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운하

 


'''유네스코''' '''세계유산'''
[image]
이름
한국어
대운하
영어
The Grand Canal
중국어
大运河
프랑스어
Le Grand Canal
국가·위치
중국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12년[1]
등재기준
(i)[2], (iii)[3], (ⅳ)[4], (vi)[5]
지정번호
1443
1. 개요
2. 역사
2.1. 수나라 시대
2.4. 현대
3. 건설효과


1. 개요


베이징항저우를 잇는 운하이다. 단기간 내에 건설된 운하가 아닌 수백년에 걸쳐 만들어낸 역사적 과업이다.

2. 역사



2.1. 수나라 시대


[image]
위진남북조시대 약 400여년간의 중국은 남북이 분단되어 오랜 분단으로 말미암아 경제문화적으로 남북간의 차이가 컸다. 이를 해소하기위해 중국을 재통일한 수문제는 강남과 강북을 잇는 대운하를 계획하였으나 현실적인 재정문제로 인해 계획에 그쳤다. 그런데 이것은 절대로 '''돈이 없어서'''라는 뜻이 아니다. 수문제는 수나라를 부유하게 경영한 황제이며, '''현실적으로 출혈이 너무 큰 대공사'''이기에 하지 못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 수양제는 아버지를 다른 의미로 아득하게 뛰어넘는 대단한(...) 인간이었다. 1억 5,000만의 인부가 2,700km에 걸쳐 땅을 깎아낸다는 대역사를 밀어붙였다. 심지어 이 공사는 단 8년밖에 안 걸렸다. 어마어마한 혹사와 무리수가 뒤따른 공사였다. 이 대운하를 포함하는 여러가지 대공사가 이어졌으며, 심지어 양제 개인의 사치도 심했다. 그리고 3차에 이은 고구려 원정까지 대실패로 끝나면서 결국 수양제는 민심을 잃게 된다. 수나라는 망하고 자신도 살해당했다. 하지만 그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대운하는 이후 중국을 '''희대의 먼치킨'''으로 만드는데 지속적으로 힘을 보태주었다.

2.2. 당나라 ~ 원나라 시기


당시의 대운하는 말 그대로 장강/황하/회하를 연결한 것에 그칠 뿐이다. 왜냐하면 강물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운하를 비스듬하게 대각선으로 팔 수 밖에 없었고, 그런 탓에 2,700km라는 길이를 갖게 되었다. 또한, 강물의 흐름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운송선이 운행할 때 계절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게다가 운하가 낙양까지밖에 가지 않기 때문에, 낙양에서 장안까지 운송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거리는 가까웠지만 지형이 험하고, 수도에 쓸 식량을 나르는 문제였기 때문에 그 양이 너무나 엄청나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송나라변량으로 수도를 옮겼고, 나중에는 '''갑문'''을 발명함으로써 해결이 되었다.[6]
훗날 금나라북송을 몰아내어 송 조정이 강남으로 피신할 때, 조정은 금나라의 군대가 대운하를 통해 자신들을 추적할 것을 염려하여 대운하의 각종 시설들을 모두 파괴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1194년, 수양제의 대운하는 끊기고 말았고, 그 역할은 원나라 때 바닷길이, 명나라 땐 새로 개발된 대운하[7]가 그 역할을 맡으면서 다시 수리될 필요성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재까지도 수양제의 대운하는 끊긴 상태이다.
대운하는 장강 이남 지방의 개발과도 맞물려있는데, 개발이 마무리되던 시기와 대운하가 개통된 시기가 큰 차이가 없었던 덕분에 엄청나게 많은 강남의 물량을 화북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이것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화북지방이 계속 지니고 있었던 부분적 이유가 되기도 한다. 14세기 이슬람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원에 방문해 이에 대해 기록을 남겼는데, 대운하를 '북경에서 발원하는 '''강''''이라 기록했다.

2.3. 명나라 ~ 청나라 시기


[image]
오늘날의 대운하 이른바 '''경항대운하(京杭大运河)'''라고 불리는 것은 명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수양제의 대운하가 낙양을 중심으로 두 개의 대각선을 교차시킨 형태였다면, 명대의 대운하는 정말 북경에서 항주까지 직선으로 뚫은 것이다.이 운하는 해하(海河), 황하(黃河), 회하(淮河), 장강(長江) 및 전당강(戰䕋江)의 주요 5대 수계를 연결하였으며, 전체 운하 길이는 약 1,794㎞에 달한다. 그리고 수양제의 대운하와는 달리 각 수계의 지류와 호수를 적절하게 연결해서 공사의 어려움을 줄이고 수량의 조절이 용이하게 했다.
이 운하는 실제로는 원대에 만든 것인데, 왜냐하면 원나라는 북경에 수도를 정했기 때문에 북경까지 식량을 운반해야 했다. 하지만 원대에는 수량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고 때문에 운하가 자주 막혔다. 그래서 운하 자체로 기능하지 못하고 바다로 식량을 옮기는 해운을 병행해야만 했다.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명대에서였다. 명나라의 영락제북경으로 천도하기로 한 다음 대운하를 보수, 증설하였는데 이 때 비로소 오늘날의 대운하가 완성되었다. 명대부터 제대로 기능하기 시작한 대운하는 대동맥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명대에 매년 강남에서 북경으로 실어나르는 식량의 규모가 원대의 운송량의 40배에 가까웠다. 훗날 들어선 청나라에서도 경항대운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세기 문제가 생겼다. 700년 간 태산 이남으로 흐르던 황하가 태산 이북으로 흐르게 된 것. 그 때문에 경항대운하의 물자수송 능력은 큰 타격을 받았다.

