독점하는 한편, 평양에 점포를 개설하고 진남포에도 점포를 신설했다. 그렇게 2~3년간 노력한 끝에, 그의 사업은 다시 번창했다.
재기에 성공한 뒤, 이승훈은 '상놈' 취급에서 벗어나 양반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1899년 납청정에서 용동(龍洞)으로 이사한 뒤 친족을 모아 집성촌을 만들려 했다. 자신의 집과 형의 집을 각각 짓고, 다른 친척들도 같이 모여 살게 해 여주 이씨 문중을 만들었다. 또한 그는 양반으로서의 신분 상승을 위해서는 자제들을 공부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서숙(書塾)을 설립하여 한학을 공부시키는 한편, 장성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공장에서 제작된 유기상품을 맡겨 행상을 하게 하여 자력으로 생계를 꾸려가도록 했다.
1901년, 이승훈은 김인오, 윤성운 등과 함께 합자하여 평양에 무역업을 위한 상사(商社)를 차렸고, 진남포에도 지점을 설치했다. 자신은 국제무역상으로 변신해 평양과 서울, 그리고 경인선 개통과 함께 서울과 인천을 자주 왕래하며 새로운 사업을 개척해 나갔다. 그의 상업활동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고, 주로 해외 수입품을 취급했다. 사업이 번창한 뒤, 이승훈은 납청정의 유기공장과 유기상점을 조가 이자향에게 일임하고, 진남포의 지점은 김정민에게 맡겼다.
1902년에는 새로운 화폐인 백동화(白銅貨)의 발행으로 화폐가치의 변동이 심했는데, 이로 인해 지방에 따라 그 구매력이 달랐다. 특히 상평통보의 구매력이 서울과 부산 간에 큰 차이가 있었는데, 서울의 1냥은 엽전의 유통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부산에서는 2냥의 가치와 맞먹을 정도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승훈은 두배에 달하는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 지체 없이 서울에서 1만 냥을 수집하여 배에 실어 부산으로 출항시켰다.
그러나 이 선박은 목포 근해에서 일본 영사관 소속 선박에 부딪혀 침몰했고, 그 바람에 1만 냥이 고스란히 수장되고 말았다. 이승훈은 일본 영사관을 상대로 2만 냥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오랜 시일이 지난 후 본전 1만 냥을 받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물론 침몰한 선박에 대한 배상금도 받지 못했다.
그러던 1904년 2월 8일부터 1905년 가을에 이르기까지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이승훈은 군수품이 폭등할 것을 예상하고 군인들의 배낭과 군화 등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쇠가죽 수십만 점을 대거 구입해 용산창 모래벌판 위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러일전쟁이 격화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일본이 일찍 승기를 잡아서 곧 종전이 되어버렸고, 이승훈은 쇠가죽을 헐값으로 처분할 수 밖에 없어 큰 손해를 봤다. 이로 인해 재산을 탕진한 그는 실의에 빠진 채 낙향했다.

2.2. 교육계몽운동


이후 서우학회(西友學會) 회원으로 참여하던 1907년 8월, 안창호의 강연회에 참석한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후 그는 개인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민족의 부흥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금연, 금주와 단발을 결행했고,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단체 신민회에 가담하여 신민회 평북 총감(總監)이 되었다. 또한 온 민족이 상놈이 되는 판국에 어떻게 양반이 될 것이며, 본래 상놈이야 두말할 것이 있겠냐며 집안을 양반가문으로 일으켜 세우려던 뜻을 접었다. 그리고 용동으로 돌아와서 8월에 서당을 고쳐 소학교 과정의 신식 교육기관인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설립하여 김덕용 선생을 초빙해 산술, 수신, 역사, 지리, 체조 등의 과목을 가르치게 했다.
1907년 12월 24일, 이승훈은 거의 전 재산을 들여 제적산 자락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는 오산학교를 세운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이 학교를 경영하는 것은 오직 우리 민족에 대한 나의 책임감 때문입니다. 내가 학교를 경영하거나 그 외 사회의 모든 일을 할 때 신조로 삼고 나가는 것은 첫째, ‘민족을 본위로 하라’는 것과 둘째, ‘죽기까지 심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으로 어떠한 곤란과 핍박과 위험이 앞에 있더라도 싸워 이기고 또 위안을 얻습니다."

윤경로, <105인 사건과 신민회 연구>, p.52.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신속하게 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던 박승봉의 도움이 컸다. 그는 헤이그 특사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평안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해외공관 근무 경험이 있던 그는 이미 서구문명과 기독교를 접한 바 있어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이승훈이 그에게 오산학교 설립 도움을 요청했을 때, 오산 근처의 향교와 승천재를 알선하고 부지를 사용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2]
오산학교 개교식은 학생 7명을 모아놓고 진행되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지금 나라가 날로 기울어져 가는데 우리가 그저 앉아 있을 수는 없다. 이 아름다운 강산, 선인들이 지켜 내려온 강토를 원수인 일인들에게 맡긴다는 것이야 차마 있어서는 안 된다.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일이다. (중략) 내가 이 학교를 세우는 것도 후진을 가르쳐 만분의 일이라도 나라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오늘 이 자리에 일곱 명의 학생밖에 없으나 이것이 차츰 자라나 70명 내지 700명에 이르는 날이 올 것이니, 일심협력하여 나라를 빼앗기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부탁한다."

