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라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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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락해방동맹의 전신격 단체인
수평사(水平社)의 깃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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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부락해방동맹의 깃발
1. 개요
2. 역사
2.1. 오랫동안 유지된 이유
2.1.1. 인도와의 비교
2.1.2. 대한민국과의 비교
2.1.3. 중국과의 비교
2.1.4. 일본 사회의 특수성
2.2. 일본과 유럽의 차이
3. 인구
4. 차별
4.1. 과거
4.2. 현황
4.3. 넷상에서
5. 대책
6. 창작물에서
7. 부라쿠민 차별 사례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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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部落民(ぶらくみん(부락민)/被差別部落民(ひさべつぶらくみん(피차별부락민)
부라쿠민[2]은 전근대 일본의 신분 제도에서 최하층에 위치해 있었던 천민을 가리키는 단어이자, 그 후손들을 현대 일본 사회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차별하고 비하하는 증오발언[3]이다. 부라쿠민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사민평등[4]이 선포된 후 평민 계급으로 흡수되었으나, 기존 평민들이 에타·히닌으로 불리던 구 천민과 동일시되는 것을 거부하고 신(新) 평민이라고 부르며 차별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신분제의 철폐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일본 사회의 최하층을 차지하는 집단이다.
물론 부라쿠민 계급은 현대 일본에서 법적으로 존재치 않고 다른 자본주의 국가처럼 그 중에서 재벌[5], 상류층·중산층(서민층)·하류층 하는 식으로 자본과 권력, 명예 등에 따라 나뉘는 다양한 계층이 존재하지만, 부라쿠민의 문제는 다른 계층과는 달리 재산이나 인맥 등이 아닌 혈통과 그들이 모여 사는 지역[6]에 의해 차별받는 것이다.

2. 역사


어원은 '히사베츠부라쿠민(被差別部落民, 피차별부락민)'. 이 단어가 줄고 줄다 보니 부락민, 즉 부라쿠민이 되었다. 현대 한국어부락은 그저 마을을 뜻하는 평범한 한자어에 불과하고, 실제 언어생활에서도 흔히 쓰이고 특별히 부정적인 어감은 없다. 원래는 일본어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부락이란 단어가 시간이 지나면서 잘 안 쓰이게 되고 그 파생어인 부라쿠민만 부정적인 뜻으로 남아서 쓰이다 보니, 상위 개념인 '부락'의 어감마저 나쁘게 뒤바뀌었다. 일본에서는 이 단어 자체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여기므로, 만약 일본어로 문장을 쓸 일이 있다면 부라쿠민이라는 단어를 매우 조심해서 작성해야 한다.
상술했듯 이 단어는 일본인들에겐 모욕 그 자체다. 실제로 소설 등에서 '부락'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썼다가 시민단체에서 항의가 들어와서 이미 전국 서점에 풀린 책을 모조리 회수하거나, 심지어 판매가 금지되는 일도 일어났을 정도이다. 야채부락리의 일본판 이름 역시 부락에 매우 비하적인 의미가 있기에 바뀌었다. 그래서 부락을 대체할 슈라쿠(集落, 집락)라는 단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인터넷에선 부라쿠민 (burakumin) 라틴 표기 앞글자만 딴 B라는 은어가 주로 사용된다. 또한 강 건너(川の向こう)라는 식의 속어도 쓰인다.
(부라쿠민 출신인 듯한) 소설가 나카가미 켄지(中上健次)는 "골목길(路地)"이라는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그래도 예외는 있는지, 정말로 저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재특회 같은 극단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일본 사회가 우경화되어 간다지만 저렇게 부라쿠민 차별을 공언하고 다니는 사람은 사람 취급을 안 해 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 천민 계급의 기원은 확실한 것이 없다. 이것은 근대 일본이 군국주의화되면서 야마토 사상을 꺼내들었던 것의 여파라고 추정되는데, 당시의 일본은 아이누를 비롯해서 일본 인근 지역을 사실은 전부 일본 땅이라는 대일본주의 주장을 펴기 시작했고, 이들과 이들의 토지를 흡수하면서 '일본의 위대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소수 집단의 역사를 부인하고 일체화했기 때문이다.[7]
이 과정에서 많은 자료들이 사라졌고, 이에 따른 연구의 진보는 미미한 상태. 천민 계층의 기원 시점은 근대, 중세, 고대로 나뉘어지며 근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집권 기간이었던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중세는 11세기라고 보는 것이 보편적. 에도 시대에는 천민 계급을 에타(穢多, 예다),[8] 히닌(非人, 비인)[9]이라고 불렸다. 에타는 직업과 상관 없이 혈통으로 결정되거나 나병등의 전염병 환자를 뜻했고, 히닌은 터부시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혹은 부락으로 도망친 범죄자 등을 뜻했다. 즉 망나니, 장의사, 백정 등을 주로 뜻했다.[10]
에타의 탄생도 일본이 여러 국가나 부족 등으로 쪼개져 전쟁을 하던 시기에 피정복당한 세력이 그 바탕이라느니, 외국에서 표류해 온 무리를 노예로 삼은 것이라니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민속학자 아카마츠 케이스케(赤松啓介, 1909 ~ 2000)[11]의 연구에 의하면 적어도 전국시대에는 이미 에타 내지는 그에 준하는 집단이 존재했다고 한다.
과거의 일본은 지배 계급인 무사 층에 불만이 몰리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계급간의 불화(차별)를 부추겼으며,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민 평등을 실현하기 위하여 제도적으로 신분 계급을 없애면서 이들을 모두 평민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사람들은 에타 출신 평민들을 '신(新) 평민'이라 부르며 여전히 차별하였다. 메이지 시대가 화족 등의 소수의 사회 고위 계층에 이끌려갔던 시대였던 만큼 결코 차별이 사라지지는 않았고,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2차대전 패전 이후에도 문제되는 일부만 잘라내고 나머지 시스템은 그대로 이어간 것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12]
아무튼 그렇게 차별당하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피차별 부락,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피차별부락민이라고 부르게 되면서 부라쿠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구 천민 계급만이 부라쿠민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피차별 부락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을 부라쿠민이라고 부르는데, 에타나 히닌의 집단 거주 지역 이외에도 전쟁포로·전염병 보균자·옛 에조·하야토·구마소 등의 집단 거주 지역이 피차별 부락으로 분류되었다. 부락 내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이 부락 밖으로 나가거나, 부락 밖에서 빈곤한 사람이 생활비가 싼 부락으로 유입되는 경우는 계속 있었고, 시즈오카 현에서는 민간 음양사가 메이지 초기 음양사 폐지령 이후 실직하여 빈곤으로 인해 피차별민으로 간주된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그 외에도 부락 밖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부락으로 유입되는 경우가 있다.
1884년 도쿄 대학에 인류학회가 생기면서 부라쿠민의 기원 등에 대한 연구도 시작된다. 그러나 당시의 기관지를 보면 신분제가 철폐되었음에도 당당하게 에타라는 멸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에 연구 중에는 심지어 '안구가 빨갛고 고기를 먹기 때문에 조선인에서 기원한 것'이라는 황당한 내용을 주장하는 것도 있었다.[13][14] 당시 일본인들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이만큼이나 진보했는데, '저런 미천한 자들이 일본인일 리가 없다!'는[15] 선민사상에서 나온 주장. 1908년에는 전국적인 지방개선 운동을 시행하며 미에현에서는 부락 개선정책도 같이 시행되는데, 이것은 차별 대책이 아닌 치안 대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빈곤층에서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데, 당시 미에 현 빈곤층의 대부분은 부라쿠민이였기 때문이다. 이때는 에타의 타인종 도래 기원설을 반영하여 도쿠슈부라쿠(特殊部落특수부락 혹은 特種部落특종부락)라고도 불린다.
물론 그렇다고 차별을 가만히 두고 보기만 했던 건 아니다. 1922년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수평사(水平社)가 등장하여 부라쿠민 해방 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발표된 수평사 창립 선언문은 일본 최초의 인권선언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수평사는 이후 여러 조직으로 갈라져 버렸고 완전한 해방을 달성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2.1. 오랫동안 유지된 이유


