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요
薯童謠
1. 개요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향가의 하나이다. 민간 설화가 향가로 승격된 예 중 하나이다.聞新羅真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 羙艶無雙, 剃髮來京師. 以薯蕷餉閭里羣童, 羣童親附之. 乃作謡誘羣童而唱之云.
"善化公主主隠,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夜矣卵[1]
乙抱遣去如."童謡滿京逹扵宫禁, 百官極諌竄流公主扵逺方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수도로 갔다. 마를 동네 아이들에게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그것은 이러하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善化公主主隠,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夜矣卵乙抱遣去如)"
동요가 도성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들리자 백관(百官)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했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무왕(武王) #'''
훗날 백제 무왕(武王)이 되는 서동(薯童)이라는 인물이 신라 경주에 가서 꾀를 내어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 결혼한 후 우연하게 얻은 금으로 사찰을 창건한다는 이야기가 '''서동 설화'''이며, 이 서동 설화에 등장하는 노래가 '''<서동요>'''다.
이 서동요의 내용은 한 마디로 선화공주가 방문을 열어놓으면 밤마다 맛동이 와서 자고 간다는 내용.
삼국유사의 <서동 설화> #1 무왕의 출생
삼국유사의 <서동 설화> #2 서동이 노래로 선화공주를 얻다
삼국유사의 <서동 설화> #3 서동이 왕위에 오르다
삼국유사의 <서동 설화> #4 미륵사를 짓다
2. 서동 설화
백제인인 가난한 서동은 마를 캐면서 살았기에 맛동이라고 불리었는데, 신라에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주면서 이 불순한 노래(서동요)를 부르게 하여 스캔들급 루머(헛소문)를 퍼트린다. 루머를 들은 왕은 공주를 궁궐에서 쫓아낸다. 결국 서동은 자신이 퍼뜨린 소문대로 결혼에 성공했다고 한다. 선화공주는 쫒겨나올 때 가져온 금을 떼어서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했고, 이를 안 서동은 마를 캘 때 나온 금이 산더미만큼 있다고 하고는 왕에게 인증까지 했다. 그리하여 서동은 어찌어찌 해서 금도 얻고 인심도 얻어 백제의 왕이 되고,[2] 결국 선화공주와 함께 유명한 백제 사찰인 미륵사[3] 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설화의 전문이다. 이 때문에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던 미륵사와 서동 설화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려사(高麗史)》[4]#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5]#에는 "말통(末通)대왕"이란 명칭으로도 나오는데, 이는 바로 "薯童"을 훈독한 "맛둥" 정도의 어휘를 적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만 선녀와 나무꾼처럼 현대의 시점으로 다시 본다면 문제가 있는 내용이다. 타국의 공주를 모해할 목적으로 노래를 지어서 퍼트린 것이 사실이라면, 현대 기준으로 명예훼손의 구성요건을 충족한다. 여성의 정절을 중요시하던 시대에 '''무고한 왕족 여성을 음란한 여자라 모함하여''' 비참한 처지로 만든 뒤 차지한 셈이다. 스스로 주장하면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크니 뭣모르는 아이들에게 알려주며 대신 퍼뜨리게 하는 치밀함까지... 요즘 이런 방식을 썼다가는 서세원이나 양원경 수준의 범죄자다.
이런 학문적 가치와는 별개로 내용 자체가 미천한 신분이던 자가 공주를 만나 왕이 되어 잘 살았다는 이야기니, 천 년도 넘는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대중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가진 향가이다.
여기까지는 참 쉬운데 이 뒤부터가 난관이다...
3. 풀리지 않은 문제
3.1. 서동요의 해석 문제
서동요 내용 자체는 4구체로, 현존하는 모든 향가 중에사 제일 짧은데, 특히 마지막 구의 해석을 두고 두 학설이 첨예히 대립하고 있다. 여기서는 양주동과 김완진 두 사람의 설에 기초하여 원문을 제시한다.
(본 문장은 본고딕(Source Han Sans, Noto Sans CJK) 체나 함초롬체 LVT(아래아 한글 문서 참고), 혹은 네이버 나눔바른고딕 옛한글 서체(나눔글꼴 문서 참고)가 설치돼 있으면 제대로 보인다.)