윤병석, <남강 선생의 독립사상: 민족주의 교육과 신민회 및 3.1 운동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p.24.

이승훈은 명망 높은 유학자인 백이행을 찾아가 교장이 되어줄 것을 설득해 수락을 받아낸 뒤, 실제 학교 운영은 교감인 자신이 도맡았다. 학교 운영을 위하여 처음에는 대부분의 재산을 처분하고 가족들의 호구지책용으로 일부 땅을 남겨두었었다. 그러나 오산학교 교사들에게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처지가 되자 그 땅마저 모두 팔아 학교 재정에 보탰다.
최초의 오산학교 교사들은 여준, 서진순이었으며, 이후 유영모, 이광수, 신채호, 조만식, 이종성 등이 교사로 초빙되어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역사, 지리, 수학뿐만 아니라, 법학통론, 헌법과 같은 수준 높은 과목도 가르쳤다. 오산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독립심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모든 학교생활의 바탕을 자율(自律)에 두었다. 기숙사는 자치적으로 운영했다. 기숙사 규정이나 조직, 학생들의 풍기단속까지 학생들 스스로가 규정을 정하고 감독위원을 임명해 생활해 나갔다. 시험은 학생들의 양심을 존중하여 무감독으로 진행했다. 동문회의나 학생회의, 임원 선출 등 모든 생활도 자치적으로 행했다.
이승훈은 모든 학교 일에 교사들의 솔선수범을 강조했다. 자신부터 학교 일이라면 친히 솔선수범의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변소에서 사무실에 이르기까지 비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졸업생들이 건립한 이승훈 동상 재막식 전날, 그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여기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동상을 세웠지만, 나는 큰일 한 것도 없고, 단지 학생들의 변소를 청소했을 뿐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3]
이승훈은 특히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큰 관심을 두고 장래 지도를 했다. 그는 4, 5명씩 자신의 사랑채로 불러 침식을 같이하면서 한 학생 한 학생을 대상으로 그가 평소에 봐온 장단점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학생들의 장래 문제를 의논하였고, 우리나라가 처한 현 시국에 대한 견해는 물론, 동서고금 성현들의 말씀도 전했다. 제자 조진석은 후에 이승훈은 늘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회고했다.

“우리나라가 왜놈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은 첫째, 우리 겨레가 무식해서요, 둘째, 우리나라의 경제력과 힘이 약해서야! 너희들은 왜놈을 원망하기 전에 우리의 이 점을 잘 알고 정차 나라를 독립시켜야 해, 졸업 후에도 부지런히 배워서 우매한 겨레를 깨우치고, 이 나라를 이끌어가야 해. 현재 우리나라의 실정으로 보아 너희들은 목사가 되어 선 민중을 깨우치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훌륭한 인재로 기르고, 의사가 되어 무지와 가난으로 불쌍히 신음하는 겨레의 고통을 덜어주고, 변호사가 되어 억울하게 누명쓰고 고생하는 겨레의 인권을 옹호해 주어야 한다."

조진석, <지행일치의 남강 정신: 남강 이승훈 선생의 인간상>, p.81.

1910년 7월에 12일 오산학교 제1회 졸업식이 열렸다. 이승훈은 11명의 졸업생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당부를 했다.

“여러분이 학교에 들어온 지 4년이 되었다 할지라도 학교가 초창기가 되어 여러 가지 설비가 부족하여 공부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교문을 떠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형편은 편히 앉아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나아가 여러분들이 배운 만큼이라도 우리 동포들을 깨워줘야 합니다. 여러분을 거칠고 험악한 이 세상에 보내는 것이 마치 사자들 틈바구니에 보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거칠고 험악한 것을 정복하고 새 길을 여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임무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부탁할 것은, 오산의 졸업생들은 어디를 가든지 거짓말로 남을 속이지 말고 자기가 맡은 일을 게을리 하지 말고 몸소 실행하며 민족의 영광을 높이는 훌륭한 인물이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한규무, <기독교 민족운동의 영원한 지도자 이승훈>, p.64.