여기까지라면, 노예 등 천민 신분이 유지되던 세계의 여러 전근대 국가들과 다를 바가 없다. 문제는 이런 천민 거주 집단을 차별하는 사회적 풍토가 일본에 현대까지도 계속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이 받던 대접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는 전근대 시기의 신분제 질서가 남아 있던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2.1.1. 인도와의 비교


인도는 카스트 제도를 법적으로 완전히 철폐했다.[16] 물론 말 그대로 법적으로만 없어진 것인지라 아직 시민들의 뇌리 속에 카스트의 잔재는 상당히 남아있지만, 타고난 직위보다는 경쟁력이 더 중요시되는 21세기 사회의 물결 아래 인도 정부가 경제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하위 카스트에게 복지, 세금 감면 등 많은 사회적 혜택을 제공하는 식으로 계층간 평등화를 꾀했고, 인도로 진출한 많은 외국계 대기업들이 '카스트? 신분이 낮으면 어때, 일 잘하는 사람이 장땡이지.'하면서 그런 거 전혀 신경 안 쓰고 어디까지나 능력만으로 사람을 뽑아다 쓰다 보니, 점차 인도 대중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아닌 능력과 사회적 지위를 인정하는 경향이 퍼져나갔다. 오히려 법률로는 '카스트에 따른 차별은 금지한다.'는 조항이 있을 정도.
외국계 기업과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적은 시골 중심으로 카스트의 악습은 아직 남아있으나, 분명 과거 인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17]물론 아직도 카스트에 따라서 사람을 차별하는 악습이 암암리에 존재하나, 대도시를 중심으로 카스트 제도가 뿌리부터 뒤흔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카스트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하위 카스트나 불가촉천민의 수가 인도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나 되므로,[18] 그들의 표를 얻어야 하는 정치인들과 그들과 공존하며 살 수밖에 없는 도시민들이 주축이 되어서 카스트 제도 붕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즉, 막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때에 비하면 엄청나게 변화한 것이 맞다.
다만, 부라쿠민 문제 해결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일본 정부에 비해 인도의 중앙 정부는 카스트 제도의 타파를 위해 적극적인 수단을 강력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 인정할 만하지만, 이 단락에서 이야기하는 '인도에서 카스트 차별 문제의 해결'에는 다소 고평가된 부분도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일본이든 인도든 일단 공식적, 법적으로는 차별적 신분 제도가 전혀 없지만 암암리에 남아있는 차별적 인식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황 자체는 마찬가지인데... 이런 조건에서 비교해 볼 경우 인도의 불가촉천민 차별이 일본의 부라쿠민 차별보다 훨신 심하고 공공연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나마 대도시를 중심으로 차별적 구조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지역에서 공공연한 차별, 심하게는 린치와 같은 심각한 범죄도 빈발하는 것이 인도의 현실이다.
사실 일본의 부라쿠민 문제가 유독 두드러지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일본처럼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선진국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라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애초에 인도는 카스트 문제 말고도 문해율이나 소득 수준, 사회적 인프라, 여성 인권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아직은 하위권에 들기에 카스트 문제가 있어도 사실 그렇게 놀랍지도 않지만, 과거 세계 2위 수준의 국력을 자랑했고 경제 거품이 꺼진 지금도 최고 수준 선진국으로 평가되는 일본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놀랄 노 자인 것.
이 때문에 불가촉천민 중에서 불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일본에 와서 부라쿠민을 발견하고 경악하는 경우도 있다.

2.1.2. 대한민국과의 비교


한국에서 이런 집단적인 신분 차별이 고려시대에는 향, 소, 부곡 등의 지역명을 붙인 천민 집단 거주지라는 형태로 존재했다. 그러나 고려 중기만 가도 군현제의 변동과 맞물려 축소되거나 사라져갔다. 무신정권 시대의 유명한 반란인 망이·망소이의 난 등 반란이 일어나면 폐해지기도 했고, 반대로 대몽 항쟁기에 몽골군에게 승리한 경우에는 현으로 승급되는 등 변화가 다양했다. 고려 말기엔 이름만 남은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야인(野人·여진족)과 일본인(倭人)과 같은 귀화인이 존재했고, 그들 역시 고려 시대와 같이 고립된 구역에서 살게 했다. 조선 정부는 향화(向化)라고 하여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여진족이나 일본인을 귀화시켜 노략질을 못하게 하는 회유책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직업은 대부분 백정과 같은 직종으로 한정되었으며, 호적에 출신이 기록되어 사실상 조선인과의 혼혈이 불가능했다. 물론 조선 말기에 들어와서 호적 세탁 같은 방식으로 신분 제도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이들 또한 평민 신분으로 상승되면서 천민, 노예 신분에 대한 차별은 사라졌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노비제 폐지, 신분제를 법적으로 폐지시키고 사회적인 면에서 근대화를 추구하던 한국인들에 의해 신분차별을 타파하는 활동이 활발해졌다. 한일병합 이후로도 친일 양반 중심의 신분차별은 존재했지만[19][20] 일제에 맞서기 위한 민족통합을 위해 평등을 중시하는 신분 차별 운동이 대두되었다.# 특히 1945년 광복 이후의 혼란기와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불바다가 되어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서류 자료마저 싹 소실되어 누굴 양반, 천민으로 몰 증거가 사라지고, 그나마 희박하던 신분 의식까지 완벽하게 증발한[21] 것이 큰 이유이다. 당장 서로 죽어나가고 먹고 살기 바쁜데 신분을 따지고 할 것도 없었다.[22] 실제로 학자들 중에는 한국전쟁이 '결과적'으로 끼친 한 가지 긍정적인 영향으로 '신분제 의식의 완전한 소멸'을 꼽는 이들도 있다.

2.1.3. 중국과의 비교


중국도 마찬가지로 노예나 천민의 비중이 매우 낮고, 실질적으로 신사 계급(양반)과 평민의 2단계로 분리되었기에[23] 천민 계급이 드물었으며, 더구나 중국도 중일전쟁의 혼란과 전후 국공내전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문화대혁명으로 계급 의식이 와해되었기 때문에 천민 출신에 대한 차별이 없어졌다. 물론 이러한 혼란상과 문화대혁명의 결과가 매우 부정적이었음에는 변함이 없으나, 대체로 이런 진통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시골에서 돈을 벌기 위해 대도시에 와 일하는 농민공들이 소외 계층으로 전락해 사회 문제가 되고 있긴 하다. 중국은 시골에서 대도시로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고 일정한 요건을 갖춰 해당 도시의 호구(戶口)를 취득하기 전에는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기에 자녀들은 학교에 입학할 수 없거나 사회보장제도에서 배제되는 등 사실상 법적으로도 차별을 받고 있다.

중국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내로라 하는 명문가들도 거의 대부분 중일전쟁국공내전 때 가문이 무너지거나, 그 때 살아남았어도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들의 습격으로 거의 대부분 멸문지화를 당했다. 가장 대표적인 명문가인 공부(孔府, 공자의 직계 가문)도 국민당 정부가 무너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대만으로 도망가서 그나마 명맥만 겨우 유지한 상태다. 본토에 남아있던 공부 저택이나 공묘(공자의 사당), 공림(공자와 그 자손들의 묘)는 당시 거의 다 파괴되었던 것을, 지금은 간신히 외형만 복원해 놓은 상태이다. 지금 중국 정부가 내세우는 공자의 후손이네 뭐네 하는 것도 따져보면 직계가 아닌 거의 남남이나 다름없는 것을 가져다가 문화 전통 과시용, 선전용으로 이름만 내세우는 것에 불과하다. 특히 중국도 형식상으로는 공화국[24]이므로 신분제를 인정할 수 없다. 대만도 마찬가지로 명색이 민주주의 공화국이고, 국부천대 때 공자 가문처럼 대만으로 이주한 다른 명문가들도 그 과정에서 영향력을 매우 크게 잃어서 말 그대로 가문 남아 있다. 그나마 공자 가문은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자리를 세습하면서 상당한 예우를 받지만, 이는 중화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대만 정부가 의도적으로 예우를 해주는 것이지 가문 자체의 권력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역시 공식적으로는 공직이지 별도의 신분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시대든 명문가의 힘은 그 지역에서 대대로 살면서 이어온 토지와 자원을 차지하는 것과, 그리고 오래된 혈연·지연을 기반으로 맺어진 강력한 네트워크에서 나온다. 오대십국시대 이후부터 사서에 계속 등장하는 '강남 사족'이라는 말이 이런 이유로 나왔다. 하지만 고향에서 쫓겨난 이런 명문가들에게 남은 건 도망치면서 가져온 족보 쪼가리나 약간의 금은보화 정도였다. 그나마 잦은 화폐 개혁과 인플레를 거치며 이들은 경제적으로도 취약해진다. 이는 한국에서도 자주 보이던 모습이다.[25]