- 夘[8] 乙의 해석
- 抱遣去如의 해석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Alexander Vovin) 교수는 서동요가 백제어(고대 한국어의 방언)로 쓰였다는 설을 내놓았다. 서동요에서는 대격 표지로 乙(을, ur)을 사용하는데 고려 광종(고려) 대의 승려 균여가 지은 보현십원가와 예종(고려)이 지은 도이장가를 제외한 신라에서 만든 다른 모든 향가가 대격 표지로 肸(힐, gur)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빈은 이를 백제어에서는 gur에서 g가 탈락했던 것으로 해석한다. g는 연구개음으로 탈락하기 용이하다고 한다. 또한 삼국사기의 백제 고유명사에서 乙은 여러차례 사용되었던데 반해 肸은 사용된 적이 전혀 없었던 것에 근거해 이것이 고대 한국어의 방언인 백제어의 음운론적 특성이며 이런 특성이 서동요에도 반영된 것이라 주장하였다. 논문 링크
하지만 이후 현존하는 서동요는 삼국시대가 아니라 고려시대에 지어진 향가이기 때문에 다소 특이점이 있다는 게 밝혀져 남풍현 교수의 이론대로 서동요, 처용가, 풍요를 고려시대 향가로 분류하게 되었다. 보빈 교수 또한 최근에 출간한 논문을 보면 역시 이 가설을 포기한 듯하다.[10] 실제로 이승재 교수가 출토한 백제 목간을 보면 백제어의 표기법 자체가 서동요의 훈주음종(訓主音從) 표기와 완전히 다르다.
3.2. 기원이 된 설화
3.2.1. 백제 동성왕의 혼인동맹
사학자 이병도가 제기하였다. 그는 동성왕의 이름인 모대(牟大), 모도(牟都), 말다(末多)[11] 등이 서동(薯童)의 우리말 음인 맛둥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도 말통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 역시 동성왕의 여러 이름들과 그 발음 형태가 상당히 비슷하다. 그래서 이 시기에 신라와 국혼한 사실이 있음을 연결지었다. 일반적으로 이병도가 발음의 유사성만 들이밀은 학설은 후대에 대부분 부정당하는 경향이 큰데, 이 학설만은 의외로 신빙성이 높다. 이병도가 언급한 동성왕과 신라 이찬 비지의 딸 사이의 결혼 동맹은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백제의 왕이 신라 귀족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정식 역사서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유일한 경우가 동성왕이다. 이는 아래의 마나노장자설과도 잘 맞물려 들어가고 있다.
서동요에서는 신라 국왕의 공주로 나오지만 동성왕대의 이 결혼 동맹은 귀족의 여식인 부분이 다르다고 볼 수 있지만, 신라 이찬 비지의 가족관계 기록은 없어도 일단 최고 관등 이찬이면 이미 왕족에 매우 근접한 성골/진골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동성왕과 결혼한 신라 여성은 이미 왕녀나 다름없는 신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추측은 앞서 말한 무강왕의 무덤과 맞지 않는데, 5세기의 인물인 동성왕은 7세기 이후의 양식인 고분보다 이른 시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설명하기가 애매해진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왜 설화에 무왕 시대에 창건한 것이 확실한 미륵사 이야기가 포함됐는가를 설명하기가 힘들다.
3.2.2. 일본의 마나노 장자 전설
공교롭게도, 일본 오이타현 분고오노시(豊後大野市)에는 마나노 장자 전설(真名野 長者 伝説)이라는 서동 설화와 아주 흡사한 전설이 있다.