이승훈의 당부대로 많은 졸업생들이 일제의 탄압 가운데서도 민족을 구원하고자 독립운동에 귀중한 일꾼들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함석헌, 주기철, 한경직, 염상섭, 홍명희, 김소월, 백인제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이승훈은 신민회에서도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안창호,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전덕기, 이동휘, 안태국, 김구, 유동열, 양기탁, 최광옥, 김동원 등과 함께 전국에 오산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을 많이 설립하여 민족운동가를 양성함으로써 국민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1908년 평양에 세워진 대성학교가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전국 각지에 각종 상공 실업기관을 만들어 민족경제를 이룩하여 경제적 자주 역량 향상을 도모하고자 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이승훈 자신이 평양 마산동에 설립한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와 태극서관이었다. 자기회사는 근대적 주식공모를 통해 우리나라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주식회사로, 이승훈은 고려자기의 전통을 잇는 좋은 제품을 만들어 상공을 진흥시키려 했다. 태극서관은 국민의 민족의식을 각성시킬 만한 각종 서적을 출판·보급하였다.
1910년 9월 하순, 이승훈은 평양에 갔다가 산정현교회에서 특별집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에 끌려 참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인 한석진 목사의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설교를 듣고,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다음 주일부터 나부열(羅富悅, Slacy L. Roberts) 선교사가 담임으로 있는 정주교회에 출석하였다. 동시에 10월에 오산학교 구내에 오산교회를 설립하고 정기정을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12월에는 오산학교의 교육주지(敎育主旨)를 기독교로 바꾸고 나부열 선교사를 교장으로 초빙하였다.
한편, 신민회는 서간도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한 뒤 독립전쟁을 일으켜 독립을 이룩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승훈은 서울에서 신민회 간부들과 비밀리에 회합하여 부흥기지 설치 계획을 설명하고 이를 결정하였다. 전국의 자력 있는 유지들을 규합하여 서간도 유화현 삼원보 등에 그 기지를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안명근이 황해도 안악군 등지에서 모금 운동을 하던 중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일제는 안명근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조작하고 신민회 간부와 회원을 비롯한 600여 명을 전격 체포했다. 이때 이승훈도 체포되어 경성 일본 헌병대로 압송되었고, 1911년 2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600여 명중 105명을 재판에 회부했는데, 여기에 이승훈도 포함되었다. 이승훈은 경성으로 압송된 후 윤치호, 양기탁 등과 함께 10년형을 언도받고 대구와 서울의 형무소를 전전하며 혹독한 수감 생활을 했다. 그는 1915년 5월 가출옥으로 풀려날 때까지 온갖 학대와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옥중에서 좌절하지 않고 신앙을 갈고 닦았다. 옥중에서 매일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는데, 신약성경만도 100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 서북지방의 기독교계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윤산온(尹山溫, G.C. McCune)과 나부열 등이 그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감옥으로 심방(尋訪)하고 교제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는 출옥한 후 정주교회 정지정 목사로부터 세레를 받았다.