2.4. 현대


이 운하는 현대에도 남아 있으며, 그 기능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8] 물론 현대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육상 수송능력이 뛰어난 '''철도'''와 자동차, '''비행기''' 등의 다른 운송수단이 크게 발달했기 때문에 명청대에 비해선 그 비중이 떨어진다.

3. 건설효과


수나라의 패망 이후 종종 유학자들이 대운하 건설과 같이 무리한 토목공사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려 망국으로 이르게 한다는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부정적인 시각은 대체로 '작은 세입으로 작은 정부'를 추구했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게서 통영되는 것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자치통감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이 유학자에게만 통용되었는지에는 의문점이 존재한다. 수나라의 대운하 공사에 대한 비판은 무리한 토목공사에 대한 비판이지 대운하 자체를 불필요한 것이라고 서술하지 않는다. 이는 만리장성에 대한 비판과 유사하다. 당시 수나라는 대운하만 공사한 것이 아니라, 궁전 건설까지 다양한 토목공사를 진행하였고 이러한 여러 대공사의 진행은 국가적으로 무리가 오는 것은 사실이다. 토목공사는 오로지 인력으로만 하는데, 그만큼 인력을 동원한다면 농사짓는 인력이 부족하게 되어 식량산출입이 줄고 이는 국가경제에 큰 악영향을 미친다. 지금의 자본주의가 등장하는데 있어서 잉여농산물의 위치가 절대적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에 이러한 무리한 토목공사를 비판하는 것은 단순히 유학자의 입장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또한 대운하의 건설이 실질적인 효과를 내는 것은 당나라 때에 들어서였다. 심지어 당나라에서도 그렇게 효과를 보지 못했는데, 그것은 당시 선박기술이 그렇게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하만 뚫어 놓는다면 물류통상면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선박기술 또한 발전해야 한다. 특히 대운하의 경우 중국의 내륙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바람 변화가 심하다. 그러다보니 선박이 예정일에 도착하지 못하거나 역풍에 의해 운하 위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가 있었기에 단순히 운하만 판다고 물류수송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당나라에서도 운하는 단순히 세수로의 역할을 했을 뿐 이를 통해 경제적인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루어지기도 어려웠으며, 그만큼 잉여생산물이 넘치지도 않았다.
그러나 대운하가 아무런 효과를 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운하의 건설은 분명 물류통상의 혁명 기반을 마련한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기차를 발명하기 전에 운하는 그야말로 대량수송의 핵심적인 기반이었다. 대운하가 없었다면 강북과 강남의 경제권이 통합되거나 중국의 산물이 이동하는 효과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단순히 대운하만으로 물류통상의 혁명이 이루어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대운하라는 인프라가 설치되어 이후 강남의 발전이 중국 전반에 퍼질 수 있는 물류순환의 기반 역할을 하였고, 이를 통해 국가경제 발전을 견인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교류의 발전으로 인해 황하와 장강 등으로 나누어져 있던 북중국과 남중국을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통합시켰다. 그래서 대운하가 본격적으로 효과를 내던 송나라 이후에는 하나의 중국문화인 한족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수호지가 그러한 작품 중 하나이다.[9]
[1] 2016년 수정[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다른 기준과 함께 적용 권장)[6] 정확히 말하자면, 5대10국후량부터 개봉부에 수도를 두었다.[7] 갑문을 이용해 수위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산동반도를 정면으로 통과하는 새로운 운하가 생겼다. 명대의 새로운 대운하는 그러나 청나라 때인 19세기 초반에 황하의 유로번경으로 700년 넘게 산동 이남으로 흐르던 황하가 다시 산동 이북으로 유로를 변경한 여파로 몰락하였다.[8] 자연하천과 직결된 남방 한정. 산둥반도 구간은 이미 토사의 유입으로 완전히 기능을 멈추었다.[9] 물론 한족문화는 오래되었으나, 하나의 민족의 정체성이 형성은 송나라 시대에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의 한족의 정체성은 대운하뿐 아니라 외세의 침공이라는 변수도 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