>508년 분고국(豊後国) 마나 벌판(真名の原)의 타마다 마을(玉田の里)[12] 에 토지(藤次)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토지는 3살에 아버지를, 7살에 어머니를 잃어 거리를 헤매는 고아가 되었다. 이를 후카다 마을(深田の里)의 스미야키(숯장이) 마타고로(炭焼き 又五郎)가 거두어 주었으나 토지가 21세가 되었을 때 양부모는 81세, 79세의 나이로 차례차례 세상을 떠났고 토지는 이름을 코고로(小五郎)로 바꾸어 가업을 이어갔다. 당시 수도(현 나라현)에는 쿠가 대신(久我 大臣)의 딸로 타마츠히메(玉津姫)라는 공주가 있었는데 타마츠히메는 10세부터 얼굴과 몸에 추한 반점(혹은 사마귀)가 생겨 가족이 모두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공주는 15세가 된 해의 어느 날, 일념발기(一念発起)하여 야마토국(大和国)의 미와묘진(三輪明神)[13] 에게 인연 맺음(縁結び)의 기도를 드려보기로 하였다. 공주는 미와 마을(三輪の里)의 거울 연못(鏡の池)에서의 목욕재계와 칠일칠야(七日七夜)의 단식을 하고 9월 하순 만월의 날에 신사를 찾아갔으나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고 호우가 쏟아져 배전(拝殿)에서 쉬다가 그만 잠이 들어 꿈을 꾸게 되었다. 꿈 속에서 용모가 아름다운 어떤 노인이 나타났는데 노인은 "너의 남편이 될 사람은 멀리 바다와 산을 넘어서 있는 분고국 마나 벌판의 스미야키 코고로라는 남자이며 지금은 비록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어리석고 천한 자이지만 이 자와 결혼하면 부귀를 누려 남편은 대장자(大長者)가 될 것이다. 결코 의심하지 말지어다."라 하였다. 그리고 노인은 삼나무 잎으로 공주의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정성껏 정화해주며 "그대의 장래를 수호하겠다."고 말하였다. 공주가 꿈에서 깨니 곁에 삼나무 잎이 한 개 있었다. 공주는 하늘을 우러러 보고 신께 엎드려 절한 뒤 부모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대신 부부는 먼 여행길이 걱정돼 반대하였으나 공주의 결심은 확고해 마침내 허락하게 되었고 다음 해 2월, 16세가 된 공주는 부모님께 받은 황금을 몸에 지니고 코고로를 찾아 분고국(豊後国)을 향해 떠났다. 이하 생략. 마침내 코고로를 만났으나 코고로는 가난 때문에 결혼은 무리라고 하였다. 공주는 지참으로 갖고 온 황금을 건내며 쌀을 사오라고 하였다. 코고로는 쌀을 사러 가다 연못의 오리를 잡으려고 손에 있는 황금을 집어던졌지만 전부 빗나가서 빈손으로 돌아왔다. 공주는 어이가 없어서 그건 황금이었다고 하자, 코고로는 자신은 그게 황금인지 몰랐으며 그런 돌은 산의 세 연못과 숯불가마 주변에 얼마든지 널려있다고 대답한다. 공주가 놀라서 찾아가 보니 수많은 황금과 사금이 널려있었다. 황금이 널려있던 연못에서 몸을 씻자 공주의 피부병은 완전히 나았고 연못물을 마신 코고로는 지혜로운 미남자가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하고(531년) 호화로운 저택(御殿)을 지었는데 이에 코고로는 마나노 장자(真名野 長者)로 불리게 됐다. 이하 생략. 원문
이 설화에 나오는 마나노 장자가 서동이라면, 아무래도 7세기의 인물인 백제 무왕은 연대가 맞지 않는다. 마나노 장자 전설은 6세기 경에 나왔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백제에서 전해져 왔다고 가정했을 경우 백제의 서동 설화보다 연대상 앞선 것이 되기 때문. 이 때문에 서동 설화가 마나노 장자 전설과 동일한 이야기임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서동이 무왕이 아니라 5세기의 인물인 동성왕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는 위의 이병도가 주장한 동성왕설에 비추어본다면 나름대로 잘 맞물려진다. 무령왕과 마찬가지로 동성왕 역시 일본 출생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점을 고려하면 두 설화 간의 연결고리는 충분하다. 다만 이 경우에는 동성왕설과 같은 약점을 가지게 된다.기존 학설에 이러한 내용을 추가하여 2011년 12월 15일에 KBS 역사스페셜에서 방영하였다. 여러가지 학설이 실린 기사