2.3. 3.1 운동


1916년 오산교회 장로로 부임한 그는 1917년 3월 본격적인 신학 공부를 위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그해 9월에 열린 제6회 장로회 총회에 평북노회를 대표하여 장로 총대로서 참석했고, 1919년 2월 19일에 열린 제15회 평북노회에서도 신학생으로 계속 추천받았다. 하지만 그는 신학생으로서 그치지 않고 독립운동의 활로를 도모했다.
그러던 중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제 1차 세계대전 종결 후 세계 문제를 논의할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승훈은 이 소식을 듣고 한민족의 독립의사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판단하고, 평양을 비롯한 서북 지역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함께 방안을 논의했다.
1918년 9월, 이승훈은 평북 선천에서 열린 제7회 장로교총회에서 상해교민 대표 여운형과 만나 국제동향을 전해듣고 파리 강화 회의를 계기로 궐기하는 일을 논의했다. 또한 11월에는 만주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며, 12월에는 도쿄 유학생 서춘이 오산학교에 들러 이승훈, 조만식, 박현환 등에게 국제정세와 동경유학생들의 움직임에 관하여 설명하고 국내운동의 방법을 의논했다. 이승훈은 이 자리에서 여운형과의 계획을 밝히고, 국내, 상하이, 도쿄에서 각각 독립선언을 발표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1919년 2월 6일 상하이 신한청년당에 소속된 선우혁이 평안도로 잠입하여 종교계 및 사회 지도자들과 만나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선우혁은 선천에서 양전백 목사를 만났고, 정주에서 이승훈 장로를 만났으며, 평양에서 길선주 목사를 만나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했다. 이승훈은 선우혁을 만난 뒤 "그냥 누워 있다가 죽을 줄 알았는데, 이제 죽을 자리가 생겼다."며 좋아했다고 한다.[4]
이후 평양에서는 선우혁의 권유를 기초로 하여 독립선언을 할 것을 결정하고,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가 교계에서 운영하는 숭실전문학교, 숭실학교, 숭덕고등보통학교, 숭의여학교, 숭현여학교 및 보통학교의 교사, 학생들과 기독교도, 시민들을 동원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시위를 강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한편, 국내에서 교세가 가장 컸던 천도교 측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따른 국제정세의 변화를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고자하는 논의가 있었다. 1918년 12월부터 최린, 송진우, 현상윤 등이 권동진, 오세창 등의 천도교계 지도자들에게 거족적인 민족운동의 필요성을 건의해 동의를 얻어냈다. 이후 상하이에서 온 밀사와 2.8 독립 선언을 준비하던 재일 유학생들이 파견한 송계백이 천도교 지도자들을 찾아왔다.
1919년 1월 20일,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천도교 간부들이 교주 손병희를 찾아가 독립운동 추진 계획을 보고해 허락을 받은 뒤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원칙으로 추진할 것을 합의했다. 천도교 측은 국권 반환을 총독부에 요구하며 구미열강에 원조를 구하고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는 천도교 단독으로는 불가능하여 외국과의 교섭관계에 유력한 기독교와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최린은 1월 말에서 2월 초 사이에 자신의 집에서 최남선, 송진우, 현상윤 등과 독립운동에 관해 논의한 뒤 천도교, 기독교, 불교와의 연합을 계획했다.
최남선은 최린의 부탁을 수락하고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연계를 담당했다. 2월 7일 이승훈의 제자이자 중앙중학교 교사를 지내던 현상윤이 최남선의 부탁을 받고 오산학교 졸업생 김도태를 만나 이승훈에게 경성으로 상경해달라고 권해줄 것을 부탁했다. 김도태는 2월 8일 아침 경성을 출발해 정주로 갔지만, 이승훈은 때마침 선천에서 열린 사경회(査經會)에 참석했기에 만나지 못했다. 김도태는 대신 이승훈의 집에 있던 박현환에게 용건을 전한 뒤 11일 경성으로 돌아갔다.
선천에서 돌아와서 박현환으로부터 김도태의 말을 전해들은 이승훈은 함께 사경회에 참석 중인 이명룡 장로, 유여대, 김병조, 양전백 목사 등을 만나 천도교와의 독립운동 제휴에 대해 논의하고 찬동을 받았으며, 평양에서 길선주, 신홍식, 손정도 등의 찬동을 얻었다. 처음에 길선주와 신홍식이 목사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꺼려하자, 이승훈이 “성경말씀에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지 않았소? 그럼 우리 조선이 독립된 다음에 왜나라에 가서 살렵니까?" 라고 함으로써 두 목사의 참여를 이끌어내었다고 한다.[5]
정주읍교회 담임 목사 최성주가 완전독립 요구보다 자치 허락을 총독부 당국에 요청하는 것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자, 이승훈은 해 “그런 미지근한 태도로 무슨 독립운동을 하겠소? 그건 안 되오. 아예 이번 기회에 완전 독립을 하도록 우리 목숨 내놓고 싸웁시다."라고 답했다.[6] 이후 이승훈은 선천을 떠나 12일 아침에 경성에 도착해 최남선을 만나고자 했으나, 최남선은 경찰의 이목을 의식해서 송진우에게 이승훈을 대신 만나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하여 송진우와 이승훈은 종로구 계동에 소재한 김성수의 집에서 만났다.
송진우는 이 자리에서 천도교의 동향을 설명하면서, 기독교 신자들도 독립운동 준비에 합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승훈도 상하이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이 재정 지원 요청과 국내의 적극적인 운동을 독려해서 평안도 지방 기독교도들이 이미 독립운동에 참여할 뜻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곧 천도교와 기독교가 합작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승훈은 송진우와의 회동에서 기독교 측 동지의 물색을 약속한 다음, 세브란스병원으로 가서 병원 구내 교회 목사 함태영과 제약주임 이갑성을 찾아 송진우와의 교섭 전말을 들려줬다. 함태영은 즉석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약속했으며, 이갑성도 같은 뜻을 표시하였다. 이후 이승훈은 2월 12일 밤 야간열차로 선천으로 가 김용률의 집에서 묵고, 다음 날 13일 장로교 평북노회 도사경회가 열리고 있는 선천으로 향하였다.
선천에 도착한 뒤, 의주관리교회의 김병조 목사와 정주 덕흥교회 이명룡 목사를 만나 경성에서 천도교 인사들과 만나서 기독교와 천도교의 제휴를 합의했음을 통보해 승낙을 받아냈다. 이후 선천 북교회의 양전백 목사, 의주 동교회의 유여대 목사를 잇달아 찾아갔고, 그들 역시 찬성을 표했다. 이후 이승훈은 김병조, 이명룡, 양전백, 유여대와 함께 독립선언서에 대표자로 서명했고, 그들로부터 인장을 받아냈다.
2월 13일 야간열차로 평양으로 가 하룻밤을 묵은 그는 14일 아침 복통을 가장하여 기홀병원에 입원한 뒤 2월 16일 손정도, 신홍식, 길선주, 그리고 태극서관 총무 안세환을 만났다. 그는 이들로부터 독립운동 참가 동의를 받아낸 뒤, 16일 밤 다시 야간열차로 신홍식 목사와 함께 경성으로 향했다. 17일 경성에 도착한 뒤 소격동에 사는 김승희의 집에 머물었고, 그날 오후 사람을 시켜 송진우를 만나게 했다. 송진우는 최남선이 한규설, 윤용구, 김윤식 등 명망높은 이들을 만나 독립선언에 가담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고 전햇다.
2월 18일, 송진우가 직접 이승훈을 찾아가 같은 내용의 말을 하고 돌아갔다. 19일에는 최남선이 이승훈을 찾아가 기독교와 천도교의 독립운동 제휴를 논의했다. 하지만 이승훈은 천도교의 반응이 미온적이라고 판단하고, 기독교 단독으로라도 행동할 계획을 세우기로 하고, 경성의 감리회, 장로회 대표들과 만나기로 결심했다.
2월 20일 이명룡 장로가 이승훈을 찾아가 그날 밤 8시에 협성학교 사무실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감리교 측 인사들의 만남이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승훈은 현장으로 가 감리교의 박희도 YMCA 간사, 오화영 목사, 정춘수 목사, 신홍식 목사 등을 만나 기독교 단독의 독립운동을 어떻게 펼칠 것인지를 논의했다. 여기서는 독립선언보다는 독립청원 쪽에 논의의 초점이 모였고, 결국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또한 별도로 청원 사실을 알리는 포고문을 만들어 대중에게 배포하기로 하였다.
이승훈의 기독교-천도교 합작 제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박희도는 기독교와 천도교의 교리의 차이와 서로 교류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행동일치가 어려울 것이라는 부정적 의사를 피력하였고, 정춘수는 동학농민운동의 예를 들며 천도교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반대 의사를 제기했다. 한편 이 모임은 각지로 사람을 보내 찬성자를 모으기 위해서는 약 3,000원의 비용이 필요하고, 이 비용을 각지의 교회에서 모금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감리교 측 모임과는 별도로 장로교 측에서도 별도로 남대문통에서 장로교 장로 함태영의 집에 세브란스병원 제약 주임 이갑성, 평양 기독교서원 총무 안세환, 장로교 조사(助事) 오상근#s-2, 장로교 목사 현순 등이 모여 독립운동 방법을 논의했다. 여기서도 독립선언보다는 독립청원으로 의견을 모았다. 2월 21일, 이승훈은 동지 규합을 위해 함태영의 집을 찾아갔다. 함태영은 전날 밤에 있었던 감리교 측 모임과 장로교 측 모임의 논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편, 향후 두 모임을 하나로 통합하기로 했다.
