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규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영규는 1882년 9월 7일 경기도 한성부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이후 본적지인 양지현 읍내면(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했으며, 임계원(林桂元)과 혼인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발발하자 남곡리의 밤나무골에서 김운식(金云植)과 함께 주동이 되어 독립만세시위계획을 추진하였다. 이후 1919년 3월 29일 동리 주민 100여명을 규합하여 이들을 이끌고 태극기를 높이 들고 내사면에서 양지리까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행진하다 경찰에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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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언도받아# 공소하였으나 7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으며#, 이에 상고하였으나 8월 2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8일 특별 사면으로 감형되어 출옥한 후 용인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4년 1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한영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191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883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191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의하면,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는 본적·주소지이고 출생지는 경성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