2.1.4. 일본 사회의 특수성


반면 일본은 태평양 전쟁 말기 원폭 투하를 비롯한 짧은 시기의 본토 폭격 외에는 한국처럼 국가 기반을 뿌리째 흔들 만큼, 범국가적 규모의 대전쟁이 장기화될 정도로 시스템이 뒤집힐 만한 변화를 겪지도 않았고, 행정력이 박살나는 사태 역시 피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기본 사회틀은 그대로 유지한 채 상대적으로 느리고 차분히 변화했으므로, 기존 사회의 질서에 변화가 거의 없었다. 특히 농촌은 도시와는 달리 주된 폭격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에도 큰 피해를 받지 않았던 편이고, 향촌의 작은 사회 질서는 뿌리 깊게 남아있었다.
한편 또 다른 이유는 일본이 가장 오랫동안 신분 차별이 잔존하는 국가였다는 점 또한 작용하였다. 실제로 역사적인 흐름을 보았을 때 동양 문화는 우선 중국에서 발전하고 이것이 주변 국가로 퍼져나가는 방식이였는데, 중국과 가까운 한반도 왕조들은 이 영향을 비교적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던 반면, 일본은 거리와 지리상의 문제로 인하여 이 흐름에서 뒤쳐지는 편이었다. 일례로 한중일 삼국 모두 한 때는 같은 땅 안에서 여러 국가로 찢어져서 싸우던 시기(춘추전국시대, 삼국시대, 전국시대)가 있었으나, 중국은 3세기에 출범한 진나라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룩한 통일국가가 완성되었고, 한반도 또한 7세기에 출범한 통일신라부터 마찬가지로 통일국가가 완성되었으나, 일본은 이것이 7세기부터 11세기 후반 겨우 4세기 동안 중앙 정부의 통치하에 통일되있다가 다시금 지방 무사들의 반란으로 국토가 분열되는 바람에 6세기 동안 혼란을 가지다가 17세기에 출범한 강력한 권력을 거느린 에도 막부 시대가 되어서야 겨우 잠잠해질 만큼 변화가 느렸다.
일본은 구 화족 출신들 중 상당수가 현대 일본에서도 정계의 명문가로 불리면서 대대로 지역구를 세습하고 있다. 미디어에서도 그런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는데, 일본 만화 중에서 성인 취향의 극화를 보면 정말 자연스럽게 아들이 아버지의, 사위가 장인어른의 지역구를 물려받으며, 아무도 그 상황을 이상해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들이나 사위도 으레 당연히 자기가 물려받는 걸로 알고 있다. 화족이나 무사 집안 출신과 평민 부자들이 정략결혼하여 대대손손 해먹는 모습도 많이 묘사된다.
때문에 일본은 가장 오랫동안 제도적으로 신분 차별이 남아있는 국가였고[26] 이것이 개선되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던 데다가 상기한 대로 사회 구조가 갈아 엎어질 만큼 큰 사건이 없었던 것이다.

2.2. 일본과 유럽의 차이


그나마도 비슷한 섬나라에 같은 군주국인 영국의 경우는 적어도 내부에서부터 끊임없는 개혁을 하려는 시도가 수 차례 있어 왔다. 영국은 스스로 국왕과 의회가 대립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서 민주주의가 스스로 정착되었지만[27], 반면 일본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미국에 의해 반강제로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 단, 영국 역시 뿌리 깊은 계층에 대한 분리 의식이 있어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에 대한 분리가 분명하다. 이 때문에 영국 사회에서도 이러한 계층적 분리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28]
일본은 지방 명문가를 비롯한 지역의 고유 특색이 매우 강한 데다가 과거 천민·중인·무사들이 살던 거주지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누가 누구의 후손인지 구분도 쉬워서 과거 천민들의 후손들은 차별을 받았다. 현대에 와서는 취직이나 면접에서 출신 성분은 상관이 없다고 여겨졌지만, 부락지명총람사건으로 인해 여전히 천민 출신이 차별받고 있음이 드러난 바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계층 간 혹은 지역 간 유동성이 떨어지는 사회라서 일본 사회에 부라쿠민이 존속했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당장 영국만 봐도 역사적으로 '천민' 계급은 공식적으로 없었다. 그리고 영국 뿐 아니라,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도 의외로 신분제의 영향력이 공고하다. 프랑스스페인,[29] 오스트리아처럼 몇 번이나 나라가 뒤집어졌음에도 옛 지방 토호나 왕족, 귀족들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지방의회에서 유럽 연합 의회 의원까지[30] 하는 사례들은 생각보다 많다.
따라서 일본의 부라쿠민 차별을 혼란 없이 사회가 온건하게 발전한 탓이라고만 보기 어려우며, 신분제 자체보다는 종교 등 다른 문제가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장 도축업자만 해도 2차대전 전까지는 부라쿠민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는데, 이는 살생을 금기시하는 불교의 영향이 컸다.

3. 인구


부라쿠민의 인구 수에 대한 정보는 자료마다 다르다. 1993년 일본 정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4533개 '동화지구'[31]에 부라쿠민 89만 2751명이 있다고 하는데, 실제 인구는 200~300만은 된다고 추정한다. '동화지구'는 주로 서일본에 많은데 각 동화지구의 세대 수는 적게는 5가구로부터 많게는 1천 가구까지 있으며 평균 155가구 정도. 그 4분의 3은 농촌에 있다. 홋카이도·토호쿠 일대·도쿄도·도야마현·이시카와현·오키나와에는 동화지구가 없다.[32][33]

4. 차별


세계 인권 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 결의안 중

(제1조)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제2조) 모든 인간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지, 기타 어떠한 종류의 차별 없이, 이 선언에 규정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있다…(후략)

(제22조)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를 가지며, 국가적 노력과 국제적 협력을 통하여, 그리고 각 국가의 조직과 자원에 따라서 자신의 존엄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에 불가결한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들을 실현할 권리를 가진다.

일본국헌법(日本国憲法)

(제11조) 국민은 모든 기본적 인권의 향유를 방해받지 아니한다. 이 헌법이 국민에게 보장하는 기본적 인권은 침해할 수 없는 영구한 권리로서 현재 및 장래의 국민에게 부여된다.