3.3. 서동의 정체에 대한 문제
이 서동요가 전해져오는 삼국유사에 따라 서동이 무왕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세부적인 역사적 정황과 모순되는 점이 많아서 서동 설화가 진짜 있었던 일인지, 진짜라면 서동이 진짜 백제 무왕이였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일연은 "고본에는 백제 무강왕(武康王)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백제에는 무강왕이라는 왕이 없다"고 언급하면서 무왕으로 '바로 잡은' 것. 여기 무왕이라는 것이 단순한 일연의 추측인지, 일연이 참고한 여러 자료 중에서 무강왕이라는 기록과 무왕이라는 기록이 모두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과연 일연이 올바르게 추정한 것인지에 대해서 조차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선 무왕이 살았던 시기는 이미 그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관산성 전투 이래로 신라와 백제가 한참 원수지고 끝없이 격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이러한 점에서 백제의 거지에 불과한 미천한 신분의 서동이 신라 공주와 결혼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한편으론 성왕이 한강 유역을 내준 직후[14] 왕녀를 진흥왕의 소비로 보냈다는 기록 때문에 가능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또한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면서 나온 사리함의 기록에는 미륵사를 중건한 왕비가 백제 관료의 딸로 보이는 기록이 적혀 있어서 설화에 나오는 신라의 선화공주라는 말과는 맞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때문에 과연 무왕이 진짜 서동인지, 혹은 서동 설화 자체가 거짓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조동일 등 일부 인문학자들은 아예 선화공주가 후에 추가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조선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15] 에는 익산군에 있는 오래된 무덤인 쌍 고분(雙陵條)에 대해 "쌍릉은 오금사 봉우리 서쪽 수백보 되는 곳에 있는데, <고려사>에 후조선(後朝鮮)의 무강왕(武康王)과 왕비의 능이라 하였다. 그런데 속칭 말통대왕(末通大王)능이라 한다. 일설에는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인데 말통은 즉 서동이 변한것이라 한다" 고 모호하게 기록하고 있다. 후조선은 마한이다. 마한을 '후조선'이라고 하는 이유는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을 차지했을 때 준왕이 한반도로 와서 마한을 세웠다는 설 때문이다. 문제는 이 기록 때문에 무강왕과 서동 그리고 무왕의 관계가 뒤섞였다는 것이다.자료
또, 일본의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枳慕密地, 익산 금마)로 천도하고 새로이 제석정사(帝釋精舍)라는 사찰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무광왕이 대체 누구인지, 백제의 무왕인지, 마한의 무강왕인지에 대해서 이견이 있다. 혹은 무강왕이 사실은 백제의 무왕의 또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참고로 이 쪽은 이쪽 나름대로 익산에서 왕궁으로 추정되는 유적(왕궁리 유적)이 발견되면서 "백제가 과연 익산에 천도했느냐, 했다면 누가 했느냐" 등의 문제로 번져서 골치아픈 상황기사 하여간 이 무강왕의 존재로 인해 서동요의 작자인 서동의 정체와 백제 무왕, 그리고 마한 혹은 백제의 무강왕이 얽히게 되었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학설이 분분하게 되어서 혼란의 극을 달리고 있다. 거기다가 일반인 입장에서는 환빠마저 달려들고 있는 상황이라 아무 설을 정설로 받아들이기에는 애매한 상황이다.