2월 21일 오후 최남선이 이승훈을 찾아갔다. 이때 이승훈은 전날 밤 기독교계가 단독으로 독립청원을 할 거라는 이야기를 전달했고, 최남선은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에 관계되는 문제이므로 종교의 같고 다름을 불문하고 합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승훈은 동지들과 다시 협의한 후 그 가부를 회답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최남선은 천도교와의 합작을 위해 최린을 급히 만나 볼 것을 제의했다. 이에 따라 최남선의 안내로 이승훈은 오후 3시 무렵에 최린의 집을 방문해 최린을 만났다.
최린은 천도교에서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했다며 기독교 측의 의견을 타진했다. 이에 이승훈은 전날 밤에 기독교계가 기독교-천도교 합작을 협의했지만 합의하지 못한 상태며, 독립선언보다는 기독교 단독의 독립청원운동으로 의견이 기울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최린은 기독교계의 분위기에 당혹감을 나타내며, 민족의 행동통일을 위해서는 양측의 합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승훈도 공감하며 기독교계를 설득해보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이승훈은 이 운동을 위해 3,000원의 자금이 필요하고, 상해로 사람을 파견하기 위해서도 2,000원의 비용이 필요하다며 천도교에서 빌려줄 수 있는지 물었다. 최린은 손병희와 상의하겠다고 답했다.
그날 밤, 장로교, 감리교 양측 인사들이 세브란스병원 내 이갑성의 숙소에서 독립운동의 방법과 천도교와의 합작 문제를 위하여 모임을 가졌다. 장로교 측에서 이승훈,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 김세환, 김필수, 오상근, 감리교 측에서 박희도, 오화영, 신홍식, 오기선 등이 참석했다. 독립운동의 방법으로는 전날 밤에 논의된 대로 일본 정부에 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가능하면 많은 이의 이름을 연서해 제출하도록 하고, 그 초안은 이승훈과 함태영 두 사람에게 일임했다.
천도교와의 합작 문제는 일부 반대 목소리도 나왔지만, 이갑성, 함태영, 안세환 등이 종파를 초월해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해 힘을 얻었다. 천도교와의 교섭위원으로는 이승훈과 함태영이 지목되었으나, 합동 추진 문제는 천도교 측의 운동방법을 정확히 탐문해 본 후 결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독립청원서에 서명할 대표자들을 모집하기 위해 신홍식을 평양에, 오화영을 개성에, 이갑성을 경상도에, 김세환을 충청남도에 보내고, 유럽에 서면(書面)을 보내기 위해 현순을 상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튿날인 2월 22일, 이승훈은 최린의 집으로 가 전날 밤 기독교계의 논의 결과를 통고했다. 이에 최린은 이승훈이 요청한 운동자금 5,000원을 지원할 수 있다고 답을 한 뒤, 운동 방식은 독립선언을 중심으로 삼고 미국 대통령과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낼 계획임을 설명했다. 최린은 이승훈과 함태영에게 독립운동의 일원화가 아니면, 민족의혼을 발휘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선언론에 기독교계가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이승훈과 함태영은 최린의 주장을 받아들여 기독교 측의 동의를 받아내기로 했다. 서너 시간 후, 최린이 이승훈을 찾아가 5,000원을 건네줬다.
이승훈은 이 자금 가운데 2,000원을 상하이로 갈 현순에게 건넸고, 2,000원은 도쿄로 가서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안세환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로 떠날 이들에게 건넸다. 이승훈은 돈을 빌림에 있어 기독교계에서 빌린 것이 아니라 이승훈 자신의 자격으로 빌렸음을 강조했고, 가족부양비는 오화영, 이필주, 박희도, 박동완, 김창준, 신석구, 이갑성 등 7명에게 가족생활비로 지급되었는데, 노모가 있는 사람, 사후 생계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지급하도록 했다.
한편, 박희도는 3·1운동의 기독교-천도교 합작 가능성이 가시화되자 학생층과의 연합을 위하여 청년학생대표인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과 보성전문학교의 강기덕 등과 의논하여 그들의 찬동을 얻었고, 2월 23일 경 이승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박희도는 당초 연희전문학교 사감으로 있으면서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 대표 격인 김원벽, 강기덕, 김형기, 한위건 등은 물론, 보성전문 졸업생인 주익 등과 접촉하고 있었는데, 이들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기독교-천도교 연합 독립운동에 결합시킴으로써 3·1운동을 단일화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2월 23일 밤에는 기독교계 인사들이 함태영의 집에서 모였다가 비밀 논의를 위해 바로 옆에 있는 이갑성의 숙소로 옮겼다. 이때 모인 인사들은 지방에 내려간 이갑성을 제외한 이승훈, 함태영, 박희도, 오화영, 신홍식, 안세환, 현순, 오기선 등이었다. 이들은 천도교 측이 제안한 독립선언 방식에 대해 집중 토론했으며, 천도교 방식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오기선 목사는 독립선언 방식에 끝까지 반대하고 결국 민족대표로서 서명을 거부했다.
2월 24일, 이승훈은 24일, 이승훈은 함태영과 함께 최린의 집으로 가 독립청원과 독립선언을 함께 하는 방식을 취했다며 기독교 측의 결정사항을 전달했다. 최린은 크게 기뻐했으며, 향후 독립운동 계획에 대해 구체적인 협의를 했으며, 독립선언서 초안을 이들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같은 날 불교계 인사들인 한용운, 백용성이 가세하면서 종교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대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2월 26일, 기독교계에서 33인의 민족대표 가운데 독립선언서 서명 순서를 놓고 논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이승훈은 “순서는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아무를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라고 호통을 쳤다. 이 호통에 좌중은 조용해졌다고 한다.[7] 이후 독립선언서에 기독교계 16인(이승훈, 양전백, 오화영, 신홍식, 길선주, 이필주, 김병조, 김창준, 유여대, 이명룡, 박동완, 정춘수, 신석구, 최성모, 이갑성, 박희도)와 천도교 15인(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이종일, 권병덕, 양한묵, 김완규, 홍기조, 홍병기, 나용환, 나인협, 박준승, 임예환, 이종훈, 최린), 불교계 2인(한용운, 백용성) 등 33인의 민족대표가 서명 날인함으로써, 3월 1일 독립선언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이뤄졌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선언식이 끝난 직후 경찰이 들이닥쳐 체포되었고, 남산 왜성대로 끌려가 취조받았다. 3월 6일 경무총감부에서 취조를 받을 때, 일본인 검사가 "피고는 앞으로도 어디까지든지 조선의 국권회복운동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렇다. 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어디까지든지 하려고 하고, 또 먼저도 말하였지만 이번 독립운동은 우리 동지들만으로 한 것이지 외국 사람이나 외국에 재주(在住)하는 조선 사람이라든지 또는 학생 등과는 하등 관계가 없으며, 일본 정부에 대하여 청원한 일에 있어서도 외국 사람의 조력을 요할 필요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이후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승훈은 형무소 수감생활 중 누구나 싫어하는 똥통의 소제를 솔선수범하여 도맡아 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그는 “주여, 감사합니다. 바라건대 이 문에서 나가는 날 이 백성을 위하여 이 똥통 소제하기를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8] 또한 그는 수감생활 가운데 성경을 가까이 하며 여러 차례 구약과 신약을 통독하였다.
1922년 7월 21일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으로 가출옥한 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감옥에 들어간 후에 한 일은 이천 칠백여 폐지나 되는 구약을 열 번이나 읽엇고 신약전서를 사십독을 하얏며 그 외 야소교에 관한 서적 읽은 것이칠만 폐지는 될 터이니 내가 평생에 처음 되는 공부를 하얏소. 장래 나의 할 일을 나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에게 밧치어 교회를 위하야 할 터이니 나의 일할 교회는 일반 세상 목사나 댱들의 교회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이 이제부터 조션민족에게 복을 내리시려는 그 뜻을 바다 동포의 교육과 산업을 발달 식히고자 하오."