4.1. 과거


일본 사회는 근대가 되도록 한 가문이 계속해서 같은 지역에서 같은 직업에만 종사했다. 전후가 되어서 민속학의 연구가 활발해진 덕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일본의 무라(村)[34] 사회에 있어서는 법률이나 제도적으로 명문화되지는 않았어도 강고한 신분 계급이 존재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직업인데, 예를 들자면 사람들이 꺼리는 질병이나 죽음에 관련된 직업을 가진 자는 사회적으로 직분이 낮아서[35] 같은 무라 사회의 구성원이라도 차별의 대상이 되는 일이 있었다. 말하자면 직업이 곧 계급인 셈으로, 현대 일본에서도 가업을 몹시 중시하는 것은 그 잔재에 해당한다. 특히 이러한 차별의식에 대해서 이해하기 쉬운 예는 혼인인데, 혼인은 집안끼리 격이 차이가 나지 않는 가업을 가진 가문끼리 맺었고, 이에 따라서 계급이 대물림된 것이다. 그 밖에도 중병을 앓은 경우 원래의 가문의 격보다 한두 단계 정도 낮게 계산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폐쇄적인 신분 차별은 심지어는 무라 단위로도 이루어졌는데, 예를 들자면 동과 서에 각각 무라가 있다면 특정한 직업에 종사하는 구성원이 많은 쪽을 더 높은 격으로 쳤다. 따라서 무라와 무라는 기본적으로 소통이 되지 않는 폐쇄적인 사회였다. 일례로 에도 시대에 어떤 마을이 인구 때문에 둘로 갈렸는데, 그 중에서 한 마을이 당시 유행하던 가부키로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가부키에 대한 수요가 어쨌건 간에 사회적인 인식은 안 좋았기 때문에, 무라 단위로 차별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36].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근대가 되기까지 출신지와 이름[37]으로 어떤 정도의 삶을 살았는지 그 간략한 내력을 알 수 있었다. 일본사 인물들을 연구하는 데에도 출신지가 활용된다. 대표적으로 이가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닌자설이 있는 마츠오 바쇼. 이 점을 악용한 것이 바로 부라쿠민 차별. 일본 사회에서 최하위층에 속하는 부라쿠민과는 같은 부라쿠민 이외에는 혼인을 맺지 않고 당연히 주거도 제한되기 때문에, 출신지를 보면 단번에 부라쿠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점을 이용하여 이력서 등에 적힌 출신지를 보고 부라쿠민을 불합격시킬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일본 공동 납골 묘지를 방문했을 때 묘지 안에 철책이나 담벼락을 둘러 다른 묘비들과 격리시킨 구역이 있다면 그 구역은 100% 부라쿠민의 무덤이다. 죽어서도 일반인과 차별하는 것이다. 2010년 이후 각 지역마다 행정 지도를 하고 있다지만 묘지 내 격리 구역이 철거되는 것도 아니라서 딱히 없어지는 건 아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부라쿠민 출신은 노골적으로 차별받는 일이 다반사였고, 관동 대지진 때나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들은 특히 일본 극우 세력들로부터 '화풀이' 식으로 차별당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이에 대항해 차별 받던 부라쿠민들의 상당수가 좌익 운동에 투신하기도 하였고 개중에는 아예 야쿠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역시 차별받던 집단인 재일과 함께 같이 사회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 일본에 왔던 한 사업가는 그때 남아 있던 부라쿠민 동네를 이렇게 얘기한다. '여자들은 가끔 관청 허가를 받아서 감시하에 일반인 동네로 나와서 생필품을 사갈 수 있으나, 남자들은 절대 나오게 하지 못한다. 또한 그 동네에 일반인이 들어가면 살해당할 것이 자명하므로 절대 접근하지 말라.'[38] 동네에 일반인이 들어가면 살해된다는 점에서 이누나키 마을이 연상되는 대목.

4.2. 현황


종전 후 제국 헌법이 폐지되고 GHQ에 의해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중요시하는 일본국헌법이 탄생하면서, 정부는 부라쿠민에게도 다른 소수 집단들에게처럼[39] 비슷한 노력을 기울여서 사람들의 차별 의식은 과거에 비해 많이 약해졌다. 이들을 비국민처럼 대했던 과거에 비해선 장족의 발전이다. 그러나 일본 사회는 기본적으로 굉장히 보수적인 사회이며, 지난 수백 년간 내려왔던 뿌리 깊은 차별의식은 아직까지도 드문드문 드러나 일본 국내외의 비판을 받곤 한다.
구글 어스에서 고지도와 현재 지형을 겹쳐볼 수 있는 기능을 이용하면 부라쿠민이 살았던 마을을 볼 수 있다고 해서 한때 문제가 되었다. 구글 어스 기능 자체의 문제라기보단 2차 사용에 따른 악영향이 문제된 것. 일본 총무성에서도 처음에는 이 기능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았지만, 부라쿠민 단체들의 건의에 의해, 그들에게 악영향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구글에게 총무성 이름으로 요청한 것이다. 이에 대해 구글은 이러한 문제가 완전히 발생하지 않도록 그 기능을 삭제하였다. 오늘날은 일본 경제의 급성장과 정부 주도의 처우 개선 노력 등으로 인해 부라쿠민 거주지의 주거 환경은 상당 부분 개선됐지만, 아직도 암암리에 '부라쿠민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취직·결혼 등에서 감당할 수 없는 불이익이 있으므로, 일본 사회가 풀 민감한 문제로 떠오른 지가 오래다.
실제로 일본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이 특수부락지명총람 등 사립탐정사무소, 흥신소 등에서 비밀리에 발간, 유통하는 리스트를 구입하여 지원자의 출신지를 가려내는 데에 사용하는 등의 문제가 꽤 있었다. 특수부락지명총람의 존재는 일종의 도시전설로 여겨졌으나, 1975년에 최초로 부락지명총람사건이 언론에 드러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났고 최소 9종류의 책자가, 채용·결혼 문제 등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시대의 정서에 역행함을 알고도 발간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게다가 부라쿠민 차별 철폐 운동이 진행될수록 색출 작업도 고도화되어, 1990년에는 도쿄 도내의 행정 서사들에 의한 부라쿠민 의심자 족보 구매 사건, 1998년에는 오사카 시내의 대형 흥신소가 기업들로부터 차별 신원 조사를 의뢰받은 사건 등이 일어났다. 위의 링크 기사에서도 대기업에서 부라쿠민으로 의심되면 끝까지 뒤쫓아서 기어이 떨어뜨린다는 익명 제보까지 있다. 결국 이러한 신상털기 시장도 아직까지 살아남았다. 이러한 필터링은 물론이며, 어쩔 때는 없는 죄조차도 무고한 이들에게 뒤집어 씌운다. 실제로 1963년 5월 1일 발생한 사야마 사건(狭山事件)으로, 사이타마 현 사야마 시에서 일어난 여고생 납치 피살 사건에서 경찰측이 납치범을 잡지 못하자 대신 시 근처의 부락에 쳐들어가서 이시카와 카즈오(石川一雄, 당시 24세)를 붙잡아 고문 후 엉터리 자백을 받아내는 대규모 사고를 저질렀다. 이시카와 카즈오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94년에 가석방되었다.
아소 타로가 자기 파벌의 회합 자리에서, 자민당 총리 후보기도 했던 노나카 히로무를 비난하면서 한 발언이 "노나카 히로무 같은 부라쿠민을 일본 총리로 세울 수는 없다."였다고 한다. 격분한 노나카 히로무는 자민당 총무회에서 "장래의 총무대신[40] 자리를 약속받은 아소 타로 정책조사회장(원내대표 격), 당신은 파벌 회합 자리에서 '노나카 히로무 같은 부라쿠민을 일본 총리로 세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이 사실을 당시 회합에 참석한 의원 중 세 사람을 통해서 이미 확인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당의 정책을 담당하고, 앞으로 대신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앞으로 인권계몽이 가능할 리가 없다. 나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하고 일갈했다. 우오즈미 아키라, <노나카 히로무 차별과 권력(野中広務 差別と権力)> 2003년 9월 11일[41]
아소 타로는 이 말에 반박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웬만해서는 직접적인 모욕은 삼가는 편이며 화가 나도 돌려서 말하지만,[42] 대놓고 부라쿠민 운운하는 것 자체가 기득권 세력이 부라쿠민을 얼마나 무시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노나카 히로무[43]도 대놓고 분노를 터뜨릴 정도였다. 극대노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다. 그리고 일본인이 분노한다는 건 상대방을 절단내겠다는 뜻이다. 즉 '부라쿠민'이라는 단어가 사생결단을 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모욕으로 쓰임을 보여준 것이다.
부락해방동맹,[44] 전일본동화회,[45] 전국부락해방운동연합회,[46] 자유동화회[47] 등의 단체는 부라쿠민 차별 해소를 명분으로 정부 보조금을 받고 있는데, 이 중 부락해방동맹과 전일본동화회에서 엄청난 양의 비리를 저질러서 밝혀진 사건만도 적지 않다. 그리고 일본 최대의 사기 사건인 이토만 사건의 주범으로 유명한 재일교포 출신 사기꾼인 허영중도 부라쿠민 해방 운동 계열에서 일을 했었다. 그러나 분명히 부라쿠민 차별은 암암리에 남은 문제로, 단체의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을 '그래서 부라쿠민은 차별받아 마땅하다!'는 당위성으로 연결시키는 오류를 범해선 안 된다.
일본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장례식을 거의 불교에서 주관하는데, 장례기간 내에, 혹은 장례식을 치른 후에 승려를 청하여 망자의 영혼에게 계명(戒名)을 지어줌이 일반적인 관습이다. 계명은 원래 승려로 출가하여 비구계를 받거나, 또는 평신도로서 보살계 등을 받아야 지어주는 것이다. 다만 일본의 정토종·정토진종은 사람이 죽으면 부처가 된다고 하여 죽은 후에 일괄적으로 계명을 지어주었고, 나중에는 불교 종파를 가리지 않고 일본의 보편적인 장례 관습으로 정착했다.
그런데 일본 불교계는 부락민 장례식만큼은 다른 데서는 사용할 수 없는 모욕적인 의미를 담아 계명을 지어주곤 했다. 계명에 귀축(鬼畜)·하인(僕)·도살(屠) 등 단어를 넣어, 부락민 망자의 직업이나 천한 신분을 조롱한 것. 이 때 부락민들 대부분은 어차피 글도 모르니까 그런 계명을 지어주어도 이게 모욕적인 줄도 모르고 받았다. 이러한 계명을 차별계명(差別戒名)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죽으면 부처가 된다는 믿음을 따른다면, 이런 차별계명들은 곧 부처를 모욕한 셈이라 현대적 윤리관뿐만이 아니라 일본 불교의 관점에서도 변명이 불가능하다. 현대에 들어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자 과거에 지은 차별계명을 사찰에서 바꿔주기도 한다. 2009년에는 정토종이 종단 차원에서 과거에 지었던 차별계명 1600여 개를 바꾸는 법회를 열기도 했다. #
현대에도 부라쿠민 출신을 차별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하며, 이에 관련된 상담이 인터넷상에 올라오고 있다.#[48]
다만 외부인이 일본의 부라쿠민의 문제를 거론하거나 외국에 부라쿠민이 언급되었다는 게 일본의 인터넷에 알려지면, "부라쿠민은 언제적 얘기냐? 벌써 예전에 사라졌고 법적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데 괜히 차별 문제를 침소봉대해서 일본을 차별국가같이 보이려고 과도하게 부풀려낸 프로파간다", "부라쿠민? 그게 뭐냐? 먹는 거냐? 그런 거 들어본 적도 없는데.", "2ch 종자들이나 차별하지" 등등 부정하는 것도 특이점이다. 사실 외부인에게 자국의 치부를 보이는 것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영 좋지 않을 테니. # 카이카이 채널에도 부라쿠민에 관련하여 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 물론 그렇게 외부인 앞에서 부라쿠민 차별을 '과거의 일'이나 '모르는 일'로 여기면서 차마 '일본의 전통', '부라쿠민은 근본부터가 차별받아 마땅한 존재' 등의 표현으로 대놓고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부라쿠민 차별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악습이라는 사실이 많이 알려졌다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다. 부라쿠민 차별이 당연시되었던 전근대 일본에서는 굳이 부라쿠민 문제를 숨기거나 부정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부라쿠민은 인도에서 카스트하리잔을 구분하듯 사회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지은 것이므로, 인종적으로는 다른 일본인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일본인 사회에서는 '부라쿠민과 교류하거나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보수적인 가치와 '부라쿠민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차별 반대론이 동시에 자리하고 있으며, '부라쿠민이라는 용어조차 사용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정치적 올바름, 그리고 '일본이라는 세계적인 인권 선진국에서 오늘날까지 부라쿠민이 차별받고 있을 리가 없다!'는 차별 존재 부정론자, '부라쿠민 녀석들이 자신의 지위를 역이용해 정부로부터 각종 보조금과 특혜를 누리고 있다!'는 극우 파시즘까지 온갖 주장이 난립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부라쿠민 문제가 진전되지 않는 이유는[49] 일본이라는 나라가 가진 특수성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도 그 실태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국제사회에서 '선진국 일본'이 가진 이미지에 좋을 것이 하나도 없고, 일본 언론 등의 입장에서는 부라쿠민 문제를 아예 다루지 않는 방향으로 가거나, 그도 아니면 구체적인 입장을 잡지 못하고 지지부진 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일본 국내에서도 다테마에 문화 때문에 이러한 논란거리들은 쟁점화되어 수면 위로 드러나기보다는 최대한 일상 속에서 언급되는 것을 자제하는 편이며, 이에 부라쿠민 문제는 차별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침묵한 채 일본 사회에 커다란 그림자로 남아 있다. 이는 일본 사회 한 단면에 위치한 어둠을 보여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4.3. 넷상에서


