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종연횡

 

'''고사성어'''
'''合'''
'''縱'''
'''連'''
'''橫'''
합할 합
세로 종
이을 연
가로 횡
1. 개요
2. 내용
3. 현대 외교


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한 갈래였던 합종가와 연횡가들에 의해 주장된 외교술. 대표적으로 연나라에게 합종설을 주장한 소진이 있으며, 진나라에게 연횡설을 주장한 장의가 있다. 오늘날에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가, 이익단체를 망라한) 각종 세력들이 행하는 이합집산을 뜻하는 표현으로도 쓰이고 있다.
한자 표기가 여러 가지로, 합종의 '종'을 縱(세로 종)과 從(좇을 종)으로, 연횡의 '횡'을 橫(가로 횡)과 衡(저울대 형)으로 제각각이다. 여기서 從과 衡은 縱과 橫의 독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쓰인 가차 용법이다.

2. 내용


간단히 설명하자면 '''합종'''은 작은 국가끼리 뭉쳐 거대한 국가에 대항해야 한다라는 것이고 '''연횡'''은 _거대한 국가에 대응하기 위해 뭉친 동맹을 하나하나 꼬드겨 무너뜨리는 방법_이다. 현대 외교용어로 말하면 '''다자주의multilateralism''' VS '''일방주의unilateralism'''.
전국시대가 열린 직후, 전국칠웅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던 것은 위와 제였지만, 점차 중원의 주도권은 진나라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진의 국경이었던 하수와 진령산맥은 천혜의 요새였고, 두 자연 요소가 만나는 함곡관만 틀어막아버리면 외부 세력이 진나라 영토 안으로 진격하는 것은 당시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또한 진나라는 영토 안에 관중 평야가 존재해서 협소한 영토 탓에 자급자족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던 다른 나라들과 달리,[1] 자급자족 및 물자 축적이 가능했던 점도 진나라의 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다.[2]
상술한 유리함을 지닌 진은 시간이 흐르면서 세력을 팽창하고자 시도했고, 6국 가운데 진과 국력으로 맞불을 놓을 수 있는 나라는 없었기 때문에 외교적인 술책을 고안해내야 했다. 그리고 이 고민 속에서 종횡가가 등장한다. 기원전 4세기 후반 위(魏)의 공손연(公孫衍)은 처음으로 합종책을 제안하면서 연·조·위·한·제·초 6국이 연합하여 진에 대항할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6국 간에도 서로에 대한 반감이 컸을 뿐만 아니라, 진나라의 방해 공작까지 겹치면서[3]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한편 진은 합종책에 대한 대항책으로 위의 장의(張儀)가 제안한 연횡책을 자국의 외교 노선으로 채택하는데, 연횡책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진이 6국 중 상대적인 약국을 도와 그 나라가 세력을 확대시키게끔 도와주자는 전략이다. 그리고 초나라가 진의 연횡책에 낚여 제나라와의 동맹을 파기하면서 진의 국력은 한층 더 커지게 됐다. 근데 뭐 이게 이상하지 않은 게 이후에도 초나라는 국력은 큰데 외교적으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여 타국의 신뢰를 사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아차싶었던 6국들은 소진(蘇秦)의 주장에 따라 다시 합종책을 취하였다. 6국이 연합하여 진을 공격하게 되자 진도 할 수 없이 점령하였던 땅에서 후퇴했다.[4] 이후로도 합종과 연횡은 반복되었는데, 전국칠웅들은 손익계산에 따라 합종과 연횡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기 때문에 이러한 시대를 비꼬아서 조진모초[5]이라는 고사성어도 등장한다.

3. 현대 외교


경제이슈가 주안건인 현대 외교도 어떻게 보면 합종과 연횡을 오가는 외교틀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원래 미국에서는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합종책을, 중국과 러시아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연횡책을 사용하고 있었다. 미국은 극동에서 한국 대만 일본 인도 필리핀 싱가포르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유럽간의 안보적 교류를 강화하여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이에 대해 중국과 러시아는 연횡책으로서 남미의 반미국가와 교류하고 극동과 중동의 친미국가들에게 경제적 혜택과 군사적 압박 민족갈등을 일으켜 서로 연대하지 못하게 하고 있던 것. 특히 러시아는 유럽연합 쪽에 친러성향이 있는 그리스, 키프로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터키, 벨라루스, 몰도바에 설득하여 유럽에 자신들의 불이익이 되는 조치를 무력화시키는 연횡책을 쓰고 있다.
다만 도날드 트럼프 대에 들어와서는 정반대가 된 모습으로, 중국이 일대일로로 만들어놓은 경제권에서 다자주의를 외치며 자유무역을 주장하지만 미국에선 보호무역을 주장하며 일방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상황으로 역전되었다. #

[1] 중세 이후로는 강남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양자강 일대가 엄청난 생산성을 보였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양자강 일대는 그냥 늪지대였기 때문에 초나라도 땅만 넓지, 생산력은 미미했다.[2] 중세 이전까지 중국 역대 왕조들의 수도 소재지가 대부분 관중 평야에 자리잡았다는 점만 봐도 이 일대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중국 왕조들의 도읍이 지금처럼 동부로 옮겨지기 시작한 것은 수양제에 의해 대운하가 건설되어 물자 비축이 용이해진 이후이다. 참고로 진나라의 위치가 무조건 유리한 것은 아니었고, 나름대로의 불리함도 지니는데, 그것은 바로 중원 서부에 치우쳐서 강족을 비롯한 유목민족들과 맞닥뜨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진나라 건국 초기는 이 이민족들과 생사를 건 피터지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 주나라가 수도를 동쪽으로 옮겨야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서쪽에 박혀 있었기에 초기에는 중원국가들에게 좀 무시당하기도 했다. 실제로 진(秦)나라는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진(晉)이 조, 위, 한으로 쪼개지기 전까지는 목공 대를 제외하면 중원에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3] 합종책을 견제하기 위한 진나라의 방해 수단은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렸다. 뇌물이나 반간계는 기본이고 암살도 애용됐다. 거의 냉전 시대 당시 미국과 소련의 첩보전을 뺨치는 수준[4] B.C. 318년에는 다같이 진의 함곡관을 공격하였으나, 함곡관의 방어력이 실로 어마무시한 거여서 간단히 실패로 돌아간다.[5] 朝秦暮楚, 아침에는 진나라 편, 저녁에는 초나라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