김승태, <남강 이승훈의 민족의식과 민족운동 방략>, p.43


2.4. 이후의 행적


이승훈은 출옥 후 오산학교 운영을 다시 맡았다. 그는 교육 사업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일본 교육시설 시찰을 결심했다. 1923년 1월 4일 일본에 건너간 그는 3주간 일본의 공사립 대학과 각종 학교 교육시설을 돌아봤다. 시찰 중이던 1월 14일 주일에는 동경조선인연합교회에서 400여 교인 앞에서 ‘고생한 후에는 반드시 낙이 있다’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승훈은 한민족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민족을 비교하면서, “나라를위해 일하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도 조절하거나 타협하거나 비굴하지 말 것”을 역설하고, 우리 백성에게는 날카로운 예언자의 통찰로 불의를 고발하고 잘못을 충고해주는 용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승훈의 동정을 기사화한 <기독신보> 1923년 2월 14일자 기사는 이승훈의 설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금번에 교육사업과 기타 문화사업을 시찰하기 위하여 동경에 건너간 이승훈씨는 그동안 조선청년회 총무 백남훈씨와 그외 제씨의 안내로 각 학교 실업장소를 시찰하던 중 지난달 14일 주일 오전은 동경조선인연합교회에서 ‘고생한 후에는 반드시 낙이 있다’는 제목으로 지금 우리 생활의 비참한 형편과 후에 오려는 생활의 광명을 들어 격렬한 설교를 했는데, 그날 모여든 교우 400여 명이 자못 형언할 수 없는 감격을 받았다더라.