2ch 넷 우익들이 시도 때도 없이 비난하는 계층이기도 하다. 지자체로부터 온갖 특혜를 받고 있어 오히려 역차별을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부라쿠민이 되고 싶다는 식의 스레드가 2ch에서 자주 보이는데, 보통 직업이 없는 잉여 니트가 만드는 스레드로 나도 부라쿠민이 되면 니트 신세에서 벗어나 지자체의 지원을 받고 자영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말 그대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바보 같은 소리다.
물론 지자체에서 부라쿠민 자영업자에게 세금 감면 등 혜택을 주고 있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부라쿠민이 정상적인 직장에 취업할 수 없기 때문에 죽으라고 놔둘 순 없으니 지원을 해주는 것일 뿐이며, 게다가 지원해주는 자영업이 그럼 좋은 일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원래 부라쿠민이 해오던 일(즉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의 근거가 되었던 직업), 즉 장의사나 음식 쓰레기 처리, 청소 같은 3D 업종 뿐. 그리고 부라쿠민은 부라쿠민이 운영하는 사업체에 취업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저 자영업자를 지원해 주는 것 뿐이다.
따라서, 말만 같은 빈곤층이지 출세의 기회가 작게나마 존재하는 이들과 아예 일반적인 생활의 기회조차 박탈당해 국가가 도울 수밖에 없는 이들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부라쿠민들이 일본 사회에 소외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기득권층도 부라쿠민에 대한 인식이 영 좋지 않기는 해도 이들에 대한 국가적 차별은 대놓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혐한초딩이나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 일명 '재특회'에서는 이들에 대한 강제추방과 국가적 차별을 주장을 해대는 것을 넘어서서 부락민에게 증오 발언과 폭력을 휘둘러, 일본 정통 우익들에서도 국민을 분열시키는 애송이 집단으로 보고 있다.
다른 의미로는 지방 도시를 비하하는 의미로 쓰인다.[50] 예를 들어 지방 도시에서 지자체 단위의 투자 유치 사업을 벌이면 부라쿠민 따위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촌티는 못 벗는다는 식으로 비하하고 조롱하는 의미로 쓴다.
과거 조선시대의 백정처럼 도축업과 연관되어 있다 보니 인터넷 상에서는 애먼 정육점 주인이나 도축업자를 부라쿠민이나 재일 취급해버리는 개념 없는 네티즌들이 좀 보인다.[51]
다만, 2020년대 들어서, 이러한 부라쿠민차별은 자국을 여기 중세 잽랜드요라 인증하는 꼴이라, 줄어드는 추세.

5. 대책


아직도 이러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라 망신이 아닐 수 없기에 일본 정부에서도 많은 대책을 세웠으며,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이나 부정적 인식은 과거에 비해 많이 희석되었으나 아직도 잔존해 있다. 우선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소득 격차에 대해서는 교육 기회 확대, 일자리 제공, 공무원 채용 우대 등으로 격차를 좁혀 삶의 질을 올리는 것으로 부라쿠민과 다른 일본인들의 차이를 없애려고 하였으며, 이러한 움직임을 동화대책사업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업에 상당히 많은 예산이 배정되고, 이에 따른 이권도 비례하여 커지기 때문에 부락해방연대나 전일본동화회 같은 권력화된 부락보호단체 측 간부가 횡령하거나 단체 내에서 탈세, 사기를 치는 일들이 종종 발생했고, 이런 사건들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부라쿠민들의 이미지를 떨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2000년대까지도 부라쿠민이라는 단어가 방송 금지 용어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부라쿠나 부라쿠민 등이라는 단어가 방송에서 나오면 항의 전화를 받거나 경고를 받았다. 이 규정은 현재 해제되었지만, 영향은 여전히 남아 보통은 '동화'라고 표현한다. 일본인과 대화를 할 때는 '부락민'이라는 말 자체를 꺼내지 않는 것이 권장된다. 한 일본인이 비유를 들기를 "미국에 방문해서 흑인 차별 문제를 토론하면서 '미국에서는 깜둥이(nigger) 차별 문제가 심각하다면서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면서 '도와(同和)'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내뱉었다가는 바로 사회에서 매장당하고, 당사자들과도 사이가 나빠진다고.
대책 자체가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어서 젊은층 사이에서는 차츰 차별 의식이 사라져 가고 있다.[52] 사실 국민 소득이 오르면서 먹고 살 만해짐+차별을 행하던 세대의 노화로 인한 세대 교체 등으로 굳이 차별을 해야 할 전제조건이 사라진 상태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라쿠민 중에서도 부모층에서 숨겨 스스로도 부라쿠민 출신인지도 모르고 살 정도라면 더더욱 그런데, 이게 굳이 재특회 같은 극우들이 들춰내지 않는 이상은 그냥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6. 창작물에서