하여간 아직 확답이 없다. 대표적인 학설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3.3.1. 백제 무왕설
삼국유사 이후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설이다. 서동은 곧 백제 무왕이며, 왕비는 신라 진평왕의 3녀 선화공주라는 것. 일단 1차 사료인 삼국유사에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강력한 설이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서동 설화 외에도 미륵사 창건 설화와 관련된 무왕의 기록 하나 더 존재한다. 삼국유사 3권 흥법(興法) 법왕금살(法王禁殺)편 “법왕(法王)이 부여에 왕흥사(王興寺)를 처음 짓기 시작하고, 무왕(武王)이 35년에 걸쳐 왕흥사를 완성하니 이 절을 미륵사다. 이 때문에 쉽게 서동이 백제 무왕이 아니라고 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2009년 1월 19일 미륵사지 석탑 해체 및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금제 사리봉안기(金製 舍利奉安記)에는 미륵사가 무왕의 시기에 창건되었다고 쓰여있었다. 반면 문제가 된 것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 왕비가 미륵사의 건립을 발원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 이는 미륵사를 창건한 왕의 왕비가 백제 귀족 사택씨 가문의 딸이라는 말이기에 이 학설의 힘이 빠지게 되었다. 설화에는 선화공주가 신라 왕의 딸이기 때문. 또한 앞서 말했듯이 당시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험악했기에 결혼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한편으론 성왕이 한강유역 뺏긴 직후 왕녀를 진흥왕의 소비로 보냈다는 기록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기도 한다.
이 때문에 서동 설화 자체가 거짓이거나, 서동이 무왕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좀 더 커졌다. 서동 설화가 거짓이었다고 하면 간단한 문제겠지만, 워낙 인기있는 설화고, 삼국유사에 나온 기록 때문에 서동요 역시 아주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불국사의 창건 설화처럼 전부 사실은 아니래도, 사실에 부분적인 스토리가 덧붙여져 완전한 거짓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도 많이 있으니... 그래서 현재는 보완차원에서 무왕의 왕비가 여러명이었거나, 기록에 나온 사택 왕비는 선화공주의 사망 뒤에 들인 후처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현대 한국인들에게 부인은 한 명뿐이고 조선시대까지도 첩실 이외 정실부인은 무조건 한 명이어야 했으므로 착각하기 쉽지만 조선 태종 이전까지는 신라도 고려도, 조선 초 이성계 때까지도 왕이면 정실부인이 여러 명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부인 많기로 유명한 태조 왕건의 경우 정실부인인 '왕후'가 6명이고 첩실에 해당하는 '부인'은 24명이었다. 조선 태종부터 정실부인은 단 1명, 후궁은 여러 명까지 가능으로 바뀐다. 때문에 백제 무왕도 사택씨 왕후의 존재가 밝혀졌다고 해서 곧바로 선화공주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백제사 연구자인 노중국 교수도 "고려 태조 왕건은 정비만 6명을 뒀다. 선화공주와 사택왕후 모두 무왕의 정비였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무왕의 왕후가 여러 명이었다고 추정하는 또다른 근거로, 왕후가 한 명이면 성씨를 쓰지 않고 그냥 왕후라고 하면 되는데 미륵사지 사리봉안기에서 굳이 사택씨 왕후라고 성씨를 적은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백제 가까운 시대인 무령왕릉의 사례를 보면 무령왕의 지석은 내용이 자세하지만 왕비의 지석은 성씨를 생략하고 있기 때문에, 무왕의 경우 왕후가 여러 명이니 굳이 성씨까지 표기써서 특정한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16]
전북 익산 대왕릉에서 신라 토기로 추정되는 유물이 나와 선화공주의 무덤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었지만, 2018년 뼈 분석을 통해 익산 대왕릉은 결국 백제 무왕의 것으로 밝혀졌다.
3.3.2. 마한의 성읍국가 설
건마국의 무강왕에 대한 설화란 가설이 2000년대에 들어 힘을 얻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후조선(後朝鮮)의 무강왕(武康王)과 왕비의 능"이라는 기록을 바탕으로로 서동이 기원전 마한의 왕이었던 무강왕(武康王)이라는 마한왕설이 나왔다.
이에 따르면 같은 기록의 "백제의 무왕"이라는 언급이나 미륵사와 연결된 것은 후대의 이야기와 섞인 것으로, 원래 서동의 설화는 마한의 이야기며 무강왕은 마한의 왕(혹은 마한에 속한 한 소국의 왕)이라는 것이다. 즉 이 설을 따르면 이국의 공주와 결혼한 것은 마한의 무강왕이며, 백제 무왕은 무왕대로 백제의 미륵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것을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다가 마한의 무강왕이 백제의 왕인 줄 알고 백제의 왕 중 이름이 가장 비슷한 무왕으로 끼워 맞췄다는 추측이다. 이 경우에는 미륵사탑의 기록에도 맞고, 서동 설화 역시 무리없게 된다. 오직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잘못 추정한 것이 된다.