귀국 후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참여하여 이상재와 함께 1923년 4월 초에 출범한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총회의 중앙부 집행위원 겸 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했다. 이에 일제는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고 민립대학 설립을 저지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924년 5월, 이승훈은 김성수의 부탁을 수락하고 1년 동안 동아일보 사장을 맡았고, 물산장려운동에 가담했으며, 조선교육협회에도 관여했다.
1925년에는 오산학원을 재단법인으로 만들고 이사장에 취임했으며, 학교시설을 확충하고 고등보통학교 인가 신청을 하여 이듬해에는 총독부의 인가를 받았다. 1925년 말에는 국제선교연맹 회의를 앞두고 한국교회 대표의 참가를 협의하기 위하여 회장이던 모트(Dr. JhonMott, 穆德) 박사가 내한하여 주한 선교사 29명, 한국교계 대표 29명을 조선호텔로 초청하여 12월 28-29일에 걸쳐 그 준비회의를 개최했는데, 이때 이승훈도 한국 기독교계 원로로서 한국교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1926년 가을, 이승훈은 오산학교로 복귀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산업 발달을 목적으로 하는 자면회(自勉會)를 조직하여 농가의 부수입을 올리게 하고, 자신의 사유지를 제공하여 공동 경작케 하는 등 농촌 부흥에도 진력하였다. 그런데 1930년 2월 4일 선천읍 북예배당에서 열린 제37회 선천 평북 노회에서 그를 장로직에서 ‘시무치 않는 죄’로 면직되었다. 즉, 장로의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장로로 시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무교회주의를 표방한 '성서조선' 그룹과 접촉하면서 오산에서도 성경연구모임을 만들어 참석했다. 이는 그가 교회에 출석하는 것보다 실질적인 말씀 묵상과 실천을 중시했음을 의미한다. 그와 함께 오산성경연구회를 만들어 모임을 가졌던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는 다시 더 아는 것이 있으니 신앙의 인(人) 남강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바 수십 인밖에 모르는 큰 사실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가 일찍이 기독교를 믿었고, 신학교 학생이었고, 교회의 장로였던 것을 세상은 잘 안다. 그러나 내가 말함은 그것을 가리켜 말함이 아니다. 그는 최근에는 도리어 교회에서 나왔고, 교회에 대하여는 단념하였었다. 교회는 지금 조선을 위하여서는 좋은 일을 하는 이보다 도리어 해되는 일을 함이 많다고 하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고로 그가 근래로는 소위 신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증거를 하고 갔다. 하나님은 그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위대하게 썼다.

함석헌, <민족 생명의 촛불 남강 선생: 종교가로서의 남강 선생>, p.73~74.

1930년 5월 3일, 이승훈은 오산학교에서 자신의 동상제막식이 거행되었을 때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내가 오늘까지 오면서 내가 한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모두 신(神)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나는 재래(在來) 불학무식(不學無識)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으나 신이 나를 이렇게 이끌어서 오늘까지 왔습니다. 이후도 그럴 줄 믿습니다."

함석헌, <민족 생명의 촛불 남강 선생: 종교가로서의 남강 선생>, p.74.

다음날인 5월 4일 주일, 그는 오산성경연구회를 찾아가서 자신이 본래 무식한 사람으로 아무 것도 할 만한 힘이 없었지만, 자기가 진리를 찾고 의(義) 사모하고 그 의를 위하여 자기를 이기고 일하여 나가고자 하는 힘은 성경을 보는 가운데 생겨났다고 했다. 또한 “하나님을 보게 된 것이 가장 영광이며 물질적 동상보다도 정신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 것을 내 일생 중에 가장 더 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정신적으로 영생할 수 없는 인간은 저러한 동상을 몇 백개 세우더라도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없어지고 말 것”이라고 했다.[9]
1930년 5월 8일 밤, 이승훈은 용동 주민들의 자치조직인 자면회(自勉會) 사람들과 자택에서 모임을 가졌다. 모임이 파한 후 돌연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이튿날인 5월 9일 새벽 4시에 결국 숨을 거두었다. 부음 소식이 전해지자 평양의 27개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은 모임을 갖고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결의하였다.[10] 평양을 비롯해 서울 등 지방에서도 지역장례위원회가 꾸려졌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도 5월 10일자 사회면에 그의 사진을 싣고 '위대신산(偉大辛酸)한 그 일생'라는 부제를 달아 부음 기사를 실었다.
이승훈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자신의 시신을 땅에 묻지 말고 생리 표본으로 만들어 생리학 교육재료로 사용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5월 17일 오산학교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을 때, 그의 시신은 열차편으로 18일 오전 경성제국대학(서울대 전신)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시신을 해부한 후 뼈를 표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표본 제작은 경성제대 해부학교실의 이마무라(今村) 주임교수가 맡았다.
조선 총독부는 이승훈의 사망이 큰 파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경성에서 조기와 만장을 달지 못하게 하고, 추도회도 열지 못하게 했다. 급기야 표본 제작도 중단시켰다. 표본이 학생들에게 끼칠 영향을 두려워한 것이다. 결국 6개월이 지난 11월 2일, 이승훈의 뼈만 유리함에 담겨져 오산으로 이송되었고, 11월 5일 다시 영결식이 거행된 후 오산학교 인근 산기슭에 안장되었다. 이승훈의 제자 조진석이 기술한 바에 따르면, 일제는 묘비의 비문을 정으로 쪼아버리고 비문 없는 묘비마저도 땅에 묻어버렸다고 한다.[11]
함석헌은 1930년 6월 잡지 <성서조선(聖書朝鮮)>에서 이승훈을 기리는 글을 실었다.