  • 《공기의 밑바닥(空気の底)》시리즈 - <밤의 목소리(夜の声)> 편: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철완 아톰으로 유명한 일본의 만화가 데츠카 오사무는 만화잡지 '플레이코믹'에서 총 14편의 연작 단편을 연재했고, 이를 1970년에 《공기의 밑바닥'(空気の底)》이라는 이름으로 두권의 만화집을 출간했다. 이 중 하권에 실린 <밤의 목소리(夜の声)>라는 단편에서 여주인공 '유리'는 일본을 떠나 베트남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유리는 전도유망한 일본인 청년 사장 에이이치의 프로포즈를 거절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부라쿠민이라 일본에 돌아가지 못하고 결혼할 수 없다고 밝히는 장면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장면은 초판에만 등장하고, 두번째 판본부터는 유리가 돌아갈 수 없는 원인이 부라쿠민에서 전과 6범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당시 일본의 부라쿠민을 쉬쉬하는 분위기를 봤을때, 사회적 파급을 고려해서 바꿔야만 하는 당시 어른의 사정이 있었던 모양. [53]
  • 굿 바이》: 2008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영화 《굿 바이》(원제: 오쿠리비토; おくりびと)에 보면 전직 첼리스트가 고향으로 내려와 장의사가 되는데, 부인(히로스에 료코 분)을 비롯하여 모든 친척들이 수치스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 마을 사람들도 장의사를 천대하는데,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 때문이다.
  • 《떠오르는 태양》: 1993년 제작된 헐리웃 영화인 《떠오르는 태양》에서 부라쿠민이라는 말이 대사에 직접 나와서 일본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일본 내에서 부라쿠민을 일반적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언급하지 않기 때문.
  • : 2014년, 50년 전 사야마 사건의 용의자로 억울하게 피해를 보았던 이시카와 카즈오 씨와 그의 부인,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불명예를 떠안고 사는 그의 형 등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가 공개되었다. 예고편을 보면 그는 75살 할아버지가 된 지금도 여전히 거리에서 무고함과 결백함을 주장하고 살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피해자 마을에서는 진범 찾기로 마을 사람들 간의 갈등 발생보단 부라쿠민 출신 이시카와 카즈오를 희생시켜 마을 단결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 House M.D. - 주인공 그레고리 하우스가 군 대위인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병원 청소부 취급을 받던 부라쿠민 출신 의사가 실력만으로 주변을 입 다물게 만드는 것을 보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54] 하우스 본인도 계급이 아니라 성격 때문이지만 왕따 취급을 받으면서도 오직 실력 하나로 주변을 입 다물게 하는 의사가 됐다. 비슷한 경우로, 재일교포들이 의료계에 많이 진출해 있어서[55] 오사카, 고베 등지에는 재일교포 출신인 의사가 많다. 의료계는 어차피 실력만으로 승부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56]

7. 부라쿠민 차별 사례


사례를 연대순으로 기재.
  • 1963년: 사야마 사건(부라쿠민이 여고생을 살해한 살인범으로 몰린 사건)
  • 1971년: 일본 포크 그룹 아카이토리(赤い鳥)가 싱글로 발표한 부라쿠민의 민요 <타케다의 자장가>(竹田の子守唄)[57]가 방송국들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됨(1990년대에 해금).
  • 1975년: 부락지명총람사건
  • 1990년: 행정 서사들에 의한 부라쿠민 의심자 족보 구매 사건
  • 1993년: 게이오기주쿠대학 학생의 협박투서사건: 부라쿠민 출신의 가정에 출신지를 폭로하겠다는 협박 투서를 하여 500만 엔을 요구한 사건. 결국 범인은 체포되었고 2000년에 제적 처분을, 2001년에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의 처분을 받았다.
  • 1998년: 차별 신원 조사 사건
  • 2001년: 우체통, 공원 등에서 낙서 사건
  • 2002년: 청소사무소, 공사현장 등에서 낙서 사건
  • 2003년: 부라쿠민 해방동맹 회원 자택에 에타시네(エタ死ね: 부라쿠민 죽어라) 투서 사건
  • 2005년: 행정 서사에 의한 호적 부정 입수 신원 조사 사건
  • 2006년: 토지 조사 차별 사건
  • 2008년: 연속 대량 악질 투서 사건, 공원 낙서 사건, 호적 부정 입수 신원 조사 사건
  • 2010년: NTT 동일본 계열사 건물에 낙서 사건

8. 여담


  • 전 오사카 시장이었던 하시모토 도루가 부라쿠민 출신이다. 아사히 신문 계열의 잡지 주간 아사히에서는 '하시모토 도루의 과격한 행동은 그의 혈류에 있다.'[58]는 취지로 쓴 칼럼을 실어 온갖 쌍욕을 먹은 적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지향하는 정치적 지향점은 극우 성향이다. 다만 이 부분은 하층민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이 반체제적인 경향을 보일 경우 빠르게 매장당하는 현실[59]을 고려할 때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60]
  • 굳이 대놓고 동화지구가 아니라 하더라도, 유신 이전에 도축장이 있었다거나 해서 부락이 있을 수밖에 없던 지역이면 타 지역민들이 해당 지역을 싸잡아서 좀 낮춰보는 경향이 있다. 일본은 특히 각 지자체 면적이 촘촘하기 때문에 기초 지자체, 즉 시·정·촌 단위로 이렇게 싸잡기도 편한(?) 면이 있다.
  • 도축업에 종사하던 부라쿠민들은 아부라카스(あぶらかす)라 하여 돼지껍데기곱창 등을 기름에 튀겨먹곤 했는데, 공교롭게도 오키나와 요리의 안다카시나 재일교포들이 고안해냈다고 알려진 호르몬 요리와 유사하다. 이런 점을 흥미롭게 생각했는지 부라쿠민 출신 저널리스트인 우에하라 요시히로는 차별받은 식탁(원제: 被差別の食卓)이란 이름의 책을 쓰기도 했다.
  •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을 맞은 이후에, 한반도에 남은 일본인들 중에서 일본에 돌아가는 걸 거부한 사람들 대다수가 부라쿠민이라는 말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자신들이 본국에서 당했던 설움을 알고 있어서 같은 마을에 관청에서 시찰이니, 공출이니 쳐들어오면 한국 사람들을 잘 커버치면서 서로 윈윈하던 사이라 광복 이후에도 잘 섞여 살았다. 물론 부라쿠민도 어쨌거나 혈통상으로는 일본인인지라서, 한국인들을 상대로 갖은 부심을 부리면서 악랄하게 대한 사람들도 있긴 했기에, 이들은 당연히도 해방 직후에 일본으로 추방되거나 한국인들에게 무수한 보복을 당하고 하층민으로 전락했다. 이런 경우는 일본 내의 하층민들을 이용해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가 한국의 독립을 막고자 한 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61] 이는 웬만한 제국주의 국가들이라면 예외없이 벌이는 악행으로, 당장 일본 제국만주를 침공하고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울 때도 한국인들을 끌어들이고는 이들을 우대하는 식으로 원주민만주족몽골족, 한족들의 저항을 찍어눌렀으며, 스페인남아메리카를 침공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착취할 때에 여기에 앞장섰던 콩키스타도르의 대부분이 가난한 하급 귀족이나[62] 스페인 정부의 수배를 받던 부랑자와 범죄자였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 일본 우익사관을 지낸 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가 부라쿠민을 대해 종교적인 차별이 없었으며, '부락 상류층의 자칭 볼셰비키'들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 자신들이 속한 집단을 끼워맞추기 위해 가상의 정체성을 창조해다는 주장으로 수준 이하의 논문을 쓴 적 있었다.#