이 학설은 서동 설화의 내용 자체도 근거로 한다. 서동 설화를 보면 서동은 사람들의 인망을 얻어 왕이 되었다고 하고 있을 뿐 당시 서동이 살던 지역의 국가나 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어서 건국신화와 같은 느낌을 준다. 또한 무왕의 시대인 7세기는 '왕가와의 혈연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 설화적 인물이 왕이 되기에는 시대가 너무 늦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하지만 1916년에 벌어진 발굴 결과 쌍릉 양식이 판석제 돌방무덤이며, 7세기의 백제의 무덤양식과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와서 무덤 주인이 마한의 왕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어졌다.
실제로도 이 쌍릉은 사비시대의 능산리고분의 양식과 일치하게 되어 그 주인이 백제 무왕의 무덤일 것이란 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참고로 이 쌍릉은 미륵사지의 멀지 않은 정 남쪽에 있으며, 쌍릉의 동쪽에는 왕궁리 유적이 매우 가깝다. 지리적으로 봐도 백제랑 연관성이 많다.
이로 인해 미륵사 측에서 통일신라 대에 사찰의 역사를 넓히기 위하여, 혹은 신도를 모으기 위하여 무강왕의 설화를 차용한것이란 견해 또한 존재한다. 이 경우 아마 가장 정확한 학설이 될것이다. 관세음응험기의 '무광왕'은 왜 백제 왕으로 기록되어 있는가란 의문만 해소되면 되는것이다. 이 때문인지 한국민속박물관 측에서도 이설에 따라 서동요가 무강왕의 마한 건국 설화이며, 무강왕의 도읍, 백제 별궁의 위치, 미륵사의 위치 등의 여러 역사적 사실들로 인해 미륵사 창건 설화가 정립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더불어 학계에서는 익산에 위치했던 마한계 국가인 건마국을 두고, 목지국이 백제 아래로 통합된 이후 나머지 마한 세력을 통솔했던 중심세력이었다고 본다. 금마면에 위치한 이 건마국은 서동요의 신화 요소들과 음운학적으로도 알맞고, 위치도 일치하며 국력도 작지 않은 만큼, 건마국의 설화가 서동요로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라 추정키도 한다. DBpia를 비롯한 많은 학술저널의 논문에서 서동요의 발생지를 건마국에 비정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관련으로 소수 견지로는 건마국이 아닌, 목지국의 준왕에 대한 설화란 주장도 존재한다.
3.3.3. 기타 소수설
3.3.3.1.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설
김서현의 처인 만명부인이 바로 신라 고위 왕족 혈통의 공주이며, 김서현은 멸망한 옛 '''가야의 왕족'''(셋째 왕자 김무력의 아들)이라는 것을 감안해 보면 꽤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둘이 결혼할 때도 신분 차이 때문에 트러블에 야반도주에 가까운 탈출극이 있었기도 하다. 즉 이 사례가 남자 주인공의 국적만 백제로 와전되었다는 설이다. 자세한 사정은 만명부인 또는 김서현 문서를 참고.
3.3.3.2. 백제 무령왕설
사재동이 주장하였다. 무강왕의 康자가 무녕왕의 寧자와 의미가 통하는 등을 근거로 하고 있다. 또한 무왕의 시기는 백제 국력이 좋지 못한 시기라 미륵사 수준의 큰 절을 창건하기 힘들었을 것이란 점이 요지.여기
3.3.3.3. 원효설
김선기의 학설로, 서동이 실제로는 신라 승려 원효라는 것이다. 물론 위의 그 어떠한 학설보다도 신빙성이 낮다. 근거라고 해야 실제로 신라 공주였던 요석공주와 이어진다는 공통점과, 원효의 출가 전 이름인 '설서당'의 서당과 서동의 유사성 정도다. 문제는 서동요 설화가 백제 측 구전임이 확실하고, 서동의 서(薯)는 음차가 아니라 훈차라서 "마"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3.4. 익산 미륵사지 석탑 금판 사리봉안기 해석 문제
2009년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에서 금제사리기(金製舍利器)와 함께 발견된 한 장의 금판에 담긴 내용 때문에 서동 설화의 진위 자체가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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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을 만들고 부처님 사리를 모신 경위를 금판에 새겨놓은 사리봉안기(奉安記)가 무왕의 왕후는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고관의 딸이라고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가로 15.5㎝,세로 10.5㎝ 크기의 금판 양면에 글자를 음각(陰刻)하고 글자마다 붉은 색을 칠한 사리봉안기 앞면에는 1행 9글자씩 모두 11행 99자를,뒷면에는 11행 94글자를 새겼는데, 미륵사와 석탑을 언제 누가 세웠는지 밝혀놓았다.