“남강은 과연 조선에서 등촉(燈燭)이었다. 나는 여태껏 저만큼 광휘 있게, 저만큼 뜨겁게, 저만큼 기운차게, 저만큼 참되게 산 이를 보지 못하였다. 이제 그가 감을 보고 내가 느낌은, 겨울 방 안에 광명 삼아 난로 삼아 붙들고 지키고 앉았던 외로운 촛불의 꺼져버림이다. 적막하고 무료하고 답답함이다. 최근에 와서 의(義)의 맥박이 계속되었다면 그가 유일까지는 아니라도, 한두 줄기밖에 아니 되는 동맥 중에서 가장 큰 줄기이었다. 진정한 조선 사람을 고른다면 그는 제일 먼저 뽑히어야 할 일인(一人)이다.

그는 지난 5월 16일 그의 영결식을 거행하는 자리에서 애사(哀辭)를 말하던 조만식씨의 말과 같이 ‘조선에 태어나고 조선을 위하여 울고 웃고 조선을 위하여 죽었다.’ 그는 참 조선사람이었다. 참 조선사람이었던고로 참 사람이었다. 혹은 참 사람이었는고로 참 조선사람이었다. 조선을 참사랑했는고로 그에게 참사랑이 있었고 지성이 있었고 희생이 있었다. 그는 조선의 지도자라기보다도 조선의 보배였다. 조선 생명의 운재자(運載者)였다. 그가 간 후에 조선의 촛불이 꺼졌다고 하여서 과장의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승훈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3. 성격과 일화


성격은 능동적이고 유쾌하여 민족대표 33인의 서열을 정하는 것도 순탄하게 처리하였으며, 학교 기금을 위해 평안도의 광산업자들을 포섭하는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또 세상을 보는 안목이 있어 어디에 땅을 사두라고 하면 어김없이 땅값이 오르게 되는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애시당초 사업가로 성공한 분이니.
  • 어렸을 때부터 정성들여 일을 하는 습관이 있어서 16세에 놋그릇 가게의 점원으로 일했을 때는 가게의 놋그릇들이 광택이 보석마냥 번쩍번쩍하게 날 정도로 정성들여 닦았다고 한다. 이때 '사람도 이와 같이 열심히 하면 빛날 것이다.'를 깨닫고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일본인들을 앞지르라는 당부를 하기도 했으며,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학 표본을 만들어 내 사랑하는 학생들을 위해 쓰게 하라[12]
  • 독실한 개신교인이지만 3.1 운동 당시 승려이던 만해 한용운 선생을 독립 선언서 서명 윗 부분에 넣고 계속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개신교인들이 그걸 안 좋게 말하자 그들을 이렇게 꾸짖었다고 한다.
>나라가 있어야지 종교가 있지! 그럼 일본이 종교만 인정하면 일본이라도 상관없는 거 아니냐? 제발 경솔하게 종교부터 따지지 마라!
  • 이런 일화도 있다. 오산 학교의 화장실은 그 당시에 재래식이었고, 그 때문에 겨울이 되면 쌓인 똥이 얼어버리는 사태가 자주 발생했다. 그래서 이승훈 본인이 직접 얼음똥을 도끼를 들고 와서 손수 깼다는(…) 일화다. 학생들을 아끼는 마음이 드러나는 좋은 일화다.

4. 대중매체에서


  • 1982년작 MBC 드라마 <거부실록: 남강 이승훈>에선 배우 김무생이 연기했다.
  • 1984년작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선 성우 김용식이 연기했다.
  • 1985년작 KBS1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이낙훈이 연기했다.

5. 기타


이 분이 세운 오산 학교의 후신은 현재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오산 중학교와 오산 고등학교. 분단과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학교를 재건한 경우다.[13] 의사양반의 모델인 백인제 선생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독립 운동에 투신하면서 금연했으나 늘그막에 사업 실패와 모진 고초로 다시 흡연을 하는 등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
역사학자 이기백과 친척이다. 이기백의 고조부인 이승익이 이승훈의 형이다.

[1] 시인 백석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이만열, <역사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 p.51~52.[3] 조진석, <지행일치의 남강 정신: 남강 이승훈 선생의 인간상>, p.82.[4] 한규무, <기독교 민족운동의 영원한 지도자 이승훈>, p.125.[5] 김경옥, <지조를 지킨 지도자들: 남강 이승훈>, p.143.[6] 김경옥, <지조를 지킨 지도자들: 남강 이승훈>, p.144.[7] 조진석, <지행일치의 남강 정신: 남강 이승훈 선생의 인간상>, p.87.[8] 함석헌, <민족 생명의 촛불 남강 선생: 종교가로서의 남강 선생>, p.75.[9] 김해연, <한국기도교회사: 한국 기독교 문화사 및 사상사>, p.170.[10] 조선노동총동맹 등 6개 단체는 이승훈의 사회장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11] 조진석, <지행일치의 남강 정신: 남강 이승훈 선생의 인간상>, p.88[12] 물론 지켜지진 않았다. 일본의 방해였다는 설도 있으나, 애시당초 유교적 윤리가 남아 있던 조선에서 고인의 유해를 함부로 하긴 어려웠을 터이다.[13] 숭실학교, 숭의여학교도 이와 같은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