[1] 부라쿠민들은 일본 주류 종교(불교, 신토)로부터 외면받았기 때문에 대안종교로 기독교를 선택한 경우가 많았다. 기독교 사회주의 성향이었던 사이코 만키치(西光万吉)가 '고난'과 '해방'을 상징한다 하여 예수의 가시 면류관을 모티브로 삼아 이 깃발을 만들었다. 또한, 깃발의 배색이 사파티스타와 비슷하다[2]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표제어가 부락문제(部落問題)이며, 한국어와 영어 문서의 표제어는 부라쿠민이다.[3]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현대 일본에서는 형식상으로 신분제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 자체가 비칭이고 멸칭이지만, 이 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은 현대에까지 계속해서 실존하고 있다.[4] 황족과 화족(귀족)을 제외한 일반 무사와 백성, 노비들 간의 신분제를 없애려고 메이지 정부에서 실시한 정책.[5] 물론 구 재벌은 해체되었지만 이후 성장한 대기업의 소유자나 자수성가한 재벌로 명맥을 잇고 있다. 구 재벌인 자이바츠도 기업 소유만 못할 뿐 오늘날에도 사회 최상류층을 이룬다.[6] 부라쿠민이 아닌 사람이 결혼 등 이유로 부락으로 이사하면 역시 부라쿠민으로 취급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래에도 나오는 부라쿠민의 인구 통계이다. 여기서는 부라쿠민 혈통을 타고 태어난 인구가 아니라 부락 지역(동화 지구)의 인구를 집계하였다. 즉, 혈통과 상관 없이 그 지역에 살면 부라쿠민으로 지칭하는 것이다.[7] 막부 시대를 열고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을 지배했던 쇼군도, 아이누를 정벌하기 위해 선발되었다는 의미의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정이대장군)'에서 온 말이다. 한자를 해석하자면 '오랑캐를 정벌하는 대장군'.[8] 불교와 신토에서 말하는 '더러운'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는 뜻.[9] 불교 용어로 '인간의 형상을 하였으나 인간이 아닌 존재' 를 뜻한다. 원래는 둔갑술로 인간의 형상을 하고 나타난 야차 등을 가리켰다.[10] 실제로 에타와 히닌이 종사하는 직업이 도살업, 사형 집행인, 피혁 가공, 시신 매장, 도로 청소였기에 말 그대로 3D 직업이었다.[11] 일본제국주의를 학문적인 관점에서 지탱한 야나기타 쿠니오의 일본 미화 사상을 비평한 양심적인 학자다.[12] 사실 일본은 미국원자폭탄을 맞기는 했으나, 한국처럼 나라의 시스템 자체가 무너져내릴 정도로 쑥대밭이 되지는 않았다. 이는 일본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위한 작전이 준비되어 있었으나, 실행 직전에 일본이 원폭을 맞고 바로 항복한 덕분에 기존부터 이어져오던 국가 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13] 籐井乾助, 「獲多は他国人なる可し」, 『東京人類学会報告』, 第10号, 1886年 12月[14] 원래 일본에는 육류 음식이 없었다. 675년부터 1871년까지 약 1200년간 육식을 금지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인의 신장을 개선하고자 정부 차원에서 육식을 권장했지만, 실제로 대중들 사이에 육식 문화가 퍼지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190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육류 문화가 조금씩 퍼지는 정도였다.[15] 놀랍게도, 이 논리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극딘적 사상을 지닌 일본인들이 자국의 치부를 덮기 위해 사용한다. 일본의 어두운 면이나 사건사고는 전부 재일 외국인들이 일으키는 것이고, 순수한 일본인은 무결하다는 주장을 일본 인터넷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16] 사실 이건 다소 잘못된 서술인데 정확히는 아예 법제화한 적이 없다고 한다.[17] 아직도 카스트 가지고 사람 차별하는 일은 흔하다지만, 인도의 경제가 고속으로 발전하면서 카스트 대신 능력별로 사람을 쓰는 일이 늘었다 보니, 재력이나 스펙이 달리면 카스트도 소용 없다는 푸념이 인도인들 사이에서도 돌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외국에서 들어오는 정보의 습득이 빨라서 세속주의적인 경향이 큰 대도시에서는 극단적인 힌두교 근본주의자가 아닌 이상, 카스트 가지고 사람 차별하는 것 자체가 몰상식한 짓으로 받아들여지는 만큼 상대의 카스트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아예 카스트 따위는 장식으로 여긴다. 그래서 요즘 인도에선 시골에서나 카스트 운운하는 상황이다.[18] 실제로 수드라, 불가촉천민 출신 정치인도 있고, 람 나트 코빈드 현 인도 대통령도 불가촉천민 출신이다.[19] 몇몇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일제에 의해 양반 중심의 신분 제도가 폐지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법적인 차별은 대한 제국 시절에 폐지되었다. 다만 법적인 철폐와 별개로 잔존했던 신분의식은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건재했으며, 조선총독부 또한 친일 양반,유림을 수용하며 신분제적인 기득권을 유지시켜줬다던 반론도 존재한다.[20] 법적으로면 평등이지 실제로 차별이 만연했다는 증거로 백정들의 차별철폐운동인 형평사 운동(1923년)을 들 수 있다. 사실 일본이야말로 조선보다 먼저 신분제를 폐지했음에도 여전히 구 황족, 화족은 특권을 누렸으며,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은 그대로라서 1922년 '전국수평사'를 결성하게 된다. [21] 총칼과 힘이 지배하는 전쟁, 동란기에 구시대의 신분제적 가치는 당연히 시궁창에 처박힐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그 빈 자리를 이념이 빠르게 채워 나갔다.[22] 1960년 총선 때 김종인의 조부인 김병로 전 대법원장이 전북 순창군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고 낙선한 원인이 '아랫것들에게 고개 숙이며 표를 달라고 할 수 없다'고 선거 운동을 안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조선시대의 앙시앵 레짐이 사라진 것이다.[23] 물론 노비가 있긴 하지만 자손이 아닌 1대에만 한정되고, 그나마도 대부분 죄인 신분이었다. 조선에서는 19세기에야 일반화되는 궁정이나 양반집의 고용인 제도가 중국에서는 이미 고대 시대부터 일반화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노비 계급이 세습되었다. 특히 주인이 노비의 자식들을 자기 가문에 입적시켜서 계속 노비로 부려먹던 방법도 있고, 외국에서 조공이나 선물로 보내온 노예나 군대에서 부리는 노비들은 대대손손 부려먹었다. 자세한 것은 노비 종모법을 참조.[24] 대만은 자유민주주의, 중국은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다.[25] 현재 한국의 전주 이씨 가문이 과연 일본의 구 화족이나 황족 출신들처럼 잘 먹고 잘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대부분의 전주 이씨들은 그냥 평범한 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이석씨나 이원씨 같이 꽤나 대한제국 황가와 가까운 혈통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무도 관심을 갖거나, 결혼 등을 통해 그 집안에 편입되려고 하지 않는다. 유럽처럼 과거에, 혹은 현재도 귀족으로 여겨진 가문의 일원이 되거나 작위를 받으려고 혈안인 사람들 또한 전혀 없다.[26] 흔히 한반도에서도 사농공상 같은 식으로 신분 차별이 있지 않았냐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시기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는 근거로서 조선인들이 미개해서 자신들이 계몽시켜 주겠다면서 그 이유랍시고 각종 날조와 과장을 주입해서 만든 식민사관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실제로는 조선은 '사람은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는 이념의 성리학을 기반으로 공식적인 계급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오히려 천대받던 계층인 백정을 어떻게든 주류 사회에 편입시키려고 국가 차원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여기서도 서얼이나 여성, 노비 등의 차별 계급이 남아있긴 했으나 부락 단위로 사람 취급도 못받던 부라쿠민에 비해서는 양호한 편. 그리고 문제는 저런 식으로 사농공상으로 차별을 하던 게 일본에서도 있었으니 이 부분에서는 다를 게 없다.(단, 일본에서는 사의 위치를 무사들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만 다르다)[27] 영국 내에서 의회파와 왕당파가 갈려 서로 내전을 했을 만큼 국토가 내전으로 황폐화된적도 있었다.