김상현 동국대 교수가 번역한 바에 따르면 봉안기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좋은 인연(善因)을 심어…깨끗한 재산을 희사하여 절을 세우시고,기해년 정월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륵사 석탑의 창건 연대는 무왕 재위 기간인 639년이며, 무왕의 왕후는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을 지낸 사택의 딸이고, 미륵사는 좌평의 딸인 왕후가 재물을 보시하고 창건했음이 밝혀졌다. 좌평 벼슬을 지낸 '사택'은 백제의 8대 성씨 가운데 하나로 노중국 계명대 교수는 "성왕이 사비로 천도할 때 이를 지지했던 핵심 귀족"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봉안기의 기록만으로 두 사람의 로맨스를 허구로 단정짓기엔 무리라는 의견도 있다. 사리봉안기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백제 왕후가 재산을 기부한 일, 이를 토대로 가람(절)을 세운 일, 639년 정월에 사리를 석탑에 안치한 일 3가지다. 이것만으로는 선화공주가 무왕의 왕후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고 미륵사의 창건 시기도 639년으로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석탑에 사리를 봉안한 시점과 사찰의 창건 시점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무왕의 재위기간이 워낙 길어서 왕후가 여러명일 수도 있다는 것.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을 발원했으나 수십년이 걸리는 탓에 완공을 보지 못하고 일찍 타계한 뒤 다른 왕후가 서탑을 세웠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이번에 사리기와 봉안기가 발견된 석탑은 서탑인데 동탑이나 중앙의 탑에 선화공주에 관한 기록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즉, 서쪽 가람은 백제 귀족의 딸인 후대 사택왕후가 짓고 중원은 선대 왕후인 선화공주가 세웠을 수도 있다. 실제로 동서에 각각 탑이 있는 사찰의 두 탑 모두에서 사리기가 각각 출토된 경우도 미륵사와 창건 연대가 멀지 않은 경주시 감은사지를 비롯해 김천시 갈항사지, 장흥군 보림사 등등 몇몇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대 신라의 황룡사도 그랬던 것처럼[17] 미륵사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과정을 거치며 오랜 세월 속에서 완공되어서 무왕, 선화공주, 사택왕후가 모두 미륵사 건립의 주체라고 보는 설도 있다.
3.5. 밝혀졌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무왕의 비 중 신라의 왕족 여인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등장했다''' 라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익산지역 쌍릉의 발굴 결과, 무왕과 같이 묻힌 왕비가 무왕보다 먼저 죽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 경우 사택 왕후의 경우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왕보다 늦게 죽었으므로 사택적덕의 딸이 아닌 무왕의 첫째 비가 존재했을 것이다라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관련기사 1, 2. 이는 무왕의 다른 비가 존재했을 가능성이기 때문에 이걸로는 서동요의 주인공이 무왕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못 된다. 선화공주가 익산 성주의 딸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 역시 선화공주는 신라왕의 딸일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대체자를 선택한 것이었다.