[28] 가령 영국의 경우 근대 민주주의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의의와는 달리 유독 언론 매체들의 수준이 개판인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 이에 대한 해석으로 영국인들 대다수가 민주주의 정신과는 별개로 아직도 영국 사회에 만연한 계급 분리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언론이 제 역할을 했다간 그와 같은 계급 분리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가 없게 될 테니 일부러 황색언론의 길로 샌다는 것.[29] 프랑스스페인바스크 지역에서는 혁명 이전에 불어로는 '카고(Cagots)', 혹은 스페인어로 '아고테스(Agotes)'라는 부라쿠민 비슷한 계급이 있었지만 현재는 사라졌다. 이 역시 2차 대전과 스페인 내전으로 계층이 와해된 덕이 크다.[30] 대표적인 사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31] 同和地区=피차별 부락으로 정부에서 지정, 지원하는 지역.[32] 그러나 동화지구로 선정되면 피차별부락이라는 것이 명백해지고, 그 때문에 역으로 차별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동화지구 선정을 거부한 사례도 있다. 단적인 예로, 센소지로 유명한 도쿄의 아사쿠사 근방도 과거에는 에타가 모여 살던 지역이었다.[33] 홋카이도오키나와는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아예 일본 영토가 아니었으므로, 당연히 부라쿠민 동네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아이누족류큐인 등의 소수 민족들이어서 부라쿠민 못지 않은 차별을 당해야 했다.[34] 마을을 뜻하는 촌을 풀어서 읽은 것으로, 학문적으로 무라라고 할 경우 일본 특유의 사회 단위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35] 장례식을 문중들이 주관하는 문화가 있어서, 장례지도사가 전문직 대접받는 현대 한국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36] 다만 가부키 배우가 부라쿠민 취급받는 건 에도 막부 시기까지의 이야기고, 오늘날에는 전문적인 가부키 극단이나 대대로 배우 생활을 하는 가부키 집안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인간문화재로 공인받아서, 도리어 황족이나 구 화족, 재벌 급의 최상류층으로 여겨지고 있다.[37] 성씨라는 개념은 원래 일본의, 적어도 평민 이하의 사회에서는 없었으므로 최소한 메이지 유신 이전에 성이 따로 있는 사람들은 미야케를 가지는 황족이 아니면 절대 다수가 사무라이로 대변되는 무인(武人)과 화족이었다.[38] 이 묘사를 하는 것이 잇시키 마코토의 만화 피아노의 숲에서 초기 배경이 되는 마을인 이치노세 카이의 고향, '숲의 가장자리'다.[39] 다른 일본 내 소수 집단들인 아이누, 재일 한국인, 재일 중국인, 류큐인들은 각각 일본 정부 차원에서의 선주민 인정, 한류, 중화가, 동화정책 등으로 어느 정도 사회 내 포용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아이누인은 거의 조상 민족에 대한 의식 없이 사는 사람도 굉장히 많으며, 류큐인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그냥 오키나와현 토박이 정도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일본에 완전히 동화됐다.[40] 총리대신이 아니라 일본 총무성(행정안전부 격)의 장관을 가리킨다.[41] 総務大臣に予定されておる麻生政調会長。あなたは大勇会の会合で『野中のような部落出身者を日本の総理にはできないわなあ』とおっしゃった。そのことを、私は大勇会の三人のメンバーに確認しました。君のような人間がわが党の政策をやり、これから大臣ポストについていく。こんなことで人権啓発なんかできようはずがないんだ。私は絶対に許さん![42] 물론 오사카후쿠오카, 오키나와는 상당히 직설적인 동네라 완전히 그렇지는 않다.[43] 게다가 이 양반은 교토 출신인데, 교토는 다테마에가 일상인 일본에서도 최고 레벨인 곳이다.[44] 친 민주당 성향의 단체.[45] 친 자민당 성향의 단체.[46] 부락해방동맹에서 일본 공산당 지지자들이 나온 단체로 부락 해방 운동의 권력화나 부패상을 비판한다. 다만 이쪽도 완전히 깨끗한 건 아닌 게 교토 지부 쪽에서 공금 횡령 사건이 일어난 바 있다.[47] 친 자민당 성향의 단체인데, 1981년 전일본동화회에서 탈세 사건이 밝혀지자 전일본동화회에서 탈퇴한 회원들이 만든 단체.[48] 질문: 부락 차별에 대해서(질문입니다). 30세 남자입니다. 저희 집이 부락(민)입니다. 그게 원인이 되어 여자친구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제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고, 평생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 사람도 자기 부모의 생각이 이해 안 된다고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상대도 안 해준 것 같습니다. 사랑의 도피라도 하려 했지만, 저희 집은 자영업을 하고 있어서 그럴 수도 없습니다. 저는 장남이고 형제가 없습니다(가업을 이어줄 사람이 없어서 도피도 힘들다는 말). 이번 주에 여자친구의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면 좋을지 조언을 해줬으면 합니다. 답변: 차별하는 상대를 비난하지 말 것. 성실히 진심을 말할 것. 아마 이야기는 평행선을 달리겠지만, 한 번 서로 이야기하는 정도로 설득될 거라 생각하지 말 것. 끈기 있게, 포기하지 말고. 지금은 부락 출신 80% 이상이 부락민 아닌 사람과 결혼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각오가 필요합니다. 타인인 당신이 아무리 설득해도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어렵습니다. 딸의 강한 마음만이 부모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49] 부라쿠민에 대한 일본 사회의 차별은 현재진행형이지만, 한 때는 그 정도가 너무도 심하여 일본의 야쿠자 문제가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가장 큰 원인들 중 하나가 될 정도였다. 부라쿠민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사회에서 출세할 방법이 전혀 없다 보니 폭력 범죄에 손을 대는 결과로 이어진다.[50] 심지어는 도쿄 부심이 강한 사람이 사이타마현, 치바현, 가나가와현 등 도쿄 인접 현들을 빗대면서 비하하기도 한다.[51] 사실 현대에 들어 일본에서 육가공업 및 정육점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일반인들이 더 많아졌다. 애초에 육가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욕하는 것은 일단 '누구 덕분에 고기를 처먹게 되는지'와 '이런 종자들이 과연 육가공 기업의 회장에게도 이런 짓을 시전할 수 있는지'가 문제다. 당장 도시전설 중에 조폭이 도축업자에게 나대다가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들어봤냐'는 말과 함께 역으로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52] 그러나 차별 의식이 배제 의식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성소수자들을 향해서 "니들 동성애자인 거 인정은 해 주겠는데 내 옆에는 오지 말고 내 눈에도 띄지 마라"라는 식으로 대하는 반응과 같다.[53] 출처[54] 하지만 이는 고증오류이다. 2차 대전 이전에는 애당초 그 출신들이 상급 학교에 진학하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의사가 될 일은 없었다.[55] 실제 사례로, 재일한국인 음악가 양방언의 아버지는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이주 후 외과의사가 되었고 자녀 5명을 모두 약사 또는 의사가 되도록 키웠다. 그러나 양방언은 의사가 되었다가 이것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느껴 병원에서 뛰쳐나가 음악가가 되었고, 그후 아버지와의 사이가 서먹해졌다고 한다.[56] 하지만 결국 이들 중 적잖은 수는 미국으로 이주해서 한국인, 일본인을 모두 상대한다.[57] 싱글의 B면은 그 유명한 '날개를 주세요'.[58] 물론 이 사건을 보도한 언론에 의해 일부 과장, 왜곡된 측면이 있다.[59] 실제로 세계 각국에서 개혁에 나선 사람은 하시모토 도루처럼 최하층 출신일 경우에는 대부분 외부에서의 과격·강경 성향의 변화를 추구했고, 내부 개혁은 오히려 기득권층 내 일부 깨어있는 이들의 몫이었다.[60] 참고로 하시모토 도루는 오사카 시장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온건중도화됐다.[61] 염상섭의 소설인 만세전에서는 일본인 야쿠자 하나가 같은 일본인인 가난뱅이 농부에게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인신매매를 하자고 꼬드기는 대목이 나온다. 정부건 민간인이건 할 것 없이 한국인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데 자국의 하층민을 포섭하여 이용하는 일이 흔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62] 끼니를 거를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는데도, 귀족으로서의 체면때문에 생업에 종사할 수 없던 이들이 태반이다. 그래서 이들은 아메리카북아프리카건 어딜 가든지, 한탕 벌어 챙기겠다는 욕심에 현지인에 대해 학살과 약탈, 착취를 일삼았다.