2016년 쌍릉 출토 유물 재조사 결과 '''20대-40대 사이 여인의 유골'''과 '''신라제 토기'''가 나오는 바람에 신라 공주까진 아니어도 신라 왕족 여인이 이 무덤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아진 상태다. 기사
그러나 이 이주헌의 논리는 학계의 많은 질타를 받고 있다. 치아 분석은 마모흔 분석에 의한 것이여서 그 한계가 분명하다고 보고자 스스로가 그 자인하고 있으며, 쌍릉은 정식 발굴된 무덤이 아니라서 고고학적 정황도 충분하지 못하다. 고고학도들이라면 학부때 배우겠지만, 치아 감식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학적 분석 기법은 고고학적 정황에 기반하지 못하면 고고학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더군다나 쌍릉은 추가장이 가능한 횡혈식석실분 구조이며, 일제 발굴 후 거의 100년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주헌이 그 근거로 제안한 대왕릉 출토 연질토기는 신라토기라 볼 수 없다. 이주헌이 발표한 세미나에서 토론자 최완규를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그 사실을 지적하였다.
정리하자면 선화공주라는 증거는 여전히 없으며, 앞으로 검증해나가야 할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정황상 쌍릉은 백제 사비기 분묘인 능산리형 무덤 중에서도 후기 형식이면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크기 때문에 무왕릉으로 볼 수 밖에 없으며, 소왕릉은 왕후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능묘의 입지가 산 정상부로 바뀌고, 봉분의 규모가 커진 것도 당시 당나라 황제릉인 헌릉과 소릉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미륵사 출토 사리외호와 사리내호는 배경을 원문 정으로 눌러서 원문으로 가득 채우는 어자문 기법이 돋보이는데, 그러면서도 배경을 성글게 채운 형식으로 수말, 당초에 해다한다. 또 대왕릉 출토 옥 대장식구는 역시 당식 대금구가 정립하기 이전 양식으로 수나라말 당나라 초기의 형식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무왕의 수많은 수나라, 당나라 교섭기사 등에서도 당나라와 백제 무왕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결국 대왕릉 추가발굴에서 60대 성인 남성의 유골이 발견됨에 따라 이주헌이 제기한 학설은 사실상 입론의 여지를 잃었다.
[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자료에서는 夘을 卵의 오자로 보았다는 설을 채택한 듯하다.[2] 근데 이 부분부터 잘 살펴보면 뭔가 이상하다. 가난하게 살고 있던 백제 서민이 신라의 공주가 결혼해서 부자가 되는 시나리오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 왕이 된다면 당연히 아내랑 연이 있는 신라 왕이 되어야지 뜬금없이 백제 왕이 되고 있다. 딱히 서동이 백제 몰락왕족이라든가 하는 언급 하나 없는데도 말이다.[3] 彌勒寺. <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주석이 있음[4] 俗號末通大王陵, 一云, 百濟武王, 小名薯童. 권57(지(志) 권제11) > 지리2(地理 二) > 전라도 > 전주목 > 금마군 항목.[5] 在郡西北五里許, 谷呼武康王爲末通大王.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전라도 전주부 익산군[6] 남 몰래 정을 나누고/남 몰래 시집가고[7] '얼다'는 '결혼하다, 정을 통하다'를 가리키는 옛말로 '어른'의 어원이기도 하다.[8] 자전에 나오는 夘의 풀이는 다음과 같다. ①누워뒹굴 원 ②蜿(꿈틀거릴 원/완)의 이체자 ③鴛(원앙 원)의 이체자 ④卯(넷째지지 묘)의 이체자 ⑤外(바깥 외)의 이체자 ⑥卬(나 앙)의 이체자 ⑦卿(벼슬 경)의 이체자[9] 현대의 한자음대로 음차하면 '묘을'[10] 보빈 교수는 논문 양이 워낙 많고 본인의 이론도 꽤 많이 바뀐 편이라 최근 논문을 보는 게 중요하다.[11] 일본 서기에 기록된 이름[12] 후에 미에 마을(三重の里)이라는 이름이 붙는다.[13] 현 나라현 오미와신사(大神神社)[14] 사실 이것도 신라가 백제의 통수를 쳐서 뺏었다기 보다는 백제가 유지할 여력이 안 돼서 내려온 틈에 신라가 무주공산이 된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견해가 현재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15] 동국여지승람의 증보판[16] 한국 고대사의 기본 사료 p.98[17] 진흥왕 때 창건되고 9층 목탑은 선덕여왕 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